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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의 노예제 : 왕정 초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도시 로마를 창건한 로물루스(Romulus)가 취하였다는 정책은 왕정 초기의 노예제와 관련하여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는 정복전쟁을 통해 장악한 도시들의 성년 남자들을 죽이지 말도록 하였고 그 주민들을 노예로 삼지도 않았다. 그는 정복한 도시들에 로마 식민시들을 건설하였으며 일부 주민에게는 로마시민권을 주도록 하였다. 또한 주민의 수가 부족하자 카피톨리움 언덕의 한 신전 피난소를 인근 도시의 주민들에게 개방하였고 거기에는 자유인이든 노예이든 어떤 외국인도 도피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로마시민으로 받아들여졌다.
초기의 가부장제적 사회에서는 소수의 유력한 귀족들이 숫적으로 많지 않은 노예들을 소유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노예는 가부장(pater familias)의 가정(familia)의 구성원
이 되었다. 노예는 가부장의 절대적 권한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노예들이 주인의 가족공동체 일원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므로 이 시기의 노예제는 흔히
그러나 가부장제적 단계의 노예제에서는 노예들이 생산과정에서 아직 결정적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고 평가된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노예노동보다 부채노예나 피호인들의 노동이 예속적인 노동의 지배적인 형태였다고 말해진다.
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피호인(被護人, cliens)을 유지함으로써 위세와 권한을 증대시키고, 피호인들의 노동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보호자는 법정에서 피호인을 변호해주었으며, 경제적으로 피호인이 용익할 수 있도록 약간의 토지를 허용하였다. 이에 대해 피호인은 보호자에게 노역을 제공하고 복종할 의무가 있었다.
특히 피호인은 보호자를 위해 투표하는 등 보호자를 정치적으로 지지하였다. 결국 피호인들은 인신은 자유인이었지만 본질적으로 유력한 보호자의 가문에 연결되어 그 가문의 보호와 통제를 받는 보호자 가문의 외부 집단이었다. 피호제도는 중세로 들어서면서 농노제로 바뀌게 되는데 피호인과 농노가 담당하는 일이나 기능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이를 통해 중세봉건사회제도가 게르만적 측면뿐만 아니라 로마의 제도적 측면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부장제적 노예제의 시기는 여러 범주의 예속인들, 즉 노예, 부채노예, 그리고 피호인이 공존하였고 외국인 출신의 노예노동이 아직 두드러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2. 노예제의 확산
로마는 기원전 4세기의 팽창전쟁에서 보다 빈번하게 피정복민을 대규모로 노예화함으로써 기원전 4세기 이래 이탈리아에는 전쟁포로로부터 구입된 ‘구매노예들’이 증가하였다. 노예노동의 중요성으로 미루어 노예제의 확산을 시사하는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12표법에 엄밀히 규정되어있던 부채노예제가 기원전 326년의 포이텔리우스법(lex Poetelia Papiria)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일반적으로 부채노예제는 포이텔리우스법을 통해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완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로마 초기에는 부채노예제가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정복을 통해 전쟁포로로 유입되는 구매노예들이 증가함으로 인해 부채노예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은 자유민간의 노예교환관계가 부적절하다고 느껴 부채노예제를 폐지하게 된 것이다.
또한 노예무역이 중요하게 되었다. 일찍이 기원전 348년에 체결된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조약은 양 조약당사국이 동맹국들의 포로들을 자신들의 세력권내에서 노예로 매각하는 것을 금하는 내용을 포함하였다. 이는 노예무역이 고려되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4세기에 로마인들이 소유한 노예들이 많았다는 또 다른 증거는 노예해방세의 도입이다. 기원전 357년에 만리우스법(lex Manlia)은 주인이 노예를 해방할 때 해방되는 노예가치의 5%에 해당하는 노예해방세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아테네의 경우는 해방되는 노예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아주 예외적인 상황(민회의 승인)하에서만 피해방인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다. 또한 태생이 그리스이고, 양친 모두 시민일 때만 시민권이 부여되었고, 시민권이 주어진 경우에만 직접적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다. 노예와 외국인, 여성의 경우에는 절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노예 해방이 빈번하였고 자유를 얻은 피해방인들은 로마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로마시민의 거주지 단위인 트리부스(tribus)에 등재되었다. 즉, 노예도 재산을 모아 독립하고 군역을 진다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을 통해 로마시민권을 획득하기에 이른 피해방인들은 전 주인을 보호자로 하는 일종의 피호인과 같은 지위에 있었다.
그들은 민회에서 보호자의 정치적 목적을 지지하고, 보호자에게 경제적, 개인적 봉사를 행하는 등 전 주인에게 행해야 할 여러 가지 의무를 계속 지니고 있었다. 피해방인의 아들은 완전한 로마시민이 되었다. 결국 로마의 노예제는 이방인들을 로마사회에 통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유력자들이 소유했던 토지규모를 알려주는 사료를 발견할 수는 없지만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은 시민 각자가 점유할 수 있는 공유지의 규모를 제한하였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이 법을 통해 당시 일반 중소자영농의 토지보다 꽤 넓은 토지를 용익하는 유력자들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노예들의 수와 중요성이 증대되고 부채노예의 역할이 줄어든 상황에서 공유지를 선점하여 용익하는 부유한 지주들은 중소자영농들과 달리 노예노동을 이용하여 토지를 경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유한 지주들의 토지가 모두 노예들에 의해 경작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농번기와 농한기 사이에 노동수요가 지극히 불균등한 곡물경작에서 항상 부양해야 하는 노예들을 대규모로 이용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화정 중기 노예제의 발달 정도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제2차 포에니 전쟁 이전의 로마 사회에서는 경제적 생산이 아직은 대규모의 노예노동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시기에는 부분적으로 가부장제적 형태의 노예제도 여전히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부유한 로마인들도 아직은 대규모의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으나 노예노동이 부채노예나 피호인의 노동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고, 노예제가 확산되어 유력자들뿐 아니라 평민들 중에도 약간의 노예를 소유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 노예경제시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공화정 후기와 제정 초기는 노예제의 최성기였다. 로마는 단순히 노예들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라 ‘엘리트들의 직접적 수입의 대부분을 노예들이 제공하는 노예제 사회'로 변모되었다. 이 시기 농촌과 도시에서 가족노동의 범위를 능가하는 작업의 상비노동력은 노예로 이루어졌다고 이해된다. 그러므로 노예제의 최성기는 잉여생산에서 노예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에서 노예경제시대였다.
이 시기 노예제 농업경영은 곡물위주의 생산이 아니라 시장을 지향하여 상품을 생산하였고, 노예노동이 합리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생산이 크게 증가하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노예제 생산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시장지향의 노예제 생산은 노예제 농장 경영과 노예제 이목 및 조방적 곡물경작에서 잘 드러난다.
한편 곡물경작 위주의 자급적 경영을 하던 소농들은 노예제 농업경영과의 경쟁에서 불리하였고, 토지를 집중하고자 하는 유력자들의 압력을 받았으며, 오랜 기간의 군대복무 등으로 몰락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농업적인 측면에서 노예제 농장경영은 주변의 자유인 일용노동을 전제하여 노동력이 조직되었으며, 노예제 농장경영과 소농경영은 공존관계에 있었던 측면이 입증되고 있으므로, 노예제 농업경영의 발달로 농민이 크게 몰락하였다는 식의 설명은 설득력이 적다고 본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해외출병이 많아지면서, 군인들은 자신의 토지를 오랫동안 돌보지 못해 로마에 귀환했을 때 토지가 황폐화되는 일이 잦았고, 그럴 경우 그 토지를 싼 값에 팔아넘겨 무산자가 되어 식량을 배급 받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제국화한 현실에서 시민들의 장기간의 군대복무가 무엇보다도 소농을 위기에 처하게 한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예제 사회가 성립될 수 있던 전제조건과 그 특징은 무엇인가? 특히 이탈리아에서 노예제 사회를 가능하게 한 요인은 무엇보다도 거의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통한 값싼 노예노동, 유력자들이 점유할 수 있던 막대한 공유지였다. 특히 노예공급과 대토지의 형성이 노예제 농업경영의 발달에 중요하였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를 고찰해 보고, 노예들의 다양한 업무와 처우를 살펴보자.
1) 노예공급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대규모의 집단포로화가 일반적이었다. 전쟁동안 군대에 복무할 나이의 시민 중 절반이 군대에 소집되었을 것인데, 이는 많은 수의 노예와 잘 확립된 노예노동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그 당시에 많은 시민들의 군대소집을 가능하게 할만큼 충분한 수의 노예들이 존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로마 군대의 출정이 있고나면 외국인 노예무리가 이탈리아로 유입되었다.
한편 해외의 노예시장, 특히 헬레니즘 동부에서 활발하던 노예시장들의 노예무역도 노예공급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주로 헬레니즘 국가들 간의 전쟁에 의한 전쟁포로나 속주 소아시아인들의 유괴 혹은 가난한 부모들이 매각한 자식들이 노예시장에 넘겨졌다.
노예공급 방식의 하나로 노예의 자연재생산, 즉 노예양육이 주목된다. 공화정 후기와 말기의 계속적인 전쟁들을 통해 노예들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노예가격이 저렴할 때는 노예양육이 불필요하거나 거의 권장되지 않았을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 통설이다. 노예양육은 제정기의 평화가 도래하고 정복전쟁이 중단되고서야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노예양육이 어떤 경우에 얼마나 이용되었을까?
포도주나 올리브유의 생산에 집중한 노예제 농장경영에서 노예양육은 중시되지 않았다. 기원전 2세기 전반에는 엄밀하게 경제적 사고에 입각하여 부양해야 하는 노예들은 농장의 일상적인 작업을 행할 수 있을 정도만 보유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들 중에서 여자노예는 빌리쿠스(vilicus)의 동거인인 빌리카(vilica) 한 명 뿐이고 이들의 동거에서 노예자식이 태어났겠지만 나머지 일반 노예들의 동거나 그를 통한 노예양육은 고려되지 않았다. 따라서 공화정 후기에 농장노예의 공급방식은 일반적으로 값싼 외부노예를 구입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기원전 1세기 중반, 이동방목, 즉 이목(移牧)의 경우 노예양육을 고려하였다. 이목노예의 경우 감독목자뿐 아니라 일반 목자들에게도 저지대와 고지대 방목지 모두에서 여자노예와의 동거가 권고되고 있다. 이목노예들은 활동이 유동적이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에 그들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노예소유주들은 남녀노예의 동거를 허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가축사육에 필요한 전문지식이나 가축을 다루는 기술은 실제적 경험이 중요하고, 또 가축들과의 오랜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이목노예의 양육은 고려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도시 가내노예들 중 여자노예들의 비율이 농촌노예의 경우보다 높았을 것이므로 노예의 재생산과 양육의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노예는 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지만 주인이 허락하면 동거의 형태로 남녀노예가 결합할 수 있었다. 가정에서 태어난 노예는 보통 다른 노예들보다 더 나은 처우를 받았으며, 만약 그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학문적 혹은 전문적 일을 위한 훈련을 받을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2) 대토지의 형성
라티푼디움(대토지) 경영은 노예노동을 통한 로마경제의 특징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다. 유력자들의 대토지는 공유지의 점유나 임대와 관련되었으므로 공화정 후기 로마 국가의 공유지 정책에 관련된 사료들을 중심으로 대토지 소유의 추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국가의 일련의 공유지 정책이나 농지법은 유력자들의 대토지소유를 억제 내지 공격하면서 빈민들에게 공유지를 분배하려는 의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력자들의 노예제 농업경영의 발달은 그들이 점유한 공유지를 결국 사유지화 하면서 대토지에 대한 법적 정당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력자들의 라티푼디움 경영은 사유지에서보다 공유지에서 더욱 왕성하게 발달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유력자들은 토지 구입비용이 들지 않고 국가에 소액의 지대만 납부하면 되는 공유지를 선점하거나 국가로부터 임차함으로서 넓은 토지를 용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이나 기원전 2세기 초로 추정되는 농지규모에 관한 법이 시민의 공유지 점유에 한계를 설정하고 법의 위반자에게 벌금을 부과하고자 하였음에 반하여, 기원전 133년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법(lex agraria)은 시민이 점유할 수 있는 공유지의 한계를 500유게라로 설정하고 초과한 부분을 몰수하여 빈민들에게 분배하여 유력자들의 대토지를 공격하였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공유지 정책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한편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은 시민이 점유한 공유지의 법정 한도 초과분을 몰수하여 빈민들에게 할당해 주면서 할당지에 대해 명목적이나마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도록 하여 할당지가 공유지의 성격을 지니게 하였고, 할당지의 양도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할당지들이 다시 유력자들에게 매각되어 흡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의 이런 조치들은 곧 폐지되면서 결국 대토지를 분할하여 빈민들에게 분배하려는 정책은 종결되었으며 이제 시민이 점유한 공유지는 농지분배를 통해 할당받은 소토지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사유재산이 되었다.
그 후 내란기의 농지정책은 더 이상 유력자들의 대토지를 공격하면서 공유지를 몰수하여 빈민들을 정착시키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란에서 승리한 군사령관들은 정적(政敵)들의 사유지와 재산을 무차별적으로 몰수하고 그 토지에 자신의 퇴역병들과 지지자들을 정착시켰다. 이때 부자들과 소농들의 토지, 그리고 도시 전체의 토지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몰수되었다.
그렇다면 내란기 퇴역병들의 정착이 소농계층을 강화시키고 유력자들의 대토지에 타격을 가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란기에 몰수 대상 지역에 해당되지 않았던 대토지의 경영은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사유지이든 혹은 공유지이든 더 이상 어떤 법의 위협도 받지 않으면서 발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토지에 정착한 퇴역병들이 곧 토지를 매각하였던 것은 유력자들의 대토지 형성을 촉진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로마의 대토지 경영이 더욱 발달한 것은 이 시기였던 바, 그것은 노예제 발달의 자연스런 추세에 기인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3) 노예의 일과 처우
노예들은 그들의 전문적 능력과 기능에 따라 지위 상에 차이가 있었다. 노예들은 서로 다른 지위에서 다양한 경제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노예제 농장의 소유주들은 농장에 거주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며 농장경영은 자신도 노예인 빌리쿠스에게 맡겨졌다. 빌리쿠스는 농장의 노예들을 엄격히 통제하였을 뿐 아니라 필요시에는 자유인 일용노동자들을 고용하고 그들의 작업도 통제하였다. 막중한 책임과 특권을 지닌 빌리쿠스에게는 여자노예 빌리카와의 동거가 허용되었다.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농장을 설비한 농장 소유주는 가능한 한 많은 수익을 이끌어내려 했기 때문에 농장노예들의 일상생활은 고된 작업의 연속이었다. 기원전 2세기 전반 농장소유주들은 무자비하고 경제적 이해타산에만 입각한 노예관을 보여준다.
노예반란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던 많은 수의 농촌노예들, 즉 이목노예들이나 농장노예들이 노예제에 항거하기보다 자신들의 개인적 자유를 갈구하던 염원이 반영된 즉자적 운동이었다. 또한 노예반란은 노예소유주들의 노예통제 방식이 융통성이 없었다는 점과 로마 공화정의 사회통제 수단이 수많은 노예들을 충분히 통제할 만큼 발달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셈이었다.
한편 로마 국가는 노예반란의 주요 무대였던 방목지역과 그 인접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맡은 정무관들을 파견함으로써 노예들에 대한 국가적, 집단적 통제방식도 모색하였다. 콜루멜라는 노예제 농장의 소유주들은 지하감옥을 마련하여 도주를 시도한 노예나 규율을 어긴 노예들을 엄격히 처벌하도록 함과 동시에 노예들의 불평에도 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경제적 수익을 증대시키고자 했다.
수공업 작업장이나 상업 활동에 이용된 노예들의 지위도 그들의 기능에 따라 다양하였다. 자유인으로서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것은 흔히 농업에 종사하는 것보다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상업이나 제조업, 무역업, 선박업, 은행업 등은 노예소유주가 노예나 피해방인에게 자본을 제공하고 그들로 하여금 대행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직종에서 주인을 대행하는 노예나 피해방인은 막중한 책임과 함께 상당한 지위와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광산노예와 검투사 노예들은 가장 가혹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광산노예들은 아무런 기술을 지니지 못한 노예들이었다. 광산노예들과 함께 일하게 되는 자유인들도 있었다. 로마인들은 범죄자들을 광산으로 보내는 처벌을 빈번히 내렸고 이런 ‘처벌의 노예들’은 엄밀한 의미의 동산노예는 아니었지만 노예들과 함께 일하였다. 대개의 광산노예들은 광산에서 일하다 죽었다.
노예들이 가혹한 처우를 피하기 위해 혹은 단순히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도주를 시도한 노예들은 물론 잔인하게 처벌되었다. 도망노예를 비호하는 것은 범죄였으며, 도망노예를 구입하거나 매각하는 것도 범죄에 속하였다.
도시노예들의 일은 농업노예들의 일보다 일반적으로 용이하였다. 유력자들의 가정에는 가내의 일상적인 일들을 담당하는 노예들이 있었다. 좀더 잘 교육받은 노예들은 유력자 가정의 회계를 담당하거나 주인의 서기로 그리고 유모나 가정교사로서 비교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물론 유력자들은 가내노예들이 담당한 일들을 위해 자유인들을 고용할 수도 있었으나 도시의 유력자들은 자유인들을 고용하기보다 노예들을 소유하길 선호했다. 가내에 많은 노예들을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또한 노예들에게는 자유인들이 꺼리는 어렵고 천한 일을 시킬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가내노예들은 농업노예들과 수공업 노예들 혹은 광산노예들보다 나은 처우를 받았다. 또한 주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노예는 외국인 출신의 구입된 노예들보다 더 나은 처우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역적으로 그리스나 이집트처럼 보다 ‘문명화된’ 지역 출신의 노예들은 고울인이나 게르만인과 같은 ‘비문명화된’ 지역 출신의 노예들보다 농업노동이나 광산노동에 덜 투입되었을 것이다.
농업농예들의 경우와는 달리 도시의 가내노예들에게는 주인이 특유재산, 즉 페쿨리움(peculium)을 제공하는 경우도 많았다. 주인은 가내노예들이 다양한 봉사의 대가로 약간의 돈을 획득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도시의 가내노예들은 주로 현금 형태의 페쿨리움을 저축하였으며, 그것으로 사업을 하여 페쿨리움을 증대시키기도 하였고 궁극적으로 그 돈으로 자유를 매입(해방)하기도 하였다.
물론 노예는 법적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으므로 노예의 특수재산은 여전히 주인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인은 언제든지 페쿨리움을 몰수할 수도 있었다. 페쿨리움의 획득이나 그것을 통한 노예해방은 농업노예들의 대다수에게는 그 가능성이 전혀 없었으며, 농업노예보다 나은 처우를 받으면서 주인과 접촉할 수 있던 도시노예들에게 한정된 현상이었던 점에서 농업노예와 도시노예 사이의 처우상에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도시노예가 농촌노예보다 우월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도시노예는 농촌노예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았다. 둘째, 주인의 자식에게 학업 지도를 할 정도로 지적 수준이 높았다. 마지막으로 도시노예는 상업ㆍ수공업 등을 통해 유력자의 재산을 불려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마지막 이유가 농촌노예와 도시노예 사이의 처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4. 결론
로마의 역사는 시민 상호간에 형성된 부채노예와 피호인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동산노예가 강제노동의 지배적인 형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초기의 가부장제적 노예제사회로부터 노예가 잉여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노예경제의 사회로 변모한 것은 로마가 폴리스에서 제국으로 성장한 현실이 반영된 것이었다. 로마의 노예경제시대는 지속적인 팽창전쟁의 결과 가능하게 된 값싼 노예공급과 풍부한 토지, 막대한 부의 유입, 그리고 시장의 발달이라는 예외적인 호조건에서 발달하였다.
대규모 노예제 생산에 이해관계를 가졌을 유력자들은 대토지 소유를 억제 내지 제한하려는 국가의 공유지 정책에 대응하여 자신들이 점유한 공유지를 법적으로 사유지화하여 결국 대토지 소유의 법적 정당성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노예소유주들은 전쟁포로를 통해 노예가 풍부히 공급되던 시기에도 노예의 충원을 구입에만 의존하지 않고 남녀노예의 동거와 노예양육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농촌노예들이 가혹하고 비참한 현실에 항거한 대규모의 노예반란들은 로마 국가와 노예소유주들에게 커다란 위험을 노정하였다. 노예반란을 경험한 노예소유주들은 노예들의 통제를 보다 용이하게 하면서 경제적 수익을 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노예노동의 조직과 통제방식을 모색하였고, 노예들이 많은 지역에 대한 국가적, 집단적 통제의 노력도 기울였다.
흔히 대규모 노예제 생산의 발달은 소농의 몰락과 도시로의 유입, 그로 인한 사회정치적 위기의 배경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노예제 생산과 소농경영의 관계를 단순히 일반화할 수는 없다. 로마가 노예경제 시대에 직면한 구조적 문제들은 농업적 측면에 대한 고찰과 더불어 장기간의 군대복무와 정치적 혼란이 소농의 몰락에 미친 영향 등을 규명함으로써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노예제를 다각도에서 살펴본 결과, ‘로마노예제’를 통해 로마제국이 ‘개방적 시민 사회’였음을 알 수 있었다.
◈ 라티푼디움 [latifundium]
라티푼디움은 고대 로마시대의 대토지소유제도이다. 로마가 세계로 힘을 뻗치던 시기에 로마는 기본적으로 공화정이었다. 그리고 정복을 통해 얻은 땅은 국유화했다. 로마 군대는 기본적으로 자유철기병이었는데 자유철기병은 신분상으로는 자유민이면서, 기반은 중소농민층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토지가 황폐되고, 중소자유농민계급이 몰락하면서 유력자에 의한 토지 사유화가 진전되었고, 그 노동력은 정복지에서 끌려온 노예로 충당되었다. 이처럼 노예노동에 기반을 한 대규모 농장을 라티푼디움이라 한다.
그러나, 노예제도에 의한 대규모경영은 비생산적이었고, 노예공급도 차차 감소하면서, 노예제보다는 자유소작제로 변화하게 된다. 원래 소작인은 신분상으로는 자유로워야 하는데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로마제국 말기에 토지에 매어 있는 소작인을 ‘콜로누스’라고 지칭하였으며, 이 토착농민제도를 ‘콜로나투스’라 한다. 콜로누스들은 노예가 아니라 신분상으로는 자유민에 속하고, 가족을 형성하고 재산을 소유했지만 농지를 떠날 수는 없었다. 즉 일종의 '계약자유인'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