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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이념적 기초>
<알라(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바로 이슬람의 기초를 이룬다.
주제가 매우 중요해서 철저하고도 이것은 명백한 논의가 요구된다.
명료를 기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간단한 논증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 주제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하거나 너무 단순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도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참고 읽어 주기를 당부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혹은 경험과 이해가 부족한 탓으로 하나님의 개념에 의문을 던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태도는, 비록 이들이 박학한 지식인으로 자처하지만, 불안한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주장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관심을
두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처해 있는 정확한 입장이다. 이렇게 하자니, 논의의 상당 부분이
마치 성인이 아닌 아이를 주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꾸며지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본서는 젊은 무슬림에게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올바른 개념을 알려 주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은 비무슬림으로서 소위 하나님을
믿고 종교를 옹호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개념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몇 가지 단순하면서도 초보적인 논증을 하는 것은 이상의 이유들 때문이다.
그러나 논증의 단순성이 오히려 많은 성인들에게는 심오한 사색을 유도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이러한 단순성은 바람직하고 창의적인 단순성이 될 것이다.
이러한 단순성 단체가 이슬람의 뚜렷한 특징이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가정마다 가장이 있고, 학교마다 교장이 있으며, 도시마다 시장이 있고,
주마다 주지사가 있으며, 국가마다 국가의 원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모든 산물은
어떤 생산자의 작품이며, 모든 아름다운 예술품은 어떤 예술가의 창작품임을 우리는 의심 없이
안다. 이 모든 것이 명백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지식에 대한 갈구와 세계의 범상치 않는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지는 못한다.
수려하고 절묘한 경치를 보여주는 자연의 미, 끝없는 하늘의 지평선, 그리고
그 지평선 멀리의 아스라함, 쉬지 않고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지는 낮과 밤의 교대,
해와 달과 행성의 궤도, 생물계와 무생물계, 대대로 이어지는 인간의 부단한 과정과 진보,
이 모든 것을 보고 인간은 종종 경탄해 마지아니한다.
우리가 더불어 살고 있고, 무한히 향유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 유지시켜 나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 자주 의문에 사로잡힌다.
거대한 우주를 설명해 낼 수 있는가? 존재의 신비가 납득할 수 있게 풀어져 있는가?
책임을 진 가장이 없이는 가정이 제 구실을 할 수 없고, 행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도시가 번창해 나갈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수반이 있지 않고서는
국가가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또 무엇이든지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게다가 우리는 우주가 존재하고 가장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고 있으며 헤아릴 수 없이
오랫동안 존속해 오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과 인간의 존재를 단순한 우연에 맡겨 버릴 수 있는가? 인간이 단순히 우연에
생겨난 것이라면, 인간의 전 생애도 우연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그 전 존재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여길 수 없으며,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한 자기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고 스스로 어떤 계획에
따라 행동의 모범을 설정하고자 한다.
개인이나 단체, 국가는 자기의 행동방침을 설정하고자 한다. 개인이나 단체, 국가는
자기의 행동방침을 계획하며, 용의주도한 계획은 모든 어떤 원하는 결과를 낳는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인간이 어떤 종류로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훌륭한 계획의 가치는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거대한 우주의 조그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계획을 세우고,
이렇게 세운 계획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 자신의 존재와 우주의
존립 역시 어떤 계획된 방침에 의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물리적 존재의
배후에 계획하는 의지가 있으며 사물을 존재하게 하고 질서 있게 운용시키는 유일무이한
정신이 세계에 있음을 뜻한다.
우리의 세계가 보여 주는 경이로움과 생명의 신비는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다. 그렇다면 만물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한 거대한 힘이 작용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는 가장 매력적인 예술 작품을 창조해 내고, 만들어 내되,
그 존재에 어떤 특수한 목적을 부여하는 위대한 예술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 힘은 모든
힘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이며 이 예술가는 모든 예술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다.
진실한 신앙인들과 사리에 밝은 사람들은 그분을 알라 혹은 하나님이라 부른다.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창조자이며 세계 제일의 건축가이며, 생명의 창시자이며
만물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부양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창조하거나 만들 수
없기에, 그분은 인간이 아니다. 그분은 어떤 동물이나 혹성이 아니며 우상이나 신검(身檢)같은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스스로 생겨날 수도 다른 것들을 창조해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분은 기계도 아니다. 태양도 달도 아니며 그렇다고 별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거대한 체계에 의해 통제되며 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 모든 것들을 만들고 유지시켜 주는 분이기에 이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
만든 자는 만들어진 것과는 다르며 그보다 위대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또한 그 어느 것도 스스로 생겨날 수 없으며 경이로 가득찬 이 세계가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세계에서 생성되는 부단한 변화가 그것이 만들어진
것임을 증명하고 있는 바이며 만들어진 것이면 무엇이나 그것을 만든 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시키는 분, 인간을 창조하고 부양하시는 분, 자연 속에서 작용하는
효율적인 힘, 이 모두가 하나로서 동일한 바, 알라 혹은 하나님으로 알려져 있는 분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분이야말로 신비중의 신비이며, 만유 중에서 가장 지고한 분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책, 성꾸란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에게 밤을 만들어 주어 쉬게 하시며,
낮을 만들어 주어 볼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
진실로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은혜와 자비로 충만하시거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적도다.
너희의 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신 것을.
그 분 외에 신은 없나니, 너희는 어찌하여 그분을 외면하느뇨.
하나님의 표징을 부인하는 자들이 도리어 외면 당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땅을 만들어
너희의 안식처로 삼으셨고 하늘을 만들어 너희의 은신처로 삼으셨도다.
너희에게 형체를 주시되, 그 형체를 아름답게 하셨으며, 너희에게 맛나고 정결한 음식을
마련하여 주셨도다. 너희의 주,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니, 그분을 영예롭게 할지어다.
그분은 세계의 주이시도다!
그분은 살아있는 분이시며 그분 외에 신은 없나니 그분에게 요청하며
그분에게 진실하게 헌신할지니라. 세계의 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꾸란, 40:61-65)
너희에게 바다를 복종시켜, 그분의 명으로 배가 항해할 수 있게 하며, 너희가 그분의 선물을
구하게 하고 감사함을 보일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 그분은 천지의 만물을
당신께로부터 너희에게 복종시키셨도다. 보라, 진실로 그 가운데 숙고하는 자들을 위한
표징이 있으리니: (꾸란, 45:12-13)
전세계의 최고주인이요, 만물의 창조자이신 분은 알라(하나님)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는 분이시기에, 사람은 다만 성찰과 명상을 통해서만 그 분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무소부재하시며 그분의 큰 힘은 세계 어디에서나 작용하고 있다.
세계의 만물이 그분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상, 인간은 그분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위대한 힘을 믿어야만 인류는 생명의 그 많은 신비를 가장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올바른 지식과 종교적 통찰력을 얻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며,
실행과 건전한 윤리에 이르는 정로(正路)요, 행복과 번영으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지침이다.
일단,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은 다음에는 그분의 속성과 명칭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완전한 모든 것과 절대적 선은 그분에게 속하지만, 결점이나 악은
그 어느 것도 그분에게 해당이 없다. 특히 다음 사항을 알고 믿어야 한다.
1.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므로 동반자나 자식이 없으며 누구를 낳지도 누구에게서 태어나지도
않는다. 그분은 영원히 만인의 간구를 받으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 무엇도 그분과 동등
하지 못하다.(꾸란, 112:1-4)
2. 그분은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분이시며, 보호자요, 진실한 안내자이시며, 공평한 분이고
최고의 주이시며, 창조자요, 감시자이시며,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며, 전지(全知)하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시며, 듣고 아시는 분이시며, 증인이요, 영예로운 분이시며 유능하고 유력한
분이시다.(예, 꾸란, 57:1-6, 59:22-24)
3. 그분은 사랑하는 분이요 부양자이시며, 관대하고 자비로운 분이시며, 부유하고
독립 자존하는 분이시며, 용서해 주는 분이요, 온화한 분이시며, 인내심 있고 안식(眼識)있는
분이시며, 유일무이한 분이요 보호자이시며, 재판관이요 평화로운 분이시다.
(예, 꾸란, 3:31, 11:6, 35:15, 65:2-3)
이러한 하나님의 명칭과 속성들 하나 하나가 성꾸란의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의 창조물에게 지극한 사랑과 친절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배려와 자비 속에 살고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헤아릴 길이 없으니, 이는 그분이 헤아릴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꾸란, 14:32-34, 16:10-18)
하나님은 지고하시지만, 생각 깊은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가까운 분이시다. 그분은 이들의
기도에 응하여 도움을 베푸신다.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이들이 지은
죄를 사하여 주신다. 그분은 당신과 화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환영하며, 결코 그 누구도 배척
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는 선량해지고, 옳은 일을 하며, 악을 멀리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분은 선함과 사랑이 지극한지라, 선하고 옳은 일만을 권하고 또 이를 가납하신다.
그분의 자비의 문은 당신의 후원과 보호를 진지하게 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 있다.
(꾸란, 2:186, 50:16)
하나님의 당신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은 무한하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그분의
은총을 저울질 할 수 없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출생시 이후는 물론 그 오래 전부터도
우리를 잘 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만드시되, 창조물 중 가장 좋은 형체를 주셨고 또 우리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온갖 감각과 능력을 부여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와 우리의 가족을 부양하신다. 그분은 인간에게 지성을
창조하시어 이해할 수 있게 하시며, 영혼과 양심을 창조하시어 선량하고 정의롭게 하시며,
느낌과 감정을 창조하시어 친절하고 인정스럽게 해 주신다.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획득하고 빛다운 빛을 보는 것은 그분의 자비가 있음으로서이다.
그분은 자비로우시기에, 우리를 창조하시되, 그 형체를 가장 아름답게 하시며, 해와 달을,
육지와 바다를, 땅과 하늘을 식물과 동물을 우리에게 마련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이러한 모든 것들과 우리가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기타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분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만드시며,
인간에게 존엄과 지능을, 명예와 존경을 부여하시니,
이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부왕(副王)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에게 희망과 평온을, 용기와 자신을 심어 준다. 하나님의 자비가
있으므로 해서 비탄과 슬픔을 치유하며,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성공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진실로 하나님의 자비는 고난에 빠진 자를 구제하며, 고통을 당하는 자의 기운을
북돋우며, 병든 자를 위로하며, 절망에 빠진 자를 일으켜 세우며, 궁핍한 자에게는 위안을 주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 삶의 곳곳에서 항상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당연시 한 나머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실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으며 정신적으로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자비로우신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잊거나 저버리지 아니하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진지한
요청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자비와 사랑이 있기에 그분은 우리에게 옳은 길을 보였으며,
사도와 성서와 계시를 보내 주셨다. 모두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고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배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낸 마지막 사도는 무함맏이며,
현존하는 가장 믿을 만한 하나님의 성서는 꾸란이다.
무함맏이 세운 관습과 꾸란의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는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배운다.
만일 누가 죄를 짓거나 악행을 저지르게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그분을 크게 거역하는 것이요, 자기 자신의 존엄성과 존재를 훼손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회개하고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쳐 하나님에게 되돌아서고 싶어하며,
하나님에게 성실히 용서를 구하고 정직하게 그분께 나아간다면, 그분은 정녕코 그를 받아들여
용서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나 그분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자신의 잘못된 태도를 깨닫고, 하나님께 되돌아오기로 작정한다면 틀림없이 용서받을
것이다.
이에 대한 꾸란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동반자를 세우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나, 이외에는 당신이 용서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시나니, 하나님께 동반자를 세우는 것은 실로 가장 가증한
죄이니라.(꾸란, 4:48,116)
이같이 말하라 : 스스로 그 영혼을 욕되게 하는 나의 종들이여! 하나님의 자비를 단념하지
말지니, 그분은 지극히 관대하고 자비로우사,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이라. 너희의 주께로
(회개하여)돌아서, 그분께 복종할지니라. 형벌이 너희에게 내리기 전에, 형벌이 내리고 나면
도울 자 없으리라. 그런 즉 너희의 주께서 너희에게 계시한 최선의 길을 따를 지어다.
형벌이 너희에게 내리기 전에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꾸란, 39:53-54)
이렇게 커다란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보답으로 우리에게 있는 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자라는 게 없으며, 독립 자존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보답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분에게 보답할 수 없거니와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은총과 자비에 값을 매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란 다만 선량하고,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할 줄 알며, 그분의 권고를 따르고, 그분의 법을
시행하며, 그분의 미덕과 속성들을 올바로 나타내고, 지상에서 그분을 정직하게 대리하고
진실하게 대표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존엄과 명예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은 우리를
노예로 삼고자 아니하신다. 두려움과 미신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복종시키고자 아니 하신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지위를 만물 위로 높이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굴욕을 주고자 아니 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어떤 규칙과 규정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든 그것은 결국 우리를 이롭게 하려는 배려다. 우리를 도와, 서로 화목하고 친절하게,
형제애를 나누며,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삶을 누리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귀어 큰 기쁨을 누리며,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을 찾게 해 주자는
의도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분에 대해 말할 것도 많다.
심오한 불가사의와 감동적인 경이로 가득 찬 이 세계는 마치 펼쳐놓은 책과 같아서,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읽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이
인간에게 보내 주신 많은 사도들과 계시들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러 오신다.
이러한 사도들과 계시들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자연을 깊이 살펴보고 사도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하나님의 계시를 읽어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극히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그분께 나아가는 정로(正路)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몇 가지 대표적인 꾸란 구절들을 다음에 옮겨, 본 논의를 결론짓기로 한다:
알라께서는 자신 외에는 신이 없음을 증언하시나니 천사와 지식 있는 자들 역시 그러하도다
-그분은 정의의 수호신이도다. 그분 외에는 신이 없나니 그분은 강하고 지혜로운 분이시로다.(꾸란, 3:18)
알라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수호하시나니, 하늘과 땅의 열쇠들이 그분의 것이로다.
(꾸란, 39:63-64)
알라는 창조를 시작하시고 또 창조를 거듭하시나니, 그분께로 그대가 돌아가리로다.
(꾸란, 30:11)
하늘과 땅에 있는 무엇이나 다 그분의 것이니 만물이 그분께 복종하는도다. 창조를 시작하시고
또 창조를 거듭하는 분이 바로 그분이시니, 그분께는 지극히 쉬운 일임이라, 하늘과 땅의 가장
높은 지위가 그분의 것이니, 그분은 강하고 지혜로우시도다.(꾸란, 30:26-27)
<이슬람의 의미(意味)>
이슬람의 어원은 아랍어 어근 “싸리마” 인데, 이 말은 특히 평화, 청결, 순종, 복종을 뜻한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이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을 뜻한다. 이 말의
원래 의미와 종교적 의미 사이의 관계는 깊고 명백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하므로써만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고 청결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국외자들은 우리의 종교를 “마호멧주의자(마호멧교도)”라고 부른다. 무슬림들은 이런 말의
사용을 거부하며 이에 항의한다. 우리의 신앙이 마호멧주의로 유별(類別)되고, 우리가 마호멧
주의자로 불리울 경우, 심히 그릇된 의미가 내포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명칭은
이 종교가 일개 인간, 곧 무함맏의 이름을 따서 명명(命名)되고, 이슬람 역시 유태주의(유태교),
힌두주의(힌두교), 마르크스주의 등과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주의”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잘못된 명칭이 내포하는 또 하나의 오류는 국외자들이 자기네가 마호멧주의자
라고 부르는 무슬림들이 실례로 마치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함맏을
숭배하거나 믿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하나 더 보면, 마호멧주의자라는 말이 국외자들을 오도하여 그로 하여금
이 종교가 무함맏에 의해 창시되었고, 그 때문에 이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틀린 명칭에 내포된 의미는 모두 심히 잘못된
것이다. 고작해야 오해를 일으킬 뿐인 것이다. 이슬람은 또 하나의 주의(ism)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숭배하지도, 기독교인, 유태인, 힌두인, 마르크스주의자 등이
각자 자기네 지도자를 생각하듯 그를 생각하지도 아니다. 무슬림들은 하나님만을 숭배한다.
무함맏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모범적으로 생활할 임무를 하나님께 부여받은 일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인간에 대한 경건성과 완전성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로서
역사 속에 서 있다. 그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사람됨 그리고 미점과 미덕의 면에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경지의 산 증거다. 또한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종교적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무함맏에 의해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그가 창시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슬람의 원 창시자는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슬람의 창시 년대는 아담시대까지 소급한다. 이슬람은 어떤 형태로든 태초부터 존재해
왔으며, 마지막 때까지 존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교의 올바른 명칭은 이슬람이며,
이를 신봉하는 자들이 무슬림인 것이다. 일반의 오해와는 달리 이슬람, 혹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그분의 법에 복종하는 것과 더불어, 결코 개인의 자유의 상실이나 운명론에의
굴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거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슬람의 올바른 의미와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음이 확실하다.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개념은
그분을 가장 자비롭고 자애로우시며, 가장 사랑이 많고 인간의 안녕에 가장 관심이 많으신 분,
지혜로 충만하고 당신의 피조물을 보살펴 주는 분으로 평한다. 따라서 그분의 뜻은 자비롭고
선한 뜻이며, 그분이 규정하는 법은 무엇이나 인류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문화인들은 자기네 나라 법을 준수할 때, 건전한 시민으로, 그들이 속한 각 사회의 정직한
성원으로 간주된다.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들이 법에 복종함으로써 자유를
잃게 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운명론자들이요, 무력한 자들이라고 단 한시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한 뜻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최선의 법인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건전하고 정직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는 한편, 타인의
권리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책임을 다하는 창조적인 고차원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의에 순종한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가 줄어들거나, 박탈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차원의 자유가 풍부하게 주어진다. 이러한 순종은 정신을 미신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것을 진리로 가득 채운다. 영혼을 죄와 악에서 해방시켜 선과 청결로 그것을 자극한다.
자아를 허용과 탐욕에서, 질투와 긴장에서, 두려움과 불안에서 해방시킨다. 사이비신들과
저급한 욕망에서 해방시켜, 선과 미덕의 아름다운 지평을 인간 앞에 펼쳐 놓는다.
하나님의 선의에 순종하고 그분의 유익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평화와 조화를 보존하는 최선의
수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한편으로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 인간 사회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연의 제 구성요소들 간에 조화를 창출해
낸다. 이슬람에 의하면, 세상만물, 혹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현상은 하나님께서 정한 법칙에
지배된다. 그러므로 전 물질계가 이슬람의 상태에 있다는 것, 혹은 그것이 무슬림임을 뜻한다.
물질계는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갖지 않는다. 자의적으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즉 복종의 법인 창조주의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유독 인간에게만 지성과 선택 능력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지능과 선택의 자질이
있기에, 하나님의 선의에 복종하고, 그분의 법에 순종하라고 권유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길을 택해야만,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게 필연적으로 복종하는 기타 자연의
모든 구성요소 사이에 조화를 구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의 길을 걷는다면, 정로(正路)
에서 이탈하여 일관성을 잃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입법자의 노여움과 처벌을 받게 된다.
이슬람이 하나님의 선의에 순종하고, 그분의 유익한 법에 복종하는 것을 뜻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도들의 메시지의 정수를 이루는 것이므로, 무슬림이라면 무함맏
이전의 모든 예언자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인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예언자들과 이들의
추종자들 모두가 무슬림이었으며, 그들이 믿는 종교는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의 세계 종교인
이슬람이었다는 것을 믿는다.(꾸란, 2:128-140, 3:78-85, 17:42-44, 31:22, 42:13)
1972년 12월 4일자 Observer Dispatch(O.D)지에 실린 나의 성명을 여기에 전재하는 것이 이제
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성명은 이제까지 논의된 문제와 관련하여,
얼마나 많은 왜곡과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지를 지적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중복되고, 되풀이
되는 점도 없지 않지만 쟁점이 극히 미묘하고 이슬람의 관점을 재론할 필요가 있어서인 만큼,
양해해 주기 바란다.
특종 뉴스 하나(O.D.11월 25일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미처 모르고 있던 대중에게
동정을, 많은 학교 교사와 종교계 인사에게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선의와 양식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자신의 도의적 책임을 외면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커스 일리아슨(Marcus Eliason)이 요르단의 이스라엘 점령지역에서 “모슬렘들”이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이브라힘으로 숭배하고 있다 ”고 보고해 왔다. 요즘 세상에, 우리가 사는 이
조그만 세계에서 무슬림들이 이브라힘을 숭배하고 있다는, 생생한 보도에 접하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더욱 믿어지지 않는 것은 이 뉴스가 짐작하건대 정통한 소식통에서
흘러나와 알 권리가 있는 대중에게 보고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서양인들은 무슬림들이 무함맏을 숭배한다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무함맏의 종교가 마호멧교로 통하고 그 추종자들이 서양에서 마호멧교도들로 알려
지게 되었다. 그 후 경위야 어떻든 무슬림들이 “일종의 신”인 알라를 숭배한다는 것이 서양인
들에게 분명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들이 아브라함을 이브라힘으로 숭배하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이나 그 외 어떤 인간도 숭배한 사실이 없다. 이들이 항상 믿어
오고 있는 바는, 무함맏은 그 보다 앞서왔던 수많은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간이며,
한 인간으로써 예언자 지위라고 하는 최고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인류에게는
최대의 찬사가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이 마지막 예언자이긴 하지만 유일한 예언자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낸 영원한 메시지를 보강하여 영원히 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메시지를 시대와 민족에 따라서 많은 예언자들에게 계시하였으니, 이들 예언자 가운데
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 다윗, 모세, 예수 그리고 무함맏(이분들께, 평화가 깃들기를)이
포함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슬림들이 이들을 믿되, 그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우주적 소망과 세계주의적 정향(定向) 때문에 자기들을 마호멧교도라
부르고 자기들의 신앙을 마호멧교라 부르는 것을 불행한 오칭(誤稱)이라고 보아
이를 유감스러워 한다. 거기에 내포된 의미가 불쾌함에서다. 까닭 없이 그런 게 아니다.
무슬림들은 자기들이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이름을 따서 명명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초월적이고 영원한 종교이기 때문이다.이 종교의 올바른 명칭은 이슬람이며,
그 신봉자는 무슬림이라고 불러야 타당하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본 이슬람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법에 복종함을 뜻한다. 꾸란은 하나님의 뜻을 선하고 자비로운 것으로,
그분의 법을 가장 이롭고 공정한 것을 규정한다.
따라서 이렇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슬람의 윤리적 상태에 있는 한
사람의 무슬림인 것이다.
꾸란이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믿을 만한 예언자들을 무슬림이라 칭하고,
이들의 종교를 오직 하나의 동일한 명칭 즉 이슬람으로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의미로서이다.
따라서 무슬림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무함마드의 추종자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나머지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추종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슬람에서 알라라는 말은 간단하나 지극히 단호하게, 온 세계의 창조자, 주중의 주,
왕 중의 왕이신 유일무이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일상예배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을 다음에 들어둔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슬람의 기본신조(基本信條)>
진실하고 충실한 무슬림들은 다음에 제시하는 주요 신조들을 믿는다.
1. 그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은 지고하고 영원한 분이며, 무한하고 강하신 분이며,
자비롭고 자애로운 분이요, 창조주이며, 부양자이시다. 이런 신념이 힘을 발휘하는데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그분만을 바랄 것이 요청된다.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그분의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
이러한 신념에 의해서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공포와 절망, 죄의식과 혼란에서
인간이 해방된다. 독자에게 앞에서 설명한 이슬람의 의미를 살펴 볼 것을 권한다.
2.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를 모두 믿되, 이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민족마다 하나님께서 보낸 경고자, 혹은 사도가 있었다. 이 사도들은 선을 가르친
위대한 교사였으며, 정의를 수호한 진정한 투사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택하여 인류를 가르치고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다.
이들은 역사의 여러 시대를 통하여 보내졌으며, 민족마다 하나 이상의 사도가 있었다.
시대에 따라서는 한 민족에게 두 명 이상의 사도들을 동시에 보내시기도 하였다.
성꾸란은 이들 중 25명의 이름을 들고 받아들인다. 이들은 무함맏을 제외하고는 민족적,
지역적 사도로서 알려졌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지, 그들의 종교는 근본적으로 같았으며,
이슬람으로 일컬어졌던 것이니, 이는 그것이 하나의 동일한 근원, 즉 하나님에게서 비롯하여,
하나님 정로(正路)로 인류를 인도한다는 한 가지의 동일한 목적에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사도들은 예외 없이, 결국에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었던 바, 바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내리고, 이들을 임명하여 어떤 과업을 수행하게 하셨다. 이들 중 무함맏은 최후의
사도로서 예언자 지위의 초석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다.
우리 멋대로 하는 생각이 아니요, 편의상의 신념도 아니다. 다른 모든 이슬람의 신념이
그렇듯이 그것은 근거 있는 논리적 진리인 것이다. 참고로 여기에 위대한 사도 몇 분
곧 노아와 아브라함, 이스마엘과 모세, 예수와 무함맏-이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이 있기를-제위의 이름을 언급해 둔다.
꾸란은 무슬림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이삭, 야곱과 그 12지파에게 내려진 계시를 믿나이다. 그리고 모세와 예수에게
내려진 계시와, 주께서 당신의 모든 예언자들에게 내리신 계시를 믿나이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서로 차별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나이다.
(꾸란, 2:136, 비교3:84, 4:163-165, 6:84-87)
3. 진실한 무슬림은 제 2조의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경전과 계시를 믿는다.
이들은 인도의 불빛으로서 사도들은 이를 통하여 제각기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의 정로(正路)를
보였다. 꾸란은 특히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예수의 경전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이 계시되기 오래 전에 이런 경전과 계시의 일부가 소실되거나, 왜곡되었으며
또 일부는 망각되고 등한시되거나, 혹은 감추어져 버렸다. 현존하는 하나님의 경전으로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꾸란뿐이다.
무슬림들은 꾸란 이전의 경전과 계시를 믿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그 완전한 원본이
어디 있는가? 사해(死海)밑에 아직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앞으로 두루마리들이
더 발견될 지도 모른다. 또는 기독교인이나 유대인 고고학자들이 성지에서 발굴을 계속하여
찾아낸 것들을 전부, 일반에게 공개하게 되면 이에 대한 정보를 더 입수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슬림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없다. 완전하고 믿을 수 있는 꾸란이 그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소실된 부분이 없으며, 더 첨가될 리도 없다. 그 신빙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신중한 학자나 사상가 가운데 그 누구도 그것이 진본(眞本)이라는데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꾸란의 이런 특성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인 바, 하나님께서는 꾸란을 계시하시어,
친히 책임을 지시고, 그 첨삭과 왜곡을 철저하게 막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꾸란은 여타의 모든 경전의 판단 기준으로서 무슬림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꾸란과
일치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되지만, 꾸란과 어긋나는 것은 다 배제되거나
보류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진실로 우리가 꾸란을 보내었노니, 또 정녕코 이를
보존하리라. (꾸란, 15:9 비교 2:75-79, 5:13-14,41,45, 6:91, 41:43)
4.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믿는다. 이들은 순수한, 빛나는 영적 존재들이며,
본질적으로 먹고 마시거나 자야 할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육체적 욕망이나 물질적
욕구가 없다. 이들은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이런 천사들은 많이 있으며 천사마다 어떤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 육안으로 천사를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실존이 필연적으로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눈으로 볼 수 없고 감각되지 않는 것이 많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의 존재를 믿고 있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장소들이 있는가 하면, 기체나 에테르처럼
육안으로 보거나 냄새를 맡거나, 만져 보거나, 맛을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를 믿는 것은 지식이나 진리를 오로지
감각적 지식이나 감각적 인식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슬람의 원칙에서 연원한다.
(꾸란, 16:49-50, 21:9-20, 제 2조 참고)
5. 진실한 무슬림은 최후 심판일을 믿는다. 이 세상에 언젠가는 종말이 오며, 사자가 부활하여
공정한 최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쌓은 행적, 우리가 가지는 의향,
우리가 하는 거동, 우리가 마음에 품는 생각,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 하나 하나가 모두
헤아려져 정확히 기록, 보존된다. 심판일에 이 모든 것이 심리(審理)될 것이다. 기록이 좋은
사람은 푸짐한 보상을 받고, 하나님의 천국으로 따뜻한 영접을 받을 것이다. 기록이 나쁜
사람은 형벌을 받아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진짜 성격과 그 정확한 모습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무함마드가 말한 대로라면, 천당에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어 본적이 없으며, 마음속에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선행에는 보상이, 악행에는 형벌이 어김없이 따르리라는 것을 믿는다.
이 날은 정의의 날이요, 마지막 총결산의 날이다.인간이 만든 법의 처벌을 면할 수도 있듯이,
약삭 바르기만 하면 죄를 짓고도 벌을 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심판일에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비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입장을 대변해 줄
변호사도 없이 현장에서 체포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들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보실 수 있으며, 또한 그분의 대리자들이 일일이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경건한 사람이 있어, 선행을 베풀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도, 잠시 어울렸다가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사례나 찬사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날에는 결국 응분의 보상을
받을 것이며 널리 사례를 받게 될 것이다. 절대적 정의가 모두에게 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일을 믿는 것이 지금 세계가 당면한 복잡 다단한 많은 문제들을 풀어 주는 종국적인
해답이다. 죄를 저지르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부도덕한 행위에 있으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사업에 성공하고 생활이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덕망 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지한 노력에 응분의 대가가 따르기는커녕,
피해만 더 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있다. 이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도 대립하는 상황인 것이다. 죄진 사람이 세상법망을 피해 처벌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게다가 더 부유해진다고 한다면 덕망 있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선의 대의를 증진시킬 것인가? 선에는 보상을 하고, 악은 저지시키는 무슨
방법이 있어야만 한다.
비록 지금 세상에서는 이렇게 되고 있지만-주지하는 바와 같이 된다 하더라도 제때에 즉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어느 날엔가는,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니, 이날이 바로 심판날이다.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불의를 용납하고 해악을 묵인하려고 심판일이 있는게 아니다.
착취당하는 자를 회유하거나 착취하는 자를 안심시키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정로에서
벗어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조만간 완전히 구현되리라는
것을 다짐해 두려는 것이다.(예, 전기의 논급 창조)
6. 진실한 무슬림은 초시간적인 하나님의 지식과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믿는다.하나님은 이 세상에 무관심하시지 않으며 수수방관 하시지도 않는다.
그분의 지식과 힘은 수시로 작용하여 그분의 관대한 영역에 질서를 유지하며 그분의 피조물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지혜롭고 사랑하는 분이시며,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반드시 선한 동기와 의미심장한 목적을 수반한다. 일단 이런 생각이 마음에 새겨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비록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것이 틀리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굳은 신앙심으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굳게 믿고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지식이 한정되어 있고, 우리의 생각이 개인적인 차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에 그분의 지식은 무한하고 그분의 계획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인간이 운명론자가 되거나 무력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사와 인간의 책임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줄 뿐이다. 우리는 날 때부터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기에 우리의 능력과 자유도 그 정도에 있어 유한하고 한정적이다.
우리는 만능이 아니기에 그분은 인자하시게도 우리가하는 일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으신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거나 우리에게 유한한 능력을 주시어, 우리의 유한성 및 책임한계와
균형을 이루게 하셨다. 한편 하나님의 초시간적인 지식과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가 자신의 한정된 능력 범위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며, 올바른 선택을 하라고 권유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거나 계획한대로 되지 않더라도 신앙심을 잃어버린다든지, 정신적 긴장이나
건강을 해치는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한번해서 안 되면 다시 해 보아야 하며
그래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엔, 최선을 다 했으니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의 능력과 책임의 한계밖에 있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이런 신조를 가리켜 “까다와”와 “까다르”를 믿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초시간적인 지식은 사건을 예견하며, 사건은 하나님의
정확한 지식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 꾸란, 18:29, 41:26, 53:33-62, 54:49, 65:3, 76:30-31)
7.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무의미하게 창조하시지 않았으며
인생에는 인간의 육체적 필요와 물리적 활동을 초월하는 웅대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다. 완전한 은둔과 철저한 명상 속에 전 생애를 보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안다는 것이요,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분의 계율에 복종하고 삶의 곳곳에서 그분의 법을 시행하며, 옳은 일을 하고,
악을 피함으로써 그분의 대의를 세운다는 것을 것이며, 그분과, 우리 자신과, 같은 인간들을
공정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은 삶에서 도피하지 않고 삶을 사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고한 속성을 우리 몸에 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소박한
언명이 아니며,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포괄적이고 결정적인 언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에 목적이 있고, 인간이 그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창조된 것이라면,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부과하실 때는, 이 책임을 수행해 나가는데
필요한 도움도 함께 베풀어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행동방침을 결정할 수 있는
지능과 능력을 부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전력을 다하여 자신의 존재 목적을 철저히 추구하라고
강권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거나 생을 헛되이 보내거나 혹은 자기의 소임을
등한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악행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다.
(참조, 꾸란, 21:17-18, 51:56-58, 75:37)
8.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유의 위계 질서 속에서 인간은 특별히 높은 지위를
누린다고 믿는다. 인간이 이처럼 뛰어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행동 능력을
비롯하여 합리적 기능과 영적 열망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위가 뛰어날수록 그만큼
책임도 무거워지는 것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부왕(副王)의 지위를 차지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대리자로 임명하여 활동하게 한 사람은 반드시 어떤 권력과 권위를 가지게
마련이며,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명예와 고결성이 부여된다. 바로 이것이 이슬람에서의 인간의
지위인 것이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저주받은 종족이 아니다. 훌륭하고 고귀한 업적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된 존엄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서 사도를 택하신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신뢰할 수 있고 유능하며 선의 엄청난 보물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꾸란, 2:30-34, 6:165, 7:11, 17:70-72, 90-95)
9. 진실한 무슬림은 사람은 누구나 다 “무슬림”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이것은 출생의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계획을 실현하고 그분의 명에 복종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영적인 잠재력과 지적인 성향이 있어, 이슬람에
올바로 접하고 그 천성이 향상되어 나가도록 놓아두기만 한다면, 이러한 잠재력과 성향을
통하여 그가 훌륭한 무슬림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슬람을 올바르게 전해 주기만 하면,
쉽사리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자손들의 천부의 열망을
비롯하여 윤리적 영적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개인적·사회적·국가적·세계적 차원에
걸쳐 건설적이고 건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신성한 신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은 인간성을 창조하셨기에 어떻게 해야 인간성이 가장 유익한가를 아시는
하나님의 세계 종교이기 때문이다. (꾸란, 3:30, 64:1-3, 82:6-8)
10. 진실한 무슬림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에는 죄가 없으며 덕을 유전 받았다고 주장할
권리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사람은 마치 아무 것도 써 있지 않은 책과 같은 존재다.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이 온전할 경우, 성인의 연령에 달하면 자신의 행위와 의사에
책임을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는 한 죄에 구속되지 아니하며,
자신의 계획에 따라 스스로 책임을 지고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이 두 가지의 자유 곧 죄에 구속되지 아니하는 자유와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는
유전 받은 죄라는 무거운 짐에서 무슬림의 양심은 해방시켜 준다. 원죄의 교리가 야기하는
불필요한 긴장을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제거시켜 주는 것이다. 이슬람에 있어서의 이러한
자유의 개념은 하나님의 정의의 원칙과 개개인이 하나님께 직접 책임을 진다는 원칙에
그 바탕을 둔다.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의 짐을 져야 하며,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누구도 타인의 죄는 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아담이 원죄라는 것을 범했다고 한다면, 거기에 속죄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책임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용서하실 수 없었고, 다른 누구에 의해
그 죄를 대속 시켜야 했다든지, 아담이 용서를 빌지 않았거나, 용서를 빌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 가능성이 극히 희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해 주시는 속성과
용서의 권능은 물론이려니와, 그분의 자비와 정의에 어긋나는 처사일 것이다. 이와 같은
가정은 상식을 철면피하게 무시하는 것이며, 바로 하나님의 개념을 무모하게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제 9조 참조, 꾸란, 41:46, 45:15, 53:31-42, 아래의 죄의 개념 참조)
이러한 합리적 생각과 꾸란의 권위를 바탕으로 하여 무슬림은 아담이, 여느 지각 있는
범죄자가 그러하듯이,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고 믿는다.
또 마찬가지 근거에서 자비로우사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용서를 베푸셨다고
무슬림은 믿는다.(꾸란, 2:35-37, 20:117-122)
그러므로 무슬림은 아담을 비롯한 전 인류에게 유죄선고가 내려져 예수가 그 죄를 대속 하러
올 때가지 용서받지 못하였다는 교리를 추호도 용납할 수 없다. 결국 무슬림은 예수가 십자가
에서 죽음으로써, 전 인류의 죄를 단번에 제거하였다는 극적인 이야기를 환영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가 그릇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 둘 게 있다.
무슬림은 예수가 그 적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형의 교리는 그 바탕에 있어 그것이 인간의 논리와 존엄에 어긋나는 만큼이나
무슬림의 예수에 대한 존경심이 흐려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이슬람에서 예수가 차지하는 높은 지위가 깍아내려진다든지, 하나님의 뛰어난 예언자로서
예수를 받드는 무슬림의 신념이 흔들리게 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교리를
배척함으로써 무슬림은 보다 더한 경애와 존경으로써 예수를 받아들이며 예수께서 원래 가져
온 메시지를 이슬람의 불가결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무슬림이 되려면 하나님의 예언자 모두를 차별 없이 받아 드리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해 둔다. 이슬람에서 예수가 차지하는 일반적 지위는
뒷장에 가서 더 논의될 것이다.
11. 진실한 무슬림은 인간은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구원을 얻으려면 신앙과 행동, 신념과 실천이 겸비되어야 함을 뜻한다.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없는 행동만큼이나 불충분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생활 속에 살아 움직이고 그 신념이 현실화되어야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본조는 이슬람이 여타 신조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말뿐인
봉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시며, 진실한 신자라면 신앙의 실천적 요건에 관한 한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본조는 지적한다. 또한 그 누구도 타인을 대신하거나 그와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예, 꾸란, 10:9-10, 18:30, 103:1-3 참조)
12.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든 먼저 그에게 올바른 길을 보이지 않고서는,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많은 사도와 계시를 보내시고,
인도를 베풀고 경고를 발하기 전에는 징벌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신 소이(所以)
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나 사도에 접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건전한 상식에 따라 행동하지 않은데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그러나 알면서도 고의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거나 그분의 정로(正路)에서 이탈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으로 해서 처벌될 것이다.(꾸란, 4:165, 5:16 &21, 17:15)
이 점이 무슬림 각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세상에는 이슬람에 대해 들어보지 못하고 이슬람을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도 이슬람을 애써 찾는다면 진실해질 수 있고
훌륭한 무슬림이 될 수도 있다. 알지도 못하고,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은 무슬림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을 지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이슬람은 이런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무슬림들이, 이들을 이슬람으로 초대하여, 이슬람의 참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전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에게 말로써 이슬람을
전파할 뿐 아니라-더욱 중요한 것으로서-생활 속에 이슬람을 액면 그대로 실현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예, 꾸란, 3:104, 16:125)
13.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성에는 악보다는 선이, 절망적으로 실패할
가능성보다는 선도에 성공할 가망성이 더 많다는 것을 믿는다. 이런 신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과업을 부과하시고, 사도들에게 그를 인도하기 위한 계시를 보내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인간이 날 때부터 가망 없는 존재이고, 선도의 여지가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어떻게 절대적인 지혜를 가진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에게 책임을 과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식의 권고를 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모든 것이 허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살피고 관심을 쏟고 계시다는 사실이 인간은 무력하거나 가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선을 식별하고 선해지려고 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굳건하고 인간을 합당하게 신뢰한다면, 정녕 우리 세대에서도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꾸란의 관련 구절을 면밀히 연구하고 그 뜻을
음미해 보아야 한다.
14. 진실한 무슬림은 신앙이란, 이치를 따져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아무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완전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신앙이 행동을 자극하고,
신앙과 행동이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기만이나 강요도 당함이 없이,
확고한 신념 위에 신앙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문의 전통 때문에 무슬림으로 자처하는 사람이나 강요를 받거나 맹목적으로
모방해서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무슬림으로 보시지 않는다.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충분한 근거를 가진 신념 위에 자신의 신앙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심이 남아 있거나 반신반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신앙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연의 펼쳐진 책 속을 살펴보고,
추리력을 발휘하고, 꾸란의 가르침을 음미해 보라고 권유하신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리를 찾을 때까지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능력과 성의에 부족함이 없다면 틀림없이 그러한 진리를 찾게 될 것이다.
(예, 꾸란, 2:170, 43:22-24 참조)
이슬람이 건전한 확신을 요구하고 맹목적 모방에 반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슬람은
진실하고 진지한 사상가로 정평이 나 있는 모두에게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남김 없이
발휘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거나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생각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믿을 만한 종교 경전만을 의지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러한 경전은 그 자체로서 충분할 뿐 아니라 그로서는 여기에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요는 신앙이 건전한 확신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마음속에서는
의심이 말끔히 가셔 버리지 않는 한 누구든지 진정한 무슬림으로 자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건전한 확신과 선택의 자유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경우에만 이슬람이 완전한 것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그것이 강요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강요당한 신앙을 받아들이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속에서 우러나오지 않거나, 자유롭고 건전한 확신에서
비롯되지 않는 이슬람은 진정한 이슬람으로 여기시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고로, 무슬림 국가에서 많은 비무슬림 집단이 완전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무슬림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슬람이 종교의 강요를
금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내부에서 비쳐 나와야 하는 빛이다. 선택의 자유가 책임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최선을 다해서 이들에게 강한 신앙심을 고취시켜야 한다. 건전한 바탕 위에 신앙을
확립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영적인 접근법이 있는 바, 이것은 주로 꾸란과 무함맏의
전승에 근거하는 것이다. 또한 합리적 접근법이 있는데, 이 방법에 의하면 결국, 지고한 존재에
대한 신앙으로 유도된다. 이렇다고 영적인 접근법에 확실한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합리적 접근법이 영성을 고취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양자는 상호 보완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활발한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적 지식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으면, 합리적 접근법이나 영적인 접근법 혹은 두 가지
방법에 다 의지할 수 있으며, 자신이 내린 결론의 타당성에 자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할 능력이 없거나, 자기의 추리력에 자신이 없으면 영적인 접근법에만
국한해도, 믿을 만한 종교원전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에 만족할 수 있다. 요컨대, 영적인
접근법에 의하든, 합리적 접근법에 의하든, 혹은 이 두 가지 방법에 의하든 결국 하나님을
신앙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모든 길은 그 중요성에 차이가 없으며 이슬람에서
똑같이 취급되고 있다. 올바른 경로만 밟는다면 같은 목적, 즉 지고한 분에 대한 신앙으로
이끌어지게 된다. (꾸란, 5:16-17, 12:109, 18:30, 56:80)
15. 진실한 무슬림은 꾸란이 천사 가브리엘을 매개하여 무함맏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꾸란은 하나님으로부터 때에 따라 조금씩 계시되었으니, 이는 어떤 의문에 답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논쟁을 종결지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영원한 행복으로 인간을 이끄는 최선의
길잡이가 되기 위함이었다. 꾸란의 글자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속에서 울리는
소리 하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의 반향인 것이다.
꾸란은 이슬람 제일의 가장 믿을 만한 원전이다. 이것이 아랍어로 계시되었던 바, 지금도
여전히 완전한 아랍어 원전으로 되어 있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관심을 두시어 꾸란을 보존하시고, 그것이 언제 어디서나 인류에게 최선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시며, 그 왜곡을 방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비교, 꾸란, 4:82, 15:9, 17:9, 41:41-44, 42:7,52-52)
꾸란이 그 문제에 조금의 변화도 없이 심지어 점하나 바뀌지 않고 완전한 원전으로 보존된
역사상 유일한 경전이라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전하셨음을 증명하고 있는 바이다.
꾸란을 기록하고, 그 장절을 짜고, 그 본문을 보존한 역사는 무슬림들 뿐만 아니라 성실하고,
진지한 학자들의 마음속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로서, 어떤
신앙을 가진 학자-자신의 지식과 정직성을 존중하는-든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온 인류가 나선다 해도 꾸란의 장 하나도 흉내낼 수 없으리라는 것이 무함맏이 이룬
불멸의 기적이다.(꾸란, 2:22-24, 11:13-14, 17:88-89)
16. 진실한 무슬림은 꾸란과 무함맏의 전승은 확연히 구분된다고 믿는다. 꾸란은 하나님의
말씀인 반면, 무함맏의 전승은 꾸란의 실천적 해석이다. 꾸란은 받은 그대로 전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 무함맏이 맡은 역할이었다. 그가 내린 해석과
그 실천이 소위 무함맏의 관습(전통)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이 이슬람 제이의 원전인 바, 제일의 원전이요, 판단의 기준인 꾸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관습(전통)과 꾸란 사이에 조금이라도 모순되거나 불일치 하는 점이
있으면, 무슬림은 꾸란만을 고수하고, 꾸란 이외의 것을 전부 의문시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무함맏의 진짜 관습이 꾸란에 어긋나거나 상반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러두기
이제까지 이슬람의 주요 신조들을 논하면서, 일부러 전통적인 방법에 따르지 않았다. 이 주요
신조들을 5개조 내지 6개조에 국한시키지 않고, 가급적 많은 원칙들을 포함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술한 모든 신조는 꾸란의 가르침과 무함맏의 관습(전통)에 근거하여 유도해 낸
것임을 여기에 지적해 둔다. 꾸란의 구절을 더 많이 인용하고 관습을 많이 들어서 본 신조들의
근거를 제시할 수도 있었지만, 지면 관계상 이를 생략하였다.
하지만 꾸란과 무함맏의 전승을 참고로 하여 자세히 연구해 볼 수 있다.또한 운명 예정설이니
숙명론이니 자유의지니 하는 등의 서구식 술어와 전문용어는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다. 혼란과
전문성을 피하고 싶어서 일부러 이렇게 했다. 아랍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용어는
대부분의 경우, 이를 이슬람에 적용시키면 오해의 소지를 낳을 뿐 아니라 그릇된 인상을 주게
된다. 따라서 외래 종교용어를 가져다가 이슬람에 대입시키게 되면 본서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또 외래 종교용어를 본서에서 사용할 경우, 이슬람의 실상을 밝히자면 많은
단서와 주석의 첨가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면을 늘려야 하는데 형편상
도저히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 평이하고 단순한 말로 설명을 가하려고 했다.
앞으로도 본서의 설명은 이에 준할 것이다.
[1])많은 세기 동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위인들의 정신을 사로잡아 오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한한 인간의 지능이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할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인간의 지능은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그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과학이나 철학 혹은 특수한 인식론을 신뢰한다고
공언한다. 이들의 논법은 사리에 맞지 않거나 부적절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항상 복잡한데다,
이해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계발된 자유로운 정신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기 마련이다.
그 길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체를 부인한다고 해서
그 실체가 실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흥미 있는 비교 견해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Jacques Maritain,
하나님에의 제접근방법(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54);
Muhammad Zafrulla Khan,
이슬람 : 현대인에 대한 의미. (New York: Harper &Row, 1962);
John Hick, ed.,
하나님의 존재(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64)
[2]) 훌륭한 문학작품을 다른 언어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꾸란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꾸란은 자국의 아랍어와 문학의 대가들에게 도전을 제기하였던 바(지금도 도전하고
있다) 그 가장 짧은 장(章)을 놓고도 이와 근소하게 유사한 것조차도 이들이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입증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꾸란의 의미와 미와 매력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꾸란의 의미와 미와 매력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온 것은 꾸란의 완전 번역이 아니며,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본래의 꾸란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다른 언어를 써서 내린 인간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원전의 힘찬 문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제시된
번역에는 인용부호의 삽입이 엄격히 배제될 것이다.
첫 번째 글:
아프간 피랍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대학 내 기독단체들도 이를 주시하고 있다. 대학의 국제교류로 중동지역의 학생들이 한국으로
대거 몰려오면서, 캠퍼스 내 무슬림 학생 수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도 지난
2000년도 이후 이집트, 파키스탄 등의 중동지역 국가의 대학들과 교류협정을 맺었고, 2007년
가을학기 현재 서울대 캠퍼스에서는 히잡을 쓴 무슬림 여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에 서울대학교회(박흥수 목사)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고취시키고자 5일 전호진 박사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를 초청해 수요채플 중 이슬람 강연회를 가졌다.
이슬람, 왜 과격한가? 이슬람에 대한 정보가 아직 대중화 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이슬람을 보통
‘테러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평범한 무슬림들을 만나면 그들은 ‘우리도 테러를
싫어합니다, 우리는 평화의 종교입니다’라고 말해 혼란을 가중시킨다. 전 박사는 이에 대해
“이슬람은 테러의 종교이기도 하고 평화의 종교이기도 하다”고 했다. 전호진 박사에 따르면,
이슬람은 ‘메카의 이슬람’과 ‘메디나의 이슬람’으로 구분해야 한다. 메카와 메디나는 둘 다
마호메트가 계시를 받은 곳이지만, 메시지에서는 큰 차이가 난다. 메카에 있을 때 마호메트는
유대인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면서 ‘평화’, ‘겸손’에 가까운 메시지를 전했으나, 메디나로 가면서
공격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로 변했다.
현재 코란에는 메카의 메시지와 메디나의 메시지 모두 담겨져 있다. 현재 공격적이고 테러를
서슴치 않는 이슬람은 특히 메디나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이다. 이슬람 전문가들은 시기적으로
나중에 기록된 메디나의 메시지를 이슬람의 기본 특성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박사는 메디나 이슬람의 과격성 근원에 대해 “종교적 전체주의(religious
collectivism)의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전 박사는 과격 이슬람 세력들이 원리주의 이슬람을 이데올로기의 대안으로
채택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공산주의는 이미 끝났고, 자본주의도 곧 소멸된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그것을 대체할만한 이데올로기로 원리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전 박사는 이슬람의
과격성의 또 하나의 원인이 “16세기 이후 서방세계에 국제적 주도성을 빼앗겼다는 울분과
자존심의 추락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 박사는 “지금 상당수 중동 국가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세운 나라이며, 스페인 같은 경우도 6백년간이나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았다”며
이슬람이 피해만 당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기독교의 이슬람 선교 가능한가? 메카의 이슬람이 평화를 지향한다 하지만, 테러를 일삼는
메디나의 무슬림이 있는 현 상황에서 기독교의 이슬람 선교가 과연 가능할까. 전 박사는
“가능하다”고 했다. “이미 이슬람은 내부적으로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 박사에 따르면
이슬람 내의 지식인, 젊은 학생들은 이미 과격 이슬람으로부터 돌아섰고, 상당수 서구화
되었다. 과격 이슬람들은 이같은 현상이 생기자 자신들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오히려 더 과격해지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어, 이슬람 내부 갈등도 깊어지고 있다.
전호진 박사의 서울대학에서의 강연은 학생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김명옥(경제학 박사과정)씨는 “이슬람에 대해 사실 잘 몰랐다. 오늘을 계기로 크리스천들이
깨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긴장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두 번째 글: 이슬람 전문가들 “평화의 종교? 결국 과격세력이 주도”
테리 로 박사, 조지 사다 장군, 윌리엄 와그너 박사 강연
9·11 이후 국내에서 본격화된 이슬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아프간 피랍사태를 계기로
최고조에 달했다. 이슬람에 대한 각종 정보들이 서적과 언론 보도, 세미나 등을 통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이슬람과 이슬람 문화를 이해하려는 움직임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슬람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얻기에는 이견이 분분하다.
‘평화와 화해의 종교’로 소개되는가 하면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종교’로도 묘사되고 있는
이슬람의 본질에 접근해 이해하기 위한 세미나가 개최됐다.
13일 기독교회관에서는 이슬람과 이스라엘 연구기관인 투아이즈네트워크(회장 전호진 박사)가
주최한 제3회 세미나가 250여 명의 참석자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마쳤다. ‘이슬람의 세계
변화전략’을 주제로 한 이 세미나는 월드 컴패션 회장인 테리 로(Terry Law) 박사와 전 이라크
공군 부참모총장인 조지 사다(George Sada) 장군, 미 남침례교 부총회장이자 올리벳대학
학장인 윌리엄 와그너(William Wagner) 박사 등 이슬람 현장 경험가이면서 선교 전문가들이
강연자로 나섰다.
이들은 자신들이 오랜 기간 직접 경험하고 연구해 온 이슬람 세계와 무슬림들의 실상에 대해
“결국 이슬람 세계는 소수의 과격주의 무슬림들이 주도해 왔다”는 데 의견을 모았으며,
이러한 과격주의자들이 한국에까지 상륙하는 데에 한국교회는 심각성을 느끼고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1부 강연에 나선 테리 로 박사는 이라크와 아프간의 최고 지도자들을 만나 ‘종교의 자유’를
새 헌법에 포함시킨 장본인이다. 로 박사는 이날 “가장 중요한 자유는 종교의 자유”라며
종교를 바꿀 수 있는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에 해당하며, 이슬람 국가에서도 예외 없이
존중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못 박았다.그는 “샤리아(Sharī‘ah, 이슬람의 법)에 따르면 무슬림들은
타종교로 절대 개종할 수 없다”며 “3번의 기회가 주어져도 개종을 고집한다면 가족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슬람 사회에서 개종자를 죽이는 것은 알라에 대한 충성으로 정당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로 박사는 “나는 국가 지도자들을 만나고 서명운동을 벌이며 이러한 샤리아에 기반을 두고
있는 헌법에 인간의 기본권 존중에 대한 조항을 포함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샤리아와 인간의 기본권을 동시에 존중하는 것은 분명 모순이나 실제 이라크와
아프간 헌법에는 모순된 부분이 많다”며 중요한 것은 “이들 국가의 헌법이 분명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부 강연을 맡은 조지 사다 장군은 실력과 성품을 인정 받아 20년간 사담 후세인의 자문
역할을 했으며 현재 로 박사와 함께 이라크의 종교 자유의 보장과 복음 전파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역자다. 이라크의 아시리아 기독교인 출신인 사다 장군은 이날 “평화를 사랑하는
다수의 온건주의 무슬림들이 있지만 사실상 이슬람 역사를 보면 폭력과 힘으로 이들을 통치한
소수의 과격주의 무슬림들이 이들 세계를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라크는 634년까지
기독교 국가였으나 아랍인의 공격으로 이슬람 국가가 된 이후 수백만의 기독교인이 학살되고
학대 받았다고 밝혔다. 아시리아 기독교인의 경우 75만 명이 학살됐으며 350만 명이 박해를
피해 해외로 흩어졌다.
사다 장군은 “바로 1~3년 전만해도 종교 때문에 많은 이들이 참수당했고 10대 어린이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으며 여성들은 강간당했다”며 “과격한 무슬림들은 자신들과 같은
무슬림들도 학살하는 테러리스트의 폭력을 서슴없이 보여 주었다”고 증언했다. 특히 후세인의
독재정권 때는 쿠르드족이 18만2천 명, 시아파가 50만 명이 학살됐고 4천8백여 개 마을이
폐허가 됐다. 또 후세인은 실제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소유하며 위협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사다 장군은 “코란에는 ‘당신의 적과 알라의 적을 위해 가서 테러를 하라’는 구절이 나와 있다”
며 “이는 곧 무슬림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죽여도 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코란의 35개 구절에서 ‘가서 보는 사람마다 죽여라’, 115개 구절에서 ‘박해하고 테러하라’고
한다”며 “13억 무슬림이 모두 과격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종교도 결국 코란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모두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이 땅에
생명과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말하고
“폭력과 전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무슬림들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밖에
고칠 수 없다”고 말했다.
3부 강연에 나선 윌리엄 와그너 박사는 32년 동안 유럽, 중동, 아프리카에서 미 남침례교
선교사로 이슬람 사역을 해 왔으며 10여 년 전부터는 급속도로 팽창하는 이슬람의 선교
전략을 연구해 미국과 유럽 교회에 이를 알리며 경각심을 일으키고 있다. 이날 와그너 박사는
“무슬림들은 2080년까지 전 세계를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치밀하게
추진해나가고 있다”며 “UN 통계도 2050년에는 전 세계 청년의 절반이 무슬림이 될 것으로
발표한 이상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와그너 박사는 “이슬람에서 ‘선교’를 의미하는 ‘다와’(Da’wah)는 아주 천천히 진행되나 매우
성공적이다”고 말했다. 무슬림들은 유학생 선교사를 파견하고 종교연구용 건물을 무상으로
지어 주면서 캠퍼스로 파고드는 것 외에도 수감자나 이민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 접근해
이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또 무슬림들은 ‘지하드’(Jihād)를 따라 이슬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폭력과 살인도 마다하지
않고 있으며 전세계 곳곳에 ‘모스크’(Mosque)를 세우며 이슬람을 확장시켜나가고 있다.
이들은 교회를 사들여 모스크로 바꾸고 유명 성당과 교회보다 더 큰 모스크를 세우면서
정작 파손된 교회 건물을 수리하는 허가증을 내 주지 않기도 한다.
무슬림들은 결혼을 통해서도 많은 여성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고 있다고 와그너 박사는
말했다. “이슬람에서는 아내를 택할 때에는 거짓말을 인정한다”며 “많은 여성들이
‘나는 부자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변화됐다’는 등의 거짓말을 믿고 결혼했다가
무슬림이 되고 만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나이지리아를 비롯해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음성이나 꿈, 환상과 같은
특별한 계시와 병 고침과 같은 기적을 통해 무슬림들의 개종이 이뤄진다”고 밝혔다.
와그너 박사는 한국도 이슬람의 공격적 선교에서 안전지대가 아니라며 “‘가장 좋은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슬림들에게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무슬림들의 공격적
선교에 대응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슬람은 1988년 한국을 2020년까지 이슬람화하여 아시아 이슬람화의 전초기지로 삼는다는
전략을 밝혔으며 이슬람 강의, 봉사활동, 이슬람 관련자료 번역 및 출판, 이슬람 대학 설립 등
의 방식으로 적극적인 선교를 펼치고 있다.
투아이즈네트워크 회장인 전호진 박사는 “이슬람에는 온건성과 폭력성이 공존하지만
다수의 온건주의 무슬림들조차 소수의 과격주의 무슬림들로부터 테러와 납치, 살해를 당하면서
과격주의 무슬림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슬람의 선교를 저지해서는 안되지만 이러한 과격주의 이슬람이 확장되거나
한국에 들어오는 것에는 강력히 맞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세 번째 글:
세계복음주의연맹(WEA, World Evangelical Alliance)의 종교자유위원회(RLC, Religious Liberty
Commission)가 이슬람 극단주의의 원인이 이슬람에 대한 비방(defamation)에 있다고 주장한
최근 유엔인권위원회(UNHRC, 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 보고서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WEA 종교자유위의 수석연구원인 엘리자베스 켄달(Elizabeth Kendal)은 18일 종교자유위
정기기도소식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문제의 핵심은 이슬람에 대한 비방(defamation)이나
이슬람공포증(Islamophobia)에 있는 것이 아니다”며 “오히려 이슬람 독재자들의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한 ‘배교공포증(Apostaphobia)’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고
지적했다. 켄달은 “국제화와 정보 및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전에 의한 개방은 권력의 이동을
가지고 왔고, 이는 세계의 종교 권력자들에게 심각한 ‘배교공포증’을 몰고 왔다”며 “이들의
추종자들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는 주로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수단에 의해서,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강경한 억압이나 부정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문제의 유엔인권위 보고서는 현대 인종주의, 인종차별, 외국인혐오증 등에 관한 유엔 특별
보고자(Special Rapporteur) 두두 디엔(Doudou Diene)에 의해 작성됐다.
디엔은 그의 보고서에서 세계 인권에 관한 규약들이 이슬람공포증에 있어서 재해석되고,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엔은 이슬람공포증이 “이슬람에 대한 근거 없는 적개심과
공포 그리고 그로 인한 무슬림 또는 무슬림 다수에 대한 공포와 혐오”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이슬람에 대한 비방은 이슬람공포증을 초래하게 되며, 이는 무슬림의
권리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져 무슬림들을 극단주의로 몰고 간다.
이에 대해 켄달은 디엔의 보고서에 나타난 일반화(generalization)는 옳지 않다(untrue)고
지적했다. 그녀는 “종교(religion)를 인종(race)과 연관지으려는 시도는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켄달은 디엔의 보고서가 그 시작부터 편견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디엔의 보고서는 민주주의 국가들만을 대상으로 조사하고 있으며
전체주의 국가나 종교 독재 국가의 경우는 다루지 않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어 켄달은 디엔이 지하드(Jihad)나 지하드로 점령한 지역에서 소수 비무슬림 집단을
통치하는 법인 딤밋튜드(Dhimmitude)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이 이슬람공포증의 오래된 예로
십자군을 들고 있다며, 특히 이 부분에서 디엔의 편견이 뚜렷이 드러난다고 했다. 그녀는
“십자군은 사실 제국주의적인 이슬람 지하드에 대한 대반란(counter-insurgencies)이었다”고
밝혔다. 디엔은 그의 보고서에서 “문명과 종교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 and religions)
이론은 냉전시대부터 힘을 얻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이슬람 제국주의, 억압,
테러리즘보다는 오히려 현대의 이슬람공포증을 초래했다고 했다.
디엔의 보고서는 지난달 말 열린 유엔인권위 제6차 회기 때 제출됐다. 켄달은, “세계 인권
조약 개정에 관한 디엔의 발의는 틀림없이 다음 회기 때 논의될 것”이라며 우려했다.
그녀는 또한 이는 세계인권선언(UDHR,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과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 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and
the ICCPR)의 개정을 이끌어 낼 것 같다”고 덧붙였다. 켄달은 마지막으로 “유엔인권위에서
디엔의 발의가 통과된다면 세계 인권의 이슬람화(Islamization)가 시작될 것이다”고 경고했다.
네 번째 글: 유럽, 2025년까지 무슬림 3천만 명 거주 예상.
프랑스 전체 인구 10%가 무슬림, 정치적 영향력도 커져
유럽이 터키, 중동,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이민 온 무슬림들에 의해 급속히 이슬람화되고
있다고 최근 인터콥 뉴스가 전했다. 지난 15년간 유럽으로 넘어 온 무슬림 이민자 수는
두 배로 증가해 약 1천5백만 명이 현재 유럽에 살고 있고, 유엔 조사에 따르면 2025년까지
유럽에 거주하게 될 무슬림 수는 대략 두 배인 3천만 명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
프랑스는 전체 인구 10%가 무슬림이며,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그리스 등은 6~7%가
무슬림이다. 이밖에도 인터콥 뉴스는 유럽에서 무슬림들은 이미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선거에 주요한 변수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주 온 무슬림들은 정착촌을
형성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다섯 번째 글: 기독교와 이슬람 공존 어려운 근본 이유는?
[이만석 칼럼]“이슬람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만 묘사”
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은 세계 주요 종교로 인정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의 주장을 한 발씩 양보하고 서로 공존하며 이해와 협조를 다져 나가면 세상이 훨씬
평화로운 분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두 종교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이슬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주후 100년경 기록된
요한계시록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이유로 어떠한 구절도 더하거나 뺄 수 없도록
해 놓았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무하마드가 주후 622년에 이슬람을 창시할 때 ‘우리가
알라(Allah)라고 부르며, 기독교인들이 믿는 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만일 무하마드가 받은 계시가 정말로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라면
요한계시록 22장 뒤에 코란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둘 중의 하나는
거짓을 말하는 셈이 된다. 한편 히브리서 1장 1~2절에는 하나님께서 옛적에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마지막으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훌륭한 선지자들 중 한 사람으로만 묘사하고 마지막
선지자는 무하마드라고 주장한다. 또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거짓 종교로 교리화해서
가르친다. 왜냐하면 코란 5장 17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신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이미
불신자들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코란 5장 51절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아! 유태교도나 기독교도를 벗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서로 서로가 벗이다.
너희들 속에 그들을 벗으로 하는 자가 있으면, 이 자도 그들과 한 통속이다. 알라께서는
무지막지한 백성을 인도하시지는 않으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하마드는 왜 이토록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미워했을까? 짐작하건데 무력으로
아라비아 반도를 점령하려 했던 무하마드에겐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굴복하지 않은 이들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무하마드가 창조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내용들이 거짓말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신구약 성경을 미리 읽어 본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슬람 초기부터 아라비아 일대에 살고 있는 유대교인
들과 기독교인들은 무참히 학살당하거나 과중한 세금을 감당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교리는 양립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더 예를 들자면 기독교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 즉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했다면
이슬람은 부인을 넷을 얻어도 좋다(코란 4:3)고 하며,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짝을 이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했다면 이슬람은 이혼은 두 번까지 허용(코란 2:229)하는 것이다.
또 기독교가 예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다면 이슬람은 예수의 신성을
믿으면 이미 불신자(코란 5:17)라고 말한다. 이처럼 기독교와 이슬람은 서로 공존하기 어려운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해와 협조를 통해 근본적인 연합을 이루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다.
여섯 번째 글: “번역된 코란은 원문의 혐오 부분을 변형하거나 삭제” (이만석목사)
이슬람교는 코란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면 코란의 본래 의미가 그대로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번역된 코란은 이미 코란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상한 말 같지만 아랍어 외의 언어로 번역된
코란은 코란이 아니라는 이슬람의 견해에 나는 동의한다. 왜냐하면 한국어로 번역된 코란만
보더라도 내용상 코란 원문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코란 원문의
혐오스러운 부분은 심하게 변형하거나 삭제시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코란 4장 34절에는 ‘반항할 우려가 있는 아내에게는 먼저 말로 타이르고 그래도
안 들으면 (여러 부인들 중에서 그녀만) 잠자리에서 제외시키고 그래도 안 들으면 때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용선 박사의 한글 번역본은 이를 ‘반항적으로 되기 쉬운 걱정이 있는 여자는
잘 타이르는 말을 듣는다면 그 이상의 수단을 써서는 안된다’고 번역하고 있다.
이슬람에 대해 자칫 부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는 부분을 감추기 위해 본문 내용이 대폭
삭제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최영길 박사는 때리라는 말을 ‘가볍게 때려 줄 것이니라’고 번역
했다. 이는 내용을 희석하거나 덜 혐오스럽게 하기 위해 ‘가볍게’라는 단어를 추가한 경우다.
이 구절에 대한 이슬람 국제출판국의 번역은 ‘그들을 응징하라’고 번역했다. 때리라는 말과
응징하라는 말은 다른 말이지 않은가.
코란 4장 15절에 보면 ‘간음한 부인이 있으면 죽음이 그를 데리고 갈 때까지 집 안에
가두어 두라’고 했다. 이슬람 국제출판국에서 번역한 코란 4장 16절을 보면 이를 간음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흉악한 잘못의 죄’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주석을 달아 놓기를 ‘간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의미를 확대 적용한 번역이다.
또한 코란 4장 47절에는 ‘성서의 백성들이여 우리가 계시한 것(코란)을 믿으라
이는 너희가 소유하고 있는 것(신구약성경)을 확증하는 것이라. 우리가 얼굴을 지워버리고
그것을 등뒤로 돌려 버리거나 안식일의 사람들(유대인)을 저주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저주하기
전에 그리하라. 알라의 명령은 그대로 수행됨이라’는 구절이 있다.
유명한 이슬람 학자 싸프와트 타프씨르나 마크 가브리엘은 ‘우리가 얼굴을 지워버리고’라는
부분을 ‘코, 눈, 눈썹 등의 감각기관을 완전히 지워버려 마치 등과 같이 되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최용길 번역 코란을 읽어 보면 ‘성서의 백성들이여 알라께서 계시한 것을
믿고 그 이전에 너희와 함께 있었던 것을 확증하라 알라께서는 그들의 명예를 거두고 그들을
후미로 돌렸나니 이는 알라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 자들을 저주했듯 그들을 저주하도다
알라의 명령은 항상 수행되노라’고만 번역해 원문이 말하는 본래의 의미를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도록 해 놓았다.
코란 38장 44절에는 ‘욥이 맹서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푸른 나뭇가지로 100대를
때리는’ 장면이 있다. 이를 최용길 번역 코란에는 ‘자기 아내를’이라는 말을 빼 버리고 ‘푸른
나뭇가지’를 ‘푸른 풀’로 바꾸어 버렸다. 각주의 설명을 보면 ‘욥이 자기 아내를 풀 다발로
100번 때려 그의 병이 낫는다면 그렇게 하기로 맹서했는데’라고 설명하고 있어 대충 분위기를
알 수 있지만 ‘100대를 때린다’는 표현을 ‘100개의 풀로 한 번 때린다’고 달리 설명하고 있다.
코란 52장 20절은 김용선 번역 코란에서 ‘(천국에서) 침상에 기대앉으면 눈이 큰 처녀들이
짝으로 주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최용길 번역 코란에는 많은 ‘처녀들’을 한 사람의 ‘배우자’
로 바꾸어 번역하고 있다. 또한 믿지 않는 자들을 만나면 그들의 ‘목을 치라’는 말을 최영길
번역 코란은 ‘때리라’(최영길 번역 코란 8:12, 47:4)고만 번역해 놓았다.
위의 몇 가지 예에서 알 수 있듯 코란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제공할만한 구절들은 소위 ‘상황화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 우리 문화권에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표현들로 바꾸어지고 삭제됐다. 이러한 문제는 한글 번역 코란 뿐
아니라 외국어 번역 코란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슬람에서도 주장하듯 아랍어로 기록된
코란이 아니면 더 이상 코란이라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곱 번째 글:
투아이즈네트워크 대표 전호진 박사가 구소련의 몰락을 ‘소리 없는 3차 대전’이라고 규정
하면서 앞으로 이슬람 테러와의 전쟁이 4차 대전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전 박사는 14일
사랑의교회 호스피스선교회 강연에서 “공산주의는 21세기에 들어 몰락했지만, 대신 종교적
요소를 포함시킨 공산주의와 같은 이슬람이 고개를 들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전 박사는 이번 강연에서 “이슬람과 공산주의는 반서구화, 반기독교, 반민주주의에서 서로
통한다”며 “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공산주의와 이슬람은 친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고 밝혔다. 이어 전 박사는 “그 증거는 중동국가과 북한과의 관계에 있다”며
“북한은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에서 시리아를 적극 지원했고 현재 이집트, 요르단 등
중동국가와 매우 친밀하다. 현지에 가면 ‘노스 코리아?’라고 물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슬람과 공산주의의 공통점에 대해서도 “이 땅에 유토피아를 세워보자는 것”이라며
“중동의 제3세계 국가들이 기독교와 공산주의를 버리고 대안으로 자신들의 종교대로 이 땅에
천국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 중 유토피아를 만든 사례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이슬람 국가 안의 인권 피해와 테러에 대해 “과격한 화합주의를 이어받은 탈레반은
정권을 잡자마자 여자들을 모두 사회에서 격리시켰다”며 “이슬람은 숫자가 많은 곳마다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태국은 현재 3%가 무슬림인데 남쪽 지방의 천주교회가 테러를 당했고,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등 이슬람 근본주의들이 모여 있는 근방에는 항상 기독교 목회자가
많이 죽었다”고 폭력성을 지적했다. 전 박사는 “지금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전체주의가 나와
우리 시대를 위협하고 있다. 탈레반이 우리나라에도 있다”고 우리나라도 테러 예외 지역이
아님을 경고했다. 전 박사는 “타종교의 선교행위를 막을 권리는 없지만 실체는 알아야 한다.
물론 평민 이슬람과 같이 좋은 이슬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슬람 세계를 주도하는 세력은
5~10%의 과격파란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슬람의 공격적인 선교방식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에 이미 15개의 모스크가 있고 그 외에도
가정 모스크가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며 “한국에 모스크를 세우는 데 항상 사우디 대사,
쿠웨이트 대사, 파키스탄 대사가 참석했다. 이슬람의 선교는 정치가 함께한다”며 전체주의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음을 설명했다.
전 박사는 아프간 사태에서의 왜곡된 국내 여론이 국내 이슬람화의 현상이라고도 밝혀
주목된다. 전 박사는 “외교부에서는 파키스탄에서 카불까지 가는 도로 이동을 조심하라고 했지
아프간 입국 자체를 금지한 적은 없었다”며 “이런 사실이 전혀 보도되지 않은 채 아프간에
간 사실만으로 매도하는 것은 국내 여론 조작의 대표적 사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 박사는 “강도는 뭐라고 하지 않고 간 사람만 책망한다. 의료봉사는 좋은 일인데
그것을 역으로 왜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갔느냐고 비판한다”며 “한국사회가 이상하게
좌익 성향을 보이고 있다. 뭔가 우리 사회가 비정상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보도에 대해서도 “SBS가 교회를 비판할 때 다른 채널에서는
라마단 영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며 “교회를 비판하면서 이슬람은 부각시키는 고도의
언론플레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여덟 번째 글: 이슬람 스스로 극단주의 막는 모습 보여라
탈레반 무장세력에 피랍됐던 한국인들이 무사히 귀국했지만 이번 사태는 9.11 테러 이후
집중 조명받기 시작한 서구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갈등이,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갈등으로 확대돼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약컨대, 한국도 이젠 더 이상
테러로부터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슬람권에서 진행되던 외국인 추방과 납치, 특별히 선교사
폭행과 감금, 살해는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의 2001년 9.11 테러를 시작으로 더욱 적극
적인 형태로 변모되고 있다. 외국에서는 미국과 영국의 심장인 뉴욕과 런던을 연이어 공격하고
인도네시아 등 이슬람 자국 내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납치, 테러를 자행하며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다.
모든 이슬람이 테러세력이라는 말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러나 이슬람권이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들의 테러를 반대하지도 규탄하지도 않는 것과, 오히려 자신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선교에
나서는 것은 참으로 한탄스런 모습이다. 탈레반이 사회봉사를 하러 온 기독교인들을 무차별로
감금, 살해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탈레반 정도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수많은 선교사들을
폭행 추방하면서 자신들은 오히려 전세계에 선교사를 보내고 사원을 짓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독교 선교사들이 자국에서 테러세력에 의해 납치 감금 살해당하는 것을
방관하면서 자신들은 그 선교사들이 파송돼 온 나라에 역으로 선교사를 파송해 그 땅의
선교 자유를 만끽하며 사원을 세우고, 각종 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이슬람은 전세계적으로 지난 50년간 200%나 성장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미국, 영국 등
테러 피해국에서 이슬람이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 미국에는 무슬림 이민자들이 무슬림촌을
만들고 사원을 건립하고 있으며, 영국에서는 교회 건물들이 무슬림 사원으로 팔려 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 23명이 피랍되고 그 중 2명이 살해당한 한국도 비공식적 통계에 따르면,
이슬람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이슬람권으로부터는 ‘한국이야말로 아시아
선교의 기지’라는 말도 들려온다. 문명의 충돌을 예견한 사무엘 헌팅턴은 세계의 주요 문명을
서구 기독교 문명, 이슬람 문명, 유교 문명, 동방 정교 문명, 힌두 문명, 일본 문명, 아프리카
문명, 라틴 아메리카 문명 등 8개로 나눈 바 있다.
그러나 종교를 문명의 기준으로 삼는 그의 해석에 더해 이번 한국인 피랍 사태까지 참작
한다면, 동아시아 유교 문명에 속한 기독교 국가 한국 역시 이번 일을 시작으로 각종 테러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한국은 기독교세가 강한 전형적 기독교 국가다.
한국 기독교가 인식하지 못하는 중에라도 이슬람권은 한국 기독교와의 효과적 대결을 위해서
이번 피랍과 같은 근본주의 테러를 방관할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한국을 이슬람화 하기 위한
다양한 선교전략도 구사해 올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이슬람권을 향해 이슬람을 자처하는
근본주의 테러 세력에 대한 배척과 지원중단을 요구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가 그들에게 선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만큼 그들도 자신의 나라에서 기독교의 선교의 자유를 허용해 달라 요구하며
대화의 창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전세계 이슬람권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이
보호받고 위기관리시스템도 효과적으로 구축해 이번과 같은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또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한국의 이슬람화 운동은 이미 시작됐고 아프간 사태에서 보여
지듯이 이슬람권이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홉 번째 글: 이슬람의 금식 라마단은 어떻게 하나?
9월 13일부터 이슬람의 ‘라마단’(이슬람력으로 9월을 의미)이 시작된다. 이슬람에서는 해마다
이슬람력으로 9월이 되면 한 달간 금식을 해야 한다. 평생 금식이란 것을 해 보지 않은 기독교
인들도 있는데 해마다 한 달간 금식을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런데 라마단 금식은 하루 종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가 있을 동안에만 먹지 않는다.
사람들은 해가 지면 바로 먹기 위해 음식을 준비해 놓고 저녁 기도시간을 알리는 방송을
기다린다. 이 방송 이후에는 먹어도 되는 것이다.
우리가 추석이나 설날을 명절로 지키듯 라마단은 일종의 무슬림들의 축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태양빛이 강렬한 중동에서 낮에 물도 못 마시게 하는 것은 일종의 고문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이 한 달 동안의 금식을 무사히 마치면 어린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는 순수한 상태로 돌아간다고 가르치기에 너도나도 금식에
참여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정부는 이 이슬람의 율법을 온 국민이 철저하게 지키도록 하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국민들이 철저하게 금식을 지키는가를 확인하며, 만일 이를 어기는
사람들에게는 중한 벌을 가한다.
이슬람에서는 술은 마시지 못하도록 규제하지만, 담배는 규제하지 않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엄청나게 많은 담배를 피워댄다. 그러나 라마단 기간에 이슬람 국가들을 방문해 보면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다. 이는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 이슬람 교리에 대한
복종의 의미도 있지만 경찰력이 무서워서 지키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래서 라마단 기간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길거리에서도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라마단 금식을 하는 한 달은 온 국민들이 낮에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식당들도 영업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식당이 음식을 못 팔아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그들은 오히려 금식을 하지 않는 달보다 더 많은 매상을 올리며 즐거워한다.
왜냐하면 많은 무슬림들이 해가 지는 즉시 먹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먹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먹지 못하니 해 뜨기 직전까지 폭식을 하여 종일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에너지를
비축한다.
이란 등 몇몇 이슬람 국가에서는 국민들이 금식 때문에 고생한다 하여 출근 시간을 한 시간
늦춰 주고 퇴근 시간을 한 시간 당겨 준다. 하루에 두 시간이나 단축근무를 하니 금식 기간이
오히려 축제의 기간이 된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초청해서 수 십 명씩
식사를 대접하는데 이것은 라마단 기간에만 볼 수 있는 이슬람 사회의 진풍경이다.
텔레비전에서는 이슬람 성직자가 나와서 금식에 대한 강연을 하고 전화로 질문을 받아 상담을
해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금식이 무효로 선언되면 라마단이 끝난 후에 무효가 된 날 수
만큼을 금식해서 채워야 하는 것이 이슬람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자기가 한 금식이 혹시
무효가 되지 않았나를 알아보기 위해서 질문이 쇄도한다. 필자는 그 내용들이 너무 생소해서
라마단 금식 상담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하곤 했다. 그 질문들 중에는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다.
예를 들면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데(여행자, 환자, 임신부는 금식
대상에서 제외되나 후에 수 일간 금식해야 함) 그 음식 냄새가 코로 들어가면 금식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슬람 성직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냄새는 코로 들어가도 좋지만 그 냄새로 인해 입에 침이 생겨서 그것을 삼킨다면 그날의
금식은 무효다.”방송을 듣다가 이슬람의 금식에 대해서 또 다른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떤 부자가 돈은 많은데 금식을 하기 싫은 경우에는 자신을 위해 대신 금식할 사람을 찾아서
계약서를 쓰고 대가로 일금 얼마를 준다면 과연 합법적인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 성직자는 ‘대리 금식 계약은 합법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돈을 받고 금식을 대신
해야 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금식을 못하게 되었을 때, 부자가 계약 위반을
문제 삼을 경우에는 제3자에게 다시 금식 의무를 양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말하자면 공사를 하청 받은 업자가 다른 업자에게 재하청을 주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 성직자의 대답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단 처음 하청 받은 금액보다
더 작은 금액을 주고 재하청을 주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붙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금식은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때로는 필요할 때도 있다. 성경에도 금식을
말하며 민족적인 금식을 선포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단식과 먹지만
않는 금식이 있다. 그러나 해 있을 경우만 금식하는 경우는 없다. 종교경찰의 단속이 무서워
금식하는 척하는 위선적 금식은 더욱 찾아 볼 수 없다.
북극이나 남극에는 6개월간 낮이고 6개월간 밤인데, 그 곳에서 사는 무슬림은 6개월간
해가 있는 동안은 먹지 못한다면 죽으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금식이 권고사항이
아니라 의무사항이라면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절대로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없다.
무하마드가 만든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아라비아 반도에 사는 아랍 사람들만을 위한 종교라는
말이 맞는 말이다.
열 번째 글: 한국으로 몰려오는 이슬람... 근본주의 실체를 알아야
탈레반 정신적 근원은 가장 폭력적인 ‘사우디 와합주의’
지난 5월 서울대 중동지역 유학생들은 ‘서울대 이슬람선교회’를 결성하고 한국의 이슬람화를
위해 서울대를 근거지로 삼겠다고 밝혔다. 파키스탄과 터키에서 온 이슬람 선교사들은 한 청년
선교단체 간사에게 한국교회와 토론회를 갖고 싶다고 요청하고,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 대학생
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며 이슬람 포교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국이슬람중앙연합회는 이슬람
홍보 책자를 발간하며 이슬람의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는 한편 중동 유학 지원, 모스크 건립,
대형문화행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슬람 전파에 나서고 있다.
무슬림들의 ‘한국 이슬람화’ 노력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아랍의
모 일간지는 “한국인의 종교성에 비추어 볼 때 이 세대에서 가장 적합한 이슬람 선교지는
‘한국’”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한국 이슬람화’의 전략을 이미 세웠다.
더구나 ‘한국 이슬람화’는 ‘아시아 이슬람화’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면서 더욱 적극적인 포교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전세계 이슬람화 추진 중인 무슬림들
=30년간 이슬람 선교현장에서 활동한 선교학자이자 교육자인 윌리엄 와그너 박사(William
Wagner)는 작년 말 방한 때 “무슬림들은 2080년까지 전세계를 이슬람화하기 위해
‘다와’(Da’wah,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한 일체의 행위), ‘지하드’(Jihād), ‘모스크’(Mosque) 등의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무슬림들은 유학생, 교수의 신분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여 캠퍼스에서 포교활동을 하며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곳곳에 모스크를 건립하고 있다. 최소 가족단위의 이민정책, 결혼 및
출산정책 등은 유럽, 미주 등지에서 이슬람의 거주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로써 지난 50년 동안
이슬람은 200%가 넘는 성장을 했다. 현재 전세계에는 13억 무슬림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국내에는 4만 명이 무슬림이며 무슬림 외국인근로자까지 합하면 모두 14만 명이 있다.
이들 중 이슬람을 적극 포교하기 위해 ‘파송된 선교사’가 1만3천 명이라는 말도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는 80명이 무슬림이 되었으며 이 중 71명이 한국인이다.
▽‘선교의 자유’ 맘껏 활용하지만 자신들에겐 적용 거부
=이처럼 해외에서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하는 이슬람은 정작 자신들의 국가 내에서 타 종교의
선교활동은 물론 종교행사, 집회활동까지 제한하고 있다. 인간의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처사다. 더욱이 한국정부가 탈레반 세력과의 인질 협상에서 ‘기독교 선교
중단’에 합의함으로써 국제화 시대 상호주의 원칙에 더욱 어긋나게 되었다. 실제 아프간에서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면 사형 혹은 종신형을 받으며, 기독교 신자를 살해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아프간뿐만이 아니다. 이슬람 국가는 코란에 의해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현장에서
죽이거나 억류할 수 있으며 타 종교로 개종했을 때에도 명예살인이 정당화된다. 이슬람 외
타 종교에 대한 철저한 배격이다. 이슬람-이스라엘 연구단체인 한국투아이즈네트워크 회장
전호진 박사(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이번을 계기로 한국교회 선교의 방법은
전환돼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 선교는 규탄하면서 이슬람 선교는 문제시하지 않는 것은 중대한 모순”이라고
밝혔다. 그는 언론, 정부, 사회가 총체적으로 선교를 비난하고 매도하는 사태를 우려하면서
“사회정의 논리나 인간도덕 원리상 일차적으로 사람을 납치하고 죽이는 세력이 중대한 범죄자
이며 종교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보편적 인권규범을 상황윤리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마치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적 폭력과 비윤리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하면서, 공산주의 국가의 인권억압과 폭력행위에 대해서는 눈감아 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탈레반 정신의 근원은 ‘사우디 와합주의’
=사우디아라비아는 탈레반 태동기에 탈레반을 양성하는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사를 전국에
세우고 사우디의 와하비즘으로 무장한 탈레반들을 길러냈다. 와하비즘은 종교가 정치화된
종교적 전체주의의 모델이다. 독일인 국제정치학자 스테픈 슈발츠는 저서 ‘이슬람의 두 얼굴’
에서 와하비즘을 “볼셰비키나 나치스와 유사한 준 군사적 정치기구를 세워 엘리트들이 부를
독점하고 극단적 억압에 의존하며 피를 흘리기 좋아한다”며 혹평했다.
와하비즘은 1974년에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는 ‘파트와’를 발동,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고 반과학적 사고를 하며, 미술전을 금지하는 등 철학, 예술, 음악을 금하고 있다.
또 기독교와 유대교를 미워할 것을 가르친다.
▽정부의 과격 종교집단과의 협상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정부가 탈레반과 대면협상을 하자 국제 여론의 비난이 거세다. 이는 탈레반이 창설되고
아프간을 장악한 후 어떻게 통치했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탈레반은 단순한 무장세력이
아니라 이슬람 근본주의에 기초해 아프간을 다시 장악하려는 과격 종교집단이다. 지난 6년간
아프간을 통치했으나 가혹행위와 잔학행위, 공포정치를 일삼았다. 그래서 대다수 아프간 주민
들이 탈레반의 재집권을 두려워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수니파 이슬람이 아니면 같은 무슬림이라도 납치했다. 주민들에게는
엄격한 이슬람 관행을 요구했다. 여성들의 교육, 외출, 직업활동 등을 금하고 의무적으로
‘부르카’(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눈 부위만 망사로 된 아프간 여성 의상)를 착용토록 했다.
남성들도 수염을 기르지 않으면 율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또 위성방송, 텔레비전 시청과
인터넷 사용, 비디오, DVD, CD 플레이어 사용을 금지하고 오락행위를 일체 금지시켰다.
‘우상 금지’를 이유로 세계 최대 불상인 바미얀 석불을 로켓포 등으로 파괴하는 극단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탈레반은 미국의 아프간 공습으로 정권을 잃었으나, 2004년 이후 아프간 남부,
동부지역에서 세를 회복하며 폭력 성향이 강화된 ‘네오 탈레반’ 세력으로 등장해 자살 테러와
납치 등을 일삼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는 한국정부가 불법 테러집단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한 것은 탈레반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인근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에서 외국인 납치를
부추길 위험성도 높아졌다.
탈레반도 이번 납치를 성공적으로 평가하며 다른 동맹국에서 똑같은 일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한 이슬람 전문가는 “차라리 교회나 단체가 이번 협상 전면에 나섰어야 한다”며 “이번 일로
반미, 반기독교, 반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이슬람과 반미세력이 결탁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어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슬람도 선교의 자유 허용하도록 해야
=선교 전문가들은 아프간 사태 이후 한국교회는 선교지 교회와 적극 협력하면서 현지 교회 및
전도자 양성을 돕고 비노출 선교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와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관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전호진 박사는 “우리 사회는
종교의 자유와 인권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슬람 국가에 종교의 자유를
촉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이슬람에 대해서도 “종교와 문화의 다원성과 종교적
평화와 공존을 인정하고 ‘이슬람 근본주의 상륙’은 함께 저지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정교분리의 한국 헌법도 존중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투아이즈네트워크는 이번에 이슬람
근본주의의 실체와 이슬람의 포교 전략을 한국교회에 알리기 위해 9월 13일 오후 3시 30분
기독교회관(서울 종로5가 소재)에서 이슬람 문화권의 권위자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개최한다.
세미나에는 유럽에서 30년간 이슬람 선교를 해 온 선교학자이자 교육자인 윌리엄 와그너 박사
(William Wagner, 미국 올리벳대학 학장)가 ‘이슬람의 세계 변화 전략’(How Islam Plans to
Change the World)에 대해 주제강의하며 이라크에서 복음 전도 및 교회 개척을 지원하고
있는 테리 로 박사(Terry Law, 국제 컴패션 회장)와 조지 사다 장군(George Sada, 전 이라크
공군 부참모총장) 등이 함께 초청강사로 나설 예정이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마드의 출현이 신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다는 말이 코란에 나와 있다
(코란26:196).이란의 중서부에는 아와즈(Ahwaz)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차로
약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되었던 수산성이 있다. 수산성의 정문에서
약 1백 미터 정도만 걸어가면 다니엘의 묘지가 있는데 그곳에는 다니엘을 소개하는 글귀를
동판에 큼지막하게 새겨 벽에다 걸어놓았다. 그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다니엘은…무하마드가
태어날 것을 예언한 선지자이며 예수와 함께 재림할 선지자이다”
어디에 근거를 두고 이 글귀를 쓴 것일까. 왜 다니엘의 이름을 빌려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다니엘을 소개하는 한 장짜리 인쇄물을 주었다.
읽어 보니 성경의 다니엘서 12장에서 다니엘이 무하마드가 출생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읽어 보았다. 아무리 봐도 무하마드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데,
다른 책자에서 다니엘서 12장 3절이 바로 그 예언이라고 말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이것이 무하마드의 탄생을 예언한 구절이라는 주장이었다.
또 무슬림들이 무하마드의 탄생이 예언되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여기서 보혜사는 헬라어 원문에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라고 되어 있다. 그것을 무슬림
학자들은 ‘페리클레토스’(‘빛나는, 칭찬받는’의 뜻)라고 주장한다. ‘무하마드’라는 이름은
‘아하마드’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빛나는 자, 칭찬받는 자’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다니엘서에 나오는 ‘별처럼 빛난다’는 구절이 무하마드의 등장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구약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신18:15)라고 한 말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는 것이며 곧 무하마드의 출현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세는 전쟁을 했던 사람으로 무하마드 역시 전쟁을 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는 전쟁을 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무하마드의 탄생을 예언하는 구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무슬림들은 무하마드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이 많이 있었는데,
기독교인들이 성경구절을 바꿔버리고 일부러 없애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찾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유대인들)은 말씀을 변조하고 그들에게 전해진 말씀의 상당 부분을 없애
버렸다”(코란5:13) 그러나 정반대의 구절이 코란에 있다. “그 분은 그대에게 이전의 확증으로서
진실이 들어 있는 성전(聖典: 신구약성경)을 내려 주었고 전에도 그분은 율법과 복음을
내리셨다”(코란3:3, 코란6:92, 코란10:37) 여기서는 율법과 복음(신구약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코란을 내려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코란에 대해 의심이 생기면 성경을 읽어 본
사람에게 물어보라는 구절도 있다. (코란10:94)
처음 성경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핍박 받고 있을 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추종자로 끌어들이려는 유인책이었던 것 같다. 그 때 그들은 무하마드가 계시를
받았다는 내용을 듣고 다른 영의 계시로 분별하고 믿기를 거부했다. 당시 무하마드는 그들을
응징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메디나로 이동해서 통치자로서 힘이 생기자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가진 성경말씀이 변질되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결국 무하마드는 신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신구약성경에서 자신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성경이 변질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모순에 빠진 것을 증명하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
열 한 번째 글: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 알고 보면 달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영을 분별하는 것이다. 진리의 영을 분별하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사단을 위한 열심이 될 수 있다. 자기 생각에는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 열심 때문에 노하시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사무엘하 6장에
다윗이 임금이 되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 법궤의 운반 책임자였던 웃사의
경우다. 소들이 뛰놀아 법궤가 흔들리자 웃사는 자신의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손으로
법궤를 붙잡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웃사를 그 자리에서 죽게 하셨다. 상식적으로 보면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성물은 고핫 자손이 메어 운반하게 되어
있는데 소들이 끄는 수레로 운반한 것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만지면 죽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민수기 4장15절).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법궤가 수레 위에서 상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있나?’ 웃사는 진리의
말씀을 떠나 자신의 열심으로 법궤를 붙들었다가 결국 죽음을 당했다. 진리의 분별력이 없으면
이렇게 열심히 일한 것으로 큰 벌을 받는 수가 있다.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의 상식과 이성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명령을 내리실 때가 있으며, 사단도 때로는 광명의 천사처럼 그럴듯한 명령을 내려 성도들을
넘어지게 하는 경우를 성경에서 종종 보게 된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실 때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This shall never happen to you!)”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영어 문법상 이 문장은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자기가
막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간적으로 생각하셨다면 ‘나를 이토록 생각해주니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라고 말씀하셔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마태복음 16장23절)라며 심하게 꾸짖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당시 인류를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를 가로막는 것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인류 구원의 길을 차단하려는 사단의 작전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진리의 영을 분별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첫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은 성령님이시고
이를 부인하는 것은 악한 영이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둘째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다.(요한일서 4장 1절)
이를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부인하기 위한 교묘한 사단의 전술이다.
셋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
이라’(요한일서 4장 7절)라고 했다.
성령은 불신자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누가복음 6장 27절)이 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이 세 가지 정도만 확인하면 진리의 영인지 악한 영인지 확실하게 구별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코란은 어떨까. 위의 세 가지 기준으로 우리는 성령의 계시인지 다른 영의
계시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첫째로 코란을 계시한 영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들은 마리얌의 아들 예수를
주로 숭배하고 있으나 알라 외에는 경배하지 말라,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코란 9장 30~31절)
고 한다.
둘째로 코란을 계시한 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길 ‘우리가 알라의 사도 마리얌의 아들 예수를 죽였노라 하였으니 실로 그들은 예수를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박지 못하였으나 다만 예수가 못박힌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며 이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분명 그것에 대한 의혹의 상태에 있고 그들은 그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다만 추측을 따를 뿐이다’(코란 4장 157절)라고 한다.
셋째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성령의 계시와는 달리 코란을 계시한 영은 ‘이슬람을 믿지 않는
자들은 발견되는 대로 죽이라’(코란 9장 5절), ‘만일 그들이 너희로부터 물러서지 아니하고
또 평화를 제안하지 아니할 때는 너희가 어디서 그들을 발견하던 그들을 포획하여 살해하라.
이는 알라께서 너희를 위해 그 권한을 부여하였노라’(코란 4장 91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코란에는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을 무지한 백성(불신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믿는
자(무슬림)들아, 유대교도나 그리스도교도를 벗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서로서로가 벗이다.
너희들 속에 그들을 벗으로 하는 자가 있으면 이 자도 그들과 한 통속이다. 알라께서는
무지막지한 백성을 인도하시지는 않으신다’(코란 5장 51절)라고 한다. 이 정도면 알라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른 신이라는 충분한 증거다.
참되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이슬람의 알라와 같은 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속히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슬람
영의 정체를 알아 이에 사로잡힌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열 두 번째 글: 기독교와 이슬람의 평화공존은 가능한가
투아이즈네트워크, 양 종교간 이해와 평화 모색
“시리아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오래 전부터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해 왔으며, 현재도 1천1백만
의 무슬림들과 3백만의 기독교인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시리아의 전 박물관을 총괄하는
아흐마드 세리 박사(다마스커스 국립박물관장)는 시리아에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은
“우리 모두가 마치 하늘과 땅을 공유하는 것처럼 공존해 온 역사였다”고 밝히고 수니파 무슬림
으로서 바라보는 기독교와 이슬람에 대해 소개했다.
최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투아이즈네트워크(회장 전호진 박사) 세미나에서 그는
“4세기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6세기 무하마드에 의해 이슬람이 등장한 후 시리아에는
기독교 문명, 이슬람 문명, 아랍 문명이 상호관계 속에서 공존해 왔다”며 “코란의 언어이기도
한 아랍어로 성경이 번역되는가 하면, 무려 10명의 교황을 배출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교황의 무덤이 모스크 안에 있는 사례도 소개했다. 지금의 시리아는 이슬람 세력이 강한
비종교 국가(1973년 전까지는 국교가 이슬람교)이지만 과거 사도 바울의 활동 무대였으며,
한때 기독교가 크게 번성하기도 했다.
따라서 시리아에는 성경의 역사와 직접 관련된 교회 유적지와 유물이 풍부하다. 현재 전 세계
에서 온 134개의 고고학 연구팀이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시리아 정부에서도 내년
3월까지 주요 기독교 유적지들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시키려고 1천만 유로(약 126억
원)를 투자했다. 현재 비잔틴시대의 주요 건물과 교회 복원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세리 박사는
“평화를 사랑하는 진정한 무슬림들은 과격하고 급진적이며 모든 종교가 공존하는 것을 인정
하지 않는 급진주의자들을 무슬림이라 생각지 않는다”라며 “이들은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에
타격을 입히는 세력”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시리아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한 인식이 좋으며 차별 사례도 적다고 설명했다. 2천여 명의
국회의원 중 2백여 명, 20여 명의 장관 중 5명이 기독교인이다 보니 기독교인이 요직을
차지한다며 시기하는 무슬림들도 있다고 말했다. 시리아 52개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이들도
절반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인구의 19%인 기독교인들은 힘을 결속하며 사회에서 받는
차별을 최소화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들이 시리아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표했다. “시리아 교회의 전도 행위는 얼마든지 받아들여지며,
최근 24개 교회가 함께 신학강의를 갖고 전도 열의를 다지기도 했다”며 “2백여 개 시리아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이 이미 자유롭게 활동하는데, 외부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 사역을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전호진 박사는 이날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는 시리아 기독교인들과 달리 활동에 제약을 받는
외국인 선교사들은 교회 내에서 현지인 성도들을 굳건히 세우며, 이들로 하여금 자국인을
선교하도록 돕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열 세 번째 글: 이슬람 “2020년까지 한국 이슬람화”... 기독교 대응은?
20세기 후반 무슬림들은 2080년까지 전 세계를 이슬람화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들은 우선
유럽을 이슬람화하기 위해 영국을 전진기지로 삼았으며, 이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현재 런던은 극단주의 무슬림들의 요충지가 되었으며, 영국에는 120만 명 이상의 무슬림들이
거주한다. 그리고 유럽의 무슬림들은 빠른 속도로 증가해 왔다. 이제 무슬림들은 아시아를
이슬람화하기 위해 한국을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공격적인 선교를 펼치고 있다.
이슬람 전문가인 전호진 박사(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이스라엘(Israel)과 이슬람
(Islam)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와 접근을 논의하는 ‘투아이즈네트워크’(Two I’s Network)의
창립을 앞두고 15일 기자회견에서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슬람 선교운동에 관해 한국
기독교계의 적극적인 관심과 대응을 요청했다. 전 박사에 따르면,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이미 중동 I 국가의 한 언론은 무슬림들이 한국을 이슬람화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한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이 전략은 2005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중동 이슬람 지도자 선교대회에서
한국을 2020년까지 이슬람국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으로 구체화됐다. 문화교류, 경제협력 등을
이유로 작년 1월 서울에서 열린 OPEC종교부 장관회의나 9월 ‘중동·이슬람문화풍물대전’,
11월 제4차 한·중동포럼 등에서는 직간접적으로 이슬람 포교와 관련된 내용이 함께 언급됐다
고 전 박사는 주장했다. “이와 같은 국내 이슬람 관련 행사들은 중동에서는 크게 보도되지만,
한국에서는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며 “더구나 이런 행사가 우리나라 정부나 대기업의
협력과 지원을 받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덧붙여 말했다.
전 박사는 이슬람이 일부 사람들이나 언론 등에 의해 ‘평화의 종교’로 가장되거나 하나의 문화
로써 일반인들에게 소개되는 점 역시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대학생들을 타깃으로
펼치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슬람은 아랍어를 제2외국어로 채택하는
운동을 벌이며 아랍어과 학생들에게 장학금 혜택을 주거나 중동으로 유학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중동에 소재한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으려면 유학생들은 십중팔구 코란을 읽고
이슬람으로 개종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전략적으로 한국 여성이나 농어촌 총각과 결혼해 자녀를 무슬림화 한다든지, 중동에
있는 한국인 근로자나 자이툰 부대원을 대상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하기도 한다. 무슬림들은
교회에도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외국인근로자교회의 사역자들을 이슬람 행사에 초청하고
국내 일부 대형교회 앞에 사무실을 열어 교회활동을 모니터링하는 것이 그 예다. 국내 무슬림
외국인 근로자들에 의해서는 부평에 모스크가 건립됐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지원으로
한국어 코란은 재번역 됐다.
전 박사는 “이슬람의 선교전략을 한국교회에 알릴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종교 인권 탄압을
고발해 이슬람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며 “이러한 역할을 투아이즈네트워크가 앞으로 감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투아이즈네트워크는 3월 29일 오후 5시 30분부터 서울 역삼동 한국상담
선교연구원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은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첫 세미나를
연다. 이날 강의는 이스라엘 전문가 모리모토 유쪼 박사(일본 나사렛신학교 졸, 히브리대학교
및 대학원, 예루살렘대학교를 졸, 현 동경 나사렛신학교 교수, 나사렛교회 목사)가 맡는다.
투아이즈네트워크 창립 멤버인 김남식 박사는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이나
이슬람의 제국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바탕에 깐 후에 종교 인권 탄압 문제를 다루며
선교적 대응을 해야 한다”며 ‘투아이즈 세미나’ 등을 통해 이스라엘 및 이슬람을 바르게
이해하는 구체적인 이론적 근거 등을 제시할 계획을 알렸다.
열 네 번째 글: 윌리엄 와그너 박사 “이슬람 확장에 경각심 가져야”
‘다와’, ‘지하드’, ‘모스크’는 이슬람의 주요 선교 전략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급속히 성장하는 종교는 이슬람입니다. 지난 30년간 이 이슬람에 대해
연구하고, 또 무슬림들과 함께 일하면서 알게 된 것은 이슬람이 세상을 정복하는 데 아주 매력
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슬림들은 ‘2080년까지 전 세계가 이슬람화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려는 무슬림들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
하려면 무슬림의 전략을 알고, 적절한 대응법을 찾아야 합니다.”이슬람 선교현장에서 30년간
활동한 현장사역 전문가이자 선교학자, 교육자인 윌리엄 와그너 박사(William Wagner)가
자신의 저서 ‘이슬람의 세계 지배 전략’(How Islam Plans to Change the World)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방한했다.
와그너 박사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세계 정복을 위한 무슬림의 전략을 ‘다와’(Da'wah),
‘지하드’(Jihād), ‘모스크’(Mosque) 등 3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고 소개하고, 한국교회가 이슬람의
확장에 더욱 경각심을 갖고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슬람교에는 기독교의 ‘선교’와 마찬가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믿도록 노력하는
일체의 행위’를 뜻하는 ‘다와’가 있다.
와그너 박사는 이슬람의 선교 전략 중 첫 번째로 ‘다와’를 꼽았다. 그는 “무슬림 선교사들은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슬람 교리를 전파한다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적극적이고
집요하게 ‘다와’를 한다”며 “이는 전세계에서 상당한 효과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현재 미국인 선교사가 이슬람 선교현장에서 사역하는 수보다 무슬림 선교사가 미국에서
사역하는 수가 더 많은 실정이라고 말했다.
와그너 박사에 의하면 무슬림 선교사 다는 유학생이나 교수의 신분으로 해외에 파견돼 캠퍼스
에서 이슬람을 포교하고 있다. 실례로 아프리카의 한 국가에서 대학 교수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집트 이슬람계는 교수들의 임금까지 부담해가며 무슬림 교수 40명을 파견했다.
물론 무슬림 교수들은 수업 이외에 따로 시간을 내서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에게 이슬람
교리를 전파하게 된다.
와그너 박사는 “이 같은 형태의 캠퍼스 선교는 기독교 국가에서 크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현지의 해외 유학생들을 이슬람교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외에 무슬림
선교사들은 감옥의 죄수나 이민자 등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와그너 박사가 지목한 무슬림들의 선교 전략은 ‘지하드’다. 이는 곧 이슬람을 전파하고
수호하기 위해 마음이나 펜(논설), 지배의 방법뿐만 아니라 검(무력)을 사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슬람 최고 경전인 코란은 지하드를 모든 무슬림의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와그너 박사는 “무슬림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지하드를 이용하지만,
이슬람 교세가 적은 국가에서는 전략적인 차원에서 지하드를 언급하진 않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무슬림 선교 전략은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를 전세계 세우는 것이다. 와그너
박사는 “이슬람 국가들은 자국 내에 기독교 교회당을 짓는 것을 금지하면서 다른 국가에는
계속해서 모스크를 세우고 있다”며 “사우디아라비아는 매일 1억5천만 달러 상당의 돈을
모스크 건립에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무슬림들은 정치적 상황이나 이민정책, 미디어를 통해 포교활동을 하는데, 특히 이민
정책은 유럽이나 미주 등지에서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무슬림들의 이민은 개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최소 가족이나 친척 단위로 이뤄진다. 무슬림들은 특정 지역에 모여
살면서 그 지역의 땅 값을 떨어뜨린 뒤, 땅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거주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 같은 방식으로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미국에서 첫 번째로 갖고 싶어 한 미시간주를
손에 넣었다. 현재 미시간주에 거주하는 인구의 50%가 무슬림이며, 특히 포드자동차가 탄생한
디어본은 인구의 90% 가까이가 무슬림이 되었다.
와그너 박사는 “이처럼 이슬람이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하면 할수록 기독교에서도 활발하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한국교회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서라도 이슬람 선교
현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도전적이고 헌신적인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해 낼 수 있기를 희망
했다. 윌리엄 와그너 박사는 미국 남침례교 해외선교위원회에서 30여년 전 선교사로 파송돼
유럽, 중동, 아프리카에서 무슬림들을 섬겼으며, 골든게이트침례신학교 선교학 교수,
미국 남침례교(SBC) 부총회장, 유럽 침례교연합 ‘Muslim Awareness Committee’ 의장을
역임했고 현재
열 다섯 번째 글: 한국 안으로의 이슬람 침투 전략 (이만석 목사)
들어가는 말
1955년, 한국에 이슬람이 들어온 것은 6.25 동란 때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던 연합군에 합류해
한국 땅을 밟은 터키 군대에 의해서였다. 이슬람이 한국 땅에 발을 붙인 지 벌써 50년이
넘었다. 이슬람 쪽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에 무슬림 숫자가 2005년 말 현재 15만 명이라고
한다. 그들은 한국을 무슬림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서울 한남동에 있는 이슬람 중앙 성원을 비롯해서 부산, 전주, 인천, 광주, 안양, 파주,
부평, 등지에 대규모 성원을 건축하고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4개의 이슬람 센터와
50여개의 이슬람 예배처소가 있다. 이들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계속 늘어나게
될 것이다. 한국에는 이슬람 성원의 통계를 보면 2005년 말 현재 국내외 무슬림 15만 명이
활동하고 있다고 하며 이슬람권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아 온 한국 무슬림 박사들이
23명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정부는 일체 종교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대부분 엄청난 석유를 생산해 내는 중동의
이슬람국가들에게 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때는 한국 이슬람 중앙 성원을
짓는데 한남동의 시유지 1,500평을 희사했다. 그리고 잠시 대통령직을 감당했던 최규하
대통령은 80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를 공식 방문했을 때 한국에 이슬람 대학을 건립하는데
적극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2개월 뒤 한국 정부의 이름으로 용인에 있는 국유지
43만 평방미터(약 13만평)를 이슬람 대학 부지로 헌납했다. 한국의 이슬람은 규모는 작지만
산유국들의 막강한 외교력을 배경으로 다른 종교에서는 꿈도 못 꾸는 일들인 국유지를
무료로 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의 선교전략
아랍어 강좌 국제화 시대에 외국어 교육 붐이 일고 있는 한국의 현상을 잘 이용하여
산유국들의 장점을 선전하며 아랍어를 가르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데
아랍어는 코란의 언어이기 때문에 아랍어를 배우려면 자연히 이슬람 강의를 들어야 한다.
배우는 사람들은 선생과 제자사이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선교전략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래서 2002년부터 중고등학교에서 아랍어를 제 2 외국어로 선택 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
교육법이 바뀌었다. 물론 이 법을 제정하기 위해서 무슬림들이 얼마나 노력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바이다.
지금은 아랍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슬림 남성들이 한국
여성들과 결혼해서 자녀들을 낳으면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중고등학교에 진학 할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한국의 교육법에 주어진 혜택을
누리게 해 달라며 강력하게 아랍어 선생 채용을 주장할 것이다.
언론사와 매스컴 이용
이들은 매스컴의 힘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언론사 종교 담당 기자단을 초청하여 특별 강연을
2006년 한국 이슬람 선교위원회 사업계획으로 잡았다. 또한 이들은 2004년에 한국의 교육방송
(EBS)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이슬람 13부작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이슬람국가 15개국을
순회하면서 촬영 편집한 동영상을 13회에 걸쳐 방송 했다.
이것은 국가의 국민의 교육세를 받아 운영하는 공영방송을 이용하여 이슬람이라는 특정
종교를 홍보하는 멋진 작품이었다. 나는 그 13편의 동영상을 다 보았다. 그것은 완벽한 이슬람
홍보용 자료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작품들을 편집하고 제작하는데 한양대학교 문화 인류학
교수인 이희수 씨가 감수했다. 그는 한국에 이슬람을 선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조선일보 기자와 인터뷰할 때 선언한 사람이다.
이 이슬람 13부작은 2005년에 방송 프로듀서 작품상을 받았다.
사회와 역사를 가르치는 중 고등학교 교사들을 초청하여 이슬람을 교육함
1989년 9월 제1회 이슬람 역사 바로 잡기의 일환으로 서울 지역 중 고교 역사 담당 교사들을
초청하여 이슬람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해마다 1-2회씩 이러한 행사들을 하고 있다.
2006년에도 두 번 중고교 교사들을 초청하여 이슬람 강연회를 가졌으며 8월 2일에는 이화여대
부설 중등교육원 공통사회 부전공 연수교사 37명이 서울 이슬람 중앙 성원을 방문하여 황의갑
박사(한국이슬람교 중앙회 사무총장)의 ‘이슬람 문화 이해’라는 주제 강의를 1시간여에 걸쳐
듣고 질의응답시간을 갖는 등 이슬람 문화 이해를 돕기 위한 자리를 가졌다.
주한 이슬람 공관장 자문 위원회
1998년 4월 27일 주한 이슬람 공관장 자문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는 한국에 있는 이슬람
국가의 대사들로 구성되는 모임인데 한국에서 어떻게 하면 이슬람을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하고 공관장으로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의논하여 한국의 이슬람화를 지원하는 모임이다.
한국을 이렇게 이슬람화 할 것이다.
2005년도에 발간된 한국 이슬람 연맹에서 출판한 한국이슬람 50년사에 이들이 발표한
미래의 선교계획이라는 부분을 보면 아래와 같은 선교 전략을 가지고 있다.
1)마스지드 건립
이슬람 사원을 아랍어로 마스지드라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서울 중앙 성원을 비롯해 9개의
이슬람 성원이 있으며 4개의 이슬람 센터와 50여개의 임시 예배소가 있고 국내외 약 15만
명의 무슬림들이 예배와 종교적 의무를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이슬람 센터와
예배처소를 점차적으로 확대 개편해 내년 늘어나고 있는 무슬림들을 위한 새로운 성원의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2)국제 이슬람 학교 설립
무슬림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한 교육시설이라는 명목으로 영어로 가르치는 초등학교 유치원
및 어린이집을 만들어 어려서부터 이슬람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오일 달러를 받아서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다른 유치원들의 거의
절반 값으로 이런 학교들을 운영한다면 많은 한국인 엄마들이 자녀들을 그 곳으로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3) 이슬람 문화센터 건립
이슬람 문화센터를 다와센터(Da’wah Center)라고 부른다. 이는 선교센터라는 말이다.
한국 이슬람 전래 반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이슬람 종교 사회
문화를 알리고 교류할 선교 및 문화 공간을 가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이슬람 문화
센터를 서울에 개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는 많은 이슬람국가들의 언어교육부터
시작하여 상설 이슬람 교리강좌 등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 이슬람을 뿌리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
4) 꾸란 번역 위원회
지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꾸란들의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여 이해가 어렵고 내용상의
오류가 많은 것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새로운 꾸란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서 매주 토요일에
꾸란 번역위원들의 정기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비정기적으로 연구 토론 모임을 가지고 있다.
5) 이슬람 대학 건립
1970년대 말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사업이다. 1977년에 쿠웨이트 사업가 쉐이크 압둘라 알리
알무타와가 한국 이슬람 중앙회를 방문하여 제안한 이슬람 대학 설립 계획은 1980년 7월
최규하 대통령이 이슬람 대학부지 43만 평방미터를 기증함으로 구체화 되어 지금 추진 중에
있다. 아마 이 대학이 건립되면 완공식에 이슬람국가 원수들 혹은 장관들이나 왕자들이
참석하여 각종 특혜와 전액 장학금, 진학에 따른 학위 보장 및 취업보장들을 약속할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머리 좋은 수재들이 밀려들어갈 것이다. 한국 이슬람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고급 무슬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며 이들은 삽시간에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들을 장악하게 될 것이 예상 된다.
6) 이슬람 관련 서적 출판 위원회
지금까지 많은 이슬람 서적들이 나와 있다. 이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책들과
인쇄물들을 만들어 홍보하고자 한다. 그들이 이렇게 문서 선교에 힘쓰는 이유는 한국에는
문맹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자료들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면
누구든지 읽어서 스스로 터득한다는 것이다.
7) 한국 여성들과 결혼 및 출산 전략
이슬람권에서 한국에 근로자로 들어 온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불법체류자들이 많은데
이들이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 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방법이다. 한국 정부는 아내가 한국인이고 남편이 외국인이면 남편에게 체류허가를
발급해 준다. 그동안 불법체류를 한 사람일지라도 합법 체류자의 자격을 얻게 된다.
무슬림권의 결혼제도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일부 다처제도이다. 그래서 자기 나라에서 결혼을
하고 가족들이 있는 사람도 체류자격을 얻기 위해서 또 한 사람의 부인을 얻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하면 많은 자녀들을 낳아서 무슬림들의 숫자를 늘려가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느린 방법인 것 같지만 이미 유럽은 이 방법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중동 전문가 버나드 루이스 교수는 “이번 세기가 끝날 때면 유럽에선
무슬림이 비(非)무슬림을 추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에서는 국민의 10% 정도인 600만
명의 무슬림이 있지만 신생아 4명 중의 한명은 무슬림 자녀라고 하니 25%의 신생아들이
무슬림이라는 말이다. 이대로 가면 유럽의 무슬림 숫자는 2025년에 이르면 지금의 두 배가
될 것이며 독일은 이대로 가면 2041년에 무슬림 인구가 독일 원주민들 숫자를 추월할
것이라고 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 출산 전략은 무서운 것이다.
→ 그래서 지금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女와 결혼함으로 인하여 한국을
무슬림화하기 위한 전략중의 하나이다.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는 무슬림애 의하여 여러 가지
아주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무슬림 이민규제를 서서히 진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대만과 일본에서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외국인 노동자를 아예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일본과 대만에선 외국인 노동자가 자국여성과 사귀면 그 외국인
노동자를 바로 붙잡아다가 추방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이 까페에서도 밝혔듯이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여성과 결혼비율이
선진국 남성과의 결혼비율을 제외하고 단연 선두를 달린다. 그런데 한국여성도 그들의 전략을
경계하기는커녕 그들의 전략에 말려들고 있으며, 앞으로 한국에서도 10여년이 지나면
무슬림들에 의하여 무수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맺는 말
1988년 한국의 올림픽이 끝났을 때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기자가 귀국해서 쓴 칼럼에 한국은
차기 이슬람 국가가 될 것이다. 한국을 이슬람화 하면 동남아와 극동을 이슬람화 하기에 쉬울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즉시 전략적으로 연결되었고 한국은 이슬람에 대해서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데 이들은 한국을 이슬람 국가로 만들고자 차근차근 전략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깨어 경성하여 대비하지 않으면 한국은 이슬람 국가가 되기에 적합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나라로 그들의 집중 공격을 받을 것이다.
우선 한국의 정부는 다른 모든 종교보다 이슬람에 특혜를 주고 있다. 어떤 이슬람 국가에도
선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가 없는데 한국에는 완벽한 종교의 자유가 있다.
아무도 이슬람의 선교를 방해할 자가 없다.
그리고 한국 국민들은 범사에 종교성이 많아서 어떤 종교도 쉽게 발을 붙일 수가 있다.
특히 이슬람에서는 자녀 교육문제를 파고들어 교육법을 바꾸어 놓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
편찬위원회에 이슬람 박사를 집어넣어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이슬람에 대한 혐오스런
부분들을 모두 바꾸어 놓았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준비가 완료된 상태라는 말이다.
이제 이슬람 대학이 건립되면 본격적으로 드러내 놓고 공격적 선교로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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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혼은 이 글을 읽고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하여간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은 모두가 도찐개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을 항상 이분법적으로 나누려고만 한다.
<친구 아니면 적>
입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지 실질적으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개신교들이나 상기와 같은 오로지 무슬림화를 위하여 지하드을 외치는 이슬람교나
소름이 끼치는 종교라는 것이 서글프다.
빙혼교처럼 타인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인정하는 그런 종교가 참종교이지
<친구가 아니면 적>이라고 몰아붙이는 그런 종교는 지구상에서 빨리 사라져야만 할 것이다.
내가 믿는 신만이 유일신이고 다른 사람이 믿는 신은 미신이라는 사상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이 세상 사람들은 영원히 전쟁과 죽음의 고통 속에서 헤매다가 죽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