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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교파사 스크랩 통합측과 분열의 50주년 기념 포럼(2)
한아름 추천 0 조회 53 12.08.15 15: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통합측과 분열의 50주년 기념 포럼(2)| 신학 자료실
쉐퍼 | 조회 3 | 09.09.05 15:10 http://cafe.daum.net/CPI2002/5lnD/283
 
 

통합측과 분열의 50주년 기념 포럼(2)
합동 ? 통합 분열, 그 이후 (1961년 ~2000년대)
 
리폼드뉴스
총회임원회(총회장 최병남 목사)는 통합측과 분열된지 50주년이 되는 금년 제94회 총회를 맞이하면서 분열의 역사적 평가와 연합를 위해서 총회역사홍보위원회(위원장:강자현 장로)의 주관으로 "한국장로교단 분열과 연합 50년 평가와 전망"이라는 주제의 포럼이 지난 9월 1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 캠퍼스에서 진행됐다. 1944년 통합측과의 분열은 통합측에서 말한 것처럼 박형룡 박사의 3천만환 사건이 분열의 핵심 원인이 아니며, 오히려 WCC에 대한 신학적 문제가 가장 큰 분열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은 통합측의 역사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인식과 해석의 차이였다.
 
▲ 한국장로교단 분열과 연합 50년 평가와 전망   ? 리폼드뉴스

 
 
 
 
 
 
 
 
 
 
 
 
 
 
 
 
 
 
 
 
 

본 포럼은 예장 합동교단의 신학적,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고귀한 가치를 개혁신학이라는 큰 틀속에서 찾아야 하며, 이러한 가치는 오늘날 합동교단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본 교단의 이러한 신학적 인식과 해석의 원리는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이러한 신학적 입장하에서 타교단과 연합이 모색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본 교단의 신학적 입장과 다른 교단과의 연합은 늘 한계가 있음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번 포럼에서 박용규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는 "1959년 합동 통합 분열과정과 요인"에 관한 주제 강의가 있었다. 그동안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늘 합동측과 통합측과의 분열을 지나치리만큼  박형룡 교수의 3000만환 사건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합동측에서 적극적으로, 학문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 속에서 이번 포럼에서 발표한 박용규 교수의 당시 분열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합동측 입장에서 볼 때 객관적인 분석과 평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인섭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는 "합동 통합 분열, 그 이후(1961년~2000년대)"라는 발표에서 1959년 분열은 신학적 문제로 인한 분열이라고 전제한뒤 분열에 대한 객관적 정리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안 교수는 타교단과의 연합에 앞서 본 교단이 추구하는 신학적 방법론이 먼저 정리되어야고 그 신학적 방방론을 통해서 연합이 모색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특히 합동측과 통합측이 정치적 연합보다 "칼빈의 방법론에서 배워, 공동의 신학적 유산을 찾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므로써 신학적인 시각이 하나되지 못할 경우 연합의 행위가 아무리 명분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연합은 진정한 연합이 될 수 없다는 취지의 강의는 적절했으며, 특히 분열 당시 통합측에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교세가 미약하게 출발했지만 지금은 통합측 보다 부흥하고 성장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합동측은 개혁주의적 신학적 전통을 금과옥조와 같이 존중하고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라고 강조하면서 본 교단인 합동 교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음은 안인섭 교수가 발표한 논문의 전체 내용인 전문을 게재한다. 논문에는 관련 주는 파란 글씨로 표기했다.  

 
I.들어가는 글

▲ 안인섭 교수     ? 리폼드뉴스
1959은 한국의 장로교회에서 합동과 통합이 분리된 해이다. 공교롭게도 양 교단이 분열한 이 해는 칼빈이 태어난 지 45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였다. 분열 이후 50년의 역사가 지나가는 동안, 양 교단은 각각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양 교단은 분열이라고 하는 과거 역사에 대한 정직하고 성실한 평가가 미흡했으며, 또 그럴 의지도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교단 분열 50주년을 맞아, 과거 반백 년의 역사를 회고하여 새로운 미래를 모색 하는 작업은 매우 시의 적절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합동과 통합이 분리된 이후, 특히 합동 측의 발전 과정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합동 교단은 WCC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외국의 선교적 지원이 열악한 상태에서 스스로의 부흥과 성숙을 도모해야 했던 상황에서 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합동 교단은 실제적인 규모로 보나 시대적인 기대치로 보나, 21세기 세계 장로교회를 앞장 서서 섬겨야 할 소명 앞에 서 있다.

필자에게 주어진 부분은 1959년 합동과 통합이 분열된 이후 1961년부터 합동 교단의 성장과 발전을 교회사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포럼의 취지에 맞추어, 통합 측 과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면서 합동과 통합 교단을 비교하면서 논문을 진행하고자 한다.

필자는 먼저 이를 위해서 장로교회의 뿌리가 되는 칼빈은 교회 분리와 연합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지 교회사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조명해 볼 것이다. 그 이후에 구체적으로 합동과 통합 교단은 2000년대 현재 과거 1959년의 분열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총신대학교 100년사』와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를 통해서 비교할 것이다.

또한 양 교단의 신학교인 총신대학교와 장로회 신학대학교가 지향하는 교육의 목표를 비교함으로 양 교단의 미래 지향점을 비교할 것이다. 이런 이념적인 바탕 위에서, 합동과 통합의 발전이 비교될 것이다. 먼저 양 교단의 양적 성장을 통계적 방법으로 고찰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은 양 교단이 신학적으로 어떤 발전을 이룩했는지를 살펴 보기 위해서, 양 교단이 공히 중시하고 있는 칼빈에 대한 수용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상과 같은 비교 연구는, 가능한 한 당파주의적이거나 일방적인 변호나 비판의 입장을 버리고 역사적인 방법에 근거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지만 합동과 통합은 서로 간의 소통과 이해 속에서 미래 지향적인 자세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II. 칼빈의 신학에 비추어 본 교회 분열과 연합 : 교부(어거스틴)의 역할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가 분열한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은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은 15세기와 16세기 초의 유럽 교회가 성경에서 제시하는 원칙에서 벗어나 마치 강력한 관료체제처럼 변질되어 있을 때,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가자는 기치하에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sola gratia)의 정신을 가지고 성경적이고 초대교회의 전통을 살리는 교회를 세우려는 내적인 동기 하에 이루어진 운동이다.

한편 이 종교개혁은, 넓은 문맥에서 살펴 보면,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혁이었다. 그 당시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인문주의 운동이 종교개혁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으며, (안인섭, "인문주의자 칼빈," in: 『칼빈과 한국교회』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9), 209-248.) 교황주의에 반대하는 영주들과 정치적 세력이 종교개혁을 후원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16세기 유럽 교회에서 발생한 종교개혁은, 신학적인 원인이 그 중심에 위치하면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이 부차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난 교회 개혁운동이며, 그 결과 이 운동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새로운 교회가 태어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발생으로 16세기 유럽의 교회 안에는 다양한 스펙트럼 형성되었다. 가장 우파로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있었으며, 좌측에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때 칼빈이 맡고 있었던 신학적 과제는 양면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종교개혁 교회가 교회분열운동이 아니라 역사적 교회와 신학적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종교개혁의 교회가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면서 교부들의 시대 이래로 전래되어 오는 신학적 전통을 간과하고 있는 급진 종교개혁과는 차별되는 개혁운동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안인섭, "Calvin's View of Augustine and the Donatist Church,"in: Calvinus Sacrarum Literarum Interpres: Papers of 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Calvin Research, (ed.) Herman J. Selderhuis (G?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8), 271-284.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4세기 북아프리카에서 활동했던 어거스틴과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에 그의 관심을 기울였다. 칼빈은 16세기의 로마 카톨릭 주의자들과 동 시대의 급진적인 재세례파들 사이의 양 극단적인 교회론 사이에서, 어거스틴과 도나티스트 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도나티스트 논쟁을 인용하면서 칼빈 자신의 교회론을 정립해 갔다).
 
요약하자면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지지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신학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급진적 종교개혁을 배격하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혼란한 16세기 유럽의 상황 속에서 칼빈은 두 개의 극단적인 교회론 기둥들을 피하면서, 성경에 근거한 그 자신의 교회론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때 칼빈은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을 순수하고 순결한 교회의 선생으로 인정하여 그들의 저작들을 인용하면서(A.N.S. Lane, "Calvin’s use of the Fathers and the Medieval!s," Calvin Theological Journal 16 (1981), 160-162. ; J. van Oort, "Calvinus Patristicus: Calvijns kennis, gebruik en misbruik van de patres" in De Kerkvaders in Reformatie en Nadere Reformatie, (red.) J. van Oort (Zoetermeer: Boekencentrum, 1997), 75-76. ; H.O. Old, The Patristic Roots of Reformed Worship (Z?rich, Theologischer Verlag, 1975), 156-158). via media(중용의 길)의 길을 택했다.

1.교부와 종교개혁의 관계

칼빈이 어거스틴을 중심으로 교부들을 적극 활용하며 그들의 교회론에 의존하는 것은 16세기 종교개혁 교회가 초대교회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J. van Oort, "Calvinus patristicus: Calvijns kennis, gebruik en misbruik van de patres," 69). 즉 칼빈은 교부들의 풍부한 신학적 자산을 활용하여 방금 태어난 종교개혁 교회를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전통적 기독교와 한 선상에서 이해시키려고 하였다(A.N.S. Lane, "Calvin’s use of the Fathers and the Medieval!s," 189-190. 171 - 173). 그 배후에는 어거스틴을 고대 교회의 증언자요,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자로 보는 칼빈의 교부학적 인식과 역사관이 놓여있다.

2.로마 가톨릭 교회를 반대

칼빈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들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 신학자들의 교회론을 교회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오류이다. 그보다는 일련의 교리적인 문제에 대한 도전이다(R. Keen, "The Fathers in Counter-Reformation Theology in the Pre-Tridentine Period," in The Reception of the Church Fathers in the West (Leiden: E.J. Brill, 1997), vol. 2, 701-43). 칼빈의 초기 저작부터 후기 저작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칼빈이 자신의 신학을 세우는 과정에서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R.J. Mooi, Het kerk ? en Dogmahistorisch Element in de Werken van Johannes Calvijn (Wageningen: H. Veenman & Zonen N.V., 1965). ; J. van Oort, "John Calvin and the Church Fathers," in The Reception of the Church Fathers in the West , (ed.) I. Backus (Leiden: E.J. Brill, 997), vol. 2).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의 헌정사(Dedicatory Epistle to King Francis)에서 종교개혁의 교회는 초대 교회를 잇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Calvin, CO 1. cols. 16-17. ( = Institutes, dedication) (1535/6)).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간의 신학 논쟁인 로잔 회의에서도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회에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그들은 교부들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부들로부터 신학적 토대를 지지 받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H.O. Old, The Patristic Roots of Reformed Worship (Z?rich: Theologischer Verlag, 1975), 142).
 
이런 칼빈의 생각은 칼빈이 제네바로부터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무르고 있을 때인1540년에 나온 『사돌레또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확인된다. 칼빈이 볼 때, 종교개혁운동의 교회는 사도들의 순전함이 유지되는 교회를 지향하며, 그러므로 동방 교부인 크리소스톰과 바질, 그리고 서방 교부인 키프리안과 암브로스와 어거스틴 시대의 교회로 돌아가려는 교회라는 것이다(H.O. Old, The Patristic Roots ofReformed Worship, pp. 142-143. J. van Oort, "John Calvin and the Church Fathers," 675). 특히 칼빈은 1559년판 기독교강요의 교회론 부분에서 어거스틴에게 큰 빚을 지고 있으며,(J. van Oort, "John Calvin and the Church Fathers," 680-682). 칼빈의 작품들 중에서 교황주의에 반대하는 논쟁적인 맥락에서 칼빈이 두드러지게 인용되고 있다(A.N.S. Lane, John Calvin: Student of the Church Fathers (Edinburgh: T&T Clark, 1999), pp. 28-32. Cf. R.J. Mooi, Het Kerk - en Dogmahistorisch Element in de Werken van Johannes Calvijn (Wageningen: H. Veenman & Zonen N.V., 1965).

3.급진 종교개혁 운동을 반대

칼빈의 입장에서 볼 때, 16세기 로마 교회는 성경에서 벗어나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칼빈은 중세의 이단자들(medieval! dissenters)에서 대안을 찾지 않았다(A.N.S. Lane, "Calvin’s use if the Fathers and the Medieval!s," 182-183). 또한 칼빈은 급진종교개혁 운동의 급진성을 비판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헌정사에서 "… 그[사탄]는 사람들의 폭력을 이용하여 이 전정한 씨앗을 뿌리째 뽑으며, 힘이 닿는 데까지 가리지를 뿌려 진리를 질식시키고 그래서 그것이 성장도 결실도 할 수 없도록 힘쓰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급진 개혁주의를반대하고 있다(Calvin, CO 1. Cols. 9-26. ( = Institutes, dedication) (1535/6)). 칼빈은 한편 중세 가톨릭 교회 밖의 개혁 운동이었던 왈도파(the Waldenses)는 지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칼빈은 중세의 그레고리(Gregory)나 버나드(Bernard) 등에서는 참된 교회의 모습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칼빈은 15세기 말의 타락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배격하지만, 중세의 급진 개혁 세력에서 참된 교회를 찾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중세의 보편 교회를 통해서 참된 교회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교부들의 신학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급진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신학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4.종교개혁 운동 안에서의 연합 강조

칼빈은 어거스틴을비롯한 교부들을 사용하여 신학적인 반대편인 로마 가톨릭과 급진 개혁 세력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16세기에 가장 널리 존중되고 있는 교부였던 어거스틴을 사용함으로서, 칼빈 자신의 신학이 당시에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었던 다양한 종교개혁 운동들과 동일한 신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변증하려고 했다(L. van Ravenswaay, Augustinus totus nosterDas Augustinverstaendnis bei Johannes Calvin (Goettingen: Vandenhoeck&Ruprecht, 1990)). 칼빈이 어거스틴을 사용한 의도 중에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칼빈은 어거스틴을 사용하여 당시의 종교개혁의 여러 전통들 (예컨대 멜랑흐톤 등)과 자신이 공통의 신학적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설득했던 것이다.

요약해 보면, 칼빈은 어거스틴과 교부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밖으로는 좌, 우로 양극화된 로마 가톨릭과 급진 재세례파를 반대했으며, 안으로는 종교개혁 운동에 참여하는 세력의 연합을 추구했다. 충분히 있을 만한 상황이지만, 종교개혁 운동의 내부에서 다양한 신학적 경향이 대두되었을 때, 칼빈은 어거스틴을 중심으로 하는 교부들의 신학적 전통을 매개로 종교개혁 그룹의 연합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5.칼빈과 한국 장로교회

오늘날 교회의 분열과 연합을 생각할 때 우리가 살펴본 칼빈의 교회론은 매우 소중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지금의 한국 교회가, 마치 16세기 유럽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같이, 성경과 복음의 본질적인 정신은 상실한 채 관료주의와 같이 변질되고 권위주의화 되며 전통 속에 갇혀서 자기 개혁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교회의 순결을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신학을 간과하며 보편적인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혁명주의는, 16세기 급진적 종교개혁운동과 같이 분리주의에 불과할 뿐이다. 칼빈은 재세례파들의 입장은 도나티스트 운동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거스틴을 따랐던 것이다.

결국 칼빈은 16세기 종교개혁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종교개혁의 교회는 하나의 참된 교회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어거스틴을 사용했으며, 이런 방법론을 가지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성경적이고 역사적 교회와 굳건하게 연결된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교회의 장로교의 분열과 연합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신학적 전통성과 역사성을 중심축으로 하면서, 그 안에서는 서로 존중하고 연합하는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 즉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의 문제는 다양성 안에서의 연합(Unity in Diversity)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III. "합동"과 "통합" 분열 이후의 발전 (1961년~ 현재)


한국 장로교회를 주도하고 있는 합동과 통합이 1959년에 분열한 것은 한국 장로교회사 뿐 아니라한국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분열에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WCC가입 문제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박형룡의 3,000만환 사건이라는 것이다. 박용규, "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 「신학지남」 (2002), 141-162. 여기에 대해서 당파적인 시각을 가지고 일방적인 옹호나 일방적인 비방을 목적으로 말한다면 정당하지 못할 것이며, 보다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 문제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난 2002년에 개교 100년을 기념해서 총신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각각 『총신대학교 100년사』와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를 출판하였는데 이 사료는 각 신학교와 이 신학교의 교단인 합동과 통합이 1959년의 분열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 원인에 대한 평가 비교
2. 총신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의 교육이념 비교(2009년 8월 현재)
3. 분열 이후 교회의 성장 
 
1. 2. 3. 부분은 추후에 정리하여 연제하도록 하겠습니다.
 

4. 신학적 발전

1)분열(1959) 이후, 칼빈 수용에 나타난 합동과 통합의 신학적 발전 (1959-1979) (한편 칼빈 수용과 관련해서, 주로 기장 측을 중심으로 진행된 칼빈에 대한 진보적 해석도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진보적인 교회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김재준 박사 또한 한국 교회의 또 하나의 칼빈 수용의 예로 볼 수 있다. Cf. 연규홍, 「한국 장로교회의 칼빈 신학사상 이해에 관한 연구: 한국 장로교회의 일치를 위하여」(한신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5), 127, 131. 김재준 박사는 1934년「신학지남」 칼빈 특집호에 "칼빈의 설교"를 번역했으며 T.H.L. Parker의 Portrait of John Calvin을 1950년에 번역한 바 있다. 전경연도 1953년부터 "칼빈의 생애와 사상"이란 글을 연재하면서 1959년에 "칼빈의 신학사상"을 출판했다. 또한 김정준 역시 1965년 한국 칼빈신학 연구회의 칼빈서거 400주년 기념논문집에 "성서학자로서의 칼빈"을 기고한 바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결국 한국의 진보적인 교회 또한 칼빈에 대한 해석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합동과 통합은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장로 교회로서 개혁주의 전통을 존중하기 때문에, 칼빈의 신학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양 교단이 칼빈의 신학을 어떻게 강조하면서 신학적으로 발전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비교 고찰한다면, 우리는 합동과 통합 교단의 신학적 발전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합동 : 역사적 칼빈주의 전통 위에서 칼빈 수용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1950년대는 한국 교회에서 칼빈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분열 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가면서, 비록 칼빈탄생 450주년인 1959년에는 할 수 없었지만, 그보다 3년이 지난 1962년에 칼빈 특집호 「신학지남」이 출판될 수 있었다(「신학지남」 제29권 1호 (1962). 1934년에 이어 다시 칼빈 특집호로 나온 「신학지남」에 기고된 논문들은 다음과 같다. 박형룡, "칼빈의 현대적 의의," 안용준, "칼빈의 생애와 사업," 박형룡, "칼빈 신학의 기본 원리," 오병세, "칼빈의 신국관: 그의 공관복음 주석에 의하여," 명신홍, "칼빈의 윤리사상," 편집실 역,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제의서," 김희보, "목회자로서의 칼빈," 명신홍역, "요한 칼빈의 설교: 성경을 정당하게 사용할 것," 조동진, "교회의 분리와 통일에 대한 칼빈의 해석," 한철하, "칼빈의 정치론," 신복윤, "칼빈주의. 그리고 한철하 박사의 서평인 "아브라함 카위퍼의 칼빈주의의 강의"와 "헨리 반틸의 칼빈주의 문화 개념"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합동 교단에서 칼빈의 신학에 부여하는 의미가 매우 컸다는 것을 의미하며, 전형적으로 역사적 칼빈주의 전통 위에서 칼빈을 해석하고 있다는 경향을 보여준다.

①개혁주의와 개혁 신학

한국 교회에서 가장 정통적이고 보수적으로 칼빈을 해석하면서 개혁주의와 개혁신학을 강조한 신학자는 박형룡 박사(1897-1978)였다. 그는 이미 1934년에 칼빈 특집호로 꾸며진 「신학지남」에서 "칼빈의 예정론"을 기고하면서 본격적으로 칼빈의 신학을 역사적인 칼빈주의 입장에서 소개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칼빈주의 예정론」이라는 제목으로 1937년에 L. Boettner의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를 번역하였다. 그뿐 아니라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라는 논문을 통해서 1940년에 역사적 칼빈주의의 가치를한국 교회에 계속 소개하고 있었다.
한편 1959년 교단이 합동과통합으로 분열한 직후인 1962년에 칼빈 특별호로 「신학지남」이 기획되었는데, 이곳에서 박형룡은 권두언을 통해 칼빈의 현대적 의의를 강조하면서 "칼빈 신학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비록 교단은 분열하였지만, 합동은끝까지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견고하게 붙잡아야 한다는신념을 피력하고 있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가장 선명하고 직설적으로 개혁주의와 칼빈의 개혁 신학을이어가야 할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은 박형룡 박사의『교의신학』 서문이다. 다음과 같은 박형룡 박사의 언급을 들어 보라.

필자의 본의는 칼빈주의 개혁과 전통신학을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는 데 있고 감히 무엇을 창작하려는 것이 아니다. 팔십 년 전 이 땅에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전하여 준 그대로의 바른 신학을 새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필자의 염원이기 때문이다(박형룡, 『교의신학, 서론』박형룡 박사 저작전집 I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서문).

이것은 전형적으로 개혁주의 개혁 신학의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에 의하면 선교사들을 통해서 한국 교회가 전수 받은 역사적 개혁주의를 다음 세대에 지속적으로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를 교회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박형룡 박사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신학은 종교개혁의 전통으로 돌아가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데에서 다시 강조된다. 그런데 그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칼빈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서울: 다산글방, 2003), 220-231. 이런 역사적 개혁주의에 대한 존경은 필연적으로 칼빈을 어거스틴과의 연계 속에서 이해하게 하는 역사적 인식을 다시 한 번 드러내 준다. 박형룡 박사는 다음과 같이 합동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선언하고 있다.

칼빈의 신학적 교리들은 어거스틴 교리의 부흥이요, 어거스틴의 교리는 사도 바울의 교리의 부흥이었다. 칼빈은 바울과 어거스틴의 교리들을 조직적으로 현대를 위하여 표현한 첫 사람이었다(박형룡,「신학지남」29권 1호 (1962), 20).

이상에서 우리는 합동 교단의 신학적 토대를 놓았던 박형룡 박사가 설정한 신학적 방향을 살펴 보았다. 이 교단이 앞으로 어떻게 신학적 발전을 이룩하게 될 것인지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성경에 근거한 합동의 신학은, 역사적으로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신학에 기초하며, "칼빈과 칼빈주의로 돌아갈 때" 사도적인 신앙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형룡의 구원론 칼빈과 비교 연구했던 장신대의 최윤배 박사는, 박형룡의 이중 은혜에 대한 이해가 칼빈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거의 같았다"라고 확인하기도 했다(최윤배,「죽산 박형룡의 구원론: 칭의와 성화를 중심으로」한국개혁신학회 제21차 정기학술심포지엄 논문집, (고려신학대학원, 2006), 159-172).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합동과 통합의 분열 이후, 합동은 "역사적 칼빈주의"라는 신학적 방향성을 강조하면서 그 정체성을 세워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②칼빈주의적 성경해석학

해방과 전쟁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인 1950년대에 한국 교회는 칼빈 연구로 그 정신적 구심점을 찾고 있었다. 이때 칼빈과 칼빈주의적인 관점을 가진 성경신학으로 성경해석학적 기초를 형성한 것은 박윤선 박사(1905-1988)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칼빈주의 위에 합동의 신학이 세워진 것처럼 성경해석학 또한 칼빈주의적 성경해석학이 합동의 뿌리를 형성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1952년부터 1953년에 걸쳐서 「把守軍」에 게재했던 "칼빈주의"라는 일련의 글들을 통해서 한국 교회에 칼빈주의 신학을 소개하고 있었는데,(박윤선,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와 칼 발트의 기본 원리"「把守軍」제13호 (1951). "칼빈주의 (1)"「把守軍」제16호. ; "칼빈주의 (2)"「把守軍」제17호. ; "칼빈주의 (3)"「把守軍」제19호. ; "칼빈주의 오대교리 (4)"「把守軍」제21호. ; "칼빈주의 오대교리(5)"「把守軍」제22호. ; "칼빈주의와 정치"「파수꾼」제33호).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으로서 칼빈주의를 한국 교회에 본격적으로 소개했다는 데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박윤선은 칼빈주의 문화운동에도 진력하여 1957년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박윤선 박사는 "아브라함 카위퍼"라든지 "헤르만 바빙크" 등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에 깊이 감명을 받아 이 칼빈주의를 한국 교회에 알리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정성구, "칼빈주의 연구와 한국교회," 142-143). 주지하는 바처럼 박윤선 박사는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에 화란의 "자유대학"에서도 연구를 진행함으로, 미국의 칼빈주의는 물론 화란의 개혁주의도 한국 교회에 소개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의 신학적 스펙트럼을 확장했다는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체계화된 칼빈주의 신학을 토대로 했던 성경신학자 박윤선 박사는 결국 칼빈주의에 근거한 신구약주석을 완성하여 1979년에 출판했다. 드디어 칼빈주의적 성경해석학이 한국 교회에 형성된 것이다.

③칼빈과 칼빈주의 연구의 확산

개혁주의 신학과 칼빈주의적 성경해석학이 형성된 이후, 이 신학적 전통은 체계적으로 연구되어 합동 교단뿐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에까지 확장되었고, 국제적으로도 활발하게 교류되었다. 이와 같이 합동 교단이 칼빈주의 연구를 조직적으로 수행하면서 국제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정성구 교수(1942- )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성구 박사에 의하면 자신은 박윤선 박사를 통해서 칼빈과 칼빈주의 신학과 조우하게 되었으며, 특별히 아브라함 카위퍼의 화란 개혁 신학을 통해서 칼빈주의 신학에 더욱 심취할 수 있었다(정성구,『은총의 포로: 현암 정성구 박사 회고록』, 175 이하). 정성구 박사는,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이 칼빈주의임을 지적하면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에서 발흥한 교회 정치 체제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칼빈과 칼빈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잘 밝혀주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한국 칼빈주의 연구의 출발점은 1934년에 나온 칼빈 특집 「신학지남」이다.

체계적인 칼빈주의 연구의 진행은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의 수립(1985년)을 통해서였는데, 이 연구원의 목적은 칼빈과 칼빈주의 사상의 연구였다(정성구, "칼빈주의 연구와 한국교회," 154-156). 이 연구원은 칼빈과 칼빈주의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였으며, 칼빈주의가 현대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 왔다(정성구,『은총의 포로: 현암 정성구 박사 회고록』, 280-282).

또한 합동 교단의 체계적인 칼빈주의 연구는 동시에 한국 칼빈주의의 국제화로도 이어졌다. 정성구 박사는 "한국칼빈학회" 활동을 통해서 합동 교단의 칼빈 연구가 학문 세계에서 고립되는 것을 방지했을 뿐만 아니라, 4년마다 한번씩 개최되는 세계칼빈학회에 계속 참여함으로 한국 칼빈주의를 국제화 시키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2)통합 : 에큐메니즘에 기초한 칼빈 수용

①개신교 스콜라주의를 비판하는 칼빈 해석

한 두 명의 신학자가 한 교단의 신학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에큐메니즘을 지향하는 통합의 신학적 중심에 이종성 박사가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종성 박사는 먼저 한국의 보수적 장로교회가 17세기의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영향에 빠져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따라서 그가 지향하는 것은 16세기 칼빈의 사상을 환원적으로 연구하여 그 핵심을 찾고, 그 핵심을 다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재해석 하자는 것이다(연규홍, 「한국 장로교회의 칼빈 신학사상 이해에 관한 연구: 한국 장로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115-121).

이런 맥락에서 이종성 박사는 칼빈 연구를 강조하였는데, 그의 영문 논문인 "Calvin Studies in Korea: Its History and Present Situation"는 한국 교회의 칼빈과 칼빈주의 연구에 대한 본격적인 첫 연구 시도라고 할 수 있다(J.S. Rhee, "Calvin Studies in Korea," in: Circular (Clearing House of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Institutions for Christian Scholarship), No. 13 (April, 1979). 54-63). 이박사는 먼저 간략하게 한국 역사를 서술한 후에, 한국인들의 종교적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알렌(H.N. Allen) 선교사의 한국 입국보다 훨씬 이전인 1592년부터 시작된 서양의 가톨릭 선교사와의 간접적인 접촉부터,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했던 Carl A.F. Gutzlaff 선교사와의 만남 이후의 한국 교회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특별히, 1970년대 후반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칼빈 연구의 현황을 상세하게 정리해 주고 있다. 물론 이종성 박사의 이 영어 논문은 비록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한국에서의 칼빈 연구의 현황을 최초로 국제적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는 데에 그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종성 박사는 1960년 H.T. Kerr의 A Compend of the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을 번역함으로 기독교강요의 핵심 내용을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했다. 그는 또한 1965년에는 한국 칼빈신학 연구회의 칼빈서거 400주년 기념논문집에 "칼빈의 생애와 그의 위치"를 기고했으며, 1968년에 "칼빈-생애와 사상"을 출판하고(이종성, 『칼빈: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1970년대에(W. Niesel의 Die Theologie Calvins를 번역함으로 W. 니젤,『칼빈의 신학』 이종성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7)). 칼빈연구의 길을 여는데 공헌했다.

②복음주의적 칼빈 해석

한편 이종성 박사와는 다른 강조점인 복음주의적이고 에큐메니칼한 시각을 가지고 칼빈을 이해했던 것은 한철하 박사였다. 그는 1980년대부터 이종성 박사와 정성구 박사와 더불어 한국 칼빈 연구 트리오의 한 축을 형성해 왔다. 한박사는 "복음 전도"와 "교회 성장" 모두를 목표로 삼고 있으며 크게 보아서 그의 경향은 복음주의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연규홍, 「한국 장로교회의 칼빈 신학사상 이해에 관한 연구: 한국 장로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124-126).

한박사는 이종성 박사와는 달리, 칼빈을 바르트로 대변되는 신정통주의 신학과 예리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정통적인 신학을 교회의 참된 신앙으로 강조했다.

그는 1962년 신학지남 칼빈 특집호에서, "칼빈의 정치론"을 썼고, "헨리 벨틸 칼빈주의 문화관"과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의"의 서평을 기고했다. 한편 1965년 한국 칼빈신학 연구회의 칼빈서거 400주년 기념논문집에 "칼빈신학에 있어서의 경건"을 기고함으로 한국의 칼빈 연구를 선도했다. 그의 칼빈 연구의 범위는 정치적 칼빈주의와 칼빈주의 문화개념에까지 이른다.

③칼빈에 대한 공동 연구를 시도함

본격적으로 칼빈에 대한 공동 연구가 증진된 것은 "한국 칼빈신학 연구회 (The Society of Calvin Studies in Korea)"의 발족에서 그 기초가 찾아진다. 이 연구회는 1963년 12월 10일에, 한경직 목사 (회장)와 이종성 박사 (총무겸 서기)를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다. 1965년에, 이 "한국 칼빈신학 연구회"가 "칼빈 서거 400주년 기념 논문집"을 발간했는데, 여기에는 한경직, 이종성, 김정준, 한철하 등이 칼빈의 신학적인 면을 다루었으며, T.F. Torrance 교수와 W. Niesel 교수의 글도 실려 있다. 이 한국 칼빈신학 연구회는 칼빈연구를 더 증진시켰으며, 국제적인 안목을 열게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연구회는 1986년에 이종성, 한철하, 그리고 정성구가 함께 조직하여 대표적인 한국의 칼빈 연구 기관이 된 "한국칼빈학회"의 전신이 된다.

2)1980년대 이후 합동과 통합의 칼빈 연구의 심화 : 다양화, 조직화, 국제화

1980년대 이래로 한국 사회는 경제 성장과 민주화 성취, 그리고 통일 운동의 증대로 이어지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는 한편으로 합동과 통합 양 교단의 칼빈 연구가 심화되고 있는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86년 헝가리 데브레첸에서 개최된 세계 칼빈학회에 참석한 이후 귀국한 이종성, 한철하, 정성구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한국칼빈학회(Korea Calvin Society)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초대 임원은 회장에 이종성, 부회장에 한철하, 총무에 정성구였다. 이 학회의 성립 과정에 대한 자서전적 기록은 다음을 보라. 정성구, 『은총의 포로: 현암 정성구 박사 회고록』(대구: 한빛, 2002), 269-271). 그 핵심 구성원을 보면 합동과 통합의 칼빈 연구가들이 함께 모여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 이후 양 교단의 칼빈 학자들이, 비록 다소 참여도의 차이는 있지만, 임원으로 함께 이 학회를 이끌어 오고 있다. 이 한국칼빈학회는 1년에 4회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연 1회에 걸쳐 「칼빈연구」를 출판한다. 국제적으로 한국의 칼빈 연구를 대표하는 기구로 공인되어, 세계칼빈학회에 한국 대표단을 파송하기도 하는 이 한국칼빈학회는 한국 칼빈 학자들의 공동연구를 선도하는 학회로도 평가된다(이 한국칼빈학회는 세계칼빈학회와 아시아 칼빈학회에 한국의 학자들을 파송하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연구회이다). 1989년 1월 일본Kwansei Gakuin University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 칼빈학회 이래로 한국 칼빈학회는 아시아 칼빈학회와 세계 칼빈학회와 연합하여 국제적인 칼빈 연구 네트워킹을 형성하고 있다.

IV. 나오는 글

본 논문에서는 합동과 통합 분열 50주년을 맞아, 1959년에 분열된 이후 1961년부터 오늘날까지 합동과 통합의 발전을 교회사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먼저 이 작업의 기초적 토대를 세우기 위해서, 양 교단 공동의 신학적 전통인 칼빈은 교회의 분열과 연합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16세기 문맥에서 살펴 보았다.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을 교회 분열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참된 교회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석했다. 또한 로마 가톨릭과 급진적인 종교개혁이라는 당시의 양 극단 사이에서, 어거스틴과 교부들의 신학을 중심으로 중도의 길을 걸었다. 한편 다양한 종교개혁 운동 사이 에서는 교부들의 신학으로 공동의 토대를 만들어 함께 연합하면서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 보면, 구조적인 차원에서 조급하게 이루어진 교회 연합 운동은 항상 더 큰 문제를 낳곤 했다. 따라서 오늘날 합동과 통합이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바로 칼빈의 방법론에 있다. 먼저 공동의 신학적 유산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안에서 서로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다. 합동이나 통합이 자신의 신학교에서 교육 목표로 제시하고 있는 개혁주의 전통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이 개혁주의를 놓고 양 교단의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사가 증언해 주는 것처럼 신학적인 측면에서 일치하고 연합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사실 각각의 교단 안에서 조차 이 신학적 연합은 쉽지 않다. 따라서 필자는 장기적으로, 또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접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보다 쉽고도 바람직한 것은 목회와 선교, 사회 복지, 그리고 남북 통일 등 한국 교회 앞에 놓여있는 공동의 과제를 함께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사역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연합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합의 주체들이 각자 무엇이 서로 다른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다른 지체도 더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합동 교단은 지난 50년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통합 보다 더욱 부흥하고 성장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으로 설 수 있게 한, 개혁주의적인 신학적 전통을 금과옥조와 같이 존중하며 이것을 더욱 견고하게 붙잡아야 할 것이며, 또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했던 이 교단의 목회 철학을 이어 가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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