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레 운동과 1907년 대부흥 운동의 비교 연구

 

이 광 순

 

 

1. 문제 제기

교회 갱신 없이는 선교도 없다. 왜냐하면 교회 갱신은 선교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선교의 기초가 되는 교회 갱신은 회개와 회심을 통해 일어나는데, 그래서 일종의 연쇄적인 순환 과정을 형성한다. 즉, 회개는 교회를 갱신시키고, 교회 갱신은 선교를 불러일으키며, 선교는 다시 회심으로 이어진다. 회심, 갱신, 선교, 그리고 다시 회심으로 이어지는 연쇄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회개 없이 갱신이 일어나지 않으며, 갱신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선교도 없다. 또한 그 반대로, 선교가 실현되면 회심과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되고, 회개는 교회의 갱신과 부흥으로 이어져 다시 선교 운동을 일으키는 순환이 일어난다. 이러한 연쇄적이고 순환적인 과정은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수 많은 사례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면 교회 갱신과 선교의 시발점인 회개란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회개가 일어나는가? 이 논문에서는 먼저 회개와 교회 갱신의 정의를 내리고, 어떠한 회개와 갱신이 선교로 이어지는 지를 성경과 선교운동사의 사례들을 통해 분석해 볼 것이다. 특히 위에서 제시한 회개, 갱신, 선교, 그리고 다시 회개로 이어지는 연쇄적이고 순환적인 과정을 입증할 것이다. 이 과정을 성경과 선교 역사를 통틀어서 개괄하기에는 연구 범위가 너무 광범하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는 200여년 전에 근대 선교의 새로운 전기를 노정한 영국과 100여년 전에 한국 초기 선교에 일어난 갱신 및 선교 운동을 집중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교회 갱신과 선교 간의 상관 관계를 규명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18세기에 영국의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존 웨슬레가 주도한 영국 교회의 선교 운동과 한국 교회의 1907년의 부흥 및 갱신 운동을 비교함으로써 갱신과 선교 간의 상관 관계를 검증할 것이다.

 

2. 회심과 회개의 개념

성경에서 회개는 인간이 창조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회개라는 말은 명사가 아니라 "방향을 바꾸다"(turn) 또는 "되돌아가다"(return)라는 동사로 쓰는데, "회개하다"라는 동사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악이나 악한 행실과 행동을 돌이켜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과 태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키거나, 생각을 바꾸는 것, 곧 사고와 의식의 전환을 가리키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회개는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도 섬기지도 않다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turn)이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숭배하다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return)이다. 따라서 회개(repent)와 회심(conversion)은 돌이키다 또는 되돌아가다라는 말에서 나왔으며,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회심과 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새로운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는 영적인 변화 뿐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삶과 행위의 총체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구약에서 회개는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서 복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 숨자,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으로 회개, 곧 돌아올 것을 촉구하셨다. 가인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기회를 주셨다. 이러한 회개의 개념은 아브라함에게서 헌신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비 데라의 집 곧 우상의 집을 "떠나, 가라"고 명령하셨고, 아브라함은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대 변신을 하게 된다. 선지자들도 '이스라엘아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 오라', 즉 '본래의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하기 위하여 다시 돌아 오라'는 회심을 외쳤다. 이처럼 구약에서 회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헌신하는 것을 가리킨다.

 

신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마 1:1)고 시작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서 그 복을 나누어주고 그 복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족보에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신약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족보에 올라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킨다. 바꾸어서 말하면 신약에서 회개는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 족보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구약에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새로운 언약인 신약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 회복을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보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죄 용서함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므로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게 되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 이처럼 회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 지음을 받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서도 인간은 스스로 고치고 바꾸어서 새롭게 다듬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며(고후 5:17; 요 3:3),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롬 10:10).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고 수평적인 인간 관계들을 바로잡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는 새롭게 태어나서 새롭고 올바른 관계들을 회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종합해서 선교신학적으로 정의하자면, 회심(conversion)은 "전환" 즉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 또는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함"(turn or turn again)이다. 그러한 회심은 대체로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불신자가 과거에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 1:9)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둘째, 믿다가 낙심하거나 타락한 자가 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와서 섬기는 것이다(삼상 7:3). 셋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어서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를 회복하고 삶의 태도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은 불신자, 타락한 자,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역사 속에서 참된 변화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회개는 필연적으로 변화를 수반하는데, 그것이 곧 갱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신분을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회개는 이처럼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삶을 가져오는 갱신의 결실을 맺게 된다.

 

 

3. 교회 갱신의 개념

일반적으로 갱신이라는 말은 '새롭게 하다', '신생시키다', '부활하다', '새로 흥왕해지다'라는 의미이다. 영어에서 갱신은 새로운(new)에 접두어(re)를 붙여서 새롭게 하다(renew)와 그 명사형(renewal)을 쓴다. 'renew'는 헌 것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 곧 재생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양 자 모두에 쓰인다. 따라서 교회 갱신(church renewal)은 낡고 퇴락한 교회를 신앙적으로 새롭게 재생시켜서 다시 헌신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살리다' 또는 '소생시키다'라는 의미를 가진 부흥(revival)도 갱신과 비슷한 것으로서 서로 대체해서 쓰이는데, 이 글에서는 교회 갱신과 부흥을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 곧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서로 자유롭게 바꾸어 쓸 것이다.

 

또한 갱신한다는 것은 거듭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갱신(renewal)은 옛 사람을 벗어 던지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며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거듭나는 갱신은 몇 단계를 거친다. 먼저, 옛 것, 곧 기존의 것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 과정이다. 기존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통회하게 한다. 말하자면 기존에 대한 비판은 곧 내적 갱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갱신은 외부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해서 자신에 대한 비판과 반성 그리고 통회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에 갱신은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awakening 또는 revival)인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재 헌신(recommitment)의 과정이다. 이와 같이 갱신은 과거와 기존을 결별하고 새로운 것에 대해 다시 헌신하는 것이다.

 

갱신은 거듭남의 과정을 거친다.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에 갱신 운동이 일어나면 그 다음에 거듭남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갱신 운동은 아무 때나 일어나기보다는 어떤 위기에 당면했을 때 일어난다. 위기에 처하면 인간은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을 하게 되며 잘못을 회개하게 된다. 따라서 갱신은 다음과 같은 몇 단계를 거친다. 먼저, 직면한 위기를 의식하는 단계이며, 둘째는 위기의 원인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는 단계이며, 세째는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을 받고 내면적인 새로움을 체험하고 외적으로 이웃과 화해하는 단계이며, 마지막으로 교회가 성장하고 나아가서 교회 밖으로 선교를 하는 단계이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는 교회 갱신은 이처럼 궁극적으로 복음 전파라는 선교의 결실을 맺음으로써 대단원을 마무리짓는다.

 

회개는 성령의 은사이다. 성령이 임할 때 회개 운동이 일어난다. 사도행전 2장 37절을 보면, 성령이 임하자 모인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대대적인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성령이 임할 때 인간은 자신의 죄와 죄성을 인지하고 시인하며 고백하고 회개를 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갱신은 회개하고 통회하기 위해 성령을 갈급하게 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 성령이 임하실 때 교회는 영적인 눈을 뜨게 되고 자신의 죄를 보고 깨닫게 되며 죄사함을 구하게 된다. 말하자면 교회는 성령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게 된다. 성령은 회개의 은사를 베풀 뿐 아니라 그러한 회개를 통해 교회를 갱생시키고 부흥하게 하며 선교하게 한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는 성령으로 깨끗하게 된 다음에 성령의 권능을 얻어서 땅끝까지 증인이 되는 선교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4. 영국의 부흥과 교회 갱신 운동

서구의 기독교 선교는 일보 전진과 일보 후퇴, 그리고 일보 전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전진과 후진의 반복은 대대적인 각성과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가 쇠퇴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선교 운동사에서 18세기와 19세기초에는 대규모 각성 운동이 일어난 시기로서 개신교 교회가 대내적으로 신앙적인 거듭남의 체험을 하고 대외적으로는 세계로 교회를 확장하는 선교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 중에서도 영국 교회는 그러한 내적 갱신과 외부를 향한 선교를 결합시켜서 괄목할 만한 부흥 및 선교 운동을 전개한 교회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왜 18세기에 유독 영국에서 교회 갱신 및 부흥 운동이 일어났는가? 이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특정한 한 가지 원인에 의해 그러한 교회 갱신 운동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원인들을 두 근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당시의 영국 사회 내부에서와 영국 사회가 처한 사회 경제적 및 문화적 상황이며, 다른 하나는 영국 교회, 곧 영국의 제도권 교회인 국교회였다.

 

18세기의 영국은 산업 혁명의 와중에 있었다. 유럽의 경제적 패권을 둘러싼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이긴 영국은 이른바 대영제국을 건설할 만큼 대내외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산업 혁명은 한편으로는 영국에게 엄청난 자본 축적과 경제적 성장 그리고 부를 안겨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심각한 사회 문제들을 초래했다. 공장 지역을 중심해서 신흥 도시들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운집해 있었으며, 그들의 생활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의료 및 위생 시설은 부족하고, 수도 및 하수도는 정비되지 않았으며, 주택은 비좁고 불결했고,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은 턱없이 모자랐다. 산업 혁명은 부익부빈익빈을 초래함으로써 빈부격차를 한층 더 심화시키고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더욱 악화시켰다. 특히 저임금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극도의 빈곤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그래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이 공장에서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는 비참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산업 혁명이 가져온 이러한 불행과 고통이 영국의 대다수 빈곤층을 덮쳤으며, 이것은 곧 영국이 거듭나지 않으면 안되는 위기 국면을 조장했다.

 

영국의 번영과 부는 다른 한편으로 지리상의 발견과 더불어 제국주의적 팽창에 상당 정도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1776년의 미국의 독립 전쟁은 영국이 보유한 가장 크고 풍요한 식민지의 상실을 가져왔다. 미국의 독립은 영국에게 경제적으로 큰 손실과 타격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무한하게 계속될 듯한 번영이 오래지 않아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팽배시켰다. 그것은 영국 패권의 쇠퇴 조짐으로 인식되었으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위기 국면으로 다가왔다.

 

다른 한편으로,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영국에까지 미쳤다. 특히 인간의 이성을 앞세우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높이 기리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이 혁명의 물결과 더불어 산업 혁명의 소용돌이에 있는 영국 사회를 위협했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은 영국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무신론과 무신앙을 조장했으며, 이는 곧 도덕적 타락과 퇴폐를 부추겼다.

 

18세기의 영국 교회는 안팎의 이교적이고 세속적인 도전에 직면해서 영적인 무력감에 빠졌다. 그 때는 이미 종교 개혁 운동이 교회를 일깨운 지도 200년이 지났으며 교회를 쇄신하려는 열정도 식은 지 오래 되었다. 무엇보다도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회 안팎의 지식인들과 지배층은 공개적으로 기독교적 신앙을 비판하고 기독교의 신조들을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규정하고 버릴 것을 종용했다. 더욱이 낭만주의가 기세를 떨치면서 무신론적이고 이교적인 풍조와 여론이 교회의 권위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신앙을 조롱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영국 교회에 미치면서 교회 내의 위계 질서가 교란되기 시작했다. 즉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국왕과 그 휘하의 성직자들에 대한 일반 평민들의 반발이 터져나왔다. 특히 영국 교회가 세속의 왕권과 결탁해서 무절제하게 권력을 휘두르고 또 왕권은 교회를 권력의 도구로 삼은 이른바 정교유착의 비리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지식인들은 기독교가 100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할 정도로 영국 교회는 위축되어 있었다.

 

이러한 위기 국면에 처한 영국 교회에 회개와 갱신을 촉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운동은 존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 찰스 웨슬레(Charles Wesley, 1707-1788), 그리고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ld, 1714-1770)에 의해 주도되었다. 웨슬레 형제는 어머니의 신앙에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경건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형인 존 웨슬레는 1720년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으며, "거룩한 모임" (Holy Club)이라는 동아리를 조직하고 동아리 회원들과 엄격한 신앙 생활을 실천했다. 홀리 클럽은 초창기에 율법주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었기 때문에 동료 학생들이 그들에게 냉소적으로 "메소디스트"(Methodist)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메소디스트는 엄격한 규율주의자 또는 형식주의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밤마다 모여서 기도하고 헬라어와 신약 성경을 공부하고 매일의 일과에 대한 반성과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하고 또 일주일에 한번씩 성찬식을 거행하고 일주일 중의 이틀을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로 정해서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 별칭은 웨슬레를 따라다녔으며, 훗날에 제도화된 교회의 명칭으로까지 남게 되었다. 1735년에 조지 휫필드가 홀리 클럽에 가입함으로써 그는 웨슬레 형제와 함께 영국 교회의 부흥과 갱신 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같은 해인 1735년에 웨슬레 형제는 '해외 지역 복음 전파 협회'의 파송을 받아서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 조지아주로 갔다. 그들은 미국으로 가는 항해 도중에 감동적인 영적 체험과 만남을 경험한다. 그것은 폭풍이 치는 와중에도 함께 승선하고 있던 모라비안(Moravian)들이 침착함을 잃지 않고 찬양을 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존 웨슬레가 조지아주 사바나에 도착하자 모라비안 지도자였던 스판겐베르그(Spangenberg)를 만나 개인적인 회심과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찰스 웨슬레는 1736년에 병이 나서 귀국했으며 존 웨슬레 역시 1738년에 미국 선교를 미완으로 남겨둔 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 해에 두 형제는 또 한번 큰 변화를 경험했다. 1738년에 존은 이른바 올더스게이트에서 열린 부흥 집회를 계기로 거듭나는 체험을 하게 되며, 1739년부터 동생 찰스와 함께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모임이나 교회 안에서만 설교를 했는데, 그의 설교에 대한 반발이 심하게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설교가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의 신학적 관점은 당시의 영국 교회와 갈등을 빚었다. 또한 1739년에 조지 휫필드의 광부들을 위한 브리스톨 야외 집회가 성공을 거두자 그는 존 웨슬레에게도 그러한 대중 집회를 권유하게 되었다. 존은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았지만 조지의 설교 광경을 보고 자신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청중이 있으면 어느 곳에서나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영국 국교는 교구 성직자의 허가없이는 아무도 교구 안에서 설교하거나 전도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존은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영국 교회와 대립하게 되었다.

 

웨슬레 운동에는 주로 중하류층의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일부 상류층이 영국 국교회의 형식적인 예배에 반발해서 이 운동에 가담했다. 따라서 웨슬레 운동은 영국 국교회의 제도권 바깥에 있거나 아니면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제도권 교회에서는 웨슬레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비난을 하기도 했다. 설교 중에 청중들이 감정적 소요를 일으키거나 의식을 잃는 등의 소동이 그러한 비판과 비난을 불러일으켰지만 웨슬레 운동은 전도대를 조직해서 순회 전도를 하는 부흥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제도권 영국 국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존 웨슬레의 탁월한 조직 능력과 행정력은 이미 옥스퍼드에서 홀리 클럽을 조직한 데서 입증되었다. 그는 타고난 조직 능력을 발휘하고 또 모라비안 교도들과 친밀한 교제에서 습득한 그들의 형제애적 조직 구성을 참고해서 협회, 연회, 단 그리고 속회들을 결성했다. 처음에는 브리스톨의 광부들과 런던의 주물 공장에 협회를 조직했으며, 평신도 지도자들이 그 협회를 영적 도덕적 성장을 위한 친교 수단으로 운영하도록 했다. 그런데 일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전도 설교도 하게 되면서 점차 평신도 지도자들의 활동과 역할이 활발해졌으며, 이는 나중에 기존의 영국 국교회와 감리교회를 구분하는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평신도 설교 문제는 평신도 안수 문제로 비화했다. 존 웨슬레는 처음에는 영국 국교회와 분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협회를 영국 교회와 연결시키고, 협회 회원들도 교회에서 성찬을 받도록 권장했다. 그러나 존은 신약의 장로직이 주교직과 동일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평신도들을 안수해서 장로와 감리사로 임명했다. 이것은 웨슬레 운동을 영국 국교회와 분리해서 하나의 교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웨슬레 운동은 웨슬레 형제와 휫필드가 교리상의 이유로 불화와 함께 결별하게 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존 웨슬레는 알미니안주의자(Arminian)였는데 비해서 휫필드는 예정론자였다. 훗날 그들은 화해하기는 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존 웨슬레는 자신이 죽기 전에 100명의 목사를 지명해서 회의를 구성하게 하고 그의 모든 사업을 계승하게 했다. 그 회의가 1791년에 존 웨슬레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정식으로 웨슬레 감리교회로 발족해서 발전했다. 다른 한편으로 조지 휫필드도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는데,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회를 조직했다. 이처럼 웨슬레 운동은 새로운 교회로의 제도화로 결말을 맺게 되었다.

 

웨슬레 운동은 훗날 영국의 부흥 운동을 두 방향으로 이끌게 되면서 영국 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교회를 중심한 선교회 조직과 선교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 개혁 운동이었다. 이 두 방향을 향한 영국의 부흥 운동은 영국 제도 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전자의 보기를 들면, 1815년 이후에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교회 내의 부흥 운동은 개인적인 헌신과 변화를 강조하고 참여자들에게 선교 사명을 고취시켰다. 그 결과로 뒤이어서 수많은 선교회들이 조직되고 해외로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되었다. 후자의 보기로는 어린이 노동 금지와 노예 제도 타파 그리고 감옥 개선 운동으로 나타났다. 어린이 노동에 대한 규제를 위해 이른바 주일학교 운동을 활성화시켰으며, 노예 제도 반대는 드디어 1807년에 대영제국 내에서 노예 매매를 금지시키는 법률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처럼 웨슬레 운동은 감리교회로 제도화되었지만 그 맥은 영국 교회 전반의 부흥 운동으로 이어져서 교회 내적으로는 갱신 운동으로, 대외적으로는 사회 정화와 개선 운동으로 발전했다.

 

 

5. 한국의 부흥과 교회 갱신 운동

한국 교회의 갱신 운동은 19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세기 말에 서구 열강의 교회들이 앞다투어서 한반도에 선교사들을 파송함으로써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지 겨우 20여년만에 성령의 놀라운 역사하심이 한국 교회에 일어난 것이다. 바로 1907년을 기점으로 해서 전국 교회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간 회개와 부흥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1907년이라는 특정 시점에 그러한 갱신 부흥 운동이 한국 교회에서 일어났는가? 그 원인은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왕조 정치가 자주권을 상실하고 정치적 불안정이 점차 가시적으로 높아가고 있었으며,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감행한 일본의 침탈이 서서히 시작되고 식민지 체제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전통 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유교적인 가치관과 규범이 무너지고 봉건적 지배 체제가 균열하면서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었으며, 동학이 탄압에 의해 괴멸 상태에 이르면서 민심을 모아서 하나로 결속시켜주는 종교가 없는 일종의 중심 종교의 진공 상태가 생겼다.

 

풀어서 보면, 먼저 정치적 위기가 1907년의 갱신 부흥 운동을 촉발시켰다고 할 수 있다.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한반도는 일본을 비롯해서 청,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 중에서 일본은 1894년 7월에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기세를 더욱 올리게 되었고, 급기야 1895년 10월 8일에 명성황후를 시해하기까지 하면서 조선 왕조를 위협했다. 1904년 2월에 일본은 러일 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지 지배 체체의 준비를 서서히 완료하게 되었다. 1907년은 이처럼 한국 교회가 식민지 지배 체제의 출범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목격하고 있던 때였다.

 

전통 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유교 문화가 개화로 인해 서구 문화의 침투와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양반이 지배하는 봉건 체제 역시 열강과 일본의 침략으로 그 뿌리가 흔들리면서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었으며 신분 질서의 교란과 더불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조선은 더 이상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으로 극심한 변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조선의 지배층과 유교적 가치 체계는 더 이상 희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1907년의 한국 교회는 한편으로 전통 사회의 붕괴와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질서의 대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과도기적 혼란기에 있었으며, 그러한 지배 문화와 질서의 공백이 종교적 갱신 운동에 대한 필요성을 높였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이미 지배층의 윤리 기반인 유교가 더 이상 삶의 규율로 작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불교와 무속과 같은 기존의 종교들은 백성들의 종교적 구심점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서구 문화의 침투에 맞섰던 동학이 일정 기간 동안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서 삼남 지방의 백성들을 결속시켜왔지만 지도자들의 검거와 조직의 와해 그리고 혹독한 탄압책으로 인해 1907년 즈음에는 그 운동의 기세가 한풀 꺾여서 퇴조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1907년의 한국 교회는 정신적 종교적 공백 또는 진공 상태와 마주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새로운 종교 운동을 갈망하고 그에 대한 기대가 점증되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1907년 당시의 한국 사회는 표현 그대로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그러한 위기는 한국 교회에 오히려 자성과 회개 그리고 갱신을 촉구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기독교인들은 위기에서 절망하고 실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교회를 구심점으로 삼아서 모이고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고 회합을 가지는 것으로 난국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것이 곧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은 1903년에 태동했다. 그해 겨울에 원산에서 미스 화이트(M. C. White)와 캐나다 장로회 여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기도회를 시작한 것이 대부흥 운동의 발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기도회 중에 어떤 한 남자 선교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 체험을 설교했는데,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서 그 다음 주일 예배 후에 한 한국인 신자가 아내를 돌보지 않은 죄를 자복하는 회개 운동이 촉발되었다. 마침 그날 저녁에 스칸디나비아 선교연맹의 프란손(F. Franson) 목사가 중국에서 와서 하디(R. A. Hardie)의 집에 머물면서 기도회에 참석했으며, 기도회는 점차 확대되어 교파를 초월해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모두가 창전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계속하고 성경 공부를 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그 다음 해 정월에는 다시 원산 삼파교회에서 연합 사경회가 열렸고, 그 집회에서 장로교 선교사 업아력(A. F. Robb) 목사, 전계은(全啓恩),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등이 은혜를 받고 복음 선포에 나섰다. 그 해 여름에 하디 선교사의 주도 하에 제직 사경회가 열리는 등, 원산에서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통회하며 기도하는 운동이 계속 이어졌다.

 

원산에서 시작된 기도와 회개 운동은 먼저 평양으로 번졌다. 1906년 여름에 평양의 선교사들이 하디 목사를 초청해서 사경회를 개최하고 [요한 일서]를 공부하고 성령 세례를 갈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운동은 서울로 전파되었다. 서울에서는 미국에서 온 존스톤(H. A. Johnston) 목사가 인도와 웨일즈(Wales)의 부흥 운동에 관한 보고를 했는데, 그것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화에 의하면 존스톤 목사가 "여러분 중에 성령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일어서시오"라고 했을 때, 길선주 신학생이 일어섰다고 한다.

 

드디어 1907년에 이르자 원산에서 시작한 부흥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회개 운동의 폭발은 먼저 평양에서 일어났다. 구체적으로는 1907년 1월 6일 평안남도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함께 모여 열흘 동안 낮에는 성경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전도 집회를 하는 중에 폭발적인 부흥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방의 신자들이 자비로 집회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하루 참석 인원도 남자만 1,500명이었으며 여자들은 예배당 안에 자리가 없어서 밖에 앉게 할 정도였다는 데서 그 폭발성을 짐작할 수 있다.

 

성경 공부를 통한 집회였던 장대현 교회 사경회는 기도 운동으로 발전했다. 1월 14일에 열린 사경회에서 이길함 목사가 설교 후에 두 세 사람에게 기도할 것을 부탁드리자 20여명이 한꺼번에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 목사는 "그러면 모두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했고,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통성 기도를 했다. 통성 기도 소리가 마치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것이 한국 교회의 첫 통성 기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경회는 성경 공부 중심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기도회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집회로 발전했으며, 다양한 기도회들이 생겨났다. 예컨대 새벽 기도회, 저녁 기도회, 철야 기도회, 산상 기도회, 구국 기도회 등의 기도회 모임은 이 사경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1907년 정월 초에 교회 사경회에서 시작된 기도와 회개 운동은 교회 바깥의 학교로까지 퍼져나갔다. 2월에 개학과 함께 기독교 학교 2,500명의 학생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3월에는 장로회 여자성경학교에서 그리고 5월에는 장로회신학교에서 선교사, 교수, 학생 모두가 특별 사경회를 개최했다. 학교로 기도와 회개 운동이 전파되면서 학생들이 참회와 더불어 새로운 전도자로 헌신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평양에서 시작한 사경회를 통한 회개와 부흥 운동은 전국 각계 각층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예컨대 1907년 3월에는 장로교 부인 사경회가 12일 간에 걸쳐서 열렸으며, 이를 시작으로 지방마다 부인 사경회가 확산되었고 특히 부인들을 위한 여전도회 사경회가 성황을 이루었으며 훗날에 여전도회 도사경회로 발전했다. 교회들 역시 지역마다 연합 사경회를 가졌으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연합으로 초교파적인 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래서 선교사 하디, 게르딘(J. L. Gerdine), 길선주 목사 등은 교파를 초월해서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집회를 열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확산되어 가는 부흥 운동을 목격한 존 모트(J. R. Mott)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한국은 비기독교 국가들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다.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보다 더 크고 놀라운 선교의 결과가 나온 선교지는 없었다".

 

이 운동은 국경을 넘어서 만주와 중국으로 퍼져나갔다. 만주 지방에 있던 목사들이 평양까지 와서 부흥 집회에 참석하고 은혜를 받고 돌아가 부흥을 일으키고 중국 전역으로까지 운동을 확산시켰다. 이렇게 해서 1907년에 평양에서 폭발한 부흥 운동은 국내외 전도와 해외 선교로 발전했다.

 

1907년의 부흥 운동은 다음의 몇 가지 특성들로 인해 초기 한국 교회의 형성과 성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1907년 운동은 영적 회심을 일으켰다. 1908년에 일본 감리교 감독이었던 해리스(M. C. Harris)가 볼티모어에서 열린 총회에서 "스스로 의인 행세하는 유교 신자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불교도들, 수 천명의 마귀 숭배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옛 것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한 증언은 당시의 부흥 운동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둘째, 1907년 운동에 의해 촉발된 회심은 화해의 성격을 지녔다. 회심은 앞에서 정의했듯이 하나님과 인간 간과 인간들 간의 관계 회복, 곧 화해를 의미한다. 먼저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다음에 이웃들과 화해하는 관계 회복이 1907년의 대부흥 운동에서 일어났다. 무엇보다 후자의 중심되는 것으로는 동서의 화합, 곧 화해가 이루어졌다.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던 한 선교사의 고백을 들어보자. "이때까지 (1907년) 나는 다소간 '동은 동이고 서는 서이다', 양자간에는 참 친화성이나 공동으로 만날 광장이 없다는 건방진 생각을 가졌었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한국인들은 서방이 가졌던 것 같은 종교적 체험은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부흥 운동은 나에게 두 가지를 확실히 가르쳐 주었다. 첫째는 표면상으로 서방과는 천 가지나 다른 것들이 있을지 모르나 한국인들은 그 마음에 있어서 또한 모든 근본적인 것들에 있어서는 서방의 형제들과 일치한다. 둘째는 동방은 서방을 가르칠 많은 것들만 아니라 깊은 것들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이것들을 알기까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전히 모른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교인들 간에도 회심을 통한 화해가 이루어졌다. 방위량 선교사의 설교 중에 한 장로는 다음과 같이 회개했다. "나는 하나님을 대하여 싸운 죄를 지었습니다. 교회의 장로이면서 나는 나의 형제 장로를 미워할 뿐만 아니라 방목사도 미워했습니다. 목사님,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습니까?".

 

셋째, 1907년 운동은 사경회를 통해 시작되고 발전했다는 특징을 지닌다. 사경회는 단순한 부흥 집회가 아니라 기도회와 성경 공부 모임이었으며, 그러한 특이한 형태의 사경회는 한국 교회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게 했다. 기도와 성경 학습 중심의 사경회는 서양 교회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 자체에서 개발하고 자생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말하자면 서구 교회의 부흥 운동을 한국 교회에 현장화시킨 형태가 사경회였다. 그 중심을 사경회에 둠으로써 사경회 참석자들 모두가 기도하고 회개하고 또 성경을 배우고 전도 사명을 깨닫고 선교에 나설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사경회를 통한 교회 갱신과 부흥 운동은 교회 지도자와 평신도 모두를 망라한 모든 교인이 전도자로 거듭나는 한국 교회 특유의 선교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게 했다.

 

1907년 운동은 교회와 교파를 초월하는 대연합의 에큐메니칼적 성격을 가졌다. 교회 갱신 운동은 특정 교회나 교파 안에서 자체의 자정 운동으로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1907년 운동은 한반도의 모든 교회가 모든 교인이 모든 선교사가 분리의 벽을 깨뜨리고 하나로 연합해서 전국적인 회개와 부흥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대연합을 일궈낸 이 운동은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07년 운동은 초기 한국 교회의 급속한 수적 성장에 기여했다. 언더우드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06-7년 사이에 장로교회는 불과 1년만에 34%에 해당하는 18,857명이 늘어나서 교인 수 54,987명에서 73,844명으로 성장했다. 감리교회는 18,107명에서 39,613명으로 무려 118%나 불어났다. 이 통계로 계산해보면, 장로교회 교인은 3명이 1명을 전도한 셈인데 비해서 감리교회는 교인 1인당 1.18명을 전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부흥 운동은 이처럼 양적인 교회 성장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기독교회 전체의 성장을 가져왔다. 예컨대 기독교 학교 성장도 부흥 운동과 궤를 같이해서 일어났다. 1906-7년 사이에 기독교 학교는 208개에서 344개로 증가했다. 학생 수 역시 1906년에 3,456명이었는데 1907년에는 7,504명으로 4,048명이 증가했다.

 

1907년에 그 절정에 이른 부흥 운동은 해가 바뀌면서 퇴조하기 시작했다. 운동의 그러한 위축과 쇠퇴는 처음부터 배태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운동의 시초부터 개인적인 회개와 회심 그리고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에 국한됨으로써 사회 전체 성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으며, 자연히 동원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여서 회개하고 기도하고 성경 공부를 하는 사경회는 비참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 구실을 했으며, 개인적인 안식과 평화를 넘어선 사회 전체에 대한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게 했다. 특히 합방을 향해 급박하게 옥죄어온 일제 침략과 그로 인한 정치 사회적 불안정을 외면하고 교회라는 고립된 세계 안에서 영혼의 안식과 구원을 추구하게 한 것은 그 운동을 태생적으로 제한시켰다.

 

1907년의 부흥 운동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역시 실패했다. 그것은 사회 정치적 위기를 도외시한 채 영혼 구원에만 치중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09년 9월에 남감리교회는 연차 대회에서 '20만명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채택했으며, 이어서 서울에서 열린 복음주의 선교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는 '백만 명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백만 구령 운동"(The Million Souls Movement)안을 채택했다. 1910년 선천에서 열린 제4회 장로회 독노회도 7인 대표를 선출해서 100만 구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그 날은 공교롭게도 한일 합병된 지 20일이 되는 날이었다. 이처럼 나라를 잃었는데도 백만 구령 운동과 같은 영혼 구원에 전력하도록 함으로써 부흥 운동의 재개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교회가 부흥 운동을 재개 또는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1907년 운동은 선교라는 결실을 맺었다. 한국 교회는 1907년을 기점으로 해서 "선교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해외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 선교운동사에서 1907년은 대부흥 운동의 해만 아니라 장로교회 독노회가 조직된 해이며,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한 해이기도 하다. 장로교회는 독노회를 조직한 후에 노회 안에 전도부를 설치하고 전도에 박차를 가할 것을 결의했다. 그 첫 전도 사업으로 신학교 졸업생 7명 가운데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리고 2년 후에 장로교회는 최관휼 목사를 불라디보스톡에, 한석진 목사를 일본 동경에 파송했으며, 여전도회에서는 이선광 선교사를 제주도에 파송했다. 백만 구령 운동의 일환으로 김영제 목사를 북간도에, 김진근 목사를 서간도에, 방화중 목사를 미국과 맥시코에 사는 동포들을 위해서 파송했다. 사실상 장로회신학교 7명의 졸업생 중에 절반은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그 후에도 수많은 선교사가 중국, 일본, 만주, 러시아 지역으로 파송되어 세계 선교의 기초석을 다졌다. 이처럼 1907년의 교회 부흥 운동을 보면, 폭발적인 회개와 갱신의 열정은 식었지만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운동은 해외 선교 사역으로 이어져서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기반을 일찍이 놓은 셈이었다.

 

 

6. 결론: 사례 비교

영국의 웨슬레 운동과 한국의 1907년 부흥 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대조를 이룬다. 우선, 웨슬레 운동은 웨슬레 형제와 조지 휫필드와 같은 지도자에 의해 시작되고 조직화되었지만 1907년 운동은 몇몇 주동 인물을 거론할 수는 있지만 선교사나 목사와 같은 특정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기보다는 집회 중심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대중 운동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웨슬레 운동은 존 웨슬레가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을 조직하고 엄격한 율법주의적 규율들을 실천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1791년에 웨슬레가 사망하기까지, 그리고 그 후에 감리교회가 설립될 때까지 적어도 70년 동안 지속된 운동이었다. 반면에 1907년 운동은 물론 1903년에 원산에서 여선교사들의 주도 하에 열린 기도회가 그 발단이 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운동은 1907년에 전개되었으며, 곧 그 절정에 이르렀다가 사그러든 매우 단기적인 사건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1907년 운동은 그 해에 활활 타오르다가 금방 꺼져버린 횃불과 같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웨슬레 운동은 조직화되었는데 비해서 1907년 운동은 비조직적이고 비체계적이었다. 웨슬레 운동은 협회를 조직해서 평신도 지도자에게 운영을 맡기고, 연회, 단, 속회를 만들어서 운동을 조직화했으며, 평신도들을 안수해서 그러한 조직을 이끄는 담당 지도자로 세웠다. 이 때문에 웨슬레 운동이 영국 국교회와 분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리교회로 독자적인 교단을 설립하고 제도화할 수 있는 조직적 제도적 기반을 운동 기간 중에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1907년 운동은 기존의 교회 안에서 일어났으며, 교회를 분열시키기보다는 연합 집회를 통한 결속을 가져왔다. 또한 1907년 운동은 집회 참석자들을 조직화해서 지속적으로 운동을 이어나가도록 하기보다는 그들을 회개시키고 각성하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회심시키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장소를 옮겨가면서 개최되는 집회가 운동을 이어나가도록 함으로써 조직화되지 못했다.

 

두 사례는 이처럼 뚜렷한 대조를 이루지만 동시에 유사한 점들도 지적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두 운동 모두 회개하고 기도하고 성경 공부를 하는 모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두 사례 모두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교회를 갱신시키며, 이러한 교회 갱신이 교회 부흥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두 운동 모두가 회개와 갱신으로 출발한 데는 공통의 어떤 원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18세기의 영국과 1907년의 조선이 처한 상황은 전혀 달랐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것은 두 사회 모두, 두 교회 모두 어떤 위기 국면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18세기의 영국과 영국 교회에는 산업 혁명과 세속적인 사조가 위기를 조성했으며, 1907의 조선은 외세의 침략과 식민지 체제의 시작 그리고 봉건 질서의 붕괴와 기존의 유교적 윤리 규범의 해체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와 같이 두 사례 모두 위기에서 교회를 다시 소생시키고 일으켜 세우기 위한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더 나아가서, 두 사례 모두 회개와 갱신 운동으로 출발했지만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교회 부흥 운동으로 발전했다는 유사점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두 운동은 선교 운동으로 나아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웨슬레 운동은 윌리엄 캐리와 같은 위대한 선교사를 배출했으며, 캐리에 의해 웨슬레 운동은 세계 선교 운동으로 한층 격상되었다. 1907년 운동 역시 연이은 사경회 불길은 잡혔지만 그 때 지펴진 선교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역사를 일궈냈다.

 

이와 같은 두 사례를 비교해 보면, 회개, 갱신, 그리고 선교 운동은 이어지는 일련의 연쇄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교회 갱신과 선교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인지할 수 있다. 따라서 회개없는 갱신이 있을 수 없으며, 갱신이 일어나면 반드시 선교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