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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서 시를 읽다(21)
- 그라스(향수마을), 칸, 니스(마티스 미술관), 망통(장콕도), 모나코(그레이스 켈리)
김철교(시인, 배재대 명예 교수)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특히 남쪽 지중해 해변을 끼고 있는 도시들은 예술가들의 발자취가 가득한 곳이다. 니스(Nice)에는 샤갈과 마티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니스에서 기차를 30여분 타고 카뉴쉬르메르(Cagnes-sur-Mer)에서 가면 르누와르의 미술관이 있다. 그라스(Grasse)에서 향수의 역사를, 모나코(Monaco)에서는 그레이스켈리의 미소를, 칸(Cannes)에서는 기라성같은 배우들의 손자국을, 망통(Menton)에서는 장콕토의 그림과 영화와 시와 조각이 해변에 맞닿아 있는 작은 성 속에서 우리를 받기고 있다. 생폴드방스(Saint-Paul Devence)에서는 마그재단 미술관과 샤갈의 무덤이 있는 성을 만날 수 있다. 앙티브(Antibes)에는 피카소의 숨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좀 멀기는 하지만 아를(Arles)에는 고호의 흔적들이 배어 있는데 하루에 다녀올 만하다.
6월 25일(화): 칸과 그라스(향수마을)
아침 일찍 그라스 향수마을을 향해 길을 나섰다. 기차 시간표에는 분명히 니스에서 그라스까지 가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기차는 중간역인 칸에서 멈춰 섰다. 칸에서부터는 철도역에서 제공하는 무료 셔틀버스로 가야했다. 중간 기차역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오히려 잘 되었다싶어 칸에서 잠시 틈을 내어 레드카펫을 밟아보았다.
1. 칸(Cannes)
기차 길로 보면 그라스와 니스 중간에 국제영화제(Cannes International Film Festival)로 유명한 칸이 있다. 이탈리아의 베니스 국제 영화제(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독일의 베를린 국제 영화제(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와 더불어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힌다.
1932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가 영화 종주국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기획하여, 1946년 9월 20일 제1회 칸국제영화제가 열리게 되었다. 최고 영화에 주어지는 ‘황금종려상’(palme d’Or) 트로피는 프랑스 영화감독이자 시인인 장 콕토(Jean Cocteau)가 해변 가로수로 많이 자라고 있는 종려나무 잎사귀를 본떠서 디자인하였다. 주(主)상영관인 팔레 데 페스티벌(Palais des Festivals et des Congres)에서 경쟁부문 작품이 상영되며, 화려한 의상을 입은 배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개막식 레드카펫 세리머니도 여기에서 매년 5월 열리고 있다.
칸은 예술로서 뿐만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영화가치를 평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 영화 전문가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장소이기도 하다.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 1984〉가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었으며,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영화는 제52회 영화제에 출품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1999〉이었다.
<매년 5월이면 열리는 칸의 국제영화제 행사장 앞 레드카펫에서, 정다운 연인 모습을 연출하다>
2. 그라스(Grasse)
그라스는 프랑스 향수원액 생산의 70%정도를 차지하는 향수원료 생산지이자, 세계 최고의 향수 조향사를 길러내는 곳이다. 따뜻한 햇볕과 비옥한 토양, 북풍의 찬바람을 막아 주는 분지 등 천혜의 기후와 입지조건으로 장미, 라벤더, 자스민 등 향수 원료로 사용되는 각종 식물들이 가장 잘 자라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라스에는 프라고나르(Fragonard), 몰리나르(Molinard), 갈리마르(Galimard) 등의 향수공장, 향수박물관, 향수연구소가 있으며, 국제첨단과학기술단지가 있는 인근 소피아 앙티 폴리스(Sophia Antipolis)에는 샤넬(Chanel)의 향수연구소가 있다.
우리 부부는 물어물어 프라고나르 향수공장(Parfumerie Fragonard)을 찾았다. 마침 단체 여행객이 있었는데 영어로 해설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어 동참하였다. 많은 꽃들에서 향료를 추출하고 걸러내어 무수한 향 테스트를 한 후의 향수가 나오기까지 전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다양한 향수병과 용기, 라벨 등의 변천사를 구경할 수 있는 전시장과, 향수, 향료, 비누 등을 살 수 있는 판매장도 있다.
<프라고나르 향수공장 견학장소> <향수제조설비 등 각종 자료 전시실>
향수박물관은, 1782년부터 있었던, 니스에서 가장 오래된 향수공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1926년에 프라고나르 향수공장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향수회사 이름은 그라스 출신의 유명한 화가(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 이름을 차용하였다. 박물관 소장품은 향수역사상 3천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19세기 향수병과 제조기기 등의 자료까지 소장하고 있다. 설립자의 손자이자 예술과 역사를 사랑하는 코스타(Jean Fracois Costa, 1921-2012)가 수집한 것이다.
1층에는 향수박물관이 있고, 아래층에는 생산작업장이 있다. 부근에는 프라고나르 미술관(Musee Fragonard)도 있는데 여기에는 18-19세기의 그라스 출신 화가 세 사람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제라드(Marguerite Gérard, 1761-1837), 말레(Jean-Baptiste Mallet, 1795-1835)의 작품을 코스타가 수집한 것이다.
그라스 향수산업은 가죽산업 때문에 발달되었다고 한다. 6,7세기경 켈트족을 피해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정착해서 형성된 그라스에서는 가죽산업이 발달하였다. 당시 그라스 사람들은 동물가죽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향료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발전해 그라스의 향수산업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그라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 『향수』가 더욱 그라스를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85년 발간 된 이 소설은 독일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가 썼다. 후각이 천재적으로 발달한 주인공 그루누이는 지상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독특한 향기를 지닌 처녀들을 차례로 살해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생아 그루누이는 우연히 황홀한 향기를 흩날리고 가고 있는 처녀를 뒤따라가서 그녀의 향기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살인을 하게 된다. 그 후 그루누이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향수를 만들기 위한 처녀 살인을 계속해서 저지르게 된다.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은 2006년에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라스에서는 많은 훌륭한 조향사를 배출하였다. 고대에 향을 만드는 사람은 주로 제사장이나 주술사였으며, 그리스-로마시대에는 화학자들이 향료를 제조하였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수도사들이, 17세기부터는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화학자들이 제조하였고, 19세기에 이르러 전문 조향사들이 직접 향수회사를 설립하여 다양한 브랜드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20세기에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고급 의상점)들이 자신들의 패션세계를 향수에 담아내기 시작하는데 그 선두주자가 바로 코코샤넬이다. 그녀는 “향기가 없는 여자는 미래가 없는 여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1921년 샤넬은 조향사 어네스트 보(Earnest Beaux)가 개발한 ‘Chanel N°5’라는 브랜드의 향수를 출시했다. 샤넬은 5라는 숫자를 행운의 숫자로 생각하여 상품이 출시되고 나서 5개월째가 되는 5일에 출시 쇼를 했다. 그 후 샤넬 N°5 향수는 인기를 얻게 된다.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가 샤넬 N°5는 “어떠한 꽃에도 존재하지 않는 향”이라고 묘사한 바 있고, “잠잘 때 샤넬 N°5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다”고 한 마릴린 먼로의 이야기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2014년 9월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문화 샤넬전 - 장소의 정신’(Culture Chanel-The Sense of Places)이라는 이름의 샤넬전시회가 열렸다. 가브리엘 샤넬(1883-1971)의 일대기와 예술과 디자인, 패션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기획의도를 가진 전시회다. 특히 샤넬은 시인, 화가 등과 교류하면서 영감을 얻었고, 그들의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특히, 쟝콕토, 피카소, 모딜리아니, 마리 로랑생 같은 화가와 말라르메, 브르통 같은 시인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이들이 그린 샤넬의 초상화와 작품집들도 함께 전시되었다.
<마릴린 먼로를 매혹시킨 향수, 샤넬 5>
그라스에서 니스로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탔는데 요금이 1유로였다. 버스도 아주 새 차로 쾌적하고 좋았다. 프랑스에는 사회주의여서 정부에서 관리하는 교통수단은 저렴한 것 같다.
니스로 돌아와서는 해변에서 푸른 파도가 해변가 몽돌을 굴리며 들고나면서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푹 쉬었다. 몇 달이고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니스를 중심으로 한 프로방스 지방에서 그림을 그리며 말년을 보냈는가 싶다.
6월 26일 (수): 마티스 미술관, 장콕도 미술관, 모나코 궁전
오전에 시내버스를 타고 마티스 미술관을 거쳐 기차를 타고 망통으로 가서 장콕도 미술관을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나코에 들려 궁전과 모나코성당, 그레이스켈리 기념장미공원에 다녀왔다.
마티스 미술관(Musée Matisse)
6월21일부터 9월 23일까지 니스에 있는 여덟 곳의 크고 작은 미술관들이, 마티스미술관 개관 50주년을 기념하여, 합동으로 마티스를 기리는 여름 행사(Nice 2013, Un ete pour Matisse)를 하고 있었다. 물론 시미에(Cimiez)에 있는 마티스미술관이 중심이 되지만 표 한 장을 사면 니스에 있는 미술관 여덟 곳 모두를 다 방문할 수 있다. 니스 해변가를 중심으로 마티스가 머물며 그림을 그렸던 장소를 설명하는 팜플렛을 보니, 니스 해변을 누비며 살았던 화가가 마티스였다.
프랑스 북부 카토(Cauteau)에서 1869년 출생한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1917년 12월에 니스 해변가(Beau-Rivage)에 작업실을 마련하면서 니스에 정착하여, 40여년을 니스와 니스 주변지역에서 보냈으며 1954년 11월 3일 시미에(Cimiez)에서 죽었다.
<마티스 특별전 팜프렛 표지> <니스 변두리 ‘시미에’에 있는 마티스 미술관>
니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니스 외곽에 있는 시미에(Cimiez)로 갔다. 마티스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색으로 된 마티스미술관은 마티스가 기증한 작품들을 기초로 1963년 설립되었다. 미술관은 생전에 마티스가 살았던 레지나 저택(Hotel Regina)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창 발굴 중인 로마유적지와 시미에 수도원, 프란시스칸 미술관(Musee Franciscain) 등도 인접해있다. 마티스 미술관에는 대표적인 회화 작품들, 조각들, 소묘, 일러스트 북 등은 물론 생전에 그와 가족들이 사용하던 소품들과 문서들이 전시되고 있다. 마티스와 마티스 가족들 그리고 프랑스 정부가 소유하고 있던 작품들이 기증되어 가장 많은 마티스 작품을 보유한 미술관이 되었다. 마티스 미술관에 소장된 마티스의 작품은 그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일생에 걸친 작품경향의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마티스는 처음에는 파리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로 전향하였다. 1892년 파리의 장식 미술학교에 적을 두고, 루브르미술관에서 모사를 하고 있는 사이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 1826-98)의 눈에 띄어 그의 미술교실에 입학하였다. 마티스는 1904년 파리의 볼라르(Ambroise Vollard)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지면서 비평가로부터 “마티스의 작품은 명료하면서도 강렬한 시각”을 구성하고 있다는 평을 들었으며, 우리의 시각과 감각을 환기시키는 그림을 평생 그렸다. 마티스는 「화가에 대한 논고(Notes on a Painter)」라는 글에서, “내가 꿈꾸는 것은 아무런 문제나 우울한 주제가 없는 균형과 순수, 고요함을 보여주는 예술이다. 모든 정신적인 노동자, 사업가, 문인을 위한 예술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미술이며, 육체적인 피로를 풀게 해주는 편안한 안락의자와도 같은 예술”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마티스에게 색채는 감정과 소통하는 미적 요소였으며, 미술과 시와 음악을 조화롭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춤 II (Dance II, 1909-10, 캔버스에 유채. 260X391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미르타주 미술관, 러시아>
<음악(Music, 1910, 캔버스에 유채,
260 x 389 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미르타주 미술관, 러시아)>
「춤 1」(Dance I)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The Museum of Modern Art)에, 「춤 2」(Dance II)는 러시아 상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춤 2」는 마티스 후원자였던 러시아의 부호 세르게이 슈츄킨(Sergei Ivanovich Shchukin)의 주문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Dance II'는 'Dance I'에 비해 좀 더 격정적인 색조로 바뀌었고 붉은 색 춤꾼들의 움직임이 두드러져 보인다.
“춤”은 빨강, 녹색, 파랑, 단 세가지 색 뿐이다. 이 세가지 색은 빛의 3원색이다. 물감으로 그렸지만 빛의 3원색이 만들어 내는 현란함이 우리 눈을 자극한다. 마티스 예술의 진수인 단순성과 강렬함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푸른 하늘과 녹색 언덕이 단순하게 처리되었고, 다섯명의 무희는 강렬한 붉은색으로, 서로 손을 맞잡고 돌아가며 강렬한 생명력을 분출하고 있다. 마티스는 색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화면을 평면화했다. 시츄킨은 「춤 2」이 마음에 들어 마티스에게 짝이 될 만한 음악을 주제로 한 그림을 요청하였다. 「춤 2」와 같은 색, 같은 형태의 구성이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음악」에서는 바이올린과 피리의 선율이 색채와 함께 어울려 감동을 주고 있다.
마티스는 가정에 충실하였으며, 젊은 모델들이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매혹된 적은 있었을지라도 깊은 외도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인 아말리에(Amélie)는 마티스의 모델로 일했던 시베리아 출신의 젊은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Lydia Delektorskaya)와의 관계를 의심하여 자주 다투다가 1939년 마티스와 이혼하게 된다. 마티스는 1941년 암 수술을 받았으며, 리디아는 13년 동안 마티스 곁을 지키면서, 수많은 작품의 모델도 되었다. 특히 수술 후 이젤 앞에서 작업하기가 힘들어 붓 대신 가위로 색종이 오려붙이기에 몰두하였는데 리디아는 곁에서 충실히 시중을 들었다. 이 종이 작업을 통해 마티스는 마침내 진정한 자아와 마주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947년 마티스는 『째즈(Jazz)』라는 이름의 작품집을 한정판으로 출간하게 되는데, 이 책에는 그의 화려한 종이 작업 작품들과 마티스의 당시 생각을 담은 글들이 실려 있다.
마티스는 종이오리기를 "가위로 그렸다"라고 기술했고, 그중 20개의 작품을 골라 『째즈』에 수록하였다. 책의 제목을 정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삽화 중 다수가 서커스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라서 처음에는 '서커스'라는 제목을 붙였으나, 재즈 음악의 열광적인 양식으로부터 많은 착상을 받았기 때문에 결국 '재즈'로 결정한 것이다.
마티스의 작품집『째즈』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니스는 세계적인 째즈 축제로도 유명하다. 1세기경 세워진 고대 로마 원형 경기장 유적지 아레나 드 시미에(Arènes de Cimiez)와 주변의 유적지 공원을 축제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1948년 처음 개최된 니스재즈축제(Nice Jazz Festival)에는 재즈의 거장으로 불리는 미국 뉴올리언스 출신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과 그의 올 스타즈(Louis Armstrong and his All Stars) 밴드가 무대를 장식했다. 그 뒤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재즈 연주자들이 참석하면서 축제는 유럽 최고의 재즈 축제라는 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푸른 누드(Nu bleu IV, 1952, 빠비에 꼴레, <이카루스 (Icare, planche VIII),
103X74Cm, 마티스미술관, 니스)> 1947, 42X32.5Cm,
오려붙인후 판화, Villa Arson 소장, 니스>
「푸른 누드」 시리즈는 마티스의 작품 중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마티스는 눈으로만 보는 그림이 아니라 풍부한 색을 통해 마음으로 보는 그림을 원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파장이 긴 빨간색보다 파장이 짧은 파란색이 훨씬 더 뜨겁다는 것을 알게 되어 파란색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은 대단하였다. 게다가 마티스는 몸이 단지 피부색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뜨거운 생명의 불꽃(파란색)을 담고 있는 여성을 그리고 싶었다. “색은 단순할수록 내면의 감정에 더 강렬하게 작용한다." 마티스가 한 말이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빠삐에 꼴레(오려 붙이기) 기법은 마티스의 작품 말기에서 사용된 기법이다. 다행이도 이 기법 덕분에 마티스는 불편한 몸으로도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이카루스」는 『재즈』라는 그의 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카루스는 갇혀있던 동굴을 빠져나와 아버지가 깃털을 밀랍으로 고정시켜 만든 날개를 달고 날아올라 도망친다. 그러나 하늘을 날게 된 것에 자신감이 붙게 되자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높이 날아 태양 가까이에 갔던 이카루스는 결국 밀랍이 녹는 바람에 깃털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 바다에 추락하여 죽고 만다. 마티스의 <이카루스>는 추락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늘은 파란색 바탕으로, 검은 이카루스의 가슴에는 동경심을 가진 인간의 심장이 빨간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노란색의 별 무늬는 날개의 깃털로 보인다.
2. 장 콕토 미술관(Musée Jean Cocteau)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 화가, 극작가, 영화감독이었던 장 콕토(Jean Maurice Eugène Clément Cocteau, 1889-1963)의 작품을 전시하는 첫번째 미술관은 망통이 모나코 공국의 영토였던 시절 모나코 왕 오노레 2세(Honoré II, 1598-1662)의 명으로 건립된 바닷가 요새 건축물로, 장 콕토가 버려졌던 이 건물을 단장하였으며, 장 콕토가 죽은 지 3년 뒤인 1967년에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장콕토가 마련한 미술관) (장콕토가 장식한 망통 시청의 결혼식장)
2층 규모의 미술관에는 장 콕토가 남긴 수채화, 파스텔 그림, 소묘, 스케치, 조약돌로 만든 모자이크, 벽화, 도예품, 태피스트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조약돌 모자이크가 바닥과 창틀에 꾸며져 있고, 장콕토가 지중해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과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다. 장콕토가 만든 영화를 소개하는 방도 마련되어 장콕토의 일생과 작품을 소개하는 필름도 돌아가고 있었다.
망통 시내에 있는 시청에는 장 콕토가 1958년에 프레스코화로 장식한 결혼식장인 살레 마라주(Salle des Mariages)가 있고, 연인의 모습 등 프레스코화가 벽과 천정에 가득하였다.
또한 조금 떨어진 바닷가에 장 콕토 작품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미술관이 2008년 벨기에 출신 미국인인 미술수집가 원더만(Sevrin Wunderman)의 기부에 의해서 지어졌다. 첫 번째 미술관은 좁고 작은 관리실 밖에 없으나, 새로 마련된 미술관은 널찍하여 많은 작품을 전시할 수 있고 관람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각종 부대설비도 갖추어 있다.
<잠자는여인(Sleeping Woman, 1951, 캔버스에 유채, 66.5 X 95 Cm, 장콕토 미술관, 망통>
장콕토가 1950년에 산토-소스피르(Santo Sospir)에 집을 마련했을 때, 큐비즘에 영향을 밭은 그림들을 그렸다. 장콕토는 피카소와 많은 시간을 보냈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52년에는 뮌헨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림, 드로잉, 태피스트리 등이 전시되었다.
장콕토는 파리 근교의 메종라피트 출생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일찍부터 파리 사교계에 출입하였다. 20세 때 처녀 시집 『알라딘의 램프』(La Lampe d’Aladin, 1909)에 이어, 『희망봉』(Le Cap de Bonne-Espérance, 1919), 『포에지』(Poésie, 1920) 등을 출간하였다.
장콕토는 러시아 발레단의 디아길레프, 작곡자 스트라빈스키, 화가 피카소, 시인 아폴리네르는 물론 샤넬여사와도 친분이 있었다. 적지 않은 그림을 그렸으며, 시는 물론 평론집, 발레단 각본, 희곡, 소설 등도 썼다. 또한 무대장치와 교회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손을 댔다. 마티스는 입체파적 미학을 작품에 담아서 새롭고 기발한 환상의 예술 형식을 만들어 냈다. 말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 <시의 왕>으로 추대되는 등 명예를 누리다가 1963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든 영화 ‘오르페우스(1950)’는 칸 영화제 최고작품상을 받은 바 있으며,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수여하는 황금종려상의 디자인은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장콕토 작품이다. 이 디자인은 1955년부터 사용해오고 있다. 그가 감독한 영화 『시인의 피』(Le Sang d’un Poete, 1930)는 초현실주의 영화로, 영화의 대사는 거의 없으며, 침묵과 음악으로 채워져 있는데, 독특한 아방가르드 분위기가 넘쳐 난다.
그의 시 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귀」는 원래 칸 연작 단시 중 여섯 번째 시이다. 귀와 조개껍질과의 시각적 유사점에서 출발하여, 그 조개껍질이 파도 소리로 이어지고, 다시 그 파도 소리로부터 자연스럽게 귀로 되돌아오는 구성이다. 또 다른 단시 「산비둘기」도 행간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귀
- 장 콕토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
산비둘기
- 장 콕토
두 마리의 산비둘기가 상냥한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그 나머지는 차마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3. 모나코 공화국(Principality of Monaco)
<모나코에 있는 켈리 기념 장미공원.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리모델링 중이어서 정문이 닫혀 있었다.>
기차로 니스에서 모나코 몬테카를로 역까지는 20분이 소요된다. 모나코는 BC 10세기경 페니키아인이 최초로 거주하다가 로마에 정복되었고, 1297년부터 이탈리아 그리말디가의 영지가 되었다. 1861년에 프랑스 보호 하에 주권을 인정받았고, 1919년 베르사유 협정에서는 독립과 주권을 모두 보장받았다. 독립국이면서도 국방권과 외교권은 프랑스가 가지며 공작 임명권도 프랑스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남쪽으로 지중해에 면한 해안을 따라 길이 3㎞, 너비 500m의 땅을 국토로 하며, 바티칸시국(면적 0.44㎢)에 이어 세계 제2의 소국이다. 카지노와 관광이 주요 수입원이다.
“내 궁전은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넓어요.” 라고 말하면서 모나코 왕자 레니에 3세가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며 그레이스 켈리에게 청혼한 일화는 유명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세기의 결혼식 이후 모나코는 미국 등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관광대국으로 급성장했다.
전설에 헤라클레스가 지나간 곳에 세워진 신전 자리라는, 모나코 빌(Monaco Ville)은 높은 곳에 위치한 성채여서 입구까지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다. 입구에 들어서면 수도승으로 위장해 모나코를 탈환했던 프랑수아 그리말디(François Grimaldi)의 동상이 우리를 맞아준다.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결혼식이 실제로 열렸던 왕궁과, 부부가 잠들어 있는 성당의 입구에는 결혼식 사진 등 여러 가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절벽아래 해변을 내려다보면 많은 요트들이 가득한 항구와 아름다운 집들이 한 폭의 천국 그림을 펼치고 있다. 정오쯤 열리는 왕궁 앞 위병 교대식은 모나코의 인기 높은 이벤트 중 하나이며, 왕궁에는 지금도 왕이 살고 있다.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 1929-82)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194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가서 미국극예술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Dramatic Arts)에 들어갔다. 그후 브로드웨이 무대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활동하였으며, 『14시간』(Fourteen Hours, 1951)에 단역으로 출연하여 영화에 데뷔하였다. 1954년에 『갈채』(The Country Girl)에서 알코올중독에 빠진 남편의 재기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시골 아내를 연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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