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다. 한주의 종점이다.
아내와 술 한 잔 때리던 젊은 날 족쇄를 벗어던진 발걸음은 가벼웠다. 금요일은 황금빛 다리였다. 다음 날 오후엔 산에 가는 날이다. 평소 아내를 시샘하던 산들은 쌀쌀맞게 악수도 없이 우리를 냉랭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햇살이 깔리면 당신의 품으로 포근하게 안아 주었지.
저만치 앞서 걸어가던 시간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없이 돌아본다. 내가 눈인사를 건네며 먼저 알은체하자
“이제 옷을 벗을 때도 되었잖아”
표정도 없이 한마디 한다.
“알았어. 짜~사~ (항상 도도하게 굴더니 웬일이지)”
잘 있으란 말도 없이 가버리는 놈의 뒤통수에 욕을 실컷 해준다. 속이 좀 후련하다.
억세게 추웠던 작년 겨울. 아들이 혼례를 올렸다.
어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휠체어에라도 앉아서 그 모습을 보았다면, 혹시 툭툭 털고 웃으며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내는 나 홀로 여행을 떠났다.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벌써 7년 넘게 편지도 없고 전화도 하지 않는다. 무척 재미가 있나 보다. 그곳은 외로움도 그리움도 욕심도 시간도 없는 놀이동산이 틀림없다. 전화라도 하라고 입이 닳도록 소리쳐 보아도 소귀에 경 읽기다. 특히 오늘처럼 억센 비가 쏟아질 때면 더 생각이 난다. 우울한 마음을 막걸리 한 잔으로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 웬만한 비는 그냥저냥 맞으며 다닐 수도 있겠지만 우동 다발로 내리는 오늘 같은 날은 우산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산이다.”
“얼라! 내가 우산이지... 여자가 무슨 우산?”
“당신은 우산을 잘 잃어버리잖아.”
아내는 자기가 우산이 된다고 계속 우긴다. 그러면서
“그럼 당신은 장화 하면 되잖아. 첨벙첨벙 아무 대나 다니는 개구쟁이 아이처럼. 키~ 키, 내가 우산 받쳐 줄게”
그렇게 장화와 우산은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헤이! 우산”
“하이! 장화” 하면서 막걸리 한 잔 때리러 나가곤 했다.
아내의 존재란 무엇일까?
싸우면서 크는 아이들처럼 부부도 다투면서 정을 쌓는다.
왜 매일 우산을 잃어버리고 다니냐며 핀잔을 들었던 때가 어제 같은데 지금도 책이나 우산, 손전화를 가끔 잃어버린다. 생각해 보면 나는 더 큰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중인데도 말이다. 나는 아내라는 우산을 잃어버린 것이다. 장화는 있는데 우산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 아내가 사라졌다. 아내는 찾을 수 없는 분실물이 된 것이다.
아내의 우산은 신발장에 잘 모셔져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우산을 펼치면 아내가 튀어나올 것만 같지만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아내가 없다는 것은 우산도 없이 거리에 나가는 것이다. 청승맞게 혼자 비를 맞으며 거리를 걷는 것은 끈 떨어진 가방 아니면, 낙첨된 복권처럼 다시는 보기 싫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있는 사람은 비를 맞으며 걸어도 당당하게 보이고 멋있어 보이지만 내가 비를 맞고 걸으면 왠지 후줄근해 보인다.
“수고했어.”
숨을 할딱이며 아내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혼자 여행을 떠났다.
언젠가 토요일이었다. 친구들과 바둑을 두고 집에 와 보니 아내가 사라졌다. 병상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지 않은가? 아내가 제 발로 걸어 나갔을 리는 만무하다. 대문이나 현관문도 다 잠겨 있었고 아내만 없을 뿐이지 모든 게 제자리에 있었다. 아내는 폐암이 전이되어 머리 수술 후유증으로 1+1은 물론 1-1도 모르고 손만 약간 움직일 수밖에 없고 인지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라서 누군가가 데리고 갔을 것이지만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요양 보호사 아주머니께 전화를 넣어 보아도 저녁 식사 후 주무시는 것을 보고 와서 모른다고 한다. 앞이 캄캄하다. 그렇다면 혹시 아내의 언니들이나 동생들이 데리고 갔을까? 그렇다면 전화라도 했을 터인데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음날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와서 말해 주었다. 언니들이 와서 아내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이런 썪을...”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제부가 고생이 많으니 자기들이 아내를 돌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를 간호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짓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 후 또 바둑을 두고 집에 오니 (당시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내 시간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아내가 악을 쓰면서
“어디 갔다 와. 나 빨리 죽으라고 고사 지내고 왔어?”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낄 웃었다.
“헤이 우산! 어디 갔다 오셨나? 나들이 잘하고 왔네”
몸에서는 구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언니들이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한다. 요양병원은 아주 부유한 사람이 다니는 곳 아니면 요양사 몇 명이 많은 환자를 돌보기 때문에 일 대 일로 전담해서 돌보기가 어려운 곳이다. 오죽하면 현대판 고려장이라 하지 않는가. 가족처럼 매일 관장을 하고 (심하면 손으로 후벼 파야 할 때도 있다) 매일 목욕을 시켜 줄 수가 없는 곳이 요양병원이다. 머리를 감기고 목욕을 깨끗이 하고 등창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좋은지 다시 한번 자기 몰래 나갔다 오면 국물도 없다고 으름장을 논다. 평온하게 잘 잔다. 아이고, 얼마나 고생을 했을꼬?
아내는 가족을 위해 우산이 되어 준 고마운 존재였다. 그런 아내가 아이와 나, 시어머니를 남겨놓고 기약 없는 가출을 했다. 우산도 팽개치고 떠났다. 한구석에 먼지를 뒤 집어쓴 장화만 을씨년스럽게 너부러져 있었다.
남자에게 아내가 없다는 것은 돈 없는 지갑과 같다. 여러모로 불편하고 팔다리가 잘린 듯 거꾸로 굴러가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고 하며 ‘아내는 없는 것보다 악처라도 있는 게 낫다’라고 했겠는가? ‘과부 자식은 쌀이 서 말이고 홀아비 자식은 이가 서말이다’라는 말은 아내의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글이다. 홀로된 과수댁은 무슨 짓을 해서든지 아이들에게 버팀목이 되고, 디딤돌이 되어 잘살아 가지만 홀아비는 자기 몸뚱이 하나 건사하지 못해 얼마 가지 않아서 귀신같은 몰골로 변해 가는 것이다. 불쌍한 인생이다. 아비나 자식들이 모두 꾀죄죄하고 그늘이 져 보이게 마련이다.
아내는 옆집 애인이자 누이요, 엄마요, 선생님이고 친구다.
평생을 지지고 볶고 살지만, 남성들이여 아내 없이 며칠만 살아보소. 어머니나 할머님도 여인이지만 당신들은 그냥 할머니고 어머니일 뿐이다. 그러나 아내는 애인이고, 마누라고, 누님이며, 이모도 되었다가 고모도 되고, 싸울아비인가 하면 평화 봉사단원이고, 동창생이자 구세주이고 부처님이다. 나를 막내아들로 빚어 놓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요술장인 것이다.
잘난 구석도 없는 평범한 사내지만 금요일만 되면 아내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은 족쇄가 채워진 발목이 녹슬어 가는 중이다. 선친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가슴에 대나무 송곳을 꽂고 사신 할머님과 얼마 전 86세로 타계하신 어머님. 그리고 불치의 병으로 먼저 간 아내가 더불어 그립다. 모두 다 보고 싶다.
나의 여자들은 다 떠나갔다.
그녀들이 가슴에 달고 가던 꼬챙이를 이제는 내가 온몸에 대바늘로 꽂고 산다.
등 긁어 주며 백 년 해로 하는 당신이 정말 행복한 부부가 아닌가?
아직도 살아 숨 쉬는 아내.
당신은 천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