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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성령
홍인규 교수
1. 서론
이 논문은 바울 서신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이해를 근거하여, 바울의 성령 신학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바울은 신약의 저자들 중에서 성령론에 있어서 가장 큰 공헌을 이룩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성령에 대한 가르침은 여러 신학적인 주제들과 연결되어 있어 폭넓고 심오하다. 그러므로 성령론의 몇가지 쟁점들을 놓고 집중적으로 논쟁을 하기보다는 바울의 포괄적인 가르침을 고찰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적절하다고 판단할 때, 일부 쟁점들은 아래에서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바울 서신이 모두 상황적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서재나 도서관에서 작성된 신학 연구 논문이 아니다. 도리어 여러 교회들이나 사람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작성된 일종의 목회적 편지이다. 그렇지만 바울 서신에는 다른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공유하는 복음의 내용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또한 그 속에는, Beker가 주장한 바와 같이 신학적인 통일성(coherence)도 있다. 바울 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종교 개혁의 시각에 사로잡혀 이신칭의를 바울 신학의 열쇠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교리는 구원의 한 은유(metaphor)에 불과하다.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여, 다른 학자들은 바울 서신에 수없이 등장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에 주목하고,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믿는 자의 계속적인 그리스도의 체험에서 바울의 중심 사상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그것도 바울의 다양한 신학적인 관심을 모두 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최근에는 다수의 바울 신학자들이 종말론적인 구원을 바울 신학의 핵심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새 시대를 도래시키고, 놀라운 구원을 성취하셨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형성되고, 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은 완성을 대망하면서 미래의 축복을 현재 누리며(부분적으로나마)살고 있다.
우리가 취급하고자 하는 성령이라는 주제는 바울 신학의 이러한 중심 내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논문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① 성령과 삼위일체, ② 성령과 새 시대, ③ 성령과 구원, ④ 성령과 교회가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은 요약과 간단한 호소로 구성된다.
2. 성령과 삼위일체
바울은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 언급한다. 특별히, 그는 성령을 다양한 행위의 주체로 제시한다. 성령은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시고(갈 4:6; cf. 롬8:15), 육체를 대적하시고(갈5:17) 믿는 자들을 인도하시고(갈5:18; 롬8:14), 모든 것을 통달하시고(고전2:10), 하나님의 생각도 아시고(고전2:11). 십자가의 복음을 가르치시고(고전2:13; cf. 엡3:5),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고(고전3:16; 롬8:11; 딤후1:14),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시고(고전12:11),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고후3:6), 믿는 자들의 영으로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고(롬8:16), 믿는 자들의 연약함을 도우시고(롬8:26),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고(롬8:26-27), 믿는 자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주시고(엡3:16), 심지어 믿는 자들이 죄를 지으면 근심하신다(엡4:30). 이것은 성령이 어떤 비인격적인 힘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그러면 성령과 하나님(성부), 그리고 성령과 그리스도(성자)의 관계는 어떠한가? Fee의 통계에 의하면, 바울 서신에서 "하나님의 영" 또는 "그의 영"이라는 표현은 16번, "그리스도의 영" 또는 그와 동등한 표현은 3번 등장한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바울이 성령을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성령의 출처(source)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갈4:6은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살전4:8; 고후1:22; 5:5; 갈3:5; 롬5:5(cf. 엡1:17)에서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셨다고 진술되어 있다.
그러한 이해는 하나님께서 그의 신(영으로 충만하게 하시고(출31:3) 또는 그의 신(영)을 부으신다(욜2:28)는 구약의 이해와 일치한다(cf. 민24:2; 삿3:10).
성령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하다. 고전2:6-16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이고, 그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깨닫을 수 있다는 것을 논한다. 이 문맥속에서 바울은 성령이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며"(2:10), "하나님의 사정(mind)"도 안다(2:11)고 주장한다. 롬8:27에서는 동일한 진리가 역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는 성령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성령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과 하나님이 하나의 동일한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분명히 하나님과 구별되는 인격이다.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리운다(갈4:6; 롬8:9; 빌1:19). 이것은 롬8:9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나 성령은 처음부터(영원 전부터)그리스도의 영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여 만유의 주로 높임을 받으신 다음(cf. 롬1:4; 빌2:9-11),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만유의 주로 즉위하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성령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학자들은 고후3:17a("주는 영이시니")와 고전15:45b("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에 근거하여(cf. 고전6:17),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문맥에서 볼 때, 고후3:17a 의 "주"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3:16) 언급된 출34:34의 "주"를 의미한다. 그리고 고전15:45b는, 첫 아담이 창조를 통하여 자연적인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하여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들어가셨음을 말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은 서로 분명하게 구별된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성경 구절들은 많다(예, 롬9:1; 8:26-27, 34; 15:30); 고전12:4-6; 고후13:13; 엡4:4-6),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롬8:26-27과 8:34이다. 이 구절들에 의하면, 성령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신다. 그런데 성령은 지상에서 간구하는데 반하여(8:26-27),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신다(8:34). 이처럼 성령과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인격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성령 사이의 관계처럼,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의 관계도 아주 친밀하다. 롬8:9-10을 보면, 성령과 그리스도는 상호 교환되어 등장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9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10절). 이것은 엡3:16-17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 안에 거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성령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일종의 대사(ambassador)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에 의해 주(Lord)로 높임을 받은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을 교회 안에서 집행하신다. 유대교에서는 성령을 단순히 하나님 자신의 인격과 능력의 연장(extension)으로 본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이다.
바울은 원래 철저한 일신론자였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얼마 안되어 성령을 체험한 다음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가 혁명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인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구원은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고후13:13),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롬8:32).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사 우리 믿는 자들을 대신하여 고난과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였다(빌2:8).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성취하신 구원을 우리의 삶속에서 실현시키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그 역사적인 구원을 지금 실제로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다.
3. 성령과 새 시대
성령의 오심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새 시대가 이미 도래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새 시대의 완성(consummation)을 보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의 묵시록적인 종말 사상에 의하면 이 시대(this present age)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시대인데, 죄와 질병과 고난과 죽음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셔서 이 악한 시대를 극적으로 종식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인데, 의(righteousness)와 온전(wholeness)과 부활과 성령이 특징을 이룬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오심, 특별히 그의 부활 사건과 성령의 오심은 시대를 바꾼다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것으로 새 시대(종말)는 이미(already)도래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새 시대가 이 세대 속으로 침투되어 들어왔다. 그런데 종말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not yet). 다만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파하시고 믿는 자들이 몸의 부활을 경험할 때(고전15장), 그것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새 시대는 비록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새창조를 가져온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후5:17). 이 세상은 정죄를 받아서, 그것의 현재 모습은 지금 사라져 가고 있다(passing away)(고전7:31).
이러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바울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 특별히 그의 신학의 중심인 구원론을 보면, 그런 관점이 현저하다. 바울이 볼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신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현존하는 사실(reality)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리 믿는 자들이 미래에 "구원을 얻을 것이다"(We shall be saved)라고 말하지만(롬5:9),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현재 "구원을 얻고 있다"(We are being saved)라고도 말한다(고전1:18). 이처럼 구원이란, 미래에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지만, 이미 성취된 것으로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는 우리가 지금 새 시대의 능력인 성령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성령 체험은 우리가 미래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미래 완성이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성령이 마지막 완성을 보증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의 이러한 두 가지 종말론적인 역할(증거와 미래 보증)을 세 은유를 통하여 묘사하고 있다.
첫째, 성령은 "첫 할부금( )"(개역 성경; "보증")이다. 이 은유는 신약에서 오직 바울 서신에만 세 번 나타난다(고후1:22; 5:5; 엡1:13-14). 은 고대 헬라 상업세계에서 첫 할부금(down payment)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였다. 이것은 미래에 완불하겠다는 약속("I shall pay in full")이며, 동시에 부분적이나마 현재 사실("Her I pay the first instalment")을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성령의 선물은 우리가 현재의 삶 속에서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첫 할부금이며, 동시에 우리의 몸의 부활을 포함한 미래 종말론적인 유업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다.
둘째, 성령은 "처음 익은 열매( )이다. 롬8장을 보면,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이미 구원의 혜택(예, 성령의 인도,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을 누리고 있다(8:15-17).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체의 연약함과 고통 속에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부활)을 기다린다(8:23). 이러한 문맥에서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를 받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8:23).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동격의 소유격으로서, 성령이 곧 "처음 익은 열매"라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 익은 열매"는 추수기간 초기에 거두어들인 열매를 가리키는데, 그것 다음에는 본격적인 추수가 반드시 따라온다. 그렇다면 성령은 하나님의 축복의 첫 배당(first portion)이요 또한 그것 뒤에 완전한 축복이 올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은유는 "인(seal)"이다(고후1:21-22; 엡1:13; 4:30). "인"이란 소유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은유에도 종말론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엡1:13; 4:30에 의하면, "인"이란 성령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인치사 우리를 자기 소유 삼으셨다. 그뿐만 아니라, 소유자로서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신다. 그래서 엡4:30은 "그[성령]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령이 미래 구속의 완성을 보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성령은 새 시대의 도래와 현존에 대한 증거이며, 동시에 미래 완성의 보증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완성을 기다리면서 단순히 현재의 연약함과 고난을 감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축복을 현재 경험하면서 미래를 대망하게 한다.
4. 성령과 구원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바울의 진술은 주로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구원을 믿는 자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믿는 자의 경험의 측면에서 볼 때, 구원은 복음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듣는 것은 믿음보다 앞서는 것이며(롬10:14), 또한 믿음을 동반한다(사전 2:13; 살후2:13; 엡1:13). 그런데 듣는 것은 보냄을 받은 자의 선포가 전제된다. 효과적인 복음 선포는 성령의 사역이다(고후3:8). 바울은 여러 곳에서 자신의 성공적인 선포 사역의 원인을 성령의 역사로 돌린다. 특별히 롬15:18-19에서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다고 증언한다. 또한 살전1:5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진술하고, 고전2:4은 "내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말한다(cf. 롬15:18-19); 갈3:2). 인간의 지혜와 수사학과 웅변술은 결코 듣는 자의 마음에 자기 죄에 대한 깨달음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 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복음이 아무리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된다 할지라도, 듣는 자는 자신이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으면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다. 십자가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전1:23). 자연인( , natural man)에게는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고전2:14). 그들은 이 세상 신(사탄)의 미혹을 받아 마음이 어두워져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후4:4).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눈에서 베일을 제거하여 우리로 보게 한다(cf. 사50:5).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생각까지 꿰뜷어 보시는 성령을 통하여서만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설(paradox)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고전2:10-16).
이로 보면, 믿는다는 것도 결국 성령으로 가능한 것이다. 물론, 갈3:2-5에 강조된 바와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이것은 믿음이 성령의 선물보다 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성령이 믿음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성령이 전도자의 선포에 기름을 붓고 듣는 자에게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후 4:13에서 셩령을 "믿음의 영( )" 곧 믿음을 일으키는 영이라고 부른다.
또한 고전12:3에서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분명히 선언한다(cf. 갈5:5, 22). 이와 같이 성령은 믿음의 원인(cause)이 된다.
우리 구원을 위한 성령의 사역은 계속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믿음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은 우리의 신분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는 믿기 전에 죄와 마귀의 노예였고(갈3:22; 4:3, 8; 롬6:17), 하나님의 원수였다(롬5:10). 그러나 성령은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다. 갈4:6을 보면, 하나님은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또한 롬8:15는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고 말한다. "아바"는 아람어로 원래 어린 아이의 언어이다. 그런데 그것은 연령과는 상관없이 자녀들이 아버지를 아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막14:36에 의하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직접적이고 개인적이고 친밀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자들이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머리로만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서 뜨겁게 체험하게 되고(롬5:5), 아버지께 대하여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가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실제적으로(이론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탄생이다. 갈4:29는 믿는 자가 이삭처럼 "성령으로 난 자"라고 말한다. 성령은 "생명의 성령"이다(롬8:2). 성령은 새 시대의 삶의 원천인 것이다(갈5:25). 따라서 성령의 삶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이다. 그것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삶이다(롬6:11 이하). 죄의 종으로서의 삶은 육체(savrx)의 정과 욕심에 사로잡혀 저주에 이르게 하는 일들을 생산한다(갈2:20) 전 인격에 과격한 변화를 가져온다(cf. 갈5:22-23). 골3:10의 말씀처럼, 우리를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개종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바울이 볼 때, 그리스도인이란 과격하게 변화를 받은 자이다. 근본적인 변화 없이 단순히 죄사함만 선언 받은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cf. 고전, 갈5-6, 롬6, 8, 12, 골3, 빌2-4). 여전히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옷만 깨끗하게 갈아입은 자는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는 성령의 침입을 받아 혁신적인 내적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cf. 롬12:2). 살후2:13에 진술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cf. 고전6:11).
그러므로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새 삶이란 다름 아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다. 갈5:25에서 바울은 진술한다: 여기서 ("만일")는 "때문에(since)"의 의미를 가진다. 가 직설법( )을 동반하면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그것은 가정(supposition)이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갈5:25는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성령을 좇아 행하자." 이것은 우리가 성령을 새로운 삶의 원천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옛 언약(모세언약)안에서 이스라엘의 백성은 율법의 모든 문자적인 요구에 순응하여야 했다. 그러나 새 언약의 백성은 더 이상 그러한 의무 아래 있지 않다. 옛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의 기능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 종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삶의 모든 초점을 성령에 맞추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원 증명표(identity marker)는 오직 성령이다. 성령은 새 시대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sovereign power)으로서 우리의 전 삶을 주관한다. 우리는 이미 성령이 다스리는 새로운 삶의 정황 안으로 인도되어, 그 안에서 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롬7:14-24에 나타난 갈등과 절규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볼 때, 성령의 삶이란 단순히 이상(ideal), 곧 비현실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롬7:14 이하는 그리스도 이전의(before Christ) 또는 그리스도 밖의(outside Christ)유대인(개종 전의 바울 자신도 포함됨)의 경험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회고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 두 가지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첫째, 롬7:14-24에 등장하는 "나"는 죄의 노예로서 항상 패배한다. 그리고 그런 삶은 롬8장에 설명된 성령의 삶과는 결코 양립될 수 없다. 둘째, 롬7:7-25에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롬8:9에 의하면,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의 중심적인 역할이 가장 선명하게 설명된 곳은 갈5:16-6:10이다. 이 부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권면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5:16; cf. 5:25)이다. 이 권면은 바울의 성령 윤리의 기본이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것은 "성령으로 걸으라(walk by the spirit)"가 된다. 유대교에서 "걷는다"는 것은 전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 바울은 윤리적인 행동을 묘사하기 위하여 그 표현을 자기 편지에서 17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걸으라" 또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하는 명령은 우리의 전 삶이 성령의 다스림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cf.5:18).
이러한 성령의 삶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먼저, 그것은 믿는 자의 삶에서 육체의 정욕을 좌절시킨다. 이에 관하여 바울은 갈5:16에서 진술한다. 이 진술은 두 가지 요소, 즉 권면과 명확한 보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육체"는 무엇인가> "육체"는 히브리어로 인데, 그것은 우선적으로 몸의 살을 가리키나, 때로는 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단어의 의미는 확대되어 여러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대조하여 연약한 인간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예, 창6:3; 대하32:8; 욥10:4; 시56:4; 78:39; 렘17:5). 바울에게 있어서, 그 히브리어 단어에 해당되는 말은 이다. 구약의 의미들이 대부분 그의 서신들에 나타난다.(예, 고전15:39; 고후12:7; 갈4:13-14; 고전1:25; 갈1:16; 빌3:3). 그러나 특징적인 것은 갈5-6장과 롬8장에서 육체가 죄의 도구로서, 심지어는 죄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악한 세력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육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패배를 당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고, 자체적으로 "정과 욕심"을 가지고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cf. 갈5:24). 그리고 성령의 열매(갈5:22-23)에 반대되는 자기 "일"(갈5:19-21)을 생산한다.
이러한 육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갈5:17은 그것의 이유를 제공한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욕망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되느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성령과 육체의 상호 대적으로 말미암아, 둘은 절대적으로 양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육체의 욕망은 충족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사실, 육체에 매인 자는 정욕에 사로잡혀 육체의 일만을 생각한다(롬8:5a). 이런 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만족을 위하여 하나님을 배척한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사는 자는 성령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이다(롬8:5b).
그러나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한 번도 육체의 정욕에 의해서 유혹을 받거나 그 정욕에
굴복되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도 때로는 실패한다. 그러나 참으로 성령으로 변화받은 자는 넘어졌을 때에 즉시 회개하고, 다시 성령의 다스림에 자신을 의탁한다. 그러므로 고의적으로 죄 가운데 계속 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cf. 요일3:9).
성령의 삶이 가져오는 두 번째 결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갈5:22-23에 나타난 바와 같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여기 맨 처음에 등장하는 사랑은 다른 모든 덕목의 총괄이다. 이 사실은 고전 13:4-7에 나타난 사랑의 정의를 볼 때 분명해진다. 방종과 자기 만족으로 특징을 이루는 육체의 일과는 대조적으로, 사랑은 남을 위한 깊은 관심과 섬김이다. 이것은 유아독존식의 개인적인 삶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안의 여러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미덕으로서, 공동체를 세우고 여러 가지로 분리된 자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cf. 갈3:28).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성령의 열매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그의 삶과 마지막으로 모든 죄인들을 위한 그의 죽음에는 그의 본질적인 모습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압축되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삶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게 되는가? 육체에 속한 자들은 정욕에 사로잡혀 온통 육신의 일만을 생각한다(롬8:5). 이런 자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기" 때문에(갈5:26), 그리스도의 낮아진 삶과 고난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란 미련한 것이다(고전1:23),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신다(고전2:13).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통하여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사랑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cf. 롬5:5). 그리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에 압도당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강렬한 내적 열망을 창조하는데, 그것은 육체의 정욕에 복종하는 수치스러운 삶을 단호히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을 닮고자 하는 마음이다(cf. 갈4:19).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기쁨으로 그의 다스림 아래 자신을 온전히 드리게 된다. 그러면 더 이상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되는 것이다(갈2:20). 이렇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고후3:18). 이러한 삶에 성령의 열매는 풍성하게 맺어진다.
이처럼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그의 다스림 아래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회적인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중단 없이 계속되어져야 한다. 육체가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정복된 것은 사실이나,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갈5:13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육체는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정욕으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여(갈2:19-20) 이미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갈6:14)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5:24)는 변함없는 사실을 항상 인정하면서(cf. 롬6:11), 우리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야 한다. 성령의 삶은 계속되는 자기 부인과 철저한 헌신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은 결국 율법의 참된 의도와 목적이 충족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는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의 삶 속에서 자기 본성이 영광스럽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예, 사58을 보라). 그러나 율법은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을 공급해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롬7:14-15; 8:3).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여 그의 사랑의 삶을 본받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모습(성품)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하신다. 그리하여 율법의 원래 목적과 의도는 이루어진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 안에 온 율법이 완성된다는 말은(갈5:14; 6:2; 롬8:4; 13:10)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면,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아니하는 것이다(갈5:18, 23b). 갈6:8b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선언한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그렇지만, 육체의 정욕에 굴복되어 육체의 일을 생산하는 자들은 율법의 정죄를 받게 된다(갈5:21b, 6:8a). 롬8:6은 요약적으로 말한다: "육신( )의 생각( , mind-set, aspiration)은 사망이요 영( )의 생각( )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것은 우리가 육체의 지배를 받아 육체의 정욕에 집착하여 살면 죽음에 이르나,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성령의 열망을 따라 살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감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자에게 마지막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믿는 자의 경험의 측면에서 볼 때,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완성된다(cf. 갈3:3).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믿게 되며,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며, 성령으로 육체의 참된 목적이 충족되어 정죄받음이 없이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5. 성령과 교회
마지막으로 취급되어야 할 주제는 성령과 교회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은 그의 신학의 중심이다. 그러나 구원이란 단순히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
물론, 그런 관계가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개개인을 구원하여 완성될 천국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3세기 교부인 Cyprian이 말한 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옳다. 그러므로 바울의 초점과 관심은 항상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 전체에 두어져 있다(cf. 고전5:1-13; 6:1-11). 이들은 마지막 완성을 기다리면서, 현재 이 땅 위에서 미래의 삶을 함께 영위해 가는 자들이다.
옛 언약에서와는 달리,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성령의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의 새로운 탄생이 성령의 변화시키는 사역으로 시작되는 것처럼, 믿음의 공동체의 존재도 성령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고전12:13은 말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개인이 어떻게 믿는 자가 되느냐보다는,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자)이 어떻게 한 몸을 이루느냐는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대답은 모두가 개종시에 한 성령으로 세계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전의 모든 구분(인종적, 사회적, 경제적, 또는 성적)은 없어지고 모두가 한 몸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성전으로 삼고 내주하신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거처를 정하시고 자기 백성 중에 임재하셨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성령을 통하여 교회라는 공동체 가운데 거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3:16-17에서 고린도 교인들(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또한 고후6:16도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바울의 강조점은 믿는 자 개개인보다는 교회 공동체 전체에 놓여 있다.
물론, 고전6:19는 개개인의 신자 안에도 성령이 거하신다고 말하지만 그는 공동체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가 아니고 공동체의 일원이다.
성령에 의하여 시작되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또한 하나님의 가족이다. 갈4: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영[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또한 롬 8:15-16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 믿는 자들은 양자의 영(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서로 형제 자매가 되었다. 심지어 롬8:29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가족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엡2:19와 딤전3:15에서 직접적으로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표준새번역)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믿는 자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은 개인주의를 배척하고, 우리를 한 몸이요 한 가족으로 묶으신다. 이러한 성령은 우리 안에 아주 친밀한 유대 관계를 생산하신다. 사실, 성령이 하시는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최고의 특징은 참된 교제이다. "성령의 교제"라는 말은 바울 서신에 두 번 등장한다(고후13:13 , 빌2:1 ). 이 표현은 우선적으로 목적격적 소유격으로서, 성령에의 참여(participation in the Spirit)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주격적 소유격으로서, 성령이 교회 안에서 창조하시는 교제를 포함한다. 이러한 믿는 자들 사이의 교제는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것이 그 특징이다(cf. 고후13:13; 갈5:22-23). 빌2:2-4에 의하면, 그 교제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며", 자기 자신을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겸손히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힘쓰는 것이다. 만일 믿는 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그들 가운데 불화와 내분과 알력이 있으면(엡4:25-31), 하나님의 성령은 근심하게 된다(엡4:30).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엡5:18), 교회 안에서 모든 인간 관계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된다(엡5:21-6:9). 이로써 아담의 타락 이후 계속되어 온 인간 사이의 불화와 갈등과 대결은 극복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참된 영성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이 서로 돌아보아 서로를 섬기고 서로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믿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로의 유익을 구하며 사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고찰하여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이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 안에서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졌기 때문이다. 고전12:7은 말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은사]을 주심은 공동의 유익을 위함이라."
바울 서신에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세 가지 용어가 등장한다. 그것들은 ("신령한 것" 고전12:1; 14:1), ("은사" 고전12:4, 9, 28, 30-31; 롬12:6; cf. 벧전4:10), ("선물" 엡4:7)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이다. Turner에 의하면 는 동사 (to give graciously)에서 유래된 것이고, 접미사 - 는 결과(result)를 둣한다. 그렇다면 는 문자적으로 볼 때 은혜로 주어진 선물을 의미한다. 이 는 문맥에 따라 고전7:7에서 독신과 결혼, 고후1:11에서 지극히 위험한 상황에서의 구출, 롬6:23에서 영생(cf. 롬5:15, 16), 롬11:29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여러 특권들(롬9:4-5)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는 고전 12장과 롬12:6에서 특별히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어떤 학자들은 ( 의 복수)가 "성령의 나타남"(manifestation of the Spirit, 고전12:7)에 제한된 것으로서, 조로 고전12:8-10에서 언급된 가시적인(성령의 역사라고 즉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은사들, 곧 성령의 초 자연적인 은사들만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문제가 많다. 첫째, 고전12:8-10에 나타난 은사 목록이 다른 은사 목록들(고전12:28-30; 롬12:6-8; 엡4:11)에 비해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유별난 것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특별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둘째, 고전12:12이하에서 바울은 교회와 은사의 관계를 몸과 지체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몸에는 아름답고 존귀하게 보이는 지체들과 약하고 덜 존귀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있지만, 모두가 몸을 이루는 데 절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범한 은사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은사들도 주신다. 이것이 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가 를 포괄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에는 기적적인 은사들이 물론 포함된다. 그러나, 여러 은사 목록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연적인 재능이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교회를 섬기는 데 사용되어지는 은사들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서신에는 네 개의 은사 목록이 제공된다. 그것들은 의미 있는 중복과 동시에 중요한 변화도 보여준다.
첫째 목록은 고전12:8-10에 나타나 있다: ① 지혜의 말씀(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력), ② 지식의 말씀(하나님의 역사적이 계시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그것을 잘 해석하는 능력), ③ 믿음(고전13:2에 언급된 바와 같이, 산과 같은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믿음), ④ 병 고치는 은사들(육체적인 몸을 고치는 기적적인 능력), ⑤ 기적들(병고침을 제외한 다른 기적적인 현상들, 특별히 귀신을 쫓아내는 것 ), ⑥ 예언("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고전14:3, 표준 새번역] 성령의 감동으로 갑작스럽게 주어진 말씀[고전14:29-32]), ⑦ 영들 분별(예언을 복음의 기준에 따라[롬12:6]) 분별하는 것[고전14:29]), ⑧ 방언(성령에 감동된 언어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와 찬송[고전14:14-15]), ⑨방언 통역(하늘의 언어[고전13:1])인 방언을 해석하는 것).
둘째 목록은 고전12:28-30에 등장한다: ① 사도(일반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사도적인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지칭), ② 선지자(고전12-14장의 문맥을 고려하면 예언의 은사를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를 의미), ③ 교사, ④ 기적들, ⑤ 병 고치는 은사들, ⑥ 서로 돕는 것, ⑦ 관리하는 것( , administration), ⑧ 방언 ⑨ 방언 통역.
셋째 목록은 롬12:6-8에서 발견되어진다. ① 예언 ② 섬기는 일(행6:1-6에 기술된 집사의 일, 곧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③ 가르치는 일 ④ 권위하는 일(exhortation), ⑤ 구제하는 일(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일), ⑥ 다스리는 일 ⑦ 긍휼을 베푸는 일(빈궁한 자, 병든 자, 노약자, 또는 불구자들을 돌보는 일).
마지막 넷째 목록은 엡4:11에 있다. 여기에 (선물)가 (은사) 대신에 사용되고 있다. 목록은 가장 간단하다: ① 사도, ② 선지자, ③ 복음 전하는다(evangelist), ④ 목사와 교사(이들은 하나의 전치사로 함께 묶여 있어, 하나의 활동을 언급하는 것 같다).
이상의 은사 목록들은 모든 은사들을 총망라한 것이 아니다. 각 목록의 구성은 각 서신의 독특한 수사학적인 상황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바울이 볼 때,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성령의 삶이다(갈5:16 이하: 롬8:1 이하). 한 지체의 어떤 역할이 교회 공동체에 건설적인 공헌을 한다면, 바울은 그것을 은사로 인정하였을 것이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고전12:7, 11; 롬12:3; 엡4:7). 교회 안에는 은사를 받지 않은 교인, 곧 아무런 쓸모가 없는 교인이 하나도 없다. 각자에게는 성령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최소한 한 가지 은사(그러니까 한 가지 이상의 은사)가 주어진다.
다양한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고전12:7). 은사는 결코 개인의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교회 공동체)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엡4:12). 우리의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지만 여러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전 12:12). 이러한 사실은, 지체들이 상호 의존적이며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 은사를 통하여 교회를 세운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에서 언급된 각 은사의 기능을 고려하면, 그것은 지체들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차원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 교회, 세상 등에 관한 깨달음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말씀 선포, 가르치는 일, 예언, 영들 분별, 방언 통역 등에 의하여 충족된다. 바울이 볼 때, 깨달음을 증진시키는 은사들은 다른 은사들보다 우위에 있다. 새로운 깨달음 없이, 새로운 일과 역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공동체의 정신적·사회적인 안녕(psycho-social well-being), 곧 지체들 사이의 평강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여기에는 목회적인 성격을 가진 은사들이 중요한데, 그것들은 서로 돕는 것, 섬기는 것, 권하고 위로하는 것, 구제하는 것, 긍휼을 베푸는 것 등이다. 이러한 은사들이 사용되면, 지체들의 심리적인 필요가 충족되고 공동체의 사회적인 응집력은 강화된다.
셋째, 공동체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복지를 성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은사가 단지 영적인 측면에만 유익을 준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이란 전인적인 것으로 육체적인 평안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병 고치는 은사, 기적들,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은사 등을 교회에 주신다.
넷째, 공동체의 무의식적인 영역에도 만족을 주는 것이다. 방언이라는 것은 말하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송이다(고전14:14-15). 이 방언으로 우리의 영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 은사들에 의하여 공동체 생활의 모든 영역이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해지도록 계획하셨다. 공동체가 온전하도록 세움을 받는 데는 참으로 다양한 은사들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도 전인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을 뿐만 아니라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 귀신을 쫓아내셨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셔서 역사하신다(cf. 고후6:16). 그런데 이제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사역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사실, 은사는 주님의 특별한 사역(particular minstries).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통하여 서로 섬기며 세울 때, 주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은사가 활용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공동체를 세우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공동의 유익을 위하려면, 은사는 사랑의 원리로 사용되어야 한다(고전13:1-3; 롬12:9-10; 엡4;15). 사랑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하지 않으며, 자기 은사를 자랑하지 않고, 은사로써 자기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구한다(고전13:4-5). 그러나 사랑이 결여되면, 은사 사용은 자기 주장과 자기 자랑과 자기 이익 추구로 표현되어 결국에는 공동체를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열매인 사랑(갈5:22)과 성령의 은사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날 때에만 공동체는 진정한 세움을 입게된다.
어떤 학자들은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사도 시대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Warfield에 의하면, 성경에서 기적이란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승인하는 것으로서 정경의 오나성과 함께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충분한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 물론, 기적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참됨을 입증하는 역할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예, 행14:3; 고후12:12). 그러나 그것 만이 기적의 모든 목적은 아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보면, 치유와 귀신 축출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증거요 선포된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이다(예, 마12:28; 툭4:18-21; 7:20-22; 행10:38). 또한 바울은 위에서 본 것처럼, 기적적인 은사들을 포함한 모든 은사가 교회를 지속적으로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고전12:7; 엡4:12).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어느 특정한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교회사에서 기적적인 은사들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는 없었다.
Gaffin은 Warfield와 약간 입장을 달리하여, 모든 기적이 사도 시대의 마감으로 중지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볼 때, 신유나 그와 관련된 은사들은 지금도 계속된다(예, 약5:14-15). 그러나 예언과 방언은 모두 영감된 계시인데, 그것들은 정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예언과 방언에 대한 Gaffin의 이해는 수용될 수 없다. 고전 12-14장과 롬12:6에 언급된 예언이라는 것은 구약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권위 있는 예언이 아니요, 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교훈하는 목회적인 예언으로서(고전14:3), 사도적인 가르침에 근거하여 분별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고전14:29' 롬12:6; cf. 살전5:20-21). 방언도 영감된 계시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방언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와 찬송인 것이다(고전14:14-15). 이 방언은 말하는 자 자신에게 덕을 끼친다(고전14:4). 그러므로 예언과 방언은 신학적 계시도 아니고, 정경준비(preparation of Scripture)와 관련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고전13:8-10은 은사의 중단 문제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한다. 그것은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결국에는 폐하여질 것인데, 그 시기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재림 때까지 존속될 것이다(cf. 엡1:17-21; 3:14-21; 골1:9-12). 그러나 이것은 모든 은사가 다 계속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사도라는 특별한 직분은 1세기 이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고전12:14장에 나타나 있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울의 최초의 가르침이 예배 모임의 문맥에서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통역과 해석이 요구되는 방언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감으로부터 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이 볼 때, 방안은 단순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천사의 말"(고전13:1)로서, 성령의 최고 표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취급하고, 공적 예배시에 방언을 지나치게 몰두하였다(cf. 고전14:6, 23). 이에 반대하여, 바울은 예배에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가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전14: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고전14:26a, b).
그런데 "모든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해야 한다"(고전14:26c).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가르치고 교훈하고 격려하기 위한 다양한 말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드려지는 찬송과 기도도 공동체에 덕이 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고전14:15-17).
공중 예배에서 기도와 찬송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참된세워짐이 있는 예배 속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수직적인 측면과 수평적인 측면은 구분되어서는 안된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인 것처럼,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다.
6. 결론
성령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일종의 대사(ambassador)역할을 담당한다. 원래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살전4:8; 갈3:5; 4:6; 고후1:22; 5:5; 롬5:5),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런데 성령은 또한 리스도의 영으로 불리운다(갈4:6; 롬8:9; 빌1:19).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여 만유의 주로 높임을 받은 다음,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을 집행하시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령의 오심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성령은 새 시대의 도래와 현존에 대한 증거이며, 동시에 미래 완성에 대한 보증이다. 첫 할부금(고후1:22; 5:5; 엡1:14), 처음 익은 열매(롬8:23), 그리고 인(seal)(고후1:21-22; 엡1:13; 4:30)이라는 은유가 것을 잘 묘사해 준다. 믿는 자는 성령을 통하여 미래의 축복을 현재 경험하면서, 미래를 대망한다.
새 시대의 도래로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은 구원이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아들의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하셨다. 그런데 성령은 그 역사적인 구원을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적용시키는 일을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전도자의 선포에 기름을 붓고(살전1:5; 고전2:4; 롬15:19), 듣는 자에게 깨달음(고전2:10-16)과 동시에 믿음을 선물로 주사 참된 신앙 고백을하게 하신다(고전12:3). 또한 성령은 믿는 자의 마음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음으로써(갈4:6). 믿는 자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탄생으로, 전적으로 새로운 삶 곧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갈5:25). 성령의 삶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오는데, 먼저는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육체의 정욕을 좌절시키는 것이고(갈5:16), 다음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성령의 열매를 생산하는 것이다(갈5:22-23).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그의 백성의 삶속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율법의 원래 의도가 성취된다(갈5:14).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령을 따라 살면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아니하고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갈5:18, 23b; 6:8). 이처럼 믿는 자의 경험의 측면에서 볼 때, 구원은 성령으로 시작되어 성령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이란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을 구원한다기보다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모두 한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고전12:13),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성전이 되고(고전3:16-17; 고후6:16),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이다(갈4:6; 엡2:19; 딤전3:15). 이러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주요한 사역은 개인주의를 배척하고, 구성원들 사이에 친밀한 유대 관계를 생산하여 서로 섬기고 서로 세우는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다(고후13:13; 빌2:1-4). 이와 관련하여 논의되어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이다. 은사는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하나도 예외없이 주어진다(고전12:7).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다. 기적적인 은사들은 물론이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교회를 섬기는데 사용되어지는 자연적인 재능까지도 은사로 취급된다(고전12:8-10, 28-30: 롬12:6-8; 엡4:11). 은사의 목적은 공동체의 공동의유익을 위한 것이다(고전12:7). 이것은 영육간에 지체들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목적이 성취되려면, 은사는 반드시 사랑의 원리로 사용되어져야 한다(고전13:1-3; 롬12:9-10; 엡4:15). 초자연적인 은사의 중단 시기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고전13:8-10). 은사는 주로 예배 모임 가운데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활용된다(고전14:26). 하나님께서는 참된 세워짐이 있는 예배 속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이상의 요약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경험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모든 삶(개인적인 삶과 공동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한다. 증거, 믿음, 중생, 성장, 열매 생산, 교제, 은사수여, 서로 섬김, 예배등이 모두 성령의 사역이다. 현대 교회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입술만으로 성령을 인정하는 것을 중단하고, 성령을 체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성령은 두 세대 사이를 살면서 완성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에게 중단 없이 능력을 공급하는 분이시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17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