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매월 말에 월말 고사를 치르고 석차를 알려주었는데 공부를 따로 해본적도 없고 누가 공부하라고 참견도 안했지만 그리고 등수가 잘 나와도 식구들 아무도 관심 써주지 않았지만 기억에 1등을 놓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먹고 사는데 온 신경을 써야만 했던 부모님들은 아이가 1등을 해봐야 의식주 해결에 아무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그보다도 학교선생들에게 관심을 더 받아 혹시라도 기성회비외에 더 부담해야 될 일이 생겨날지도 모를 불안감도 한 몫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이는 5학년 때 현실로 나타났다. 5학년 7개 반 전체에서 1등을 했고 담임선생님은 관례적으로 1등한 아이집에서 선생들을 대접한다면서 내게 2,000원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집이 멀어 1시간 씩 걸어서 통학하던 난 이 날 철길을 따라 열차가 오면 피하며 걷기를 반복하다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던 것이다. 좀더 사실을 얘기하자면 기차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몇번을 참았는지 모른다. 가난하다는 사실은 -그래서 학년 선생님들께 요새말로 한턱 쏠 수없다는 사실이- 그래서 2000원을 가져오라고 집에 얘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차라리 죽는게 나을거라는 유혹을 12살짜리 아이가 감당하기가 어려웠던것 같다. 다행히도 갈등과 방황으로부터 탈출해 집에 들어왔을 때, 아이가 하나 쯤 안 들어와도 잘 모를 정도의 방목수준인 분위기였지만 웬일인지 이날 어머니는 내게 캐물으셨고 마지못해 얘기한 내게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다음날 우울하게 학교에 앉아 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셨다 2,000원을 구해가지고......공부를 잘해서 부모님께 큰 걱정과 폐를 끼친 것이다.
이제 리코더 이야기를 해야겠다.
우리나라에 리코더가 필수악기로 지정된 해는 1973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이니까 35년 전의 일이다. 근화국민학교에 리코더 합주부가 있었는데 4학년 때 담임이셨던 김봉진 선생님이셨다. 아마도 4학년 때 기악합주로 연구수업을 하셨는데 내가 맹활약을 했었기 때문에 6학년 다른 반인 나를 부르셔서 리코더합주반에 들어오라 하셨다. 당시 100원 정도였던 리코더를 살 여유조차 없던 터라 대답 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던 내게 서랍에서 새 리코더 한 개를 꺼내 주셨던 선생님!!! 이 사건이 내 인생을 바꾸게 될 줄 그때는 몰랐었다. 당시 춘천교육대학교에는 한국에 리코더를 처음 소개하셨던 박재훈 교수가 계셨는데 마침 친형이 그분의 제자로 재학중이었고 교수님 영향을 받아 이 시절 형으로부터 리코더음색으로 동요대신 바흐의 미뉴엣, 가보트 등을 들으며 보낼 수 있었다. 형에게 운지를 물어가며 어렵지않게 흉내낼 수있었고 형은 박재훈교수께 나를 데려가 보이기도 했다. 급기야 1976년에 교수님 제자들로 이루어진 춘천리코더중주단이 창단 되어 연주를 했는데 박재훈 교수님께서는 중3인 나를 찬조출연 시키셨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텔레만 파르티타 4번을 형의 반주로 연주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강원도교육청 주최로 학생실기대회가 열렸는데 관악기를 통합해서 시상을 했는데 중3때 헨델의 소나타 다장조 2악장 알레그로로 준비해서 트럼펫 클라리넷에 이어 3등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일로 인해 춘천 MBC인지 KBS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인터뷰와 형의 반주로 연주를 했었다. 형은 당시 양구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는데 이 방송 때문에 먼 길을 휴가를 내서 오셨었다. 아마도 리코더로 한국 최초의 방송 출연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우리가족은 형제들이 많았고 의식주 해결이 늘 문제였었다. 너나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11남매인 우리 가족에게 의식주 문제는 다른 집보다 큰 문제였다. 그런 와중에도 형들 누나들은 항상 음악을 즐겼던 것 같다. 연중행사의 하나인 이사 때 마다 풍금 실로폰 하모니카 리코더 기타 등이 많지 않은 이삿짐 속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형들과 기타반주로 화음을 노래하며 자연스레 음악의 아름다움을 체득한 것 같다.
중학교시절의 음악선생님도 잊을 수 없다. 황숙중 선생님이라는 분이셨는데 당시 10문제 나오는 음악시험 문제가 우리학교가 평균 10점이나 높을 정도로 이론을 잘 가르치셨다. 시험을 보면 2시간씩 보는데 150문제를 내기도 하셨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도 100문제 맞추기 어려울 정도로 중학생에게 버거웠는데 나는 실수로 한 두 문제 틀릴 정도였고 늘 재미있었다. 내가 아는 음악이론은 거의 중학교 때 다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게다가 교감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셔서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머리가 뛰어나다는 말씀을 수시로 하셨다. 이러한 여러 여건들이 내가 음악가로 살아가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리코더를 불면서 당시에는 그 음색이 순수한지 어쩐지 모르고 그냥 좋았다. 이유가 없이 그냥 좋았다. 나이가 들어서 보니까 리코더가 다른 악기보다 맑고 순수한 음색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리코더를 부는 순간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는 당시의 시름들을 잊을 수가 있었던 것 같다. 단 한 번도 레슨을 받은 적도 없고 음반을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그냥 행복했다. 어쩌다 소나타 악보를 하나 입수하게 되면 밤새도록 전 악장을 사보했다. 지금은 몇 초 만에 복사 할 수 있지만...... 악보를 사보하는 작업조차 즐거웠다. Sammartini Concerto in F major, Handel Sonata들 Telemann Partita등 그때 사보했던 곡들이다.
돌이켜보면 스트레스라는 용어조차 생소했던 그 시절 리코더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 같다. 녹음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후에는 앙상블 연습을 할 수가 있었다. 여러분도 해보시면 정말 재미있다. 1성부를 녹음하고 2성부를 불며 녹음기와 함께 연주하는 것이다. 성부를 바꿔서 반대로 할 수도 또 트리오도 이와 같이 하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적인 호흡이 기가 막히게 맞는다. 당시에 리코더로 대학도 갈 수 없었고 유학은 꿈도 못 꿨지만 그냥 좋아서 불었다.
첫댓글 앞으로 갈길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어느 지점엔가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역할을 하는 그 때 그 사람이 있지요. 제게는 그 자리에 샘이 서 계시네요.^^
돌이켜보면 수많은 은인들이 인생이라는 무대에 주연으로 조연으로 등장하는데...홍샘도 제 인생에 빼 놓을 수없는,... 한몫 단단히 하고 계셔요...ㅎ
와..교수님의 그 열정이 오늘날의 교수님을 있게 하셨군요. 그 열정이 부럽습니다. 저도 그 자체로서 즐거운 그 무언가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명진이가 앞으로 수많은 아이들에게 인생을 바꿔준 단 하나뿐인 선생님으로 기억될 수도 있겠지...
제 인생도 리코더 땜에 바뀌고 있어요..ㅎㅎㅎ 저한텐 행복의 악기죠.^^
인생의 심각한곳에서 탈출 시켜주는 악기가 ... 진지함은 가진 채로...긴장도 적고 연습조차 행복한...죽기전까지 할 수있는 악기...바로 리코더가 아닐까?
선생님 얘기 감동적이다..ㅠ.ㅠ
글을 잘 못 써서 재미없지만 그대로의 내 모습이지...
초등학교 4학년. 바하음악학원에서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겠죠?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으니 새삼 모든게 감사하게 느껴지네요...^^
새삼! 옛날이 떠오르네. 상인이와 4중주 만들어서 서울교대 콩쿨 나갔던 생각도 나고...리코더로 맺어진 귀한 인연이지.
아~각 성부를 녹음해서 들으머 연주하는 방법도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