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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 |
Ⅰ.사료 비그리스도계 사료 그리스도계 사료
Ⅲ.신앙의 그리스도 예수 부활 신앙 그리스도론적 존칭 |
Ⅱ.역사의 예수 개관 활동배경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행적 예수 수난사 |
Ⅱ.역사의 예수
활동 배경
정치적 배경
기원전 63년 로마군 사령관 폼페이우스( G. Pompeius, 기원전 106~48)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음, 이스라엘 남부의 반 사막 지역인 이두메아 출신 이방인인 안티파테르(Antipater)가 로마의 환심을 사서 팔레스타인에서 실권을 행사했다. 기원전 43년 안티파테르가 암살당하고, 기원전 40년 그의 아들 헤로데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 이란 칭호를 받았다. 그는 기원전 37년 로마군의 지원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33년 동안(기원전 37~4) 팔레스티나 전역을 다스렸다. 기원전 4년 과월절을 앞두고 헤로데는 예리고 별장에서 병사했다. 죽기 5일 전에, 그는 친아들인 왕세자 안티파테르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의심해서 처형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1권 661~664항). 헤로데의 아들 셋이 아버지의 영지를 나눠 가졌다. 아르켈라오(Herod Archelaus, 기원전4~서기 6)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안티파스(Herld Antepas, 기원전 4~서기 39)는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필립보(Herld Philip, 기원전 4~서기 34)는 골란 고원 북부 지역을 각각 다스렸다.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기원전 27~서기 14)는 유다와 사마리아의 임금 아르켈라오를 현재 프랑스의 비엔(Vienne)으로 귀양 보내고, 총독을 파견하여 두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폰시우스 빌라도(26~36)가 제5대 총독으로 재직할 때 예수는 공적으로 활동하다가 이스라엘 주권을 복원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상론을 바란다면 박상래 지음, 《성서와 그 주변 이야기》 , 바오로딸 1977, 156-188쪽을 보라.
종교적 배경
①성전 중심의 사두가이파 : 이스라엘 백성의 신심 중심지는 예루살렘 성전이다. 기원전 20~19년부터 대대적으로 개축하기 시작한 성전에서는 오전 · 오후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렸고, 그 밖에도 유대인들이 제물을 가져오면 수시로 속죄의 제사 · 친교제 · 번제를 그리곤 했다. 매일 오전 · 오후 정기 제사 때에는 “기름에 반죽한 고운 밀가루와 함께 어린 양을 잡아 번제로 살라 바쳤다(민수 28,1-8 참조). 한 살짜리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는 제단에 뿌리고 몸통은 네 쪽으로 잘라 남김없이 불에 살라 바쳤다(레위 1,3-13 참조). … 안식일에는 어린양을 두 마리 더 바쳤고 고운 밀가루 반죽도 그렇게 했다. 매월 초하룻날(일종의 新月祭)에는 속죄를 위해서 황소 두 마리 · 숫양 한 마리 · 어린 양 일곱 마리 · 숫염소 한 마리를 바쳤고 아울러 고운 밀가루와 포도주도 바쳤다”( 박상래 , 《성서와 그 주변 이야기》, 204-205쪽). 예수 시대에 성전에서 일하던 사제(제관)들과 그 보조원 레위들의 숫자를 예레미아스(J. Jeremias) 교수는 1만 8,000명으로 추산했다. 그들은 십일조와 성전세와 헌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사제들은 24개조로 나뉘어 한 주간씩 돌아가면서 제사를 바쳤다.
사제들의 우두머리인 대사제와 그 측근 사제들이 귀족들과 야합하여 사두가이 당파를 형성했다. 이들은 기득권에 집착한 나머지 평신도 당파인 바리사이파와 대립관계에 있었다. 이들은 항상 정권과 헬레니즘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들의 사상적 특징으로는 구전 부정(《유대 고대사》13권 297항) · 천사의 존재 부정(사도 23,8) · 영혼 불멸 부정(《유대 고대사》18권 16~17항) 등이다. 부활을 부정했다는 설(마르 12,18-27)과 모세 오경만 경전으로 인정했다는 설도 있다.
예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자주 부딪히지 않았다. 그러나 30년 4월 초순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 낸 성전 정화 사건으로 이들의 비위를 거슬린 것이 그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인 것 같다.
②율법 중심의 바리사이파 :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때 ‘경건자들’(하시딤)이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 독립 전쟁이 성공하여 하스모네 왕조가 세워졌을 때 현실 정치에 동조한 경건자들이 바리사이파로 발전했다. 그리고 하스모네 왕조가 대사제직까지 겸직하는 것에 분개해서 사해 서북쪽 쿰란으로 가서 묵시 문학적 영성을 추구한 이들이 에세네파가 되었다. 바리사이파들은 요한 히르카누스 1세(기원전 134~104) 치세 때 사두가이파의 적수로 나타난다(《유대 고대사》 13권 288~290항). 알렉산데르 얀네우스(기원전 103~76) 치세 때에 정권에 저항했고, 그 후계자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기원전 76~67) 치세 때는 정권과 화해하면서 영향력이 급상승했다. 예수 시대에 바리사이들은 6,000여 명이었으리라고 예레미아스 교수는 추정했다.
바리사이파들은 성서와 더불어 구전도 중시했다(《유대 고대사》13권 297항). 이들은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즐겨 결의론을 전개했다.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사도 23,6-8).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주로 바리사이파와 논쟁을 하였다. 이는 예수가 그만큼 그들과 어울렸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후에 발생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논쟁을 소급해서 예수의 입에 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졸저,《마태오 복음이야기》중 “유대교 심판설교”).
③종말에 집착한 에세네파 : 에세네파의 출현 동기는 이렇다. 시리아 정권을 상대로 이스라엘 독립 운동을 일으킨 마타티아 제관의 넷째 아들 요나단(기원전 160~142)이 독립군 지도자가 된 것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그가 과욕을 부려 152년에 대사제 직분까지 겸직했다(1마카 10,21; 1Q 하바꾹 주석 8,1-13). 그로 인해 당시까지 독립 운동에 가담했던 경건자들 가운데 사제들이 몹시 저항했으며 사독계 사제인 ‘의로운 스승’이 이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대사제는 사독 가문에서 배출되는 전통을 요나단이 거스렸다는 것이다. 에세네 중앙 수도원인 쿰란을 발굴한 드 보(R.G. De Vaux, 1903~1971)에 따르면, 요나단의 조카 요한 히르카누스 치세 때(기원전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쿰란으로 이주하여 큰 수도원을 세웠다. 기원전 31년 대지진으로 쿰란 수도원이 파괴되자 수도자들은 어디론가 이주했다가,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 치세 때(기원전 4~서기 6) 다시 쿰란으로 돌아와서 수도원을 재건했다. 서기 66년에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이 일어나고, 로마 진압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68년 6월 21일 예리고를 탈환했다(요세푸스,《유대 전쟁사》4권 450항). 예리고에서 남쪽으로 불과 13㎞ 떨어진 쿰란의 수도자들은 서둘러 도서관 장서를 뒷산 11개 동굴에 숨기고 도망치다가 모두 몰살된 것 같다. 그들의 장서가 1947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쿰란 문헌이다.
에세네는 묵시 문학에 빠져서 종말 전쟁 · 종말 잔치를 기대하였다. 이들은 종말에 구원되고자 엄격한 계율을 만들어 정성껏 지켰으며,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수시로 목욕[洗淨浴]을 했을 뿐만 아니라, 독신으로 살았다. 적어도 쿰란 수도자들은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동조하는 일반인들은 재산도 소유하고 결혼도 했다.
예수가 에세네파의 회원이었다는 주장이 유포되고 있다(B. Thiering). 그런가 하면 쿰란 제7 동굴에서 발견된 그리스 파피루스(7Q5)는 마르코복음서 6장 52-53절과 일치한다는 주장이 25년 전에 처음으로 제기되더니(J. OʼCallaghan), 최근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C.P. Thiede · M. dʼAncona, Der Jesus-Papyus, Müchen, 1996). 그러나 쿰란 문헌 판독 전문가 푸에쉬(E. Puech)는 이들의 주장을 일축했다(Welt und Umwelt der Bilbel, Heft 10, 4. Quartal 1998,P.44). 에쎄네와 쿰란에 관한 논문 세 편만 적는다: 졸저,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 1988, 72-78쪽; 박상래 지음,《성서와 그 주변 이야기》, 바오로딸 1997, 222-249쪽; 안성림/조철수 역주,《사해문헌》 1, 한국문화사 1996.
④독립 투사들의 젤롯당 :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 간혹 ‘열혈당’이라고도 하는 젤롯당(Zealot)의 유래와 활동을 언급하는데, 그 기록들을 모으면 다음과 같다. 서기 6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임금 아르켈라오를 비엔으로 귀양 보내고 총독을 임명하여, 세금을 거둘 목적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자 갈릴래아 호수 북쪽의 천연 요새 가믈라(지금의 Khirbet es-Salam) 출신 유다가 호구 조사와 납세 거부 운동을 벌였다. 그가 내세운 기치는 이스라엘 성지의 주인은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젤롯당의 효시이다(2권 118·433항; 7권 253~257항). 유다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시몬도 반로마 운동을 벌이다가 티베리우스 알렉산델 총독(46~48)에게 처형당했다. 그의 후손과 자객들이 알비누스 총독 때 (62~64) 대사제 요나단을 죽였다(2권 254~257항). 손자 메나헴은 66년 예루살렘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다른 독립군 단체에 의해 살해당했다(7권 253항). 유다의 후손인 엘레아자르 벤 야이르는 마사다 천연 요새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다가 74년 해방절에 장열히 순국했다(7권 391~401항, 졸저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83-85쪽).
이상이 요세푸스가 기술한 젤롯당, 일명 자객당의 유래와 활약상이다. 열혈당(그리스어로 젤로티스, 아람어로 칸느안)은 하느님과 민족에 대한 열정이 넘쳐 로마인과 로마에 동조하는 동족을 배척한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열혈당원들 가운데는 단도로 로마인들과 로마에 동조하는 동족을 죽이는 극렬 분자들이 있었다.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에도 젤롯당원으로 활약하였던 시몬이 있었다(마르 3,18). 열혈당의 유래와 활약상은 여기서 약술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박상래, 《성서와 그 주변 이야기》,249-264쪽).
예수는 민족 독립 운동을 비롯해서 정치 문제에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로마의 군국 정치나 그리스의 민주정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거니와 관심조차 표명하지 않았다. 경제 문제 대해서도 그렇다. 예수는 유산 분배 문제에 개입한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만일 그분이 이승에 환생하신다면 자본주의, 사회주의 또는 제3의 길에 관심을 드러내실까? 단지 온 겨레에게 혜택이 가는 경제를 추구하라는 정도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요즘 우리의 시각이긴 하지만 당시 최대의 사회 문제는 노예 제도였다. 예수나 바오로는 노예 제도 철폐를 거론한 적이 없다. 단지 노예를 학대하지 말고 사람으로 아껴야 한다고 하셨을 따름이다. 또한 예수는 문학 · 음악 · 조형 예술에 대해 말씀하신 적도 없다. 문화에 대한 그분의 뜻을 감히 헤아린다면, 나날을 살아가는 데 보람을 심어주는 문화를 가꾸라는 정도였을 것이다. 위의 관점이 옳다면, 예수님 또는 신약성서에 근거해서 정치신학, 경제신학, 사회신학, 문화신학을 전개하는 것은 번지수가 빗나갔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우리나라 경제위기를 맞아 개신교계 신약학자들이 힘을 합쳐《신약성서의 경제윤리》(한들 1998)라는 논문집을 펴냈는데, 과연 경제위기 해소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묻고 싶다.
⑤묵시 문학 사조 : 묵시 문학은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종교 문학이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던 시대로서,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와 바빌론 유배에 이어 참으로 처참한 시기였다. 묵시 문학자들은 의기소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 위안을 주려고 애썼다. 이들은 현실에 절망하고 오직 초현실에 희망을 걸었다. 이들은 세상을 양분하여 ‘이 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나누었다. 이 세상은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죄와 악의 소굴이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중단 없이 퇴보한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죄와 악이 늘어난다. 작게는 가정이 파괴되고 나라는 가뭄 · 홍수 · 기근 · 지진 · 전염병으로 쑥밭이 되며 국가 간에 전쟁이 자주 일어난다. 마침내 해 · 달 · 별이 빛을 잃고 떨어지는 등 우주적 파국 현상이 일어나서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통곡할 때 하느님 또는 대리자인 사람의 아들(人子)이 땅에 내려와 선민을 구원하고 만민을 단죄한다. 선민은 새 하늘 · 새 땅 · 새 예루살렘에서 지복을 누린다. 이것이 묵시 문학의 큰 줄거리이다.
그렇다면 묵시문학자들은 어떻게 천지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역사 전체와 종말 사건과 종말 이후의 신세계를 알았을까? 그들은 사적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계시나 정보도 없이 단지 상상 · 공상 · 환상 · 망상을 통해 책들을 집필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 이스라엘 위인들의 이름을 도용했다. 묵시 문학은 모두 가탁 작품이다.
예수 시대를 전후해서 쓰여진 유대교 묵시 문학 작품 가운데 중요한 작품으로는《다니엘서》· 에티오파아어《에녹서》· 라틴어로 전해 오는《모세의 승천기》와《제4에즈라서》· 시리아어《바룩서》등이 있다. 신약성서에서 유대교 묵시 문학 유형을 가장 닮은 작품은 요한묵시록이다. 앞에서 소개한 에세네파도 묵시 문학에 심취했다.
예수도 묵시 문학적 표현을 더러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선포도 묵시 문학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종말 설교(마르 13장; 마태 24-25장; 루카 17, 20-37; 21, 5-36)를 보면 공관복음서 작가들도 묵시 문학적 표현들을 상당히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나 공관 복음사가들이 묵시 문학과 거리를 둔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들이 종말 임박 신념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지만 종말의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날과 그 시간을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 자신도 모른다고 한다(마르 13,32). 사람의 아들이 내려올 장소도 거론하지 않는다. “마치 번개가 동쪽에서 서쪽까지 빛나는 것처럼” 온 세계 어디서든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볼 수 있다고 한다(마태 24,27; 루카 17,24). 종말에 “구원 받을 사람이 적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예수는 많다, 적다고 답변하지 않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뜻으로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쓰시오”라고 말했을 따름이다(루카 13,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