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준의 포스트 잇>
죽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것.
어머니는 내가 스물일곱 살이던 해에 돌아 가셨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등지던 어머니와그 나이가 되어 지난 1년을 살았다
이른 나이에 가까운 이와 사별(死別)한 사람들은 독특한 경험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얼마섯살에 마흔살의 아버지를 잃은 사람은, 마흔 살이 되고 나서 부터는 꿈속에서 자신보다 하루라도 더 젊은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여든 살이 되면 그는 꿈속에서 자기보다 인생을 절반 밖에는 살지 못하는 한 사내향해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이런 꿈에서 깨고 나면, 그 기분은 헤아리기가 어렵다 (어려울 것이다)
그런 상념에 사로 잡혀서 인지, 올 한해 부모님을 꿈 속에서 자주 뵈었다.
나보다 젊은 어머니를 꿈속에서 만나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해 였고
노인이 되어 작고하신 아버지와는 '그러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다는
무의식 때문이 있을 것이다.
해질녘 페르시아의 한 철학자가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갑자기 비명이 들리고 하인이 달려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며 벌벌 떨었다. 하인은 철학자에게 말(馬)을 빌려 달라고 애원했
테헤란으로 도망치겠다는 거였다 철학자는 승낙했고 말에 올라탄 하인은
내려 앉는 어둠속으로 쏜살 같이 사라졌다.
산책을 중단한 철학자는 집안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거기 죽음의 신이 서 있었다.
철학자가 물었다. "왜 내 하인에게 공포를 주었나?"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오늘 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 저승으로 데려갈 계획인데,
그가 아직도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놀랐을 뿐이다"
나는 현실에서도 저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십수년전 아는 형님이 '대단한 '직장에서 지방의 직장으로 스카우트 되는 것에 대해
갈등하고 있었다 그 지방의 직장도 조건이 '나쁘진 않았다' 나는 서울에 있기를 권했다
내 말 때문에 그런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서울에 남았다.
몇년뒤 그는 서울의 직장에서 국제 뉴스에 나올 만큼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그가 지방으로 갔다면
그는 서울에서 겪었을 불행은 '상상조차 못한 채' 서울에서 누질 승승장구를 그리워
하고 있었겠구나
이렇듯 인간은 무엇이 좋은 일이고 무엇이 나쁜일 인지 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다. 행복과 불행에 대한 운명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운명' 자체는 분명이
있다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반드시 죽으니까. 죽음은 나와 타인의 '영원한 이별'이다.
그러나 우리는'자신과의 영원한 이별'에 대해서는 늘 망각한다.
죽음은 죽은자의 묘비가 아니라 제대로 살기위한 산자의 경전(經典)이다.
언젠가 나는 백발노인이 되어
쉰세살의 한 여인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며 내 지난 삶을 고백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인생을 열심히 사랑해야하는 이유다. (시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