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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역 대순전경 (平譯 大巡典經)
대순전경 초판본(大巡典經 初版本) 원문(原文)과 평역(平譯)
2000년 경남 진주에서 푸른글
나의 작업에 대하여
이 평역은 대순전경 초판본을 원본 그대로 적고 저의 평역을 덧붙인 것입니다. 대순전경 초판본이 중요한
것은 종통(대두목)의 문제로 증산계통의 종교인들이 여러 갈래로 종파가 갈라지기 전의 책이라
초기의 증산사상과 판본의 흐름을 연구하는데 있어 가장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본은 제가 처음 증산선생을 알게 되었던 1983년 겨울, 서울에서 한의원을 하시는 분이 대순전경의
초판본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빌려서 복사한 후, 그동안 혼자 간직해오다가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보급이 되기 시작하자 여러사람이 이 초판본을 볼 수 있도록 컴퓨터 한글파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 후 이런 저런 사정으로 거의 10년이 지난 이제서야 이 작업을 마쳤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끈 이유중 가장 큰 이유는 한글전용세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저의 한자실력이 형편없어서
대순전경의 모든 한자들을 하나하나 옥편에서 찾아야 했고, 게다가 욕심을 내어 평역까지 덧붙이려다 보니
한자로 된 구절들의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였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최소한의 번역을 위해서는 수많은
참고문헌을 찾고 한자를 새롭게 공부해야 했으며, 설혹 짜집기식으로 주워 맞추어 일부 번역이 되더라도
그 뜻을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접하고 책속의 글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찾고 그것을 번역하기 위해 방황한지 거의 20여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글을 여기에 올려둡니다. 부끄러운 이 글을 올리면서 제가 스스로 그나마 위안으로
삼으려는 것은 재주가 없는 저의 서투른 평역으로나마 한자에 어두운 새로운 한글세대와 증산사상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이 책을 접하여 대순전경을 읽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면 저의 서투름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평역은 모든 글자에 대해 국어사전과 옥편을 찾아서 글의 의미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쉽게
평역하려고 하였으며 증산계통의 신앙인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읽고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
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자체 교정을 몇 번씩 거쳤기 때문에 오자나 탈자도 거의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이 책은 아래에서 보듯이 昭和四年(1929年) 이상호, 이정립(=이성영) 형제가 동화교회도장에서 펴낸 대순전경
초판본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저의 보잘것 없는 작업으로 대순전경을 보다 깊이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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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역 대순전경 (大巡典經) 목록
제 1 장. 선생의 탄강과 유년시대 (第一章, 先生의 誕降과 幼年時代, 共六節)
제 2 장. 선생의 유력 (第二章, 先生의 遊歷, 共六節)
제 3 장. 선생의 성도와 기행이적 (第三章, 先生의 成道와 奇行異蹟, 共一百八節)
제 4 장. 문도의 종유와 훈회 (第四章, 門徒의 從遊와 訓晦, 共七六節)
제 5 장. 치병 (第五章, 治病, 共四二節)
제 6 장. 천지공사 (第六章, 天地公事, 共八一節)
제 7 장. 전교 (第七章, 傳敎, 共一二節)
제 8 장. 법언 (第八章, 法言, 共七二節)
제 9 장. 개벽과 선경 (第九章, 開闢과 仙境, 共二四節)
제 10 장. 문명 (第十章, 文明, 共三二節)
제 11 장. 인고문명 (第十一章, 引古文明, 共四節)
제 12 장. 화천 (第十二章, 化天, 共三十節)
제 13 장. 선생의 이표 (第十三章, 先生의 異表, 共六節)
제 1 장. 선생의 탄강과 유년시대 (第一章. 先生의 誕降과 幼年時代)
1. 선생의 존함은 강 일순(姜一淳)이시며 증산(甑山)은 그 분의 호(號)이시니 지금으로부터 134년전
(2005년 기준) 단기4204년, 서기1871년, 이조 고종 8년 신미년 음력 9월19일, 양력 11월1일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에서 탄강(誕降)하시니라.
선생께서 탄강하신 마을은 원래 객망리(客望里) 손바래기라고 불리워지던 곳으로 선생께서 오시기 전에는
선망리(仙望里)라고 불리워지더니 후에는 객망리라 하고 그 뒤로는 신월리(新月里)라 불리워지니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기(新基)마을 곧 새터이다.
原文: 先生의 姓은 姜이오 名은 一淳이오, 甑山은 그 號이시니 距今 五十八年前 李朝 高宗 辛未 九月十九日에
朝鮮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今 정邑郡 德川面 新月里)에서 誕降하시니라.
2. 선생의 아버님 존함은 흥주(興周)요. 어머님은 권씨이니 선생의 어머님이 고부군 답내면(畓內面) 서산리
(西山里)에 있는 친정에 근친(覲親)가셔서 계시던 어느날 하루는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 몸을 덮으면서 온 세상이 밝아지는 꿈을 꾸신 후 그 뒤에 태기가 있더니 선생이 탄강하실 때에는
산실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고 밝은 빛이 온 집안을 둘러싸고 그 빛이 하늘까지 뻗어 있더라.
原文: 父의 名은 興周오 母는 權氏니 權氏가 古阜郡 馬項面 西山里 그의 親家에 覲省하엿다가 하로는 하눌이
南北으로 갈나지며 큰 불덩이가 나려와 몸을 덥흠에 天下가 光明하여진 을 일로부터 有身하엿더니 그 誕降
하실적에 産室에 異香이 가득하며 밝은 빗이 집을 둘너 하눌에 쳣더라.
參考句節: 先生께서 誕降하실 때에 두 仙女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産母를 看護하더니 이로부터 異常한
香氣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에 뻗쳐서 이레동안 繼續하니라.
낳으실 무렵에 부친이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두 선녀(仙女)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산모(産母)를
간호(看護)하더니 이로부터 이상(異常)한 향기(香氣)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에
뻗쳐서 이레동안 계속(繼續)하니라.
3. 점차 자라시면서 얼굴이 원만하시고 성품이 관대하고 후하시며 남다르게 총명하시며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심으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공경과 사랑을 받으시니라.
原文: 漸次 자라심에 相貌가 圓滿하시고 率性이 寬厚하시며 聰明과 慧識이 超衆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敬愛를 바드시니라.
4. 어리실 때부터 살아있는 모든 것을 아끼시는 덕이 두터우셔서 나무심기를 즐기시며 자라나는
초목 하나라도 꺽지 아니하시고 아주 작은 곤충이라도 해를 입히지 아니하시며 간혹 위험에 빠진 생물을
보시면 힘써 살리시니라.
原文: 幼時로부터 好生의 德이 富하사 種樹하기를 즐기시며 자라나는 草木을 折치 아니하시고
微細한 昆蟲이라도 害치 아니하시며 或 危機에 瀕한 生物을 보시면 힘써 救援하시니라.
參考句節: 하루는 先生의 父親께서 벼를 말리시며 새와 닭을 심하게 쫓으시니 先生께서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 먹는 것을 그렇게 못 보시니 사람을 먹일 수 있겠나이까." 하시며 만류하시더니 부친이 듣지 않고 굳이
쫓으니 별안간 한 낮에 천둥이 치고 큰 비가 쏟아져 말리던 벼가 다 떠내려가 한 알도 건지지 못하니라.
차경석이 논에 나리는 새떼를 굳이 쫓거늘 가라사대 "한떼 새의 배채움을 용납하지 못하니 어찌 천하 사람의
배 채워 주기를 뜻하리요." 하시니라.
일곱살 되시던 丁丑年에 農樂을 보시고 문득 慧覺이 열리셨으므로 長成하신 뒤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아니하시되 農樂은 흔히 구경하시니라.
5. 선생께서 서당에 들어가셔서 한학을 배우실 때 한 번 들으신 것은 곧 그 자리에서 깨달으시고 동무들과
함께 글을 지으실 때는 항상 장원을 하시니라. 하루는 선생의 스승이 다른 여러 학부형에게 미움을 받을까
하여 선생 다음으로 뛰어난 학동에게 장원을 주려고 속으로 마음을 정하고 시험을 보았더니 또 선생에게
장원이 돌아가거늘 이것은 선생께서 스승의 속마음을 미리 아시고 다른 학동과 선생의 문체와 글자모양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신 까닭이라. 모든 일에 이렇게 지혜롭고 현명하심으로 보는 사람마다 다 놀랍고 이상하게
생각하니라.
原文: 書塾에 드러 漢學을 배우실 새 한 번 들은 것은 곳 깨다르시고 동무들로 더부러 글을 지으심에
恒常 壯元을 하시니라. 하로는 스승이 여러 學父兄에게 뮈움을 바들가하여 文章이 次號되는 他兒에게 壯元을
주려고 內意를 定하고 考試하엿더니 先生에게로 壯元이 도라가니 이는 先生이 스승의 內意를 미리 아르시고
文體와 字樣을 變하야 辨別치 못하게 하신 까닭이라.
모든 일에 이러케 慧明하심으로 보는 者가 다 驚異하니라.
參考句節: 丁丑(1877)年에 先生의 父親께서 訓長을 구하여 先生께 千字文으로 글을 가르치실 때 하늘 天字와
따지 地字를 가르칠 때에는 따라 읽으시나 검을 玄字와 누루 黃字를 가르칠 때에는 따라 읽지 아니하시거늘
訓長이 할 수없이 그친지라. 父親이 안방으로 불러들여 그 緣故를 물으니 말씀하시기를 "하늘 天字에 하늘의
이치를 다 알았고 땅 地字에 땅의 이치를 모두 알았으니 더 배울 것이 어디 있사오리까. 남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훈장이 남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치 못하니 돌려보내사이다." 하시니 父親께서 할 수없이 訓長을
돌려보내시니라.
아홉 살 되시던 己卯年에 父親께 請하여 後園에 別堂을 짓고 홀로 居處하사 外人의 출입을 금하시고 間日하여
암 꿩 한 마리와 비단 두자 다섯치씩 구하여 들이시더니 두 달후에 문득 어디로 나가셨는데 방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더라. 그 뒤에 집으로 돌아오사 自意로 外接에 다니시면서 글을 배우시니라.
부친이 정읍 읍내 朴 富豪에게 수백 냥 빚이 있어서 督促이 심하므로 걱정으로 지내거늘 先生께서 父親께
청하여 돈 오십냥을 준비하여 가지고 朴 富豪에게 가사 돈을 주시고 그 집 私塾에 가서 학동들과 싸여서
노실 새 訓長이 韻字를 불러 학동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니 先生께서 함께 글짓기를 청하사 落韻成詩
하심에 詩格이 絶妙하거늘 訓長과 학동들이 크게 이상히 알며 朴 富豪도 심히 奇異히 여겨 집에 머물러
그 子侄들과 함께 글 읽기를 청하는 지라. 先生께서 不得已하여 며칠 동안 머무르시다가 父親의 빚을 걱정
하시니 朴 富豪가 모든 일에 크게 奇特히 보고 심히 사랑하여 드디어 債權을 抛棄하고 證書를 불사르니라.
열세 살 되시던 癸未年에 모친이 친히 짠 모시베 예순자를 마을사람 유덕안(柳德安)에게 들리사 정읍장에
팔러 가셨는데 덕안은 다른 일이 있어서 다른 곳에 가고 선생께서는 모시베를 布木廛에 놓고 앉으셨더니
문득 헛 눈을 파는 사이에 모시베를 잃어버렸더라. 덕안이 이 말을 듣고 빨리 돌아와서 찾으려하나 날은
저물고 많은 사람중에 찾을 길이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시기를 청하니 先生께서 듣지 아니하시고
즉시 고창으로 가시며 가라사대 "내일 들어가리라." 하시거늘 덕안은 어찌하는 수 없이 혼자 돌아가니라.
이튿날 선생께서 모시베 값을 가지고 돌아와서 모친께 올리시니 온 집안이 이상히 여겨 사실을 물으매
가라사대 "모친이 無限한 勤苦를 들여서 짜신 物件을 잃었음에 얼마나 愛惜히 생각하실까 하여 오늘이
고창장(高敞場)이므로 반드시 장에 나올 듯 싶어서 바로 고창으로 갔더니 다행히 찾아서 팔아왔나이다."
하시니라.
선생께서 일곱살 때에 어느 글방에 가셨는데 訓長으로부터 놀랄 경(驚)의 韻을 받으시고 글을 지으시니
이러하니라. "遠步恐地坼 大呼恐天驚"(발 걸음을 멀리 옮기려하니 땅이 갈라질까 두렵고 크게 숨 쉬려 하니
하늘이 놀랄까 두려웁구나.)
6. 집안이 가난하여 학업은 일찍 그만두시니라.
原文: 家勢가 貧乏함으로 學業은 일직 廢하시니라.
제 2 장. 선생의 유력 (第二章. 先生의 遊歷)
1. 선생께서 24세 되시던 갑오(1894)년에 고부사람 전 봉준이 당시의 악정에 분개하여 동학신도들을 모아서
혁명(갑오농민혁명)을 일으키니 세상이 흉흉해지는지라. 선생께서 동학농민군의 앞날이 이롭지 못할 것을 미리
아시고 "달빛 어두운 밤에 기러기 높이 나는데 오랑캐 장수 선우(匈奴族 君長)는 밤을 틈타서 도망 하는구나.
날쌘 말을 탄 장수가 뒤 쫓으니 큰 눈 내리는 속에 궁도에 빙둘러 쌓이리라."라는 옛시를 여러사람에게
외어주시며 눈 내리는 겨울에 이르러 동학군이 패망 할 것임을 미리 알려 주시며 함부로 동학군에 들어
움직이지 말라고 가르치시더니 과연 이해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하여 섬멸되고 선생의 가르침에 따른
사람은 모두 화를 면하니라.
原文: 二十四歲 되시든 甲午에 古阜人 全 琫準이 當時의 惡政을 憤慨하야 東學信徒를 모아 革命을 일으키니
一世가 洶動한지라. 先生이 그 前途가 不利할 줄 아르시고 "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欲將輕騎逐 大雪滿弓刀"의
古詩를 여러사람에게 외워주사 冬期에 이르러 敗滅될것을 諷示하시며 妄動치 말라고 曉諭하섯더니
이해 겨울에 果然 東學軍이 官軍에게 剿滅되고 先生의 曉諭에 조친 者는 다 禍를 免하니라.
參考句節: 이 해 시월에 동골에 가사 東學接主 안 윤거(安允擧)를 訪問하시니 마침 태인 닥뱀이 안 필성
(安弼成)이 한 마을에 사는 동학신도 최 두연(崔斗淵)과 함께 와서 윤거에게 道談을 듣고 있더라. 先生께서
마루에 걸터 앉으사 윤거와 더불어 姓名을 通하신 뒤에 일러 가라사대 "고부에서 난리가 일어나서 東學軍이
황토마루(黃土峴)에서 勝利를 얻었으나 畢竟 敗亡을 면치 못하겠으므로 동학군의 發源地인 이곳에 효유하러
왔노라. 그대가 接主라 하니 삼가 戰亂에 參加하기를 回避하여 無辜한 生民을 戰禍에 몰아 들이지 말라.
섣달이 되면 그들이 全敗하리라." 하시고 돌아 가시는 지라. 윤거는 이 말씀을 듣고 드디어 접주를 辭免하고
戰亂에 참가치 아니 하였으나 최 두연은 믿지 않고 윤거의 代로 접주겸 明査長이 되어 윤거의 部下를
引率하고 出戰하더라.
필성은 두연에게서 道를 받은 뒤에 南原으로 와서 從軍하라는 軍令을 받고 스무날 닥뱀이를 떠나 남원으로
향할 때 全州 九耳面 亭子里에 이르니 先生께서 길가에서 계시다가 필성이 이르름을 보시고 일러 가라사대
"그대가 올 줄을 알고 이곳에서 기다렸노니 함께 가자." 하시고 필성으로 더불어 두어마장을 行하여
任實 마군단 酒幕에 이르러 가라사대 "날이 차니 이곳에서 쉬어 기다리라. 남원에 가서 만날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리라." 필성이 가로대 "旅費가 없으니 만날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困難하겠나이다."
가라사대 "밥 굶을 걱정은 하지 말라." 하시더니 두어시간이 지난 뒤에 문득 放砲聲이 나며 과연 두연이
수 천 軍馬를 거느리고 지나가며 필성에게 "남원으로 가지말고 전주로 따라오라." 하는지라. 先生께서
필성에게 일러 가라사대 "군마의 뒤를 가까이 따라감이 不可하니 천천히 가자." 하시고 전주 수통목에 이르러
가라사대 "오늘은 전주에서 騷亂하여 殺傷이 있으리니 이 곳에서 자고 내일 가자." 하시고 필성으로 더불어
수통목에서 쉬시니라.
이튿날 필성을 데리시고 전주에 이르사 조용한 곳에 主人을 定하시고 저녁에 필성에게 일러 가라사대
"거리에 나가면 볼 것이 있으리라." 하시며 함께 나가사 한 곳에 이르러니 세 사람의 머리가 길 바닥에 구르는
지라. 가라사대 "저것을 보라. 이렇게 위험한 때에 어찌 輕率하게 몸을 움직이리오." 하시더라.
필성은 이곳에서 선생과 作別하니라.
그믐께 東學大軍이 전주를 떠나서 京城으로 향할 때 필성이 종군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니 선생께서
길 가에 서 계시다가 필성을 불러 물어 가라사대 "이제 종군하느냐." 對하여 가로대 "그러하나이다."
가라사대 "이 길이 크게 不利하리니 操心하라." 하시더라. 필성은 선생을 作別하고 종군하여 진잠읍(鎭岑邑)을
지나서 유성(儒城) 장터에서 쉬고 다시 하루를 행군하여 다음날 새벽에 淸州 兵營을 進攻할 새 삼십리 가량
(假量) 미치지 못하였는데 先生께서 또 길가에 서 계시다가 필성을 불러 물어 가라사대 "너의 軍中에 한 중이
있더냐." 대하여 가로대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는 이길을 따르지 말라. 저희들이 妖僧의 말을 듣고 滅亡을
當하리라."
필성이 가로대 "이런 重大한 일에 어찌 불길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가라사대 "나의 말을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어찌 저희들을 미워함이리오. 저희들의 불리한 將來를 알므로 한 사람이라도 화를 면케하려 함이로다."
가로대 "그러면 先生은 어찌 이곳까지 오셨나이까." 가라사대 "나는 동학에 종군하여 온 것이 아니요,
구경하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때에 김 형렬(金亨烈)이 필성의 곁에 있다가 선생께서 필성과 酬酌하시는
말씀을 듣고 인사를 청하거늘 형렬에게도 從軍하지 말라고 권하시는지라. 필성과 형렬은 先生의 말씀을
믿지 않고 從軍하여 가다가 청주 병영앞 산골에 이르니 좌우에서 伏兵이 일어나서 砲火를 퍼부음에 동학군에
죽는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지라.
필성과 형렬은 慌怯하여 몸을 빼어 松林속으로 들어가니 선생께서 이곳에 계시다가 불러 가라사대
"너희들은 잘 逃亡하여 왔도다. 이곳은 安全하니 安心하라." 하시니 형렬은 비로소 先生의 知鑑이 非常하심을
感服하니라. 두 사람은 종일 먹지 못하여 주림을 이기지 못하거늘 先生께서 돈을 내어주시며 가라사대
"저 곳에 가면 떡집이 있으리니 주인이 없을지라도 떡값을 數爻대로 떡그릇 안에 두고 떡을 가져오라."
필성이 명하신대로 하여 떡을 가져오니 선생께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 먹이시니라.
先生께서 두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동학군이 미구(未久)에 쫓겨오리니 우리가 먼저 감이 옳으리라." 하시고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실 때 진잠에 이르러 문득 가라사대 "동학군이 이곳에서 또 많이 죽으리라."
두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심히 불쾌히 생각하거늘 가라사대 "저희들을 미워함이 아니요, 사태(事態)의
진전(進展)될 기미(機微)를 말함이니 아무리 듣기 싫을 지라도 불쾌(不快)히 생각하지 말라." 하시니라.
산중유벽(山中幽僻) 한 곳에 쉬시더니 얼마 아니하여 총소리가 어지러히 일어나며 그 곳에서 격전(激戰) 끝에
동학군이 많이 사상(死傷)하니라.
이곳을 떠나 산길을 행하시더니 문득 목탁(木鐸)소리가 들리거늘 찾아가니 곧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더라.
가라사대 "해는 아직 이르나 더 가다가는 해(害)를 입으리니 이곳에서 자고 가자." 하시고 쉬시더니 얼마
아니하여 한 중이 이르러 말하되 "동학군이 노성(魯城)에 유진(留陣)하여 도망하는 군사(軍士)를 붙든다."
하거늘 필성과 형렬이 크게 근심하니 가라사대 "이곳에서 쉬자는 것은 정(正)히 이러한 화(禍)를 피(避)하려
함이라. 내일 아침에 떠나가면 아무 사고(事故)가 없으리니 염려(念慮)하지 말라." 하시더라.
이튿날 아침에 갑사를 떠나시면서 가라사대 "그대들은 이로부터 큰 화가 없으리니 각기 갈려가라." 하시니
두 사람은 오히려 두려운 마음을 놓지 못하여 선생과 동행(同行)하기를 청(請)하거늘 허락(許諾)하시고
함께 여산에 이르사 가라사대 "만일 읍내를 지나면 옷을 빼앗기리라." 하시고 샛길로 들어 고산(高山) 인내
장터로 향(向)하시니라.
이때에 여산읍으로 지나는 동학군은 모두 읍사람에게 옷을 빼앗기고 벗은 몸으로 흩어져 가니
대개(大槪) 전번(前番)에 동학군들이 북상(北上)할 때에 읍사람들의 옷을 빼앗아 갔음을 보복(報服) 함이러라.
이 길로 전주에 이르사 두 사람을 각기 돌려 보내실 때 필성과 형렬이 숙박비(宿泊費)가 없음을 걱정하거늘
가라사대 "내가 이곳에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돌아가라." 하시거늘 이에 선생께 작별하고 형렬은 구릿골로
필성은 닥뱀이로 각기 돌아갔더니 이 뒤에 동학 전군(全軍)이 도망해 와서 섣달 열 사흗날 원평(院坪)
접전(接戰)과 보름달 태인 접전으로 연전연패(連戰連敗)하여 산망(散亡)하여 버리니라.
2. 갑오동학농민전쟁 이후로 나라의 정치는 더욱 부패해지고 세상의 인심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며 권력을
쥔 자들은 더욱 횡포하고 잔학해져서 재물을 억지로 강탈하는 것을 일 삼으나 유교는 허례허식만 숭상하고
불교는 혹세무민에만 힘쓰며 동학은 혁명 실패후 그 기세가 꺾여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기독교(舊敎)는
이 틈을 타서 세력을 신장하는데만 온 힘을 기울이니 민중들은 도탄에 빠져 마음을 편히 가지지 못하고
귀의 할 곳을 찾지 못하여 불안과 두려움이 사회 곳곳마다 엄습하거늘 선생이 널리 천하를 구하실 뜻을
품으시고 유교, 불교, 선교, 음양참위의 모든 책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신 후에 세상인심을 두루 살피시고
체험하시기 위하여 정유(1897)년부터 길을 떠나 여러 곳을 두루 다니시니라.
原文: 以後로 國政은 더욱 腐敗하고 世俗은 날로 惡化하야 官憲은 오직 貪贓殘虐을 일삼으며 儒者는 虛禮만
崇尙하고 佛徒는 誣惑만 힘쓰며 東學은 難을 經한 後로 萎靡를 極하야 거의 形跡을 거두게 되고 西敎
(基督敎 新,舊敎)는 勢力을 伸張하기에 盡力하니 民衆은 苦窮에 져 安堵의 길을 엇지 못하고 四圍의 眩惑에
싸히여 歸依할 바를 아지 못하야 危 와 不安이 全社會에 襲來하거늘 先生이 慨然히 匡救의 뜻을 품으사
儒,佛,仙 陰陽讖緯의 書籍을 通讀하시고 다시 世態 人情을 體驗하시기 爲하야 丁酉로부터 遊歷의 길을
떠나시니라.
參考句節: 先生께서 스물다섯 되시던 乙未(1895)年 봄에 古阜地方 儒生들이 平亂을 축하하는 뜻으로 斗升山에
모여 詩會를 열었을 때 先生께서도 參與하셨더니 한 老人이 先生을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작은 책 한 권을
傳하니 先生께서 그 책을 通讀하시니라.
先生께서 松廣寺에 여러 날 동안 계실 때 중들이 先生께 無禮하게 대접하니 꾸짖으시기를 "요망한 무리들이
산 속에 모여 佛法을 빙자하여 惑世誣民하고 世間에 害毒을 끼치니 이 소굴을 뜯어 버리리라." 하시며
法堂 기둥을 손으로 잡아 당기시니 기둥이 한 자나 물러나니 그제서야 온 중들이 달려와서 謝罪하므로
그치시니 그 후에 물러난 法堂 기둥을 원상대로 回復하려고 여러번 修理하였으나 물러난 기둥이 회복되지
아니하니라.
이 뒤에 전주에 가사 백 남신(白南信)의 아우 소실(少室) 기생(妓生)의 친가(親家)에 사관(舍 )을 정하시고
오랫동안 머무르시더니 그 기생이 선생의 우아(優雅)하신 의표(儀表)를 탐(貪)내어 하루는 밤을 타서 선생께서
거처(居處)하신 방으로 들어오거늘 선생께서 꾸짖어 보내셨더니 그 뒤에 다시 수차(數次) 들어오거늘
여전(如前)히 개유(開諭)하사 돌려 보내시니라.
3. 충청도 연산에 가셨을 때 정역의 창시자인 역학자 김 일부에게 들리시니 이때 일부는 어느날 꿈에
하늘로 부터 천사가 내려와서 증산선생과 함께 천상옥경에 올라오라는 상제(上帝)의 명을 전하므로
일부가 선생과 함께 천상에 올라 요운전이라는 액자가 걸린 화려한 궁궐에 들어가 상제를 뵈오니
상제께서 선생이 널리 세상을 구하려 하시는 뜻을 치하하며 매우 우대하는지라. 일부가 이상히 여기는데
선생이 오셨으므로 이 꿈을 말씀드린후에 요운이라는 도호(道號)를 선생께 드리고 매우 공경 하니라.
原文: 忠淸道 連山에 이르사 易學者 金 一夫에게 들니시니 이에 一夫의 꿈에 하눌로부터 天使가 나려와서
姜士玉과 함 玉京에 올나오라는 上帝의 命을 傳하거늘 一夫가 先生과 함 天使를 라서 玉京에 올나가
曜雲殿이라 題額한 壯麗한 金闕에 드러가 上帝 謁見하니 上帝- 先生에게 對하야 匡救天下하려는을 賞讚하며
極히 優遇하는지라. 一夫 - 크게 異常히 녁여 이 꿈을 말한 後에 曜雲이라는 道號를 先生 드리고 甚히
敬待하니라.
4. 이 길로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각지를 유력하시며 민심과 풍속을 살펴보시니
선생의 학식과 견문이 더욱 깊고 넓어 지셔서 가는 곳마다 신인(神人)이란 칭송를 들으시니라.
原文: 이 길로 京畿, 黃海, 江原, 平安, 咸鏡, 慶尙各地를 轉轉遊歷하시니 先生의 慧識은 博學과 廣覽을
(?)라 더욱 明澈하여지심으로 이르는 곳마다 神人이라는 稱頌이 놉흐니라.
參考句節: 선생의 부모님께서 열세 살 전후로 매파를 두어 여러 차례 揀選을 하시다가 너무 심하게
揀選하셨음을 깨닫고 어디서든 청혼이 있으면 즉시 허혼하리라 마음을 정하셨더니 열네 살 되시던
갑신(1884)년 늦가을에 하동 정씨 문중에서 청혼이 있거늘 즉시 허혼하고 맞이하니 몸이 정상이 아니고
心德이 곱지 못하더라.
이때에 선생께서 늘 천하창생의 운명을 깊이 걱정하시거늘 정씨부인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종종 불화를
일으키니 선생께서 때로 심히 우울해 하시며 집을 떠나시니라. 하루는 정씨부인(鄭氏婦人)이 간곡(懇曲)히
말씀하여 가로대 "이제는 그만 돌아다니시고 집에서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사이다." 하니
선생께서 가라사대 "그렇게 적은 말이 어디 있느뇨." 하시고 이 후로는 집을 가까이 아니하시니라.
갑진(1904)년에 선생께서 구릿골에 계실때 황 응종이 와 뵙고 "정씨부인과 인연을 끓으라."는 부친의 명을
전하니 이는 이때에 고부 본댁에서 정씨부인이 시부모에게 불효하여 집안이 화평하지 못함으로 부친께서
황 응종을 보내 이 사실을 말씀드리게 함이라. 그 후에 하루는 정씨 부인이 구릿골에 찾아왔거늘 선생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라.
5. 이렇게 수 년간을 두루 세상을 유력 하시다가 30세 되시던 경자(1900)년에 고향으로 돌아오시더니 이때에
전주 이동면 전룡리에 사는 이 치안이 아들의 혼담을 위해 충청도로 향하다가 주막에서 선생을 만나 서로
인사도 없이 하루밤을 같이 지내고 그 다음날 떠나려 할적에 선생이 치안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혼사를
위해 길을 떠났으나 반드시 헛일이 되리니 이 길을 가지말고 오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전부터 혼사를 말해오던 곳에서 매파를 보내와서 청혼을 하여 혼인이 성사되리라. 만일 이 기회를 잃으면
다시 혼인길이 열리기 어려우니 빨리 돌아가라." 하시거늘 치안이 선생께서 자신의 일을 상세히 알고
말씀하시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여 비로소 선생과 인사를 나누고 선생의 계시는 곳을 상세히 물은 후 집으로
돌아가니 과연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라.
原文: 이러케 數年동안을 遊歷하시다가 庚子에 故鄕으로 도라오시더니 이에 全州 伊東 面 田龍里 李 治安이
求婚次로 忠淸道를 向하다가 旅舍에서 先生을 만나 一夜를 同宿하고 翌日 臨發에 先生이 治安다려 일너
가라사대 그대가 이제 求婚次로 길을 낫스나 반다시 虛行이 될 것이니 이 길을 가지 말고 다시 집으로
도라가라. 그러면 前日부터 議婚하여 오든 곳에서 君家에 媒介를 보내여 完約을 求하리라. 만일 이 機會를
일흐면 婚路가 열니기 어려우리니 도라가라 하시거늘 治安이 先生 서 自己의 事情을 알고 말삼하심을
神奇히 녁여 비로소 姓名을 通하고 先生의 住所를 자세히 무른 後에 곳 그 길을 가지 안코 집으로 도라오니
果然 말삼하신 바와 갓흐니라.
6. 혼사 일이 있은 이후로 이 치안이 선생의 신성하심을 흠모하여 자기집으로 선생을 모셔왔더니 그때 치안의
아들 직부는 마을 이장으로 갑자기 마을인구를 조사할 일로 매우 고민하는지라. 선생께서 주산으로 셈하신
후에 호수와 남녀 인구수를 자세히 일러주시고 삼일내에 한 사람이 줄어들것임을 말씀하시거늘 직부는 믿지
않고 온마을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조사해보니 과연 한 호수 한 사람의 차이도 없고 또 삼일만에 한 사람이
사망하므로 이로부터 비로소 직부가 선생의 신성하심을 진심으로 느끼고 따르니라.
原文: 이 後로 治安이 先生의 神異하심을 欽慕하야 自家로 延聘 하엿더니 마참 里中人口를 緊急히 調査할
일이 잇서 治安의子 直夫가 甚히 苦心하는지라. 先生이 籌를 取하야 演算하신 後에 戶數와 男女 人口數를
자세히 일너주시고 三日內에 一口가 損 할 것을 말삼하시거늘 直夫는 밋지 안니하고 드대여 里中을 도라
一一히 精査한즉 果然 一戶 一口의 差錯이 업고 한 三日內에 一口가 死亡하는지라. 이에 直夫가 비로소
驚異하야 그 神異하심을 感服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