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꿀오소리 후회록/ by. 얼음빙수
벌꿀오소리는 벌꿀을 좋아하는 오소리였다.
벌꿀오소리는 이름 만큼이나 귀여운 외관을 가졌으나
성격이 용암처럼 사납고 마이웨이가 심했다.
[사진1 - 가시에 박혀도 신경쓰지 않는 벌꿀오소리]
벌꿀오소리는 틈만 나면 아프리카 벌들의 집을 처부수고 꿀과 애벌레를 갈취했다.
벌집 사냥꾼의 몸뚱어리에선 언제나 달달한 꿀냄새가 났다.
김종인은 벌꿀오소리였다.
벌꿀오소리는 벌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벌꿀을 좋아했으나,
벌꿀 분해에 필요한 소화 효소를 가지지 못했다.
한때 꿀독에 빠져 고생한 적 있는 반달가슴곰이 벌꿀오소리에게 조언했다.
“남이사 꿀을 먹든 독을 먹든 돈을 먹든 똥을 먹든.”
김종인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종인아, 내 말 좀 들어봐...”
“왜 이래. 자꾸 위클래스 상담 선생님처럼 굴 거야?”
“그렇다면 종인아, 왜 그렇게 꿀에 집착하는지 말해줄 수 있니?”
“달잖아.”
입에 단 것 중 생에 해롭지 않은 것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벌에게 쏘이는 건 달지 않잖아?”
우린 늘 손대면 다칠 게 분명한 이상을 좇아
좆같이 방황하곤 하지.
김종인은 아무런 부가설명 없이 우수에 젖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불시에 반달가슴곰을 공격했다.
“내게 벌침은 없어서 못 맞는 봉독주사일 뿐이야.”
김종인은 이번 생엔 소화 못할 또 다른 이상(벌꿀)을 찾아 떠났다.
벌꿀오소리의 원대한 낭만에 대해 듣고자 한다면 곰조차 목숨을 걸어야할 것이다.
벌꿀오소리 후회록/ by. 얼음빙수
벌꿀오소리는 꿀을 좋아했지만 꿀만 빠는 인생을 추구하진 않았다.
벌꿀오소리는 잡식성이었다.
벌꿀오소리는 벌꿀 소화효소가 없지만,
맹독에 대한 강한 내성이 있었다.
벌꿀오소리는 동서고금 동식물을 막론하고 모든 것에 덤볐다.
약육강식 피라미드에 서늘한 꿀바람이 불었다.
김종인은 밥 먹듯 강제전학을 다녔다.
“김종인이다. 친구는 필요 없으니까 괜히 찝적대지 마. 나에게 시내 나가서 닭갈비 먹자고 제안하는 놈들은 그 말이 유언이 될 줄 알아.”
닭갈비까진 아니지만 닭꼬치를 먹으러 가자고 말하고 싶었던 너구리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친구들은 잦은 전학에 화가 난 벌꿀오소리를 달래보려 노력했다.
“종인아, 내가 수업 종소리에 맞춰 벨리댄스 춰줄까?”
흥 많은 킹코브라가 웃으며 다가왔다.
“내가 더 잘추면 가만 안 둬.”
벌꿀오소리는 웃는 얼굴에도 침을 뱉었다.
“그럼 더 연습해서 다음에 할게.”
킹코브라는 풀이 죽었다.
“너에게.
다음 같은 건.
없어!”
벌꿀오소리가 킹코브라의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서 까칠한 귀염둥이가 전학을 왔다고
능청떨고 싶어 안달이 나있던 황조롱이도 가만히 입을 닫았다.
벌꿀오소리에게 블랙맘바는 블랙퍼스트 맘마일 뿐이었다.
벌꿀오소리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도 강했다.
벌꿀오소리에게 자비를 바라는 것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렇듯 피도, 눈물도, 겁도, 온정도 없는 것 같은
벌꿀오소리 곁에는 단 한 명의 동지가 있었다.
벌꿀길잡이새였다.
벌꿀오소리 후회록/ by. 얼음빙수
벌꿀길잡이새는 유능한 정보원이었다.
“여기는 김민석.
여기는 김민석.
응답하라 김종인.
응답하라.”
벌꿀길잡이새는 벌꿀오소리에게 벌집의 위치를 알려주고
그가 초토화시킨 현장에 남은 꿀을 취했다.
“김종인이다. 오바.
위치는?”
“잘 지냈냐?”
“그럭저럭. 위치는?”
“난 잘 못 지냈다. 이틀만에 모기를 40방이나 물렸어.”
“사자에게 물리는 것보단 낫잖아. 위치는?”
“이런! 싸가지 없는 놈! 그걸 말이라고 해?”
“버물리 잘 바르고, 어서 위치나 알려줘.”
“이봐, 김종인. 내가 그걸 순순히 알려줄 것 같나.”
“순순히 알려줘. 위치는?”
김민석이라고 해서 김종인에게 없는 친절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민석은 지구상에 인격체라곤 본인밖에 없는 것처럼 구는 김종인에게 서운함을 느꼈으나
뭐 원래 그런 놈이니까, 하고 넘어갔다.
“좌표 보냈다. 잘 지내라. 김종인.
언제 얼굴이나 한 번 보자.”
“얼굴을 왜 봐. 귀찮아.”
“그냥 으레 하는 인사 미친놈아.”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나는 너 보고 싶어.
너는 나 안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라도 이렇게 하는 거야.”
“쓸데없는 말이야. 줄여.”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대화 양상이었다.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김민석이 말라리아 모기에 물려 열병이 도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김민석은 열이 올라 두개골이 지끈거리는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벌꿀오소리 후회록/ by. 얼음빙수
“종인아, 혹시 민석이 형이랑 연락되니?
그 형이 요즘 통 안 보인다?”
“나도 몰라.”
김종인과 김민석의 연락이 두절된 지 어느덧 한달이었다.
김종인은 다른 벌꿀길잡이새와 벌꿀을 찾아나설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벌꿀을 찾으러 다니지 않는 김종인은 24시간이 남아돌았다.
낮잠을 너무 많이 자서 불면증에 걸린 김종인이 동산에 누워 밤하늘을 봤다.
“벌꿀 안 먹어도 잘만 살아지네.”
하루라도 꿀을 찾지 않으면 온몸에 가시가 돋을 줄 알았건만,
금단현상조차 없는 걸 보면 김종인은 벌꿀오소리가 아닐지도 몰랐다.
맹목적인 열망에 회의감을 느끼던 벌꿀오소리가 성명학적으로 고찰했다.
“그러게 이름을 왜 벌꿀오소리라고 지어놔서.”
성명학적으로 고찰하던 벌꿀오소리가 존재론적으로 고찰했다.
“꿀 없이도 잘 살 수 있는데.”
외계인들은 새벽마다 지구에 별빛으로 위장한 방사선을 조사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센치함에 피폭된 김종인이 김민석과의 마지막 대화가 되어버린 무전을 떠올렸다.
김종인은 벌집을 털러갈 생각에 신나서 김민석의 일갈을 가볍게 웃어넘겼었다.
“야. 네가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야.......”
“맞아. 나 원래 친구 없어.”
김종인은 김민석과의 무전이 끊기자마자 벌집을 향해 미친 듯 달려나갔다.
그날 턴 벌집이 마지막 벌집이었다.
회상을 끝낸 김종인은 머쓱한 마음에
장수말벌에게 쏘인 상처를 연신 긁적였다.
“민석이형은 모기에도 내성이 없나?”
“.......”
“버물리를 바르라니까.”
“.......”
“참나. 꿀 찾으러 안 오냐?”
“.......”
“그래도 형이랑은 친구라고 할걸 그랬나.”
벌꿀오소리 후회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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