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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정치인이면서도 위대한 사상가였다. 자신이 배운 학문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관직에 나가 민생 안정과 제도 개혁을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였고, 은퇴한 후에는 후배 양성과 사회 교화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일찍이 신분 차별의 벽을 해소하려고 애썼으며, 내 몸 아끼는 것보다 남을 공경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처가에서 준 집을 팔아 가난한 친척의 끼니를 대주었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먼 친척 여동생이 어려울 때 기꺼이 도와주었으며, 그 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복을 입고 슬퍼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율곡의 착하고 어진 성품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또한 감수성이 풍부하고 순정적인 경향도 있어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와 외할머니 이씨(李氏)에 대한 애정은 효성 이상의 것이었다.
이렇듯 극히 인간적인 그였지만, 서로 나뉘어 당파 싸움을 하던 당시 정치 현실에서는 양쪽 모두에게 의심과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그의 자세는 오히려 모호하고 편파적인 것으로 비난받았고, 끊임없이 해야 할 일을 찾아 끝까지 추진하는 그의 업무 수행 태도 역시 쓸데없는 일을 만드는 위인으로 비판받는 이유가 되었다.
율곡은 이러한 세태 속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을 한탄하였으며, 먼저 정치 지도자들이 바로 소야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백성을 잘 먹인 후에 교육을 시켜야 다스림도 통하는 것이지, 백성들의 배를 주리게 한 후에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는 민생 치도의 철학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일찍이 외적의 침입을 예견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는 선견지명을 보였으나, 이것 또한 조정의 반대에 부딪쳐 실현되지 못했다. 그 후에 전 국토가 일본과 청나라 군사들의 발 아래 짓밟히는 참화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통분을 금치 못할 일이다.
율곡은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솔선수범하는 실천적인 철학자였으며, 그 과정을 통해 참된 도(道)가 실현되기를 바랐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 총명했던 어린 시절
율곡(栗谷) 이이(李珥)은 중종(中宗) 재위 31년(서기 1536년),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났다. 한때 기거했던 파주 지방의 지명을 따서 호를 율곡이라고 하였다. 율곡은 외갓집에서 태어나 여섯살 때 본가인 한성 수진방으로 오기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는 율곡을 낳던 날 태몽을 꾸었는데, 검은 용이 바다에서 날아와 침실 쪽 마루 천장에 스며드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고 얼마 후에 율곡이 태어났다고 해서 어릴 적 이름을 현룡(見龍)이라고 하였다. 그때 율곡을 낳았던 방을 지금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부른다. 이(珥)라는 이름은 율곡이 열한살 때 아버지가 큰 병을 앓던 중 꿈을 꾸었는데, 백발 노인이 율곡을 가리키며 "이 아이는 동국(東國)의 대유(大儒)이니, 이름을 '구슬 옥(玉)'변에 '귀 이(耳)'자를 붙여 짓도록 하라."고 말하여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율곡의 본관은 덕수(德水) 이씨(李氏)로서,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를 그 시조(始祖)로 한다. 율곡의 집안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계속 관직에 종사하던 명문가였으나, 그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는 율곡이 태어나던 당시 아직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평범한 서생이었다.
율곡이 태어난 외가는 마당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던 대갓집으로 세종(世宗) 때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崔致雲)이 건축한 것이었다. 최치운의 아들 최응현(崔應賢)대에 와서 사위인 이사온에게 물려주었는데, 이사온도 그의 사위 신명화에게 상속하였고, 신명화도 아들이 없자 맏사위인 권화에게 물려주었다. 권화(權華)대에 와서 아들은 권처균(權處均)에 의해 집의 이름이 오늘날 전해지는 대로 오죽헌(烏竹軒)이라고 불려졌다. 신명화가 율곡의 외할아버지이고 권화가 이모부이며 권처균이 이종사촌이다.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율곡의 부모가 혼인하던 해에 세상을 하직하였고 율곡은 외할머니 이씨(李氏)의 사랑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은 자매만 다섯이었는데, 그의 부모는 총명한 둘째 딸 사임당을 특히 사랑했으며 율곡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했던 어머니 사임당을 닮아 율곡도 외할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었는데, 이조좌랑 시절에는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사직하고 강릉으로 달려갈 정도였다.
율곡의 총명함 또한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율곡이 세살 때 외할머니 이씨가 석류 열매를 율곡에게 보여 주면서 "무엇과 같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율곡은 옛 시를 인용하여 "부서진 빨간 구슬을 껍질이 싸고 있다."라고 대답하여 주위를 감탄케 하였다. 겨우 말할 나이에 이미 글까지 깨우쳤던 것이다.
네살 때는 사략(史略)의 첫 권을 배우면서 스승이 문장 부호를 잘못 붙여놓은 것을 찾아낼 정도로 영특하였다. 일곱살 때는 이웃에 사는 진복창이라는 사람에 대해 평하는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지었는데, 여기에서 율곡은 진복창을 소인으로 보고 장차 큰 화를 일으킬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진복창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갖은 악행을 저지르니, 이는 율곡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한 셈으로서, 어릴 때부터 뛰어났던 그의 안목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여덟살 때는 파주의 임진강변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열살 때 지은 경포대부는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의 작품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열세살인 명종(明宗) 재위 3년(서기 1548년)에 소과인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어린 나이에도 과거만을 위하여 학문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그의 일생에 걸친 신조이기도 하였다.
◆ 젊은 날의 방황
열여섯살 되던 해 여름, 그가 가장 존경하던 어머니 사임당이 별세하자 율곡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관서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열두살 손위인 맏형 선과 함께 세상에 대한 견문도 넓힐 겸해서 길을 나선 사이에, 어머니 사임당은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사임당이 마지막 숨을 멈추던 그 시각에 율곡 일행은 서강 나루에 와 있었다 하니, 지척에 있으면서 사랑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그의 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파주 선산에 어머니를 묻고 3년 동안의 시묘(侍墓)를 마친 후에도 율곡은 인생의 허무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生)과 사(死)를 포함하여 인생의 모든 일이 부질없는 듯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뜬구름 같은 삶의 의미를 찾을 길이 없던 율곡은 어느 날 봉은사(奉恩寺)에서 불교 서적을 읽다가 돈오(頓悟)라는 구절에서 섬광 같은 깨우침을 얻게 된다. 참선을 통해 진리를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는 불교 사상이 그동안 고민해 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아홉살 되던 해 봄, 율곡은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의 진리를 구하는 길에 매달려 보기로 작정했다. 조선은 억불정책(抑佛政策) 때문에 선비라 해도 한번 불교에 귀의하면 관직으로 나갈 길이 영영 막혀 버리던 사회였다. 따라서 웬만한 결단이 아니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행동이었던 셈이다. 주위의 놀라움과 만류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명예와 이익에는 이미 관심이 없었던 율곡은 오로지 참된 진리를 찾아 끝내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금강산의 마하연에 있는 참선 도장을 찾아간 율곡은 일체의 세속적인 관심을 끊고 진리 탐구에만 정진하였다. 사실 율곡의 이 금강산행은 불교에 완전히 귀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떠나기 전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 "타고난 기를 잘 길러서 도리를 깨우치고, 다만 우매하고 망령스럽게 되지 않기 위함이다." 라고 쓴 것과, "공자께서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여 기를 기르기 위해 산수를 찾아가는 것일 뿐이다." 라고 적은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율곡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허무함으로 인한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을 털어 버리고, 웅장한 대자연의 기상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심정은 입산하면서 지은 '동문을 나서면서'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율곡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방법으로는 도무지 진리를 깨우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결국 1년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산한다. 불교에 회의를 가진 이유에 대해 율곡이 훗날 술회하기를, "돈오법에 이끌려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라는 불교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그 하나는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가?'라는 문제에 집착하여 생각을 거듭해 보았으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따라서 그것을 수행의 방법으로 하는 불교도 허망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불교에서 '생각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라.' 하고 가르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여, 침식을 잊고 깊이 사색해 보았지만 곧 별다른 기묘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마음이 함부로 달려나가는 것을 막아 주고,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여 극도로 허명(虛名)한 경지를 만들고자 하려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털어 놓았다.
또한 "불교에서는 일부러 뜻 모를 화두(話頭)를 던져서, 사람들이 그것과 자신을 연관짓게 함으로써 마음을 연마하게 한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노력을 게을리하여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종의 속임수라는 생각에 미치자 불교를 버렸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불교를 신앙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한 생각이겠지만 율곡이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겨우 1년만에 하산한 것은 애초부터 그의 사고 체계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기본 정신과 불교 사상이 맞지 않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율곡은 불교에 대한 회의가 들자 다시금 유교 서적을 들춰 보기 시작하였고 훗날 "그 깊이의 참됨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이것 또한 이때에 비로소 깨달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내면 상태가 유학자일 수밖에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율곡으로서는 젊은 날 방황했던 시기에 불교의 길로 잠깐 외도했던 것일 뿐이다. 여기에서 율곡의 성품에 대한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데, 그가 비록 나중에 성현(聖賢)의 경지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젊은 시절에는 지나친 자기 확신으로 인한 경박함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 새로운 출발
율곡이 하산하자 우선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가 산사에 있을 때 머리를 깎고 중 행색을 하였느냐 하는 점이었다. 당시에 삭발은 곧 선비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율곡은 수행하는 동안 머리를 전혀 깎지 않고 지냈음이 하산 즉시 만난 많은 사람들에 의해 확인되었지만, 한때 불교에 탐닉했던 그의 태도는 오랫동안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구실로 이용되었다.
금강산에서 내려온 율곡은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실천해 나갈 구체적인 방안으로 '자경문(自儆文)'을 지었다. 일종의 좌우명이었던 자경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뜻을 크게 가지자.
둘째, 마음을 안정시키자.
셋째, 혼자 있는 것을 삼가자.
넷째, 언제나 할 일을 먼저 생각하자.
다섯째, 일에 닥쳐서는 성의를 다하자.
여섯째, 옳지 않은 일은 절대 하지 말자.
일곱째, 자세를 항상 바르게 하자.
여덟째, 방심하거나 서두르지 말자.
율곡은 인생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입지(立志)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사상이 가진 두드러진 특색으로서 40세에 지은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제일 첫머리에 입지에 대한 장이 있고 42세 때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첫머리에도 입지에 관한 장을 두었다. 그리고 47세에 지은 학교모범(學校模範)에서도 16조의 규범 중 첫조에서 입지를 강조했다.
율곡은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 "만약 뜻이 서지 않으면 모든 일이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고 말하였다. 또 뜻을 세우는 방편에 대해서는 "참되면 뜻이 저절로 서는 법이고, 그 뜻을 항상 공경하는 태도를 지녀야 뜻이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하산 후 강릉 외가에서 새로이 학문에 정진한 지 1년이 되던 1556년, 스물한살의 나이로 한성시에 장원급제한 율곡은 그 이듬해 9월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큰딸과 결혼했다. 노씨 부인은 건강이 좋지 못해 율곡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낳았지만, 그 딸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 그러고 나서 노씨는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러나 노씨 부인은 살림이 어려운 가운데도 소리 없이 대가족을 이끌어 나갔다. 노씨 부인은 율곡보다 8년을 더 살았지만 천수(天壽)를 다하지는 못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주위의 권유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파주 선산에서 평생을 존경하던 남편 율곡의 신주(神主)를 끌어안고 버티다가 결국 왜군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결혼한 이듬해, 율곡은 그동안 머물고 있던 성주 처가에서 강릉 외가를 향해 떠났다. 가는 도중에 예안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59세의 노대가와 23세의 홍안 청년이 2박 3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두 천재는 서로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 후 두사람은 여러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훗날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율곡은 멀리서나마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며 슬퍼했다고 한다.
율곡은 그해 겨울에 한성 별시(別試) 문과에 참가하여 천도책(天道策)이라는 글을 써서 장원급제하였다. 이 글은 음양이라는 기(氣)의 작용으로 천지 조화를 설명한 것으로 율곡의 자연 철학에 대한 근본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정사룡과 양응정은 율곡의 답안을 채점하면서, 자기들은 시험 문제를 만드는 데도 여러 날을 고심했건만 이 젊은이는 짧은 기간 내에 이토록 놀라운 내용의 글을 지었다면서, 실로 천재가 나타났다고 감탄했다 한다. 이 천도책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서 율곡이 47세 때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게 되었을 때, 명나라 사신인 황홍헌(黃弘軒)과 왕경민(王敬敏) 등은 율곡에게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예를 표하였다.
스물다섯살 때에는 지야서회를 지어 또 한번 지난날을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면서 학문에 계속 정진하였다. 스물여섯 되던 해 5월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파주 선산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하며 보냈고, 상복을 벗은 이듬해 명종 재위 19년 7월과 8월에는 소과와 대과에 연속으로 장원급제하였다. 율곡이 전부 아홉차례의 과거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하여, 당시 장안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부르며 칭송이 대단했다. 그러나 비교적 늦은 나이로 과거에 최종 합격한 셈인데 이것은 금강산 구도행각을 전후하여 방황했던 시간이 있었던데다가, 부모의 죽음으로 6년여의 공백 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 초기의 관직 생활
스물아홉살에 승문원(承文院) 권지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율곡은 호조(戶曹)와 예조(禮曹)의 좌랑을 거쳐 서른살에는 사간원(司諫院)의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5월에는 윤원형(尹元衡)과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간원진시사소를 임금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서른한살에 관리 임용을 주관하는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선조(宣祖) 원년(서기 1568년)에 서른세살로 사헌부(司憲府) 지평이 되었다. 그 전해에는 후사없이 죽은 명종의 뒤를 이어 국왕의 생전에 총애를 받던 하성군(河城君)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선조이다.
그해 4월에는 장인 노경린이 맏사위인 율곡에게 뒤처리를 부탁하고 죽자, 처가의 재산을 적서와 남녀의 구별 없이 동등하게 분배하여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진취적 사고의 일면을 보여 주기도 했다. 또 명나라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서 중국에 다녀왔고, 귀국 후에는 홍문관(弘文館) 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6월에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었다.
율곡은 이 시기에 정치가 나아갈 방향을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국왕에게 올렸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개혁 의지가 부족한 조정의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율곡은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사직을 하고 강릉으로 내려간다. 서른다섯에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으나, 그 해 10월에 건강이 나바져서 다시 사직하고 처가인 해주에서 한동안 요양하다가 이듬해 1월에 파주 율곡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 시기에 율곡은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관직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껴서 그 심정을 편지에 적어 퇴계와 친구들에게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해주에서 칩거하던 해 12월에는 퇴계의 부음을 접했다. 율곡은 거처하던 내실에 신위를 차려 놓고 제문을 지어 바치는 등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평소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 여간해서는 남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던 율곡이었지만, 퇴계에게만은 유일하게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른여섯살 때인 선조 재위 4년(서기 1571년) 6월에는 청주 목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어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건강이 다시 나빠져 청주 목사 자리도 10여개월만에 사직하고 율곡리로 돌아와 요양해야 했다. 이후에도 계속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다가 서른여덟살 되던 해 7월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이때에도 세차례에 걸쳐 사양하였으나 선조가 끝내 허락하지 않아 할 수 없이 관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관직에 복귀하고 2개월 후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되어 왕명이 출납을 맡게 되었으며, 그 이듬해 정월에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임금으로서 취할 태도를 밝힌 만언봉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이나 선조는 개혁에 대한 논의만 분분한 채, 구체적인 조치는 하나도 실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율곡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아 업무가 번잡한 승정원 근무가 힘들어지자, 한직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선조(宣祖)는 율곡을 한직에 놔두지 않고 대사간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그러나 율곡은 임명된 다음 달에 병으로 사임하고 다시 파주 율곡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사직하고도 몇차례 관직이 내려졌지만 율곡이 모두 사양하자, 선조는 율곡의 처가가 있는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외직으로라도 관직에 그를 붙잡아 두려고 하였다. 결국 사직한 지 6개월 만인 그 해 10월, 율곡은 관찰사의 지위로 관직에 다시 나갔으나 병약한 몸으로는 지방관의 격무를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채 6개월도 못 되어서 다음 해 3월에 또 다시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파주로 돌아와 쉬고 있던 율곡에게 선조가 다시 부제학을 제수(除綬)하여 중앙 정계로 들어가서 근무하던 중, 그 해 9월에는 2년전부터 집필해 왔던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탈고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이 책은 군왕의 도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자세히 서술한 것으로서 나중에 왕에게 가르침을 주는 경연의 교본으로 쓰인다. 또한 성리학에 비판적이던 실학자들에 의해서도 높이 평가된 책으로서 율곡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에는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대립으로 동인(東人), 서인(西人) 붕당의 조짐이 완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율곡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갈등을 해소시키려고 노력했으나 평소 서인이었던 심의겸과 친분이 깊었고 심의겸을 지지하는 정철(鄭澈)과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형제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동인 계열에서는 그를 서인으로 지목하고 경계하기도 하였다. 율곡은 양쪽을 화해시켜 조정이 갈라지는 것을 막고 나라의 장래를 안정시키려는 일념뿐이었는데, 서인 쪽에서도 이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동인 편은 아니지만, 자기들 편 역시 확실하게 들어 주지 않는 율곡을 야속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동인, 서인 붕당의 대립에 대한 율곡의 자세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세상일에 양쪽 다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정확하게 가리지 않고 무조건 원만하게만 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율곡은 백이숙제(伯夷叔齊)를 예로 들면서 "양쪽이 모두 선비들이니 화해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지 어느 한쪽만 맞다 하면 그 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정쟁이 심화되는 와중에 율곡은 건강이 다시 나빠진데다 선조마저 율곡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자 마침내 은퇴를 결심한다. 당시 스물다섯살이었던 청년 임금 선조는 자기 자신을 높이고 크게 여기는 자존자대(自尊自大) 의식이 강하여 직언하는 신하들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총명하기는 했지만 민생을 위하기보다는 제왕의 위신을 높이려고만 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와 같은 국왕의 자세는 유달리 뜻이 높고 자기 주장이 강한 율곡과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율곡은 마침내 그해 10월에 사직을 하고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해주 석담에 청계당을 비롯하여 새 터전을 짓기 시작했다.
◆ 일가동거와 교육을 위한 해주 생활
사직한 이듬해 정월에 일가가 모여 살림할 수 있는 집이 완성되자, 율곡은 어려서부터 꿈꾸어 왔던 일가동거의 계획을 실현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7년전에 죽은 맏형 선의 유가족을 데리고 와서 형수 곽씨로 하여금 집안 살림을 주관하게 하고는 직계 형제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그러나 점점 가까운 친척 중에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나 극도로 가난하여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나중에는 100여명에 이르는 대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율곡은 동거계사라는 가족 사이에 지켜야 할 준칙을 만들어 많은 가족들을 무리 없이 잘 이끌었다.
율곡에게는 서인 출신인 계모가 있었는데, 변덕스럽고 성질이 사나워서 율곡 형제들을 많이 괴롭혔다. 홀로 된 후부터는 심사가 괴로워져서인지 새벽에 꼭 해장술을 즐겼는데, 율곡은 아침 문안을 드린 후에 손수 술 주전자를 데워 잔에 술을 부어 드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남 대하듯 하지 않고 부모에 대한 도리로 정성껏 모시자 계모도 마음을 바꾸어 온순해졌으며, 훗날 율곡이 자신보다 먼저 죽자 정성껏 보살펴 준 고마움에 보답할 길이 없다면서 소복을 입고 3년을 지냈다고 한다.
율곡은 자신보다 한살 아래인 맏형수 곽씨를 항상 웃어른으로 공경하였고, 둘째형 번에게도 예의를 다해 섬겼다. 번은 체면을 모르는 사람으로 동생의 지위가 높아진 후에도 주위에 사람이 있건 말건 율곡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곤 하였다. 이에 율곡은 조금도 언짢은 기색 없이 형의 시중을 들었는데, 이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이 민망하여 말렸다. 그러나 율곡은 "부형 앞에서 지위가 무슨 상관이며 그 분부를 어찌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할 수 있겠는가? 무릇 부형 앞에서는 지나친 공손이란 없는 것이며, 형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예를 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나중에 둘째형 번은 율곡의 작품이 세상에 전해지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는데, 동생이 큰 인물이 될 사람인 줄을 미리 알았는지, 율곡이 밖에서 돌아오면 오늘은 어떤 글을 지었는가를 꼭 물어서 그것을 손수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율곡부터 이렇게 솔선수범하니 집안은 법도가 서고 항상 화평했다. 하지만 대가족이 모여 살다 보니 먹고사는 문제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입이라고 해야 서른할살 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파주 당에서 나는 곡식이 전부였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대가족의 생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율곡은 호구지책으로 대장간을 차리고 농기구를 만들어 팔아서 생계비를 충당했다. 이런 모습에 대해 훗날 이항복(李恒福)은 자신의 문집에서 "성인은 참으로 매사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하며 감탄하기도 했다.
한번은 재령 군수로 있던 친구 최립(崔粒)이 율곡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고서 양식을 보내 왔지만, 율곡은 받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주위에서 그 이유를 묻자, "옛 친구의 사사로운 물건이라면 안 받을 리 없겠지만, 관가의 곡식을 헐어 보낸 것 같아 받을 수가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율곡은 어려운 처지에도 항상 엄중하게 처신했고,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굶을망정 같이 살던 식구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가 일가에 대해 베푸는 마음은 지극하기 이를 데 없어, 먼 친척에 대해서도 늘 관심을 가지고 돌보려고 했다. 또한 이웃이나 하인들에게도 항상 예로서 대했으며, 경조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여 우애를 도모했다.
율곡의 일가동거에 대한 꿈은 일곱살 때 이륜행실(二倫行實)을 읽은 후부터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 책에서 당나라의 장공예는 아홉세대가 함께 살았는데, 황제가 그 비결을 묻자 '참을 인(忍)'자 백개를 써서 바쳤다는 내용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때부터 계획한 것이었다.
율곡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향약과 창고를 세워 주민들의 교화에도 적극 노력하였다. 43세 되던 해에는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워 많은 인재를 육성했다. 율곡은 암기보다는 스스로 사색하고 깨우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으며, 학문은 일상에 있다는 그의 지론대로 어느 자리에서나 항상 가르침을 베풀고자 하였다. 소학(小學)을 무엇보다 먼저 배워야 할 교과목으로 권장하였으며, 좀더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 소학집주(小學集註)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율곡은 45세 되던 해 12월에 대사간으로 다시 출사하기까지 5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일가동거의 꿈을 실천하면서 교육과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몇차례 출사하라는 조정의 요청이 있었지만 율곡은 이를 모두 사양했다. 그 대신 상소를 올려 동인, 서인 붕당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모두 개혁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당파를 없애고 조정을 화해시키려던 율곡의 상소는 도리어 권력자들에게 비난을 샀고, 국왕도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45세 되던 해 5월에는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지었는데, 이것은 윤두수(尹斗壽)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사람들이 조선으로 온 기자(箕子)의 사적(史積)에 대해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서 율곡은 "이 당에 기자가 들어와 오랑캐를 면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모화주의(慕華主義)적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율곡이 절대적으로 신봉했던 주자의 출생지가 중국이기 때문에, 그의 이런 태도는 사대주의라기보다 학문의 연원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은병정사는 율곡이 다시 관직에 나갔을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제자들에 의해 자체적으로 운영되었다. 율곡도 비록 정사를 돌보느라 바빴으나 편지로나마 제자들을 계속해서 지도하였다.
◆ 마지막 관직 봉사
율곡은 선조(宣祖) 재위 13년(서기 1580년) 12월에 45세의 나이로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6월에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예문관 제학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잠시 호조판서로 있다가 11월에는 대제학으로 전임되었으며, 다음 해 정월에는 이조판서를 겸임하며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율곡이 길을 열어 준 인물 중에는 훗날 영의정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이항복(李恒福)이 있다. 또한 이조판서로 재직하는 동안 왕명에 의하여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을 짓기도 하였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그 후 의정부(議政府) 우참찬을 거쳐 우찬성으로 승진했다. 이 당시에 율곡은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고 치도(治道)에 도움이 되고자 전시폐소(展示弊疏)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여기서 그는 풍속이 타락하고, 관리가 개인의 이익에만 신경을 쓰며, 조정이 분열하여 기강이 해이해지고 백성들은 폐단에 시달려 점점 곤궁해지고 있다며 현실에서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강조하고, 세가지 폐단을 고칠 것을 건의했다. 즉, 공물 제도를 개정하고 아전의 수를 줄이며, 지방관을 자주 바꾸지 말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10월에는 명나라 사신을 맞는 사절로서 활동했는데, 율곡에게 감명받은 명나라 사신들이 황제에게 요청하여 조선 사신들에 대한 대접을 더욱 융숭하게 하도록 조치해 줄 정도였다고 한다. 사절로서 소임을 마친 율곡은 그해 12월에 병조판서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국방대책을 위한 '육조계'를 올리고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여 외침에 대비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붕당에 휩싸인 당시 조정에서는 이러한 그의 선견지명을 이해하고 이에 찬동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신들도 태평한 때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공연히 민심을 불안하게 하여 화를 부르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율곡의 예언대로 그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아 선조 재위 25년(서기 1592년)에 왜군이 침입하여 전 국토가 유린되는 병화(兵禍)를 당했으니 그의 선견이 실행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국방 개혁을 단행하였다. 우선 서얼 출신들과 노비들 중에서 원하는 자에게 서얼은 관직을 허용하고 노비는 속량하는 방안으로 북방 병력 증강을 도모했다. 그리고 당시 상번(上番)을 면하는 조건으로 바치던 속포(贖布)를 병조의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나누어 갖는 폐단이 많았는데, 그 속포를 북방 병력을 위한 군수품으로 전용하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또 병사들의 양곡이 부족하자 서얼들에게 곡식을 바치고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 신분 제도의 폐습을 개선하고 군량도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수(射手) 1만여명을 뽑으면서 3등 이하의 사수에게는 말을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어 부족한 말들을 충당하였다. 그밖에도 관리들의 녹봉에서 각출하여 북방에 파견된 군사들의 가족을 도와주어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율곡의 정치 철학은 먼저 조정에서 처신을 올바르게 하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폐단이 되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고쳐야 한다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율곡의 원칙적 태도는 주위에 적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동인, 서인 붕당의 대립이 여전한 상황에서 그가 서 있을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율곡을 시기하고 미워하던 무리들은 호시탐탐 그를 조정에서 몰아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격무과 지병으로 시달리던 율곡이 국왕의 부름에 즉시 응하지 못하자 삼사(三司)에서 탄핵이 일어났다. 이 기회에 율곡의 반대파들은 그를 완전히 실각시키려고 집요하게 공격하였고, 결국 율곡은 그해 6월에 사임을 하고 파주로 내려갔다가 8월에 해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을 신임하여 그를 비난하던 무리들을 징벌하고, 9월에 판돈령 부사로 다시 부른 후 10월에는 이조판서로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율곡의 병이 깊어져 49세가 되던 이듬해 정월부터는 병석에 눕는 지경에 이른다. 율곡은 병석에서도 항상 나랏일에 대해 걱정하였다. 죽기 하루 전에도 서익(徐益)이 북방을 순찰하는 임무를 받아 떠난다고 하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육조방략(六祖方略)을 지어 준 후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후 깨어나서는 손발톱을 지르고 목욕을 하는 등 단정한 모습을 갖춘 후 한성 대사동에서 숨을 거두었다. 49세의 한창 나이에 운명하여 무슨 한이 그토록 깊었던지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율곡이 죽기 하루 전날 부인 노씨가 흑룡이 침실에서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는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에도 가장 가까운 사람의 꿈에 용이 나타나는 기이한 인연을 가졌던 셈이다.
율곡은 사후에 남긴 유산이 없어 염습에 쓸 수의도 친구들이 얼마씩 나누어 내서 준비했다. 그리고 한성에서 지내는 동안 집을 세 내어 지냈기 대문에 유가족들이 거처할 곳이 없자, 친구와 제자들이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장지는 선영이 있는 파주 자운산으로 정해졌으며, 발인하던 날에는 일반 백성들까디 슬피 애도하며 율곡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기 위해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소현서원(紹賢書院)과 묘소 근처 자운서원(紫雲書院)에서 율곡의 제사를 모셨다.
◆ 이율곡의 사상과 성품
모든 현상은 '기(氣)'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고, 그 근거가 바로 '이(理)'라는 것이 율곡 사상의 근본이다.
율곡에 다르면 '이'는 공기와 물 같은 것이고, '기'는 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공기와 물이 그것을 담는 그릇의 형태에 따라 모양이 정해지는 것처럼, '이'도 변화하지 않는 '본연의 것'이지만 성질이 일정한 범위 한에 국한되는 '기'의 존재 때문에 서로 다른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형이상의 불변하는 것이고, '기'는 형이하의 변화하는 존재로서 '이'는 '기'를 주재하며, '기'를 통해 '이'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율곡은 '기'가 '이'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을 '주리(主理)'라 하고, '기'가 '이'의 명령을 듣지 않고 능동적으로 발현되는 상태를 '주기(主氣)'라고 하였는데, 이 중 전자를 '지선(至善)'으로 보았다. 만물의 본연인 '이'가 중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기'에 의하여 국한되고 차별되므로 '기'의 갈고 닦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그는 개별적 규범인 '소당연(所當然)'만 알고 만물의 근본 원리인 '소이연(所以然)'을 깨닫지 못하면 참된 도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다. 소당연이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을 말하고, 소이연이란 '그렇게 되는 까닭'을 말한다. 이것을 통해 율곡은 당시의 교조적인 견해에 반대하고, 학문의 참된 이치를 탐구하는 자주적인 학풍을 세웠다. 따라서 그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나 퇴계처럼 재야에 머물러 학문 연구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정학일체(政學一體)의 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현실 정치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실천하는 것이 배운 자의 임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율곡의 성품은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효심과 우애가 깊고 인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성격도 담백하여 말과 행동이 일치하였고, 심성이 맑고 깨긋하여 타인과 밀담을 하거나 소곤거리는 법이 없었다. 광풍제월(光風霽月) 같고 청통쇄락(淸通灑落)하다는 말은 율곡의 인물됨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다만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자기 주장이 강했고, 분석적 사고를 하는 경향 때문에 모든 사람의 특징을 샅샅이 들어 평하기를 좋아했다. 도 대담하고 침착한 일면도 있었는데, 이와 관련된 일화 하나를 들자면, 그가 젊었을 때 친구인 성혼(成渾)과 화석정(花石亭) 아래에 있는 강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배가 크게 요동쳐 성혼이 두려워했다. 그러자 율곡은 "우리 같은 사람이 탔는데 무슨 염려가 있겠는가?" 하고 말하며 태연하게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은 스스로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철저히 피해갔으나, 편협하지 않고 유연한 성품을 지녔다. 이것을 알 수 있는 두가지 일화가 있다. 그 하나는 율곡의 정갈한 이성관(異性觀)을 증명해 주는 내용이다.
황해도 관찰사 시절에 몸종으로 데리고 있던 유지라는 아이가 평소 율곡을 흠모했었다. 율곡이 떠난 후에 성장하여 기생이 되었는데, 명나라 사신을 대하는 사절로서 잠시 해주에 들른 율곡을 찾아와 연모의 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율곡은 한 방에서 병풍으로 경계를 짓고 촛불을 밝혀둔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율곡은 유지의 애끓는 마음에 혹여 상처라도 될까 봐 다음과 같은 위로의 글을 전해 주었다.
'문을 닫자 하니 인정을 상할 것이요, 같이 자자 하니 의리를 해칠 것이다.'
이렇게 처신이 깨끗하고 깍듯했던 율곡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에 대해 지나치게 잣대를 들이댔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에 친구인 정철이 아들을 낳았는데, 축하 잔치를 벌이는 자리에 기생까지 동원하자 고지식한 성혼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며 나무랐다. 그러나 율곡은 웃으면서, "검은 먹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 것이 도(道)인 것이다." 하고 설득하여 잔치의 흥을 깨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율곡은 곧으면서도 유하고, 강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평생 솔선수범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 실천 철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