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어귀에서 움츠리고 있는 늙은 개 한 마리가 눈에 밟힌다. 흔히 볼 수 있는 백구일 뿐인데, 그 개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개를 떠올리니 공허함마저 느껴진다. 심경의 변화가 생긴 이유를 찾고 싶어 카메라를 들었다.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개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주간경향 1421호 반기웅기자)
김보람 감독(1984년생)은 잡지사에서 일하다 2012년 가을, 미디액트 독립다큐멘터리 제작과정 수업을 들으며 다큐멘터리에 입문했다. 2014년부터 다큐체 푸른영상에서 활동하고 있다. <결혼전.투>(2013), <독립의 조건>(2014)을 연출했다. <개의 역사>(2017)은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퍼플레이 제공)
영화는 후암동의 한 건물 옥상에 살고 있는 개의 과거를 추적하며 시작한다. 감독은 어쩌다 개가 옥상에서 혼자 살게 됐는지 궁금하다. 개는 그곳에 버려진 듯 보였지만, 아니다. 감독은 동네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백구에게 밥을 챙겨주는 아저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집요한 추적을 통해 아저씨와 조우한다. 아저씨는 그저 유기견 백구를 보살펴준 것 뿐이었고, 그에게서 백구의 구체적인 역사를 듣지는 못한다.(서울독립영화제2017 "개가 된다는 것" 김준민)
감독의 궁금증은 궁금증으로 끝나지 않는다. 카메라를 들고 동네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다닌다. 뭘 하느냐? 왜 생산적인 걸 안 찍고 버린 개 같은 걸 찍느냐? 동네 주민들의 의심의 눈초리와 비난의 말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초등 남자아이들로부터 인라인스케이트를 쌩하니 타고 온 초등 여학생, 길고양이에게 관심많은 여학생, 다른 동네에 살지만, 어머니를 만나러 온 아저씨, 백구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가게집 주인아저씨에게까지 백구를 언제부터 봤냐? 백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등을 묻는다. 그나마 백구에 대한 유익한 정보를 주는 이는 한 아주머니 뿐이다. 백구의 주인이 누군지도 알고 백구에게 음식을 갖다주는데도 덥썩 먹지 않는다며 똑똑하다고 백구를 칭찬하는 아주머니다. 하지만 동네 주민들에 대한 감독의 인터뷰는 개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을 것 같던 사람들에게서 개와 사람이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인상적인 인터뷰는 말을 어눌하게 하는 아저씨다. 어머니를 만나러 온 다른 동네에 사는 아저씨. 계단에서 인터뷰가 진행된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도 아니니 더더욱 유용한 정보가 나올 가능성이 없다. 지지부진한 이야기로 시간을 빼앗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다. 그런데 감독은 그를 기다려준다. 아니 그에게 말할 기회를 준다. 시골과 도시는 다르다는 말, 시골은 다른 이웃들에게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반면, 도시는 자기만 신경쓰면 되는 곳이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신경을 써서 머리가 아팠던 것 같다고, 이제 도시에서 나만 신경쓰면 되니까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 이 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쓰다 아프셨구나. 자신이 왜 아팠는지를 알고 그걸 처음 보는 타인에게 전달하는 그는 어눌한 아저씨가 아니라 누구보다 현명한 이로 보인다. 감독이 다정한 시선으로 그의 이야기를 기다려준 덕분에 아저씨의 소중하고 아픈 이야기가 나에게 전달되었다.
감독의 섬세함과 따듯함 덕분에 관객이 만나게 된 또다른 인물이 있다.
예전에는 피부미용으로 강의도 하고 심사위원도 했던 76세의 독거 할머니다, 황인용이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에도 나갔고 에스테딕 기사도 여러 곳에 기고하기도 했던, 왕년에 이름깨나 날린 할머니다. 뒷모습도 뒤뚱뒤뚱 눈여겨볼 만한 인물은 아니었을 텐데, 이상하게 감독은 할머니를 따라가서 인터뷰를 따낸다. 자신이 사는 원룸에 감독을 초대해서는 왕년에 아름답고 잘 나갔던 시절을 담은 앨범을 꺼낸다. 수줍게 앨범 속의 사진 하나 하나를 설명해주다 이내 "과거에 잘 나갔으면 뭐해? 지금 나는 초라하게 사는 독거노인인걸" 하며 부끄러워한다. 그러다 버스를 타고 가서 듣는 문학강좌에도 감독을 데려 간다. 감독을 만나고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아님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과거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되돌리고파 성형수술을 받고 싶어한다. 신청해서 출연확정이 되면 무료성형을 해준다는 TV조선의 <아름다운 당신>에 도전한다. 결국 꿈을 꾼거지 하며 좌절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전과 많이 달라져있다.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때, 과거의 영광만 보여주며 현재를 후회하는 인물이 더는 아니다. 꿈꾼 것으로 끝나야겠지 라며 지금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새롭게 자신을 가꿔갈 수 있는 에너지를 카메라 앞에 선 힘있는 눈빛에서 느낄 수 있다.
영화는 개를 주목하다 개의 역사를 아는 동네 주민들에게 마이크를 내줬다가 다시 노인정이 없어 옹기종기 모인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캐나다에 사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다 친구와 함께 오랜만에 고등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을 만나고, 고교시절 미술 선생님을 회상하는가 하면, 감독 자신의 가정사를 풀어내고 후암동 재개발 현장과 2016년 말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 현장의 열기에서 새해 맞이 불꽃놀이를 보는 사람들의 희망으로 연결한다. 엔딩 장면은 몇 번 되돌려봤다. 장면과 대사가 주는 무게를 같이 느끼고 싶어서. "삶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싶었다"는 감독의 고백과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는 성찰적 내레이션을 들으며 백구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이상하게 이해된다. 마을어귀에 움츠리고 있는 늙은 개 한 마리에서 자신의 쓸쓸한 모습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외로움을 느꼈을 지도, 모든 인생의 고독함을 보았을 수도 있겠다.
<개의 역사>를 보며 동물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 나를 대하는 태도 모두 섬세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타자와 나를 동일선상에 놓고 존중하는 미덕을 가진 김보람 감독 덕분에 내 안의 편견과 선입견이 더 많이 보이고 눈치채진 작품이었다. 좋은 영화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영화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개의 이야기,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 감독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치부가 드러나고 내 역사가 살아나니 말이다.
<개의 역사>는 잔잔한 여운과 공명을 주는 좋은 영화다. 처음에는 이름이 똑같아 <피의 연대기>를 연출한 김보람 감독인 줄 알았다. 오랜만에 따듯한 시선을 가진 감독을 알게 돼 기쁘다. 감독의 시선은 조용히 그러나 섬세하게 타인의 삶과 생명에 다가간다. 무엇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다정함을 끝까지 견지한다. 이런 태도가 작품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마지막 내레이션이 <개의 역사>를 연출한 동기와 주제로 보여진다. 쫓겨나고 밀려나는 것들, 신경쓰지 못했을 때 사라져버린 것들, 다시는 찾지 못할 그리운 것들을 사랑하는 김보람 감독의 다음 이야기가 벌써부터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