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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이야기(실학박물관)
<실학과 연행>
북한의 신의주와 중국의 단둥을 연결하는 철교이다. 왼편의 것은 한국전쟁 때 미 공군의 폭격을 받아 끊어진 것이고, 오른 편의 것은 그 후에 새로놓은 것이다. 새로놓은 철교에는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과거보존 차원에서 남겨진 왼편의 다리 위에는 한국 전쟁당시 중공군의 활약상과 미군의 모습을 담은 장면들이 판넬로 제작 전시되어 일종의 ‘간이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변문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조선사신 일행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중국의 관문이다 명나라시절, 구련성(九蓮城)이라고도 불렸던 이곳에서 조선사신들은 인원과 소지했던 물자들을 점검하고 본격적인 중국 내지로의 사행을 준비했다. 구련성은 명 중기에 쌓았던 것이지만 청나라 이후로는 방치되어 퇴락해 버렸다. 지금은 단둥 외곽의 변두리가 된 이곳에서 조선족들이 경영하는 작은 가게들과 한글 간판들을 볼 수 있다.
변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만주 벌판을 통과할 때 제일 먼저 마주치게 되는 산이다. 넓게 펼쳐진 수수밭 평원과 대조적으로 837미터의 우뚝솟은 봉우리들이 이 사람들을 압도한다. 만주에서는 보기드문 산악인지라 등산객 차림의 사람들도 제법눈에 들어온다. 산입구의 석문에는 진의천인, 적상청운 등의 글짜가 새겨져있고 산속에는 불교와 도교의 사찰들이 들어서있다.
요양은 명나라 시절 만주의 중심이자 산해관 바깥의 ‘오랑캐 ’들을 아우르는 거점이었다 . 영락제가 이곳에 요동동사를 설치한것도 이곳이 만주를 장악하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요양벌판에 우뚝선 백탑은 거란족 국가인 요나라 시절에 세운전탑이다 . 13층, 71미터까지 장대하게 쌓아올린 흰 벽돌들로부터 반사되는 빛은 북경을 향해 일망부제의 평원을 지나는 조선사신들에게 참으로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탑은 이름만 남았을뿐 공업도시 요양의 매연에 찌들어 오히려 ‘ 흑탑 ’ 처럼 보일 뿐이다.
고궁은 1626년에 건설된 후금의 황궁이다. 건주여진의 일개 부족 집단에서 출발하여 만주 전체를 아우르고, 장차명과 맞서겠다는 누르하치 집단의 의지가 담긴 정치적 중심지이다.
대정전 앞에는 만주 팔기의 각 기의 집소가 배치되어 있다 . 1637년 병자호란에서 항복했던 이후 인질로 끌려왔던 조선의 소현세자일행과 청애 다한 복속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던 삼학사의 넋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청 태종 황태극이 묻힌 소릉의 봉분 모습이다. 앞 부분에는 능의 모습을 더 장대하게 보이기 위해 석패방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겹겹으로 배치 되어 있다. 중앙에 심은 나무는 땅과 하늘의 기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전한다.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에 침입하고, 인조에게서 항복을 받아냈으며, 수많은 조선인 인 포로를 끌고 갔던 태종이 봉분을 돌아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북녕은 명나라 시절 북진이자 광녕이라고 불렀던 만주 지역의 국방상 요충지이다.
이곳에 명은 요동총병관 등을 두어 여진족등을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근처에 있는 의무려산 자락에 세워진 북진묘는 중국 황제가 동북 지역을 다스리는 지신 등을 제시하는 일종의 묘사이다.
북진묘는 내부에는 명에서 청에 이르는 시기에 세워진 많은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북녕 시가지에는 16세기 후반 이 지역에 머물면서 만주 지역의 ‘군벌’ 로 우뚝섰던 조선 출신 이성량의 패방이 남아 있다.
북녕시 동북 변두리에 남아 있는 쌍탑이다. 요나라 시절 만들어졌거니와 동탑의 높이는 43.8미터, 서탑의 높이는 42.6미터이고 두 탑사이의 거리는 43미터이다. 벽돌로 쌓은 8각 13층의 두 잡의 갇은 2층으로 되어 있고 내부에는 좌불이 모셔져 있고 그 주병에는 협시 보살들이 새겨져 있다.
의무려산 자락에서 아련하게 보이는 쌍탑의 모 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북녕시 근처에 있는 명산이다.
산해관 바깥에서 동북지역을 아우르는 진산으로 언뜻보면 바위가 많은 모습이 관악산과 대단히 닮았다. 북경을 향해 평원과 평원을 지루하게 걸으며 지쳐있던 조선사신 일해에게는 고국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홍대용의 명저 의산문답은 바로 이 곳을 무대로 서술되었다. 산속에는 옥천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과 도관들이 세워져있고, 바위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남긴 시구들이 새겨져 있다.
홍성은 명나라시절 산해관 바깥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 가운데 한였다 , 1626년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는 기마대를 이끌고 이곳을 공격하다가 명나라 장수 원숭환의 홍이포 세례를 받고, 부상을 입고 결국 절명했다. 지금도 당시 성의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성안에 남아 있는 조대수 패방의 주위에는 관광객을 비롯한 인파가 끊이지 않아 ‘ 역사 도시 ’ 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산해관은 북경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관문이다 . 감숙성에서 시작된 만리장성잉 동쪽 끝에서 발해와 만나는 곳이다. ‘천하제일관 ’이라는 오만한 문구가 상징하듯이 이 문을 들어서야 비로소 ‘중화의 세계 ’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었다. 글자 하나가 1.6미터나 되는 장대한 이 관문을 지키던 오삼계는 1644년 청나라 군대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청군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북경을 접수할 수 있었다.
북경 쪽에서 이어져온 연산산맥의 동쪽 끝트머리인 각산산성의 길이는 1587미터에 이른다. 명나라 초기에 건설되기 시작한이 각산관은 해발 444미터의 험준한 절벽 위에 설치되었다. 산성의 여기저기에는 척계광이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적대의 형식을 계승한 많은 방어 시술믈들이 산재해 있다.
진시황시절 만리장성 축성공사에 동원되었던 남편을 찾아나섰다가 죽은 정절녀 맹강녀를 모신 사당이다 . 축성 공사중에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맹강년는 호곡하면서 진시황을 질타했다. 진시황은 맹강녀의 미색과 대담성에 반해 그녀를 회유하여 유혹하려 했으나 맹강녀는 끝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고,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봉황산에 사당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존하는 북경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성당이다 .천주교가 중국에 전파되는 과정에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 테오리치의 역할이 컸다. 그는 단순한 선교사가 아니라 중국문화와 학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동시에 유럽의 학문과 과학기술을 중국에 전수하려고 시도했던 문화인이었다. 남당 역시 1601년(만력29)년에 건립한 것이다. 남당은 홍대용을 비롯하여 북경을 방문했던 조선 사신들도 들렸던 ‘명소’ 이자 이문화 섭취를 위한 전당이었다.
열하의 표지석과 보타종승묘의 원경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260여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열하의 현재 이름은 승덕이다.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덕분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열하에는 옹정, 건륭 연간에 걸쳐 청나라왕실의 이궁들이 건설되었다.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은 여름철 열하의 피서산장에 머물녀서 피서뿐 아니라 여전히 청에게 위협적 존재였던 몽골 세력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피서산장 부근의 구릉에는 포탈라궁을 본따 건설한 보타종승묘를 비롯하여 보락사, 수미복수묘 등의 라마사원이 건설되었다. 청은 내몽고의 초원지대인 아우르는 사원들을 건설함으로써 중화세계의 안과 밖을 모두 아우르는 지배자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실학과 무예>
실학의 등장배경
조선은 건국 이후 이렇다할 큰 전란을 겪지 않고 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연이어 겪으면서 농토는 황폐화되어 국가의 재정이 크게 줄어들었고 백성들은 생활에 큰 어려움 겪게 되었다. 전란을 겪으면서 왕의 귄위가 크게 떨어져 신료들의 권한이 더 강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라의 살림을 맡은 양반사대부들은 붕당을 결성하여 갖가지 명분을 걸고 쉼 없는 정쟁을 거듭하면서도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은 돌보지 않아 많은 원성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실학’이다.
실학 사상의 등장은 구시대의 사회 체제를 극복하고, 부국강병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지식인들 사이의 일련의 사상 체계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실학자들은 무릇 학문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서의 쓰임과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국기(國技)인‘무예24기(技)’는 탄생하게 된다.
무예24기의 성립
무예24기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라 불리는 정조 14(1790)년 4월 장용영(壯勇營)에서 펴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실린 24가지 기예를 말한다. 여기에 실린 24가지 기예는 조선의 쓰라린 전쟁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왕조는 전쟁의 승패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진법과 활, 대포만이 아니라 소홀히 다루었던 창검무예가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승리하기 위해 조선의 군대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군사들의 창검무예를 열심히 익혔다. 1598년, 선조의 명을 받은 훈련도감의 낭청[실무자] 한교가 중심이 되어 중국의 기예인 장창과 쌍수도 등 6기를 조선의 군사들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풀이한「무예제보」를 편찬하였다. 이어서 1604년에는 맨손권법을 풀이한「권보」를, 그리고 1610년 광해군이 집권한 시기에는「무예제보번역속집」을 편찬하여 군영에 보급하였다. 이후 1759년 북벌을 준비했던 할아버지 효종을 빼 닮았던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주도로 훈련도감의 장교 임수웅이 18가지 기예를 정리한「무예신보」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역사 배경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인 정조는 즉위하던 1776년에 아버지가 완성한 18가지 기예와 더불어 마상무예 4기를 군사들에게 적극적으로 훈련토록 지시하였다. 또한 이들 기예들을 1785년부터는 무사를 선발하는 시험과목으로 규정하였으며, 1790년에 기마군(騎馬軍)의 훈련강화를 위해 마상재와 격구를 추가하여 24가지의 기예를 그가 창설을 주도한 최정예의 군부대인 장용영에서 편찬하게 하고 책이름을「무예도보통지」라 지어주었다.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무예의 역사와 고증은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 이덕무 그리고 무예실기는 장용영 초관 백동수가 책임을 맡았다. 이처럼 동양 최고의 무예서로 꼽히는 「무예도보통지」는 국왕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문무(文武) 인재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책은 장용영을 비롯한 훈련도감, 어영청 등 중앙군영은 물론이고 지방의 군영까지 보급되어 군사들의 훈련교범으로 사용하였다.
실학과 무예24기
무예24기가 수록된 무예도보통지에는 실학(實學)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정신이 ‘금(今)’과 ‘용(用)’의 정신이다. 예를 들면 24가지의 기예를 중국[화식(華式)]과 일본[왜식(倭式)]의 기예와 더블어 조선의 방식을 그림으로 표현 것의 설명을 조식(朝式)이 아닌 ‘금식(今式)’이라 표현하였다. 이는 바로 동양삼국 최고의 무예를 적극 받아들여 오늘날 우리 군사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실학자 이덕무와 박제가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예도보통지」편집자인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가 정조 임금께 올린 글에 “그리하여 조정은 실용 있는 정책을 강론하고, 백성은 실용 있는 직업을 지키고, 학자들은 실용 있는 책을 펴내고, 무사들은 실용 있는 기예를 익히고, 상인들은 실용 있는 상품을 유통시키고, 장인들은 실용 있는 기구를 만든다면, 어찌 나라를 지키는 일을 염려하며 어찌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걱정이 있겠습니까?”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이는 조선의 군사들이 익히는 무예 또한 지극히 실사구시의 발상으로 접근하겠다는 실학정신의 표현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24기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바쳤던 조선의 무사들과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고심했던 실학자들의 공동작품이다. 다시 말해 무예24기는 오랜 역사경험과 전투현장에서 걸러진 실학정신의 무예적 표현물이자 자주국방을 상징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라 할 것이다.
화성과 무예24기
수원 화성(華城)은 앞서 설명한 「무예도보통지」 무예24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정조는 1784년에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 이를 경축하는 과거시험을 열어 많은 무사를 뽑고, 이듬해에는 훈련도감과 경과에 합격한 무사들 가운데 무예실력이 빼어난 자를 뽑아 국왕경호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였다. 이후 장용위는 1788년에 ‘장용영(壯勇營)’이라는 독립군영으로 발전하였고, 1793년에는 도성의 내영과 수원에 외영을 두어 기존의 핵심 군영인 훈련도감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정조가 주도하여 창설한 장용영은 주 훈련과목으로 무예24기를 채택하여 전투력 극대화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처럼 당시 최고의 무사들이 모인 곳이 장용영이었으며, 장용영 외영군이 주둔했던 수원 화성은 무예24기가 가장 활발하게 수련되고 펼쳐졌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장용영은 정조가 서거한 후 1802년 노론벽파들에 의해 17년만에, 짧지만 영원한 족적을 남겨 놓으며 폐지되었다. 결론적으로 수원 화성은 정조의 효정신과 실학사상 및 자주국방의 상징인 「무예도보통지」무예24기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공간으로, 우리민족의 자랑스런 전통문화 산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글 | 최형국 무예24기 사범
<실학과 과학>
실학 속의 과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종래의 성리학적 자연인식 체계를 비판적이고 자유분방하게 수정해 재정립한 새로운 체계이고, 또 하나는 17세기 초 이후 중국을 통해 수입한 서양과학의 새로운 지식정보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은 전통적 자연지식과는 상당히 다른 서양과학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지 않았으며, 그들이 새로이 정립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성리학적 인식체계에 기반해 선택적으로 수용했다.
실학자들이 접하고 선택적으로 수용한 서양과학 중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천문학 지식이었다. 조선의 실학자들이 서양의 천문학 지식을 접한 통로는 전적으로 중국에서 수입해 들여온 한문으로 변역 정리된 서양과학 서적이었다. 17세기 초 이후 주로 사신 일행에 들여온 마테오 리치의 『건곤체의』와 같은 서양 천문학 책을 통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새로운 천문학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조선 유학자들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지구설 이었을 것이다. 수 천년 동안 믿어오던 땅이 평평하고 모나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부정되고, 인간이 살고 있는 땅은 공과 같이 둥글어 저 반대편 쪽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가히 혁명적인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객관적인 천체 운행의 계산과 같은 천문학은 실용적인 차원에서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되었다. 1644년에 중국에서 시행되기 시작한 서양식 역법 시헌력을 곧이어 수용하기 시작해 불과 10년 만인 1653년에 독자적인 자체 노력과 능력으로 시헌력으로 개력할 수 있었던 것이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또한 서양식 천문도의 도입도 비교적 적극적으로 수입되었다. 1623년에 제작된 아담샬의 『적도남북양총성도』가 1631년에 수입되었으며, 1723년에 제작된 쾨글러의 『황도총성도』는 1742년에 수입되었다. 이후 관상감에서는 그것들을 모사해 사용했다. 또한 민간에서도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목판으로 제작해 널리 보급되기도 했다. 천문학 전문가가 아닌 대부분의 조선 유학자들이 천문학 서적이 아닌 가시적인 형태의 천문도를 보면서 신기한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새로운 서양 천문학을 접한 조선 실학자들은 객관적 지식 정보는 긍정하면서 수용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전체 우주의 생성의 원리, 우주의 구조와 운동의 원리 등에 대한 자연 철학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사정이 달랐다. 나아가 새로운 천문학 지식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유럽인들이 해석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것은 바로 전통과학의 패러다임에 입각해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실학자들이 서양 천문학의 새로운 지식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필터는 재정립된 성리학적 인식 체계였다. 크게 나누어 홍대용과 최한기의 기론적 메카니즘을 이용한 해석의 방식이 하나이고, 김석문과 서명응 등에서 볼 수 있는 상수학적 서양과학 읽기가 또 하나였다. 홍대용의 지구설과 지동설, 최한기의 기륜설로 이해되는 뉴튼 천문학 이해가 그것이었다. 또한 조선의 유학자로서는 가장 정합적인 우주론을 펼쳤고, 홍대용 이전에 지동설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김석문의 우주론은 다름 아닌 상수역학과 서양과학 지식의 결합으로 태어난 독창적인 우주론 사색이었던 것이다.
글 | 문중양
<실학과 지도 – 고지도를 통해 본 실학 >
또한 동국지도는 현대 지도의 축척으로 환산했을 때 대략 1:50만 정도로 당시로서는 대축척 지도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지도에 이전 시기 지도에는 거의 불가능했던 다양한 정보를 담을 수 있었고, 이후 대축척 지도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동국지도는 우리 나라 국토의 원형을 사실에 가깝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동국지도에서 확립된 국토의 모습은 약간의 수정은 가해지지만 일제에 의한 근대적 측량지도가 나오기 이전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지도에 이전 시기 지도에는 거의 불가능했던 다양한 정보를 담을 수 있었고, 이후 대축척 지도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1757년 조정에 알려지게 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이후 관청에서 적극 활용하게 되는데, 이는 정상기의 지도가 행정·군사적 용도로는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는 1770년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여지도(輿地圖)〉 제작사업이다. 그는 영조의 명을 받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와 짝할 수 있는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 때 기본도로 사용된 것이 정상기의 동국지도였다. 이를 토대로 도별도(道別圖), 군현지도(郡縣地圖) 등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지도는 이후에도 관에서 계속 모사되면서 널리 이용되었다.
민간에서도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도제작에 이용되었다. 특히 해주 정씨 가문의 정철조(鄭喆祚 1730~1781), 정후조(鄭厚祚 1758~1793) 형제는 정상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편집하여 더 뛰어난 해주본(海州本)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그의 후손과 다른 지도제작자들에 의해 수정, 보완되면서 조선후기 지도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34년 제작된 김정호의 〈청구도(靑邱圖)〉 도 바로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보완되었던 전도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지도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그의 〈청구도〉를 바탕으로 보완·발전시킨 것인데 이 역시 그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면 정상기의 동국지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한말 일본을 통해 근대식 지도제작의 기법이 서서히 도입될 때에도 정상기의 지도는 여전히 정부에 의해 제작되는 각종 전도의 기본도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동국지도가 조선후기 지도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적 지도제작기술이 도입되기 이전에 제작된 동국지도와 같은 전통시대의 지도들은 현대의 지도와는 제작기술이나 표현방식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단순히 정확도의 관점에서 전통시대의 지도를 평가한다면 여전히 미숙한 지도에 불과할 것이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도 이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하나의 지도가 탄생하기까지에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의 독창적인 노력도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축적된 많은 경험과 당시 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던 지식과 관념들이 뒷받침되어 있다. 그만큼 지도는 회화와 같은 예술작품과는 다른 강한 사회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동국지도는 비록 정상기 일 개인의 역작이라 할 지라도 그 속에는 조선시대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지도제작의 문화적 역량이 담겨져 있으며 우리의 국토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표현하려 했던 선조들의 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실학과 지도 – 용인>
용인의 옛 지도
1. 경기도지도 18세기중엽 국립중앙도서관
경기도 지도책 속에 수록된 지도, 충렬서원 앞에 정몽주 묘를, 심곡서원 앞에 조광조 묘가 있다고 표시하였고, 주막도 그려져 있다. 산맥을 푸른색으로 표시한 것이 특이하다.
2. 광여도 1767~1776년 41×32cm 서울대학교 규장각
광여도라는 지도책 속에 수록된 지도, 강줄기는 자세한데 도로 표시가 없다. 묘도식으로 산맥을 그렸으며 직동 주막을 표시하였다.
3. 해동여지도 1735년 31×37cm 국립중앙도서관
해동여지도에 수록된 지도, 용인현의 관할 행정구역, 강줄기 등이 자세하며, 도로와 역이 잘 그려져 있다. 향교와 관아, 서원 등이 잘 표기되었고, 십청묘, 음애묘등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발췌 | 수원의 옛지도, 수원시장 심재덕 발행
< 실학과 지도 – 수원>
수원의 옛 지도
1. 수원부 | 해동여지도1735년 31×37cm 국립중앙도서관
전군 군현을 모두 수록한 지도책 속에 들어 있는 고지도로 영조 말엽에 그려진 수원부 모습이다. 강줄기는 잘 표시했으나 도로 표시가 없고, 해창(海倉) 등의 창고를 잘 그렸다.
2. 수원부 | 해동여지도1735년 31×37cm 국립중앙도서관
전군 군현을 모두 수록한 지도책 속에 들어 있는 고지도로 수원부의 읍치를 팔달산으로 옮기기 전의 모습으로 동헌·향교·서원·사창 등을 기와집으로 표시하여 쉽게 찾을 수 있다.
3. 여지대전도 1700년 15.2×19.0cm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전국 군현을 모두 수록한 지도책 속에 들어 있는 고지도이며 도로 표시가 없다. 지도 다음 장애 관할 면의 초경(初境)과 종경(終境)을 적어 놓아 수원부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4. 수원지방도 | 대동여지도 1861년 40.0×30.0cm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동여도를 저본으로 판각한 우리 나라 고지도의 결정판이다. 지도표를 사용하여 지도 제작을 간편하게 하였으며, 도리는 10리마다 점을 찍어 누구나 쉽게 거리를 알 수 있게 하였다. 22첩으로 만들어 분합이 자유롭고 접으면 책의 크기만 하여 휴대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고, 지도를 전부 펴면 4m×8m의 거대한 전도가 된다. 이 지도는 앞장의 지도중 수원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실학과 지도 – 경기도>
경기도의 옛 지도
1. 여지도 18세기중엽 38×28cm 서울대학교 규장각
각 순현가의 도로망을 자세히 그렸다. 대로는 굵게 소로는 가늘게 적색선으로 표시하였다. 수원·광주·강화·개성은 유수부이기 때문에 읍치를 성곽 모습으로 그렸다. 각 군현의 진산만 표시하고 산맥 표시는 없다. 수원의 진산으로 광교산이 표시되었고, 화산(禾山)으로 표시되었다.
2. 18세기후반 58×74cm 정신문화연구원
산맥과 하천 도로망을 잘 그렸다. 경기도는 중앙이기 때문에 노랑색으로 군현을 표시하였고, 봉수대는 횃불 모양으로 그려 알아보기 쉽게 하였다. 유천과 독성산이 표시되었다.
3. 좌해도 18세기후반 31×28cm 고려대학교대학원 도서관
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구의 이동이 많고 도록의 중요성은 그만큼 강조 되었는데 그러한 필요에 의하여 제작된 지도가 이 지도이다. 각 군현간의 도로와 이정을 밝혀 여행에 도움이 되도록 제작되었다. 청계산이 표시돠어 있다.
4. 해동여지도 1804년 58×74cm 국립중앙박물관
도로를 중요시 하여 제작한 지도, 각 군현간의 도로망을 잘 그렸고, 도경계에서는 다른 도의 군현까지의 거리를 일일이 적어 놓았다. 지도 우측에는 각 군현간의 이정표가 있다. 금천을 시흥, 수원을 화성으로 표시하였다.
5. 동국여도 1822년 고려대학교 박물관
도로망 중심으로 그린 지도, 전국의 10대 간선도는 굵게, 기타 다른 도로는 가늘게 적색선으로 도로망을 표시했다. 지도 다음 장에는 경기도 각 군현간의 이정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이정표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광교산, 영화역이 표시되어 있다.
발췌 | 수원의 옛지도, 수원시장 심재덕 발행
<실학과 회화/서예>
표암 강세황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17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30.5×35.5cm
명대 오파의 거장 석전 심주의 화법을 방한 것으로 밝혔는데, 모티프 자체는 남종문인화풍의 교과서적 화보인《개자원화전》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를 베끼는 차원이 아니라, 맑고 상쾌한 느낌이 드는 새로운 화면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전경의 솟아오른 언덕에는 두 그루 오동나무가 잎을 무성하게 드리우고 있고, 그뒤 중경에는 사립문 너머에 대숲과 파초를 배경으로 초막이 있고, 마루에 나와 앚아 더위를 식히고 있는 문인이 보인다.
앞마당을 쓸고 있는 시동의 등 뒤로는 무너질 듯한 커다란 절벽이 배치되었는데, 안쪽으로약간 기운 오동나무와 호응을 이루고 있다. 그 사이로 멀리 먼산의 실루엣이 펼쳐지며 시선을 끌어당기는데, 형성한 뒤, 오동나무 오른쪽으로 펼쳐진 산의 능선을 따라 그 너머 여백의 공간으로 시선을 이끌어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물기 많은 담묵 위에 청록색 담채가 가해진 오동나무, 푸른색과 갈색 담채를 몰골법으로 처리하여 시원스런 대비가 인상적인 원산 처리 등과 어우러지면서 화면에 생기를 주고 있다.
따라서《개자원화전》에 나오는 모티브를 원용했으면서도 창작으로서의 새로운 느낌을 성공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원숙한 솜씨로 인해 한때 만년작으로 보기도 했으나, 첨재가 강세황(姜世晃;1713~91)의 초년기에 사용된 호임이 입증됨으로써 1750년대 작품으로 보고 있다.(박효은)
표암 강세황 <피금정(披襟亭)>
1788, 종이에 수묵 101.0×71.0cm
표암(豹菴) 강세황은 1788년 9월 9일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그 해 가을 맏아들인 이 심양부사로 임명되어 관사에 가 있다가, 정조의 어명에 따라 동해안 지역 그리고 내금강을 사생하러 들어가려고 회양에 들른 김응환, 김홍도 등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금강산 유람을 기록한 것이 <유금강산기>이며, 여행에서 그린 그림이 유명한 <풍악장유첩>이다. 표암은 바로 이때 회양 가는 길목인 금성의 피금정에 들른 것 같다.
” 1788년 가을 나는 피금장에 들렀다.강 언덕 그늘 짙은 고목이 가지런한데, 가던 수레 멈추니 석양이 나지막하다.바빠서 옷깃 헤치고 앉아 있을 겨을 없으니,후에 난간에 기대어 짧은 시구 지을 것을 기약해보네.회양의 와지헌에 와서 앉아 기억을 더듬어 이 그림을 그린다.”
– 표옹 –
이 시는 강세황의 문집《표암유고(豹菴遺稿)》에도 나온다.화면을 보면 정선 같은 이전의 화가들이 그린 피금정 모습과 사뭇 다르다.
즉 정선이 누대와 같은 피금정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면 이 그림에는 정자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자의 모습은 김홍도의《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가운데에 있는 <피금정> 장면과 유사하다.
강세황이 1789년에 그린 또 다른 <피금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도 구불구불 올라간 용의 허리 위에 올라앉은 듯한 누대 형태의 피금정이 아니라 화면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귀퉁이 부분에 작에 그려진 강변의 정자와 그 쪽에서 바라본 산이 등장한다.(유홍준)
표암 강세황 <산수대련(山水對聯)>
18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담채, 각 58.5×33.5cm
강세황의 중기작으로 남종화풍(南宗畵風)을 바탕으로 한 시화 일치(詩畵一致)의 경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폭은 예찬(倪瓚) 풍의 빈 정자가 강에 인접한 채 쓸쓸하게 서 있는 전경을 강건너 멀리 안개에 감싸인 채 고즈넉한 사람들의 거처와 대비 시켰고, 다른 한 폭은 단풍진 강산 어딘가에서 기러기 소리라도 들릴 듯한 드넓은 강변을 돌아 멀리 있는 마을을 찾아가는 사람을 그렸다. 두 폭 모두 저녁 나절의 적막하고 고요한 느낌을 전하기 위해 점잖고 조용한 필선으로 간략하게 그림으로써 성글고 맑은 느낌을 자아내는데 성공하였다.
” 들물은 성근 숲 너머로 흐르고 빈 정자느 저녁 바람을 맞고 있네.저는 나귀 그림자 속에 푸른 산이 저물어가고 끊어지는 기러기 울음소리 가운데 붉은 단풍 어우러진 가을이로다.”
– 박효은 –
다산 정약용 <행서>
19세기 초반, 종이에 먹. 24.5×27.0cm
강진에 유배중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쓸쓸한 심정이 애절하게 나타나있는 소품이다. 깔끔한 다산 특유의 필치에 강약의 리듬이 더해져 글의 내용이 더욱 심금을 울린다.
” 9월 12일밤, 나는 동암에 있었다. 우러러 하늘을 보니 하늘은 적막하고 드넓으며, 조각달이 외롭고 맑았다. 떠 있는 별은 여덟아홉에 지나지 않고, 앞뜰엔 나무 그림자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옷을 주워 입고 일어나 걸으며 동자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 하니, 그음향이 구름 끝까지 뚫고 나갔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찌든 창자를 말끔히 씻어버리니, 더 이상 세상의 광경이 아니었다.”
– 유흥준 –
다산 정약용 <시첩 – 성화(聖華)를 기리며>
1. 서종은 지명으로 약근군 서북쪽 사오십리에 있다.2. 심씨집에서는 온갖 꽃을 기르고 있는데, 특히 국화는 48종이나 된다.3. 산인은 평생 소설산에 있는 북쪽 골짜기에 살았다.4. 두번째 구절은 삼연 김창흡의 시를 사용한 말이다. 5. 문암 포구로부터 동쪽으로 10리 들어가면 나의 산장이다.6. 황효수는 여주강이고, 녹효수는 홍천강이다.7. 차마 옛터를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온 집안이 남쪽으로 건너갈 수 없었다.8. 성화는 올해 52세다.9. 성황에겐 위로는 늙은 어버이가 있고, 아래로는 병든 자식이 있다.10. 태수는 우천의 별명이고, 종산은 용진의 북쪽에 있다.
18~19세기,모시에 먹. 17.5×121.0cm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중 자신의옷이 닳아 헤지면 그것을 잘라 시첩을 만들어 사용하곤 했다. 이 시첩은 12폭으로 꾸며진 것인데 지금은 횡액으로 다시 표구되었다. 바닥에는 풀을 먹여 다리미로 다린 흔적이 남아 있다.
시첩의 내용은 고향인 남양주 능내리와 벗 성화를 생각하며 지은 칠언절구 10수이다. 각 시마다 시구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았다. 발문은 다산이 27년 전에 성화를 지은 것으로 비록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진실을 담은 것이라고 하며, 글 마지막은“이 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다산 초부(樵夫)가 쓰다”라는 처연한 글귀로 마무리했다.
이 시첩은 다산의 해서가 얼마나 단아하고 흐트러짐이 없으면서도 이지적이고 해맑은 멋이 서려 있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단원 김홍도 <혜능상매도(蕙能賞梅圖)>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8.5×41.5cm
중국 명대 도석인물화본인 <홍씨선불기종(洪氏仙佛奇縱)>에서 선종 6대조 혜능 의 도상을 빌려다 그린, 단원 김홍도(1745~1805경) 50대의 걸작이다. 멍하니 앉아 삼매경에 든 혜경을 두 마리 까치가 앉은 고매 위에 포치하여 유.불의 상징을 복합시켜놓았는데, 역시 김홍도다운 멋스러운 발상이다.
선승 혜능이 유사 들의 매향을 같이 즐긴다는 내용을 담고자 했을 것이다. 화제시에 “암향부동어제천(暗香浮動於諸天)”이라 썼지만, 고매에는 꽃망울조차 달려 있지 않다. 그 매향을 지루하게 기다리는혜능의 삼매경 속이 매화 가지처럼 시커멓게 엉켜 있는 듯하다.(이태호)
단원 김홍도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8.0 ×37.0cm
김홍도는 표암 강세황에게서 문인 삶의 멋과 취미를 습득했는데, 표암의 평에 따르면 김홍도가 신선 같은 용모를 타고났다고 한다. 또 당대 최고의 화원으로, 문사들과 어울려 시회아집을 가졌을 만큼 그림뿐 아니라 시.서.악 모두 수준급이었다.
“흙벽에 종이창을 내고 종신토록 포의 차림으로 시와 음악을 즐기면” 가장 좋겠다는 글의 내용을 풀어 그린 작품이다. 방건(方巾)을 쓰고 정좌한 채 당비파(唐琵琶)를 켜는 인물의 모습은 당시 문인들의 취향이자 김홍도 자신이 지향하던 풍류를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50대 어느 시기의 김홍도 자화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인물의 주변에 배치된 파초, 붓과 벼루, 칼, 생황, 호리병, 중국골동품, 서책과 화선지 등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신선의 생활상을 읽게 해준다.
다양한 기물들을 복잡하게 늘어놓은 듯하면서도 삼각형 구도로 적절히 갈무리해놓은 김홍도의 화면 운영력이 돋보인다. 단숨에 쓱쓱 그리는 듯한 김홍도 50대 절정기의 무르익은 필묵(筆墨) 으로 풍류 정신을 확실히 구현해낸 걸작이다.(이태호)
초정 박제가 <화첩 – 의암관수도(倚岩觀水圖)>
초정 박제가 <화첩 – 산수도(山水圖)>
초정 박제가 <화첩 – 어락도(漁樂圖)>
초정 박제가 <화첩 – 야치도(若稚圖)>
초정 박제가 <화첩 – 야치도제시(若稚圖題詩)>
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각 27.0 × 33.5cm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경)는 잘알다시피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북학파(北學派) 실학자이다. 청조(淸朝)의 신문물을 수용하여 부국 과 백성들의 생활 향상을 꾀하자는 이용후생론(利用厚生論)을 주장했다.
서얼 출신인 그를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 으로 발탁했을 만큼 뛰어난 문사 였다. 박제가는 네 번의 연행을 통해 청나라의 학문과 문예를 익혔고, 나빙. 옹방강 등 중국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시 . 서 . 화의 문인 취미를 길렀고, 문인으로서 전인적 교양을 갖추어나갔던 것이다. 한편 그러한 교양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 . 정치인 . 외교관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위상을 다졌을 것이다.
이 화첩에 담긴 네 점의 그림과 한 점의 제시는 박제가의 예술적 수준을 가늠하는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도판으로만 소개된 적이 있는 이 화첩이 전시 공간에 선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제가가 추구했던 신분 차별의 타파와 상공업 진흥에 대한 소신이 담겨 있는 그림은 아니지만, 전통적이고 평범한 소재를 취하여 여기 화가다운 소담한 솜씨를 보여준다.
우선 <의암관수도>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모사해본 듯 단원 화풍에 근사하다.
<산수도>는 깔끔한 수묵담채 로 평범한 산마을 풍경을 담고 있는데, 표암 강세황의 화풍이 느껴지자.
<어락도>는 장한종 의 화풍을, 네 점중 가장 활달한 필치로 그린 <야치도>는 다시금 단원풍을 연상시킨다.
<야치도제시> 행서 오언시 는 표암의 서풍 인 듯하면서도 분방한 힘이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 선배 문인 화가인 강세황보다 회화적 견실함을 이룬 듯하다. 이 화첩의 맑고 활달한 서화풍을 보면, 남의 그림을 참고로 그려보면서 부담 없이 즐겼던 대학자다운 박제가의 여유와 건전한 인간미를 읽을수 있다. 또한 <어락도>에 쓴 <장자>의 고사, <의암관수도>에 쓴 칠언시 “귀는 물에 몸은 돌에 의지했는데, 세 사람이 있지만 마음은 하나다” 등은 박제가가 주역과 노장의 사상에도 심취했음을 짐작케 한다.
서화첩 의 마지막<야치도제시> 에는 관리 생활을 하면서 내심 꿩처럼 은둔처를 찾고 싶어했던 박제가의 마음자리가 투영되어 있다. ‘정유’ 는 박제가의 또 다른 아호이다.
<의암관수도>에 쓴’수기(修基)’는 박제가의 자이다.(이태호)
실학과 문학
오랑캐를 일컫는 말은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을 들 수 있다. 중국은 자신들의 문명(이것을 보통 ‘중화문명 中華文明’, ‘화하문명 華夏文明’이라고 한다)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그 외의 것을 야만으로 배제하는 논법을 통해서 중세를 만들어왔다. 이러한 세계관을 화이론(華夷論)이라고 한다. 그들의 개념에 의한 공간적 기준에 따르면 조선은 당연히 동이, 즉 동쪽 오랑캐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본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이 ‘동이’에 속한다는 사실을 잊으려고 애쓰거나 부정했다.
북방 오랑캐라고 폄하하던 만주족이 중국 문명의 본산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세우자 중화문명과 오랑캐 사이에 혼란이 생긴다. 물론 17세기 조선의 상황에서 그 혼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임진왜란 때 군사를 보내주어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갚고, 명나라의 복수를 갚기 위해 청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하는 이른 바 ‘북벌론(北伐論)’이 한 시대를 넘어 18세기까지 위세를 떨쳤던 것이다. 병자호란을 통해서 이미 청나라에게 항복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에 있어서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조선이었기에 청나라를 치자고 주장하는 것은 관념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연암 박지원의 작품 <허생전(許生傳)>에는 이러한 관념적 허위를 맹렬히 질타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은거해서 독서에 열중하던 허생이라고 하는 가난한 선비가 변부자의 돈을 빌어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한다. 많은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도적들을 교화한 후 남은 돈은 바다에 빠뜨려 버린다. 그리고 다시 가난한 생활로 돌아온다. 이 일을 겪은 변부자는 자신이 알고 있던 이완 장군에게 허생을 천거하게 되고,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완은 북벌론의 이념이 사회적인 맹위를 떨칠 때 그 선봉에 서있던 장군이다. 그는 청나라를 칠 계책을 묻는데, 이에 대해 허생은 몇 가지 계책을 내 놓는다.
선비들은 청나라 과거에 응시하고, 서민들은 중국 강남으로 가서 장사를 하면서 그들의 허실을 정탐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나라 사람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말을 하며 변발을 해야 한다는 계책을 내놓았다. 철저히 그들의 문명과 풍습을 이용해서 청나라를 정확히 파악해야 정벌 전쟁을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당연하게도 이완 장군은 난색을 표명한다.
박지원은 이같은 상황 설정을 통해서 당시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얼마나 청나라를 관념적으로 받아들였는가를 통렬히 비판한다. 문제는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딛고 선 현실이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오랑캐라는 점을 철저히 인식할 정도로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 있어야 새로운 역사를 열어나갈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스며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실제적인 학문, 곧 실학의 정신이었다.
글 | 김풍기(金豊起),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실학과 사회>
볼모로 심양에 가다.
1636년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한달 여를 버티다가 성을 내려와 삼전도에 주둔하던 청 태종에게 항복을 하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항복을 하면서 청과 12개조로 된 조약을 맺었다. 역사책에서는 이를‘성 아래에서의 맹약(城下之盟)’이라고 기록하였다.
소현세자는 인조가 항복하는 자리에 동석하였다가 바로 볼모의 길을 떠났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청과 맺은 조약에는 조선 국왕의 장자와 차자, 여러 대신의 아들(아들이 없는 사람은 동생)을 인질로 보낸다는 조문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세자빈 강씨와 두 대군의 부인들이 모두 인질의 몸으로 심양으로 갔던 것이다. 삼학사로 알려진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붙잡혀 간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심양관의 조선인 정부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것은 4월이었다. 이들이 심양에 도착한 직후에는 조선 사신을 접대하던 동관에 머물렀고, 5월에 심양관(瀋陽館) 건물이 완성되자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1644년까지 심양관은 소현세자 일행의 숙소이자, 조선과 청의 외교를 담당하는 외교 대표부로 활용되었다.
심양관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을 비롯하여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리, 사역원 역관, 선전관, 의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합하면 총 200명에 가까운 조선인이 거주하였다.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호방(戶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공방(工房) 기구를 조직하였고, 각 기구가 은의 출입, 물품 및 의약의 공급, 사람과 말의 관리, 물건 제조 및 수리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렇게 보면 심양에는 소현세자를 대표로 하는 조선인의 미니 정부가 있었던 셈이다. 또한 심양에는 볼모로 잡혀온 조선 고관들의 자제가 있는 질자관(質子館)이나 조선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던 동관과 서관이 있었으므로, 심양은 조선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활발한 국제도시가 되었다.
외교 활동을 벌이다.
청이 소현세자를 볼모로 둔 이유는 조선과 명의 긴밀한 관계를 끊고, 청이 명을 공격할 때 조선 군대와 물자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과 맺은 조약에는 조선이 명과의 외교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이 명나라 군대가 머물던 가도를 정벌하거나 명 본토를 공격할 때 구원병을 파견해야 한다는 조문이 있었다. 과연 청은 명나라 본토를 공격하면서 소현세자를 통해 군대와 병선, 군수 물자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고, 소현세자는 이처럼 민감한 사안을 조선 정부에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인조대의 조선 정부는 청의 요구를 들어주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동아시아의 주도권이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광해군은 명과 청의 상반된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면서 군사적인 충돌을 피해 가는 실리 외교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정 세력은‘명을 숭상하고 청을 배척한다(崇明排淸)’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이 비록 청의 무력에 굴복하여 항복하였지만, 명 왕조의 재기를 기대하며 청과 맺은 조약의 실행을 연기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렇게 되자 조선에 대한 청의 불신은 날로 깊어졌고, 소현세자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점차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1639년(인조 17) 청이 명나라 금주를 공격할 때, 조선에서 마지못해 파견한 임경업 장군의 군대는 명의 군대와 내통하여 청 군대의 동태를 알렸고, 이를 알아차린 청 태종이 소현세자에게 사람을 보내 엄중하게 항의했던 것도,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소현세자는 청과의 교섭을 담당하면서 양국간에 발생하는 모든 사무를 조선의 승정원에 알려 인조의 지시를 받았으며, 시간이 촉박한 경우에는 세자가 직접 평안감사나 의주부윤에게 명령을 내려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파악된 주요 정보를 조선 정부에 알려 대책을 마련하도록 도왔다. 세자가 보고한 내용에는 만주 지역 팔기군의 동향, 산해관과 북경 일대의 청 군대 동향, 심양과 의주에서의 무역, 청 황실의 후계자 문제, 청이 일본과 외교를 맺으려는 의도, 청과 몽고의 관계 등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국제정세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이었다. 소현세자는 특별히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기밀 문건을 별도로 작성하거나 사람을 통해 구두로 전달하였는데, 이는 청 정부 쪽으로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다.
소현세자는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 군대는 조선인 포로를 획득하는 일에 골몰하였고, 수십만 명의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갔다. 청의 군대는 일반 백성보다 종실이나 양반집 부녀자를 많이 잡아가려 하였는데, 이들을 풀어줄 때에는 거액의 보상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포로가 몰려든 심양에는 포로를 판매하는 시장이 생겨났고, 보상비가 싼 경우에는 1인당 25~30냥, 보통은 150~250냥이었고, 귀한 신분의 사람이면 천냥을 상회하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재력을 가진 친척을 둔 포로들은 돈을 내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가난하고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구제될 길이 없었다. 풀려나지 못한 조선인 포로들은 소현세자가 있는 심양관으로 몰려들었고, 국가에서 공금을 내어 자신들을 구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날마다 울부짖는 조선이 포로를 보며 살아야했던 소현세자는 청과의 무역이나 농업 경영에 참여하여 재력을 비축하였으며, 이를 활용하여 많은 조선인 포로를 구출해 냈다. 이 때 심양관의 경제 활동은 세자빈 강씨가 주도하였다.
아담 샬과의 만남
1644년 청이 북경에 입성하자 소현세자 일행은 청 군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갔다. 심양에 있을 때부터 청 태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현세자를 연회석이나 전쟁터로 불러들였다. 장차 조선의 국왕이 될 세자에게 날로 강성해지는 청의 위용을 과시하고, 세자와의 친분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였다. 청이 북경을 장악하면서 청 조정은 조선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해마다 청에 바쳐야했던 공물을 줄이고, 조선에 귀화한 한인이나 여진인의 송환을 면제하며, 상당수의 조선인 인질을 돌려보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9년 동안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청이 북경을 장악하는 대업을 이루었으므로 세자를 붙잡아 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소현세자는 귀국하기 직전 70일 정도를 북경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독일인 신부인 아담 샬을 만났다. 아담 샬은 1628년 북경에 들어와 명 의종의 신임을 얻었고, 청이 집권한 이후에는 다시 청 세조의 신임을 받아 천문 관측을 담당하는 흠천감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예수회는 중국의 황제에게 접근하여 문화적, 종교적인 영향을 줌으로써 천주교를 전국으로 전파시키려는 포교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는 천문학, 수학, 역학 등에 상당한 지식을 갖춘 과학자가 될 것을 요구받았는데, 중국의 황제들이 이들의 과학 지식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아담 샬 역시 예수회 소속의 신부로서 시헌력을 만들어낸 과학자였는데, 소현세자가 바로 그를 만난 것이다.
아담 샬은 조선인이 만난 최초의 독일인이자 과학자였다. 이보다 앞서 이탈리아 신부인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 이수광이 명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수광은 마테오 리치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고, 그가 만든 『천주실의』만 구입하여 돌아왔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는 청에서 간행된 천주교 서적과 서양 문물을 세자에게 주었고, 세자가 귀국을 할 때에는 천주상과 지구의, 천문관련 서적을 선물하였다. 소현세자는 이를 통해 서양의 과학과 종교를 알게 되었고, 자신이 귀국하면 조선에서 서양과학 서적을 간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세자는 북경의 주교인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서양인 신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인 신부는 청에서도 부족한 상황이었고, 소현세자는 부득이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갑자기 사망하다.
1645년 1월 18일, 소현세자는 서울 땅을 밟았다. 오랫동안 이국에서 고생하다가 돌아온 세자였지만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조정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2개월 후 소현세자는 갑자기 사망하였다. 실록에서는‘세자의 시신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기록하였다. 독살의 혐의가 크다는 말이다.
정국의 흐름으로 볼 때, 소현세자의 외교 노선은 당대 집권 세력의 노선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정부는 청에 대해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청 황실과 긴밀한 친분을 맺고 청에 협조적이었던 소현세자의 개방 노선이 국왕 인조의 왕권까지 넘보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또한 소현세자가 가지고 온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세자가 사망한 후 세자빈 강씨는 국왕 독살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고, 그의 세 아들은 모두 유배되었다가 막내아들만 살아남았다.
소현세자는 17세기초 급변하던 동아시아의 정세에 가장 정통한 조선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국토가 유린되는 참상을 목격하였고, 패전의 책임때문에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며, 국제 정세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또한 그는 북경에서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아담 샬을 만났고,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조선으로 들여올 것을 결심했다.
소현세자는 격동의 현장에서 풍부한 외교 경험을 쌓았고 국제 정세의 동향에 대해 남다른 식견도 가졌지만, 고국에서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글 | 김문식 (문학박사, 단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