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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및 장소: 2003년 2월 14일 경기도 고양시 외곽의 한 골프 연습장 질문: 신현준 1차 정리: 이한웅, 김형진 2차 정리: 신현준, 이용우 구창모(1954년 4월 27일 생)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은 낯설다. 1980년대 그는 송골매의 리드 보컬이었고, 1985년 송골매를 탈퇴한 뒤에는 조용필, 전영록과 더불어 슈퍼스타로 군림한 정상급 가수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런 모습"이란 음악을 하지 않고 사업가로 있는 모습을 말한다. 그래서 그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구창모가 현재 현역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과거에 워낙 잘 나가던 슈퍼스타급 가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렵사리 그를 만나기는 했지만 그는 "사진 촬영은 하지 말아 달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마 본인도 지금의 모습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저런 반응을 듣고 "혹시 그의 몸이 망가지지 않았을까"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천만에. 인터뷰를 하러 나간 내가 망가졌을 뿐 그의 몸매는 지금도 잘 관리되고 있었다. 똘똘한 인상도 여전했다. 여전히 날카로운 목소리로 증언하는 그의 현재의 생각을 풀어 본다. 송골매 활동을 마무리짓기 위해 컴백을 준비하려는 그의 의지는 예상보다 훨씬 강해 보였다. "나는 집안에서 반대가 워낙 심해서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지도 못했어요": 노래 잘 부르던 소년의 성장기 ![]() - 인천 출신이고 초등학교 때까지 거기 살았죠. 뒤에는 서울의 배재중학교와 배재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김정선이랑 동창이죠. 1973년에 홍익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고 1976년에 방위로 1년 정도 군복무를 했어요. Q: 오늘 인터뷰의 첫 번째 포인트는 홍대 블랙 테트라가 만들어진 과정입니다. 그 전에 순서대로 중고등학교 때 음악을 들었던 경험부터 여쭤 보겠습니다. - 제 사촌형이 이승재 씨예요. 그 형이 그룹 사운드를 했어요. 우리 나라 최초의 그룹들이고 신중현 선배와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했죠. 나중에는 (이)승재 형이 애드 훠(Add)도 했었죠.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음악들이 벤처스나 비틀스 같은 것이었어요.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의 "The Young Ones"(1961) 같은 노래도 기억나고. 그 형들이 헤어스타일도 비틀즈 스타일로 했고 인천 부평에서 하우스 밴드로 활동했어요. 인천 부평이 기지촌이니까 그곳 클럽에 하우스 밴드들이 많았죠. 그런데 그 형들이 사촌형(이승재)의 집에서 연습을 했어요. 그러니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저런 음악들을 들었죠. 그러니까 나는 음반으로 먼저 들은 게 아니라 형들이 연습하는 걸 먼저 들은 거예요. 기타도 그 무렵 처음 잡게 되었어요. Q: 그러면 기타도 통기타가 아니라 일렉트릭 기타를 먼저 잡았던 셈인가요? - 그렇죠. 제가 처음 초등학교 때 만졌던 건 일렉트릭 기타였죠. 사촌형에게 "도레미파솔라시도", 그러니까 스케일이죠, 그걸 배운 기억이 나요. 그 뒤 서울로 와서 중학교 들어갔고... 고1 때인가 통기타를 2,000원인가 3,000원인가 주고 사서 혼자서 띵까띵까 치면서 놀았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랑 어디 캠핑이라도 가면 대표 주자로 노는 거 주도하는 식이었어요. 그때 송창식이나 이장희 같은 통기타 음악이 최고였죠. Q: 구창모 님이 고등학교 다닐 무렵 "플레이보이컵 보컬 그룹 경연대회"가 한창 인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건 본 일이 있나요? 또 음악을 들으러 음악 감상실이나 생음악 살롱 같은 곳을 다녔던 일은 있으신가요. - 보컬 그룹 경연대회는 못 봤어요. 음악 감상실은 그때 명동에 있던 라 데빵스에 자주 가 보았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종로에 이브라고 있었어요. 쉘부르도 그때는 종로에 있었고. 주로 다니는 데가 종로와 명동이었고, 고3 때부터는 무교동에 자주 다녔죠. 그때는 무교동에 있는 막걸리집에도 그룹들이 있을 때니까. 오비스 캐빈은 술을 파는 데라서 고등학교 졸업한 다음에 갈 수 있었죠. 소공동에 있던 라스베가스에 키 보이스가 나온 것도 보았어요. Q: 실례되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모범생인 편이었나요? 아니면 불량학생인 편이었나요?(웃음) - 글쎄... 불량 학생도 아니고 모범학생도 아니고 그냥 중간 정도였죠(웃음). Q: 그러면 고등학교 무렵에는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나요? - 그때 음악을 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은 개인적으로 기타 배워서 활동했어요. 그런데 나는 집안에서 반대가 워낙 심했어요. 그러니 음악 하겠다고 마음먹지도 못했어요. 집에서 워낙 반대가 심해 가지고... 왜냐하면 (이)승재 형이 크게 빛을 봤으면 그래도 나았을 텐데 계속 그룹 사운드로만 전전하니까... "눈동자"라는 노래로 처음 히트 친 건 뒤의 일이니까. Q: 그러면 그때 좋아하셨던 음악은 C.C.R.이나 산타나 같은 것이었나요? - 그렇죠. 그때는 C.C.R.이 최고였었어요. 그러니까 중3 때부터 제일 많이 듣던 노래가 C.C.R.이에요. "Proud Mary"부터 정말 많이 들었죠. 그때는 마치 탐정이 수색하듯이 각종 팝송을 섭렵할 때죠. "록 음악"은 대학 들어가서 정식으로 음악 하면서부터 빠진 것이에요. Q: 한국의 그룹 사운드 음악들도 좋아하셨는지요? - 키 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나 히 식스의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를" 같은 노래들 다 좋아했죠. 한국 곡은 시시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그렇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우리 세대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부르던 노래들이란 것이 광석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들이었어요. 한 채널만 딱 고정되어 있고 스피커만 달려 있는 라디오. 거기서 나오는 음악이라는 것이 "오동추야 달이 밝아.." 하는 노래들이었는데, 그런 노래에만 젖어 있다가 최희준 씨의 "하숙생" 같은 곡이 나왔어요. 1960년대 히트했던 노래들이죠. 그런데 중학교 이후 팝송을 듣다가 "우리 나라에는 그런 류의 노래가 없나.."할 때 나왔던 게 키 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나 히 화이브의 "초원" 같은 노래였어요. 키 보이스와 히 식스의 노래는 라디오에서 줄곧 나왔죠 Q: TV 방송도 많이 보셨을 것 같은데... - 그때는 TV가 흔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음악은 주로 라디오로 들었죠.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프로 레슬링 한다" 그러면 만화방에 가서 보든지, 아니면 어디 TV 있는 부자집에 가서 보든지 그 정도였지요. Q: 정리하면, 중고등학교 때는 음악을 무척 좋아했지만, 실제 그룹 활동 같은 건 못하고 혼자 노래 부르고 노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군요. - 아까 얘기했지만, 집에서 굉장히 반대가 심해서 (음악을)할 엄두를 못 냈어요. 음악 하는 친구들을 무척 부러워만 했죠. 배재고 동기 중에 두 명이 일렉트릭 기타를 사서 갖고 있었습니다. 전기 기타라는 게 그때만 해도 굉장히 고가품이었는데, 두 친구가 소형 앰프와 기타를 갖고 있었어요. 한 명은 얼마 전 국회의원 했던 김상우(15대 국회의원)인데 그 친구가 고등학교 때 좀 끼가 있었죠. 또 한 친구가 바로 블랙 테트라와 송골매를 같이 한 김정선이에요. 그 친구들이 박스 탑스(Box Tops)의 "The Letter"라든가 C.C.R. 노래들, 그리고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Paint It Black" 같은 노래들을 했어요. "공연할 때뿐 아니라 연습할 때도 홍익여중고 애들이 와서 보곤 했어요. 나름대로 팬이 생긴 거죠.": 홍익대 "보컬반" 블랙 테트라의 탄생 ![]() - 저는 정말 우연히 음악을 하게 됐어요. 배철수 같은 경우는 서클(런웨이=활주로)이 있어서(런웨이가 블랙 테트라보다 역사가 깊어요) 그래도 자연스럽게 음악을 하게 되었겠지만, 저는 1977년에 복학하면서 음악을 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대학에 입학해서도 한동안은 음악을 안 했죠. 물론 제가 노래 잘 한다는 소문이 나서 노래해 달라는 청이 간간이 왔어요. 그러면 가서 통기타 치면서 노래를 하는 정도. 그때 통기타 반주로 노래하면서 제일 반응을 많이 받았던 곡은 배드핑거(Badfinger)의 "Carry On Till Tomorrow"였습니다. 그걸 주 레퍼토리로 삼았죠. 저는 단지 소개받아서 가끔 무대에 서는 정도였어요. 당시 학내에 저처럼 아마추어적으로 노래하던 사람이 또 있었겠지만 교류가 없었으니 알고 지내지도 못 했고. Q: 그렇다면 항공대의 활주로 같이 학교를 대표할 만한 그룹이 홍익대에는 없었다는 말씀이신가요. 1960년대에 (뒤에 동방의 빛 하신) 강근식 님이 활동하셨던 홍익 캄보가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템페스트 출신의 장계현 님도 홍대 출신이시고. - 홍익 캄보는 미대에 있던 것으로 알아요. 그러니까 단과대 별로 그룹이 있기는 있었는데, 활주로처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학교를 대표할 만한 그룹은 없었습니다. 제가 볼 때 블랙 테트라가 홍익 캄보 이후로 처음이죠. Q: 그럼 블랙 테트라가 생기기 전에는, 그러니까 구창모 님이 1, 2학년 때는 축제 때 어떤 밴드들이 연주했나요. 그리고 그 밴드들이 어떤 레퍼토리로 고고 파티를 이끌었는지. - 미대 밴드들도 나와서 했고, 다른 학교 밴드들도 했어요. 어떤 밴드들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레퍼토리야 C.C.R.의 "Proud Mary"를 비롯해서 많았죠. "쿵쿵딱꾸" 리듬의.. Q: 블랙 테트라가 창립된 건 정확히 언제인지, 가입하게 된 건 어떤 계기였는지 궁금합니다. - 블랙 테트라가 만들어진 건 1976년으로 기억해요. 1975년부터 움직임이 있었는데, 정식으로 학교에 서클로 등록해서 서클 룸을 배정 받은 건 1976년입니다. 그때 저는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창립 멤버는 아니고 이듬해 2기로 들어갔죠. 1기는 홍대선(74학번, 기타)이라고 제 고등학교 후배가 있었고, 임현순(75학번, 드럼), 고현철(보컬) 같은 친구들이 있었어요. 이 1기 친구들이 1977년까지 활동을 했습니다. 장기집권 했죠.(웃음) 그러다가 보컬(고현철)이 군대를 가는 바람에 자리가 비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 제가 복학을 준비 중이었거든요. 기타 치던 홍대선이 제 고등학교 후배라 제가 노래를 좀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제게 가입을 제의한 거죠. 그래서 1978년 블랙 테트라 보컬이 된 거예요. Q: 항공대 런웨이 같은 경우엔 서클 명칭이 기악반이었는데, 블랙 테트라는 어땠습니까. - 우리는 "보컬반"이었어요. Q: 해변가요제에 같이 출전한 김정선(기타) 님과 오승동(드럼) 님은 홍대생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 둘 다 홍대생은 아니었습니다. 김정선은 단국대에 다녔는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제 배재고 동창이에요. 근데 당시 블랙 테트라가 기타가 좀 약했어요.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실력 있는 기타리스트를 찾는데 학내에선 못 찾겠더군요. 그래서 김정선을 영입한 거죠. 오승동도 그런 맥락에서도 들어온 거구요. Q: 블랙 테트라는 주로 어디서 연습했나요. 그리고 당시 사용한 악기와 장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고로, 배철수 님은 활주로 있을 때 키보드 살 돈이 없어서 건반을 그려놓고 연습하다가 행사 열리기 3일 전에 진짜 키보드를 빌려서 연주했다고 하던데 블랙 테트라는 어땠는지... - 연습은 평소에는 서클 룸에서 하고, 큰 행사 있을 때는 강당에서 했습니다. 활주로 얘기는 배철수에게 들었는데, 우리는 키보드는 갖고 있었어요. 그래봐야 국산 키보드였지만. 서클 지원비가 1년에 한 20-30만원쯤 되었던 것 같네요. 그걸로 악기를 샀는데 다 국산이었죠. 앰프는 30와트 짜리 20세기 앰프. 근데 국산 악기는 그때까지만 해도 문제가 많았어요. 기타 같은 경우 일단 네크(neck)가 휘어 버리잖아요. 스케일도 안 맞고.(웃음) 그래서 개인 돈을 좀 보태서 악기를 좀 좋은 걸로 구비하는 경우도 있었죠. 김정선이 일제 그레코(Greco) 기타를 갖고 있었던 건 그런 이유죠. Q: 당시 블랙 테트라가 연주한 무대는 어떤 곳인가요. 학내 행사는 물론 했을 테고, 혹시 시내 생음악 살롱이나 클럽 같은 데서 연주한 적은 없는지. - 주로 축제를 비롯해서 학내 행사에서 연주했죠. 다른 학교 축제 때 가서 연주하기도 하고. 하지만 살롱이나 클럽 같은 데서 연주한 적은 없습니다. Q: 블랙 테트라의 레퍼토리는 어떤 곡들이었습니까.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 같은 음악들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 블랙 테트라가 1976년에 정식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룹으로서 모양새가 제대로 갖춰진 건 제가 들어간 1978년경으로 봐야 할 겁니다. 그때부터 록 음악에 빠져서 수없이 음악을 들었어요. 지금 시점에서 보면 록의 고전들을 많이 듣고 연주한 거죠.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 마운틴(Mountain), 유라이어 힙(Uriah Heep), 딥 퍼플(Deep Purple), 제임스 갱(James Gang)... Q: 그런 곡들의 악보는 어떻게 구했고 또 전수했는지 궁금합니다. 미8군 무대 출신 선배 그룹들의 경우는 직접 따서 악보를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블랙 테트라의 경우 어땠나요. - 우리도 처음부터 한 셈이죠. 음반을 들으면서 각 파트별로 다 따서 악보를 그리고, 그걸로 연습했어요. 우리 중에는 김정선이 음악적으로 제일 나았으니까, 그 친구가 음악적으로 주도했다고 봐야겠죠. Q: 1978년 1학기 때 블랙 테트라에 합류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시기상 ""77 mbc 제1회 대학 가요제"가 열려서 샌드 페블스가 그랑프리를 수상한 다음인데요. 제1회 대학 가요제가 어떤 영향을 준 게 있었나요. - 아마 정서적으로 좀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대학 가요제를 보고 "나도 나가야지"란 생각을 했으니까요. 물론 집에서 모르게. Q: 해변 가요제에 나갈 당시만 해도 프로로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직 없었던 거죠. - 그렇죠. 해변 가요제에서 배철수를 만나고 난 후에 프로로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Q: 1973년에 연포 해수욕장에서 "캠퍼스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가 열렸고, 1975년엔 대마초 파동이 일어났는데, 이런 일들이 구창모 님에게 준 영향이 있다면. - 1973년 연포에서 열린 경연대회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마초 파동의 경우는 제가 좋아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싹 없어지니까 좋지 않았죠. 신중현 씨 같은 분들이 대학 그룹들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잖아요. 블랙 테트라 1기 홍대선(기타) 같은 경우는 신중현 씨가 그 친구의 우상이었어요. 그래서 공연 때마다 홍대선이 주도해서 "아름다운 강산"을 꼭 연주하고 그랬다고. 그 친구가 키도 딱 신중현 씨만해요. 그러니까 신중현 씨가 자기 모델인 거죠. 그 친구는 군대 갔다 온 후로는 음악을 그만 두었지요. Q: 그때 서클들은 학도호국단 산하였는데, 그런 편제가 블랙 테트라 활동에 영향을 준 점이 있나요? - 아니, 전혀 상관없었어요. 우리 활동은 자율적이었어요. Q: 김정선 님 말씀에 의하면, 블랙 테트라가 강당에서 발표회를 하면 홍익여고 학생들이 항상 와서 보고 그랬다던데... - 홍익대 강당을 대학교, 중고등학교가 다 같이 썼거든요. 또 홍익여중고가 강당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강당에서 연주하면(어차피 낮에는 수업 때문에 시끄러우니까 못 하고 수업 다 끝날 무렵 하잖아요?) 홍익여중고 애들이 수업 끝나고 다들 보러 오는 거예요. 꼭 우리가 공연할 때뿐 아니라 연습할 때도 홍익여중고 애들이 와서 보곤 했어요. 나름대로 팬이 생긴 거죠. Q: 1978년 해변 가요제 참가한 멤버 중에 이계형 님(오르간)은 3기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2기와 함께 출전한 건지... - 원래 이계형이 고상록과 같은 기수예요. 3기죠. 근데 우리 2기가 건반이 없어서 끌어올린 거예요. 그러니까 3기지만, 2기와 같이 활동한 경우죠. "[해변 가요제] 음반이 나왔는데 방송에서 우리 "구름과 나"가 제일 많이 나왔어요": 블랙 테트라, 연포에서 금상의 추억 ![]() - 1977년에 제1회 대학 가요제 열린 거 보고 TBC에서 1978년에 해변 가요제를 만들면서 미리 선수친 거잖아요. 2회 대학 가요제 열리기 전으로 개최 시기를 잡아서. 그래서 그때 굉장히 많은 팀들이 응모했죠. 해변 가요제에 나왔던 그룹 사운드들을 보면, 대학 가요제에 나가려고 했는데 해변 가요제라는 게 하니까 "그래 경험 삼아 한번 나가보자" 이런 생각을 한 거라구요. 우리도 그렇고 배철수도 마찬가지고, 다들 마찬가지죠. 그래서 스타가 많이 배출되었어요. 주병진, 왕영은, 임백천도 있고. 예심은 서소문 TBC 방송국 5층에서 두 번 본 걸로 기억합니다. Q: 심사위원들 반응은 어땠나요. 블랙 테트라가 상을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던가요? - 예선 다 끝나고 벌써 칭찬하는 얘기들이 좀 들리더군요. 그래서 속으로는 "좀 되겠구나" 했죠. 하지만 사실은 남의 떡이 좋아 보인다고 저희는 배철수(활주로) 음악을 무척 좋아했어요. 예선 볼 때 활주로 하는 걸 봤거든요. 뭐 다들 느끼시겠지만 배철수가 첫 인상은 별로 좋지 않잖아요?(좌중 웃음) 장발에 항상 구석을 찾아서 쭈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죠. 근데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하는데 들어보니까 이건 우리 음악하고 댈 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좋게 평가를 했죠. 너희들이 더 록에 가깝다고 얘기했어요. Q: "활주로가 블랙 테트라보다 더 록적이다"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 제가 알기엔 그 전에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같은 사운드나 편곡이 없었다구요. 그러니까 제가 굉장히 강한 인상을 받은 거죠. Q: 해변 가요제 출전곡 "구름과 나"는 언제 만들어진 곡인가요? - 3기 고상록이 우리 보컬반(블랙 테트라)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습작해놓은 작품이 많더라구요. 해변 가요제 때 어떤 곡을 갖고 나갈까 내부적으로 상의하는데, 고상록이 자신의 자작곡 4곡인가 5곡을 갖고 왔어요. 그 중에서 고른 곡이 "구름과 나"였죠. 작곡에 재주가 있는 친구였어요. Q: 항공대 활주로는 1978년 해변 가요제에서 입상한 후 1978년 제2회 대학 가요제에 또 출전했습니다. 반면 블랙 테트라는 대학 가요제에 못나갔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TBC에서 못 나가게 했다는 얘기도 있고, 대학 가요제가 더 출전 자격이 까다로웠다는 얘기도 있는데... - 해변 가요제에는 우리가 우수상을 받았거든요. 최우수상은 왕영은이 있던 징검다리가 "여름"으로 받았고. 그런데 "여름"이 최우수상을 받은 거에 대해 우리와 활주로가 무척 심하게 반발했어요. "여름"은 기성 작곡가(이정선)가 만든 작품이잖아요. 순수하지 못하다, 이건 아마추어 행사인데 기성 작곡가 곡을 최우수상을 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후일담이지만 심사위원 중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그래요. 암튼, 대학 가요제에 못 나간 이유는 TBC에서 대놓고 나가지 말라고 그랬어요. TBC 측에서 상업적으로 가려고 뒤에서 이미 작전 계획이 짜여져 있던 거죠. 물론 김정선이 홍대생이 아니라는 문제도 있긴 했어요. TBC는 학생이든 아니든 다 출전할 수 있었는데, MBC는 홍익대 그룹 사운드이면 홍대생으로만 구성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조건이 게 있었죠. Q: 활주로가 1978년 대학 가요제에도 나간 건, 배철수 님에 의하면 방송에서 활주로 노래가 전혀 안 나와서 "역시 대학 가요제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던데 맞나요? - 그렇죠. 해변 가요제 끝나고 [해변 가요제] 음반이 나왔는데 방송에서 우리 "구름과 나"가 제일 많이 나왔어요. 반면 활주로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는 안 나왔어요. 그러니까 활주로 입장에선 속이 끓는 거죠.(웃음) 그래서 활주로는 여기서 이러고 있다가는 별 볼일 없겠다고 생각해서 대학 가요제에 나간 걸로 알고 있어요. Q: 해변 가요제 입상하고 하루아침에 확 달라졌을 것 같은데... - 하루 아침에 확 뜬 정도는 아니었어요. TBC는 (수도권) 지역 방송이었잖아요. 지방에 방송이 안 나오니까 지방에서는 거의 몰랐죠. 물론 입상하고 나니까 인기가 아무래도 다르긴 했죠. 수상 기념 이런 개념으로 연주회도 했어요. 우리는 홍대 강당에서 했고, 활주로는 유관순 기념관에서 했고. 근데 활주로의 인기가 우리보다 한 수 위였죠. 활주로는 전국방송(MBC TV)을 탔으니까. Q: 구창모 님이 보시기에 1978년 해변 가요제 출전 중 잘 했다고 생각하는 데가 활주로 말고 또 누가 있었나요? - 활주로가 가장 귀에 들어왔어요. 그 다음에 벗님들인데, 듀엣으로 나왔는데 기타 실력이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Q: 상금은 얼마였나요. 상금 중에서 80%를 떼어서 김정선 님한테 기타를 사주셨다고... - 상금이 50만원이었던가. 적지 않은 금액이었죠. 근데 김정선한테 기타 사라고 대준 돈은 80%까지는 아니었을 거예요. 우리가 연습하는 동안 밀린 외상값이 많았기 때문에 상금으로 우선 외상값부터 갚았죠.(웃음) 우리는 시장통에서 주로 술을 마셨어요. 제일 자주 간 데가 학교 앞 홍콩반점. Q: 직접 관련된 질문은 아니지만, 당시 산울림이 한창 인기를 얻고 있을 때였는데, 산울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합니다. - 산울림의 작품에 대해서 신선하게 받아들였죠. 새로운 느낌을 주었으니까. 물론 아무래도 "연주 실력은 우리가 좀 낫지 않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Q: 이런 에피소드를 들었습니다. 해변 가요제 때, 연포 백사장에 런웨이가 앉아 있는데 블랙 테트라가 지나가기에 배철수 님이 "어이 같이 앉아서 놉시다" 그래서 같이 합석을 했다고. 그때 배철수 님이 시조 비슷한 노래를 하나 불렀다고. - 맞습니다. 해변 가요제 때 출연진들이 합숙 비슷하게 몇 일을 같이 지냈는데, 백사장에서 활주로와 같이 놀았던 기억이 나요. 그때 배철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암튼 희한한 노래를 부르긴 불렀어요. 우리도 김국현(베이스)이 통기타 반주해주면(이 친구가 통기타를 잘 쳤거든요) 제가 노래 부르고 그랬죠. Q: 활주로 음악을 한국적 록이라고 볼 수 있다면, 블랙 테트라는 좀 훵키한 느낌이 있는데요... - 그런 점이 있죠. 우리는, 그리고 나는 사실 록이라기보다는 팝 쪽에 가까운 음악을 좋아했어요. Q: 해변 가요제 끝난 직후부터 이미 구창모 님과 배철수 님 사이에 "둘이 같이 합쳐서 음악을 한번 해보자" 이런 얘기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 그렇죠. 저는 활주로의 음악을 마음에 들어 했고, 배철수도 우리 음악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같이 해보면 좋지 않을까"이런 얘기들을 나누곤 했어요. Q: 블랙 테트라의 음반에 관해 질문 드리겠습니다. 1집과 2집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왔는데요. - 해변 가요제에서 입상한 후, 음반 취입 섭외가 들어왔어요. 애플 레코드의 김웅일 씨가 "음반을 한번 내보자"고 그래서, 녹음 준비에 들어갔죠. 그런데 계약금을 안주는 거예요. 어느 날 활주로가 스즈키 청바지에다(그때 스즈키 청바지면 굉장했죠) 완전히 탈바꿈을 해서 딱 나타난 거예요. 알고 보니까 대학 가요제에서 이름을 날려서 지구 레코드하고 계약하고, 계약금 2백만원 받아서(당시로는 어마어마한 큰 돈이죠) 그 돈으로 "개비"를 한 거죠. 술 한잔 산다고 그래서 퍼시픽 호텔 무겐에 가서 술을 마셨습니다. 사랑과 평화가 거기서 한창 날리던 때였어요. 가서 노는 것은 좋지만 우리는 얼마나 속이 상해요. 음반 계약은 활주로보다 우리가 먼저 하고 녹음도 우리가 먼저 들어갔는데, 우리는 한 푼도 못 받고 그런 상태니까. 그래서 애플 레코드에다 "컴플레인"을 몇 번을 넣었어요. 근데도 아예 돈 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를 그냥 거저 먹으려고 그러지 않았나 싶어요. 세상 물정을 모를 때라 속만 끓이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오아시스 레코드 손 사장이 우리에게 "제스처"를 한 거예요. 이 사람들은 벌써 정보가 있었던 거죠. 손 사장은 대번에 1백 만원 짜리 3장을 우리에게 딱 꺼내놓더라구요(오아시스가 청계천에 있던 시절이죠). 애플에서 녹음한 1집 홍보판이 이미 나온 다음이었어요. 손 사장이 "너희들은 사기 당한 거다"라고 그러는 거예요. 우리는 진짜 그렇게 들리죠. 돈은 아직도 못 받았는데, 음반은 나왔으니까. 손 사장이 그러지 말고 돈은 우리가 줄 테니 우리하고 판을 내자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계약 위반 아니냐고 했더니, "돈을 못 받았는데 무슨 계약 위반이냐, 계약은 그 쪽(애플)에서 위반한 거다"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오아시스하고 계약을 하고 2집을 바로 내게 된 거예요. Q: "구름과 나"는 오아시스에서 나온 2집에는 못 실었던데요? - 애플에서 낸 1집에 실은 곡들은 하나도 못 실은 거죠. 결론적으로 돈은 한푼도 못 받고 장사는 이 사람들(애플)이 다 해먹은 거죠. Q: 말씀처럼 1집과 2집 사이가 짧은 기간인데, 키보드가 바뀌었습니다. 이기형 님에서 권오승 님으로. 권오승 님과는 마찰이 많으셨다고 들었는데. - 2집은 "대학 서클에서 벗어나 프로페셔널하게 가자"고 한 거니까. 권오승이 들어오게 된 건 그 친구가 김정선의 친구예요. 저와 권오승 사이에 마찰이 많았죠.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 음악적인 것부터 해서 성격도 안 맞고. 권오승이 독특한 친구예요. 원래 건반을 치던 것도 아니었어요. 일반 사회에서 그룹 사운드를 했던 친구인데, 그룹 하다 보면 이 악기 저 악기 다 만져보잖아요. 그러면서 건반도 좀 만져본 거죠. 근데 어쨌든 블랙 테트라에서 제가 리드 보컬이잖아요. 근데 권오승이 리드 보컬 영역까지 침범을 하니까, 그것도 친구인 김정선까지 거기 동조를 하니까, 내가 아주 상처를 받은 거죠. "야, 내가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음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나"하고. 음악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더라고. 다른 팀과 한다는 것도 우스운 꼴이고 해서, 음악을 완전히 포기하고 설악산으로 들어간 거예요.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디스코 리듬으로 발표되었지만, 원래는 바운스 리듬입니다. 느린 훵키 리듬이라 할 수 있겠죠": 송골매, 정상에 우뚝 서다 ![]() - 네. 1979년에 별별 일이 다 있었어요. 갈등과 번민... 1979년도에 배철수도 학교 후배들한테 활주로를 물려주고 프로페셔널로 나가는데, 멤버가 있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노래하고, 배철수가 드럼 치고, 김정선이 기타 치고, 김국현이 베이스 치고, 이렇게 4인조로 팀을 짰어요. 삼국지 같은 얘기죠. 근데 멤버들이 계속 왔다 갔다 하니까 거기서도 갈등이 약간 생기고... 그래서 제가 그만 두고 계속 남은 멤버들도 삐걱거리니까, 배철수가 항공대 친구들(이응수, 지덕엽, 이봉환)하고 다시 라인업을 짜서 한 게 송골매 1집 멤버들이죠. 저는 음악을 완전히 포기하고 설악산으로 들어간 거예요. 1979년 2학기 종강하고 갔으니까 11월말쯤으로 기억합니다. Q: 설악산 망월사에는 단지 쉬러 가신 건지 아니면 무엇을 하려고 가신 건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 김정선, 배철수 님이 찾아왔는데, 그 순서를 좀 말씀해 주십시오. - 4학년을 앞두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취직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영어공부를 하려고 간 거예요. 망월사로 찾아온 순서는 1980년 1월에 먼저 김정선이 왔어요. 4막 5장 깨지고 나서 답답한 마음에 찾아온 거죠. 딱히 그룹을 같이 하자는 건 아니었고. 그런데 1주일쯤 뒤에 배철수가 오더라구요. 그룹을 같이 하자고. 그래서 이제 송골매가 탄생하게 된 거예요. 배철수(보컬, 드럼), 김정선(기타), 이봉환(키보드), 나(보컬, 베이스). 4명이서 음악을 프로페셔널하게 하기로 했죠. Q: 구창모 님이 베이스를 쳤다는 시기가 이때군요. 그 시절에 알파 프로덕션에서 연습했다던데... - 서울에 올라와서 아는 선배 이종명 씨를 찾아갔어요. 이종명 씨가 충무로에서 알파 프로덕션을 운영하면서 CM송 제작을 하고 있었는데, 그 분의 도움으로 사무실의 방 한 칸을 얻어서 방음장치 하고 거기서 연습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악기도 있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니까 밤무대를 뛰게 되었어요. Q: 얘기 나온 김에 물어보면, 나중에 매치매치바 광고 나가실 때 이종명 씨의 역할도 있었나요? - 아니에요. 우리가 CF 나갈 때는 이미 히트곡을 낸 이후예요. 6인조였을 때죠. Q: 4인조 송골매일 때는 어떤 클럽에서 연주를 했나요. 레퍼토리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처음 나간 곳은 관철동에 있는 라스베가스였어요. 그곳 사장님이 제가 고3 때 무교동에서 팔도강산이란 데서 막걸리 장사로 돈을 번 분이죠. 우리가 서울에서는 그래도 좀 알려져 있어서 그때 첫 출연료로 45만원 정도 받은 것 같습니다. 그 돈으로 우선 악기를 구입했죠. 엘카라고, 당시로서는 환상적인 악기를 구입했어요. 지금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근데 라스베가스에서 일 시작한지 1주일 만에 우리가 짤렸어요. 그때 우리가 록에 심취해 있었는데, 사실 거기선 춤추기 좋은 음악을 원했던 거죠. 그래도 사장은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고 우릴 좋아했는데, 부사장이 우리를 못 마땅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장이 어디 간 사이에 우리가 짤린 거죠. 뒷얘기는 나중에 영업 부장 김은태에게 들었어요. 암튼 우리도 나름대로 자극을 받아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멤버를 더 보강했어요. 김정선이 오승동(드럼), 김상복(베이스)을 데리고 왔죠. ![]() - 그때 저는 참 순수했을 때여서 베이스 놓는 게 너무 싫었어요. 베이스를 치고 싶었고 열심히 노력했거든요. 그래서 초기에는 베이스를 쳤는데 그 뒤로는 안 했죠. 제 위치가 싱어가 되었으니까요. Q: 그 동안 송골매는 블랙 테트라와 활주로의 결합으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전성기의 송골매에서 순수한 블랙 테트라 멤버는 구창모 님 한 분, 활주로 멤버는 배철수 님 한 분인 셈입니다. - 그렇죠. 홍익대생 블랙 테트라는 나 혼자이고, 항공대생 활주로는 배철수 혼자죠. 나머지는 다들 같이 활동은 했지만 학교가 다르거나 하니까. Q: 매니지먼트는 따로 없었고 자체적으로 해결했다고 들었는데, 방송국 쪽에서 좀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던 분이 있다면 어떤 분이 기억 나는지요? - 매니저는 없었어요. 방송에서 섭외 들어오면 우리 스스로 알아서 스케줄 잡고 움직였죠. 당시는 라디오 공개방송이 많았는데, 관련해서 MBC의 장명호 씨나 김일수 씨 같은 분이 기억나네요. 우리 6인조 된 이후에는 MBC의 김명수 씨나 조희진 씨 같은 분이 도움을 주셨죠. Q: 6인조 송골매가 된 이후에는 클럽에서 연주하는데 변화가 있었나요? - 6인조 되고 나서, 라스베가스 사장이 우리를 다시 고용했어요. 개런티는 마찬가지로 45만원 정도였고. 그런데 그때 마침 저희에겐 꿈의 무대인 무겐에서 섭외가 들어왔어요. 그것도 125만원에. 그땐 이미 사랑과 평화도 없고, 무겐도 옛날 같은 전성기는 지났을 때였지만. 하여튼 그래서 라스베가스 사장한테 이야기했더니, 조건이 좋아서 간다니까 뭐라고 붙잡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무겐으로 갔죠. 그런데 여전히 우리 레퍼토리는 록 쪽이 많았는데, 클럽에서 원하는 댄스 음악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보통 초저녁 8시 스테이지부터 올라가면, 웨이터들 통해서 손님들의 신청곡이 들어옵니다. "차차차 한 곡 해주십시오"라고.(좌중 웃음) 우리 레퍼토리 중에 차차차 리듬이 없단 말이에요. 산타나 곡이라도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만 해도 저희는 산타나보다는 좀 부수는 거, 그리고 춤추기 모호한 그런 곡들을 선호했어요. 그때 무겐 사장이 딕 훼밀리의 서성원 씨였는데, 우리 연주하는 걸 한 달쯤 보더니 얘기를 하더군요. 보니까 너희들은 여기보다는 다른 데가 낫겠다. 한 군데 추천해줄 테니 가보라. 그래서 같은 조건으로 간 데가 신촌의 우산속이었어요. 그곳은 정말 우리와 정서가 딱 맞더군요. 우리 레퍼토리를 하니까 다 좋아하는 거예요. 대학생들이 많아서 그런지. Q: 그때 레퍼토리 몇 곡만 좀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딥 퍼플의 곡들... 그리고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암튼 리듬은 다 있었는데, 다 "부수어 대는" 음악이었죠. 어쨌든 우리가 우산속에서 매일 연주하면서 실력도 많이 늘었어요. 연습을 겸한 셈이죠. 이때가 1980년, 1981년쯤의 일이에요. 그 후 1981년 말 쯤부터는 MBC "영 11"에 나가기 시작했으니까. Q: 1982년 1월에 나온 송골매 2집에서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대박을 터뜨렸는데요. 그 시기에 작곡한 건가요. 뒷얘기 좀... -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1979년에 제가 쉴 때 만들어 둔 곡이에요. 그때 쉬면서 습작으로 몇 곡 만들어두었죠.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디스코 리듬으로 발표되었지만, 원래는 바운스 리듬입니다. 느린 훵키 리듬이라 할 수 있겠죠. 그게 디스코 리듬으로 바뀐 이유는 2집 준비할 때 한창 케이씨 앤 더 선샤인 밴드(KC & The Sunshine Band)가 선풍을 일으킬 때였어요. "(Shake, Shake, Shake) Shake Your Body"라든가, "That"s The Way (I Like It)" 같은 곡이 인기가 좋았죠. 리드미컬한 기타 스트로크가 그 팀의 음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예요. 우리 취향은 록 음악이었지만, 조금 대중에 영합한 면은 있죠. Q: 훵키한 음악이라면 사랑과 평화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 그렇죠. 근데 사랑과 평화는 훵키 음악인데 케이씨 앤 더 선샤인 밴드보다는 한 단계 높은 흑인 음악이었어요. 1970년대 말에 베이스 초핑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사랑과 평화 연주로 처음 봤어요. 그때 베이스 주자가 이태리인 사르보였는데, 베이스를 정말 잘 치더군요. 김명곤 형이 자기네가 연주하면 "춤추는 애들 반, 연주 구경하는 애들 반"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저도 후자 중 하나였죠. 춤추는 게 아니라 연주 구경하는 거예요. 또 애버리지 화이트 밴드(Average White Band)의 곡을 연주하는데, 이근수 형하고 김명곤 형하고 둘이 색서폰을 연주하는데, 정말 감동이었죠. 그래서 한동안 흑인 음악, 훵키 음악에 완전히 빠진 적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아무래도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만드는데 좀 영향을 미쳤을 것 같네요. Q: 사랑과 평화의 김명곤 님과 뒤에 솔로 활동하실 때도 같이 작업하시고 친하게 지내신 것 같은데,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네요. - 블랙 테트라 음반 녹음할 때 알게 되었어요. 녹음 기사가 우리 기타 튜닝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김명곤 형이 와서 가끔 봐줬어요. 편곡 같은 건 우리가 다 했지만, 예컨대 코드 배열 같은 게 안 맞는 데가 있다거나 하면 어드바이스 해주고 그랬죠. 김명곤 형은 감각이 정말 뛰어난 분이었어요. 편곡으로 이름을 날렸죠. 편곡은 감각이거든요. 그런 인재가 일찍 죽어서 참 안타깝죠. Q: 말씀 들어보니까 사랑과 평화의 음악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 사랑과 평화의 음악을 참 좋아했죠. 그런데 오히려 "한동안 뜸했었지"로 가요계에 나온 걸 보고는 조금 실망했었어요. 제 기대치가 높았던 거죠. 클럽에서 라이브 하던 것처럼 정말 멋있는 음악을 기대했거든요. "한동안 뜸했었지"는 좀 가요 쪽으로 간 거니까. 우리가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한 거나 비슷한 거겠죠. 좀 대중적으로. 그렇기는 해도 "한동안 뜸했었지"는 대중가요사에서 센세이셔널한 리듬을 선보인 곡이잖아요? "솔로 가수로 활동할 때 "록"이라는 개념은 없는 거죠": 송골매를 탈퇴하여 인기가수가 되다 ![]() - 내막을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첫 번째는 음악적인 불만과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아마추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요. 바쁘기만 무지하게 바쁘구요. 우리가 보통 편곡을 자체적으로 다 했는데, 송골매 4집을 보면 외부 인사의 영입이 있습니다. 작품도 그렇고, 편곡과 연주에 있어서도. "아가에게"란 곡은 베이스 연주를 위대한 탄생의 김택환 씨가 했습니다. 제가 훵키를 좋아해서 훵키 리듬의 "아가에게"를 만들었는데, 송골매의 김상복(베이스) 씨는 록에 깊게 빠져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의 "Heartbreaker" 같은 곡을 좋아하고, 음을 깊게 하나씩, 한 소절씩 하는 취향이죠. 그러니까 훵키한 가벼운 터치가 안 되는 거예요. Q: 그런 음악적 불만이 있었는데 한밭기획의 양승국 님이 솔로로 독립하라고 부추긴 셈으로 봐야 할까요. - 맞아요. 돈 문제는 없었어요. 제가 솔로로 나가서 계약하면서 양승국(주: 한밭기획의 대표) 씨한테 한 푼도 받은 건 없으니까. 유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죠. 마침 그때 김정수 씨(후에 "당신"을 부른 바로 그 가수)가 솔로 활동을 하려고 양승국 씨한테 가 있던 때였어요. 김정수 씨를 통해서, 그리고 방송국 사람을 통해서 한 서너 차례 저에게 솔로 제의가 들어온 거죠. Q: 양승국 님이 소방차도 뒤에는 스타로 키웠는데, 그때 김정수 씨나 구창모 님 외에 스타로 키운 가수가 또 누가 있었나요. - 있었어요. 처음한 게 "부산 갈매기" 부른 문성재 씨에요. 양승국 씨도 대전 유성에서 나이트 클럽을 운영하면서 무대도 올라갔던 분이어서 음악을 좀 알았어요. 지금은 필리핀에 가 있다고 들었어요. Q: 결과적으로 솔로로 독립한 것을 후회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송골매로 활동하던 시절이 제일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잡음도 많고 문제도 있었지만 말이죠. 사실 제일 후회스러운 것은 음악 공부하러 유학 가지 못한 것이에요. 처음 솔로로 시작하는데 레퍼토리 선택을 할 때부터 제 자신과 부딪치더라고요. "희나리"도 사실 히트는 했지만, 제 취향의 노래는 아니었거든요. 물론 그 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일리가 있어요. 나이 들어서(도) 가수 생활 하려면 이런 레퍼토리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가요계 생리상 그게 틀린 말은 아니죠. 지금도 저를 찾는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이 "희나리"를 좋아하고 찾는 걸 보면... 그래도 그보다는 뭔가 발상의 전환을 해서 획기적으로, 아니면 음악적으로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으로 생각으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음악 공부를 못한 게 너무 아쉬워요. Q: 구창모 님은 단순히 노래를 잘 하는 가수뿐 아니라, 곡도 잘 쓰는 분인데, 솔로 활동하실 때는 직접 작곡한 곡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 벌써 솔로하면서 (바깥으로 얘기한 적은 없지만, 속으로)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마음이 굳어지니까요. (곡을) 못 써서 안 쓰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작곡이 되질 않는 거예요. 저는 원래 곡 쓰는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모티브 하나 딱 떠오르면 한번에 쭉 나오죠. "어쩌다 마주친 그대"부터, (이)승재 형에게 준 "아득히 먼 곳"도 그렇고, 가사 놓고 "싸비"라든지 후렴 부분의 모티브만 딱 떠오르면 그 다음 부분은 자연스럽게 따라 나왔던 곡들이에요. 그런데 솔로 하면서 곡을 쓰려고 하는데 안 되는 거예요. 첫째, 정신적으로 힘들고. 둘째, 솔로로 히트곡이 나오니까 매일 방송하고 지방 가고 그러니 시간적 여유도 없고. Q: 솔로 음반들을 보면, 김명곤, 이호준, 김기표 님처럼 기라성 같은 분들이 작편곡을 해주었습니다. 당시 거의 올스타 급인데요. - 김명곤, 김기표, 송홍섭, 김창남, 추세호, 최종혁, 이범희... 당시 유명한 뮤지션, 작편곡자들은 다 제 음반에 참여했죠. 그 중에서 제일 편했던 건 아무래도 김명곤 형이었어요. 김기표 형도 편했죠. 김기표 형의 주관이 "가수"는 대중에게 영합되는 음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룹은 또 다르지만. 아무튼 기타나 피아노 연주 실력이 아주 뛰어났죠. Q: 추세호 님의 곡 "희나리"와 "아픈만큼 성숙해지고"가 크게 히트했는데,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합니다. - 추세호 씨는 그때 곡을 받기 전까지는 몰랐구요. 제게 곡을 주던 시점이 "멍에"(김수희)로 날린 직후였어요. 나훈아 씨가 양승국 씨에게 "추세호 씨가 아주 좋은 곡을 갖고 있다"고 얘기했다고 하는데 그게 "희나리"였어요. Q: 솔로 시절에는 송골매의 연주가 아니었을 텐데 방송 경우 누가 연주를 맡아 주었나요? - 방송에서는 악단의 연주가 거의 대부분이었죠. 그렇지만 초창기에는 영웅시대라는 밴드로 하기도 했어요. 영웅시대의 멤버가 키보드 이호준, 베이스 박강호, 키보드 한정호, 드럼이 김희현 등이었죠. 기타는 여러 명이 쳤었고. 말하자면 조용필 형의 위대한 탄생과 비슷한 컨셉으로 운영하려고 했었죠. Q: 송골매 때랑 비교할 때 솔로로 활동하는 것은 어땠나요? 제가 보기에는 재능을 소모당한다는 느낌도 들었거든요. - 활동하는 건 똑같아요.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기능적으로는 좋은데 취향에는 안 맞는 거죠. 예를 들어 "희나리"가 수록된 1집 앨범에서 제가 타이틀로 내세우고 싶었던 것은 "이 세상에서"였어요. 이 곡도 록 음악이라고 말하기는 힘든 곡인데, 사실 솔로 가수로 활동할 때 "록"이라는 개념은 없는 거죠. Q: 솔로 앨범의 타이틀은 한자로 된 한 글자로 붙어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이렇게 음반 제목을 붙인 건 누구 아이디어였나요. - 아, 그건 제 아이디어에요. 그 정도의 재량은 있었죠. Q: 솔로 활동할 때 송골매의 멤버들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 인간적으로 불편한 것은 없었어요. 방송도 가끔 같이 했었고, 업소에서 같이 무대에 선 적도 있었고. "다른 일을 하다 보니까 가수라는 직업이 정말 좋은 직업이더라구요": 라스트 앨범과 라스트 투어를 준비하며 ![]() - 블랙 테트라 시절에는 투 트랙 녹음이었죠. 송골매의 음반부터는 1집은 8트랙 녹음으로 알고 있고 2집부터는 16트랙 녹음이었습니다. 녹음 기간은 정확히 몇 프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길지는 않았어요. 앨범 하나 당 믹싱을 포함해서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걸렸어요. 우리의 경우는 작품들이 이미 준비가 되어 있어서 길게 할 필요도 없었고... 연습은 업소에서 계속 한 셈이니까 따로 연습할 필요가 없었죠. 스튜디오는 송골매 시절에는 벽제의 지구 레코드 스튜디오를 사용했고 솔로 시절에는 거의 이촌동의 서울 스튜디오를 사용했습니다. Q: 배철수 님은 송골매의 음반으로 돈을 벌지 못했다고 말하던데 사실인가요? 사정을 잘 모르는 저희로서는 저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음반으로는 돈을 못 벌었죠. 계약금 받는 것으로 끝이었어요. 송골매가 "어쩌다 마주친 그대"로 히트를 치니까 보너스라고 50원짜리 동전까지 포함해서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임 사장님 집이었는데, "음반 좀 팔렸다"고 말하면서 장롱 속에서 꺼내 주었어요.(웃음). 보너스도 2집 음반에 대해서만 받았지 그 다음부터는 없었어요, 사실 제가 솔로로 독립한 것에 이런 점에 대한 불만도 없지는 않았어요. Q: 이런 것까지 물어봐서 죄송합니다만 송골매 내부에서 돈 문제로 불만이 있었다는 말은 아닌 거죠? - (단호하게) 그런 건 없었어요. 우린 정확히 분배했어요. 단, 그런 건 있겠죠. 제 경우 송골매가 지구 레코드와 계약한 다음에 송골매에 합류한 것이니까 저는 송골매가 받은 계약금과도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그때는 일정 기한으로 계약을 하던 때라서 저 개인적으로는 지구 레코드와의 계약에서 아무 관계가 없었던 것이죠. Q: 이것도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인데 송골매 시절 단독 리사이틀은 어느 정도나 하셨는지요? -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1년에 한 두 번은 했어요. 지방에서도 몇 번 했었고. 그런데 그때만 해도 공연 문화가 활성화되지 않아서 단독 공연보다는 여러 그룹이 나오는 단체 공연이 많았어요. 단독 공연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 수입원은 여전히 밤무대였었죠. Q: "밤무대"의 경우 어느 곳에 주로 출연했는지요? - 초기에는 신촌의 우산속에 출연했는데, 송골매로 히트를 치고 나서 무교동의 그림자, 이스트 관광호텔, 신촌의 컴88에도 있었지요. 그때 그룹(밴드)을 유지하려면 돈은 벌어야 하는 입장이니까 이른바 "가께모찌"라고 하는 동시출연을 세 곳이나 한 적도 있어요. 1982년에 컴88, 이스트 관광호텔, 국일관 이렇게. 그러다가 조금 "쉬자"고 말한 다음 크라운 관광호텔과 세종 관광호텔에 나갔죠. 세종 관광호텔 나갈 때 1,500만원 정도의 개런티를 받았는데 거의 최고였죠. 제가 아직 송골매에 있을 때 하이야트 호텔에 출연한 적도 있고, 풍전 호텔은 한참 뒤 제가 나간 다음에 나간 걸 거에요. Q: 밤무대에서 일을 하지 않고 그룹(밴드)을 유지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 당시 한국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인가요? - 안 되죠. 그룹 사운드로는 그 당시에는 불가능했죠. 저 같은 경우 밤업소를 되게 싫어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지금이라면 앨범에서 수익이 생길 텐데 그때 당시는 인세 개념도 없었죠. 그때는 제작 풍토가 그랬어요. 계약금 주고 보너스 어쩌다 주는 게 다였으니까. 그걸 두고 "어수룩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Q: 그러면 음반이 몇 장 팔린지 본인들은 알 수 없었나요? 정확한 수치야 모르지만 대략 어느 정도라는 감도 잡히지 않았나요. - 몰랐어요. 송골매 2집 음반 경우 몇십 만장 팔렸다는 소리만 들었지만 그건 임정수 사장만 알고 있지 아무도 모른대요. 솔로 했을 때는 보너스를 받았어요. 보너스란 것도 주면 받고 안주면 못 받는 거죠. Q: 김창완 님 인터뷰를 했는데요. 산울림은 밤업소는 안 하셨다고 하던데요? - 오히려 지금은 라이브 카페도 여러 곳 생겨서 일을 할 수 있는 데가 많아졌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전부 춤만 추는 곳밖에 없었으니까요. 산울림도 인기는 있었지만 마땅히 설 무대가 없었던 거죠. 그러고 보면 1970년대에 있던 오비스 캐빈이나 이브처럼 라이브 하우스가 사라져 버린 거예요. 대마초 파동이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친 것이 지대한 것이죠. 1981년에 일본에 갔는데 그곳에는 밴드가 서는 곳은 "음악을 감상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던데 한국은 밴드가 서는 곳이면 "춤추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니까요. Q: 결국 1990년을 마지막으로 구창모 님의 이름을 대중음악계에서는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큐직"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지막 음반(5집 앨범)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슬픈 연정"을 타이틀로 한 5집 음반은 제가 직접 제작한 첫 음반이에요. 그때 (김)명곤이 형이랑 같이 반포에 사무실 차리고 둘이 같이 제작한 것이에요. (김)명곤이 형이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죠. 그때 (김)명곤이 형이 최고의 편곡가였고 그 형하고 매일 같이 생활했었어요 집도 같은 동네고 사무실도 같았으니까. 프로덕션 이름 큐직(Kju:zik)인 것은 K랑 뮤직의 합성어에요. 저랑 (김)명곤이 형 이니셜이 K니까... 그 음반이 1990년 3월에 나오면서 잘 팔리고 인기 순위도 죽 올라가는데 5월에 PD 비리 사건이 터졌어요. 그래서 그 전에 홍보를 한 것이 물거품이 된 것이죠. 그 사건이 음악계를 떠나는 결정적인 동기를 만들어 준 거예요. 왜냐하면 그때 처음 내가 제작자가 된 것인데 그 꿈이 이 사건으로 완전 산산조각이 나 버렸으니까요. Q: 그러면 5집 내고 소련으로 가서 사업을 하면서부터 음악에는 관심을 끊고 지내셨나요? - 객지 생활을 했으니까 음악을 듣기는 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딜러 역할을 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중국에 한국의 드라마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쁠 때인데 사스(SARS) 때문에 중국에 못 가고 있습니다. Q: 음악을 하지 않고 음악과 무관한 일을 했을 때 심정이 어떠신지요? 조금 복합적이었을 것 같은데... - 초창기 때는 새로운 세계이니까 그것도 흥미롭더군요. 제 성격에서 오는 면도 있겠지만... 그런데 다른 일을 하다 보니까 가수라는 직업이 정말 좋은 직업이더라구요.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네임 밸류가 있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 하면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잖아요. 언젠가 한번은 태진아 씨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러더군요. "아니, 그 아까운 재능을 가지고 왜 썩혀 두느냐고. 방송만 한 달에 서너번 하면 (업소 뛰면서) 한 달에 몇천 만원씩 버는데 왜 그걸 썩혀두고 사서 고생하느냐"고. 근데 저의 장점이자 단점이 뭐가 한번 딱 마음에 굳어져서 꽂히면 거기서 벗어나질 못해요. 그래서 송골매의 재결성도 마무리를 짓자는 의미니깐요 Q: 송골매 재결성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 멤버들끼리 작년에도 만나고 연초에도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는 했어요. (배)철수나 저나 각 멤버들한테 도움이 되는 일이고, 그 다음 송골매라는 존재가 어쨌든 우리 대중음악에서 그룹 사운드로서 한 페이지는 차지했다고 보거든요. 그걸 이렇게 무의미하게 방치하는 것보다는 한번 마무리를 짓는 것이 의미있다고 봐요. 제가 솔로 가수로 나오면서 송골매가 색깔은 약간 변형되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오리지널 멤버가 많이 모여서 "라스트 앨범"과 "라스트 투어"로 마무리를 하고 싶어요. 앨범은 베스트 형식에 신곡을 몇 개 넣고. 사실 다들 바쁜 상태라서 이게 실현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가 문제겠지만. 그런데 제가 이 필드가 아닌 다른 필드에 있어서 음악과 함께 돌아갈 수 있는 모티브가 생겨야 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거예요. 아무튼 "해 보겠다"는 사람들의 조건이 다 맞으면 되는 것이겠죠. 누군가 리드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죠. 이응수 씨도 움직이고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죠. Q: 다시 음악을 해 보겠다는 생각이 든 건 어떤 동기에서인가요? 한동안 음악을 하지 않으셨는데... - 이제 나이도 들어가고 여기서 더 구겨지기 전에(웃음) 한번 해 보려는 것이죠. 한동안 음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두 달이나 세 달은 투자를 해야될 겁니다. 사실 음악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은 매번 했는데 일에 발목을 잡히다 보니까 못했던 것이에요. Q: 그럼 재결성 된다면 라인업은 어떻게 구성되나요? - 몇 가지 방안이 있지만 "신송골매"가 있잖아요. 이건태, 이종욱, 이태윤 등. 아마 그렇게 되기가 쉬울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제가 송골매에서 나온 다음에 활동하던 멤버들에 저만 들어가면 되니까. Q: (다짐받듯) 재결성 꼭 하실 거죠? - (단호하게) 해야죠. 저희 팬들인 지금의 30~40대가 이제는 놀 줄 알고, 공연문화가 바뀐 것이 가장 고무적입니다. 가끔 가다 행사 같은 데서 제가 마지못해 노래부르면 다들 잘 노시더군요. 그런데 요즘이 조금 바빠요. 5월까지 뭐 한 가지를 추진하는 게 있는데 음악과 연관된 게 하나 있어요. 그게 잘 되면 음악으로 돌아오는 것이 빨라지겠죠. 그게 되면!!! 인터뷰를 마치고 골프연습장을 나설 때 카운터에서 일하고 있는 30대 초반 정도의 "언니"가 계속 우리, 아니 나를 뺀 구창모 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창모 오빠"라는 말이 입에서 나올 것만 같은 표정으로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아무튼 그 언니에게 부탁해서 구창모 님과 "기념촬영"을 했다. 송골매 재결성 공연! 실현될 수 있을까. 무조건 실현되어야만 할 텐데... ![]() |
첫댓글 이 인터뷰 올려주셔서 넘 감사해요~몇달전에 이 인터뷰 읽고선 넘 반가왔었어요..앞으로도 좋은 자료 많이 올려주세요*^^*
전 오늘에서야 이글을 읽었는데 정모때 오빠가 한 얘기가 여기에 다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