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산면 [藥山面, Yaksan-myeon]
전라남도 완도군의 중부 해역에 위치한 면이다. 주도인 조약도와 4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으로 고금도와 약산 연도교로 연결되어 있으며, 남쪽에 신지도가 있다. 주도인 조약도의 중앙에 삼문산(三門山, 399m)이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계류천들이 해안에 유입하면서 득암리 · 장용리 등의 마을을 이룬다. 면의 서남쪽 우두리 일대에는 넓은 간척지가 조성되어 있다. 동쪽에 공고지산(336m)이 있으며 북쪽 해안에 해동리와 포구가 발달하고 있다. 연안의 간석지에는 김과 미역의 양식이 성하다. 완도에서 '김'씨 성을 가진 어민이 김을 처음 양식하기 시작하여 '김'이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면 소재지인 장용리를 비롯하여 5개 법정리를 관할한다.
조선 시대 강진현에 속해 있었다. 1896년 설읍(設邑) 당시 이곳의 지명은 섬의 이름을 따서 '조약면'이라 하였고, 관동리 · 사동 · 하득동 등 1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고금면으로 편입되면서 우두리 · 장용리 · 득암리 · 해동리 · 관산리 등의 5개 리로 통합되었다. 광복 이후 1949년 고금면에서 다시 분리되면서 '약산면'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강진)에 "조약도(助藥島), 둘레가 95리이며 목장이 있다."라는 기사는 조약도 지명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보여 준다. 『해동지도』 등의 고지도에서 비교적 상세히 섬이 묘사되어 있다. 『동여도』에서는 '주위 95리'라는 주기와 함께 폐목장이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조약면 지명이 변한 사유에 대해 향토 자료에서는 "옛날부터 조약도의 산에는 약재가 많이 있어서 어느 산이든지 '藥山(약의 산)이다'라는 말이 있었기에 조약(助藥)과 뜻이 비슷하고 어감과 부르기 좋은 '약산'이란 말이 많이 쓰이기 시작하여 개칭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출처:(한국지명유래집
전라남도 완도군의 아름다운 섬 약산도
약산도는 해남반도와 고흥반도 정 중앙에 위치한 섬이다. 완도에 딸린 섬으로 완도항에서 동북쪽 약 18㎞ 해상에 떠 있는 섬이다. 약산도로 가는 뱃길에 파도가 높았다. 갯바람이 거세게 불어올 즈음에 긴 수염을 가다듬던 마도로스가 조타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섬 여행을 가는 목적으로 일러주자 “저 섬은 소죽도, 그 옆 섬은 대죽도....” 그렇게 약산도 소개하기 시작했고, 양식장을 지날 때는 다시마를 따고 있으며 그 옆이 전복 양식장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다시, 저 섬은 금당도...라고 하면서 알아서 돌아가는 전축판처럼 익살스런 투로 섬의 유래 등을 친절히 안내해주었다.그렇게 철부선이 향하는 약산도는 고려 때 영암군 탐진현, 조선 때는 강진현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완도군 소속으로 돌아왔다. 소속이 자주 바뀐 데는 생활권이 강진에도 편리하고 완도로도 편리한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약산도는 고금도와 최근 다리를 이었고 고금도는 다시 강진군 마량포구로 다리를 잇고 있다. 머지않아 강진에서 승용차로 이들 두개 섬을 연이어 건널 날이 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해남반도와 연결된 완도와도 지리적으로 가까이 연결돼 바로 육지로 드나들 수 사통팔달의 섬이 되고 있다. 1946년 해방 이후 고금면에서 분리돼 독립 면소재지 섬이 되었는데 “약재가 많은 산”이라는 뜻에서 ‘약산(藥山)’이라 부르게 됐다. 옛날에는 조약도(助藥島)라고 불렀다. “약을 수북이 담아 일한다”는 뜻이다. 즉, 조선시대 중국에서 약용식물을 탕제로서 많이 수입해 왔는데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이 섬에 약초를 이식했던 것. 그렇게 약산도는 이조왕가의 약용식물 재배단지가 되었고 서민들은 약탕에 약을 끓이는 ‘조약도 사람들’이 된 것이다.
산마다 길마다 약초가 널린 섬
그렇게 유난히 약초가 많은 섬, 약산도. 남도 지역 섬 이름 가운데 ‘약(藥)’자를 지닌 섬은 이곳뿐이다. 약산도 본섬은. 해발 356m 장룡산. 이 산자락에는 삼지구엽초 등 130여종의 약초 군락지가 있다. 어디 군락지 뿐이랴. 산자락 주변 길에도 탱자나무, 보리수, 구절초, 참빗살나무, 노루발, 황련, 야생 도라지, 더덕 등의 약초가 널려 있다. 여전히 ‘조약도’로서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셈. 특히 이 섬에서 알아준 약초가 바로 삼지구엽초이다. 삼지구엽초는 강장제 약초로서 3개의 가지에 3개씩의 잎이 나있다. 익은 것은 뿌리가 노랗다. 건강한 섬에서 자란 이 약초를 먹고 천연림이 우거진 섬 절벽에 서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던 염소. 그가 바로 약산도에서 방목하는 흑염소이다. 사계절 약초를 먹고 푸른 바다와 호흡하며 사는 흑염소.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한 듯 하다. 사람도 먹기 귀한 천연 약초를 뜯어먹고 사는 흑염소이니, 약산도를 ‘약초를 먹고 사는 흑염소의 섬’으로 부르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이 섬에는 1200여 가구가 산다. 김과 미역, 다시마 양식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데, 독특하게도 산에서 약초를 기르고 그것을 먹이로 흑염소를 길러 특산품으로 내다팔고 있다. 섬에서의 흑염소를 방목한 것은 약산도가 국내 최초. 이후 생일도 금일도 등 인근 섬과 통영 앞바다에서 1시간 걸려 닿는 국도에서 야생 흑염소를 선보인 바 있다. 약산도 흑염소는 약초를 먹고 자라 혀가 까맣고 산악지대에서 생활하다보니 무릎이 까져 털이 벗겨져 있는 게 특징이다. 어떤 염소들은 벼랑으로 떨어져 죽음을 맞기도 한다. 육지의 다른 염소와는 달리 야성이 강해 아주 민첩한 모습을 보인다. 분명한 것은 섬 안에는 흑염소의 천국이라는 사실과 이들 흑염소는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다른 가축들처럼 주인을 잘 따른 편이다. 주인이 휘파람을 불면 바로 모여든다. 그리고 날이 저물면 알아서 집으로 돌아올 줄도 안다.
돌과 약초와 동백숲이 조화를 이룬 해변
흑염소는 옛날부터 한약재와 함께 다려 빈혈쇠약, 산후 조리 등에 좋은 보약으로 통했다. 그래서 궁중 진상품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역사를 이어온 흑염소를 남녀노소가 먹는 보약으로 대중화시키기 위해 약산도 젊은이들의 노력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들은 영농법인을 만들어 약산도만의 경쟁력 있는 특산품으로 만들어 큰 소득원으로 삼고 있다. 현지에서 흑염소탕(6,000원), 수육(20,000원) 등을 맛볼 수 있다. 약산도에는 약초와 함께 대나무가 많다.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생하는 섬 죽도(竹島)가 있고 대나무가 울창한 마을이라고 하여 죽리, 죽생리, 죽선리가 있다. 약산도 여행길은 평일도 도장항에서 건너갔는데 당목항에서 하선했다. 당목은 옛날부터 고흥군과 금일읍을 연결하는 포구여서 포촌이라 불렀는데 포촌을 내려다보는 곳에 오래 된 당나무가 있어서 당목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 딱 버티고 선 이 나무는 영락없이 나그네의 발길을 끌어당길 정도로 묘한 마력을 지닌 나무이다. 위엄이 그만큼 당당했다. 당목항에서 우측 섬 모퉁이로 돌아가면 가사해수욕장이 나온다. 약산도의 유일한 해수욕장이다. 모래 질이 곱고 경사가 완만하다. 리아스식 절벽 풍경과 백년산 동백나무 숲이 조화를 이룬 300여m의 아담한 해변. 동백나무 아래는 수많은 약초가 맑은 공기와 계곡의 맑은 물을 마시며 자생하고 있다.약초가 많은 산이라고 해서 약나무산이라고 부른다. 이 숲에서 삼림욕 냉수욕까지 즐길 수 있다니 해수욕과 더불어 여행 맛을 더욱 배가시켜준다. 또한 바닷가 주변 민가에서 이곳 특산품인 흑염소와 토종닭 요리도 맛 볼 수 있어 멋과 맛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바닷가의 추억 여행이 아닐 수 없다.
돌이 비둘기처럼 반짝이고 해저에서 유물이 발견되고
다시 해변을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목항 너머 섬 끝자락에 조그만 섬 하나가 떠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예로부터 섬어두지(섬어장머리)라 부른 곳으로 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이란다. 바다 동쪽이라 하여 해동리라고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이름을 다시 어두리(漁頭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1983년에는 이 앞바다에서 청자 등 3000여 유물이 인양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곳에 느티나무 세 그루가 엉키어 한 나무가 되어 자라고 있다. 이를 삼성수(三姓樹)라고 부른다. 어두리에 처음 입주한 김씨, 박씨, 권씨 세 성씨가 결의를 맺고 형제로 살기로 하면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각기 한그루씩 심었다는 것. 270년 동안 거목으로 자랐으나 결국 고목으로 넘어진 후 1960년 그 자리에 은행나무를 심어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제를 지내고 있다. 약산도 산에는 돌이 많다. 흑염소들의 몸이 성하지 않을 정도이니 말이다. 산에는 멀리서 바라보면 유난히 비둘기 떼들이 많다는 생각이 드는데 정작 가까이 다가서 보면 그것은 바윗돌 부스러기들이었다. 이 돌조각들이 산비둘기처럼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 것. 이런 흔적이 많은 바위를 일러 ‘꾸뜰바리’라 부르는데 지금은 비둘기 구(鳩)자를 붙여 구암리라 부르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분재 같고 수석 같은 섬들의 풍경
구암리에는 툭 트인 바다를 조망할 있는 약산도 최고봉인 해발 399m의 망봉이 있다. 이 산에는 진달래 군락지가 있다. 진달래 숲에 취해 내려다 본 올망졸망한 작은 섬들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그저 푹 취해 한동안 넋을 놓을 수밖에 없다. 평온한 바다에 사뿐히 내려앉은 섬들마저 적막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북으로는 마량포구와 멀리 영암 월출산이 보이고 동으로 눈을 돌리면 거금도 금당도 평일도 생일도가 한 그루의 분재처럼 아담하게 다가선다. 남으로 신지도와 혈도, 갈마도가 잘 닦아 놓은 수석처럼 푸른 바다에 꽂혀 있다. 맑은 날엔 청산도 추자도와 제주도가 갈매기 나래짓처럼 가물가물 파도에 출렁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옆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명사십리 신지도 그리고 건너편 완도의 최고봉 상황봉이 바로 앞산처럼 가까이 다가서고 그 아래에 노화도, 보길도, 소안도가 또렷하게 들어온다. 이들 섬들이 푸르게 일렁이는 드넓은 바다가 바로 다도해국립해상공원이자 남도바다 청정바다로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것이다. 이런 조망 포인트인지라 왜적과 해적들의 침입을 감시하던 봉우리로 사용했을 것은 분명한 일. 완도 앞바다에 떠 있는 신지도 최고봉 상봉과 맞은 편 장흥 최고봉 천관산에 불 핀 봉화를 이어 올려 조정에 긴급 연락망 역할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인근 산에는 이런 봉화를 올렸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어 약산도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의 섬이기도 하다.
돌 많아 농사 못 짓는 환경을 특산품 개발로 극복한 섬사람들
한편으로는 돌과 관련해 바닷가에 재밌는 바위 이름도 있는데 일명 ‘숭어바위’. 마을사람들이 ‘소리지끝’이라고 부르고 있는 해안에 숭어 떼가 한곳에 뭉쳐 있다가 소리지 끝에 있는 바위부근을 지날 때 이 바위 위에서 그물로 숭어를 많이 잡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밭농사가 어렵다는 뜻일 터인데 주어진 자연환경에 낙천적으로 순응하며 사는 약산도 사람들의 곧고 고운 정서를 읽어 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완도 지역 해변에 조약돌 해변이 많은 게 특징이기도 한데, 약산도 역시 이와 관련된 지명이 있었다. 이름하여 ‘작살기미’. 마을 동남쪽에 사투리로 작알(자갈)이라 부르는 곳으로 자갈이 많아 그리 부르고 있었다. 여동리 산중턱에는 ‘풍풍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서 뛰면 풍풍대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런 바위와 같은 곳이 경상도 삼랑진에 있는 만어사이다. 산사 앞마당이 온통 바위인데 돌로 두들기면 파도소리가 난다. 오래 전 바위였고 결국 지금의 계곡은 해수면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풍풍바위 역시 이런 파도에 씻겨 속이 빈 바위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섬 안에는 ‘큰굴’이 있었다.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소리를 지르면 툭 트인 바다까지 메아리친다. 굴 안에는 샘물이 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약수로 마시고 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돌이 이곳 섬사람들에게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넙고리 북쪽 산에서는 옥(玉)이 나온다. 이 마을을 옥산리(玉山里)라고 부르다가 해방이후 우두리, 다시 넙고리가 부르고 있었다. 해남반도에서 옥이 발굴돼 부자동네가 된 사례가 있듯이 이곳사람들도 옥구슬처럼 사랑이 구르는 행복한 세상을 맛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었다.
바다에서 배운 억척스러움과 섬마을의 빛나는 공동체 문화
그렇게 아름다운 섬, 약산도를 빠져 나오면 많은 생각이 스쳤다. 어찌 보면 조상이 물려준 착박한 돌섬인 것을, 황무지를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앞서간 섬사람들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약산도 사람들. 그 자체로 독특한 약산문화였다. 묵묵히 자연환경을 일구어 온 긴 세월 속에는 겸허함과 옥을 다듬듯 희망의 터전을 닦아나가는 도전정신이 배여 있었다. 다시 나그네를 태우고 포구를 선착장을 빠져나가는 철부선. 약산도 상징처럼 다가온 선장의 주름살과 흰 머리칼. 선장 김길동씨(72)는 스물다섯 살 때부터 올망졸망한 이런 섬들을 오가며 섬사람들과 삶을 함께 해왔다고 한다. 근 50년을 이런 바다에서 섬사람들과 성장해온 것.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항해하다 보면 암초가 있고 바람에 쏠려 뜻하지 않는 항로로 들어서 낯선 섬에 이를 때가 많다”면서 “섬사람들도 해적에게 빼앗기고 왜적에게 당하고 태풍에 밀리면서 돌산의 굶주림과 싸우는 이중고를 헤쳐 왔다. 그러면서도 온전히 후손을 이어온 것은 바다에서 터득한 억척스러움과 건강 때문이다”는 것. 영락없이 그랬다. 바다에서 온몸으로 배운 삶이 아니던가. 파도 위에서 삶을 찾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섬사람들이다. 고립된 섬 생활을 빛나게 하는 것은 사라지지 않은 마을 공동체 문화 타이기도 하다. 그럼 섬사람들과 섬을 항해하는 삶을 사는 선장의 그을린 주름살이 당목항 거목을 닮았다. 선장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키를 돌렸다. 선미 스크루에 포말이 파도를 감아 돌렸다. 약산도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등이 굽어 푸르고 질기게 출렁이는 포말들. 백말 무성하게 긴 뱃길에 포말이고 스러지고 있다. 그리고 다시 푸른 파도가 아무 일 없는 듯 바다를 수평으로 만든다. 그렇게 약초로 몸을 다스리고 바위처럼 굳은 마음으로 쓰디쓰고 짠 인생살이를 해쳐왔을 약산도 사람들. 그들의 삶을 이 바다는 되새김질하며 통통대고 있었다.
죽선리 마을회관 주차장
등산로 초입은 너른 포장길
약수터까지는 쉽게 오를수 있다
약산도의 상징인 흑염소 조형물로 약수터를 꾸며놨다
약수터 바위에 자생하고 있는 부처손
삼문산을 가기 위해 장용산을 경유한다
2022-02-08 작성자 명사십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