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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기행
김희선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금강산 행이 결정된 그날부터 입에서는 틈만 나면 ‘그리운 금강산’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 따라 마음으로 수없이 넘나들던 우리 땅이지만, 자유로이 갈 수 없는 곳이었기에 안타까움으로만 바라보던 그 땅을 이제 밟을 수 있다는 가벼운 흥분 속에서 몇 날을 보냈다.
1998년 6월 현대 고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한 뒤 그 해 11월 18일 금강호가 첫 출항을 했고 그 후 약 8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고 하는 금강산 관광은 이제 모든 관광이 육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20005년 2월 5일 (토)
아침 7시 밥을 먹고 가야 한다고 채근하는 남편 덕분에 든든히 아침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약속된 곳까지 차를 태워주며 이른 시간 체육사의 문을 두드려 등산용 지팡이를 구해 주는 남편에게 감사하며 봉화군 선발 학생 15명을 태운 관광버스에 들뜬 마음을 실었다. 영주에서 학생 18명과 인솔 교사를 태운 뒤 버스는 풍기 IC를 거쳐 신나게 고속도로를 질주하는가 싶더니 금세 강릉 주문진을 지나 푸르른 동해가 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짙푸른 바다 위를 흰 거품을 내며 달리는 작은 배, 어깨동무를 하며 떼를 지어 달려오는 흰 파도, 우리들의 여행에 동행이라도 하려는 듯 세차게 가슴팍으로 달려와 안기는 물결들의 입김이 마냥 뜨겁다. 3·8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매 바다는 산골에서의 맑은 삶과는 또 다른 아기자기함으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양양읍을 지나니 짙푸른 바다 저편에 연한 하늘빛이 맞닿은 수평선 너머로 흰 배가 유유히 떠간다. 마치 한 폭의 유화와도 같은 저 수평선을 바라보노라니 세사에 갇혀 있던 옹졸한 마음들이 세차게 기지개를 펴며 훨훨 날아오른다.
벌써 속초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저 멀리 눈 쌓인 설악산이 그 고고한 자태를 드러낸다. 여고 시절 수학여행 속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꿈처럼 고이 남아있는 저 웅대한 산. 실향민이 많이 살고 있다는 속초 시가지 저편에서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는 설악의 웅장한 모습이 아련한 그리움을 담아 쏴하니 바람을 몰고 내 가슴에 들어와 안긴다.
하얗게 세월 안고 말없이 손짓하네
굽이도는 능선 따라 드리워진 저 그림자
골골이 여울져오는 망향의 설움인가.
정겨움 가득 담아 벅찬 마음 추스르고
보고 또 바라봐도 가이없는 이 그리움
애잔히 사무쳐오는 그대 의연함이여.
세계 챔버리 대회를 개최했던 토성을 지나 고성군 동쪽 최북단 행정 관청이 있다는 간성읍을 거쳐 화진포 금강산 콘도 옆 안보교육관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각지에서 대표로 온 332명의 학생들과 교육을 받고 3시 5분 통일전망대로 향했다.
현내면 명파리의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임을 표시하는 ‘여기는 민통선입니다.’ 라고 쓰인 아치형 표지판을 지나니 해금강이 살짝 수줍은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저 멀리 낙타봉이 일만 이천 봉 중 처음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저쪽 터널 앞에는 끊어진 철로가 앙상한 뼈만 드러낸 채 속절없이 누워 있다.
통일전망대 동해선 남북 출입사무소에 도착하여 수속을 끝낸 후 우리는 33인승 작은 버스로 옮겨 탔다. 정각 4시에 “금강산은 아는 만큼 보고 가고 본 만큼 느끼고 간다.”는 안내 조장의 유창한 멘트를 들으며 차는 출발했다. 철책선 너머로 남북 분단을 질책하듯 사납게 달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남과 북 각 2km의 완충지역인 비무장지대(여의도의 11배나 되며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로 들어섰다.
이북 땅으로 들어서자마자 북쪽 군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양사언 선생이 사셨다는 어류가 풍부한 호수 감호가 나타나고, 아홉 개의 봉우리 구선봉이 신비스런 자태를 드러낸다.
조선 인민공화국. 북쪽 군인 두 명이 차에 올라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검열을 하는 동안 숨을 죽이고 앞만 주시하던 학생들이 그들이 내려가자마자 푸우 긴 숨을 몰아쉬며 농을 던진다. 두 팔을 힘차게 양 옆으로 내저으며 꼿꼿이 걸어가는 그 특이한 걸음걸이가 연민과 웃음을 동시에 자아낸다. 동족이면서도 이다지도 긴장된 눈빛으로 서로를 경계해야만 하다니-.
연녹색 철책이 쳐진 통일로를 지나며 바라보는 고성평야를 둘러싼 바위산들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다. 산 위에는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무수히 놓여 있다. 참으로 우리와는 상이한 모습들이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커다란 바위들이 기이한 형태로 굴러 떨어지지도 않고 덩그러니 얹혀 있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난다. 이제 산들은 점점 흙과 나무를 껴안은 그 본연의 포근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북한 주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 썰매를 지치는 아이들의 모습이 저만치 보인다. ‘자력갱생’ 등의 글씨가 붉은 짐승처럼 웅크리며 우리를 바라본다. 우측에는 양지마을, 좌측에는 금강산 온천물이 나온다는 온정리 마을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죽 늘어서 있다.
북측 사무소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장전항을 지날 제 저쪽 천불산 산봉우리 너머로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해금강 호텔 앞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차를 타고 온천 빌리지에 들어 예천여중 도덕과 박선생님과 함께 여장을 풀었다.
다시 온정각으로 나가 뷔페로 저녁 식사를 한 후, 온정 봉사소에서 타 지역 선생님들을 만나 횟대어 타조꼬치 안주로 담소를 나누며 금강산 첫날밤의 낭만을 즐기었다. 이어 온천장에서 따끈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꼭 한번 보고 싶었던 금강산을 찾아왔다는 행복감으로 스르르 온몸이 녹아드는 듯했다. 노천탕 위를 수놓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선녀이런가, 저 물안개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착각에 빠져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웃음이 흠뻑 배어 나왔다.
이북 땅에서 이북 동포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다니. 북한 땅에서의 이 밤은 고요히 향내를 풍기며 자꾸만자꾸만 깊어 간다. 잠들기 전 MBC 9시 뉴스와 SBS 토지를 보며 북한 땅에서 이런 시간을 가지게 됨에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2월 6일 일요일
온천장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8시 30분 온정각 앞에서 금강산을 향하여 출발했다. 겨울 등반은 난생 처음이라 조심스럽고도 기대에 찬 산행이었다. 모두들 아이젠을 착용하고 양측에 미인송 또는 금강송, 적송, 홍송, 황장송 등으로 불리는 곧은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눈길을 따라 올라가니 향토음식점 목란관이 나타났다.
눈 쌓인 길을 조심조심 걸어 올라가서 사면이 바위에 둘러싸여 오직 하늘만 보인다는 앙지대에 이르니, 산 위에 신기한 형상으로 올라앉은 코끼리바위, 자라바위, 도마뱀바위에 얽힌 전설을 북측 남자 안내원이 친절하게 들려 주었다. 좀더 올라가니, 막힌 담장이라 불리던 곳이 대홍수로 인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자연 돌문이 되었다는 금강문이 나타났다. 어떻게 이런 기묘한 돌문이 저절로 생겼을까 감탄하며 고개를 드니, 옥황상제에게 처벌 받은 토끼이야기에 등장하는 큰 바위가 머리는 토끼 몸은 거북 형상을 하고 억울한 듯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마치 돌성을 쌓아 놓은 듯한 산 위에는 소나무들이 성을 지키는 장수와도 같은 모습으로 씩씩하게 도열해 있었다.
금강문을 지나 상쾌한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오르노라니, 옥 같이 맑은물이 흘러내린다는 옥류폭포 아래에 옥류담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옥류동이 나타났다. 세존봉 천화대와 옥류봉에 둘러쌓여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옥류동계곡의 비경에 온 마음이 사로잡힌 채 신선과 선녀들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무대바위 위에 올라서니, 마치 무대 위에 선 선녀라도 된 듯 흥에 겨워 한 소절 노랫가락을 뽑아내고 싶었다.
금강산의 4대 명폭 중 하나로 봉황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하다는 비봉폭포와 물이 흐를 때면 봉황새 한 마리가 춤을 추는 듯하다는 무봉폭포를 지나니, 금강산의 꽃과 나무를 잘 가꾸라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도 자신의 힘만 믿고 토끼가 열흘 할 일을 자신은 하루 만에 할 수 있다는 자만감으로 놀고 먹다가 결국 아무 일도 못 하고 토끼에게 욕을 먹고 있는 중이라며, 토끼와 곰이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의 바위에 대해 북측 여안내원이 특이한 억양으로 안내를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그 독특한 루정건물 배치 수법과 건축술로 우리 민족의 건축적 기교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인 관폭정이 높이 자리하고 있었다. 관폭정에서 바라보는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인 구룡폭포는 추운 날씨 탓에 얼어붙어 있어 그 장관을 볼 수 없음이 무척 아쉬웠다. 더구나 눈이 쌓여 8개의 담소가 있는 상팔담을 볼 수 없다 하니 더더욱 아쉬운 마음으로 내려오다 목란관에서 꿩속을 넣은 만두와 생선 튀김, 녹두전과 함께 닭육수로 맛을 낸 냉면으로 마음을 달랬다.
도중에 잠시 차에서 내려 신라 법흥왕 519년 보운선사가 창건하여 6.25때 소실되었다는 신계사터에 들렀다. 지금 복원 중이며 2007년에는 완공 예정이라는 신계사에는 남한 스님이 한 분 지키고 계셨다. 안내를 해 주시는 스님의 손짓을 따라 바라본 저편 산위에선 더없이 정겨운 눈빛의 문필봉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후 4시부터 40분간 쇼핑을 하며, 온정각 내 안내데스크에서 카드 충전을 받을 수 있다지만 아무래도 환전을 해 온 것이 백번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1시간가량 노천탕에서 온천욕을 즐기고, 6시부터 국제 교예 축전에서 여러 번 대상을 수상한 세계 최고 수준의 교예단인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흥겹고 아슬아슬하게 진행되는 공연은 그 기예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예술적 면모를 한껏 과시하여 교예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7시 30분까지 진행된 공연을 마치고 서로 손을 흔들며 또 만나자고 인사할 때는 가슴이 찡해왔다. 분단 된 민족 간의 안타까운 작별.
온정각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한 후, 면세점을 둘러보고 숙소에서 아쉬운 마지막 밤을 보냈다.
2월 7일 (월요일)
아침 6시 20분에 기상하여 온천장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8시 10분 온정각을 출발하여 삼일포와 해금강으로 향했다.
온정각 앞에는 4월쯤 완공 예정이라는 꼭 같은 모습을 한 제2의 온정각이 건축 중에 있었다. 날로 늘어가는 관광객들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골프장도 건설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 땅을 현대 아산이 50년 간 북측으로부터 대여했다고 한다. ‘참 많은 돈이 여기 투자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창 왼편으로 15세기에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가 찾아 왔었다는 온정리 마을이 보인다. 이 곳 온천욕은 관절염, 미용, 피로 회복에 효과가 탁월하다고 하니 관광객들이 한 번쯤 그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할 만도 하다.
금강산은 음기가 무척 강한 곳이어서 음기와 양기의 조화를 위해 한 달에 한번씩 온천탕의 남탕과 여탕을 바꾼다고 한다. 저쪽 터에는 이산가족 면회소도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오른쪽 창밖엔 운무에 가려진 금강산 봉우리가 하얗게 솜이불을 덮은 채 위엄 있게 서 있다. 저 기이한 봉우리들을 뒤로 하고 해금강으로 향할 제 금강산은 뒤에서 자꾸만 내 마음을 붙들어 세운다.
군데군데 직립을 한 북측 군인들이 눈에 띈다. 초라해 보이는 초등학교를 지나며, 북한에서는 고등학교까지 11년 간 의무교육 기간이고, 대학을 진학한 학생도 무상 교육을 받는다고 안내원이 얘기한다.
해금강으로 가는 길 양 옆에는 참대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왼편에 삼일포리 마을과 학교가 보이는데, 그 어느 곳에서든 쓰레기 한 조각 눈에 띄지 않았다.
금강산의 줄기가 바다까지 뻗어나갔다 하여 이름 지어진 해금강에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여 520여 종의 풍족한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청파미, 청송미, 기암괴석미, 금사미, 해당화미로 표현되는 해금강에는 향로봉, 촛대바위, 칠성, 부부, 동자, 누룩, 고양이 등의 갖가지 바위들이 해만물상을 이루며 밀려드는 파도 위에 누워 있었다. 향로봉과 촛대 바위로 인해 해금강의 문이 자연적으로 생겨났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향로봉을 한바퀴 휘돌아 사진 촬영을 하고는 ‘바다의 금강’이라 불리는 해금강을 뒤로 하고 삼일포로 향했다.
해금강은 바다이지만, 삼일포는 둘레가 8km인 호수로서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삼일포에 도착하여 단풍관을 잠시 둘러보고 연화대(연화대 밑의 바위가 연꽃처럼 생김)를 지나 장군대에 오르니 소나무가 우거진 와우섬(위에서 보면 소가 누워 있는 듯한 형상임)이 내려다 보였다. 옛날 왕이 관동팔경을 하루씩 보기로 하고 길을 떠났는데 이곳의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 경치에 반해 3일을 머물렀다 하여 삼일포라 한다는 이 호수 가운데는 작은 섬 단소암과 사선정이라는 작은 누각, 그리고 네 명의 신선이 가무를 즐겼다는 무선대가 있었다. 호수가 어찌나 넓은지 바다로 밖에는 보이지 않고, 호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길 중간 중간 서 있던 북한 안내원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해 왔다. “남쪽에서는 아이들을 많이 낳지 않으려 한다는데 왜 그런가요?” “남쪽에서는 영재교육을 어떻게 시키지요?” “왜 남쪽 학생들은 바지를 찢어 입고 다니지요?” 등등 갖가지 질문과 함께 넌지시 내뱉는 특유의 억양 속에는 자기네 식의 사고가 합당하다는 의도가 다분히 숨어 있었다.
돌아오는 길의 차창 밖에는 빨간 깃발을 든 북한 군인들이 드문드문 서 있다. 차 안에서 사진 촬영을 하면 그들에게 적발되는데 빨간 깃발을 위로 들면 모든 차가 정지해야 한다. 사진을 찍다 그들에게 적발되어 벌금을 내거나 카메라를 빼앗기게 되는 일도 있었다 한다.
또 다시 창밖에 나타나는 금강산의 봉우리 봉우리 그 절묘하게 솟아있는 신비스런 자태는 내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다. 능선으로 뻗어내려 골짜기를 이루고 첩첩이 둘러서 기묘하게 솟아있는 산. 그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가슴 한켠으로 아련한 그리움을 빼곡히 재워둔다.
만 이천 봉을 역력히 헤려 하니
봉마다 맺혀 있고 끝마다 서린 기운
맑거든 좋지나 말거나 좋거든 맑지 말거나.
- 정철의 ‘관동별곡’ 중에서 -
오후 1시 26분. 수속 절차를 밟기 위해 북측 통행 검사소에 도착하니 "금강산 관광객들을 동포애의 심정으로 환영한다.”라는 문구가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여 있었다. 동포애의 심정이란 말이 따뜻이 다가온다. 짐 검사를 받고 2시 11분 다시 출발했다. 길가로 보이는 금강산의 구름에 가리워진 봉우리가 정겹기만 하다. 절묘한 봉우리 봉우리들. 멀리서 바라보는 금강산은 수줍은 듯 살며시 몸을 가리며 한없이 신비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운무 안고 베일에 싸여 자꾸만 멀어지는데
돌아서는 등허리에 하얗게 흘러내리는
그대 아쉬운 눈빛
꿈속에나 마주보던 신비스런 그대 모습
첩첩이 둘러앉은 그윽한 그 몸짓은
아쉬움 삭여가며 다시 만날 기약인가
구름 속에 몸 가린 채 숨조차 죽여 가며
차마 떠나보내지 못할 무거운 침묵
물기 머금고 서 하염없이 바라보다
흐린 하늘 저 너머로 잿빛 운무 드리운다.
산은 줄곧 물기 머금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철길 위로 열을 지어 걸어가는 북한 군인들의 얼굴이 생각보다 밝은 듯하다. 저네들끼리 농이라도 주고받는 걸까? 이틀 전 올 때와 같이 북측 군인들이 차량마다 올라와 검열을 한다. 그땐 모두들 긴장하고 무서워서 감히 얼굴을 바라볼 엄두도 못 내었는데 그 사이 조금은 친근감이 생긴 모양이다. 표정도 덜 긴장되고 그 특이하게 흔들어대는 두 팔과 다리도 덜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이제 군사분계선을 지났다. 오랜만에 보는 우리 군인들의 모습이 무척 반갑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차는 비무장지대를 지나고 통일전망대를 향해 간다. “어서 오십시오. 금강통문입니다.” 라는 문구와 함께 잘 생긴 우리 국군장병의 모습이 정겹다. 이제 우리 이정표가 여기저기 보인다. 그동안 우리를 안내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은 현대 여직원 조장이 불러주는 "다시 만납시다” 라는 노래를 들으며 2시 54분 동해선 남북 출입 사무소에 도착했다.
3시 25분 또다시 남북출입사무소를 출발 구정 연휴의 혼잡을 피하여 진부령을 넘어 국도로 돌아오며, 2박 3일의 뜻 깊은 여정이 피곤함보다는 뿌듯함으로 다가왔다.
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 소동파 -
千丈白練 萬斛眞珠
(천 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흩뿌렸는가)
- 최치원 -
송나라 시인 소동파나 신라 때의 문인 최치원 같은 대가가 아니더라도 금강산에 들면 누구나 시인이 될 듯도 하다.
유홍준의 “나의 북한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북한 답사가 외국 여행과 무엇이 다르더냐고 누가 물으면 하나는 외국어 통역을 하지 않아도 말이 잘 통한다는 점, 다른 하나는 전화를 할 수 없어 완벽하게 차단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했듯이 통일전망대에서부터는 휴대폰을 소지할 수가 없으니 가족과도 연락두절 상태가 되어버리는 점이 답답했다. 그러나 이번 북한 여행길은 우리 땅 우리 민족이라는 친근감이 함께 한, 결코 생소하지만은 않은 정겨운 여행길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안타까운 분단의 벽, 너무나 상이한 사상의 무게, 그 가운데서도 미소 띤 얼굴로 “반갑습네다” 노래를 불러주는 여안내원을 보며 무척 차가워 보이는 그네의 두 손을 꼬옥 붙들어 주었다. 툭 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민족의 비애, 알게 모르게 가슴 깊숙이 박혀있는 갖가지 미운 털,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만은 없는 애잔한 정.
물이란 물은 다 얼어 있어 폭포나 담소의 비경을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눈 쌓인 금강산을 아이젠을 착용하고 발이 푹푹 빠져가며 감상하는 맛도 나름대로 멋이 있었다. 상팔담의 아름다운 경치와 만물상의 절경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아직은 가지 못하는 내금강의 비로봉 아니 백두산까지도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마음껏 갈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하며, 햇살 아름다운 어느 날 또다시 금강산을 찾아보리라 생각하며 내 포근한 보금자리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