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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해남 2코스 제2부
송지천-백포방조제-두모마을-중정마을-사포마을-관동방조제
20220514
제1부에서 이어짐
1.백포와 관동방조제, 해남과 진도를조망하는 환희
서해랑길 2코스를 송지천 다리에서 다시 이어간다. 백포방조제 아래 들길을 걸었다. 농부들이 기계로 모를 내고 있다. 미안하여 빠르게 지나왔다. 백포방조제로 올라와 보면 서해랑길 2코스의 명품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현산천은 서해 바다로 흘러들고 있다. 1925년 백포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은 모두 바다였다고 한다. 그래서 두모포구의 두모산과 두모마을은 섬이었으며 바다가 백포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방조제로 인하여 드넓은 간척농토와 습지가 생겨났다. 동쪽으로는 두륜산이 우뚝하고 그 오른쪽 움푹 파인 오소재에서 이어지는 주작산과 덕룡산이 아련하게 옛 추억을 되살린다. 남쪽으로는 해남 전체를 아우르는 듯 길게 남북으로 벋어내리는 달마산 능선이 가슴을 싱그럽게 한다. 풍경 조망은 이 풍경만이 전부일까?
백포방조제에서 걸어온 길을 조금 더 조망한다. 서해랑길 2코스 미학마을과 그 앞 어란리 들녘과 우근마을의 보리밭과 산 너머의 어란진이 가늠된다. 그래서 우근마을을 거쳐 학가마을 앞을 통과하여 이곳으로 이르는 해안길이 분명히 조망되고, 바다로 길게 삐쳐나온 학가항과 그 앞의 앙증스런 중도 섬이 바로 앞에서 춤을 추는 듯하다. 서해 바다를 응시하면 서해 바다의 길목을 지키는 진도 섬이 앞에서 손짓한다. 아, 저 산이 여귀산, 저 산에 올라서 무엇을 보았는가? 여귀산에서 내려와 남도진 석성을 방문하지 않았던가? 고려 의종 항몽 전쟁 때 삼별초군이 진도 용장성에 황궁을 세우고 고려의 주체성을 지키겠다고 몽골과 고려 정부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여몽 연합군에 용장성이 함락되고 남도진성에서 전투를 벌이지만, 배중손 장군이 전사하고 패퇴하게 된다. 남은 삼별초군사를 이끌고 김통정 장군이 진도 굴포항을 통하여 제주도 항파두리로 본거지를 옮겨 항몽 전쟁을 벌이지만 결국 패배하여 그 흔적은 아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예전에는 섬이었던 두모포 선착장과 두모마을을 거쳐 나갔다. 폐허화된 선착장 입구의 집들이 가슴에 찬 바람을 일으킨다. 흥성했을 두모포구는 이제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도모포구 앞 바다에서김 농사가 시작되어 결실의 철이 되면 도모포구에 사람들이 붐빌까? 두모마을에는 대형 김 공장이 두 곳이나 있다. 두모마을 중앙에는 이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효열부 나주 임씨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마을의 잔존심이 될까? 진도 출신의 임씨 여인은 15세에 해남으로 시집와 남편이 일찍 병사하자 맹인인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친정에서 임씨 여인을 개갸시키려고 했지만 임씨 여인은 평생을 맹인 시아버지를 모시고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심청전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덕목은 과연 이 시대에도 지켜야 할 빛나는 덕목이 될까? 선택의 문제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길손의 판단은 부정적이다.
두모마을, 예전의 섬마을을 걸어서 백포해안으로 나갔다. 백포마을과 망부산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가 백포해안은 깊숙하게 내륙으로 들어가 형성되었지만 지금 백포해안선은 백포마을 앞으로 한참을 나와있다. 고산 윤선도가 백포마을에 집을 짓고 바다를 막아 농토를 확장했다고 하는데 그 지점이 어느 곳인지 궁금하다. 고산 윤선도는 이곳에서 살려고 집을 지었지만 바닷바람이 거칠어서 결국 녹우당으로 들어갔다. 백포마을의 고산 윤선도가 지은 고택은 그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가 물려받게 되지만 그 또한 2년을 머무르다가 녹우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백포해안에서 백포마을 공재 윤두서 고택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단념하고서해랑길을 따라간다.
백포해안을 거쳐 중정마을로 올라갔다. 중정마을에는 수령 200년이 넘는 팽나무가 멋지게 자라고 있다. 그 아래 쉼터정자는 마을 주민들이 담소를 나누는 공간으로 최적격이었다. 중정마을에서는 앞이 탁 트여 걸어온 서해랑길, 학가항과 서해바다, 두모섬, 모두가 잘 조망된다.
이제 조금씩 힘에 겨워지는지 속도가 나지 않는다. 중정마을 언덕을 넘으면 해남 안호리·석호리 유적지가 있다. 삼국시대 마한의 분묘와 주거지, 도로 등이 발굴되었는데, 삼국시대 고분은 마한 최대 규모의 고분군으로, 특히 독무덤 58기가 발굴되었는데 옹관 수량이 총 124기로 단일유적으로는 최대급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런데 유적지가 어디일까? 유적지가 어느 곳인지 분명히 표시되어 있지 않아 탐방객이 유적지를 찾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길손의 판단이 잘못일까? 그렇다면, 유적지는 유적 설명안내판이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더 문제다. 유적지에 체육공원과 쉼터정자를 조성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길손의 판단은 뒤죽박죽이 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유적지공원에서 대지마을로 향하다가 대지마을회관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대지길을 따라 용천자라농장을 거쳐 송평로로 나왔다. 백포방조제에서부터 끊임없이 눈에 들어온 송평항, 이 도로는 송평마을과 송평항으로 이어지는 길일 것이다. 송평로를 가로질러 화산면 평호리 평호들을 가로질러 사포마을회관 방향으로 이어간다. 뒤돌아서서 걸어온 길을 익히고, 또 가지 않은 길을 예측하며 가야할 서해랑길을 예측하며 길을 걷는다.
구성리 해안에서 이어지는 구성리길, 사포마을회관 맞은편 길로 들어섰다. 사포마을회관 앞 사포길을 따라 서해랑길이 이어질 것이라 예측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예측, 서해랑길은 사포길을 가로질러 사포마을 뒤 언덕으로 올라가 좌일길로 이어지는 길이다. 언덕에서 뒤돌아서서 걸어온 대지마을과 가지 못한만 사포마을 반석교회의 멋진 십자가탑을 다시 바라보며 웃음지었다. 차라리 저 반석교회 앞으로 왔더라면 어떠했을까? 걸어온 길에서, 걸어가지 않은 길이 더 멋지게 보이는가 보다.
언덕을 넘으면, 서해랑길 2코스의 목적지 관동방조제와 관두산, 화산면 관동리 관동마을이 정면으로 들어오고, 왼쪽으로는 화산면 석호리 좌일마을이 위치해 있다. 좌일길을 따라서 관동방조제까지 이어지는 아스팔트길이다. 도중에 좌일리마을회관으로 나가서 마을회관을 살피고 나왔다. 관동방조제로 올라섰다. 진도 섬과 해남반도 사이의 서해 바다가 펼쳐져 있다. 진도의 최고봉 첨찰산이 건너편 중앙에 우뚝하다. 새해 해맞이 산행으로 첨찰산에 올라간 것이 몇 년이 지났는가? 그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첨찰산에서 해남반도를 조망하며 아름답다는 감탄만 늘어놓지 않았는가? 이제는 해남반도 관동방조제에서 진도를 조망하고 있다.
진도 최고봉 첨찰산 뒤쪽에 진도의 자존심 조선 남종화의 맥 소치 허련의 운림산방이 있다.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제자 소치 허련은 추사 김정희가 권력에 패배하여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자 실의하여 고향 진도로 돌아와 첨찰산 아래 운림산방을 짓고 말년을 보낸다. 베토벤의 전원교항곡 2악장은 소치 허련이 한양에서 진도로 돌아오는 마음인 듯, 같기도 다르기도 하여 전원을 들을 때면 언제나 소치의 낙향, 아니면 귀향을 떠올리게 된다. 추사와 소치가 사제지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 역할이다. 초의가 소치를 한양 통인동에 사는 추사에게 소개하여 추사의 남종화의 맥을 잇게 되는 것이다.
첨찰산 조금 더 위쪽에 벽파진, 벽파진 언덕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벽파진전첩비가 있는데, 이은상이 짓고 손재형이 쓴 비문은 가슴을 울린다. 조금 더 위쪽이 녹진전망대, 그 아래 바다가 명량대첩의 울돌목, 그 맞은편 해남에 전라우수영이 있다. 울돌목을 건너가는 진도대교가 있기 전에는 그 아래 벽파진과 해남이 배로 교통했다. 명량대첩은 벽파진대첩의 2차전으로, 벽파진에서 패배한 왜적이 대규모전투를 벌일 것을 예상하여, 이순신 장군이 그에 대비해 전술전략을 짜서 울돌목 명량에서 세계해전사상 유래가 없는 승전을 거둘 수 있었다. 관동방조제에서 건너편 진도를 바라보며 지난 시절 진도를 탐방한 추억을 되새기며 잠시 눈물에 젖었다.
관동방조제를 건너면 서해랑길 2코스 목적지인 서해랑길 3코스 안내도가 세워진 곳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 맞은편에는 다음에 진행할 서해랑길 3코스 시작점 표지가 철조망에 붙어 있다. 서해랑길 2코스의 추억이 지금도 가슴에 일렁이며 물결 짓는다. 탐방의 길이 곧 삶의 길처럼 느껴진다. 후다닥후다닥 앞서가는 일행을 좇아가기만 하는 길손의 마음은 무겁지만, 언제나 지나고 나면 가볍게 웃음짓게 된다.
2.걸은 과정
제1부에서 이어짐
중앙에 솟은 산은 가공산, 왼쪽에 두륜산과 주작산, 오른쪽 끝에 달마산 능선이 들어온다.
송지천 배수문 다리를 건너 송지면 가차리에서 군곡리로 넘어간다. 배수관리 시설물을 지나 왼쪽으로 꺾어 방조제로 나간다. 전봇대 뒤에 보이는 산은 백방산, 그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갔다고 한다.
두모마을이 중앙에 보인다. 이곳은 예전에 바닷물이 넘실거렸고, 두모마을이 있는 산은 섬이었다고 한다.
오른쪽에 솟은 산이 망부산으로 그 왼쪽 아래에 공재 윤두서 고택이 있는 백포마을이 있다. 이곳은 모두 예전에 바다였다.
방조제 아래 간척지농토 들길을 걸어왔다. 뒤쪽에 달마산 능선이 길게 벋어 있다.
앞쪽에 두모마을과 오른쪽에 망부산이 보인다. 앞에 보이는 두모마을과 뒷산은 예전에 섬이었고, 이곳은 모두 바다였다. 바닷물은 오른쪽 망부산 아래 백포마을까지 들어갔기에 그곳을 백방포 또는 백포라고 했다고 한다.
앞에 현산천을 가로지르는 땅끝해안로의 현산교가 있고, 그 뒤 오른쪽에 두륜산, 그 오른쪽 움푹 파인 오소재에서 오른쪽으로 주작산과 덕룡산이 이어지고 있다. 덕룡산 너머는 강진땅이다. 앞 왼쪽은 백방산, 오른쪽 앞은 가공산으로 예전에는 이곳이 모두 바다였다.
왼쪽에 달마산 능선, 오른쪽 맨 끝에 신평마을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신평마을 앞 해안길을 따라 이곳으로 이어진다.
중앙 왼쪽 맨 끝 산 뒤가 어란진, 그 앞 보리밭길을 걸어 우근마을로 들어가 농장길로 나왔다. 왼쪽은 신평마을, 오른쪽은 학가마을이다. 학가마을과 그 맞은편 신평마을 사이의 학가1길을 따라 해안길을 걸어 북진하였다.
왼쪽은 해남면 학가리 학가항과 중도, 오른쪽 바다로 튀어나온 끝은 해남군 화산면 평호리 송평항, 그 오른쪽은 화산면 안호리 송계마을이다. 중앙 뒤에 진도 섬이 서해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 오른쪽 맨뒤의 높은 산은 진도의 첨찰산, 정면 중앙의 산은 진도 여귀산인 듯. 여귀산 왼쪽 아래 남도진성은 고려말 삼별초의 항몽전쟁에 때 여몽연합군에게 패배하여 배중손 장군이 전사한 곳이며, 그 왼쪽 굴포항은 김통정 장군이 삼별초 군대를 이끌고 탈출한 항구로, 김통정 장군은 본거지를 제주도 항파두리로 옮겨 항몽 전쟁을 이어갔다.
앞 오른쪽은 현산면 백포리 두모항, 왼쪽에 삐쳐나온 곳 끝은 화산면 평호리 송평항, 그 오른쪽 해안마을은 화산면 안호리 송계마을, 그 맨 오른쪽 언덕 위의 마을은 안호리 중정마을이다. 맨 뒤 왼쪽의 산은 진도의 여귀산, 중앙의 높은 산은 진도 최고봉 첨찰산이다.
중앙의 산 아래 현산면 백포리 두모선착장과 그 오른쪽에 두모마을, 맨 왼쪽 해안에 화산면 안호리 송계마을. 중앙 뒤쪽 언덕에 화산면 안호리 중정마을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두모마을을 통과하여 해안으로 나간 뒤 중정마을을 거쳐 고개를 넘어 화산면 석호리 대지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앞 두모마을의 산은 예전에 섬이었다.
왼쪽 두모선착장 오른쪽에 두모마을이 있다. 오른쪽에 솟은 산이 망부산이며, 그 왼쪽 아래 공재 윤두서 고택이 있는 백포마을이 있다. 서해랑길은 두모마을을 통과하여 백포해안으로 나아가 백포마을 입구를 거쳐 중정마을 앞으로 이어진다.
현산천이 서해 바다로 흘러들고 백포방조제로 인하여 습지가 조성되어 있다. 땅끝해안로 현산교가 현산천을 남북으로 가르며 지나가고 있다. 앞 왼쪽에 백방산, 오른쪽 끝에 가공산, 맨 뒤에 두륜산과 주작산 그 오른쪽 뒤로 덕룡산이 분명히 보인다. 덕룡산은 강진군 도암면에 속한다. 현산천을 경계로 송지면 군곡리와 현산면 백포리로 나뉜다.
두모포구가 있는 저곳은 예전에 섬이었다. 한때 흥성했다고 하는 두모포구는 이제 한산하기만 하다.
뒤에 화산면 평호리 송평항, 맨 뒤 왼쪽에 진도의 여귀산이 들어온다.
송지면 군곡리에서 현산면 백포리로 넘어왔다.
달마산 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김 공장이라고 한다.
김 공장으로 재래김, 곱창김, 돌김 등을 판매하는 업체인 듯.
남편이 일찍 병사하여 맹인 시아버지를 모시고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진도 고군면 원포가 친정인 임씨는 친정에서 개가시키려고 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불사이부(不事二夫)하였다고 한다. 이 정려각은 어사 성수묵의 특명으로 고종3년 1866년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른쪽에 망부산이 보인다. 이곳은 간척지로 예전에는 바다였다. 망부산 아래까지 바다였다고 한다.
백포해안 두모길을 따라 왼쪽 언덕 위 중정마을로 진행한다. 이 백포방조제를 쌓기 전 조선조 때 고산 윤선도가 바다를 막아 농토를 개간한 곳은 어디일까? 백포마을에 있는 공재 윤두서 고택은 고산 윤선도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 바닷물은 백포마을 앞까지 이른 것 같다.
맨 왼쪽에 화산면 평호리 송평항, 중앙에 화산면 안호리 송계마을, 오른쪽 언덕에 안호리 중정마을이 있다.
앞 왼쪽은 현산면 백포리 두모포구, 그 뒤쪽은 송지면 학가리 학가항과 그 앞의 중도, 오른쪽 끝에 화산면 평호리 송평항이 있다. 바닷물은 고산 윤선도 때는 이 뒤쪽 백포마을까지 들어갔는데, 현재는 이곳에 방조제를 쌓아 간척했다.
저곳까지 바닷물이 들어갔기에 저 포구는 백포 또는 백방포라고 하며 백포마을 뒷산은 망부산이라고 한다. 고산 윤서도가 바닷물을 막아 농토를 개간한 곳이 어디쯤일까? 그는 백포마을에 집을 짓고 살고자 했으나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해남 녹우당으로 들어갔다. 이 집을 물려받은 고산의 증손자 또한 이곳에서 2년을 살다가 녹우당으로 들어갔다. 공재 윤두서 고택을 방문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서해랑길을 따라 진행한다.
오른쪽 현산면 백포리 두모마을, 그 오른쪽 산 뒤가 두모포, 맨 오른쪽은 송지면 학가리 학가마을, 맨 뒤에 달마산 능선이 남북으로 벋어 달리고 있다. 두모마을 지역이 섬이었다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두모마을과 두모포가 있는 산은 예전에 섬이었음이 분명히 보인다. 오른쪽에 길게 뻐친 학가항과 그 왼쪽에 학가마을, 그리고 중앙 맨 뒤 산 뒤가 어란진이다. 왼쪽 뒤에는 달마산 능선이 들어온다.
배수문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중정길로 나아가 중정마을로 향한다.
왼쪽 앞에 가공산, 맨 뒤에 달마산 능선은 시원하다. 중앙에 두모섬, 오른쪽 맨 뒤의 어란진을 가늠한다.
망부산 아래 백포마을, 망부산 오른쪽의 낮은 산은 청룡산인 듯. 중앙 맨 뒤에두륜산이 보인다.
백포만의 중정길을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중정마을로 올라간다.
송지면 산정리 미학마을과 그 앞 어란리 내장마을 그리고 우근마을과 학가마을이 모두 가늠된다. 가차리와 백포리를 잇는 백포방조제가 두모포 왼쪽으로 보인다.
농로를 따라 정면 중정마을로 올라간다.
왼쪽에 가공산, 맨 뒤에 달마산 능선, 중앙에 두모산이 조망된다.
중정마을에서 앞쪽의 국도 77번 백포해안로 안호교차로로 나가지 않고, 왼쪽 언덕길로 이어간다.
가공산과 달마산 능선, 두모산이 보인다. 저곳이 옛날에는 모두 바다였다.
언덕을 넘어왔다. 백포해안로를 가로질러 쉼터정자가 있는 체육공원으로 진행한다.
왼쪽 아래에 안호교차로, 그 오른쪽에 수채산, 언덕 아래에 중정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 뒤에 망부산과 백포마을, 그 뒤에 두륜산, 중앙에 가공산, 그 오른쪽 뒤에 달마산 능선, 오른쪽에 두모산이 모두 분명히 조망된다.
이곳에서 삼국시대 고분, 주거지, 도로 등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삼국시대 고분은 마한 최대 규모의 고분군으로, 특히 독무덤 58기가 발굴되었는데 옹관 수량이 총 124기로 단일유적으로는 최대급에 해당한다고 한다.
화산면 안호리에서 석호리로 넘어왔다. 대지저수지 옆 대지큰길을 따라 대지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서해랑길은 곧바로 대지리회관과 대지마을 방향으로 진행하지 않고 왼쪽으로 꺾어 이어간다.
언덕 위 안호리석호리 유적이 있는 체육공원이 보인다. 그곳에서 석호리로 넘어와 대지큰길로 내려왔다.
왼쪽 용천자라농장 앞으로 이어간다.
송평로를 가로질러 화산면 석호리에서 평호리로 넘어가 평호들을 가로지르는 들길을 따라간다.
화산면 평호리 사포마을과 사포반석교회가 보인다.
정면에 평호리 사포마을회관이 보이고 맨 뒤에 솟은 산은 서해랑길 2코스 종점 관동방조제를 내려보는 관두산이다. 서해랑길은 사포마을회관을 거치지 않고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간다.
오른쪽 끝 대지길에서 송평로를 가로질러 평호들길을 따라왔다. 왼쪽 뒤의 산은 망부산으로 그 아래 백포마을이 있으며 맨 뒤에 두륜산이 살짝 보인다.
산 아래 평호리 평발마을이 보인다. 오른쪽 끝을 넘어가면 화산면 평호리 송평마을과 송평항이 나올 것이다.
건너편 대지마을에서 송평길을 가로질러 평호들길을 걸어 사포마을 앞 구성리길로 들어왔다.
서해랑길은 사포마을회관을 거치지 않고 구성리길에서 사포길을 가로질러 언덕길로 오른다.
왼쪽 사포길은 사포마을회관 방향, 오른쪽 사포길은 삼호보건진료소 방향, 서해랑길은 사포길을 가로질러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가 언덕을 넘어 좌일길로 향한다.
바로 앞쪽에 사포마을회관이 있어서 갔다가 되돌아온다.
뒤쪽 산등성이 너머는 서해 바다 송평항이 있는 곳이다.
화산반석교회의 십자가탑이 특이하다. 오른쪽 맨 끝에 달마산 능선이 흐릿하게 들어온다.
관동방조제 뒤 관두산, 그 오른쪽 아래에 관동마을이 있다. 왼쪽 마을은 좌일마을이다.
왼쪽에 화산면 석호리 좌일마을, 정면 중앙에 관동방조제, 그 오른쪽에 관두산, 그 오른쪽 아래에 화산면 관동리 관동마을.
중앙 왼쪽에 진도의 최고봉 첨찰산, 중앙 오른쪽 벽파진, 그 위쪽 울돌목(명량)을 가늠한다.
멀리 뒤쪽에 달마산 능선이 들어온다.
진도는 서해의 길목을 지키는 요충지 섬이다. 중앙에 뾰족한 여귀산, 중앙 오른쪽에 첨찰산이 가늠된다.
서해랑길 3코스는 풍혈길을 따라 위쪽으로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