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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찾음과 얻음
1. 찾음과 얻음
세상 사람들의 말로 하자면 인간은 생을 얻는 그 순간부터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찾는 것에 따라 얻음도 따라옵니다. 그러니 ‘찾음’에 대해 우리들 스스로 숙고해볼 만합니다. ‘우리들은 매일 찾고 있다. 무엇을 찾고 있는가? 현인들, 선인들도 찾고 원한다. 그들은 무엇을 찾는가?’ 이것은 깊이 사유해볼 만합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무언가를 찾습니다. 무엇을 찾습니까? 어린 시절에는 지식을 찾고 배웁니다. 학교에 가서 지식을 쌓습니다. 지혜를 구합니다. 공부해서 학위를 얻고 나면 다시 찾기 시작합니다. 직업을 구합니다. 구직이란 돈을 찾는 겁니다. 돈, 재물을 찾을 뿐입니다.
이렇게 찾고 또 찾다가 한 번의 인생이 막을 내립니다. 인간의 생을 심사숙고해 보면, 이런 순서대로 이어져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이런 찾음은 어디서 끝나는가?’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찾습니다. 동이 트자마자 그들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새들은 하늘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찾아다닙니다. 무엇을 찾습니까? 먹잇감을 찾습니다. 안전하게 잠잘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그들 역시 찾습니다. 사람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동물들을 봅시다. 그들도 찾아다닙니다. 먹을 것을 주는 주인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먹이를 주는 주인이 없으면 여기저기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도 찾아다니고 동물들도 찾아서 떠돌아 다닙니다. 모두들 구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찾음을 분석해 봅시다. ‘우리들이 찾아 마땅한 것을 찾고 있는가? 찾을 가치가 없는 것을 찾고 있는가?’ 또는 ‘우리들의 찾음은 언제 끝을 맺는가? 끝이 있는 찾음인가? 끝이 없는 찾음인가?’ 이 찾음에 관한 의문들을 붓다께서 설하신 경전 안에서 숙고하고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6번째 상가결집 때 미얀마 종교성에서 출판한 삼장의 『맛지마 니까야』 안에 「빠사라시 숫따pāsarāsi-sutta(M26)」가 있습니다. ‘빠사라시’란 ‘덫의 밭’으로, 덫에 비유하여 설하신 경입니다. ‘덫의 밭’이란 제목을 달아두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 출판된 책에서는 ‘빠사라시’라는 제목의 경이 ‘아리야빠리예사나ariya-pariyesanā’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이 경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아리야빠리예사나’의 ‘아리야’를 ‘고귀함(noble)’으로 번역하고, ‘빠리예사나’를 ‘갈구(quest)’로 번역했습니다. ‘고귀한 갈구(noble quest)’ 즉, ‘성스러운 갈구’라는 의미가 됩니다. ‘아리야빠리예사나’와 반대되는 개념으로는 ‘아나리야빠리예사나anāriya-pariyesanā(미천한 갈구)’가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된 책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영어 번역을 읽었던 사람들이 미얀마말로 번역된 ‘아리야빠리예사나’ 경을 못 찾겠다고 할까 봐서 일러두는 겁니다. 「아리야빠리예사나 숫따(M26)」을 「빠사라시 숫따」라고 합니다.
미얀마에서는 빠사라시 숫따, 빠리예사나 숫따 두 가지 이름으로 나와 있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빠리예사나’를 ‘잠재력’ 또는 ‘숨은 재능을 개발하다’라는 뜻으로 씁니다. 하지만 잠재력을 찾는 것만이 ‘빠리예사나’가 아닙니다. 무엇을 찾든 찾는 것은 모두 ‘빠리예사나’입니다.
‘빠리예사나’는 모든 찾음에 쓰일 수 있습니다. 의식주와 관련해서 찾는 것, 지식을 구하는 것, 도(道)를 찾는 것, 일을 찾는 것, 찾는 모든 것은 빨리어로 ‘빠리예사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가끔은 ‘빠리예사나’라는 단어에서 ‘빠리pari’를 빼고 ‘에사나esanā’로 쓰기도 합니다. ‘에사나’ 역시 ‘찾음, 구함’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찾음’과 관련해서 붓다께서 설해 두신 것을 새겨볼 만 합니다.
찾음과 관련하여, ‘우리들이 찾는 것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 우리들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우리들이 구하러 다니는 것이 구하러 다닐 만한 것인가? 우리의 갈구가 고귀한 갈구인가? 고귀하지 않은 갈구인가?’라고 숙고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생각해볼 만하지요?
이런 사유를 해 보지 않는다면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쫓고, 본능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쫓고, 혹은 남이 쫓는 것을 따라 쫓을 뿐입니다. 그렇게 찾는 와중에 다 구하지 못한 채 한 생이 막을 내립니다. 다른 어떤 생에 태어나서도 또 찾아야 할 것입니다. 끝이 없는 갈구만 있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이 고귀한 찾음인가? 이익이 있는 찾음인가? 이익이 없는 찾음인가? 끝이 있는 찾음인가?’ 곰곰이 생각해볼 만합니다.
일부러 법회를 찾아 와서 법문을 듣는 것은 자신이 잊고 살던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생에 대해 깊이 사색해 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집에 있으면 지루하니 나들이나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와서 심심풀이로 들어선 안 됩니다. 법회에 오면 붓다께서 설하셨던 법을 들을 기회를 가집니다. 법문을 듣고 나면 인생을 반추하게 됩니다. 이런 사색하는 지혜는 아주 가치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 생존하던 당시에 제자 빅쿠들에게 들려주셨던 말씀들은 기억할 만합니다.
‘숫수사 수따왓다니sussūsā sutavaddhanī’53): 배우고자 하는 갈망으로 인해 배움이 늘어난다. ‘숫수사sussūsā’는 ‘소뚱sotuṁ(들음) + 잇차icchā(갈망)’ 즉, ‘듣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법회에 가서 법문을 듣고 싶은 마음’, ‘학당에 가서 배우고 싶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붓다 당시에 들음은 빤냐(지혜)를 얻는 방법입니다. 들은 뒤 기억하고 새깁니다. 이런 들음(수따suta)이 많아지면 삶이 풍성해집니다. 몰랐던 것들을 들어서 식견이 넓어집니다(왓다니vaddhanī).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법을 듣고자 하는 마음(숫수사)이 있어서, 법회에 오게 되면 붓다께서 설하셨던 법을 듣고 법에 대한 이해(수따)를 지니게 됩니다. 법에 대한 이해(수따)를 얻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후로 행동할 때 붓다께서 설하신 법을 염두에 둡니다(수땅 빤냐야 왓다낭sutaṁ paññāya vaddhanaṁ). 다음에 한 번 더 설법을 들을 때 법을 한 번 더 새겨 둡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새기게 되면 무엇이 많아집니까? 지혜(빤냐)가 성장합니다(왓다낭vaddhanaṁ). 지혜란 무엇을 위해 필요합니까? 지혜가 있으면 자연의 원리들을 제대로 알게 되고 생각할 줄 압니다. 볼 줄 압니다. 구분하고 분석해서 정확히 압니다. 이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들음을 기초로 해서 지혜를 얻습니다.
이런 지혜들을 얻게 되면 무엇을 하게 되냐면 ‘빤냐야 앗탕 자나띠paññāya atthaṁ jānāti’하게 됩니다. 생의 의미, 법의 뜻, 세상의 의미, 생의 핵심가치들을 숙고하게 됩니다. 이런 숙고는 지혜에서 나옵니다.
지혜가 없으면 무엇만 압니까? 의식주에만 매몰되어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먹어야 한다. 시간이 되면 먹어야 한다.’ 이런 먹고 입는 일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삽니다. 먹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들만 아는 게 아닙니다. 동물들도 압니다.
법문을 들어서 이러한 일상적인 일이 아닌 생의 심오한 의미를 알아가게 됩니다. 참된 이익과 이치를 생각할 줄 알게 됩니다. ‘무엇을 해야 마땅한가? 무엇을 하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을 만큼 지혜가 뒷받침될 때 ‘해서 마땅한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 ‘빤냐야 앗탕 자나띠(지혜로써 이익을 안다)’라고 합니다. 이런 심오한 의미들을 알게 됩니다.
알았을 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냐또 앗토 수카와호ñāto attho sukhāvaho(이로움을 아는 자는 행복으로 나아간다)’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존재는 이 심오한 의미대로 ‘해선 안 될 일’을 피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합니다. 생에서 허물이 없도록 지냅니다. 허물은 피합니다. 허물 없음을 지켜가므로 인생에서 할 만한 것을 하고, 해선 안 되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들을 만나지 않고 이번 생에서 평화와 행복을 얻습니다. 이렇게 법문을 듣고자 하는 갈망으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이들은 한 번의 생을 행복하게 지내고 나서 그 생의 결승점을 바라보는 시점에 이를 겁니다. 생의 목적지, 마지막 종착지란 윤회의 고통이 모두 끝난 열반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지금처럼 법회를 열고 법문을 듣는 것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지혜를 자신의 일상에 적용하여 숙고해 보기 위함입니다. 삶에 대해 바르게 숙고할 수 있도록 붓다께서 설하신 법을 마음에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2. 두 종류의 찾음
붓다께서 ‘찾음’은 두 가지라고 서두를 여셨습니다. 두 종류의 찾음이란 ‘아리야 빠리예사나(고귀한 찾음)’와 ‘아나리야 빠리예사나(고귀하지 않은 찾음)’입니다. ‘고귀한 이들의 찾음’과 ‘범부들의 찾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두 가지 찾음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고귀한 찾음’을 할 것인가, ‘고귀하지 않은 찾음’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끝없이 반복하는 찾음이 성스러운 찾음인지 성스럽지 않은 찾음인지, 우리들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가치 없는 것을 찾느라 기운을 소진하고 있는지 깊이 숙고해 봅시다.
자, 붓다께서 하시는 설법에서 모두가 주목해볼 만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분야를 설하시건 ‘해야 할 것’과 ‘해선 안 될 것’ 두 종류를 한 세트로 설하시곤 하셨습니다. 이처럼 ‘해야 할 것’과 ‘해선 안 될 것‘들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까? 금지사항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해야 하는 일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망갈라 숫따(축복경. Sn2:4)」를 봅시다.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 두 가지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붓다께서는 이 경에서 함께 어울려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음의 말씀을 하십니다 : ‘아세와나 짜 발라낭, 빤디따난짜 세와나asevanā ca bālānaṁ, paṇḍitānañca sevanā.’ ‘아세와나 짜 발라낭’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고, ‘빤디따난짜 세와나’는 ‘지혜로운 사람들과 가깝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함께 지내지 말아야 할 사람을 먼저 말씀하셨습니까? 함께 지내야 할 이를 먼저 언급하셨습니까?
붓다께서는 해선 안 될 일을 먼저 말씀하시지요? 그런 후에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아주 타당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안 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미뤄도 됩니다. 안 해야 할 일을 했을 경우에 결과가 매우 심각해집니다. 그래서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과 같이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함께해야 할 존재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해를 주진 않습니다.
삼장의 주석서에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의 길 안내방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길을 가르쳐 주는 방법은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하지만 앞뒤 없이 뒤죽박죽 길을 설명하진 않습니다. 순서대로 길을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길을 아는 존재가 이방인에게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곧장 가세요. 곧장 가시다 보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갈림길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중요한 정보를 주어야 하는 타이밍에 뭐라고 하냐면, “왼쪽으로 꺾지 마세요. 오른쪽으로 꺾으세요.” 즉 “꺾지 마세요”라고 먼저 말합니다. “왼쪽 길로 가지 마세요. 오른쪽 길로 가세요”라고 말합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먼저 일러주어야 합니다. 가야 할 길은 그 다음에 지시합니다. 이것이 체계적으로 길을 가르쳐 주는 방법입니다.
이런 체계적인 길 가르쳐 주는 방법처럼 붓다께서도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이 있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우선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선대의 모든 붓다들이 설하신 법문을 보면 “삽바빠빳사 아까라낭 꾸살랏사 우빠삼빠다”54)라고 하셨습니다. 뜻이 무엇이냐면 “어떤 불선업도 하지 마라. 선업을 모두 완성시켜라”입니다. “하지 마라”를 먼저 말합니다. 중요하니까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붓다께서는 가르쳐 주는 존재일 뿐 구해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올려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구해준다는 것은 말뿐입니다. 정말 들어올릴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들것에 올려서 들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인간은 좋아지도록 들어올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천상에 가도록 올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열반에 이르도록 들어올릴 수 없습니다. 맞습니까?
스스로 분발하고 노력해야 그 자신이 얻습니다. 부모가 자녀들 학위를 받게 해줄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자녀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돈 많은 부모의 지원으로 학위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지혜는 얻지 못합니다. 진정한 핵심은 주어서 얻는 게 아닙니다. 줄 수 없습니다. 누구도 대신 들어올려 줄 수 없습니다. 방법만 가르쳐 줄 뿐입니다. 길을 보여줄 뿐입니다. 가는 것은 자신이 가야 합니다.
붓다의 법을 꼼꼼히 살펴 보십시오. 이것이 이치에 맞다는 것을,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붓다의 법에 대해 종교나 성별이나 인종이나 국가라는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면밀히 살펴보십시오. 붓다의 말씀이 가장 좋습니다. 어느 유명한 과학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어떤 종교도 의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의 종교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불교를 택할 것이다”라고. 숙고해 보면 이치에 맞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유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불교는 사유의 지혜에 의지합니다. 봅시다. 붓다께서 8정도를 설하시면서 “내가 말한 대로 해라”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바르게 이해하라” 혹은 “바르게 보라”라고 설하십니다. 바른 견해(삼마딧티)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바르게 본다는 것은 누구의 시각인가 하면 자기 자신의 시각입니다. 얼마나 합당합니까? 붓다의 법문은 참으로 합리적입니다.
여기서 붓다께서 가이드를 하십니다. 찾아야 할 것과 찾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중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나리야빠리예사나’로 설하십니다. 추구해야 할 것은 ‘아리야빠리예사나’로 설하십니다. ‘아나리야빠리예사나’란 ‘고귀하지 않은 찾음’이고, ‘아리야 빠리예사나’란 ‘고귀한 찾음’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눈 감고 찾아 헤매는 것을 보십시다.
3. 아나리야빠리예사나
(고귀하지 않은 찾음) 4가지
붓다께서는 ‘고귀하지 않은 찾음’을 4종류로 나누어 보여주셨습니다.
첫 번째, ‘앗따나 자라담모 사마노 자라담망 예와 빠리예사띠’55)(스스로 늙을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늙을 것들만 찾고 있다)
자기 스스로 늙음을 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녹슬고 썩어드는 것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지 아닌지 스스로 생각해 봅시다. 한 사람이 인간 생에 와서 찾고 있는 것들을 보세요. 물질과 재물을 찾고 있습니다. 직장을 구하고 일해서 돈을 벌고 물건을 삽니다. 이렇게 찾아 얻은 재물과 물건은 낡는 특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배우자를 찾습니다. 이 배우자는 안 늙습니까? 늙어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나도 늙어야 하는 운명이고 내가 찾아 얻은 것 역시 늙어갑니다.
내가 원하고 찾는 물질 모두가 낡아가는 천성이 있습니다. 내가 찾아다니는 것 모두 다 그렇습니다. 집, 차, 일용품 등 낡아가는 것들만 찾아다닙니다. 망가져 버릴 것들만 찾아다닙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늙어가고 내가 찾아다니는 것도 역시 늙어갑니다. 삭아서 바스러질 것들만 찾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앗따나 뱌디담모 사마노 뱌디담망 예와 빠리예사띠’56)(스스로 아프고 병드는 천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고 병들고 상할 것들만 찾고 있다)
내가 찾고 있는 것들이 모두 아프고 병들 것들입니다. ‘뱌디byādhi’는 ‘병듦’이라는 뜻입니다. 찾아다녀서 얻는 것들 모두 아플 것이고, 다칠 것이고, 부딪쳐 깨질 것입니다. 불이 나면 타버릴 것들입니다. 불에 타버립니다. 차든 무엇이든 모두 다 부서질 것들만 있습니다. ‘뱌디 담마(병듦의 법)’만 우리들이 찾고 있습니다.
세 번째, ‘앗따나 마라나담모 사마노 마라나담망 예와 빠리예사띠’57)(스스로 죽어야 할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죽을 것들만 찾고 있다)
우리들은 죽어야 할 것들만 찾고 있습니다. 생명 있는 중생들도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고, 내가 찾아 놓은 물건들도 언젠가는 사라질 운명입니다. 나 자신이 죽을 운명에 있으며, 내가 찾아둔 것 역시 모두 다 사라져 없어질 것들뿐입니다.
네 번째, ‘앗따나 상낄레사담모 사마노 상낄레사담망 예와 빠리예사띠’58)(스스로 더러워지는 천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더러워지는 것들만 찾고 있다)
자신이 탁하고 시드는 천성이 있으면서도 탁해지는 성품이 있는 것들만 찾고 있다고 합니다.
자, 봅시다! 세상 사람들이 가족과 배우자를 찾습니다. 재물과 물질을 모읍니다. 이 모든 것들이 번뇌를 증가시킵니다.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은 그냥 단순히 생겨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마음과 심장이 탁해집니다. 번뇌가 자신 안에서 일어나면 마음이 불 같아집니다. 자신도 타오르는 성질이 있으면서 찾아서 모으는 것도 타버릴 것들만 모은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매일 찾고 있는 것이 이 네 가지에서 벗어납니까?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네 가지 찾음을 붓다께서 ‘고귀하지 않은 찾음’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을 따라다녀 보십시오. 모두들 네 가지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찾고 있는 것 모두가 위의 네 가지 특성을 가진 것들뿐입니다.
4. 아리야빠리예사나
(고귀한 찾음) 4가지
자, 그러면 ‘고귀한 찾음(아리야빠리예사나)’은 무엇을 말하는가? 붓다께서는 ‘고귀하지 않은 찾음’과 마찬가지로 ‘고귀한 찾음’을 4가지로 나누어 보여 주셨습니다.
첫 번째 ‘고귀한 찾음’입니다. 자신이 늙고 익고 시드는 천성이 있어서(앗따나 자라담모 사마노) 늙음의 천성에서 문제를 봅니다(자라담메 아디나왕 위디와).59) 늙음이라는 자연법칙의 문제를 보아서 늙음에서 벗어난 열반을 찾는답니다. 열반은 늙음이 없는(아자라ajara) 담마입니다. 그래서 늙음이 없는 것을 얻을 때까지 반드시 찾으라고 합니다. 열반의 행복을 찾아야만 고귀한 찾음입니다. 이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윤회 안에서 무엇을 찾든 끝이 나쁩니다. 늙음·병듦·죽음에서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열반을 찾아서 열반을 얻어야만 늙음·병듦·죽음에서 벗어납니다. 다시 또 늙음·병듦·죽음이 없습니다. 찾음(갈구)도 그만둘 수 있습니다. 앞에 언급한 것들을 찾고 있으면 절대 끝나지 않습니다. 윤회라는 여행을 하면서 종착역이 보이지 않는 생들을 살고 있습니다. 전혀 특별함이 없는 것들만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 ‘고귀하지 않은 찾음’이라고 설하신 겁니다.
자, 고귀한 갈구란 스스로가 늙음의 천성이 있는 것을 알고 늙음의 문제점을 보는 겁니다. 보아서 ‘자라담마(늙음의 법)’를 찾지 않습니다. 늙음으로부터 벗어난 열반을 찾습니다. 이런 수준 높은 것을 찾습니다. 원래의 자신보다 수준이 높아집니다.
자기 스스로가 늙음의 천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늙음의 성품이 없는 것을 찾습니다. 얼마나 수준이 높아졌습니까? 자신에게 이미 있는 것을 또 찾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이미 있는 것을 또 찾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준을 올려주는 찾음이 안 되고 있는 겁니다.
‘아리야빠리예사나’라는 ‘고귀한 찾음’이 되어야 수준이 올라갑니다. 나에게 ‘자라담마’ 즉, 늙음의 성품이 있습니다. 앞으로 찾는 것은 ‘아자라’ 즉, 늙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준이 더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통증, 고통스러움의 천성이 있습니다. 이 아프고 고통스러움의 천성을 알아서 ‘뱌디(병듦)’에서 멀어진 열반을 찾습니다. 이것이 붓다께서 설하신 두 번째 ‘고귀한 찾음’입니다.
16살의 수메다 존자는 유산으로 받은 많은 재물을 보고 숙고합니다. ‘나는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음이 없는 열반을 찾을 것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늙음·병듦·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난 자리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뜨거움이 가시면 차가움이 있다. 고통이 있으면 행복이 있다. 안 좋은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이 있다. 세상은 모두 쌍을 지어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찾아 떠납니다.
그 스스로 알고 싶어서 찾아 나섰습니다. 보디삿따가 언제부터 열반을 찾았느냐 하면, 4아상케야와 10만 번의 세상 그 이전부터 찾기 시작했습니다. 찾은 기간이 4아상케야와 10만 번의 세상이었습니다. 붓다가 되는 마지막 생에 왔을 때에야 이런 법을 설할 수 있게 됩니다. 짧은 기간입니까? 아닙니다. 붓다는 왜 이리 오래 걸렸느냐 하면, 스스로의 지혜로 알 수 있는 힘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압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담마를 들어서입니다. 들어야 압니다. 우리 스스로의 지혜로 알아낸 게 아닙니다. 붓다로부터 방법을 배워서 법문하고 있는 겁니다. 스스로 깨달아 얻은 게 아닙니다. 붓다께서 이미 설하신 법 그조차도 따라서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 번째 ‘고귀한 찾음’은 죽음과 관련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죽을 운명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한계를 봅니다. 한계를 알기에 죽음이 없는 열반을 찾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번뇌로 인해 탁해지는 성품이 있습니다. 이 ‘번뇌’라는 탁함에서 완전히 멀어진 열반을 찾습니다. 더럽고 탁함의 문제점을 보아서 뜨거움, 탁함, 시듦이라는 성향이 전혀 없는 열반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붓다께서 설한 네 번째 ‘고귀한 찾음’입니다.
네 가지 모두를 종합해 보면, 세상의 한계를 넘어선 열반을 찾는 겁니다. 늙음이 없습니다. 병듦이 없습니다. 죽음이 없습니다. 뜨겁고 고통스럽고 탁한 번뇌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소멸된 열반을 찾습니다. 이런 찾음을 고귀한 찾음(아리야빠리예사나)이라고 합니다. 열반을 찾지 않는 한 우리가 찾아다니는 모든 것은 가치가 없는 것들뿐입니다. 우리의 생이란 종점이 없는 궤도를 끝없이 헤매는 것일 뿐!
5. 빠리예사나 숫따
(찾음 경)
붓다께서는 이 경에서 세 가지 찾음(추구)을 설하십니다.
찾음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가 ‘까메사나kāmesanā(감각적인 대상을 찾음)’60)입니다. ① 눈으로 보고 즐길 만한 형상들 ② 귀로 듣고 좋아할 만한 소리들 ③ 코로 냄새 맡고 좋아할 만한 향기들 ④ 혀로 즐길 만한 맛들 ⑤ 피부에 접촉해서 좋아할 만한 감촉들. 이런 것들을 ‘까마kāma’라고 부릅니다. 감각적 즐거움의 대상입니다. 누가 무엇을 찾든 모두 이 안에 있습니다.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너 뭘 구하고 있니? 응, 자동차 찾아’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파트를 구해’, ‘돈을 구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무엇을 찾든 ‘감각적인 대상’을 찾음이 주요 핵심입니다.
여기 미얀마 사람들만 감각적 대상들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이것만 찾습니다. 모두가 이것만 찾습니다. 이 갈구가 계속됩니다.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면 이 찾음을 언제 끝낼 수 있을까요?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갈구를 끝맺는 방법을 오직 불교에서만 제시해 줍니다. 이 갈구는 위빳사나 수행으로 ‘수다원 도(道)와 과(果), 사다함 도와 과, 아나함 도와 과’를 얻어 아나함이 되면 막을 내립니다. 아나함이 되어야 감각적 즐거움을 찾는 일이 끝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 끝낼 수 없습니다. 아나함이 됨과 동시에 감각적 즐거움을 찾는 갈구가 완전히 식습니다.
위사카visākhā는 7살 때 수다원이 되었지만 16세에 뿐나와다나puṇṇavaḍḍhana라는 부잣집 아들과 결혼합니다. 그녀는 감각적 즐거움을 즐겨서 자녀를 많이 두었습니다. 자녀를 스무 명 낳았습니다. 수다원조차도 이렇게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앞에서 말한 감각적인 즐거움을 찾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찾음은 같지만 방법이 다릅니다. 범부들은 바른 방법으로도 찾고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도 찾습니다. 위사카처럼 지혜가 있는 이들은 아닌 방법은 쓰지 않습니다. 여법하게만 찾습니다. 찾긴 찾지만 방법에 차이가 있습니다.
수다원, 사다함을 지나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 대상을 찾는(까메사나) 작업이 완전히 끝납니다. 원하는 집착이 감각적인 것과 관련된 ‘까마라가kāmarāga’를 완벽하게 버리게 됩니다. 감각적인 것을 원하는 집착이 완전히 잘렸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바웨사나bhavesanā’61)입니다. ‘생을 찾음’입니다. 아나함이 된 존재도 생을 원합니다. 그에게는 욕계와 관련된 아래 단계의 ‘사슬 같은 집착(상요자나saṁyojana)’은 없습니다. 그러나 범천계와 관련된 높은 단계의 ‘상요자나’는 남아 있습니다. 어찌됐건 아나함조차도 생을 원합니다.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지칠 줄 모르고 생을 원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기원합니다. ‘이 생에서 죽은 뒤에도 지금 짓는 이 선업으로 인해 다음 생에서는 어찌어찌하기를...’ 맞습니까? 많은 이들이 큰 부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경전에 나오는 전설적인 거부가 한두 명이 아닙니다. 조띠까jotika, 자틸라jaṭila 등등 .. 많은 이들이 다음 생에서는 이처럼 큰 거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렇죠? 이렇게 생을 원합니다. 현생보다 좋은 생을 기대하고 갈구합니다. 생을 갈구하는 것도 참으로 기발하게 상상해내어 갈구합니다. 집착이 얼마나 큰지 찾는 대상도 찾는 방법도 가지각색입니다. 새로 태어나도 사랑하는 이와 한 가지에 앉고 싶다 합니다. 원숭이로 태어나도 같은 나무에 앉겠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까지 원합니다.
이렇게 생을 갈구함은 어디에서 끝나느냐 하면 아라한이 되어야 끝이 납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반드시 죽을 생’을 즉, ‘죽음’만을 갈구하고 있는 겁니다.
찾는 대상과 찾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빠라미를 채우고자 하는 이들은 그른 방법으로 찾지 않습니다. 바른 방법으로만 찾습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 되면 곧은 방법으로만 찾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생에 대한 갈구(바웨사나)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세 번째는 ‘브라흐마짜리예사나brahmacariyesanā’62)입니다. ‘고귀한 실천수행을 찾음’입니다. 범부들이 계·정·혜라는 삼학을 맹렬히 갈고 닦는 것. 열정을 바쳐 정진하는 것. 이것을 의미합니다. 붓다의 말씀을 만난 덕분에 계를 닦고 사마디(선정, 집중)를 모읍니다. 성스러운 수행이 습이 되도록 익혀 닦습니다. 명상을 위해 힘을 쏟아 붓습니다. 이런 것들이 무엇을 찾는 것인가 하면 ‘브라흐마짜리예사나’입니다. ‘고귀한 수행법을 찾는 것’입니다. 이 갈구는 언제 끝나느냐 하면 아라한이 되어야 끝이 납니다. 아라한이 되어야 더 이상 찾지 않습니다.
세 가지의 찾음 중에서 ‘브라흐마짜리예사나’가 진정으로 수승한 찾음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한 ‘아리야빠리예사나(고귀한 찾음)’는 열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늙음의 천성이 있어서, 늙음의 성질이 없는 열반을 찾습니다. 내가 병듦의 성품이 있어서 통증이 없는 열반을 찾습니다. 내가 죽을 운명이기에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열반’을 향한 갈애를 느낍니다. 자기 자신이 뜨겁게 근심하는 성향이 있어서 뜨거운 열기가 사라진 열반을 찾습니다. 이런 열반으로 가게 해주는 방법을 찾는 ‘브라흐마짜리예사나’는 ‘고귀한 갈구’에 속합니다. 그래서 붓다께서 이 경에 세 가지 갈구를 이렇게 설해 두신 겁니다.
좋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찾아서 마땅한 것들과 찾을 가치가 없는데 찾고 있는 것들을 살펴봤습니다. 찾아야만 얻습니다. 즉, 늙음을 찾으면 늙을 것이고, 병듦을 찾으면 병들어 아플 것입니다. 죽을 운명만 다시 맞게 됩니다. 근심스럽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찾으면 근심과 고통만 다시 얻을 것입니다. 찾아서 얻음이 그것을 갈구한 자신에게 올 것입니다.
6. 자기 자신을 찾음
모두 알다시피, 보디삿따는 붓다가야에 있는 우루웰라숲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음력 4월의 보름날 붓다가 되십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후, 49일간 과(果)의 선정에 드셨습니다. 과의 선정에서 일어나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숲으로 가셔서 「초전법륜경(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dhammacakkappavattana-sutta)」과 「무아특성경(아낫딸락카나 숫따anattalakkhaṇa-sutta)」을 설하시고 첫 안거를 보내십니다. 안거 후 우루웰라숲 쪽으로 만행을 떠나십니다. 이 여정 중 어느 숲에 드셔서 나무 아래서 쉬고 계셨습니다. 이때 한 무리의 소풍객들이 옵니다. 30명의 무리가 다급하게 달려와서는 붓다께 여쭙습니다. “스님, 여자 한 명을 보셨습니까?” 붓다께서 나무 아래 앉아 계시는데 다가와서는 앞뒤 없이 묻는 겁니다. 그러자 붓다께서 도리어 그들에게 묻습니다. “왜 그대들은 여인을 찾는가? 무엇을 위해서 찾는가?”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이들은 마하꼬살라mahākosala 왕의 아들들입니다. 그 시대 왕들은 왕비가 많았습니다. 왕비가 많으니 슬하에 자녀도 많습니다. 미얀마의 민동 왕은 왕비가 50명 있었습니다. 왕자, 공주가 100명 이상이었습니다. 이 마하꼬살라 왕도 많은 공주와 왕자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빠세나디pasenadi라는 왕자 한 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중전이 낳은 큰아들이 옥쇄를 받은 겁니다. 마하꼬살라 왕의 남은 아들들이 30명 정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30명이 넘을 겁니다. 그 중 30명이 무리를 이루어 살았습니다. 좋은 모임이라는 뜻의 ‘밧다왁기야bhaddavāggiyā’로 불렸습니다. 이들은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왕의 아들들이었지만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관직이 없었습니다. 회사를 설립해서 사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이 왕자들이 야유회를 갔습니다. 이 30명의 왕자들 중에서 29명은 혼인을 해서 배우자가 있었습니다. 한 명의 왕자만 아내가 없었습니다. 그 왕자를 위해 기녀를 데려 왔습니다. 낯선 기녀와 함께 그들은 숲에서 먹고 마시며 유흥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날 하루 데려온 기녀가 이 왕자들의 패물과 옷가지들을 훔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찾아 나선 겁니다. 그런 와중에 붓다와 우연히 마주치자 이렇게 여쭌 것입니다. “스님, 여자 한 명을 보셨습니까?”63) 붓다가 왜 찾느냐고 다시 물으시자, 이런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앞뒤 사정을 들으신 뒤에 붓다께서 그들에게 말하십니다. “자, 내가 묻겠다. 그대들의 생각을 말해 보라. 그대들에게 찾음 두 가지를 말할 것이다. 여성 한 명을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찾음이 더 이익이겠는가?” 숙고해볼 만한 질문을 던지신 겁니다.
붓다께서 “자기 자신을 찾는 것과 여성을 찾는 것 중에서 그들에게 어떤 것이 더 이익이겠는가?”라고 물으시니, 왕자들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 이익입니다. 타인을 찾는 것보다 나 자신을 찾는 것이 더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질문을 듣고 고민할 리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물음이 가벼운 질문이 아님을 직감합니다. 매우 심오한 질문임을 압니다. 철학적 질문임을 알아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를 찾아야 하는 대상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나 자신을 찾아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 이렇게 질문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양 와 앗따낭 가웨세야타yaṁ vā attānaṁ gaveseyyāthā.” 이 문장에서 서양인들은 ‘앗따’를 ‘자기 자신’이라 하지 않고 ‘자아’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여성을 찾는 것과 자아를 찾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이익이 있는가?”64)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이 문장을 근거로 “보라! 붓다는 무아견을 설하지 않았다. 유아견을 설했다”라고 주장합니다. 붓다께서 참된 자아인 ‘앗따’를 찾는 가르침을 주셨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견해에는 신중히 답변해야 합니다. 소리가 같다고 뜻도 같은 건 아닙니다. 붓다께서는 무아를 설하셨습니다. 어디에서 ‘앗따(자아)’를 찾으라 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기서 ‘앗따’는 ‘자기 자신’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단어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시각으로 넓게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마하꼬살라 왕의 왕자들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붓다께서 ‘자기 자신을 찾는 것과 여성을 찾는 것 중에서 그대들에게 어떤 것이 더 이익이겠는가?’라고 물으시자 이 서른 명은 질문의 뜻을 파악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 가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앉으시게. 나 여래가 법을 설하겠노라”라고 하시며 법문을 시작하십니다.
길을 까는 법문(아누뿝비까타anupubbikathā)으로 보시(다나)에 관하여 설하십니다. 그 뒤 계율(실라)에 대하여 설하십니다. 계율에 관한 법문을 매듭짓고 나서,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 원인을 설하십니다. 그다음엔 감각적 대상으로부터 벗어난 출가, 선정, 도와 과의 이로움과 은혜로움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이처럼 붓다께서 단계 단계 보다 성숙되어 가는 과정 4가지를 설명하십니다.
조금 더 상세히 보십시다. 보시(다나)에 관하여 설하시면서 보시를 하면 태어나는 생에서 부유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부족함을 모르고 재물이 채워진다고 보시에 대해 설하십니다. 하지만 보시의 결과로 재물이 풍족할지라도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돈이 있어도 건강하지 못하면 그 부유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계도 완전하면 좋습니다. 지계가 완벽하면 천상에 가기는 매우 쉽다고 5계에 대하여 설하십니다. 천상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설해주십니다. 천상의 달콤한 행복을 설하신 뒤에 “이 모든 행복이 헛되다. 아무리 큰 부자가 누리는 감각적 향락도 일장춘몽일 뿐, 꿈에서 깨기 전까지만 즐거울 뿐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물거품같이 사라진다”라고 설하십니다. 누구나 꿈을 꿔봤을 겁니다. 좋은 꿈에 빠진 이들은 깨어날까 봐 두려워합니다. 감각적 대상이란 꿈과 같아서 몹시도 허망하다고, 감각적 세상의 허물을 설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것들로부터 멀어져야 ‘영원한 행복’, ‘절대의 행복’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과정들을 붓다께서 하나씩 설해 나가셨습니다.
이것을 듣고 서른 명 왕자들의 마음이 아주 강하고 활기차졌습니다. 붓다의 법문으로 이들의 마음은 매우 고양되고 활력을 얻습니다. 더러움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받아들일 준비가 모두 갖추어집니다. 무엇과 같은가 하면, 천을 물들이기 전에 얼룩 없이 깨끗이 비벼 빠는 것과 같습니다. 세게 문질러서 빨고 삶아 헹군 뒤에 좋아하는 색을 염색하면 원하는 색을 얻습니다. 더러운 천을 깨끗하게 빨지 않고 염색하면 이 천에 드는 새로운 색이 선명할 리도 없고 투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의 마음이 순수해지도록 붓다께서는 새겨두기 쉬운 것부터 먼저 설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도록 단련시키셨습니다. 그 뒤 그들의 마음이 강해졌을 때에 비로소 가장 수승한 법인 4성제를 설하십니다.
‘둑카dukkha(괴로움), 사무다야samudaya(괴로움의 원인), 니로다nirodha(괴로움의 소멸), 막가magga(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라고 말씀하시자마자 그들은 지혜를, 법안을, 법을 통찰하는 눈을 얻습니다. 법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붓다께 간청합니다. “붓다시여, 저희들에게 가사를 입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찾아다니던 여성에 대한 일은 잊어버렸습니다. ‘까메사나(감각적인 대상을 찾음)’는 멈췄습니다. 이것이 멈추니 ‘브라흐마짜리예사나’라는 고귀한 수행을 닦겠다고 출가하기를 간청합니다. 붓다께서 허락하십니다.
출가한 뒤에도 이들 형제 서른 명은 함께 지냅니다. ‘빠와pāvā’라는 지역에 가서 은거하며 정진합니다. 그들을 후대에는 ‘빠웨야까pāveyyakā 서른 빅쿠’라고 부릅니다. ‘까티나kathina(해제 가사 보시)’를 이들로 인해서 시작하게 됩니다. 이 빠웨야까 빅쿠들이 빠와 지역에서 우안거 삼 개월을 지내고 사왓티 시에서 안거를 끝내고 머물고 계시는 붓다를 뵙기 위해 옵니다. 붓다께서 비 오는 먼 길을 맨발로 걸어서 오는 빅쿠들을 보시고는 ‘까티나(해제 가사 보시)’를 받을 수 있도록 전체 상가에 허락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아나마딱가 숫따」65)를 설해주십니다.
‘윤회는 너무도 길다. 그 처음을 알 수가 없다. 이렇게 긴 윤회에서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래서 윤회란 몹시 혐오해야 마땅한 것이다.’ 붓다께서 이런 내용의 「아나마딱가 숫따」를 설하십니다. 서른 빅쿠의 위빳사나 지혜를 한 단계 올려주기 위해 설하신 겁니다. 번뇌의 완전한 소멸을 향해 수행할 때 처음 가르침 하나에만 의지해선 발전이 어렵습니다. 마음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윤회를 혐오하는 마음을 많이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마음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합니다. 사유해주어야 합니다. 상기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주지 않으면 이것저것 궁리하다 약간의 사마디(선정, 집중)가 생기면 한 소식 했다고 착각합니다. 그때 교만이 들어옵니다. ‘내가 법을 안다. 다른 이들은 법을 모른다.’ 이렇게 됩니다. 아닙니다. 사유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성숙되도록 틈날 때마다 ‘담마’를 숙고해주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아나마딱가 숫따」가 그들의 위빳사나 지혜가 무르익도록 일깨워 줍니다. 붓다께서 설하십니다. “상사라(윤회)란 몹시도 길었다. 이렇게 길고 긴 상사라는 질리기에 마땅하다.” “그대들의 아득한 상사라를 돌아보라.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없다. 목이 잘려서 죽어야 했던 생들만 보라. 모가지가 잘릴 때마다 솟구쳐 흐른 피를 모으면 대양을 채우고도 넘친다. 단 한 번의 생이 아니다. 모가지가 잘려 죽으면서 흘린 피가 대양의 물보다 많다. 그러니 그대들 상상해 보라.” 붓다께서 빅쿠들에게 묻습니다. “모가지가 잘려 죽으면서 흘린 피와 대양의 물, 어떤 것이 더 많은 것 같으냐?” “붓다시여, 설하신 법을 저희들이 이해했습니다. 상사라(윤회)란 몹시도 장구하여 모가지가 잘리면서 죽은 생들의 피를 만약 모을 수 있다면 대양의 물보다도 더 많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윤회란 상상할 수 없이 장구했습니다. 너무도 장구하여 다른 방법으로 죽는 죽음이 아닌, 오직 참수 혹은 짐승으로 태어나 목이 잘려 죽음, 이러한 죽음으로 흘린 피만 해도 대양의 물보다 많다고 붓다께서 설하십니다. 소로 태어나 목이 잘릴 때 흘린 피들, 염소로 태어나 목이 잘리면서 흘린 피들, 닭의 생으로 살다가 목이 잘리면서 흘린 피들, 돼지였을 때 모가지가 끊어지며 흘린 피들... 이렇게 흘린 피들이 대양을 채운 물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사라(윤회)는 질려 마땅한 것이라고 「아나마딱가 숫따」에서 붓다께서 설하셨습니다.
붓다께서는 빠웨야까 빅쿠들이 윤회의 잔인함에 질려서 집착을 끊고 윤회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만큼,66) 위빳사나 지혜가 충분히 여물도록 일깨웁니다. 「아나마딱가 숫따」를 들으면서 그들이 생각했습니다. ‘그래. 고통을 겪은 게 몹시도 많았다. 생을 헤아릴 수조차 없으니 그 고통들 역시 셀 수가 없다. 우리들은 질릴 만하다’라고 상기했습니다. 그리곤 붓다의 설법을 들으며 사띠했습니다. 사띠하면서 위빳사나 지혜의 힘이 속력을 가지고 치솟아서 마지막엔 아라한의 도와 과에 이르게 됩니다.
이 빠웨야까 서른 빅쿠는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 이익된다는 바른 식견이 생기면서부터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나마딱가 숫따」의 설법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찾음이 완전한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무엇을 얻었냐 하면, 일체의 괴로움을 남김없이 죽이고 모든 집착과 갈구를 말려버린 아라한의 도와 과를 얻었습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찾고 무엇을 얻을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무엇을 갈구해야 할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법을 듣고, ‘우리들이 고귀하지 않은 것들을 찾고 있다. 이것만 한 평생 찾아다니면 윤회의 감옥에서 절대 탈출할 리 없다. 고귀한 갈구를 해야겠다’라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고귀한 찾음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귀한 찾음의 길을 곧게 걸어가서 마지막에는 늙음·병듦·죽음이 없는, 모든 번뇌로부터 완벽하게 멀어진 절대 고요인 열반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참된 이익을 숙고하여 깨닫고 치열하게 정진하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주해]
53) “sussūsā sutavaddhanī, sutaṁ paññāya vaddhanaṁ. paññāya atthaṁ jānāti, ñāto attho sukhāvaho.” (『테라가타』 141번 게송)
54) “sabbapāpassa akaraṇaṁ,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pariyodapanaṁ, etaṁ buddhāna sāsanaṁ.” (『법구경』 183번 게송, 「대전기경」(D14) 참고.)
55) “attanā jarādhammo samāno jarādhammaṁyeva pariyesati.” (「성스러운 구함 경」, M26)
56) “attanā byādhidhammo samāno byādhidhammaṁyeva pariyesati.” 「성스러운 구함 경」, M26)
57) “attanā maraṇadhammo samāno maraṇadhammaṁyeva pariyesati.” (「성스러운 구함 경」, M26)
58) “attanā saṁkilesadhammo samāno saṁkilesadhammaṁyeva pariyesati.” (「성스러운 구함 경」, M26)
59) “attanā jarādhammo samāno jarādhamme ādīnavaṁ viditvā ajaraṁ anuttaraṁ yogakkhemaṁ nibbānaṁ pariyesati.” (「성스러운 구함 경」, M26)
60) 세 가지 찾음(esanā)에 대해서는 「추구 경」(It3:5), 「추구 경」(S45:161), 「합송 경」(D33), 「홀로 머무는 자 경」(A4:38) 참고.
61) 미얀마 『삼장 사전』에서는 ‘바웨사나bhavesanā’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선정에서 나와 걸으며 선정의 행복을 말로 찬탄하고 마음으로 흡족해 하는 것. 와찌깜마vacīkamma(말로 짓는 업), 마노깜마manokamma(마음으로 짓는 업) 두 가지 업. 색계, 무색계 생을 원하는 범천들에게 일어나는 라가rāga(갈망)이다.”
『이띠웃따까 주석서』, 「추구 경」(It54)의 주석 참고.
62) 미얀마 『삼장 사전』에 ‘브라흐마짜리예사나brahmacariyesanā’의 두 가지 뜻이 나온다.
“1. 막가magga라는 8정도를 찾는 브라흐마짜리예사나. 아라한이 돼야 끝남.
2. 잘못된 견해를 잡고 놓지 않는 브라흐마짜리예사나. 수다원이 되면 끝남. 본질은 라가rāga(갈망)와 딧티diṭṭhi(잘못된 견해)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 「홀로 머무는 자 경」(A4:38)의 주석 참고.
63) “api, bhante, bhagavā ekaṁ itthiṁ passeyyā” (율장 『마하왁가mahāvagga』 1.11)
64) “yaṁ vā tumhe itthiṁ gaveseyyātha, yaṁ vā attānaṁ gaveseyyāthā” (율장 『마하왁가』 1.11)
65) 『상윳따 니까야』 「아나마딱가(시작을 알지 못함) 상윳따anamatagga- saṁyutta」의 「삼십 명 경」(S15:13)을 뜻한다.
66) “bhikkhave, alameva sabbasaṅkhāresu nibbindituṁ alaṁ virajjituṁ alaṁ vimuccituṁ.” (「삼십 명 경」, S15:13)
-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가르침>,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옮김
(2023년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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