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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1-3 (물질)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1. 야고보는 5장을 ‘들으라’ 곧 ‘분명히 깨닫는 자가 되어라’로 시작하고 있다.
약 4:13의 ‘들으라’와 본문의 ‘들으라’의 공통점은 재물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마음과 재물로서 성공한 부자들을 향하는 말씀이다.
물질의 부요는 하나님의 축복 중 하나로서 물질로 성공하여 부자가 되는 것은 필요한 것이요 자연스러운 생각이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방법을 떠나 이기적인 욕심에 의한 방법은 악한자의 모습(4:14)이기에 야고보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사항으로 ‘들으라’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2. 하나님 없이 재물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마음과 부자는 들을 귀가 있어도 하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이들은 시편 1:1을 인용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로서 악한자요, 죄인이요, 오만한 자이다.
막 10: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오늘날은 물질필요 시대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세상은 물질로서 부자들은 고생하며 울며 통곡한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의 삶은 물질이 있으면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데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질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물질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문제는 부자들은 물질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의 영혼까지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물질로 인해 자신의 영혼이 죽어감에도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물질 때문에 그 섬김을 게을리 하거나 적당히 행하려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지만 물질 때 문에 자신의 몸이 망가질지라도 물질 위해 헌신을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물질로 적당한 이유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즐기려 한다.
3. 야고보는 부자의 삶을 경계하라 하지만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방법대로 하나님 섬김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부자를 원하신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그 만큼 채워주신다.
믿음생활에 작은 물질로 하나님 섬김에 있어서 인색함이나 억지로 또는 게을리 하는 것이 아닌 물질로 더욱 하나님 섬김으로 받은 축복이 오병이어이다.
오병이어의 축복은 나의 작은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신은 물론 모든 사 람을 배불리도 먹고 남기는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영적인 부유함인 것이다.
어린아이의 작은 소유를 예수님께 드림으로 이루어진 오병 이어의 축복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4. 1절의 부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는 것은 물론 세상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하게 된 자들을 말한다. 이들에 대한 경고가 무엇인가?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게 된다고 말한다.
고생이란 어렵고 고된 일을 겪는 것으로 불행과 재난을 말한다.
그 이유는 2-3절에 말하고 있다.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부자는 단순히 물질의 소유가 많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이유는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이다.
물질의 소유가 크다고 해서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것은 아님에도 물질의 소유가 클수록 물질로 행복해 질것이라 생각한다. 물질부유가 높은 나라가 행 복지수가 낮고 물질소유가 낮은 나라일수록 행복지수가 높은 것을 보면 결코 물질의 부유가 결코 행복의 지수가 아니다.
물질의 소유는 영원하지 못하다. 물질의 소유가 현재와 미래의 행복을 보장 하는 것도 아님에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해 물질의 소유를 많게 하려 한다.
5. 오늘날의 시대를 말세라 한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모르는 시대를 살면서 항상 자신의 삶에 진정한 주인 누구인지를 항상 살펴보아야 한다.
야고보가 말하는 부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2-3절)
부자들의 재물은 분명히 썩어짐에도 영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물질의 부유로 자신을 과시하며 으쓱대려 하려 함은 큰 오산이다.
자신들이 입은 옷의 화려 함과 소유하고 있는 금과 은이 영원히 화려하게 빛을 비출 것이라 말하지만 재물이 썩어지고 녹슨 것이 그들의 심령이 재물을 의지하고 살아옴을 증명하는 것임에도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 재물을 쌓고 있다.
살면서 물질의 소유는 생활에 필요함을 의해서 또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물질의 부유함을 통해 빛나는 물질과 입은 옷으로서 자신이 교만함은 물론 세상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인해 하나님 섬김을 게을리 하거나 멀리 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섬김이 세상 즐거 움을 갖는데 방해 요소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조금씩 타협 또는 변명의 생활은 결국 하나님을 떠난 악의 삶으로 들어서게 된다.
하나님이 물질을 주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 물질을 의지함으로 자신의 욕망과 욕심에 의해 자신의 심령이 썩어지고 좀 먹으며 녹슬어지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불살라지는 삶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야고보서가 말하는 어렵고 고난인 고생인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버림받게 되는 삶이다.
약 5:4-6 (탐심)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6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 하나님의 축복 중에 하나가 물질적인 축복이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이 인정하시는 물질로서 부유함을 누리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자신의 중심. 이기적인 욕심에 의한 부자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다.
자신만을 위한 물질의 부유함으로 재물의 쌓아둠과 화려한 옷을 자랑함으로 영혼까지 좀먹게 하고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부자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
이와같은 부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3절의 말세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이다.
말세는 절실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재물을 쌓아두는 기쁨으로 영혼이 죽어감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
2. 재물 쌓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부자들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자신의 품꾼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의 품삯마저 착취하여 재물 쌓는 재미와 사치로 인한 자신의 평안함과 즐거움만 생각한다.
품군이란 일반적인 노동자들을 말한다.
하루 일한 댓가로 그날그날 먹고 살 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재물을 쌓아둘 여유가 없다.
그럼에도 주인 된 부자들은 이들의 삶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품삯을 지불하지 않고 자신의 재물 쌓기에만 집중하는 행위를 결코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
신 24: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 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기황후의 드라마에 황후가 잉태하지 못하자 부처에게 공을 들여 아들을 달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많은 사람을 죽인다.
하물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절의 중들까지 죽인다.
그리고 드라마 속의 주인공의 아들을 얻고 부처께서 주신 은총이라 말한다.
이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약성경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지옥에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감의 이유가 이와같은 것이다.
3. 본문에서 하나님은 부자와 품군 중 누구의 소리를 들으시는가?
누구의 소리가 하나님 귀에 들렸는가?
품군의 억울한 소리를 세상의 힘과 권세가 듣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들으시고 이들을 위로하여 주신다.
분명한 것은 부자들은 재물을 쌓아두는 재미로 노동력까지 착취하며 마음이 살찌지만 그 영혼은 굶주려 죽게 된다.
그러나 품군들은 마음은 가난할 찌라 도 그 영혼은 오히려 살찐다.
1) 하나님이 부자의 소리를 듣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탐심 때문이다.
부자들의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분명한 탐심이요 탐욕의 증 거이다.
탐심으로 가득한 삶의 모습이 5절이다.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2) 탐심이란 무엇을 갖고 싶거나 차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부당한 욕심을 부리는 것으로 만족을 모르는 욕심 속에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탐심이란 재물을 쌓아두는 재미로 재물이 필요한 곳에 공급되지 못하므로 재물의 궁핍함에 곤란을 겪는 사람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탐심이다.
사도바울은 탐심이 곧 우상숭배로 정의하였다.(골 3:5)
하나님은 물질이 탐심의 요소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필요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를 원하신다.
3) 탐심의 결과는 6절이다.
6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부자들이 행하는 교만의 극치이다.
‘정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신다.
그러나사람들을 쉽게 정죄하고 이들을 죽이는 일을 누가 하는가?
부자가 행한다.
옳은 자는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자이다.
품군들처럼 세상에 호소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 호소하는 자를 하나님은 옳은 자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 님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면서 부자에게 대항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부자들 을 손봐주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품군의 기도의 응답을 믿기 때문이다.
4. 우리는 재물에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삶이 되어야 한다.
부자로서 예수님께 칭찬을 받으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삭게오, 아리마대 요셉과 자주 장사인 루디아이다.
삭게오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자신이 쌓아둔 물질의 사용하는 방법을 올바로 알았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더 큰 은혜를 베푸신다.
그리고 삭게오의 가정을 통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 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재물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통해 부자로 만들어 주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부자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로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부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재물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맡기려 한다.
하나님은 이들을 어리석은 자로 악인이요, 죄인이요, 오만한 자로 보신다.
오히려 힘없이 외치는 품군의 모습을 옳은 자로 여시기고 이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마 11:5, 눅 4:18, 눅 7:22)
약 5:6-9 (귀한 열매)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6절까지는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믿음생활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였다. 7절부터는 말세를 살아가는 동안 농부의 비유를 통해 어떤 믿음으로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농부가 귀한 열매를 맺기 위한 기술은 무엇인가?
남다른 지식과 경험이 중 요하지만 무엇보다 소망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기다림의 인내이다.
경험과 소질 속에 하나님 돌보심의 은총을 바라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믿음생활에 있어서도 영혼을 통해 하나님 섬김보다 재물 쌓는 것에 관심을 두는 세상 사람과는 달리 오직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농부가 아무리 많은 기술과 재능을 갖고 있다할 지라도 농사의 결정적인 요소인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는 기술과 재능이 없다.
세상은 물질로서 기 쁨을 갖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을 보살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오 그 물질의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 함께 않으면 안 된다.
TV의 한 프로그램에서 얼굴 없는 천사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몰래 기부를 해오던 할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두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재산이 수십억대임을 알게 되자 그 재산을 노린 두 아들과 며느리들이 생전 보이지 않던 효도와 아버지 모시기 작전에 전략을 다한다.
서로의 다툼은 그 도가 지나쳐 씁쓸하게 끝나는 장면에서 나오는 자막 ‘부모의 재산이 당연스럽게 자식의 재산이라는 오해 때문에 생기는 세상의 모습’이라 말한다.
두 아들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 아닌 부모의 재산을 섬겼기 때문이라 말한다.
믿음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물질을 섬기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게 하는 드라마였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귀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귀한 열매란 사람만이 귀한 것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귀하게 여기는 열매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귀한데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지 않거나, 하나님은 귀한 데 사람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 열매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인생을 살다가면서 세상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므로 그 이름을 남겨야 함을 말한다.
성경은 열매로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마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사람은 살면서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 열매를 맺을 때 기쁘고 즐겁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 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다.
① 사랑, 희락, 화평은 하나님의 관계,
②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은 사람과의 관계,
③ 충성, 온유, 절제는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열매이다.
믿음의 삶은 열매를 많이 맺을수록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
요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는 하루아침에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통해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을 때 거두는 것이 참된 열매이다.
3. 열매를 맺기 위한 수고는 무엇인가?
① 가지를 통해서 줄기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비바람에도 열매를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한다.
성도는 자신의 고집과 아집을 버리고 예수님 되시는 줄기에 붙어야 생명이 있다.
② 병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좋은 열매는 벌레와 병에 제일 먼저 노출이 된다.
농부가 정성을 다하는 수고와 노력으로 보살피지 않으면 쉽게 죽게 된다.
믿음도 부지런히 살피지 않으면 언제든지 소리없이 병들거나 벌레가 먹어 열매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③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나무들 스스로가 자생력을 가졌지만 농부의 수고와 노력이 없으면 충분한 영양분이 공급되지 못하므로 농부가 원하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
이처럼 믿음의 건강함으로 위해서는 항상 말씀과 기도로서 그 삶이 채워져야 한다.
이 땅 사는 모든 열매는 중력에 끌려 땅으로 떨어지려 한다.
병들거나 약한 열매는 스스로가 아니면 작은 바람에도 쉽게 땅으로 떨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건강한 열매가 되어야 한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 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4.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그러하였듯이 늘 기도하는 말씀과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비워야 한다.
비운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자신을 올바로 보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로서 충분한 시간을 갖는 삶은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올바로 서 있는 자신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말씀과 기도가 충만할수록 그 안에는 자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게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보임은 아직도 충분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되지 못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참된 귀한 열매는 주의 강림 시에 함께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목적이요 본분이다.
세상은 자신도 모르게 바쁘다는 이유로, 힘들고 지친다는 이유로, 질병을 통한 아픔의 이유로 자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명과 합리화 그리고 유혹과 욕심, 시련과 환란 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아닌 세상 흐름에 굴복하게 한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계속해서 세상 흐름에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라 한다.
그리고 그 흐름에 정복당하는 것이 아닌 그 흐름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며 살라고 말씀하신다.
‘주의 강림이 가까우므로 길이 참아 기다리라’(7절)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세상의 흐름에 따라 느슨해지는 믿음이 아닌 농부처럼 세상 흐름 속에 ‘그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냥 흘러가는 삶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이기며 나가는 삶을 말한다.
주의 강림과 농부가 귀한 열매를 바라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① 믿음의 결실을 보상받는다.
주님이 기뻐하심으로 천국잔치에 초청한다.
② 상급이 달라진다.
같은 열매일지라도 상품의 가치가 달라지듯이 혼인잔치의 자리가 달라진다.
③ 주님의 심판이 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천국잔치에 함께 할 수 없다.
밖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뿐이다.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6. 주의 강림 시 까지 농부같이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 인내로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는 이른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귀한 열매를 소망한다.
소망은 기다림으로 이루어진다.
농부는 귀한열매를 거두기 위해 성급함으로 달려들지 않는다.
시기를 기다리며 그 시기에 따라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급하다.
급한 성격 속에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
소망은 약속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이 행한 약속은 기다림 속에 이루어진다.
인생은 기다림의 삶이다.
기다림으로 시작하여 기다림으로 마치는 것이다.
모든 약속이 기다림으로 연관된다.
이유는 아무리 막연한 약속일지라도 그 앞에는 기다림의 소망이 있다.
우리의 기다림은 주님의 강림이다.
강림을 통해 천국잔치에 함께 하는 것이다.
2)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고 말한다.
사람은 흔들릴지라도 믿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욥의 인생이 그러하였다.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통해 주변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고 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욥은 주신자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 말하며 그 믿음이 흔들리 않는다.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인 굳게 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그 삶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상한다.
3)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원망이란 자신의 생각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그 결과에 대해 못 마땅히 여기거나 만족하지 않을 때 남을 탓하거나 불평하며 미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망은 자신의 책임보다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킨다.
불평을 통해 감사보다는 원망의 마음과 말을 많이 하게 된다.
그 결과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미워하는 감정만 갖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결국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게 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행한 일이 바로 서로에 대한 원망이었다.
‘왜 자신에게 이러한 여자를 만들어 주셔서 괜히 죄를 짓게 만드셨느냐?라고 불평하고 서로의 책임을 회피하였다.
원망의 결과는 무엇인가?
①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한다.
서로의 의미는 상대편에 대항하거나 맞서는 것을 말한다.
원망은 서로의 성격, 생활의 습관과 성격으로 인한 견해 차이에서 오는 서로의 주장을 옳다고 고집하는 논쟁에서 시작된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눈에 보여지는 욕심과 욕망으로 인해 환경과 조건에 머무를 때 발생된다.
그러므로 원망에는 감사와 사랑이 존재하지 못한다.
서로 미움으로 다툼만이 있다.
②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반드시 속히 될 일 (계 1:1) 장차 될 일(계 1:19) 마땅히 될 일(계 4:1), 결코 속히 될 일(계22:6) 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평상시에 작은 일에도 서로 배려하며 사랑으로 감사하며 만족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작은 잔에는 적은 물만 들어가도 가득하다. 그러나 큰 잔은 적은 물로서 그 잔을 채울 수 없다.
서로를 비교하거나, 서로에 만족이 없으면 서로가 원망할 수밖에 없다.
원망으로 얻어지는 유익은 무엇인가?
원망은
①생활 습관 중의 하나로 불평과 불만의 연속이다.
② 믿음의 연약함의 증거로 하나님의 축복을 보면서도 불평하고 원망한다.
자신 스스로를 부정적인 시각속에 살게 한다.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일어나기 보다는 환경과 상대방을 탓한다.
그러므로 원망보다 ③고난 뒤에 나타날 축복을 바라보며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야고보서 5:10-11 (인내)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1. 주의 강림 시 까지 믿음의 성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인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한다.
① 사람과의 관계에서 참아주고 배려하는 것을 말하는 것과
② 환경과 상황에서 참아내는 것을 말한다. 본문에서 인내란 끝까지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인내해야 함은 ③ 주님의 약속인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성경은 욥의 신앙을 통해 ‘믿음은 인내’임을 말하고 있다.
욥은 아무런 죄도 없이 단지 사탄의 시험을 통해 고난을 받는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고난을 참으며 하나님의 날을 기다린다.
결국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받는다.
욥은 고난을 통해 자신의 고백이 무엇인가?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 오리라
2. 믿음에 인내를 위한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1) 부딪혀 싸우고자 하는 담대함이다.
인내가 싫어 도망하거나 피하거나 게으름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무작정 덤벼들거나, 가만히 서서 막연함의 기다림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영적싸움이다.
동계 올림픽의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 다 승리자이다.
그러나 막상 경기를 치루면 누가 승리자가 되는가?
끝까지 싸워 이기는 자이다.
처음에는 잘 하였는데 마지막 순간 그 승리를 지키지 못해 우승을 놓치는 경우를 종종 본다.
2)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다.
운동경기처럼 삶에는 지혜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선수가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코치와 감독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지시를 받지 않으면 더 멀리와 넓게 보지 못한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뜻을 이루는 것이다.
3. 인내하는 자의 결과는 무엇인가?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 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속에는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다.
사람과 동물의 성장, 지식과 경험 등을 통한 성장에는 자신을 극복하는 난관을 이겨내야 한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기다리신다.
꿀 한 숟가락을 위해서 꿀벌은 4200번이나 꽃을 쫓아 왕복한다고 한다.
믿음의 인내를 갖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하나님도 함께 기다리시며 ①하나님이 함께 하여주시는 복을 받는다. 또한 ②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여 주심의 복을 받는다.
약 5:12 (맹세)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1. 맹세를 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애씀 때문이다.
‘하늘을 두고 맹세 한다’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는 등의 말이 그러한 예이다.
이는 자신이 조금도 거짓이 없음을 고백함으로 상대방 마음을 움직여 자신을 믿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강한 의지와 주장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2. 성경에서 맹세를 하지 말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의 의지하고 달리 환경과 조건에 의해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맹세보다는 그저 평상시의 신실한 거짓이 없는 정직한 삶을 원하신다.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하시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조건이 맹세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지만 얼마 후 의지와 급한 마음이 사라지거나 기억하지 못하므로 맹세를 지키지 못하는 환경으로 맹세를 통한 거짓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맹세는 단순한 거짓이 아니라 사람에게 큰 상처를 안겨다 준다.
서로의 인격 을 존중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맹세를 통한 인격의 손상은 쉽게 회복될 수 없고 하나님께도 큰 죄가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을 믿어주기 보다는 자신의 신실성을 보여줌으로 맹세 없이도 자신을 보증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3. 하늘이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분별없이 그리고 깊은 생각없이 무책임한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맹세는 자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인생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
지금 현재의 다급함으로 자신이나 상대방의 인생을 송두리째 어려움과 좌절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맹세이다.
이같은 맹세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정죄함을 면치 못하는 것이요(하반절) 하나님의 신앙에서 떠나는 것이다.
4.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자신이 손해가 되고 시련과 어려움이 올지라도 맹세를 지킴으로 무엇보다 자신이 거짓이 없고 신실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맹세는 약속을 생명같이 여기고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그러기에 맹세란 참으로 중요하고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연약한 인생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맹세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정죄를 면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맹세로서 자신의 신실함으로 보증하려 하기 보다는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뜻을 이루어가는 신실성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약 5:13 (고난과 즐거움 중의 기도)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1. 본문에서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고난이란 어려움과 괴로움을 뜻하는 것으로, 사람은 고난으로 출생하여 고난 속에 살다가 고난으로 세상을 마친다.
아담이 범죄 후 사람은 고난 속에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 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성장하고 발전한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참된 은혜 를 받을 수도 없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더욱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큰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나 하나님 밖에서의 삶속에 고난을 면하고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2. 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광야의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나약함으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하였다.
또 사도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행하였던 몇 사람은 고난을 피하여 세상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야고보는 어떻게 행하라 하는가?
기도하라고 한다.
고난은 우리의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고난은 고난자체의 전부가 아니다. 믿음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함이요, 하나님을 능력 행하심을 체험하기 위한 기회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향한 고난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 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난은 인내를 통한 기도의 기회이며, 기도를 통해 믿음의 인격을 더욱 완성하는 기회로 하나님의 능력 행하심과 축복을 체험하며 누리는 기회이다.
3. 예수님이 고난을 당할 실 때 행하신 모습은 기도였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다가올 고난을 생각하며 행한 것이었다.
기도로서 고난을 맞섰다.
제자들은 고난이 무서워 도망하였지만 예수님은 명상, 도망, 다른 방 법을 연구하지 않으셨다.
오직 기도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계속해 고난이 찾아오는가?
그 순간이 기도의 시간이다.
기도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더욱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 보좌로 나아가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두 팔 벌려 맞이 하는 시간이다.
기도할 때 고난이 물러간다.
고난을 통한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기도하는 삶에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고난은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기도의 시간이다.
고난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려 하나님을 더욱 모셔 들이는 시간이다.
낙심하며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여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새 은 혜와 새 기쁨을 체험하는 성도되자.
4.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시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문제로 인한 답답함과 고통이 있는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믿음의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기도함이요, 하나님께 찬송함이다.
기도 속에 하나님이 함께 싶어 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즐거움을 주시는 분이시다.
세상의 방법은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즐거움과 기쁨을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고통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나는 기도조차도 나오지 않는 힘듬과 고통을 체험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이 암울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세상의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없는 기쁨과 즐거움, 진실 된 행복을 체험하였다.
세상의 문제는 그대로 있음에도 내 안의 심령이 행복으로 바뀌었다.
세상적인 이론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내 안에는 그냥 행복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새 인생의 힘이 솟아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슬픔의 생각보다는 기쁨으로 찬송이 저절로 나온다.
나는 오랜 고통의 세월을 통해 깨달았다.
세상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 망과 좌절에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죽이시기까지 하지 않으심은 물론 그 안 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게 함으로 고통의 순간을 통해 하나님이 친히 나를 만나 주시고 그 안에서 찬송이 나오게 함은 하나님만의 은혜요 특권이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5. 진정한 믿음으로 드려지는 찬송은 고난을 통해 이뤄진다.
찬송의 힘은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한다.
기도만큼이나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 찬송이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라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찬송은 하나님은 만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찬송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이다.
단지 좋은 곡을 쓰고 가사를 붙였다고 찬송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와 감사가 있어야 한다.
찬양을 부를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이 있는 영성이 있어야 한다.
찬양은 영적교통을 통한 좀 더 빠르게 새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고전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 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 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6. 찬송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찬송은 성도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생활의 꽃이다.
찬송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결정에 감사하며 드리는 최고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세상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하여 낙심하며 좌절하고 있을 때 믿음의 성도들이 즐거움으로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그 삶속에 주권자가 자신이 아닌 하나님 이심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물론, 하나님이 그 삶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이다.
고난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서 더욱 기도를 행할 때 그 삶에 환경과 조건은 변화가 없어도 그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임한다.
이 때 행하게 되는것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양하며, 이 때 드려지는 찬양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삶을 지켜 주신다는 확신속에 감사함이 넘치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7. 기도는 영적 호흡이며, 찬송은 하나님의 생명이 임재하심을 말한다.
기도와 찬송이 끊어져 있음은 그 삶이 영적으로 죽어 있음을 말한다.
‘죽었다는 것’은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육의 죽음은 육과 영이 분리됨을 말하며, 영의 죽음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리됨을 말한다.
기도로서 영적으로 호흡을 하지 못하고 영적생명이 그 안에 있지 못함은 분명 죽은 것이다.
육의 힘들어 고난당할 때나 육의 즐거움으로 있을 때 기도와 찬송을 통해 그 삶이 분리되어지는 즉 영적 죽음의 상태가 되지 않을 것 을 말하고 있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영혼의 호흡을 계속해야 한다.
시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과 문제없이는 살아가 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적인 사람들과 다른 것은 사람의 정도에 따라 고난의 정도가 다르지만 그 고난을 통해 기도와 찬송을 하는 자와 하지 않느냐의 차이다.
그래서 본문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는가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 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고 말한다.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 삶에 고난과 문제로 인한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무엇보다 그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잠시의 고난과 문제가 아닌 영원한 축복과 기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와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축복의 삶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믿음의 표현이요, 자신을 가장 큰 축복과 기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기도와 찬송이 없다면 그 삶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가물어 메마른 땅과 같은 황량한 속에 일어나는 먼지와 같은 인생이며 영적으로 죽어가는 인생이다.
믿음의 삶은 언제나 항상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인 것을 잊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약 5:14 (병든 중의 기도)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 믿음의 삶에 질병이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병든 자가 고침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예수 님의 사역을 넓은 의미로서 구분하면 말씀을 통한 가르침, 구원을 위한 복음 전파, 병든 자를 치료하는 신유의 역사로 나눈다.
사람에게 질병이 발생하는 이유를 죄로 인함 또는 기타의 이유로 말하기보다 기도의 목적 때문이다.
장로들을 청하라 함은 함께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는 기도를 행할 것을 말하고 있다.
서로 함께 고침을 위하여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죄의 용서와 성령의 역사로 인한 신유의 은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함께 하나님의 뜻을 위한 사역자로서 성장하기 위함이다.
2. 질병에 대한 치료는 신유의 은사를 가진 자만의 특권이 아니다.
신유 목적은 단순히 치료만이 아니다.
신유의 은사는 특별한 사람이 행한 특권이 아니다.
누구나 행할 수 있기에 자랑거리가 아니다.
치유는 은사는 사명자만이 감당하는 것이 아니기에 병을 치유하겠다는 의도의 신유적인 은사를 나타내기보다 함께 기도로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통한 역사와 하나님의 관계를 올바로 성립하며 그 사랑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질병은 자신이 죄로 인함도 아니요, 하나님이 특별한 은사를 위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성품으로 그 사랑을 체험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는 방법이다.
3. 질병의 치유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함이다.
질병만큼 사람의 마음을 연약하게 하는 것이 없다.
육과 정신은 물론 영적 침체까지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질병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사탄은 질병을 당하여 연약해 삶에 죄 때문에 또는 믿음이 나약함을 통해 버림받은 자로서 인정하게 한다.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서 ‘힘들어 안된다’ 라 는 생각을 머릿속에 5번 정도 인정해보아라, 결코 일어서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인도하시고 책임지신다.
치유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고통과 가난한자를 찾아오셨고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자를 고치셨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지나치지 않으셨다.
친히 다가가시거나 치료받고자 달려 나온 사람들을 칭찬과 격려를 하시었다.
그러므로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 삶은 더욱 하나님을 향해 달려 가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도 그 삶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4.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믿음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다.
순종이란 질병을 통해 고침이 없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다.
이유는 우리 삶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의 고침은 예수님의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시다.
현재에도 치료의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이기에 기도로서 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분명하고 확신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더욱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믿음이란 병을 고침 받아도 병을 고침 받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질병의 매개체를 사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그 사랑을 전달하기도 하시지만 우리의 믿음은 무엇보다 순종의 기도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여야 한다.
5. 병을 낳기 위해 기도할 때 유의할 점은 무엇인가?
1) 하나님 영광의 임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기도는 더욱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온다.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체험하게 한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의지함을 버릴 때 역사하신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일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것으로, 자신은 계속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없음을 고백 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지혜이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함을 확신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자신이 누구이며, 질병의 치료를 통해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알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할 수 있다.
질병의 고통은 분명한 하나님 음성을 듣게 하는 기회가 된다.
3)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통해 치료받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질병의 치료를 받을 경우 의사나 다른 기타의 손길을 통할 수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 치료받았느냐를 따지기 보다는 그 손길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느냐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좋은 의사와 약을 만나게 할 수도, 적절한 시기와 때를 통해 치료될 수 도 있다.
치료의 과정에서 어떠한 매개체를 사용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와 역사를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와 영광된 연관성을 감사함으로 체험하였다면 그 방법 또한 하나님의 치료의 방법이다.
4) 믿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아야 한다.
믿음은 행함이다.
질병의 치료를 받은 후 그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하나님은 질병의 치료의 목적을 분명히 하신다.
질병의 치료를 통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으로 하나님이 마음껏 자신을 통해 일을 하실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 삶에 하나님은 치료 뿐 아니라 확실한 갈 길을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신다.
이를 깨닫게 되면 치유의 역사가 없어도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속에 그 삶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간다.
6.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고 계심분임을 항상 인정해야 한다.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간혹 사람들은 질병의 고통이 하나님께 부름받기 위한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로 생각한다.
‘자신은 어떠한 질병에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치유 받아 건강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신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하나님의 질병으로 자신을 깨닫게 하시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부름에는 꼭 질병의 치유를 통한 방법뿐인가? 아니다.
적어도 본문에서는 질병은 기도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께 기도하였지만 응답 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질병을 통해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는 법을 배웠고 자족하기를 배웠다.
7. 하나님은 이 시간도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처럼 살아 가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마음 대로 살아가도록 유도한다.
복잡하고 혼탁한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삶에 기도로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삶의 목적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질병이다.
질병에서 치유함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역사를 찬양하며 자신의 삶을 오직 하나님께만 맡기는 삶이 되어야 한다.
약 5:15 믿음의 기도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동시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마음에 의심과 육신의 정욕을 위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보며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인 하나님에 대한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도의 응답을 바라며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계속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2.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뜻과 방법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응답되기를 원하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 답에 있어서 그 시기와 장소 그리고 방법은 철저히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버림에 있어서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는 자신은 급함에도 하나님은 절대 급하지 않을 수 있다.
내게는 꼭 필요한 응답이지만 하나님은 내게 필요치 않다고 판단하실 때도 있다.
3. 믿음의 기도는 문제의 해결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응답 없는 것이 응답이 될 수도 있다.
이같은 사실을 육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은혜가 될 수 없지만 믿음으로 바라보면 큰 은혜가 된다.
하나님은 결코 응답이 없는 분이 아니시다.
단지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4. 믿음의 기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감격하시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하나님께 영광되는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즐겁고 기쁘게 해 드리는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를 저축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행 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큰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힘들고 어려워 기도할 수 없음에도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주신다.
그러므로 항상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으로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모셔 들여야 한다.
5. 믿음의 기도는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자신을 높이는 삶은 교만이다.
이는 기도의 응답을 자신의 욕구 만족이나 정욕에 의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이 이끄는 대로 응답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이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가까이 하게 하는 것이다.
단순히 기도는 영적인 능력과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이 아닌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이 알아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역사를 베푸신다.
6. 믿음의 기도는 생명력이 있다.
우리의 기도에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적은혜와 생명력으로 성장하며 성공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는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도 과부의 기도를 통해 낙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기도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생명력이 분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7. 믿음의 기도는 육체적 질병에서 회복시킨다.
질병이란 육체적인 또 하나의 시련이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 스스로가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상황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육적인 질병이다.
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친히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병을 지고 채찍에 맞고 십자 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질병에서 자유를 얻었다.
육적, 영적으로 고침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앞에 나와 기도해야 한다.
이를 통해 삶을 점검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 회복하 방법은 믿음으로 인한 기도뿐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였던 벽을 허무는 것이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뢰를 보이는 것이다.
8. 믿음의 기도는 죄에서 사함을 얻게 한다.
삶의 현실은 많은 역경과 고난이 우리 앞에 있다.
그 삶속에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그 삶에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삶은 죄 된 것이다.
그 같은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기준이 ‘적당히 이만하면 되겠지..’라는 변명과 합리화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신의 중심의 죄 된 삶이다.
의인은 하나님 중심이요, 악인의 삶은 자신 중심의 삶이다.
의인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
우리 믿음은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즐겁게 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항상 자신을 발견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이다.
9. 믿음의 기도는 영적 호홉이다.
기도하기를 쉬면 안 된다.
호홉은 사람이 살아있게 하는것이요,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믿음의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약 5:16-18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18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1. ‘기도만이 살길이요, 기도만이 능력’이라 말하면서 ‘기도하라’‘기도하여야 한다’는 말은 수없이 들어왔고 또 들을 것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립하게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 에 자신을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기도로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의 삶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2. 기도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성립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서로의 죄를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살피라는 것이다.
어려움을 당하고 힘듬을 겪을 때 기도로서 해결받기 위한 목적보다는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도로서 살펴보는 것이 당연하다.
기도가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을 품군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기도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
엘리야는 기도로서 이스라엘 땅에 비를 주관하였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닌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하나님 되심을 알리기 위한 기도였다. 세상에 참된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기도로서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자신의 가족과 이웃의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가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진 정한 의인의 간구함이다.
본문에서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말한다.
묵묵히 포기하지 않고 영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것이다.
4. 기도하라는 것은 구하라는 것으로 구하는 자는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신다.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 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구한다는 의미는 종이 주인에게 납작 엎드리어 부탁하는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내세울 수도 없다.
들어주지 않는다고 앙탈부릴 수도 없다.
오직 주인의 긍휼하심에 따라 들어주시기만을 고대하는 모습이다.
우리의 간구는 오직 하나님만이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바랄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알고 더욱 하나님과의 관계가 거룩하고 아름답게 성립 될 수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삶이 되자.
약 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1. 야고보서 5장을 요약하면
1-6절은 재물에 영혼을 의지하지 말 것,
7-11절은 인내로서 믿음을 지킬 것,
13-18절은 기도로서 고난을 이기며 하나님의 뜻 을 이룰 것, 그
리고 19-20절은 진리에서 떠난 영혼을 구원할 것이다.
2. 본문을 통해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미혹으로 진리를 떠난 자들을 돌아서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에서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혹 때문이다.
물질, 염려, 근심 등의 오늘날 미혹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한다.
미혹이란 혼미하게 하여 유혹하는 것을 말한다.
혼미란 말은 이것이 진짜인지, 저것이 진짜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을 갖지 못하니 세상의 많은 소리 속에서 참된 진리를 구분하지 못한다.
특히 오늘날은 진리에 대한 가치관을 올바로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고, 자신과의 관계가 없으면 원만한 것은 다 괜찮다고 생각을 한다.
참된 진리의 개념이 세상의 관념으로 개인의 취향에 따라 각기 달라져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이 좋다’라고 생각한다.
3. 야고보는 진리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표현하며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고 있다.
진리는 단순히 생각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안다는 것은 생각과 이론적이 아닌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체험이란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마음의 변화와 그 삶에 새로운 힘이 동반되어야 한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고 그 부활하 신으로 내 자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체험은 삶의 변화이다.
세상 중심의 삶이 아닌 예수 그리스 도의 중심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4. 야고보서를 통한 야고보의 마지막 부탁은 무엇인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므로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씻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요 우리가 분명하게 해야 할 일이다.
‘진리에서 떠난 사람들을 돌아서게 하는 것’은 최고의 일중에 일이기에 야고보는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강조를 하며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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