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행복한 추억은 오래 간직하고 싶고 불행한 추억은 빨리 망각하고 싶다. 그런 정신머리로 살아왔더니 추억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다. 불행마저 행복으로 치환시켜서 가슴 깊이 간직할 줄 아는 것이 현명한 생활의 태도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해서 키케로가 ‘지난 날의 불행한 추억은 감미롭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에우리피데스 역시 ‘고생했던 추억도 지나고 보니 상쾌하다’고 한 마디 남겼다.
추억은 디지털 문명기기가 발달할수록 위력이 커진다. 올드 팝을 주로 방송하는 모 라디오방송국의 ‘저녁스케치 939’라는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예이다. 저녁 무렵 글을 쓸 때 목소리 아름다운 배미향 씨가 진행하는 이 프로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머리도 잘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행지 사진을 정리하다가 닥종이 인형이나 실감나는 모형으로 재현해놓은 풍경들을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에 젖어 한동안 헤어나질 못한다. 인천의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의 골목들, 서울역사박물관 야외의 전차, 수원 드라마 세트장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최근에는 대구에도 1970년대 스타일의 다방을 재현한 ‘쎄라비’라는 찻집이 등장, 근대문화유산 골목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드라마 ‘사랑비’에 등장했던 세트장인데 솔할공여행사(1688-3372)의 김형미 회장이 대구의 추억여행명소로 살려놓았다. 청라언덕에서 3‧1운동 계단을 다 내려와 계산성당으로 건너가기 직전 도로변 건물 2층에 쎄라비가 자리 잡고 있다. ‘쎄라비’는 ‘이것은 인생’ 정도로 해석된다.
<쎄라비 뮤직박스>
<쎄라비 네온간판>
실내로 들어가면 주황색 공중전화기와 힘께 ‘음악다방 쎄라비’라는 네온 간판이 반겨준다. 서남쪽 모서리에 디제이가 들어가서 판을 틀어주는 뮤직박스가 만들어져 있다. 대형 유리창안쪽 좁은 방이 디제이의 활동 공간이다. 수십 수백 장의 LP판이 꽂힌 장식장, 팝스타들의 친근한 얼굴이 보이는 디스크 재킷에 둘러싸여 턴테이블에 판을 올려놓던 디제이가 그 속에 있는 듯하다. 누군가의 신청을 받아 금방이라도 노래를 들려줄 듯하다. 그의 머리는 왜 길었고 청바지 뒷주머니에는 도끼빗을 쑤셔 넣었던가.
<쎄라비 벽면장식>
손님테이블에는 팔각성냥, 재떨이가 놓여 있다. 물론 담배를 피라는 것은 아니다. 7080세대들은 애인을 기다리며, 음악을 들으며 성냥개비로 탑을 쌓았고 운수를 봐주는 기계에 동전을 집어넣었다. 혹시라도 레지 아가씨 손목 한번 잡아볼 수 있을까 하여 없는 돈에 커피 한 잔을 더 시켰다. 때로는 커피에 싸구려 국산 위스키 한 방울 떨어트린 ‘위커’를 더블로 마시기도 했다. 그런 날은 대개 미팅 애프터가 깨진 날이었다. 대화의 진폭은 매우 다양했다. 사랑과 객기, 독재와 민주화운동, 취업과 아르바이트 등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울 덕수궁 맞은편 골목에는 ‘싱얼롱다방’이란 곳도 있었다. 난 지금도 기억한다. 판소리를 하는 이자람 양의 아버지인 이규대(가수)씨가 건반 앞에 앉아 노래를 지도하고 복사한 악보를 한 장씩 손에 든 손님들은 두어 시간 합창을 했다. 모르는 옆 손님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이런 곳은 일반 음악다방보다 커피값이 조금 비쌌다.
한편 동네 다방의 아침 메뉴로는 에그커피가 있었다. 이른 아침, 간밤에 마신 술로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다방에 가면 마담이나 레지 미스 김은 커피에 달걀 노른자를 넣어줬다. 그게 바로 에그커피였다. 커피가 싫은 날에는 쌍화탕에 달걀 노른자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지금도 지방으로 여행을 가면 일부러 허름한 옛날식 다방을 찾아본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음악이다. 흘러간 팝송 대신 트로트나 라디오방송이 나온다.
커피 재료가 얼마나 비싸다고 나쁜 놈이라는 욕을 먹었던 일부 주방장은 커피에 담배꽁초를 섞은 ‘꽁피’를 팔아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대구의 쎄라비 음악다방은 그렇게 우리의 젊은 시절을 추억하게 만든다. 우리 기쁜 젊은 날을 반추하게 해준다. 민주화를 위해 가슴 졸였던 우리 힘든 젊은 날을 생각나게 한다. 원두커피가 골목을 점령한 요즘 세상, 알 커피 한 스푼에 설탕, 프림 각 한 스푼. 각자 입맛대로 조제한 다음 커피 잔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커피 알갱이가 녹으면서 커피 향이 코 끝을 자극한다. ‘서로 다른 성분이 하나의 잔에서 녹아 새로운 맛을 창조한다’. 그때 그런 진리를 음악다방에서나마 알았더라면!
<쎄라비 출입문>
<쎄라비 내부>
다방을 나오려는데 ‘장발자, 미성년자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생경하게 보인다. 머리 긴 디제이 오빠들, 형님들은 이런 음악다방에 어떻게들 출입했을꼬? 먼지 앉은 거울 속에는 레지 아가씨보다도 마담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게 어울릴 나이가 된 사람이 들어가 있다. 가수 최백호 씨의 ‘낭만에 대하여’를 흥얼거리면서 계단을 다 내려가니 계산성당에서 저녁미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쎄라비 음악다방은 추억여행의 한 페이지를 멋지게 장식해준다. 나이 먹으면서 추억할 것이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이야기 거리가 많으니 행복하다. 어차피 인간은 이야기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 ‘호모스토리쿠스’인 것이다. 대구로 여행을 간다면 매운갈비찜이나 따로국밥만 먹지 말고 골목여행의 묘미에 빠지다가 쎄라비 다방에 들어가 1970∼80년대 음악다방의 분위기에도 몸을 맡겨보자.
그리고 이런 메모 한 장 뮤직박스에 넣어보면 어떨까? ‘신청곡은 호텔 캘리포니아구요, 내 평생 그곳에 꼭 가보고 싶어요.’
<정보>
쎄라비 : 계산성당(대구시 중구 계산동2가 71-1) 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