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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교
김 명 동
텅 빈 운동장엔
세월의 바람이 불어
흙먼지를 휘날린다
아직도 숨어 있는 옛 친구들 작은 발자국
시끄러운 고함소리
날마다 나를 기다리던
책상 위에는
몽당연필이 그려놓은
이름들이 잠자고 있겠지
메아리 속에 묻혀 있는
선생님의 손가락 끝에서 울리던
손풍금소리
내 유년시절의 마음속에서
아직도 노래를 부른다
오늘도 나를 오라고.
아파트
어둠이 내려앉은
까마득한
콘크리트 빙벽
공간 사이에는
서로 무언의 침묵이 가로막고
인기척 없던 창에
하나둘 눈을 뜨는 불빛
차가움에 시선이
떨림으로 멈춰있는데
요란스런 초인종 소리에
기다리던 따슨 온기가
몸을 데우는가
가 면
비가
솔잎 위에 앉으려 해보지만
송곳 같은 잎새는 앉으려는
그를 거부한다.
비가 된 속물
찡그리고 싶은 얼굴
웃음이란 가면을 쓴다.
가식으로 가득 찬
비웃음 같은 미소
누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큰 돌에 맞아 상처가 나도
웃음을 그려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얼굴
밤의 끝을 붙잡고
밝아오는 새벽을 거부하고 싶은 몸부림은
혼자만의 미치광이 놀음인데
아직도 칼날 위에 서서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쳐다보고 있다
착 각
계절을 모르는 햇살에
꽃 몽우리가 이슬을 머금고
마지막 찬바람과 싸우고 있다
성큼 다가왔던 봄 처녀가
발걸음을 주춤거리고 있다
어제가 없는 오늘이 없다지만
아쉬움만 업고 있는 것은 버려야
새로운 것들이 자리를 잡는다
겨우내 숨어 잠자고 있던
송곳 같은 새싹을 밀어 올리려는 봄 사내가
개나리 노란 꽃들의 향년에 취해 비틀거리면
마디마디 하얀 꽃을 매달은 벚꽃이
벌들의 소란 서러움에
아쉬움을 가지 끝에 남겨두고
하얀 나비가 되어 날아 다닌다
* 경북 상주 출생, 시집 어느 바보의 작은 가슴(1990), 고향은 저만치(1992), 꿈속에 별 달(1993), 그대를 사랑하는 이유(2002), 그리움의 마당에는 당신이 주인입니다(2006), 사랑춤(2015), 동구문화상, 예총회장상, 인터넷문학상 등 수상, 대전동구문학회장, 현)영동문인협회장, kimydo812@hanmail.net
찔레꽃
배 수 자
새 가지 끝에서
순백의 마음으로
하얀 꽃잎을 탄생시켰다.
잎은 서로 어긋나게 나오면서도
녹색 화장을 하고
등에는 뽀송뽀송한 잔털이
포근한 어머니의 품속 같다.
바람이 불면
짙은 향기가
인자한 어머니 얼굴을
떠오르게 하여
가슴을 뛰게 한다.
어린 시절에는
논밭에 일을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땅거미가 찾아드는
한적한 오솔길에서
따먹던 추억의 찔레꽃이
오늘따라 옛 추억을
부르고 있다.
찔레꽃 향기가
몸으로 스며들면서
그 향기가 좋아
나도 모르게
옛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 문학박사, 수원 영덕초 수석교사, 제4회 나혜석 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마음의 향기, 얼음새꽃 소리, 사색의 오솔길,
시들지 않는 꽃, 희망을 향하여 등
상 상
박 헌 영
얘들아,
앵무새 초리 몸을 만져보면
정말 조그만해.
75그램 정도.
꼬리까지 25센티미터에
75그램이면 참 조그맣지?
그런데
무게 거의 없는 깃털이 있어
초리가 날 수 있어.
사람도 그래.
사는 데 별 무게 없는 상상이
사람을 날게 해.
삶의 무게 너머로
날게 한단다.
※전남 부안 출생, 시집 나 사는 집, 하늘빛 숨, 아이와 함께 가며, 그대 없이 그대를 사랑합니다, 저 나무 내게 동행하자 한다, 철이네 엄마 아빠, 거품의 힘, 붉은 꽃잎에 쓰다, 한 사람에게만 흐르기에도 강물은 부족하다, 버릴 수 없는 나, 내 시는 없다, 시 선집 즐거워라, 죽으러 가는 저 물소리 등, parnee@hanmail.net
능소화
송 은 애
애초부터 그는 사랑에 눈멀어
끝도 없는 사랑의 멀미로
온전한 햇살을 받아줄 수 없었으니
세상을 향한 도전의 한계는
사랑으로 붉게 물들게 하였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온전한 사랑 이루게 하소서
이미 눈멀어 세상 바라볼 수 없으니
그 너른 가슴 내게 주소서
그 진한 하늘 허락해주소서
온 몸으로 원하오니
천지가 푸르도록
이 열정 받아주소서
욕지도 콩짜란
외로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내뱉기 직전에 만난 너의 모습은
나를 닮아 있었다.
지금은 타향살이에 허기져
울다가 웃다가 세상사 물들어
아나키스트처럼 빌붙어 살지만
세상을
아끼는
사랑하는
흠모하는 마음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테니까
나름 그리워하며 산다.
거미줄바위솔
아직 그곳에 내가 있었다.
나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였으니까
아름다움의 극치 또한 여름을
부르면서 끝을 맺게 했다.
계절이 끝나갈 즈음에
넓게 펼쳐질 인연 따위는
생각지 않았고.
새록새록 스며드는
바람의 색깔은 가슴에 저며든
노을이었다.
목백합
아직은 꼭 다문 입을 열
시간이 되지 않았다.
긴 침묵 속에 여러 날 보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이들 우렁찬 소리 울려 퍼지고
햇살 활짝 웃으며 가슴 두드릴 때
그때 나는 활짝 웃으리라.
그렇게 계절이 온다면
간절히 바라는 단비처럼
소낙비 내릴 것이다.
ㅡ동광초등학교 목백합나무 아래서
인디언국화
노비의 터에 자리 잡은 인디언국화
가슴이 뭉그러져 선혈보다도 더
지독한 그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원래의 그 자리 지키려는 마음이
응고되어 활짝 피어도 피워내도
가슴 한 구석엔 늘 그대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하늘 끝에 닿아있다
* 월간《순수문학》시 등단(1996), 시집 밟혀도 피는 꽃외 9집, 고택의 門을 열다, 한국예총예술문화대상(2013), 대전문학상 수상(2015)
역사를 위한 변명
이 완 형
바람이 반쯤 언 비를 몰고 온다
먹구름이 서쪽 끝에서 일어나 발을 구르듯 비를 뿌릴 모양이다 웅덩이에 빠진 발이 벌써부터 시리다 소를 앞세운 변명까지 혼란스럽다
바람은 재갈물린 적갈색 페이지 사이에서 흔들리고 갈가리 찢긴 사관의 혀가 매섭게 흐느낀다
비는 사이사이를 비집고 식칼처럼 날아들었다 차갑던 기억들이 첨첨添添 더 아리더니 끝내는 무덤덤하게 비껴갈 때였다 역사를 위한 유언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작달비처럼 천기를 훔쳤어도 눈은 분명 서쪽부터 깨어있었다
문풍지 사이로 몸을 삐죽이 들이미는 조간들의 입이 시뻘겋다 밤새 바싹 마른 천기를 훔친 탓일까 익사 직전의 지라시가 비를 주섬주섬 응시하는 시간 아침 TV가 빳빳하게 굳은 뉴스들을 토스트에 끼우면 비상벨처럼 완벽한 거짓들을 게워내는 자명종 거칠게 잡아채는 앱 틈으로 어젯밤의 몸통들이 번거롭게 녹아내리면 능선을 넘어야 할 총알들
이 복귀하는 병사들의 발에 어지럽게 걸리면서 비는 또 다시 뿌득뿌득 하얗게 침묵한다
비를 품은 몸통은 유언들을 꾸역꾸역 나르는 쇠기러기를 경계하지 않는다 아침이 밤을 밤이 아침을 생식하는 이중교배가 날개마다 증식하는 순교가 없어서다 구름 속에서 순교하는 비와 바람의 식욕이 일대일로 대응할 때 세상은 하늘이 되고 하늘은 비로소 세상이 된다 배부른 변명을 상상하는 비가 밤새 교배된 하늘을 삼킨다
응시하는 바람이 뒤뚱뒤뚱 하루를 빼는 사이
TV가 부양하는 몸의 증언
뜬눈 13.6킬로그램 앉은키 121.92센티미터의 혓바닥
끈적끈적한 청록색 눈꺼풀들을 부양시키는 물이끼
파도를 거뜬히 잘라낸 너울이 누르스름 익어가는 식탁
파도는 부서지는 것이라 수억 개의 눈을 가졌다 반은 푸르고 반은 검고 반은 하얗고, 반은 다시 푸르다
먼 파도가 긴 혓바닥을 풀어 시퍼런 비늘들을 겹겹이 증축하는 사이 식탁에서 상투적으로 혈관을 흡착해 눈알들을 꼬깃꼬깃 말리는 비선 가장 화려한 너울의 부활
풀칼라의 방사체 뱀들이 설익은 문자들을 폭식하는 내내 거미들은 수천 개의 임파선을 포트라인에 풀어놓았다 거짓 포즈들의 완벽한 부화 냉동된 몸의 증언들이 꺽꺽 수렁을 기어 나온다
수렁은 잘 물러야 붉은 이가 된다 그래서 엄청난 겨드랑이들이 즐비하다 하나는 떫고 둘은 시고 셋은 비리고 넷은 아리고 다섯은 맵다
“파도가 수렁의 물이끼를 부양하는 동안 눈알을 다 발라먹은 토끼가 여우와 당나귀에게 귀를 내어주는” 너무나 평범한 진실
흑백본능이 토마토처럼 붉다
누가 더 붉을까?
토끼와 여우와 당나귀가 포트라인에 나란히 뜬다
누가 가장 길게 미뤘는가? 누가 가장 먼저 탔는가? 누가 가장 빨리 피했는가? 누가 가장 오래 버텼는가? 누가 가장 잘 맞췄는가?
천기를 누설하는 발가락들 걸을 때마다 물컹거리는 즙이 시다
부서져야 생식하는 파도
물컹거려야 붉은 수렁
육중한 눈을 가져야 포트라인에 뜨는 몸
척척, 독방에서 손사래로 TV를 깨는 누구?
도리질로 파도를 미룰 수 있을까?
포트라인에 뜬 몸의 증언에만 기대는 TV
식지 않는 눈꺼풀을 부양하는 파도
이젠 너울이 맵지 않다
프롬프터
아나콘다의 축축한 비밀이 미간에 달라붙는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이 너의 짤막한 눈빛에 굴복한다
계속해서 포장된 이야기들을 단장하는 새들
먼지처럼 코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젓이 홍당무가 되는 마스코드
왜 바람은 조금씩 입속으로 넣어야 키가 줄지 않을까
벌써 한 시간 째 낚시를 하고 있는데도 배기량을 다 채우지 못했어
바람인형은 자기 탓이라고 하지만 바람은 연기하는 것이라고 했지
파란 눈의 뫼비우스 띠들이 레일을 따라 순회하는 사각 링크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동체를 그들은 이미 점점이 스캔을 했고 참아냈고 무섭게 버렸다
인공지능들이 내가 먹다 버린 시간들을 얼기설기 엮어 수정시킨 황금 알을 눈물도 없이 간음하는 세 줄기, 네 줄기 검은 여우들
사냥이 시작되자 너나 나나 백양나무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사냥이 시작되기 전에 파란 눈의 뫼비우스 띠들을 깨끗이 먹어치우고 나오는 검은 여우를 골라내야 하는 것처럼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기체를 빠르게 훔쳐내고 있는 아나콘다
불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그들은 귀를 막는다
눈썹이 없으니 눈이 점점 뜨거워질 수밖에
캥거루가 거푸집 없이 낙하하는 공을 잡을 수 있을까?
보지 않아도 보이는 꿈의 마술 같은 독설
자석처럼 빨려 들어가는 시선이 돌이킬 수 없는 달콤한 후회
늘어나는 가지 수에 무섭게 달아오르는 모르모트
시큼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모바일
얼굴도 모른 채 뚜벅뚜벅 계단을 오르는 알람
또 라고 읽을 때 왜 라고 묻는 형이상학
실리콘을 주입한 귀가 침묵하는 사이 검은 여우들이 증식을 시작한다
또?
※ 충남 보령 출생, 문학박사, 배재대 국문과 겸임교수, 소설 순수, 노래방 전설 등 다수, lwh8259@hanmail.net
미스터 트롯
김 창 유
저마다 어디선가 소문난 소리꾼들
한자리 모여들어 그 재주 시합하네
모두가 서로 다르듯 그 끼도 유별나네
그토록 섬세하고 그리도 간곡하게
타고난 목소리들 고르고 다듬어 내
모두가 일등이라서 심사자들 애먹네
영혼을 울려주던 자랑스런 보배들
이제는 노고 대신 월계관 나눠쓰고
이 세상 널리 퍼져서 돋아주오 신명을
찾아온 고향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왜 그곳에 가 살지 못하는 걸까
그저 찾아갈 수 없는 첫사랑처럼
아직도 멀리 아껴 두고
그리움만 키우는 걸까
등지고 떠나 온 아픔 때문에 잊어야할 고향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떠나본 그곳
때론 타향살이 힘들기도 하지만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 누가 노래도 했지
허나, 고향은
영욕의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는 나의 뿌리
더 늦기 전에 찾아든 둥지에
옛 얼굴들 보이지 않아도
뒷동산과 문전옥답은 여전하네
무너져 내린 빈집은
늙은 감나무 하나 외롭게 지켜주고
부모형제 떠났어도
갯바람 솔바람에 그리움이 맴도는 그곳
금의환향 꽃길이 아니면 어떠랴
* 충남 서천 출생, 한국 공무원문학협회 회원, 서양화가, kcy42@hanmir.com
늦가을에
김 혜 경
누추해진 가을 햇빛은
꼬리 감추기에 분주하다
잘 가꾼 정원을 포기하고
벌판의 검불까지 챙겨서
이별의 적당한 거리에 서 있다
떠남에 앞서 준비하는
붉거나 푸른 가을이
기억의 발자국을 어지럽힌다
낙엽이 흙 종이에 쓴
나무의 유서처럼
더러는 오만했던 지난 한 해를
더듬어 보는 계절
늦은 가을이라는 건
이른 겨울과 같은 거리에서 꾸는 꿈
일 몰
수평선 목에
피 젖은 붕대 감고
태양이 숨어들고 있다
낮 동안 지녀온 뜨거움에
어둠을 허락하고 받아든 노을
짧은 여정을 거쳐 도착한 곳에서
낯붉히며 내쉬는 낮은 한숨
구름의 얼굴 따라 젖어드는 노을은
사라지는 것 앞에서
잠깐 핏빛으로 숨죽인다
구불어진 날의 끝에서
지는 그대
금간 마음 앉혀놓고
어디로 숨고 있나
커피믹스
잠깐 동안 즐길 너에게
잘못 부어 버린 찬물로
녹지 못한 너 엉켜 버렸다
쓰레기통에 미련 없이 부어내면서
스쳐간 인연을 본다
항상 뜨거움을 원하던 거리에
설익은 온도로 건네던 나
녹이기에 온도가 맞지 않는
사이라는 걸 알았지
급하게 도착한 마음 하나로는 풀어지지 않는 온도
섞여있는 믹서는 끊는
마음으로 녹여야 풀린다는 것
* 경북 대구 출생, ≪상상의 힘≫ 신인상(2009) 수상, lovekim14@hanmail.net
가 을
조 영 숙
맑은 하늘 아래
바람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위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살며시 다가가 꼬리를 잡자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가을이 요동칩니다.
해가 지고 노래하던 새들도 떠난
캄캄한 밤
귀뚜라미가 노래합니다.
살며시 다가가 손으로 움키자
가을 소리 멈추고
바위 같은 침묵이 흐릅니다.
밤알이 밤낮없이
툭툭 떨어집니다.
밤 떨어지는 소리
가을의 음표입니다.
이른 아침 주운 알밤을 입에 깨물어
가을이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깨달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말을 부정하지 않게 되었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조금 보완하면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은가
이를테면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누가 말했다면
예전에는 왜 그가 나쁜 사람이냐고 시비를 걸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을 부정적인 것에 빼앗긴다면
그때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긍정할 수 있지 않은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보상을 기대하다 실망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를테면 '내가 네게 해 준 것이 얼마인데 네가 이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전에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 상대에게 보상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이미 다른 곳에서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면 즐거움으로 베풀 수 있지 않은가
사람 사이에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그의 말을 존중하고 들어준다면
사람 사이에 베푼 만큼 받아야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때 그곳에 맑은 사랑의 샘이 흐를 것이다
소쩍새
봄 밤
소쩍새 울음
진달래꽃 닮아
설움에 젖어드네
한여름 밤
천둥과 번개로 깨뜨렸나
태풍으로 날려 보냈나
장마 비로 씻어냈나
누에 실 같은 한(恨)을
가을 새벽
소쩍새 울음
산사(山寺)의 풍경(風磬)처럼
경건(敬虔)으로 숙연하네
길 위에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보며
처음부터 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땅 속에서 부드럽게 살고 싶었다.
누군가 땅을 헤집고 길을 냈다.
부드러우면 살아남을 수 없어 외피를 두껍게 했다.
그리하여 햇볕에 그을리고 밟혀도 견디어야 했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밟는 길 위의 나무뿌리
그렇게 뿌리는 나무 외피처럼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처음부터 거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마음을 헤집고 생채기를 냈다.
부드러운 마음이 밟히고, 굳은 마음이 된다. 살아남기 위해
상체 근육운동 풀기
오십견, 차일피일 병원가기를 미루다
어깨 스트레칭으로 고쳐 보기로 다짐한다
이웃 아파트의 상체근육 운동기구를 이용하여
양손에 손잡이를 잡고 굴레에 의지해 아픈 어깨를 편다
두런두런 사람 목소리 들리고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정겹다
초목이 춤을 추고, 새들이 노래하고
자동차들이 큰 길로 지나고
대로변 신호등은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깜박이고
상체 근육 운동기구에 의지해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며 움츠렸던 어깨를 펼친다
어깨를 고치기 위한 스트레칭을 하며
내 안의 움츠렸던 마음의 주름까지 펴진다
분주한 일상을 멈추고
어깨를 힘에 겹게 사부작사부작 펴는데 집중한다
운동기구 앞에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은 없고 주차되었던
승용차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새소리도 잦아들고 고요가 찾아오면
무엇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굴레에 얹힌 손은 움직임을 반복한다.
※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수료, 대전시민대학 웰다잉 강사, ysc1951@naver.com
희 망
전 월 득
내 나이 일흔 살에
맘속에 꽃씨를 심어요
고운 흙 살살 펴서
다독다독 묻어요
예쁜 싹 틔우라고
날마다 물도 줄래요
내 나이 일흔 살에
못다 핀 꽃 한 송이
피워 내려고
하얀 머릿속 들추면서
손가락 나불나불
자판에 키스 할래요
햇살은 눈부시고
희야!
하늘이 차암
뽀송뽀송하다 잉?
연둣빛 너울 속으로
산보 갈까나
어느새 연산홍은
바닥에 누워
처절한 하소연에
눈물 짓더라
바람처럼
지나가는 세월
꼼짝마라
잡아놔야 쓰겄다 잉?
겨울비
음산한 잿빛
어둠속으로
추적추적
비가 오네요
그대 즐기던
애호박 부침
소주잔이
그네 뛰고
종일토록
조잘거리는
빗속으로
그대 하얀 미소가
서성이네요
*충남 부여 출생, 한밭대 문학창작과정 수강, 서예가
유월의 기억 저편
김 근 수
모닥불 그리움의 연기
초록의 미루나무 잎을 타고
하늬바람에 애무하는 유월이여
길 옆 풀벌레 싸리나무 사이
칡넝쿨의 열차를 타고
사랑놀이 즐기는 유월아
뒷산 뻐꾸기
조각구름에 사연 실어
내 마음의 창에
희망을 그려 넣은 유월
그림처럼 밀려온 마음의 돛단배
맘껏 유영하고 휘젓는
보리 내음 향기
오, 내 그리움의 유월이여!
오월을 사랑하다
꽃봉오리 활짝 핀
향긋한 녹음의 오월
아기자기한 라일락 향기
함초롬히 젖어나는데
산과 들에 핀 들꽃들
그대 사랑한 시간들
다시 보고 싶어도
무정히 사라지는 오월
리라꽃 아름다운 맹세로
사랑은 오는 듯 하고
아직 피지 않은
꽃들의 가슴을 흔들어대는데
만나기 전부터
그리움을 먼저 배워버린
수줍은 내 사랑
오월의 품에서 노래하리라
새봄을 닮은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사랑하는 어머니
사과 꽃, 필 무렵이면
희망 찬 모습으로 세상 그려 가시던
하늘같고 바다처럼 자애로운 어머니
어머니의 계절 봄이 찾아왔습니다.
오색저고리 바람에 날리며
수줍은 꽃가마 타고 지나온 동백 길
그 고운 모습은
하얀 백발과 깊은 주름살로 변했습니다.
백 번, 천 번을 다시 살아도
다 갚지 못할 크나 큰 은혜의 어머니!
앞동산 언덕에 활짝 피어난
산수유 노란웃음 들이마시며.
깊은 밤 별들까지 품고 꿈길도 열어주시는
어머니는 내면의 은은함이
싱그러운 한 송이 백합이었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늙어버리고 가련한 어머니
천둥소리도 온 몸으로 덮어 침묵으로 돌리고
우리를 감싸고 안으셨습니다.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도
어머니의 아들, 딸로 태어나겠습니다.
우리들의 어린 날
내 작은 손목 잡으시고
환하게 웃으며 학교길 배웅하던 어머니
나,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는 어머니 마음
드릴 것 없어 봄꽃 한 송이 드립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 계간 문학세상 신인상, 금강축제 금강문학상, 한국농촌문학상 대상, <한국문학신문> 대전광역시 본부장, 문화체육관광부 ‘책 읽기 캠페 인’ 초청 작가, 시집 유천동 블루스, 오월의 연가 등, powerg@choi.com.
이 석 구
한 소년이 생각나요
옛적
어느 산골 마을에
나싱개 지천이던 시절 있었습니다
그즈음이면
뒷산엔 어김없이 진달래가 만발했고
마을 앞 한 길가엔
바람길 따라나선 많은 꽃잎이
나풀나풀 맑은 하늘을 수없이 거닐었어요
그러다가 힘이 들면
바닥에 마침내 엉덩이 깔고
서로를 위로하듯 수북이 쌓여
길게 벚꽃길 만들었지요
지금도 생각이 나요
키 작아 앉지 못하던 한 소년
가랑이 안장 밑 사이에 걸치고
힘껏 자전거 페달 밟아대던 그 소년
달리고 또 달리며
봄과 함께 휘몰아가듯
온통 꽃잎 되어 흩어져가던
문득
그 옛적
한 소년이 생각나요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잊었습니다
한참을 잊고 살았습니다
당신이 있으니 어둠이 있고
당신이 있으니 밝음도 있는 것을
당신이 있으니 흐림이 있고
당신이 있으니 맑음도 있는 것을
참으로 한참을 잊고 살았습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온통 꽃길인 것은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목나무에 새잎 나고
때가 되면
꽃 피고 열매 맺는 자연의 이치가
바로 당신이 있기 때문인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교만함
그 교만함이 내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호기심 하나에
모험 하나를 내어주며
잔잔한 고요의 가치를 찾아가는 길이랍니다
나이 더할수록
어설픈 몸짓들이 익숙한 일상이 되어 가고
간간이 다가오는 새로움은
침묵이란 사슬로 구속되지요
마음에 담아둔 말 다 하고
생각나는 대로 다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남의 말
남의 행동 하나하나 곱씹으며
나를 돌아보는 지혜
산다는 것은
조용히 그런 현명함을 찾아가는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랍니다
어서 오세요
부끄러워요
당신이 좋아 살짝 곁눈질했거든요
발갛게 얼굴 달아오르네요
두 손으로 서둘러 가려보지만
이미 들켜버린 마음은 마구 뛰기만 해요
어서 오세요
빗장 열어 드릴게요
제 가슴 그리 넓은 것은 아니지만
둘이서 마주 보고
매일매일 속삭이며 사랑 나눌 만한
그런 작은 공터 하나쯤은 있거든요
길진 않지만
조용히 산책할만한 좁은 오솔길도 있고
두레박 하나 놓인 작은 옹달샘
그곳에서 맑은 물도 한 그릇 대접할게요
어서 오세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요
그냥
왠지 좀 부끄럽거든요
봄 꽃
세상
낮게 살 일이다
봄길 걷다 보니 겨우 몇 밀리
보랏빛 살짝 드리운 작은 꽃들이
키 작은 발밑에 지천으로 깔리고
눈에 보이지 않던 낮은 세상이 온통 꽃 천지로세
※ 충남 논산 출생, 이학박사, 현)용남중학교 교장, ≪상상의 힘≫ 신인상 수상(2018), seokkoo@hanmail.net
동태 한 마리
노 복 래
햇살 저무는 어느 가을, 소금기 지느러미에 숨긴 동태 한 마리 우리 집으로 오고 있었네. 버그내장에 가신 할아버지의 점심값으로 끌려 온 긴 도시락, 자전거 짐받이에 묶여 요란하게 호송되고 있었지. 바다로 통하는 물길을 기억하려는 듯, 온 몸을 쥐어짜 흘리고 있는 물기가 잔잔한 바람을 부르고 있었네. 배웅 나갔던 아내와 난 창백해진 할아버지의 모습에 신발이 벗겨질 뻔도 했지. 노인의 허기진 배가 내는 꼬르륵 소리, 맞아, 필시 몸이 망가지는 소리였던 게야. 삼십 리 신작로 위에 부연 먼지로 떠 있던 식솔들의 눈동자, 그것이 노인에겐 희망이었던 게지. 장날의 여독을 못 풀어내고 끝내 저승으로 장을 보러 가신 우리 할아버지, 맞아, 지금이 돌아오실 시간인 게야. 노인에게 자라 노인이 된 나, 오늘 밥상에 놓인 동태의 꼬르륵 소리에 맞춰, 낡은 자전거의 페달만 밟고 있네.
아내의 소리
싸악 싸악 싸-싸악
오늘 아침도 적막을 깨고
일정한 리듬에 맞추어
쌀 씻는 소리가 들린다
조심스럽게, 때로는 우아하게
쌀알마저도 웃게 만드는
찰지고 보배로운 소리
싸악 싸악 싸-싸악
그 노래 소리를 녹음하여
무형문화재 유산에 등재하고 싶다
지구촌 모든 이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아내가 들려주는 해맑은, 생명의 소리
※ 충남 예산 출생, 한밭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 토목공학 석사, 논산시 수도 사업소장, 한밭대 외래강사 역임,(주)동양엔지니어링 부회장
하늘아래 땅위에
송 남 영
시간의 흐름 속에
무뎌진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
하늘을 유유히
흐르는 구름인 양
너는 그렇게
하늘 아래 떠도는구나.
구름 따라 떠도는
바람에 마음 담아
흐르고 흘러
땅위에 뿌리 내린
이름 없는 들꽃인 양
나는 이렇게
땅위에 그리움 심는다.
하늘아래 흐르는 너
땅위에서 그리는 나
세월 흘러 돌고 돌아올
다시 찾을 그리움으로
하늘아래 땅위에
그렇게 살자꾸나.
나도 꽃들처럼
언제나 아름다운 꽃들처럼
내 모습 아름다운 사람으로
당신에게 기억되고 싶습니다.
세상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 없는
세상 어떤 물감에도 물들지 않는
꽃들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
변덕스럽지 않고 까탈스럽지 않은
언제나 같은 향기와 늘 같은 모습
처음처럼 편안하고 휴식 같은 사람
제각기 빛깔 다른 꽃들처럼
내 모습 나만 지닌 나의 향기
당신에게 향기롭고 싶습니다.
세상 죽음 다할 때까지 변치 않는
세상 사랑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당신에게 사랑향기 가득한 사람
오직 당신에게만 향기 낼 수 있는
오직 당신에게만 빛깔 낼 수 있는
당신만 바라보는 사랑스런 사람
그대에게 나는
칙칙한 어둠속에
마음 열 수 없는 고독처럼
그립고 보고픈 사람으로 떠오르는
밝은 햇살이고 싶다.
처절한 외로움에
바다가 되는 눈물 흘러도
기대어 울 가슴으로 떠오르는
깊은 바다이고 싶다.
홀로 떠난 여행길에
두 손 잡고 함께 걷고 싶은
늘 옆에 두고 싶은 애인처럼
흐뭇한 설렘이고 싶다.
들꽃으로 3
노란빛, 보랏빛
분홍빛, 하얀빛
올해도 어김없이
네 곁에 꽃으로 핀다.
햇살 담고 빼꼼이
수줍게 고갤 내민다.
작은 꽃잎
가녀린 몸짓
짓밟혀도 꿋꿋한
강인한 나이고 싶다.
네 곁에
설 수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도
나는 부끄럽지 않다.
초라함에 잊혀지는
보잘 것 없는 야생화
흔하디 흔한 꽃이지만
때론 아주 소중한 꽃으로
큰사랑에 목메어 오는
나는야 강인한 들꽃으로
그리움은 꽃이 되어
창밖에 맺힌 빗방울에
멍하니 시선을 멈추고
표정 없는 얼굴 가득 그려진
사랑하는 그대 그리움으로
목마름에 못내 마시지 못한
그대와 사이에 놓인 차 한 잔
어느 사이 그리움은 꽃이 되어
두 볼 타고 주루룩 흘러내린다.
※ 대전 출생, 건양대 상담대학원 졸업, 상담심리학 석사, 프리랜서 강사, CMB 대전·충남·세종 시민기자, 사회적 협동조합 희망 찾기 이사, sny10197@hanmail.net
착한 농부
오 월 석
향포골 시냇물 수백 년 흐르는 곳
덜컹이던 달구지길 신작로 되고
푸석푸석하던 초가집 허물 벗어 양옥집 되었다.
남산의 올 곧은 나무들 사계절 옷 갈아입고
새벽부터 인간의 삶을 염탐하러 내려온다.
누이가 잡아준 다슬기 먹고 연명한 삶
허덕이며 작대기 들고 지게 지며 살아온 세월
들판의 잡초만큼 많았던 사연들
타인에게 더 줄까 고민하고
혹시나 부족할까 번뇌했던 시간들
고된 농사일 부러뜨려 아궁이에 처넣고
뿌연 매운 시름 굴뚝으로 날렸다.
뚝딱뚝딱 뭇 사람들 쉼터 만들고
솔바람 불어 정자에 누워 낮잠 청하면
갓 태어난 매미가 자장가를 들려준다.
외양간 황소울음 새벽 문 열고
축 처진 어깨로 이슬 내리는 어둑한 밤
온 마을 개구리들 모두 모여 사는 이야기 한창이다.
해정(海亭)의 사랑을 듬뿍 담아 심은 나무숲이 되고
그의 고운 마음, 착한 목소리 맑은 시냇물로 흐른다.
지난 수십 년 세월 날마다 걷던 아슬아슬한 논두렁길
지금은 손자들이 아장아장 그 길을 걷는다.
*海亭 : 아버지 칠순 기념으로 서예가 하산 선생이 아버지께 지어준 호(號)
※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moon5865@hanba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