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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사랑, 그리고 가족
진 재 훈
지역의 어느 유명인사가 쓴 신문 칼럼을 보니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큰 걱정거리가 돈, 사랑 그리고 가족이란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사람들은 늘 돈, 돈, 돈 하면서 살아간다.
최근 모 전직 대통령도 돈 때문에 차디찬 감옥에서 여생을 마칠 위기에 놓였다. 서민에 비하면 몇 백배 많은 부와 명예를 얻었음에도 더 많은 돈을 갖으려는 욕심 때문에 결국 패가망신한 것이다. 돈은 때론 약이 될 때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독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이 있다. ‘돈’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신파극처럼 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마주치는 큰 숙제임에 틀림없다. 나도 돈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대학을 서울로 가게 되자 우리 부모님은 매 학기 초만 되면 등록금 때문에 동네방네 돈을 꾸러 다니기 일쑤였다. 등록금 납부일이 지나면 자식에게 해가 될까 돈 빌릴 궁리에 밤잠을 설치셨다 한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은행차입은 엄두도 못 내고 그냥 이웃에게서 비싼 고리이자를 주고 돈을 융통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으니, 그때 부모님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어머님은 큰 아들인 내가 서울서 내려오면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돈 때문에 걱정이 더 앞섰다고 지금도 말씀하신다.
나도 자식을 키워보니, 돈 마련에 대한 부모로서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모님 도움 덕에 대학 졸업 후 취직하여 가정을 꾸리고 그럭저럭 살아왔으니 나에게 돈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또 한편으로는 돈 때문에 가슴 졸였던 경우도 있었다.
모임을 함께하는 지인에게 연대보증을 잘못서 말 그대로 몇 천 만원을 목돈으로 주고 푼돈을 받으며 십여 년을 마음고생 했던 적도 있었다. 또 주식 열풍에 현혹돼 주식 주자도 모르는 문외한이 주택매입 잔금을 단기간에 용돈 좀 벌려고 주식에 투자한 적이 있다. 순식간에 큰 손실이 나고, 아파트 잔금 날짜는 다가오고, 돈 걱정에 식구 몰래 밤새 끙끙 앓았던 적도 있다. 나는 돈복이 별로 없는 팔자인데 괜한 돈 욕심을 내다 낭패를 본 것 같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버드대학 교수인 마이클 센델은 성(sex), 입학자격, 환경, 사회봉사 등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가족도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사람이 살아가는 생명의 원동력 그 자체이다. 사랑에는 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 사랑이 있고, 친구 또는 형제애 등을 말하는 ‘필리아’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인 ‘스토르게’ 그리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아가페’ 사랑이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중에서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가페’ 사랑이 제일 어렵고 힘들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어렴풋이 사랑에 눈을 뜬 것 같다.
6학년 때, 큰 도시에서 시골에 있는 우리 학교로 전학 온 여자 아이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탤런트처럼 날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우리 반 여자애들과는 금방 구별이 됐다. 목까지 올라오는 새빨간 스웨터가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마치 인형처럼 예뻐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그 안타까운 마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낀 것이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때는 흰색 칼라에 교복을 단정히 입고 양 갈래 머리를 딴 이웃집 여자 애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냈다. 어느 날, 뚝 방에 앉아 해질녘 석양을 바라보며 기타도 치고 노래도 하며 어설픈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의 큰언니가 불쑥 나타나 성화를 내며 다짜고짜 그 친구를 집으로 데려갔다.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황당했던 아픈 추억이 있다. 그 때 장면이 아직도 내 머리 속에 아련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부부간의 정이 더 애절했던 것 같다.
아내가 대전 모대학병원에 제왕절개수술로 세 번째인 아들을 낳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간 후 장모님과 6시간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기다리는 내내 혹시 수술이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하고 초조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내 혼자 수술실에 홀로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느꼈을 불안감과 고독감을 상상하며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마음속으로 ‘제발 무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처음으로 신에게 빌었던 것 같다. 그 때의 애틋한 감정이 부부간의 사랑 아니었던가 싶다.
세대를 넘기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묵직한 사랑이 아닌가 싶다.
나는 마흔 살 가까이 돼서 늦둥이 아들을 보았다. 2년 전 아버지가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맬 때 해병대 복무중인 늦둥이 아들이 위급한 상황을 연락 받고 한 걸음에 달려와 할아버지 손을 잡아주던 모습이 생생하다. 제복을 입은 늠름한 아들 손을 꼭 잡고 오랜 동안 장손과 무언의 눈빛을 교환하며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후 며칠 만에 아버지는 가족의 소원대로 고통 없이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손주로 이어지는 피를 나누는 혈육의 정도 아마 사랑 중 가장 큰 사랑이 아닐까 싶다.
‘가족’은 늘 내 주변에서 나와 희(喜).노(怒).애(愛).락(樂)을 함께 해온 동반자다.
초등학교 시절, 학기 초에는 항상 공개적으로 가정환경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중 식구 수를 묻는 것이 제일 싫었다. 5명인 우리 형제 숫자가 너무 많아 창피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요즘은 평균 자녀수가 한 가정에 보통 한 두 명인데, 우리 부부는 드물게 3남매를 두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잘 한 일인 것 같다. 아이들도 형제를 많이 낳아 줘 고맙다는 얘기를 수시로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시골집 가훈은 ‘가화만사성“이었다. 그래선지 애들 모두가 가족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자란 것 같다. 특히 누나 둘이서 남동생을 잘 챙겨주고 위해주는 것을 보면 내 자식인지 딸들 ‘자식’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지금은 시집간 딸에게서 외손주가 생겨 가족 구성원이 하나 더 늘었다. 내리 사랑이라고 자식 키울 때보다 훨씬 더 손주가 예쁘다. 항상 좋은 곳에 데려가고 싶고, 좋은 장난감도 많이 사주고 싶다.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는 죽음 앞에서, 돈과 일에 조금 덜 시간을 할애하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나는 돈이 남부럽지 않게 많지는 않아도 남에게 손 내밀 정도는 아니니 그 것으로 만족하고, 그 동안 돈과 일보다는 가족을 우선한 삶을 살았으나 스티브 잡스처럼 후회는 없다. 가족 간에 사랑이 있으니 그것 또한 보람이고 기쁨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있어서 돈, 사랑, 가족은 걱정거리가 아닌 내가 살아가야 할 존재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돈, 사랑, 가족 말고 마음 편한 친구도 하나 있었으면 싶다. 유안진 작가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책에서처럼 저녁 먹고 아무 때라도 마음 내키면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랑과 우정 사이를 넘나들며 문학과 철학, 예술과 인생을 논하며 후반부 내 삶을 풍요롭게 동행해 줄 도반(道伴)같은 친구 말이다.
너무 큰 욕심일까?
선거의 추억
미국 대통령선거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치고는 너무도 유치한 트럼프의 선거 불복이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다. 세계 초강대국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망신을 주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 ‘꽃’이다. 그리고 패자는 깨끗하게 선거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정치의 핵심 미덕이다. 이런 미국의 대선 상황을 바라보니 내게도 지난 과거 선거의 추억이 떠오른다.
첫 번째 기억은 초등학교 전교 회장 선거에 대한 추억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도시, 농촌 학생들이 섞여 있는 군청소재지 내 학생수가 2천 명 정도 되는 학교였다. 지금은 어떻게 초등학교 전교 회장을 뽑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학교는 미국 대통령 선출 방법과 유사한 간접선거 방식을 채택했다. 먼저 회장에 입후보한 사람이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출마소견을 발표한다. 그리고 각 학년 반 회장 및 부회장으로 구성된 대의원이 학급구성원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투표장에 모여 전교 회장을 뽑는 방식이다.
요즘은 학생 임원 선거가 어머님들의 치맛바람으로 골치가 아프다고 한다. 자식을 전교 회장에 당선시키기 위해서는 어른 선거 못지않게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액수의 돈이 들어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전교회장 선거에 4명이 출마했는데, 아버지가 높은 직 공무원이거나 공장 사장 등 나보다 가정환경이 훨씬 좋은 애들이 경쟁 상대였다. 나는 가난한 농촌 출신으로 다른 출마자들에 비해 여러 가지 조건에서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촌뜨기였다. 하지만 강단에서 연설한 회장 출마의 변이 전교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지 전교 회장에 당선됐다. 우리 옆집에 고등학생 사촌형님이 살고 있었는데 원고 쓸 때 많은 도움을 준 덕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선생님들께서도 빈부 차별을 두지 않고 공정하게 선거를 관리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돈 많고 힘 있는 부모를 가진 아이가 전교 회장에 당선되면 학교로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사심 없이 내가 전교 회장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과는 50년 내내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내 인생의 멘토이시고 참 스승님이시다.
두 번째 잊지 못할 선거는 내가 사는 아파트 입주자대표 회장선거에 대한 기억이다. 신문에 가끔 입주자대표 회장의 이권 개입에 대한 비리기사를 보면서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대표회장은 자기 시간을 할애하면서 마을 주민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직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에선 색안경을 끼고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니 말이다.
12개동 1100여 세대가 거주하는 우리 아파트도 2015년 입주자대표회장 선거로 치열했다. 나와 경쟁한 상대는 최초 입주 시부터 통장생활을 오래 한 덕에 주민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나는 직장생활 때문에 주민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시간이 적었기에 선거에서는 상당히 불리한 조건에 놓였다. 아파트에서는 규약 상 선거관리위원회를 구성해 공정하게 선거를 한다. 먼저 해당 동주민이 각 동 대표를 선출하고, 선출된 동 대표 중에서 대표회장 출마를 선언한 사람을 대상으로 전주민의 투표로 최종 대표회장을 뽑는 방식이다. 나는 우리 아파트가 대전 서구의 중심에 있고 여러 가지로 살기 좋은 아파트임에도 평판이 그리 썩 좋지 못한 것이 대표회장 출마 이유였다. 이것은 아파트를 위해 일하는 주민대표들이 맡은 일을 잘 못 처리했기 때문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선거가 끝나고 개표하는 날은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표결과를 보며 초조해 하는 입후보자들처럼 가슴을 졸였다. 12개 동 개표함을 차례로 열고 계표 집계를 했는데, 처음 내가 사는 동 아파트 개표함이 열리자 상대 후보보다는 근소한 차이로 앞서 나갔다. 그러나 상대가 거주하는 동 개표함을 열 때는 결과가 뒤집어졌다. 수없이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다 마지막 한 개 동 개표함을 남겨 놓은 상황에서 내가 스무 표정도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 내 선거 참관인은 사실상 결과를 뒤집기가 어려운 표차니 내게 마음 편히 먹고 일찍 쉬라고 연락을 보내줬다. 식구와 서로 선거기간 동안 고생했다고 위로를 나누며 맥주 한 잔 하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또 울렸다. 막판 개표에서 2표 차이로 내가 역전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아파트 관리소장의 공식적 연락을 받고나니 최종 당선된 것이 확실함을 알았다.
그러나, 다음날 상대 후보는 승복하지 않고 개표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재검표를 요청했다. 상대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선거에 관여했던 모든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했다. 결국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다시 재검표하기로 결정이 되었고, 개표 결과는 마찬가지로 2표 차이로 최종 결론이 났다. 아파트 대표회장이 무슨 큰 감투라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처럼 재검표까지 가는 과정을 거쳤는지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참 씁쓸하다. 나는 저런 상황이라면 미련 없이 깨끗이 승복했을 것 같다. 인생 구차하지 않게……
경쟁한 동 대표에게는 임원 자격을 주고 포용하며 2년의 입주자 대표회장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2년의 대표회장 직책을 맡으면서, 우리 아파트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지역방송 협찬으로 아파트 입주민 노래자랑 대잔치도 열었고, 아파트 신문을 발행해 주민과 소통하는 데도 신경을 썼다. 이런저런 결실을 맺고, 조금씩 생활에 적응을 하게 되었다.
2016년 대전광역시에서 시상하는 모범아파트 단지에 선정되어 대전시장으로부터 상패도 받았다. 그 뒤 대전 서구청 주관 에너지 절약경연대회에서 내가 직접 PT시연에 나서 최우수상을 받아 500만원의 포상금으로 마을 잔치도 열게 되었다. 그리고 행정안전부 주관 모범 공동주택단지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7천만 원의 예산을 받아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관리사무소 리모델링 공사를 끝내고, 주민 취미 및 문화 활동 공간을 확보했던 것이 큰 보람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아파트 주변을 나서다 보면 “회장님, 잘 지내시죠?”하며 반갑게 달려와 손을 맞잡아 주시는 청소 아주머니, 경비 아저씨들을 만나면 그때 소임을 잘 맡았구나 하는 고마운 마음이 들고 무척 반갑다. 직장생활과 아파트 대표회장 활동을 겸직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선거 불복현상을 바라보며 내 선거 경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바이든 당선인의 심정을 조금 더 헤아려 본다. 두 번에 걸친 선거의 추억, 결과적으로 내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사건이었다.
* 충북 청주 출생, 금강불교대 수료, jhj43211@naver.com
약육강식
백 경 화
누가 머리 나쁜 사람을 보고 ‘새대가리’라고 말했던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산에 가서 새들의 일상을 단 몇 시간만이라도 지켜본다면 얼마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자기 가족을 보호하고 책임지며 살고 있는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새들은 푸른 하늘을 날며 아름다운 세상을 구경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새끼를 낳아 키우는 것을 보면 다리가 부러지고 날개가 찢기어도 목숨을 걸고 새끼를 돌보며 지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 런 것을 보면 아주 작은 새 일지언정 못된 사람보다 훨씬 나은 위대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TV에 가끔 등장하는 가슴 아픈 일이 생각난다. 자식을 구박하고 폭력을 행사하고도 모자라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고통을 서슴없이 주면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끔찍한 사건이 종종 일어난다. 제 한 몸 편히 살겠다고 제 자식까지 버리고 평생을 헤어 나올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하는 불쌍한 인간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 새대가리만도 못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나는 가끔 촬영을 목적으로 새들이 사는 둥지를 찾아간다. 딱따구리나 호반새, 후투티 새들은 주로 큰 나무가 많고 근처에 냇물이 있는 곳에 집을 짓는다. 큰 소나무나 느티나무 중간쯤 깨끗한 곳에 터를 잡고 날카로운 부리로 나무를 콕콕 찍어 파내서 큰 구멍을 내어 그들만의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든다. 집을 장만한 한 쌍의 새는 그날부터 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생활이 시작된다. 알을 낳고 부화시키는 일은 물론, 암새가 할 것이고, 수놈은 들랑날랑 먹이를 사냥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부양한다.
새끼를 부화시키면 부부 새는 그날부터 부양가족이 몇이나 더 늘어났으니 바쁘다. 처음에는 어린것이라고 자잘한 애벌레나 여치 같은 것을 잡아 주둥이에 두리 뭉실 묻혀서 갖고 와 입을 벌린 새끼 주둥이에 넣고 있으면, 새끼들은 주둥이에 묻은 애벌레나 알을 깨끗하게 먹는다. 며칠이 지나 새끼들이 조금 더 크면 지렁이나 큰 물고기도 잡아다 주고, 먹이가 조금 크다 싶으면 입으로 잘게 씹어서 입속 깊이 넣어 준다. 입 안에 먹을 것을 가득 물고 와서 새끼들한테 나누어 주고,나중에는 목 안에 삼킨 것까지 꾸역꾸역 토해내어 새끼 입에다 넣어 주는 것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새끼들은 계속 물어다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나날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새끼들은 어미, 아비 새가 오는 기척이 나면 밖을 내다보며 목을 쑥 빼고 짹짹거리며 입을 벌리고 있다. 어미새는 먹이를 입에 넣어 주고는 먹는 것도 예쁜지 머리를 콕콕 찍어주며 사랑스러운 표현도 잘해준다. 이런 풍경을 망원 렌즈로 한동안 보고 있으면 금방 새들의 생활과 모성애를 엿볼 수 있다. 마치 어린 자식들을 집에 두고 날품을 팔아 먹여 살리는 것 같다.재수가 좋은 날은 맛있는 고기도 많이 갖다 주고, 어떤 때는 가벼운 손으로 들어와서 안돼 보이는지 이놈 저놈 애무해 주며 행복한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이렇게 새들의 일상을 카메라로 들여다볼 때면 인간들보다 더 강한 그들의 모성애에 감동한다.
7월 어느 날은 호반새의 육추 촬영을 갔다. 사진가들이 많아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 줄을 띠고 모두 줄 밖에서 촬영을 했다. 모두들 대포 카메라로 적이 나타나면 금방 쏘아붙일 자세로 완전무장을 하고 겨누고 있다. 나는 망원렌즈가 작아서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나의 렌즈를 보고 앞으로 보내주어 맨 앞자리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또한 의자까지 주어서 편안하게 앉아 촬영할 수 있었다.
촬영장에 가면 서로가 좋은 자리에서 찍으려고 싸우고 난리인 곳도 많은데 오늘은 좋은 분들이 와서 질서를 지키며 조용히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정말 고맙고 멋진 사진작가들이란 생각을 하면서 나도 세팅을 완료하고 촬영에 들었다. 조금 있으니 노란 새 한 마리가 파르르 날아와서 새 집 앞 나무에 앉았다. 무언가 꿈틀대는 먹이를 입에 꼭 물고 와서 우리를 한번 쓰윽 보더니 갑자기 후드득 날아오른다. 그런 후,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는 새집으로 가서 먹이를 새끼 입에 잽싸게 넣어주고는 휘리릭 날아가 버렸다. 재빨리 셔터를 눌렀지만 새가 이미 날아간 뒤다. 그렇게 10여 분 또는 20분 정도 후에 나타나서 먹이를 먹여 주었다.
새끼들이 이소 할 때가 되었는지 큰 물고기와 개구리, 가재 같은 먹거리를 물어다 주었다. 저녁때가 되어 먼 곳에서 온 사진가들은 떠나고 몇몇만 남아 있을 때 갑자기 호반새는 기다란 끈을 물고 와 집 앞 나무에 앉았다. 자세히 보이진 않으나 뱀인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재빨리 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니 생각대로 큰 뱀을 물고 왔다. 떨리는 가슴으로 셔터를 사정없이 눌러댔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어미 새도 와서 맞은편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며 그네들만의 동작으로 얘기하는 것 같았다.
뱀을 물은 호반새는 어떻게 처리할까를 생각하는지 잠시 눈만 굴리고 있었다. 그때 뱀은 안간힘을 다해 꼬리를 추켜올리더니 순식간에 호반새의 목을 칭칭 감아 돌린다. 잡으려던 뱀에게 오히려 잡히어 죽게 생긴 호반새는 목에 감긴 뱀을 풀려고 온 몸으로 머리를 크게 돌리더니 급기야 목에서 뱀을 풀어놓았다. 기가 막힌 장면이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알아서 풀리는 쪽으로 머리를 돌릴 수 있을까?’ 풀어진 뱀은 다시 죽기 살기로 온 힘을 다해 요동친다. 뱀이 다시 목을 감으려고 하자, 이번에는 호반새가 순식간에 뱀의 머리를 물고 나무에다 탁탁 패대기를 친다. 저보다 몇 배나 긴 뱀을 나무에다 치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저도 같이 온몸을 돌리며 쳐댄다. 그때 호반새의 눈빛은 무섭게 번쩍이며 살벌했다. 나무에 온몸을 패대기 맞고 기절한 뱀은 축 늘어졌고, 호반새는 늘어진 뱀을 물고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 냇가나, 아니면 호젓한 곳으로 가서 어미새를 불러 작업해서 오늘 저녁은 가족이 모여 포식할 것이다.
이틀 후,나는 다시 그런 광경을 더 잘 찍어보려고 그곳에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진가들로 꽉 차 있을 그 장소에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호반새 집을 보니 모두 떠나고 빈집만이 휑하게 있어 쓸쓸함만 감돌았다.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일까? 혹시 큰 뱀이 침투했는지, 아니면 누가 해코지를 했는지 몹시 궁금하고 의아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그 사람 역시 호반새를 촬영하기 위해 온 사진작가인데 누구한테 들으니 어제저녁 때 이소 했다고 한다. ‘오라, 그래서 호반새는 새끼들을 이소시키려고 그 뱀을 잡아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했었구나!’ 조금은 아쉽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어제 일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새들의 일상을 볼 때마다 사람 사는 것과 같다는 것을 느낀다. 새끼들에게 헌신하며 가르치는 교육법을 보면 오히려 새한테 배우고 감동한다. 잘못하면 잡혀 먹힐 수도 있는 큰 뱀을 새끼들과 가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워서 승부한 노란 호반새는 가장으로서 가족들 앞에서 어깨를 쭉 펴고 위엄을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너희들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당부의 말도 했을 것이다. 그 광경을 쭉 옆에서 지켜본 어미와 새끼들은 아빠가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고 멋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정의를 앞세워 올바른 길을 가자하면 나보다 지위가 높은 자가 위에서 목을 꼭 조이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다. 돈과 명예의 힘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시대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동물이나 사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들은 약한 자는 강한 자에 지배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상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미새와 아비새와 같이 가족을 돌보는 희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아래에서 따듯함과 비상의 의지를 불태우는 미래 세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소한 새끼들이 모두 건강한 성체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날기를 소망해 본다.
* 충남 부여 출생,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수필집 산의 향기를 찾아서, 시집 술래잡기, 울림으로 다가온 자연의 노래 등, 대전문인협회 회원, 대전국제펜문학 회원, ≪꿈과 두레박≫ 회원,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bak0799@hanmail.net
첫사랑
노 복 래
1973년 가을, 예산에 살고 있던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대전으로 향했다. 친구의 소개로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충남도청에서 시행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후라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난생 처음 미지의 여자 친구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밤잠을 설쳤다.
미리 사진으로는 보았지만 실제 모습은 어떨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으며, 성격과 인품 등은 어떨까?
터미널에 미리 배웅 나왔던 친구의 안내로,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여자 친구를 만났다. 아담한 키에 짧은 단발머리, 생기 있고, 수줍어하는 모습 등 첫인상이 좋았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같이 하고 계룡산 동학사로 갔다. 그리고 계획에도 없던 남매탑을 지나서 갑사 방면으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가을의 짧은 해가 어느덧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는 게 아닌가? 정장을 하고, 구두를 신고 온 그녀는 발이 부르트고 힘들어 하면서도 한 손에 든 새우깡을 버리지 않고 걷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참을성이 강하고 절약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다가갔다.
산 중 등산로 길을 헤매다가,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민박집을 발견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선남선녀가 왔다고 반가워하며 우리를 편안하게 대해 주셨다. 처음 만나서 뜻하지 않게 산중에서 같이 머물게 된 우리는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룻밤을 손만 잡고 잤다. 전날 밤잠을 설치고 그날 산행에 많이 지쳐있던 나는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 이튿날, 신선한 공기 속, 풀벌레 소리에 깨어보니 그녀가 옆에 있었다. 나는 온 우주를 품은 느낌이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미혼 남녀가 손만 잡고 잠을 잤다고 이야기 하면 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무 일 없이 하룻밤을 지낸 우리는 서로에게 떳떳한 추억의 시간을 만든 셈이다. 이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감사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고, 그 후 2주일이 멀다 하고 만나서 첫사랑을 키웠다. 그리고 그 이듬해 결혼을 하였다. 그 처녀가 바로 지금 나의 아내인 첫사랑 여인이다.
우리는 아들 삼형제를 낳고 키워 분가시키며 지금까지 46년 동안 아옹다옹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인연은 하늘에서 맺어준 것이 아닐까? 세월이 흘러 어느덧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으로 변해 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청춘’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내 눈에는 아내가 아직도 첫 만남 때의 청순한 소녀로 기억되고 있다. 나 하나만을 믿고 일 많은 시골집으로 시집을 와서 조부모님까지 모시며, 맏며느리로서 가정의 화목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아내이다. 그러기에 나의 첫사랑이었던 내 아내에게 항상 사랑과 존경을 표한다.
앞으로 4년 후면, 우리가 만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청명한 햇살이 쏟아지는 가을이 오면, 나는 아내와 함께 계룡산 갑사로 산행을 하려 한다. 그 길을 걷다보면 나뭇잎에 덮여 있던 소중한 추억들이 하나하나 마중 나와 우리 부부를 즐겁게 해 줄 것이다.
잊지 못할 추억의 여인
고향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공직 생활을 하던 나는 1980년대 중반, 공직에 충실하기 위해 타 지역 상급기관으로 전입을 했다. 새로운 부임지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일을 한다는 것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하천정비 공사를 추진하다가 민원이 발생했다. 민원을 제기한 분은 그 당시 40대 초의 여인이었다. 공사에 편입된 사유지가 누락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재 조사결과 서류가 누락되었음을 확인하고 합당한 보상을 받도록 조치하였다.
민원제기 및 보상추진 과정에서 마찰도 있었지만,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분과 가끔 만나던 중 나는 다른 상급기관으로 전출을 가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그녀가 송별 회식이 끝날 무렵 회식 장소로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바다바람을 쐬러 가자며 미리 대기 시켜놓은 택시에 타라고 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동승 했는데 택시는 그녀의 요구에 의해 인근 모 도시로 향했고, 어느 호텔 앞에 세워졌다. 내가 납치를 당한 것이다.
나는 평소에 송도의 삼절이라 일컫는 화담 서경덕 선생을 존경하고 있었다. 희대의 명기 황진이의 유혹에 지족선사와 벽계수 등 많은 선비들이 넘어 갔지만 서경덕 선비는 꿋꿋이 지조를 지켜 황진이가 스승으로 섬기었다고 전한다. 이에 황진이는 본인과,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를 송도삼절이라 일컬었다는 고사가 있다.
화담 서경덕 선생은 벼슬길도 사양하고 오로지 지조를 지키며 학문의 길만 걷다 가신 훌륭한 선비인지라 나는 평소에도 흠모하고 있었다. 그런 영향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나의 장래에 지장을 줄까 염려되었던 것인지, 둘 다의 영향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비록 납치를 당했지만 기나긴 밤을 실수 없이 인내로 참아냈다. 장하게 버티어 낸 셈이다. 그 여인도 교양이 있는 여인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 여인의 남편은 타지에서 오랜 기간 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라 했다. 젊은 시절, 이성이 그리워서 신분이 확실한, 그리고 그 지역을 떠나는 젊은 남자와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만약 그런 기회가 온다면 참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여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이제 70대 중반의 할머니가 되어있을 그 여인을 생각하며, 그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본다.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먹는다.’는 모든 사람들이 선호하는 단어이다. 먹는 다는 것은 사람의 기본 욕구이기도 하지만 즐거움을 동반하며, 심지어 살아가는 이유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먹는다’는 단순히 먹는 행위를 지칭하는 의미를 넘어 삶의 긍정적인 동력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사랑’을 먹고 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 덕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나서는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이어서 성년이 되어서는 남편 또는 아내와의 사랑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장년이 되어서는 자녀들의 사랑을 받고, 노년이 되어서는 가족과 친지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나 자신과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아닐까? 그렇기에 남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하고, 화해를 할 수 있으며, 나 자신에 대하여도 화해와 용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도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둘째는 ‘믿음’을 먹고 산다.
부모님과 형제들에 대한 신뢰, 배우자와 자녀들에 대한 믿음, 동료. 친구들과의 신뢰는 물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 상호간의 신뢰가 무너지면 삶의 좌절을 맛보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서로 간의 믿음을 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직함이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실수를 하였을 경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상대에게 사과할 때 신뢰가 회복된다고 생각한다.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한 자기 성찰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셋째로는 ‘꿈’을 먹고 산다
어렸을 때의 꿈과 청·장년이 되어서의 꿈, 노년의 꿈은 다를 수 있겠지만, 꿈이 없는 삶은 무의미한 삶이 아닐까? 희망과 목표가 있어야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알차게 살 수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퇴 후에 꿈이 없이 산다고들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죽는 날까지 희망의 꿈은 계속 되어야 하고, 설사 실패와 좌절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도전한다는 꿈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 행여, 죽은 후에도 영생 극락(천국), 환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장자철학‘에 나타난 <삶과 죽음의 초월에 대한 연구>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말한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명언을 좋아한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충남 예산 출생, 한밭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 토목공학 석사, 논산시 수도사업소장, 한밭대 외래강사 역임, 현)(주)동양엔지니어링 부회장
섬
이 경 숙
자주 이사하며 부동산에 투자해야 재산이 증식된다는데 새로운 환경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익숙한 것에 대한 편안함 때문에 한번 정착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우리 가족은 이사를 하지 않았다. 바뀌는 것은 위층 아래층, 이웃들이 바뀔 뿐이다. 오랫동안 위층과 아래층 모두 나와 비슷한 세대가 살고 있어서 늘 조용하게 지냈는데 비슷한 시기에 위아래가 젊은 부부들로 바뀌면서 초등학교 일학년과 이학년 남매를 이고 살게 되었다. 태권도를 다니는 남매는 오빠보다도 여동생이 더 개구쟁이처럼 씩씩해서 엘리베이터에서도 장난치는 모습을 보면 오빠를 이길 정도다. 가끔 내가 먼저 아는 척을 하면 저희가 많이 뛰어서 죄송하다며 먼저 인사를 하니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악동이 아닐 수 없다. 어쩌다 참기 어려운 날은 스스로 지금 위층에 신나게 뛰는 아이들이 나의 손자들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도 한다. 올 해는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 수업이 많아지면서 학교를 가지 않으니 아이들은 더욱 시도 때도 없이 신나는 날들이 쉼 없이 콩콩콩 울려 퍼진다. 그렇게 위층의 악동을 모시고 사는 와중에 아래층의 비슷한 또래의 젊은 부부는 또 다른 스트레스를 주었다. 주기적으로 부부싸움을 어찌나 심하게 하는지 집을 다 때려 부수는 듯하다. 남자의 고함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심야에 마음을 참 심란하게 하는 일들이 잦았다. 그것은 뛰는 아이들보다 더더욱 참기 힘들어 가끔 이사를 생각해 볼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관리실직원이 와서 아래층 천정에 물이 샌다는 것이다. 놀라서 내려가 보니 손바닥만큼 천정이 젖어 있었다. 원인이 금세 밝혀져서 사태가 커지지는 않았는데 아래층 젊은 부부는 천정 모두 도배를 해야 한다고 백만 원에 가까운 견적서를 뽑아왔다. 도배한지 칠년이나 되었다는 벽은 아이들 낙서투성이로 어지러웠지만 그들은 이미 물이 말라서 눈을 씻고 봐야 겨우 알 수 있는 천청의 손바닥만 한 흔적에 관용이란 없었다. 뜯어보고 천정 그 안에 석고보드에 곰팡이라도 생겼으면 대 공사를 하겠노라고 엄포를 놓았다. 내가 좀 난감한 표정을 짓자 귀책사유가 위층에 있는 만큼 해 달라는 것은 다 해주어야 한다는 논리에 관리실 직원이 중재에 나섰지만 아랑곳없어 결국 그 젊은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다행이 그 부분에 해당하는 보험을 들어 놓은 것이 있어서 큰 부담은 없었지만 마음이 씁쓸한 것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이리저리 제약이 많은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위층 아래층 스트레스를 주니 갑자기 잘 살던 집이 싫어지고 귀책사유 들먹이며 조목조목 따지고 들던 젊은 부부를 상대하면서 서글픈 생각이 며칠 동안 가시질 않았다. 남편은 뉘 집 자식인지 참 똑똑하게 키웠다며 어디다 내놔도 내 몫은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고 칭찬을 했지만 난 내 아이가 덜 똑똑해도 현명한 사람이길 바란다고 웃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말았다. 어찌됐던 미안하다며 머리 조아리고 선물까지 들고 내려갔지만 그 부부들은 그 후로도 그 전과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없는 그저 이웃이 아닌 아래층 사람들이 되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이 먼저 인사하고 아는 체 하면서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을 꼰대 취급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서 나도 먼저 인사를 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을 위 아래로 겪으며 그 사이에 샌드위치 같이 끼어 사는 내 자신을 생각하며 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시인이 말하는 섬은 어떤 의미일지에 대해 수업시간에 토론하던 그 때는 나이가 어려서 그저 피상적인 이상향으로만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시인도 나처럼 풍랑의 바다가 힘겨워서 섬이라는 합일점에 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상대방을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누구에게나 내가 너 일수 없고, 네가 나일 수 없다. 결국 인정할 것은 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격정의 풍랑을 겪어야만 가능한 것이라면 인간관계는 늘 수면위에 얼굴만 내 놓고 발을 한없이 구르는 오리처럼 바동거리며 섬을 찾아 발을 저어야 하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 그러나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섬들은 사람과 사람, 인연과 인연사이에서 부유하며 또 얼마나 많은 인내를 요구 하는지…… . 무슨 무슨 모임이라는 이름을 지어 사람들은 모임을 만들고 그 일원이 된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나 취지에 부합하는 공통적인 분모가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외롭지 않기 위해 관계를 만들어가는 사회적 장치를 마련해 두려는 것은 아닌지. 나의 가장 이웃인 아래 위층 사람들도 문하나 닫고 들어가면 차단되는 불통의 건물에 사는 일이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현대인에게는 이상의 공간이 된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면 소통이 아닌 날을 세우는 관계 또한 우리의 민낯인 것인가.
도배를 새로 하느라 번거롭게 만든 죄로 머리 조아리며 사과하고 을의 자세로 일을 처리하느라 마음이 버겁던 어느 날 저녁, 위층에서 커다란 떡 보따리가 왔다. 아이들이 등교를 하지 않아 밤낮으로 뛰어서 죄송하다면서 위층 아이 엄마는 머릴 조아리고, 따라 온 아이들도 뛸 때와는 다르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식탁에 떡 접시를 놓고 앉아 우리부부는 한바탕 웃었다. 이놈에 아파트라는 것은 구조상 위층은 영원한 을이고 아래층은 갑인 것인가! 아파트 현관문을 닫으며 마음의 문도 함께 닫아버리는 사람들의 집단이 층층이 쌓인 한 무더기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닫혔던 마음이 슬며시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아들을 아파트에서 키워냈기 때문에 이해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알아주고, 감사한 마음이 전달됐을 때에야 비로소 나의 인내가 인정받는다는 보상심리가 나에게도 있었던 것은 아닐지......
정현종 시인이 시에서 말하고자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이란 것이 결국은 소통의 합일점 내지는 관계를 뜻하는 것일 것이다. 그 섬이라는 것이 우리를 심연의 바다에서 올라서서 발을 딛고 숨을 쉬게 만들고, 몸 뿐 아니라 마음도 충전하게 하는 하나의 위안처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작은 섬 하나 딛고 선 기분이 이런 것일까.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우리는 늘 섬을 찾아 유영하는 바다에 산다.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섬은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내 안에 있었다. 작은 콩떡의 섬에 발을 딛고 오늘은 마음이 쉰다.
그 길에 내가 있었네
봄에서 갑자기 여름 날씨가 된 어린이날,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을 오르는 길은 햇살이 유리알처럼 반짝이며 따갑게 내리쬐고 훅훅 더운 기운은 땀으로 젖어 아침 일찍부터 걷기 시작한 나그네의 다리를 지치게 만들었다. 긴 언덕을 오르는 길가에는 야자수 나무도 제 그림자를 길게 널어놓고 쉬는 초여름, 미술관 안에는 공휴일이지만 관광객 서너 명만 있을 뿐 고요했다. 그림들을 둘러보다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부인과 두 아이들을 그리며 썼던 이중섭의 육필 편지들을 읽고 있는 내게 문화 해설사가 다가와
“참 애틋하고 절절한 그리움이 느껴지지요?” 하고 물었다.
“떨어져 살아서 그래요 같이 지지고 볶고 살았으면 이런 편지 썼겠어요!”
해설사는 당연히 자기 물음에 동조하며 공감의 표현이 듣고 싶어서 말을 붙였을 텐데 얼굴도 마주보지 않고 대답하는 나의 비꼬는 듯 퉁명스러운 말투에 그만 머쓱해져서 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이중섭 가족이 잠깐 살았다는 미술관 아래 작은 집은 토굴 같았다. 그 당시에도 가난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실상을 재연해 놓은 모습을 보며 짧은 세월을 살다 가면서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없었던 이중섭의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 행복하지 못하고 사후에 평가받는 예술가들이 어디 이중섭뿐이겠냐 마는 힘겹게 짧은 생을 살다간 본인은 죽음을 맞을 때 얼마나 허망했을까. 세상에 그 어느 것도 다 의미가 없고 모든 것이 물거품 같다는 생각이 들던 그 해 초여름 내가 바라 본 이중섭의 작품은 그 자신의 삶에 아무 의미가 없었음에 초점이 맞춰져서 애절한 편지마저 더없이 서글프게만 느껴졌다.
필요이상 큰 짐을 챙기면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아닌 계획을 막연히 세웠던 그해, 여름이 시작되는 제주에서 눈만 뜨면 혼자 걷고 걸었다. 순환버스를 타고 가다가 아무데나 내려서 걷다보면 해가 기울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길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과 피로가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도 다음 날 아침 다시 걷고 걸었다. 축제가 끝난 가파도 보리밭 둑 위에서, 사려니 숲 속에서, 삼다수 길 위에서 걷고 걸어도 지쳐가는 다리만 있을 뿐 내 생각은 맑아지지 않고 내 삶의 어디쯤으로 돌아가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밤이면 칠흑같이 어둡던 그 숙소의 방안에 그대로 내가 스며들어가는 기분이었던 그 여름이 있었다. 내가 얻고자하는 것은 답이 없는 물음뿐이었으니 답도 없고 어딘가에 기댈 곳 하나 없이 오랫동안 제주는 내게 아프고 처절하게 외롭던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찾은 제주에서 내가 걸었던 그 어두웠던 길들을 다시 걸었다. 비가 오는 사려니 숲을 우비를 입고 걸으며 지난 시간을 잘 견뎌내어 다시 이 길 위에 선 나 자신에게 스스로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지난 시간이 내 삶에 아무런 의미조차 없다고 하여도 그 시간을 끊어내지 않았으므로 지금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니 애썼다고 토닥거려주었다.
아주 오래 전 한 사진작가의 삶과 작품이 TV에 소개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진을 보는 눈이 뜨일 무렵 그의 작품은 한눈에 내 감성을 흔들었다. 강렬하지도 않고 지나친 정물화 같지도 않으면서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그림도 아닌 사진이 말할 수 없는 긴 여운을 주었다. 제주가 고향도 아닌데 제주의 풍경에 빠져 제주 사진만 찍는 작가 김영갑 이야기를 보고 그의 사진첩과 글을 읽으며 언젠가 꼭 한번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만나러가기도 전에 서둘러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 어느 날처럼 뉴스에 한 줄 짤막한 그의 타계소식을 듣던 날 또 한 번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떠난 한 작가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허망함에 가슴이 시렸다. 그 해 여름 홀로 걷던 제주에서 작가는 떠났어도 그가 남긴 김영갑 갤러리를 가고 싶었지만 내 마음이 그가 말하고 싶은 시선을 따라가지 못 할 것 같아서 갈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번 제주 여행에 그곳을 찾았다. 갤러리 두모악은 작가의 삶처럼 소박하고 고즈넉한 한 모퉁이에서 주인이 남긴 그 모습 그대로 세월을 담고 있었다. 그가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찍었던 제주의 오름과 숲들이 계절 마다 켜켜이 다른 풍경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오름과 나무를 시간대별로, 그리고 계절 마다 표현한 사진들이 많았다.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상상력마저도 끌어내야 진정한 사진이라고 말하던 작가는 그 정원에 묻히고 훌쩍 세월 지나 그의 작품 앞에 선 독자는 늦은 인사를 건넸다. 루게릭병을 얻어 몸은 굳어가고 근육이 빠져가는 힘겨움에 카메라를 들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한 예술가의 절망이 그가 쓴 책에는 절절했지만 그의 작품은 한없이 아름답고 섬세했다. 살아서 작가 손수 일구어 만든 갤러리 두모악의 감나무 밑 돌담에 앉자 오늘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예술이란 어차피 완성은 없는 법, 안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도 살아서 작가에게 그의 사진이 위로였고 영혼을 담을 수 있는 일이였다면 그것으로 한 사람의 삶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내 심사가 뒤틀려 바라 본 이중섭의 편지 또한 그의 가난과 외로움을 이겨내는 한 수단으로의 표현이었다면 그의 삶은 그것으로 아름답고 위로였던 것이거늘.
“파랑새를 품 안에 끌어안고도 나는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고 한 작가 김영갑의 글처럼 모든 것은 아름답게도 보이고 비관적으로도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의 시선에 있을 뿐이었다.
힘든 시절 그 길 위에서 답을 얻으려던 그 시간도, 긴 시간 지나 지금은 담담히 바라 볼 수 있는 지난 시간도, 다 같은 길이었다. 이제 답을 찾으려하지 않는 눈을 갖게 해준 그 길도 거기 있었다. 다시 아무 의미도 찾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그 길에 내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두 작가의 삶이 있었다.
*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상상의 힘≫ 작품상(2009),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asysook@hanmail.net
어느 멋진 가을날
김 현 주
거리의 어느 곳을 보아도 울긋불긋 온통 단풍이다. 익어 가는 가을빛이 참 곱다.
올 여름 유독 비가 많이 내리고 긴 장마로 피해를 입힌 자연이 우릴 위로하는 선물을 보낸 듯하다. 매년 강수량 부족으로 건조하여 단풍으로 곱게 물들기 보다는 낙엽으로 우수수 떨어지던 거리의 나뭇잎들이 모처럼 예쁜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수런대고 있다. “잘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다”는 어느 스님의 말이 실감 난다.
여기저기 지천으로 물든 오색 단풍을 보며 풍성한 가을의 향연을 만끽한다. 바쁜 일상에 매몰되어 계절이 오가는 줄도 모르고 동동대다가 문득 마주한 가을 풍경! 이 아름다운 계절의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새삼스런 감사가 밀려온다. 코로나19로 지치고 우울한 나날 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계절은 어김없이 자신의 소임을 다하며 힘내라고 응원을 보내는 듯하다.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맞이하는 또 하나의 가을이 그저 반가우면서도 고맙다.
매년 맞이하는 가을이건만 이 가을을 마주하는 느낌은 각별하다. 내 삶도 어느새 가을쯤이어서 일까? 자연의 사계가 있듯 우리의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면, 지금 나는 그 가을의 초입에 있지 않을까 싶다. 추수를 앞둔 농부의 설렘처럼 나 또한 내 삶의 결실에 대한 기대로 설렌다.
가을은 가장 풍성하고 넉넉하고 아름다운 계절인 것 같다. 인생의 가을 또한 삶의 그 어느 시기보다 가장 풍요롭고 여유 있는 멋진 순간인 것 같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가을이 되면 1막의 인생을 마무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제2의 인생, 2막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직장인이라면 은퇴 후의 삶이 될 것이고, 사업이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
이라면 좀 더 늦게 혹은 더 빨리 자신만의 또 다른 삶을 준비할 것이다.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노년의 삶, 미래에 대한 계획은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 제2의 삶에 대한 계획과 준비는 꼭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절반의 인생을 가족과 자신의 미래를 위한 준비를 위해 살았다면 나머지 절반은 오롯이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얼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아야 한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일만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구청 공모사업으로 자필 자서전 쓰기를 진행하면서 내용 중에 버킷 리스트를 적어보는 란을 만들었다. 희망자들을 모아 강좌를 하면서 자신이 앞으로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것들을 적어보라 하면 누군가는 많은 것들을 적지만 어느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며 적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걸 보면서 평소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만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분들에게 이제라도 자신을 위해 자기만의 삶을 살아보라 권하는 건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여생을 지루하지 않게 건강하게 살기 위해 하나하나 준비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말을 전할 뿐이다.
나는 제2의 삶에 대해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고 있는지 돌이켜 본다.
직장을 다닐 땐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워 빨리 그만두고 싶었다. 마침 IMF로 갑작스런 구조조정을 했고 그게 뭔지도 모르며 성급하게 손을 들고 나왔다. 직장을 그만두고 쉬면서 주어진 무한한 자유는 방향감각을 잃은 미아가 된 느낌이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실직(?)이 된 나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얼마간은 자신에게 휴가를 준다는 마음으로 쉬면서 여유를 부렸지만 오래지 않아 권태가 고개를 들고 삶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문화센터나 대학부설 평생교육원에 다녔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시작한 제도권 밖의 생활은 내게 새로운 세상이었고 사회를 다시 배워야하는 초년생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 과정 속에 우여곡절도 많았고 남모르는 가슴앓이도 해야 했다. 겁 없이 이일저일 도전하고 손을 대 실패의 아픔도 맞보고 시련도 겪으며 4,50대를 보냈다.
개인의 인생사가 어찌 흘러가든 세월은 또박또박 제 갈 길을 갔고 나는 60대가 되었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분명한 답을 찾고 싶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르며 진정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가에 회의가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나답게 나의 인생을 살아야하지 않을까 하면서 무얼 하고 싶은지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하고 싶은 일중의 하나가 60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생각이 떠올랐다면 실행에 옮기는 것이 답이다. 망설이고 주저하다보면 아무것도 못한다. 내 성격 중 장점인지 무모함인지 모르겠지만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환경이나 처지는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저지르는 편이다. 학교는 그렇게 해서 다니게 되었고 무사히 마쳤다.
나는 나이가 들어도 은퇴하여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꿈꾸기 보다는 오히려 바쁘고 활력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젊은 날은 육아와 가사에 양립하며 직장생활을 하느라 몸도 마음도 힘들고 바빴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그 모든 일에서 놓여난 지금 시간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훨씬 자유롭고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좋다.
나는 100세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이 건강하게 일 할 수 있는 능력이라 생각한다. 그 일이 꼭 돈을 버는 경제적인 일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고 적당하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일이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러기 위하여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그것을 토대로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면서 나의 제2의 인생을 활기차게 보내려 한다. 인생의 가을을 멋지고 풍요롭게 채우기 위하여 하루하루를 선물로 여기며 충실하게!
오늘도 난 가을 속을 달린다.
은행 잎, 단풍 잎, 감나무 잎, 도토리나무 잎까지 정말 예쁘게 물든 단풍을 보며 아름다운 가을을 대가없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노라니 겨울이 지나고 새잎이 돋아나던 봄이 엊그제만 같은데, 어느새 무성한 잎으로 자라 한여름을 보내고 또 다시 겨울 맞을 채비를 위해 단풍으로 물들고 있구나 싶다.
끝없이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임에도 매번 새롭게 느껴지니 신기하다. 작은 일상도 고맙고 감동으로 일렁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마침 운전을 많이 하고 다니는 일을 하는 터여서 이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을 마음껏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 또한 행운이다.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 인듯하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이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그 일이 곧 천직인 셈이다. 인생은 다채로운 경험과 그때의 감정들이 쌓여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올 한해 코로나 19로 자칫 우울하고 무기력해 질 수도 있었을 텐데 우연히 시작한 알바(?)가 나의 한 해를 새로운 경험과 활기로 채워주었다. 그 일 덕분에 이 가을을 온전히 느끼고 만끽하며 거리의 구석구석을 누비게 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전에는 가을이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올 가을은 그런 마음 없이도 잘 지낸 것 같다. 여행은 어디론가 떠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어디에 머무느냐에 달린 것 같다. 매 순간을 축제처럼 한 걸음도 여행처럼 살고 싶다던 지인의 말처럼 나 또한 인생을 여행처럼 삶을 축제처럼 여기며 살고자 한다.
여행의 의미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늘 머물던 집을 떠나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지고 싶을 때 여행을 생각한다. 여행은 우리를 설렘과 기대로 들뜨게 한다.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또는 홀로 떠나는 여행의 묘미는 일탈의 기쁨과 함께 누리는 무한한 자유다.
반복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며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여행에 대한 기호 또한 다양할 것이다. 누구는 관광지를 좋아할 것이고, 혹자는 조용한 휴양지를 좋아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예술이나 문화적 취향을 충족하기 위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든 어디론가 떠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고 현실적 고뇌와 걱정과 시름과 일상에서 놓여 날 수 있는 인생의 보너스이다.
여행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 깊고 넓은 미학을 발견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 평소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고 자신에 대해서도 재발견과 재충전을 할 수 있는 특별하고 멋진 이벤트인 셈이다.
누구나 동경하고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여행’이 실종되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괴물이 평범한 우리의 소소한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무엇보다 마음만 먹으면 국내든 해외든 마음대로 여행 할 수 있던 자유가 사라졌다. 유목민의 후예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늘 떠나고 싶고 어딘가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기에, 여행은 그런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가장 적절한 돌파구가 되어 주었다. 특히 세계가 하나로 이어져 지구촌이라는 말이 생기고 자유롭게 왕래하며 각 나라의 다양한 문화와 음식과 관광 유적지를 보며 경험했던 그런 기회가 사라졌다. 여행은 차지하고 볼일이 있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보니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황당한 이 현실 앞에 우리는 당혹스럽고 어이없지만 새로운 환경과 변화에 적응해야 하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여행을 모색해야 한다.
작년에 ‘여백의 미’라는 프로그램을 진행 했었다. ‘여고 동창생들과 떠나는 백제로의 미각여행’이라는 타이틀로 기획된 럭셔리하면서도 차별화된 가을 여행이었다. 여고 동창생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여고 시절의 추억을 소환해 한 때를 즐길 수 있도록 점심 식사 후 여고생 교복으로 갈아입고 잔디광장에서 다양한 포즈를 연출하며 맘껏 사진을 찍고 왕년의 한가닥(?)을 재현해 보이며 행복해 했다. 참여했던 모든 여행객들이 대만족했던 특별한 행사였고 반응이 좋아 올해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19로 프로그램의 일부를 변경하여 실시하였다.
올해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단체 관광이 불가능해 ‘여백의 미“라는 타이틀은 같지만 여고 동창생 컨셉이 아닌 ‘여유롭게 떠나는 백제로의 미각 여행’이라 칭하고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끼리 승용차나 렌터카를 이용한 소그룹 개별여행으로 진행하였다. 처음 겪는 코로나19 상황이 낯설고 불편함을 주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많은 분들이 참여하였고 모든 여행객들이 한결같이 “너무 좋은 여행이었다.”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니 진행자로서 여행에 대한 갈증을 다소나마 풀어 준듯하여 뿌듯했다.
얼마 전엔 복지관 어르신 몇 분을 모시고 1박 2일로 서해안 여행을 다녀왔다. 복지관도 운영을 하지 않고 도서관도 열지 않아 어르신들이 무료함과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바람을 쐬러 가시길 원해 함께 동행 했다.
예산 수덕사를 들러 남당리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예전 같으면 요즘 한창 관광철이라서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가득할 텐데 그 많던 관광버스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당연히 식당도 한산했고 문밖에 나와 있는 상인들은 자신들의 가게로 손님을 유치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이렇게 나오니 코로나19의 여파가 얼마나 큰 지 실감이 났다.
점심을 먹고 남당리 바닷가를 잠시 산책한 후 숙소를 예약한 안면도로 향했다. 거리는 한산했고 길거리에 고구마와 사과를 파는 노점 상인만이 간간히 보였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영업을 해 생계를 이어가는 많은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이 피부로 느껴졌다. 안면도는 더욱 심각했다. 어르신들이 편히 쉬실 수 있도록 황토 펜션을 예약했다. 우리 말고는 손님이 없다. 다행히 추운 날씨에 방을 따뜻이 해놓아 어르신들이 좋아하셨다. 주변의 안면 수산시장에 들러 보기로 했으나 여장을 풀고 나니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기에 쉬시라 하고 저녁 식사를 대신할 만한 먹거리를 사러 시장에 들렀다. 숙소로 오면서 도로변에 수산시장의 특별행사 플래카드가 붙어있어 살거리나 볼거리가 있으려니 했는데, 시장 내부는 사람이 거의 없고 문을 닫은 가게도 많아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나오지 않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관광지의 황량함에 놀랍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요깃거리와 간식거리를 사들고 돌아오며 여행 산업의 미래가 걱정이 되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 여행에 대한 개념이나 방식도 달라져야 할 것 같다. 비대면이 일상이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거나 접촉하는 것을 꺼리다보니 자연스럽게 소규모 한가로운 곳으로의 여행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에 실시한 여백의 미가 앞으로 코로나 시대에 할 수 있는 여행의 모델이 된 셈이다. 삼삼오오 가까운 사람들끼리 한적하고 공기 좋은 호수나 공원 주변을 산책하거나 수목원을 찾아 심신의 휴식을 가지거나 유적지를 돌아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여행 프로그램이 코로나 시대에 적절한 방식이다. 종전의 단체 관광은 앞으로 어려워 질 것 같다.
먼 곳으로의 여행보다는 가까운 곳으로 떠나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체험 관광이나 휴가가 앞으로의 여행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해외로 떠나 일탈을 꿈꾸던 그런 여행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일을 하고 난 뒤 휴식이 필요하듯 일상에 지치고 힘들 때 가장 치유가 빠른 것이 일상을 떠나 잠시 현실을 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질 순 없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행복해하며 예전의 낭만과 여유를 누리며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 대전 출생, 수필가, 한밭문학회 사무국장, hl3evs@hanmir.com
아프리카 키친
오 월 석
COVID-19 상황으로 나의 업무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학교에서 가나 학생들의 작은 행사가 열리게 되었다. 원래 나는 중국어 전공이어서 중국 유학생들만 담당했다. 이전에는 영어권 유학생들과 관련된 행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유학생들과 의사소통이 안 되면 사실 행사를 진행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지금은 부서 직원이 갑자기 퇴직을 하면서 그 자리를 채우지 않다보니 직원들끼리 일을 나눠 갖게 되었고, 시나브로 가나 유학생 행사를 담당하는 일까지 내게로 밀려왔다. 하여튼 나는 이전보다 다양한 국적, 많은 유학생을 내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3월초부터 유학생담당자라는 이유로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3월 학기에 이어 9월 학기에도 해외에서 입국하는 유학생을 교내와 교외로 나누어 매일 모니터링해서 교육부에 보고해야 했다. 방역물품을 구입하여 자취하고 있는 격리유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휴학하겠다는 학생들의 학사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대전시청과 교육부, 그리고 보건소에서 수시로 연락이 왔고, 그들을 맞이하는 일의 중심에 내가 서 있었다.
해외에서 입국하는 유학생을 공항으로 데리러 가는 일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공항 측에서는 신입 유학생을 보호하고 있으면서 대학교 담당자가 오지 않으면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철저한 방역을 응원하던 나였지만 유학생의 착륙시간에 맞춰 공항에 도착했는데 3시간 이상을 기약도 없이 기다리다 보니 인내심에 한계가 느껴졌다. 마침 공항 검역소에서 입국 유학생이 우리 학교 소속인지를 묻는 인천공항 직원에게 퉁명스럽게 느린 입국수속의 불만을 토로했다. 주말에 매형과 누나를 대동하고 간 상황이라서 두 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특히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매형에게 미안했다. 그날, 유학생을 데리고 대전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넘었다. 두 분을 집에 보내드린 후 유학생들을 기숙사에 배정하고 나온 시각이 새벽 1시였다. 내겐 항상 졸음운전이 최대의 적이었다. 그래서 주말에 인천공항에 갈 때는 매형과 누나가 운전을 대신해 주었다. 왕복 400킬로미터의 장거리 운전은 내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인천공항을 들락거리면서 내 자가용의 주행거리 숫자가 2,500킬로미터 이상 증가했다. 학교에서 제공해주는 자가용으로는 유학생들의 짐을 싣기에 역부족이었다. 내 카니발 차량은 3명 정도는 쉽게 감당해냈다. 해외에서 입국하는 유학생 인솔업무 쓰나미가 지나가서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있을 무렵, 나는 다시 인천을 통하는 고속도로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이번에는 유학생 픽업 업무가 아니라 아프리카 가나 유학생 행사와 관련된 일이었다. 나는 점심시간인데 밥도 거르며 운전을 했다. 식사 후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작전은 성공하여 인천 송도의 한 식당 앞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가게는 송도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로 조그마한 상가건물 1층에 있었다. 상가의 북쪽은 아파트 단지가 병풍을 쳐놓아 겨울에 바람을 막아 줄 것만 같았다. 동쪽과 서쪽은 공장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남쪽에는 오래된 듯 페인트가 벗겨진 빌라단지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상가건물 중앙에 허름하게 보이는 ‘아프리카 키친’이라는 간판글씨가 보였다. 작은 간판은 초록색이었고 언뜻 보아도 규모가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치킨(닭)’과 ‘키친(주방)’의 영어발음 때문에 머리를 갸웃거리며 가게에 들어섰다.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리송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게에는 원형테이블이 다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테이블마다 놓인 키친 타올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한국식당에는 일반적으로 냅킨이 정사각형 플라스틱 통에 하얀 얼굴을 내밀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왼쪽 테이블에 건장한 흑인 남자 한 명이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게 안쪽에 위치한 주방에서는 밀려온 아프리카 전통 음식냄새가 온 가게에 가득 찼다. 아프리카 전통음식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중국집에서 느꼈던 볶음밥 냄새마냥 구수하게 느껴졌다.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이 오후 1시 30분을 넘어가는 걸 보자 뱃속에 허기가 느껴졌다. 주인아주머니는 흑인이었고, 아주머니가 안고 있는 여자아이도 귀여운 흑인이었다. 잠시 후 배달을 다녀온 키가 큰 사장도 흑인이었다. 이 가게를 왕래하는 이들은 모두 흑인이었고 나만 이방인이었다. 한국의 작은 가게에서 나는 타국에서 느끼는 외로운 감정을 맛보았다.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가게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아이를 등 뒤쪽으로 번쩍 던져 아슬아슬하게 업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예전에 내 어머니도 손자들을 업어줄 때 저런 솜씨를 보여주셨던 기억이 났다. 주인아주머니는 키가 165cm 정도 되어 보였고 풍만한 상체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하체를 갖고 있었다. 나는 이미 많은 아프리카 유학생들을 보아왔던 터라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내가 오른쪽 테이블에 앉자마자 아주머니는 행주를 가져와 닦아주었다. 아주머니가 한국인이 가게에 온 것이 낯설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내가 카운터를 가리키며 손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 긋는 행동을 취하며 지갑을 보여주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아주머니의 적나라하게 드러난 잇몸과 하얀 치아를 보니 내 기분도 한껏 상기되었다. 내게 음식을 주문하라고 메뉴판을 가리켰는데 나는 아주머니의 권유를 정중히 사양했다. 물론 나는 호기심이 강해서 아프리카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다. 중국에서 수백 가지의 생소한 음식을 먹어 보았던 경험이 있어서 아프리카 음식을 먹는 것도 자신이 있었다. 음식을 먹고 바로 대전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졸음운전이라는 커다란 장벽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나의 정중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는 메뉴판을 다시 가리키며 내게 음식을 주문하라고 하였다. 나의 두 번째 거절이 혹시 ‘아프리카 음식이 불결하여 안 먹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오해의 소지를 낳을 수 있어 아주머니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음식이 너무 빨리 나와서 놀랐다. 내가 오는 것을 알고 미리 음식을 해 놓은 것 같았다. 결혼식 때 뷔페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다란 접시에 볶음밥, 청국장에 간장을 넣은 듯한 검은 콩 요리, 간장양념을 한 날씬한 치킨 다리 한 개, 두 종류의 소스가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신기했던 것은 젓가락이 없이 숟가락만 덩그러니 접시에 올려 있었다. 핸드폰을 만지던 손님도 나와 비슷한 음식을 먹고 있었고 숟가락만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흑인 손님의 음식도 거의 비슷했다. 가나 사람들은 젓가락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음식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채 모든 음식을 먹어치워 아주머니의 성의에 보답했다. 그리고 나는 테이블마다 놓여 있던 키친타월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손으로 음식을 먹는 가나 사람들은 식사 후 크기가 작고 부드러운 냅킨으로 손을 닦는 것 보다 넓고 질긴 키친타월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인천 공단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가나 사람들이 조금 늦은 시간인데도 하나 둘씩 가게에 들어왔다. 테이블에 한 명씩 앉아서 음식을 먹었는데 서로 아는 사이인지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떤 이는 곱슬머리를 꼬아 따고서 비딱하게 앉아 맥주와 음식을 먹었다. 바로 무대에 올라가면 힙합과 랩이 가능할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나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면서 적당한 거리에서 외롭지 않게 소통하며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머니의 넓은 등이 편안했는지 아기는 바로 꿈나라여행을 떠났다. 여자아이는 두 살 정도 되어 보였고 곱슬머리에 눈이 동그랗고 포동포동한 모습이었다. 내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가련한 아프리카 아이들과는 다른, 통통한 아기였다. 아기가 엄마 등에서 바로 자는 바람에 종알거리는 말을 듣지 못해 아쉬웠다. 내가 송도의 아프리카 가게에 간 것은 가나 유학생 행사의 식비를 계산해 주기 위해서였다. 법인카드를 유학생에게 맡길 수도 없고 이동식 카드계산기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또 카드를 앞뒤 복사해서 유효기간을 알려주고 계산하는 방식도 가나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가나 유학생들이 고국의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하기에 우리 부서에서 한 번 정도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대전에서 이렇게 먼 인천까지 가나인들 사이에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또 가나 사람들 간 유대감이 강해서 서로를 도와주고 챙겨주면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주머니의 등에 업힌 아기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땅바닥 쪽으로 목이 꺾여 불안해 보였지만 쌔근쌔근 숨 쉬며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내가 식사를 마치자 ‘델라’라고 하는 유학생이 가게에 들어왔다. 나에게 반갑게 인사하여 나도 악수하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를 알고 있는데 나는 그 학생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으나 아프리카 유학생들은 서로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 구별하기가 너무 힘들다. 델라는 한국말도 중급 수준은 되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서로 대화하다 보니 그가 우리학교 화학공학과 석사 출신으로 현재 인하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었다. 오늘 대전에 있는 친구들의 부탁을 받고 카드로 행사음식을 계산하는데 통역을 해주러 온 것이었다. 서로 의사소통이 어려워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한밭대학교에 대한 애교심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학과에서 교수님과 조교선생님들이 잘 대해주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모교에서 온 내게 밝은 미소를 연신 날리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내가 가게를 나서자 아주머니는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고 아기도 이미 한참 전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델라는 내가 주차한 곳을 묻더니 30미터 정도 떨어진 내 차가 있는 곳까지 따라와서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를 보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한국에서 배운 학문을 활용해서 아름다운 미래를 맞이하기를 바랬다.
나는 오늘 고속도로에서 세 건의 사건 사고를 목격했다. 첫 사고는 인천으로 가는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에서 갓길에 흰색 스포티지 차량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가용에서 멀찍이 떨어져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두 번째 사고는 ‘아프리카 키친’을 나서서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사거리에서 트럭과 오토바이가 부딪혔는지 오토바이 기사는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의 사고를 목격한 것도 처음이었는데 사고를 목격하고 10분이 지나지도 않은 시각에 또 사고를 목격했다. 내 차가 ‘고잔’ 톨게이트 하이패스 통로를 지나려는데 맨 왼쪽의 하이패스 통로가 통제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경찰차 지붕의 경광등이 반짝였다. 사고차량은 새 차였고 흰색 자가용이었는데 하이패스 통로 왼쪽 벽을 받고서 폐차시켜야 할 만큼 부서져 있었다. 초보운전자가 운전미숙으로 사고를 냈다고 볼 수 없었다. 차량이 무척 빠른 속도로 달려가 추돌한 것으로 보아 졸음운전으로 추정되었다.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저런 형태의 졸음운전 사고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마음먹고 대전으로 내려오는데 서쪽에서 오는 햇빛이 강해 눈이 부셨다. 그리고 고속도로에서의 지루한 운전은 내 뱃속의 아프리카 볶음밥과 치킨이 본격적으로 소화되며 졸리기 시작했다. 난 도저히 졸음을 참지 못할 상황에 간신히 졸음 쉼터로 들어갔고 주차하자마자 단잠에 빠졌다. 졸음 쉼터에서 한숨을 자고 일어나니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 있었다. 갈 길이 멀었지만 정신은 맑았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고속도로 갈래 길에서 블루투스를 이용해 받던 전화에 길을 잘못 접어들어 대전을 향해 남쪽으로 가야할 차가 서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서 도로마다 병목현상이 일어나 나는 화가 치밀어 오는 것을 계속 짓눌러야 했다. 내가 운전하는 차는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고 구불거리는 산길을 넘어 유구 IC로 간신히 진입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또 고속도로에서 공사를 하는 바람에 차량이 기어가는 상황이 되었고, 나는 그 중심에 있었다. 한 번 졸음쉼터에서 지체했던 일정이 이렇게 까지 꼬이고 말았다. 그래도 큰 사고 없이 출장을 다녀온 것에 안위하며 방송을 들으며 기다리자 도로가 시원하게 뚫렸다. 나는 시원하게 달리는 차에서 오늘의 일을 곱씹어 보는 여유를 가졌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 책장에서 ‘세계의 국기’라는 책을 펼쳐 보았다. 책 속에서가나공화국에 대해 대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또 가나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것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가나는 일찍이 ‘골드 코스트(황금해안)’라고 불렸던 곳으로 약 100여 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가나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 보다 빠른 1957년 독립하여 ‘아프리카 대륙의 여명’ 이라 칭송받았으며, 이후에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기 제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가나 국기는 위로부터 빨강, 노랑, 초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가운데 노란색 중앙에 검은 별이 박혀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빨간색은 독립 투쟁으로 흘린 피를, 노란색은 풍요를, 초록색은 풍부한 삼림자원과 농지를 나타내며, 중앙의 검은 별은 아프리카의 자유를 상징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53개 나라 중 가봉, 기니,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르완다, 리비아, 말리, 모로코 등 50개가 가나의 영향을 받아서 모양을 바꿔가며 빨강, 노랑, 초록, 검정색을 사용하고 있었다. 가나의 공식명칭은 가나 공화국(Republic of Ghana)이며 아프리카의 서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는 아크라(Accra)이고, 인구는 3,041만 명 정도 되고, 화폐는 가나 세디(Cedi)를 사용하고 있다. 1$에 5.83세디 이며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120원이고, 1세디는 한국 돈 191원 정도 된다. 언어는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고 튀어(40%), 판티어(40%)를 사용하고 있다. 민족은 아프리카 흑인이 99%를 차지한다. 국토 면적은 한국의 2.3배에 해당한다. 가나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생활수준이 높은 편에 속하고, 사교적인 성격이고 밝은 옷을 즐겨 입는다고 한다.
2020년 11월 14일 우리학교에서 대전지역에서 공부하는 가나 유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모여서 가나학생총연합회(GHASKA) 행사가 열렸다. 참가한 학생의 대부분이 가나 대학원생이었고, 한국 학생들도 적은 숫자지만 참석해서 가나학생들과 교류했다. 우리나라에서 가나 유학생이 가장 많은 학교가 우리 학교라고 한다. 가나 학생들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다 보니 유학생들이 참여한 프로젝트의 우수한 논문이 해외의 저명한 학술지에 게재되어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다. 이미 박사학위를 마친 학생이 고국 가나에 돌아가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학생도 있다고 한다. 유학생들의 행사는 가나 국가 제창, 애국가 제창, 기도하는 시간, 그리고 우리 부서 국제교류팀장의 한국문화 소개 등 알차고 엄숙하게 치러졌다. 그리고 홀에서는 내가 어제 위험을 무릅쓰고 인천에 가서 계산했던 아프리카 전통음식이 펼쳐졌다. 가나 음식이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럽지 않았지만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는 형님까지 초청하여 시식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물고기 튀김, 볶음밥, 많이 느끼해 보이는 아프리카 전통 소스와 ‘카바스’를 도전정신을 갖고 먹었다. ‘카바스’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손으로 먹는 탄수화물로 두부를 만들 때 나오는 부산물인 비지와 흡사했고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우리가 밥을 먹듯 하는 그들이 맛있다고 먹는 음식이었기에 우리는 최대한 한 덩이의 ‘카바스’를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젓가락을 이용해 먹었는데 가나 학생들은 손가락으로 먹고 있었다. 내가 졸음운전을 감수하고 노력한 결과물로 수십 명의 가나 유학생들이 고향의 맛에 행복해했다. 아프리카 음식을 난생 처음 먹어 본 한국인들에게도 의미 있는 날이었다. 나는 행사를 진행하며 투덜거렸었다. “인천까지 가서 계산을 해주니 인력낭비가 아닌가?”, “꼭 한국에서 아프리카 음식을 먹어야 하나?” 등등. 나는 담당자로서 이미 유학생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나음식을 허용하겠다고 영어를 하는 직원에게 부탁해 그들에게 전달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내년에는 어제 보았던 아기, 넓은 어머니 품에서 곤히 자고 있던 아기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가나와 가나 학생들은 어느덧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수필집 『형사 남궁』(2017), moon5865@hanba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