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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다섯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신채호 역사연구가 곧 독립운동
출생 - 사망 1880.11.7. ~ 1936.2.21.
약력 1907. 신민회 가입
1911. 권업회 조직, 주필
1919.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1923.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작성
1936. 10년 형을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중 순국
성균관 시절 개화자강과 민족운동에 더 관심 가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1.7~1936.2.21)선생은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유생인 고령 신씨(高靈 申氏) 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7살에 아버지를, 15세에 친형을 잃었습니다. 정언(定言)을 지낸 조부 성우(星雨)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6세 때부터 한학을 교육받아 10세 때 행시(行時)를 지었으며, 12~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신동의 소리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18세 때 조부의 소개로 한말 유학자였으며, 학부대신이었던 양원 신기선의 사저를 출입하면서 소장되어 있는 신, 구 서적을 섭렵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였습니다. 신기선은 동도서기(東道西器)적 개화사상을 가진 정치가로, 선생은 아마도 이곳에서 개화에 대한 최초의 인식변화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세인 1898년 가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그곳에서 백암 박은식이 주도한 일부 진보적 유학경향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당시 서울에선 독립협회 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독립신문>, <매일신문>, <황성신문> 등이 이를 열렬히 지원했습니다.
언론계 입신, 애국계몽운동 이론가로 필봉을 휘두르다
선생은 1905년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얼마 후 위암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에 논설기자로 입사하게 되면서 한말 언론계에 입신, 애국계몽운동의 이론가로서 그의 문명을 떨치게 됩니다.
1906년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운강 양기탁의 천거로 다시 이 신문의 논설진에 참가하게 됩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공식적인 사주(社主)는 영국인 베델(E. T. Bethell)이었으므로 일제 통감부의 보안규칙이나 신문지법에 저촉을 받지 않았습니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서호문답], [영웅과 세계],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등 애국적 계몽논설과 사론을 집필하고 [독사신론],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 역사물을 연재하였습니다.
신민회 창립위원으로 참가
선생은 언론인으로써 뿐만 아니라 실천지식인으로써 여러 활동에 직접 가담하였는데, 1907년 안창호등에 의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창립위원으로 참가하여 대한신민회취지서(大韓新民會旨書)를 기초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민회의 평북책이었던 이승훈이 건립한 정주의 오산학교에 들른 선생의 모습을 당시 교사를 하고 있던 춘원 이광수는 1936년 4월 <조광>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주필이나 되는 단재는 풍채가 초라한 샌님이나 이상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세수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바닥, 저고리 소매와 바지 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됐다. 누가 핀잔을 주려 하면 ‘그러면 어때요’라고 하였다. 남의 말을 듣고 소신을 고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웃고 얘기할 땐 다정스러웠다.
역사 연구가 언론가 곧 민족독립운동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 [이십세기신국민(二十世紀新國民)]이란 논설을 연재하여 중고적(中古的) 영웅의 한계를 지적하고, 20세기 국가경쟁의 원동력은 한, 둘의 영웅에 있지 않고 정치, 종교, 실업, 무역, 학술 등 사회 각 부문에서 활약하는 국민적 역량에 달려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국민 각계각층의 대내외적 외경력(外競力)의 발휘를 촉구하였습니다.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에 힘쓰고
1910년 신민회 간부들은 일제의 침략 아래서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먼저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함으로써 이를 근거로 삼아 장차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러한 합의에 따라 단재는 안창호, 이갑, 이종호등과 함께 그 해 4월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중국 산동반도의 청도(靑島)에 도착하여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앞으로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는 청도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토지개간사업, 무관학교 설립, 교관양성 및 전문기술자 확보 등을 결의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하여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윤세복, 이동휘, 이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해 12월에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 김학만, 이종호 등이 설립한 권업회(勸業會)에서 그 기관지 <권업신문>을 창간하자, 이 신문의 주필로 취임, 활동하여 러시아와 중국의 한민족을 두루 계몽시켜 일제병탄 후 명멸해 가던 한국혼을 되살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1913년에는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해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고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조소앙등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중국에 있는 한국청년들의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하였습니다.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에 나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에 가까워지자 국외의 망명지도자들 사이에는 국제정세의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하였고 선생은 이 두 선언서의 서명자로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 천진 등에 유학하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이 조직되었는데 이때 단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습니다. 이어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하였습니다.
의정원회의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그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이를 반대하고 퇴장하였습니다. 제2회 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제5회 의정원회의에서는 전원위원회 위원장과 충청도 위원에 선출되었습니다.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가 노령임시정부(국민의회)와 한성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통합 임시정부로 발전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다시 분개하여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反) 임시정부의 노선을 취하였습니다.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작성
그 후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하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였습니다. 서두에서 선생은 아래와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강도(强盜)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간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조선혁명선언]은 일제의 요인(要人)과 기관을 암살 파괴할 폭탄, 단총(短銃)과 함께 의열단원들이 휴대하는 필수품의 하나였으며 이들이 활동하는 국내, 중국, 일본 등 각지에 널리 뿌려졌습니다. 이 선언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일제 당국은 큰 전율과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은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政府主義東方聯盟)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대만에서 외국위체를 위조 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으나 1928년 5월 8일 그 연루자로 일경에 피체되어 10년 형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옥사 순국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뛰어나 필력으로서 많은 단체의 취지문을 써 주셨고, 언론인으로서 애국정신이 넘쳐서 결국 독립운동을 하셨고 결국 여순 감옥에서 옥사 순국하셨습니다. 오늘날 그 애국정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언론인, 사회운동가, 애국자, 독립운동의 그 숭고한 정신을 21세기로 도약하는 지금의 우리가 꼭 이어 받아야 할 것입니다.
자료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신채호 [申采浩] - 역사연구가 곧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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