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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4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예배 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본문 : 미가 6장 6절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새번역>
오늘은 넌센스 퀴즈로 설교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오래된 고전 넌센스 퀴즈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과일 3가지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과일은 바로 감, 참외, 배입니다. 하나님은 감을 사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참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이들을 기뻐하십니다. 참외의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참외’하는 마음을 태도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배 중에서도 나주배보다 더 예배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 참외, 배 이 3가지를 꼭 잊지 마십시오.
드디어 2022년의 마지막 달 12월이 찾아왔습니다. 화살처럼 지나간 지난 1월부터 11월을 돌아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다사다난’이란 말이 정말 어울리는 한 해였습니다. 그런 한 해를 이 12월에 잘 정리하고, 또 2023년을 잘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가족들과 함께, 동역자들과 함께 즐겁고 복된 12월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12월 첫 번째 주일은 ‘당신의 예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시리즈 설교 다섯 번째 시간으로 함께 봉독한 미가서 6장 말씀을 통해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드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어떤 분들께서는 바로 ‘헌금’을 떠올리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헌금’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렇게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고 계신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시선을 드리고 계십니까?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라고 배우셨으니 지금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고 계시는 중이십니까?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통하여 예배의 정의를 말씀 드릴 때 강조하며 말씀 드린 것처럼 가장 중요한 전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려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행위가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드리지 않는다면, 바치지 않는다면 결코 예배로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드린 것을, 바친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때에 예배는 비로소 ‘예배’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드리는 행위, 바치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영어로 ‘Give And Take’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주고! 받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사회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특별히 인간관계에서 이 말은 더욱 더 중요해집니다. 물론 현 시대에는 ‘Take And Give’나 ‘Take’로 ‘받으면! 주기!’ 아니면 ‘받기만 하기’로 조금 변질된 부분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다들 마음 깊은 곳으로는 이 순서에 대해서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주어야 무엇인가 내게 돌아온다는 것이 삶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신기하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이 말씀만큼은 모두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누가복음 6장 38절, 새번역>
그래서 바울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 새번역>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먼저 드리고, 바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혹시 억울한 분이 계실 수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먼저 드리는 행위가, 바치는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 가운데 ‘Give And Take’에는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드리고, 바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먼저 주셨다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사용되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이 예배를 통해 우리가 먼저 드리는 것 같고, 바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먼저! 우리에게 충분히! 베풀어주신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한 주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주어진 ‘공짜’ 은혜가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계절의 변화조차 우리에게 먼저 주어진 은혜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먼저 드리고 바친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기꺼이 은혜에 반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밀을 마음속에 간직한 상태로, 믿음으로 품은 상태로, 오늘도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전제인 ‘드리고 바치는 행위’를 기초로 하여 무엇을 드리고 바쳐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먼저 ‘전심’과 ‘진심’을 드려야 합니다. 전심과 진심 속에 바로 ‘나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드린다는 말보다 그래서 우리는 ‘전심과 진심’을 드린다는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을 다 드리되 그 마음은 반드시 진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입니다. 언제나 예배 가운데 ‘전심과 진심’은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녀야 합니다.
하나님은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보다 우리의 전심과 진심을 예배가운데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는 것보다 우리의 전심과 진심을 예배가운데 받기를 원하십니다.
장자를 바치거나 우리 몸에서 난 자식을 바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 드리는 그 본인의 ‘전심과 진심’을 예배가운데 받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인가로 대체된 것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헌금으로 대처하지 마십시오. 그냥 예배당에 앉아 있는 수고로움으로 대처하지 않아야 합니다. 찬양하고, 일어나고, 앉고, 봉사하고, 듣고, 말하는 것으로 대처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무엇인가로 대처된 것으로 받고 싶으신 게 아니라 예배자들 각 자의 ‘전심과 진심’을 받기 원하십니다. 어찌 보면 이 ‘전심과 진심’을 드릴 수만 있다면 예배 가운데 무엇을 드릴 것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상한 심령이라고 하더라도, 찢겨지고, 괴롭고 답답한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그 마음 그대로의 전심과 진심도 구별치 않으시고 받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마음 상태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마음이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전심과 진심’을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시편 51편 17절, 새번역>
두 번째로 우리가 드리고 바쳐야 할 것은 ‘삶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바로 ‘삶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한 주간의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 질문이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 삶의 예배를 살다가 다시 예배 가운데로 돌아온 이들의 소위 ‘성적표’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헛되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체크포인트가 바로 이 질문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 다시 예배를 드리러 오기까지의 삶이 어떠했는지, 앎과 삶이 점점 일치해 가고 있는지, 아니면 예배와 삶이 괴리감으로 가득한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하여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삶을 살고자 결단했다고 하더라도 은혜가, 결단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런 예배와 삶의 반복이라면 우리는 진짜 ‘종교생활’로 접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가서 6장 8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서 6장 8절, 새번역>
아주 쉽게 요약하자면 삶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왔는가 질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그리스도인’으로 한 주간을 살아오셨다면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지 못한 채로 다시금 회개부터, 다시금 첫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저 예배는 1주일에 한 번 참석하는 ‘교양시간’으로 전락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달란트 비유의 가장 핵심은 ‘삶의 결과’였습니다. 다섯 개, 두 개, 한 개 등 몇 개의 달란트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이윤을 남겼느냐, 이윤을 남기지 못했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달란트 비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주신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마태복음 25장 24~25절, 새번역>
너무 멋진 변명을 하고 있는 듯 보이십니까? 주인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답변 같아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주인의 대답도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마태복음 25장 26~28절, 새번역>
지난주일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주일 예배 때도 우리는 드리고 바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받기만 하고 땅에 묻어 두었다가 오늘 다시 이 자리에 오신 것은 아니십니까? 간절히 소망하기는 우리 모두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의 고백을 통하여 ‘삶의 결과’를 하나님께 드리고 바치는 귀한 예배의 현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주인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마태복음 25장 20절, 새번역>
오늘도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자에게 ‘달란트’를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삶의 예배’를 살아가시겠습니까? 그저 땅에 묻어둔 채로 보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결과’를 받기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하나님께 드리고 바쳐야 할 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바로 ‘시간’일 것입니다. ‘시간이 금이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닙니다. 특별히 시간을 아끼기 위해 너무도 많은 것들이 발전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특별히 ‘스마트폰’이 바로 그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은행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식당에 직접 갈 필요도 없습니다. 물건을 사기 위해 운전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한 모든 것들이 ‘스마트폰’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사람도 ‘스마트폰’으로 만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예배마저도 ‘스마트폰’으로 드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마저도 스마트폰으로 만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껴진 시간을 모두 자신을 위해 투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지금 스마트폰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마트폰으로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하나님께 드릴 시간을 줄이고,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자 시간을 아끼는 행동이라면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시간은 하나님께 드린 하나님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이 아니기에 나를 위해 사용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냥 자기 집 앞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지 않고 며칠이 걸리더라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었기에 그 시간은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그 시간부터,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그 모든 시간이 전부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멀어도 그들은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너무도 미련해 보이지 않으십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오랜 시간이 걸려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설날이나 추석 풍경과도 동일합니다. 오고 가는 길이 피곤할 줄 알고 있고, 여러모로 불편한 것들 투성이지만 굳이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안가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왜 설날이나 추석에 여전히 고속도로는 마비가 되는 것일까요? 그 시간이 ‘행복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굳이 3일이나 떨어진 모리야 산으로 가서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냥 집 앞에서 바치라고 하면 되는데 왜 굳이 3일이나 걸어가라고 하셨을까요? 바로 그 3일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3일이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흔들리던 자신의 중심을 다잡고 이삭의 아버지가 아닌 믿음의 아버지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예배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바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는 시간입니다. 그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하심대로 진행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 예배 시간의 주인공이 하나님이 되시도록 우리의 시간을 드리고 바쳐야 합니다. 혹시라도 여전히 자신의 시간으로 가지고 계신다면, 하나님께 드리고 바치지 못했다면, 더 이상 고민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드리고 바쳐 보십시오. 그 시간이 따분함과 지루함의 시간이 아니라 은혜와 감격이 있는, 생동력이 넘치는 행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전제는 하나님께 ‘드리고 바치는 것’입니다. 무엇을 드리고 바쳐야 할까 고민하기 전에 예배는 드리고 바치는 시간이라는 전제를 꼭 마음속에 새기시길 소망합니다. 그냥 나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리만 앉아 있다 돌아가는 관람자가 아닙니다. 구경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 바쳐야 합니다.
‘전심과 진심’을 드리고 바쳐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 대처해서 드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전심과 진심’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고 바칠 ‘중심’입니다.
‘삶의 결과’를 드리고 바쳐야 합니다. ‘삶의 예배’를 기꺼이 믿음으로 살아왔다는 고백을 드리고 바치시길 소망합니다. 들었던 말씀, 주신 은혜 그냥 땅에 묻어두지 않고 앎을 삶으로, 성전예배를 삶의 예배로 다시 성전예배로 잘 이어가고 있는 삶의 결과를 하나님께 드리고 바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당신의 ‘시간’을 드리고 바쳐야 합니다. 예배는 당신이 드린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시간’이 되는 순간입니다.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이미 그 시간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의 순간만큼은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시도록 당신의 시간을 드리고 바쳐 보십시오. 그러면 예배가 왜 ‘행복의 시간’인지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지금 예배를 드리고 계신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계십니까?’ 마지막으로 처음 드린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기는 ‘전심과 진심’, ‘삶의 결과’, ‘시간’을 드리고 바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새번역>
결단찬양 – 여호와의 유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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