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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면적 성도인가?(롬 2:17~29)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 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어제가 석가탄신일이었습니다.
대체공휴일 제도 때문에 내일까지 연휴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보다 오늘이 성령강림절이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성령이어 오소서, 코로나의 영향으로 침체상태에서 아직 온전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오소서, 용산교회에 오소서, 무엇보다도 내게 강림하소서’ 기도하며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본문의 분량이 많습니다.
설교의 제목도 평소보다는 좀 긴 편입니다.
혹시 ‘오늘은 설교도 길어지는 것 아닌가?’하실지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유대인”이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17절,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로마서 2장에는 ‘유대인’이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나옵니다.
로마서 전체에 ‘유대인’이라는 말이 열한 번 나오는데 그 반 가까이가 2장에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소제목도 “유대인과 율법”입니다.
“유대인”은 원래는 '유대 지역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민족 이름입니다.
유대인은 ‘유대교를 믿는 사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지난 달에 말씀드렸는데 유대인은 선민의식이 강했습니다.
‘우리는 선택 받은 백성이다’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나가서는 ‘우리만 선택 받은 백성이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우리만 선택 받은 백성이다’ 하는 것은 ‘우리만 구원 받는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도 이방인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점이 하나 둘이 아닌데 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점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스스로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13절에서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8절에서는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을 때 로마 군인들의 영내로 끌려가기 전에 층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전도인이 되었는지를 밝혔습니다.
그 일이 사도행전 2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리라”(행 22:21)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고백하며 이방인 선교에 힘쓴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유대인이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팔레스타인을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그저 민족종교, 지역종교의 하나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 대종교(大倧敎)라는 종교가 있지요.
단군을 믿는 종교인데 처음 이름은 단군교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종교입니다.
바울의 노력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로마서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목소리를 가장 선명하게 들려주고 있는 성경입니다.
유대인들은 내세우는 것이 많았습니다.
우선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17절을 다시 봅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건물은 기초가 중요하고 기둥이 중요한데 율법은 유대인들의 기초이고 기둥이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가지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해!’ 했습니다.
지금히 선한 것을 분간한다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한다는 뜻입니다.
18절에 그 것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고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야’했습니다.
19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20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생활은 어떻하였습니까?
21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면서 자신은 도적질하는 유대인이 많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면서 자신은 간음하는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온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유대인 가운데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지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셨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8장 9절에는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간음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우상을 가증히 여기면서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면서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유대인들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28절에 답이 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표준새번역개정판』 성경을 보니까 “표면적 유대인”을 “겉모양으로 유대사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니까 "like a Jew"라고 하였습니다.
한문성경을 보니까 “외면적 유태인(外面的猶太人)”이라고 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 한마디로 해서 ‘껍데기만 유대인’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가운데 “무늬만 무엇”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은 무늬만 유대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아, 바울은 겉으로만 유대인인 것을 내세우는 유대인들을 그렇게 불렀구나’ 이렇게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나는 표면적 성도가 아닌가?’ 살펴보아야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부르는 이름이 여럿입니다.
우선 교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도 합니다.
기독교인을 영어로 바꾸어서 크리스천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도 합니다.
좀 낮춰서 좋지 않게 말할 때는 ‘예수쟁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천작쟁이’라고도 했다고 하는데 이 말의 정확한 유래는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한자로 ‘천주(天主)’라고 하는데, 천주교가 들어올 무렵에 하나님을 믿는 것을 나쁘게 여겨 ‘천주악(天主惡)’이라는 말이 생겼고, 여기에서 교회를 천작당, 예수 믿는 것을 천작질, 예수 믿는 사람을 천작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 가운데 ‘성도’가 있습니다.
성도는 성스러을 성(聖,) 무리 도(徒), 성스러운 무리, 격이 높은 말이지요.
국어사전에서 ‘성도’를 찾아보면 “기독교 신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성도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7절에서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로마의 교인들만 성도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용산교회 교인 여러분도, 여러분과 저도 성도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한걸음 더 나가서 ‘나는 성도인데 표면적 성도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표면적 성도입니다.
편할 때는 교회 잘 나오고, 자기가 기독교인 것을 밝히다가 형편이 나빠지면 교회를 멀리하고 기독교인인 것을 감추려고 하는 사람, 표면적 성도입니다.
무엇보다도 행동이 성도답지 못한 성도, 표면적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표면적 유대인”에 반대가 되는 말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면적 유대인”입니다.
29절 앞부분,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이 “이면적 유대인”을 『표준새번역개정판』 성경은 “속이 유대인인 사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은 "real Jew"라고 번역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 ‘진짜 유대인’이라는 뜻입니다.
요즘은 새로운 말들이 참 많이 생기는데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엊그제 「국민일보」 종교면 기사에서 “찐성도”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저는 처음 보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더니 여러 군데 나오더군요.
어느 목사님이 올해 1월에 “찐성도가 되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한 설교도 올라와 있었습니다.
‘진짜 성도’를 줄여서 “찐성도”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찐성도”는 “이면적 성도”의 현대적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인터넷에는 “찐성도”의 반대는 “짝퉁 성도”라고 나와 있습니다.
표면적 성도의 현대적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아, 바울은 유대인을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으로 나눴구나’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나는 표면적 성도인가, 이면적 성도인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이면적 성도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하겠다’ 다짐해야 합니다.
‘주여, 내가 이면적 성도가 되기 원합니다. 힘을 주소서, 지켜 주소서, 도와 주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인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씨름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바울은 아시아 전도의 길이 막혀 고심하다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환상을 보고 ‘아,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셨구나’ 인정하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이 일은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성경을 집중적으로 읽는 가운데 강하게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김진홍 목사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1970년대 초, 젊은 시절에 한양대학교 부근 청계천 빈민촌에 활빈교회를 세워 빈민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여자 교인 한 사람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원에서 그 여자 교인의 시신을 등에 업고 교회로 돌아오는데 귀와 가슴과 영혼에 세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네 등에 업혀 있는 죽은 그 여인이 십자가에 죽은 나 예수다.”
김진홍 목사님은 소스라치게 놀라 죽은 여인 곁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절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나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 알겠습니다. 예수님을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힘써 섬기겠다고 다짐한 것이지요.
그리고는 성동교 다리 위의 가로등 불빛 아래서 성경을 펼쳐 시편 57편 7절과 8절을 찾아 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김진홍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채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며 “이런 어두운 역사에서 새벽을 깨우는 일꾼이 되겠습니다. 서럽고 슬픈 영혼들을 위하여 희망의 새벽을 깨우는 그릇이 되겠습니다.”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새벽을 깨우리로다”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하고 자기의 사명으로, 나의 삶의 목표로, 살아가야 할 이유로 삼고 더욱 힘있게 일했습니다.
은퇴를 한 뒤 동두천에 두레수도원을 세웠습니다.
지금 80대인데 쉬지 않고 일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청계천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냈는데 제목을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120쇄가 나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이면적 성도의 삶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창세기 17장에는 아브라함이 구십구세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0~14)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할례는 유대인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바울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5절에서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저 표피를 잘라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표면적 육신의 할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28b)라고 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례와 세례는 많이 다른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내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세례를 받았는데 머리에 물 몇 번 뿌린 것을 전부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표면적 육신의 세례입니다.
예전에는 기독교 직장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지원자 구비서류에 세례증명서를 요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목회를 할 때 교인이 “우리 아이가 이번에 어디에 지원하려고 하는데 세례증명서가 있어야 한데요. 목사님 우리 아이에게 세례 주고 세례증명서 하나 만들어 주세요.”하는 부탁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받는 세례도 표면적 육신의 세례이지요.
세례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응, 나는 세례 받았어. 나는 세례교인이야’하고만 있다면 그 역시 표면적 육신의 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받은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그 세례를 이면적 세례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을 ‘쳐지맨(Church Man)’과 ’크리스천‘으로 나눠야 한다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쳐치맨은 주일에 그저 교회 한 번 나오는 성도를 말합니다.
크리스천은 중생의 확신을 갖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성도답게 살기 위해서 애쓰는 분들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과 설교를 가지고 말하면 쳐치맨은 표면적 성도, 크리스천은 이면적 성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구가 천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크리스천, 이면적 성도가 얼마나 될까?’ 좀 궁금해집니다.
북한에는 지하교회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남한에 들어온 탈북민들의 증언을 들어보아도 그렇고, 미국 국무부나 국제오픈도어선교회 같은 공신력 있는 기관들이 매년 발표하는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하교회 성도들, 이면적 성도들입니다.
중국 시진핑 정권의 기독교 박해가 매우 심합니다.
최근에는 교회가 인터넷을 선교에 활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정세를 볼 때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중국의 성도들 이면적 성도들입니다.
일본은 기독교인이 매우 적은 나라입니다.
일본의 환경이나 역사는 기독교 신앙을 갖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일본의 성도들을 대하면 순수하고 진실한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아, 이면적 성도로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한국은 짧은 기간에 교회가 놀랍게 성장한 나라, 기독교인 숫자가 많은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가서 이면적 성도가 많은 나라로 유명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표면적 성도와 이면적 성도를 구분하는 기준 역할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코로나 사태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 왔고, 하고 있는 여러분은 이면적 성도입니다..
목사님들은 연휴를 참 싫어합니다.
연휴 때는 예배 참석 인원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은 ‘더 이면적 성도들‘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에 찾아왔겠지요.
그가 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주변에 있는 표면적 유대인들의 행동을 보고, ‘이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해답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니고네모는 예수님과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고 그 끝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라는 복음 중의 복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이면적 유대인이 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되기 원합니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463장, 오늘 봉헌찬송으로 함께 부르게 될 것인 이 찬송의 1절 가사는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이렇게 신자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그저 흑인영가의 하나로 알려져 있고 작사자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가사의 내용을 보아서는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신자되기 원합 니다” 간구하며 호소하고 있는 것일까?
이면적 신자가 되기를, 더 이면적 신자가 되기 원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찬송의 2절은 “사랑하기 원합니다라”는 말을,
3절은 “거룩하기 원합니다”라는 말을
4절은 “예수 닮기 원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더 이면적 성도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더 사랑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더 거룩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예수 닮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을 그저 2천 년 전의 기록으로만 여기지 말고, 오늘 나에게 적용해서 ‘나는 이면적 성도인가?’ 물으며 이면적 성도가 되기 위해, 더 이면적 성도가 되기 위해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저희를 성도로 불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표면적 성도가 아니라 이면적 성도가 되기에 힘쓰게 하여 주옵소서.
바울 사도는 표면적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표면적 성도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는 일이 많은 것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주여, 한국교회에 이면적 성도들이 더 많아지게 하여 주옵소서.
용산교회는 이면적 성도들의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강림하신 성령님, 저희들이 이면적 성도가 되는 일을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