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노무현대통령시대의 정치상황
우리 정당사상 처음 시도한 이른바 '국민경선'을 통해 새천년민주당(이하민주당으로 줄임)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노무현은 국민통합 21'의 정몽준대통령후보와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에 극적으로 합의해 2002년 11월 25일 단일후보로 확정되었다.
2002년 12월 19일의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특히 인터넷 세대인 20~30대 젊은 층을 비롯해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지역과 그가 내건수도이전 공약의 수혜지인 충청지역 유권자의 압도적인 지지에 힘 입어 48.9% 의 득표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2.3%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2)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Participatory Government)를 표방하면서 2003년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후 노대통령은 전국정당을 지향한다는 구실로 2003년 자신의 선출모태인 민주당을 탈당하고 추종 세력을 중심으로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민주당과 갈라져 정당대의정치의 기틀을 흔들고 여권의 원내세력을 약화시켰다.1)
노대통령은 대통령직에 걸맞지 않는 경박한 행동과 정제되지 않은 품위 없는 돌출발언을 반복해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노대통령은 2004년 4월 15일의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2003년말부터 공직선거법을 무시한 채 공공연히 여당선거운동 발언을 일삼다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경고를 받기도 했다.
이 경고를 무시하고 선거개입을 계속하다가 2004년 3월 12일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에 의해서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이유로 탄핵소추되기도 했다.2
헌법 제65조 제3항에 의해서 노대통령의 권한 행사가 정지된 가운데 고건(高建)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을 하는 불행한 헌법장애상태가 발생했다.
탄핵심판사건이 헌법재판소에 계속 중인 가운데 실시된 4월 15일 제17대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처음으로 정당투표제가 도입되어 지역구의원 243명과비례대표의원 56명을 합해 299명의 국회의원을 뽑았다. 이총선거에서 여당인열린우리당은 152석의 과반수 의석을 얻은 반면 탄핵소추를 주도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국회 다수당의 지위를 잃고 민주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는 탄핵역풍이 불었다.3)
임기를 불과 한 달 남겨놓은 비생산적인 국회가 임기 개시 1 년밖에 안 된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 대통령을 탄핵소추한 것에 대한 국민의준엄한 심판이 내려진 것이다.
그래서 국회의 탄핵소추가 노대통령에게는 국회 내에 과반수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된 헌법장애상태를 되도록 빨리 해소하려고 탄핵심판사건을 집중적으로 심리해서 국회의원 총선거 한 달 후인 2004년 5월 14일 노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사건을 기각결정했다.
헌법재판소는 노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사실을 부분적으로 확인하면서도 대통령을 파면해야 할 정도로 대통령의 법 위반행위가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없고, 대통령에게 부여한 국민의 신임을 임기 중 다시 박탈해야 할 정도로 국민의 신임을 저버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대통령에 대한 파면결정을 정당화하는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국민의 직선 대통령은 민주적 정당성이 강하므로 다른 고위 공직자와 달리 중대한 위법 행위가 있을 때만 탄핵파면이 정당화된다는 논리였다. 헌법의 탄핵사유(제65조제1항:“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를 보완하는 헌법해석을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권한의 근거인 헌법을 경시하는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의 권한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대통령은 스스로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는 모범을 보여서 법치국가의 실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수호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하기도 했다.
노대통령은 탄핵사건 기각 이후에 국회 다수세력인 여당의 지원을 받으며 그의 대선 공약인 수도이전을 실현하기 위해 특별법2을 제정했지만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3으로 좌절되자, 행정수도의 분할을 위한 대체입법4을 무리하게 강행했다.
또 좌파적이고 급진적인 이념지향정책5을 추구하는 위현적인 법률을만들고 정부규제를 강화하는 실효성 없는 정책을 추진하다가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 또는 국민의 저항으로 제동이 걸려 중단되거나 법률개정을 하기도 했다.
비판적인 메이저언론을 통제할 목적으로 만든 신문법을 비롯한 언론관계법의 위헌결정,6) 사학규제와 교육의 하향평준화”를 위한 사립학교법, 부유층을 과세대상으로 한 종합부동산세 도입을 위한 조세법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노대통령은 그 밖에도 이른바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라는 미명하에 취재의 자유를 제한하는 언론탄압정책(기자실 대못질)을 강행하는 등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에 어긋나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헌법을 경멸하는 발언('그 놈의 헌법)을 하는 등 헌법수호의 책무를 망각하는 정치행태를 임기 말까지 계속했다.
노 대통령의 임기 중에 실시된 2006.5.제4회 지방자치 동시선거를 비롯한 각종 보궐선거 등에서 여당이 번번이 참패를 당하면서도 노대통령과 여당은 오만과 독선의 정치행태를 이어 갔다.
더욱이 2007년 12월의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야당 유력후보자를 비방하는 발언을 일삼다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중립의무를 준수하라는 경고를 받게 되자 오히려 중앙선관위가 자신의 언론자유를 침해했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전무후무한 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1)
노대통령은 국민통합의 헌법적인 책무를 망각한 채 전체 국민이 아닌, '노사모를 비롯한 386세대,3) 일부 친여 언론매체4와 시민단체5 그리고 노동자단체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편파적 대통령으로 행동하면서 통합의 정치가 아닌 분할과 갈등의 정치로 일관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사람과 못 배운사람, 서울 사람과 지방 사람, 영남과 호남, 방송과 신문 등 다양한 2분법적인정책으로 모든 국민을 분열시켜 통합을 해쳤다.
외교행태를 보더라도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에 대해서는 반미적인 언동을 통해서 한미간의 유대를 약화시키면서도 국군 해외파병(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주한미군의 주둔비용 추가부담, 주한미군 감축 등 미국이 요구한 것은 모두 수용하는 실리에 반하는 졸렬한 외교정책을 폈다. 미·일간의 유대강화로 인한 따돌림에는 속수무책이었고, 탈북자의 강제북송, 고구려 역사왜곡 등 우리에게 비우호적인 중국에는 저자세 외교로 일관했다.
대북정책에서는 “햇별정책'을 '포용정책'으로 포장해 북한이 주장하는 '우리 민족끼리'의 술책에 동조하면서 국제적인 현안이 된 북한의 인권탄압과 핵개발에 대해선 소극적인 자세로 침묵한 채 엄청난 규모의 경제적인 지원을 하면서도)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송환을 당당하게 요구하지도 못하는 저자세 '친북정책'으로 일관했다.
제17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두 달여 앞 둔 10월 초 노대통령의 평양방문과 김정일과의 회담 및 10·4 남북 공동합의서'는 상호주의 국제외교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지방균형발전의 구호 아래 발표된 각종 지방 개발사업은 전국을 투기장으로 만들어 오히려 부동산 시장에 혼란을 초래했다.
서민을 위한다는 편가르기 분배우선정책과 반기업정서로 5년 동안 투자증가율이 연 3%에도 못 미쳐 성장동력이 크게 위축되고2“이태백'으로 풍자되는 100만 청년실업과 빈부격차의증대라는 역효과를 초래해 민생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민주노조, 전교조 등 친북좌파세력의 불법 폭력시위를 방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처해 법질서가 훼손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그 결과 법치주의가 뿌리채 흔들려 공권력이 무력화되었다.
'작은 정부보다 일하는 정부'를 내세워 국가기관과 공기업을 비대화하고공무원과 공기업직원을 엄청나게 늘려 국가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3)
특히 고위공무원과 공기업임원의 인사에서는 말로는 '시스템 인사'를 한다면서도 원칙없는 정실인사"를 되풀이해 원성을 사기도 했다. 임기 말까지 계속된 명분과원칙 없는 측근 구하기 특별사면권의 남용으로 사법권을 심하게 훼손하기도 했다.
노대통령은 취임 초에 우리 헌정사를 '기회주의가 득세한 오욕의 역사'라고폄하하면서 이른바 '과거청산'의 명목으로 여러 위원회2를 만들어 과거사를 들추는 일에 큰 국력을 쏟아 부었다.
취임 초만 해도 노대통령이 주는 신선한 이미지 때문에 많은 사람이 큰기대를 했었지만, 국민의 이런 기대는 완전히 무너져 오히려 역대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게 되었다.3)
다만 그의 집권기간 동안 정경유착이 줄어들고 선거문화가 개선되었으며, 동남아국가연합(ASEAN) 및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유럽연합(EU) 과도 자유무역협상을 시작한 것은 국제화 시대에 국제거래의 폭을 넓힌 것으로그나마 긍정적인 업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권위주의가 많이 약화된 점은평가할 수 있지만 대통령직과 공권력의 권위까지 함께 훼손되는 권위 실종현상이 나타난 것은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