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의 무한도전>
양준혁 과 삼성라이온즈와의 인연은 참 특이하다.
첫 인연은 1988년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영남대로 진학한 양준혁은 비밀리에 삼성라이온즈 박영길 감독에게 프로전향의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대답은 거절이었다. 아마 그때 삼성라이온즈에 입단했더라면 지금 도전하고 있는 것은 2천안타가 아니라 3천안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 인연은 1991년 11월. 신인 2차 지명에서 양준혁은 쌍방울 레이더스의 1차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협상 테이블에 앉아 보지도 못한 채 양준혁은 상무를 택했고 그다음해 삼성의 1차지명을 받았다. 당시에는 2차지명을 한 선수에 대해 지명권 보유 권한의 세밀한 규정이 없었다. 이 불완전한 제도의 허점이 양준혁에게 라이온즈의 유니폼을 입을수 있게 했던 것이다.
세 번째 인연은 2002년FA가 되어 LG로부터 삼성라이온즈로 다시 오게 된 때이다. 선수협의회 파동으로 강성이미지를 얻어 모든 구단으로부터 경계대상이었고 FA금액도 35억(보상액 포함)원이라 진로가 불투명했지만 결국 삼성라이온즈의 선택을 받았다. 우승을 원했던 김응용 감독이 삼성의 사령탑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2001년도 두산에 이겨 우승했더라면 양준혁은 영원히 삼성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런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양준혁의 야구인생에서 삼성라이온즈는 가고 싶은 팀이었지만 가기에는 늘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던 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준혁은 신이 허락한 특이한 인연으로 삼성라이온즈와 함께했다. 그리고 3년의 외유 끝에 돌아온 그해에 삼성라이온즈는 그토록 염원하던 우승을 했다.
양준혁 마저 없었더라면 지역의 올드 팬들에게는 그 우승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나이가 든 노장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한 시대를 풍미한 마해영.이종범도 점차 그늘 속으로 접어들고 있는데 그들보다 1년 선배인 양준혁은 오늘도 우리의 친구가 되어 즐거움을 나눈다. 나날이 한국프로야구의 역사를 넘어서고 통산 2000안타의 대기록 달성에도 지침이 없다. 그의 존재는 힘든 서민들의 동반자이며 이 시대 우리 삶의 신나는 기쁨이다.
그의 존재의식이 투혼을 불살라 오늘의 양준혁을 있게 한 것은 과연 무었일까? 양준혁은 프로입문 6년째인 98년도 절정의 타격기량을 그라운드에 쏟아냈다.수위타자(0.342)와 최다안타(156개) 그리고 출루율(0.450)에서 선두에 오르는 괴력을 보였지만 그해 겨울 돌아온 것은 해태 임창용과의 맞트레이드 였다.
그리고, 낯선 광주에서 채 적응이 되기도 전에 2000년 3월 LG의 손혁과 또 한 번 맞트레이드 되었다. 두번의 트레이드는 양준혁의 심지를 크게 흔들었다. 절정기에 있었고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가치의 인정 문제가 아니었다. 오직 야구로써 정상에 서려고 했던 생각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눈을 조금씩 뜨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과거에 안주하려는 근성을 가장 먼저 버려야 한다고 느낀 것이 그의 첫 깨달음이었고 변화를 두려워하면 가진 것 마저 잃는다는 것이 그의 두 번째 깨달음이었다.
LG로 둥지를 튼 뒤에는 존재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비로서 자신의 뒤를 돌아 보면서 서른에 이른 양준혁은 조금씩 변모해 갔다. FA로 삼성라이온즈에 옮긴 첫해 양준혁은 2할 7푼 6리에 머물렀다. 팀은 우승했지만 그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선수생활을 시작해 처음으로 3할에서 떨어졌고 온갖 구설수에 시달렸다. 그러나 성숙해진 만큼 이번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만큼 잘 못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체해 있으면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고 그것이 곧 퇴보라고 생각해 같은 방식으로서는 프로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과거 잘 나가던 양준혁을 지워버렸다. 야구를 처음 시작한다는 기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현실의 자아가 보이기 시작했고 편해졌다. 자신을 돌아보다 절정기의 만세타법에서 해답을 얻은 양준혁은 그해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만세타법을 새로이 다듬었다. 그리고 부활했지만 2005년 시즌엔 또 한번 추락(0.261)의 고통을 겪었다.
30대 중반. 이제 한계가 이른 것인가? 스스로 반문했다. 모든 상품이 시대에 맞춰 업그레이드 되듯이 스스로에게도 능력 개발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베테랑으로서 새삼스럽게 뭘한다고... 그러나 양준혁은 능력개발을 회피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허물을 벗지 못하면 자신을 정확히 볼 수 없는 것이고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역시 스스로 일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한번도 바꾸지 않았던 오픈 스탠스를 크로스 스탠스로 과감히 바꾸었다. 그리고 거듭 새롭게 부활했다. 외다리타법을 익히기 위해 왕정치는 어둠속에서 진검으로 짚단을 베었다. 그의 훈련보조가 되다시피한 아라끼와 히로시 타격코치는 힘들어 포기할 때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어둠속에 있을 거라고 조언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양준혁은 늘 마음속의 허상을 벗어 던졌고 믿음 그대로 실천했다.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배가 부르다 그러면 나는 쉴 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절정기에 삼성라이온즈를 떠나면서 찾아왔던 정신적 방황이 그렇게 거목의 밑거름이 되어 우리 곁으로 되돌아왔다. 스스로를 분석하는 통찰력과 끝없는 야구열정 이야말로 그를 오늘에 이르게 한 비결인 것이다. 심정수는 나이가 들면 허리등의 순발력이 감소된다는 얘기에 양준혁 선배를 지적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못치는 것이 아니라 못치기 때문에 나이가 드는 것이죠.”
40세를 바라보는 스타들이 사라져가지만 양준혁의 무한도전은 묵묵히 3천안타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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