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에 관한 단상
경신교육재단 이사장 金宗年
내 나이도 이제 70을 넘어서고, 최근에는 건강이 전 같지를 않아서 이곳저곳 불편한 일이 자주 생기면서 ‘내 목숨이 도대체 얼마나 남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한 것은 나 자신이 신이 아니며, 그렇다고 남 달리 특별한 건강한 체질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면, 남은 인생 별 일 없이 온전히 산들 평균 수명으로 보아 10여 년이 될까?
나이와 목숨 이야기로 시작하니 혹 어떤 사람은 또 나이 든 양반 넋두리를 시작하려는가, 아니면 무슨 생사에 관한 거창한 담론을 펼치려고 하는가 하고 지레짐작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식도 얕은 나에게는 처음부터 분에 넘치는 욕심이요, 넋두리는 우리같이 나이 든 사람들이 모이면 귀 따갑게 듣는 것이 아닌가.
그저 최근에 몸이 안 좋아 한 동안 큰 걱정을 하면서 괜히(?) 이 세상에 단 한 번뿐인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감에 이런저런 생각이 뒤얽힌 것들에 대해 몇 자 적어보고 싶었다.
‘목숨’,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이 말보다 소중하고 값어치 나가는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것으로 우리는 나라도 구했고, 부모도 살렸으며, 진리도 찾았다. 이것이 있고부터 다른 모든 것이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귀한 것을 가리키는 이 말이 순우리말로 남아 있으니 이것 또한 우연은 아니지 않는가. 목숨은 말 그대로 ‘목+숨’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목으로 쉬는 숨’이라는 뜻이다. 아니 목으로 쉬는 숨도 있는가? 우리는 숨은 코로 쉰다고 하든지 아니면 가슴으로 쉰다고 하지 어디 목으로 쉬는 숨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왜 ‘목으로 쉬는 숨’이 우리의 생명, 즉 목숨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네 단계의 숨을 쉰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 생명력이 왕성한 어린 시절까지 첫 단계에 우리 인간들은 아랫배로 숨을 쉰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이 잠들어 숨 쉬는 모습을 자세히 보라. 나도 손자가 평안히 잠들어 숨 쉬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는데 분명히 어린아이는 아랫배, 소위 단전 부근의 근육이 움직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복식호흡과는 또다른 것이지만 우선은 복식호흡도 여기에 속한다고 해 두자.
그러다 세상의 온갖 올바르지 못한 식생활과 탁한 공기, 불규칙한 움직임, 격한 감정의 기복을 겪으면서 체형의 이상 현상이 겹쳐 우리의 숨은 점차 가슴 부근으로 올라온다. 중고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숨쉬기 운동을 어떻게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분명 가슴으로 숨쉬기를 한다.
그러다 더 나이가 들고 근력이 떨어지면 우리는 어깨로 숨을 쉰다. 쇠잔한 노인네들이 계단을 오르다 힘이 들면 주저앉아 어깨를 한껏 들썩이며 가쁘게 숨을 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한 동안 살다가 걸어 다닐 기력조차 잃어버리고 육신이 병들어 죽음이 임박해 오면 가만히 자리에 누워 목만 깔딱거리면서 숨을 쉬게 된다. 그런 숨조차 쉴 힘이 없어지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니 ‘목숨’은 최대한 아껴야 하고 길어질수록 좋은 것이 된다.
늙은이들이 주고받는 농담 가운데 ‘요즘도 숨쉬기 운동은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어떤 병이 들거나 일을 당해 죽더라도 모든 죽음의 최종 원인은 ‘호흡 중단’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건강하게 가급적 오래 살아가는 방법 가운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숨을 제대로 쉬면서 그 단계를 늦추고 기간을 최대한 늘이는 것이 결국 건강하게 오래 사는 방법이 된다. 숨을 제대로 쉰다는 것은 참으로 간단한 일인 것 같은데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할 경우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은 숨을 잘못 쉬는 경우가 훨씬 더 많고 제대로 쉬기가 간단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선은 육신이 늙어가면서 단순히 자율신경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숨’을 쉴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라도 어린 시절의 호흡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무슨 ‘단전호흡’이니, ‘명상수련’이니, ‘요가’니 이런 모든 것들의 기본은 바로 ‘어린아이 단계의 숨쉬기’로 되돌아가는 훈련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무병장수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것이어서 예로부터 이러저러한 온갖 도통의 맥이 이어져 온 모양이다.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각각의 맥에 따라 그런 숨쉬기 방법에도 이런저런 차이가 있는 모양이지만 딱 한 가지다. 숨은 ‘깊고 조용히’ 해야 한다는 점에는 일치하고 있다. 인도의 어느 사상에는 인간은 태어날 때 자신이 이생에서 쉬는 숨을 타고난다고 한다. 따라서 이생에서 타고난 숨을 빨리 소비(?)해 버리면 그만큼 타고난 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맞는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깊고 조용한 숨’을 쉴 수 있을까? 여러분들도 세상 살아오면서 체험했겠지만 호흡은 우리의 감정 상태 및 육체적 건강 상태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마음이 차분하고, 잡생각이 없고, 몸에 불편한 데가 없으면 우리의 숨은 느려지면서 조용하게 숨을 쉬게 되고, 거기에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의식이 깨어 있으면 깊은 숨을 쉴 수 있다. 그러나 불안하고, 화나고, 근심이 많고, 육체가 피곤하면 우리의 숨은 얕고 빨라지게 되어 있다. 나는 때때로 지금 내가 숨을 고르게 쉬고 있는지 한 번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마음이 착 가라앉는 신기한 경험을 자주 한다. 아직은 한 번도 무슨 명상수련을 받거나 쌓은 일은 없지만 최근 ‘목숨’에 관심을 가지면서 점점 올바른 숨쉬기도 생각하게 되었다.
숨에는 들숨이 있고 날숨이 있다. 들숨과 날숨의 반복으로 우리는 생명을 유지해 가고 있다. 그런데 들숨이 먼저인가 날숨이 먼저인가. 언뜻 생각하면 닭과 달걀의 논리와 같은 순환논리의 오류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날숨이 먼저인 모양이다. 우리가 쓰는 한자어에 ‘호흡’이라고 하지 ‘흡호’라고 하지 않는다. 呼는 날숨이고, 吸은 들숨이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습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적인 온갖 명상 수련에서는 반드시 날숨을 먼저 한다고 한다. 그런데 서양에서 들어온 맨손체조 때문에 숨쉬기 운동은 ‘들숨’부터, 그리고 ‘가슴’으로 숨 쉬는 것으로 배워왔으니 우리는 어릴 때부터 잘못된 숨쉬기를 해온 것이 된다. 영어에도 호흡(breath)을 들숨(inhale)과 날숨(exhale)의 구분을 하기도 하지만 숨쉬기의 순서를 나타낸다든가 목으로 쉬는 숨이란 특별한 어휘가 없는 줄로 안다. 그들의 호흡에 대한 생각이 동양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당연한 것이리라.
들숨과 날숨은 어떻게 다를까? 단순히 산소를 들이마시고 몸속의 나쁜 가스를 내보내는 기능의 차이만 있는 것인가? 들숨은 生하고, 生하면 動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들숨 단계에서는 침착함과 안정감은 생기지 않는다. 날숨은 滅하고 滅하면 停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힘과 정열이 생기지 않는다. 말하자면 들숨과 날숨 사이에 한 번은 생하고 한 번은 사하는 것이니 부처님 말씀처럼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은 모두 한 호흡에 달려 있는 것이 된다. 부처님도 이런 호흡을 통한 깨달음의 이치를 우리들에게 깨우쳐주시기 위해 따로 설하신 1)<安般守意經>이라는 것이 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워 아직 通解는 하지 못했지만 이제 호흡에 달린 삶의 이치는 어렴풋이 떠오른다.
들숨과 날숨 사이, 生도 아니요, 滅도 아닌 경계, 곧 生滅을 초월한 경계, 사실 이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몸과 마음의 수련이 웬만큼 깊은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누구는 선천적으로 폐활량이 많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신체적 구조에 따른 것은 배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사격할 때 표적을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처럼 우리는 모든 의식을 집중해야 할 경우엔 누구나 들숨과 날숨의 경계에 놓이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을 양미간에 있는 2)차크라에 집중하게 된다고 하며 이것이 열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하니 혹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도 이런 경우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손자 놈이 잠들어 있는 저 평안한 모습을 보며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고르고 맑은 숨소리를 듣고 있다. 얼마나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치고 평안한지 모르겠다. 목숨, 그것은 우리 모두 아껴 두어야 할 것이다.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그때 쉬도록 저 깊이 간직해 두자. 그러자면 목으로 쉬는 숨이 빨리 오지 않도록 늘 저 손자 놈처럼 아랫배로 숨을 쉬어야겠다. 단전으로 숨을 쉬려면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야 한다. 성냄도 화도 근심도 모두 내 마음에 자리하지 않고 그저 지나가도록 해야 한다. 오는 근심을 억지로 막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머물러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저 지나가도록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으리라. 앉을 자리가 없으면 그냥 지나가게 되어 있다. 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3)貪・嗔・痴를 내 마음에 자리하도록 맞이했던가. 그것들이 내 호흡을 불안정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얼마나 내 마음과 육신이 상하게 되었던가.
우리 모두 지금부터라도 숨을 바르게 쉬도록 하자. 그래서 사는 날까지 건강하고 맑은 정신으로 살자. 목으로 숨을 쉴 때가 오면 하는 수 없지만, 일부러 목으로 숨을 쉴 필요는 없는 것이리라. 늘 ‘깊고 조용한’ 숨을 쉬자. 깊고 조용한 숨을 쉬는 동안에는 우리가 마음의 정숙을 잃지 않을 것이요, 마음의 정숙을 잃지 않으면, 생각과 판단이 흐려질 수 없어 적어도 일을 헛되이 그르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나의 숨이 고른지 늘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