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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초연에 관하여
현자 수틱슈나가 현자 아가스티야에게 물었다.
현자시여! 일과 지식 둘 중 어느 것이 해방에 도움이 됩니까? 이 해방이라는 의문점에 대해 저를 일깨워 주십시오.
아가스띠야가 대답했다.
실로 새는 양 날개가 있기에 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과 지식, 이 둘이 함께 해야 해방이라는 지고의 목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일만으로 혹은 지식만으로는 해방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둘이 함께 하면 해방으로 가는 방법이 됩니다.
그대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 전설을 하나 말할 테니 들어 보십시오. 옛날 까룬야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아그니베슈야의 아들이었습니다. 신성한 경전들을 통달하고 그 요지를 이해한 후, 이 젊은이는 삶에 대해 냉담해져 버렸습니다. 이를 보고, 아그니베슈야는 일상의 의무들을 하 지 않는 이유를 아들 까룬야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아들 카룬야가 대답했습니다.
“경전의 한편에서는 죽을 때까지 경전에서 지시하는 것들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불멸은 모든 행위를 포기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 나의 구루이시며 아버지시여! 이 두 가르침에 잡혀 있는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이렇게 말하고, 젊은이는 조용히 있었습니다.
아그니베슈야가 말했습니다.
나의 아들아! 옛 전설을 들려 줄 터이니 들어 보아라. 그 전설이 지니 고 있는 교훈을 생각하고, 그러고 나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옛날, 수루찌라는 천상의 요정이 히말라야의 봉우리에 앉아 있다가 신들 중의 왕인 인드라의 사신이 재빨리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이유를 묻자, 그 사신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임무를 말했다.
“아리슈따네미라는 현자 왕이 왕국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간다마다나 언덕에서 놀라운 금욕 생활을 했다. 이를 보고, 인드라께서 내게 요정들과 함께 가서 그를 천국으로 데려오라고 하셨다. 그러나 현자 왕은 천국의 장단점을 알고 싶어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천국에서는 경건한 자들 중 최고, 중간, 최하인 이들이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닌 공덕의 열매가 고갈되면, 그들은 다시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갑니다. 이 말을 듣자 현자 왕은 인드라가 있는 천국으로의 초대를 거절했 다. 인드라는 다시 한 번 나를그 현자 왕에게 보내, 그 초대를 거절하기 전에 현자 발미끼의 조언을 구한 후에 결정하라는 말을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현자 왕은 현자 발미끼에게 소개되었다.
“탄생과 죽음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라고 현자 왕은 물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 발미끼는 라마와 바시슈타 간의 대화를 말해 주었다.
발미끼가 말하였다.
“나는 구속되어 있다. 나는 해방되어야만 한다.”라고 느끼며 그리고
완전히 무지하지도 않고 완전히 깨닫지도 못한 자는 라마와 바시슈타 간의 대화인 이 경전을 공부하기에 적격입니다. 이야기 형태로 되어 있는 이 경전에서 제시되는 해방의 방법을 숙고하는 이는 틀림없이 삶과 죽음이라는 반복적인 윤회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나는 일찍이 라마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의 사랑하는 제자인 바라드바자에게 전하였습니다. 바라드바자가 메루 산에 갔을 때 그 이야기를 창조주 브람마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몹시 기뻐하여, 브람마는 바라드바자에게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바라드바자는 “모든 인간이 불행에서 자유로워지게 하소서.”라는 부탁을 하면서 브람마에게 이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현자 발미끼에게로 가서 라마의 숭고한 이야기를 계속해 달라고 청 하라.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무지라는 어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 다.”고 브람마가 바라드바자에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브람마는 바라드바자를 손수 나의 거처로 데려왔습니다.
경배를 받고 브람마가 내게 말하였습니다.“현자여! 라마에 대한 당신의 이야기는 인간이 삼사라(반복되는 삶)의 바다를 건너게 해 주는 뗏목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계속하여 잘 끝맺어 주기 바란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창조주는 바로 그곳에서 사라졌습니다.
브람마의 갑작스런 요구에 당황하여, 나는 현자 바라드바자에게 방금 브람마가 말했던 것을 나에게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바라드바자는 브람마의 말을 반복했습니다.“브람마는 모든 이들이 슬픔을 넘어갈 수 있게 해 줄 라마의 이야기를 당신이 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오, 현자시여! 나 역시 청하오니, 라마, 락슈마나와 다른 형제들이 슬픔에서 풀려 난 방법을 상세히 말하여 주십시오.”
나는 라마, 락슈마나, 다른 형제들, 그들의 부모, 왕궁 사람들이 자유를 얻게 된 비밀을 바라드바자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라드바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젊은이여! 그대가 그들처럼 산다면, 그대 또한 지금 여기에서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발미끼는 계속 말했다.
이 세상의 모습은 하나의 혼란이다. 그것은 하늘의 푸름이 시각적인 환영에서 온 것과 같다. 마음이 세상을 생각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는 확신이 생긴 다음에야 슬픔으로부터 자유도, 진정한 본성에 대한 깨달음도 가능하다. 그리고 이 확신은 이 경전을 부지런히 공부할 때 생긴다. 그때서야 외부 세상은 실재와 비실재의 혼란에서 온다는 굳은 확신이 온다. 따라서 이 경전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지식은 수백만 년이 지나더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목샤 즉 해방은 모든 바사나 즉 마음의 조건화를 조금도 남김없이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마음의 조건화에는 두 가지 유형, 즉 순수한 것과 순수 하지 못한 것이 있다. 순수하지 못한 것은 출생의 원인이 되며, 순수한 것은 출생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순수하지 못한 것은 무지와 자아를 말한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재탄생이라는 나무의 씨앗이다. 반면에 이 씨앗을 버리면, 단지 신체를 지탱하고 있을 뿐인 마음의 조건화는 순수하게 된다. 그러한 마음의 조건화는 살아 있는 동안 해방된 이들에게조차도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현재의 동기가 아닌, 과거의 추진력으로 남아 유지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재탄생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
라마가 어떻게 해방된 현인의 깨달은 삶을 살았는지 말해 주겠다. 이를 알면, 늙음과 죽음에 관련된 모든 오해에서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스승의 거처에서 돌아오자, 라마는 아버지의 궁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즐기며 기거했다. 온 나라를 여행하면서 성스러운 순례지들을 방문하고픈 열망에 차서, 라마는 아버지가 있는 곳을 찾아가 순례를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왕은 순례를 시작하기에 좋은 길조의 날을 받았다. 바로 그날, 가족의 웃어른들이 주는 사랑이 깃든 축복을 받은 후에 라마는 길을 떠났다. 라마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히말라야에서 시작해 아래쪽으로 온 나라를 여행하였다. 그리고 온 나라 사람들의 기쁨을 받으며 수도로 돌아왔다.
발미끼는 계속 말했다.
궁전으로 돌아오자 라마는 아버지, 현자 바시슈타, 연장자들, 신성한 이들에게 공손히 절했다. 아요드야시 전역은 8일 동안 축제를 하며 순례에서 돌아온 라마의 귀환을 축하했다.
얼마 동안 라마는 궁전에서 일상적인 의무들을 행하며 살았다. 그러나 곧 이상한 변화가 그를 찾아왔다. 라마는 수척해지며 창백하고 허약해져 갔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생긴 모습과 행동의 갑작스럽고 까닭 모를 변화에 다샤라타 왕은 걱정스러웠다. 건강을 물어볼 때마다 라마는 괜찮다고 했다.“사랑하는 아들아! 걱정거리가 뭐냐?”고 물으면, 라마는 공손하게“없습니다, 아버지!”라고 대답하고는 침묵하였다.
할 수 없이 다샤라타 왕은 답을 구하러 바시슈타에게 갔다. 현자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주었다.“라마가 지금처럼 된 데는 분명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원인이 있기 전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 않듯이, 우주 원소들에서도 분노, 낙심, 기쁨 같은 변화는 적당한 원인이 없다면 고상한 사람들의 행동에 나타나지 않는 법입니다.”다샤라타 왕은 더 이상 답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세상에 널리 알려진 현자 비슈바미뜨라가 궁전에 도착했다. 이 신성한 방문 소식을 들은 왕은 달려가 그를 맞았다. 다샤라타 왕은 말했다.“현자시여!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저의 초라한 처소를 찾아 주시니 몹시 기쁩니다. 이것은 장님에게 눈을 뜨게 해 주는 것과 같고, 메마른 땅에 비를, 아이를 갖지 못하던 여자에게 아들을, 죽은 자에게 부활을,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게 해 주는 것과 같으니 저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현자시여! 당신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이미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은 존경받아야 할 신성한 존재이십니다. 저는 당신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발미끼가 계속했다.
비슈바미뜨라는 다샤라타 왕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자신의 임무를 알려 주었다. 그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종교 의식을 끝내는 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종교 의식을 할 때마다 카라와 두샤나를 따르는 악마들이 이 신성한 곳에 침입하여 그것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종교 의식의 맹세로 인해, 그들을 저주 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도울 수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 라마는 쉽게 이 악마들을 다룰 수 있습니다. 이 도움에 대한 답례로, 전례 없는 영광을 당신에게 가져다줄 많은 축복을 라마에게 주겠습니다. 왕께서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의무에 대한 헌신을 저버리지 않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숭고한 이들은 자신의 수입을 초과하는 선물은 생각하지 않는 법입니다. 당신이 ‘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악마들이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나는 현자 바시슈타와 이 왕궁에 있는 다른 신성한 분들처럼 라마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왕이시여! 지체 말고 라마를 저와 함께 보내십시오.”
이 내키지 않는 청을 듣고, 왕은 잠시 멍해져서 조용히 있었다. 그러고는 대답했다.“오, 현자시여! 라마는 아직 열여섯 살도 되지 않아서 싸움을 견딜 만한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라마는 궁전 안의 싸움을 제외하면 싸움을 본 적도 없습니다. 제가 당신과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거느리고 있는 수많은 군사들이 당신과 동행하여 악마들을 물리치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저는 라마와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모든 생물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심지어 현명한 이들도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식을 위해 행복, 배우자, 재산을 포기하지 않습니까? 예, 저는 라마와 떨어질 수 없습니다.
힘센 악마 라바나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당신의 종교 의식을 방해하는 원인이 아닙니까? 그런 경우라면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신들조차 악마 라바나에게는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되면 다시 그런 강한 존재들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시간이 지나면 이 세상이라는 무대를 떠나갑니다.”
비슈바미뜨라는 화가 났다. 이를 보고, 현자 바시슈타가 나서서 왕에 게 그의 약속을 철회하지 말고 라마를 비슈바미뜨라와 함께 보내라고 설득하였다.“왕이시여! 왕께서 약속을 철회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왕은 올바른 행동의 표본이 되어야 합니다. 지극히 강하며, 많은 무적의 무기를 지닌 비슈바미뜨라의 보호 속에서 라마는 안전할 것입니다.” 발미끼는 계속했다.
스승 바시슈타의 바람에 따라, 다샤라타 왕은 시종에게 라마를 데려 오게 했다. 시종이 돌아와 라마가 곧 올 것이라 전하고 덧붙였다.“왕자님은 낙심한 듯하고 동행하는 것을 피하십니다.”이 말에 당황한 다샤라타 왕은 라마의 시종을 보고 라마의 마음과 건강 상태에 대해 알려 달라고 했다. 시종은 눈에 띄게 곤란해 하고는 말했다.
“왕이시여! 순례에서 돌아온 후로 심각한 변화가 왕자님께 일어났습니다. 왕자님께서는 목욕과 신을 숭배하는 일에조차 관심이 없는 듯 보이셨습니다. 왕자님께서는 궁전 안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지 않습니다. 보석이나 귀한 돌에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매혹적이며 기쁨을 주는 대상이 주어져도 슬프고 무관심한 눈으로 그것을 봅니다. 궁전의 무희들을 고문자라고 생각하시고 쫓아 버리십니다! 마치 귀머거리나 벙어리처럼 자동적으로 먹고, 걷고, 쉬고, 씻고, 앉아 있을 뿐입니다. 종종 혼자 중얼거리시기도 합니다.‘재산이나 명예가 무슨 소용이며, 재난이나 집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요. 왕자님께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으로 보내시며 여흥에도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고독만을 즐기고 있습니다. 항상 자신의 생각 속에 잠겨 있습니다. 무엇이 왕자님을 찾아온 것인지,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희는 모릅니다. 날마다 왕자님께서는 더욱 쇠약해 가십니다.
반복해서 왕자님은 혼자 노래합니다.‘아! 우리는 지고의 것에 도달하려 하지 않고 삶을 여러 가지 면으로 낭비하고 있다! 자신이 고통을 받으며 모자란다고 큰 소리로 울부짖지만, 진지하게 고통과 궁핍의 원인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이것을 모두 보고 들으며, 보잘 것 없는 하인에 불과한 저희들은 모두 낙심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 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왕자님께서는 희망이나 열정을 빼앗기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치거나 정신을 다른 곳에 빼앗긴 것은 아닙니다. 무지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때때로 왕자님께서는 의기소침하여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재산, 어머니, 모든 관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왕국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 세상의 욕망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중얼거리십니다. 왕이시여! 왕께서만이 왕자님의 지금 상황에 맞는 적절한 치료법 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비슈바미뜨라가 말했다.
그런 경우라면 라마를 여기로 오게 하라. 그의 상태는 기만의 결과가 아닌, 지혜와 공평으로 가득한 것이며, 그것은 깨달음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를 여기로 데리고 오면 우리가 낙담을 없애 줄 것이다.
발미끼가 말했다.
그래서 왕은 시종에게 라마를 궁전으로 데려오게 했다. 그 동안 라마는 아버지를 만날 채비를 했다. 멀리서 그는 아버지와 현자들을 보고는 인사했다. 어리지만 성숙함이 가지는 평화로움으로 빛나는 라마의 얼굴을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라마는 왕의 발에 절했다. 왕은 그를 포옹하여 맞이한 후,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왜 그리 슬퍼하느냐, 나의 아들아! 의기소침함은 불행을 맞아들이는 초청장과 같은 것이다.” 현자 바시슈타와 비슈바미뜨라도 왕의 말에 동의했다.
라마가 말했다.
신성한 분이시여!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하게 자랐습니다. 저는 훌륭한 선생님들로부터 교육도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순례를 갔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한 생각이 저를 사로잡았는데, 그것이 이 세상의 모든 희망을 저로부터 앗아갔습니다. 제 가슴이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행복이라 부르며, 그것이 이 세상의 늘 변화하는 대상들 속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인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죽기 위해 태어나고, 태어나려고 죽는 것이 아닌가! 모든 고통과 죄악의 근원인 이런 덧없는 현상 안에서는 의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관련 없는 존재들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그 사이에 관계를 만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과 마음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고찰해 보면, 마음 자체가 실재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는 갈증을 채우려고 사막의 신기루를 좇아 달리는 것 같습니다.
스승이시여! 확실히 우리는 팔린 노예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가 없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진리에 무지한 채, 우리는 세상이라는 숲 속을 목적 없이 방황해 왔습니다. 이 세상은 무엇입니까? 존재하고 자라고 죽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고통은 어떻게 끝나는 겁니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니지만 제 가슴은 슬픔으로 피를 흘립니다.
라마는 계속해서 말했다.
오, 현자시여! 무지한 자들을 미혹시키는 재산도 똑같이 쓸모가 없습니다. 지속되지 못하고 덧없는 부는 상당한 걱정거리를 낳고 더 많은 것을 향한 탐욕만을 낳을 뿐입니다. 부는 사람을 차별하는 척도가 되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모두 부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슴이 부를 추구하려는 열정으로 딱딱해지기 전까지만, 사람들은 선하고 열정적이며 다정다감합니다. 부는 현명한 학자, 영웅, 감사를 받는 사람, 영리하며 온유하게 말하는 사람의 가슴조차 오염시킵니다. 부와 행복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부유한 자에게 그를 중상 모략하는 경쟁자나 적이 없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올바른 행동이라는 연꽃에게는 부유함이란 밤입니다. 슬픔이라는 하얀 연꽃에게는 부유함이란 달빛입니다. 선명한 통찰이라는 등불에게는 부유함이란 바람입니다. 미움이라는 물결에게는 부유함이란 홍수입니다. 혼란의 구름에게는 부유함이란 그에 유리한 바람입니다. 낙심이라는 독에게는 부유함이란 증상을 악화시키는 약입니다. 부유함은 사악한 생각의 독사와 같으며, 고뇌에 두려움을 더합니다. 그것은 냉정하고 비열한 자를 파괴하는 눈덩이입니다. 그것은 악한 욕망이라는 올빼미에게는 황혼입니다. 그것은 지혜라는 달이 월식이 되는 것입니다. 부유함이 존재할 때 사람의 선한 성품은 움츠러듭니다. 사실, 부는 죽음에 의하여 이미 선택받은 자들을 찾습니다.
오, 현자시여! 사람의 일생 역시 그러합니다. 사람의 일생은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짧습니다. 짧은 일생은 나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람을 감쌀 수도, 공간을 가를 수도, 파도들을 묶어 화환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일생 위에 믿음을 고정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짧은 수명을 늘리려는 헛된 노력으로 더 많은 슬픔을 느끼며 또 고통의 기간도 늘리고 있습니다. 나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이만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세상에서 얻을 가치가 있으며, 이것에 의해 미래의 탄생이 끝날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 사람들은 당나귀처럼 존재합니다. 어리석은 자에게는 경전을 아는 것은 짐이며, 욕망으로 가득 찬 자에게는 지혜조차 짐이며, 휴식없는 자에게는 자신의 마음도 짐이며, 나 지식이 없는 자에게는 육체(일생)도 짐입니다. 시간이라는 쥐는 쉬지 않고 인생을 갉아먹습니다. 질병이라는 흰개미는 살아 있는 존재의 바로 그 생명의 핵을 먹고(파괴하고) 있습니다.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가 항상 주의 깊고 준비된 자세로 쥐를 지켜보듯 이, 죽음도 이 일생을 늘 지켜보고 있습니다.
라마는 계속했다.
신성한 분이시여! 자기중심이라고 알려진 지혜의 무서운 적이 오는 것을 알면, 저는 당황스럽고 두렵습니다. 그것은 무지의 어둠 속에서 나타나 무지 속에서 번성합니다. 그것은 끝없는 죄스러운 경향과 행동을 만듭니다. 모든 고통은 확실히 자기중심의 주위를 맴돕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이 정신적 고통의 유일한 원인입니다. 자기중심은 제 최악의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의 대상 사이에 퍼진 채, 살아 있는 존재를 옭아매는 것도 바로 자기중심입니다. 정말로 이 세상의 모든 끔찍한 재난들은 자기중심에서 생겨납니다. 자기중심은 자기 통제력을 떨어뜨리고, 덕을 파괴하며, 평정을 흐리게 합니다.“나는 라마다.”라는 자아적인 생각을 없애고 모든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저는 자신 안에 서 쉬고 싶습니다. 저는 자기 본위의 생각으로 행한 일들은 모두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아 없음이야말로 진리입니다. 자아의 영향 아래 있으면, 저는 불행합니다. 자아가 없을 때, 저는 행복합니다. 자아는 갈망을 부추깁니다. 자아가 없으면 갈망이 사라집니다. 자아는 이유도 까닭도 없이 가족과 사회관계의 망을 퍼트려, 그 결과로 조심성 없는 영혼을 함정에 빠뜨립니다. 제게는 자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비참합니다. 청하건대 저를 일깨워 주십시오.
성스러운 분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얻은 은총이 부족한 채로, 불순한 마음은 바람처럼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무엇을 얻더라도 만족 하지 못하며 나날이 더욱 불안스럽습니다. 체는 물로 가득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마음도 세상의 대상을 아무리 많이 얻는다 해도 만족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항상 모든 방향으로 날아다니지만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지옥에서 얻을 커다란 고통의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고, 마음은 이곳에서 즐거움을 찾아 나서지만 그것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 안의 사자처럼 마음은 늘 불안하고, 자유를 잃었으며, 현 상태에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아, 신성한 분이시여! 저는 갈망이라는 매듭 때문에 마음이 펼친 그물에 묶여 있습니다. 쏟아지는 강물이 둑 위의 나무를 뿌리째 뽑듯, 불안한 마음은 제 온 존재를 앗아갔습니다. 저는 마음 때문에 바람 속의 마른 나뭇잎처럼 흩날립니다. 마음은 저를 어디서도 쉴 수 없게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대상들을 있게 하는 원인은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라는 것 때문에 삼계가 존재합니다. 마음이 사라지면 세상 또한 사라집니다.
라마가 계속했다.
갈망이 마음을 사로잡으면 수많은 실수가 무지의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정말입니다. 이 갈망은 달콤함이나 부드러움 같은, 마음과 가슴의 선하고 숭고한 성질을 고갈시켜 저를 메마르고 잔인하게 만듭니다. 그런 어둠 속에서 각기 다른 모습의 갈망들이 마귀처럼 춤을 춥니다.
이런 갈망을 억제하려고 여러 방법들을 써 본다 해도, 갈망은 순식간에 저를 누르고 강풍이 지푸라기를 날려 버리듯이 저를 무기력하게 합니다. 제가 평정과 그런 자질들을 발전시키려는 어떤 희망을 가질지라도, 쥐가 실을 자르듯 갈망은 그 희망을 끊어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갈망의 바퀴에 힘없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물에 걸린 새처럼 우리는 날 수 있는 날개가 있어도 나 지식이라는 목표나 거주지로 날아갈 수 없습니다. 제가 감로주를 단숨에 마시더라도 이러한 갈망은 걷잡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갈망의 특징은 방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를 지금은 어떤 방향으로 데려갔다가 곧 다른 방향으로 내몰아 버립니다. 마치 미친 말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자식, 친구, 아내, 다른 관계들에 얽힌 채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제가 영웅이라 할지라도, 이 갈망이라는 것은 저를 두려움에 떠는 겁쟁이로 만듭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저를 장님으로 만듭니다. 제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도, 그것은 저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무서운 악귀와도 같습니다. 모든 구속과 불행의 책임은 바로 이 무서운 악귀 같은 욕망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가슴을 부수고 그 안에 미혹을 일으킵니다. 이 마귀에 사로잡히면, 그의 영향력 안에 있는 즐거운 것에도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갈망이 행복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이 삶에서 행복이나 결실로 나아가게 하지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갈망은 헛된 노력만 하게 하고 또 온갖 불행으로 나아가게 할 뿐입니다. 행복하고 불행한 상황들이 연기되는 삶이라는 무대를 장악할 때에도, 늙은 여배우 같은 이 갈망은 선하고 고귀한 것은 연기하지 못하고 모든 경우에 패배와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갈망은 무대 위의 춤을 그만두지는 않습니다.
갈망은 방금 하늘까지 올랐다가, 곧 세상의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갈망은 늘 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의 공허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지혜의 빛이 순간적으로 빛나면, 다음 순간은 혼란이 찾아옵니다. 현자들이 나 지식이라는 칼로 이것을 끊을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라마가 계속했다.
정맥, 동맥, 신경계로 이루어진 가엾은 이 몸 역시 고통의 원천입니다. 느릴 때, 그것은 지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몸이 지각이 있든 없든, 몸은 환영만을 만든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작은 만족에 기뻐하고 작은 불행에도 침울해 하는 이 몸은, 사실상 지극히 경멸할 만합니다.
저는 나무를 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가지는 팔에, 줄기는 가슴에, 구멍은 눈에, 열매는 머리에, 나뭇잎은 수많은 질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몸은 살아 있는 존재들을 위한 쉼터입니다. 누가 몸을 자신의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 연관된 희망이나 절망은 부질없는 것 입니다. 몸은 탄생과 죽음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사람에게 주어진 배일 뿐입니다. 몸을 자신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몸이라는 이 나무는 삼사라(반복되는 존재)로 알려진 숲에서 태어납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원숭이(마음)는 나무 위에서 놉니다. 나무는 귀뚜라미(근심)의 거처이며, 곤충(끝없는 고통)은 나무를 계속 먹어 댑니다. 나무는 독뱀(욕망)에게 은신처가 되고, 야생 까마귀(분노)도 그 위에서 지냅니다. 나무 위에는 꽃(웃음)도 있고, 그 열매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바람(생명의 힘)이 나무에 활기를 주는 듯합니다. 나무는 새 (감각)를 부양하고 여행자(갈망과 욕망)가 나무에 출입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것이 쾌락의 그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독수리(에고이즘)가 그 위에 앉기도 합니다. 그것은 공허하며 속이 비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행복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오래 살든 짧게 살든 그것은 여전히 쓸모없습니다. 그것은 살과 피로 이루어져, 늙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것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순수하지 못한 물질로 가득하며, 무지로 인해 시달립니다. 그것이 어떻게 제 희망을 성취시켜 주겠습니까?
이 몸은 질병의 본거지이며, 정신적 압박의 무대이고, 감정과 정신을 변화시킵니다. 저는 그것에 매력을 느낄 수 없습니다. 부, 왕국, 몸이 무엇입니까? 시간(죽음)은 이 모든 것을 잔인하게 절단해 버립니다. 죽음에 이르면, 배은망덕한 몸은 자신 안에 살며 자신을 보호하던 영혼을 버립니다. 그 안에서 제가 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까요? 수치심도 없이 몸은 같은 행동을 계속합니다. 몸의 유일한 목적은 결국 불태워지는 것인 듯합니다. 부자, 가난한 자 모두에게 공통적인 노년이나 죽음에는 무심한 채, 몸은 부와 힘을 좇습니다. 무지라는 술에 미혹당한 채, 이 몸에 구속된 자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구속당한 자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라마가 말했다.
사람들이 무지하여 즐겁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아동기에도 슬픔은 가득합니다. 오, 현인이시여! 무기력, 재난, 욕망, 표현에 대한 무능력, 어리석음, 향락, 불안정, 약함, 이 모든 것들은 아동기를 표현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이들은 쉽게 감정을 상하고, 화내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사실 아이들의 고통은 죽어가는 사람, 노인, 환자, 다른 어른들의 고통보다 더 끔찍하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동기의 아 이 상태가 사람의 자비에 의해 좌우되는 동물의 삶의 상태와 실로 비슷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 일들은 아이들을 당황하고 혼란스럽게 하며, 다양한 환영과 두려움이 생겨나게 합니다. 아이들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악한 것에 쉽게 영향을 받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조절되고 벌 받습니다. 아동기는 복종의 시기일 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순진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마치 올빼미가 낮 동안 어두운 구멍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사실은 온갖 종류의 단점들과 죄를 저지 를 경향성들, 신경질적인 행동이 그 안에 잠재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 다. 오, 현인이시여! 저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을 행복한 시기로 어리석 게 믿고 있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쉬지 않는 마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을까요? 아이들의 마음은 극도로 침착하지 못합니다. 매일 새로운 것을 얻지 못하면 아이들은 불행합니다. 울거나 통곡하는 것은 아이들의 첫 번째 행위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아이들의 가슴이 망가져 보이기도 합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선생님의 손에 벌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불행을 더합니다. 아이들이 울면, 부모는 아이들을 달래려고 세상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세상의 가치를 재고, 세상의 사물을 갈망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들은 “장난감으로 쓸 달을 줄게.”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그 말을 믿고 손에 달을 쥘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기만의 씨앗이 어린 마음에 생겨납니다. 더위나 추위가 느껴져도 아이들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 이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동물이나 새처럼 아이들은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헛되이 손을 뻗습니다. 그것은 집안 어른에게는 두려운 일입니다.
라마는 계속 말했다.
아동기를 지나면 청년기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젊은이들도 불행을 떨쳐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많은 변화를 겪게 되고 고통에서 더 큰 고통으로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명함을 버리고 욕망이라는 끔찍한 마귀에 현혹되어, 그것들을 자신의 마음에 두기 때문 입니다. 그들의 삶은 욕망과 열정으로 가득 찹니다. 청년기에 지혜를 빼앗기지 않은 이들은 어떤 공격도 견딜 수 있습니다.
저는 덧없는 젊음에도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 시기에는 짧은 쾌락 뒤에 오래 지속되는 고통이 따라오며, 젊음으로 인해 사람은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젊은 시절 동안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여 다른 이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는 점입니다.
숲 속에 난 불로 인해 나무가 없어지는 것처럼, 젊은이들의 가슴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욕망의 불로 인해 사라집니다. 가슴의 순수를 지키려고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젊은이들의 가슴은 불순함으로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곁에 없을 때조차도 그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생각함으로 마음이 흐트러집니다. 이런 갈망으로 가득한 사람은 자연적으로 선한 이들로부터 높은 존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젊음은 질병과 불안정한 마음의 거주지입니다. 그것은 양 날개가 선과 악을 행하는 새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젊음은 사람의 선한 면을 혼란시키고 분산시키는 모래바람과 같습니다. 젊음은 가슴 안의 모든 악의 면을 일으키고, 그 안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선한 마음을 억누릅니다. 따라서 그것은 악을 부추깁니다. 그것은 혼란과 집착을 가지게 합니다. 젊음은, 육체에는 이상적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정신적인 면에서는 파괴를 가져옵니다. 젊었을 때 사람들은 행복의 신기루에 의해 유혹당하고 그것을 추구하다가 슬픔의 우물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제게는 젊음이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젊음이 육체에서 떠나려 할 때조차, 젊음으로 인해 일어난 열정은 보다 강렬하게 불타며 그 사람을 빨리 파괴시킵니다. 이 젊음 속에서 기뻐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옷을 입은 동물입니다. 젊음이 주는 악에 지지 않고 인생의 유혹에 압도당하지 않은 채, 삶의 무대에서 살아 있는 이들은 정말로 숭배를 받을 만한 위대한 영혼입니다. 그들만이 인간입니다. 그것은 넓은 바다를 건너기는 쉽지만, 좋은 것이나 싫은 것에 정복되지 않고 젊음의 건너편 해안에 닿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라마가 계속했다.
젊을 때 사람은 성적 유혹의 노예입니다. 몸은 살, 피, 뼈, 머리카락, 피부의 집합체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아름다움과 매력으로 인식합니다. 이‘아름다움’이 영원하다면 상상력이 정당화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반면, 연인의 매혹, 매력, 아름다움에 기여했던 그 살은 곧 노년의 주름이 되고 나중에는 벌레, 독수리, 불에 의해 없어져 버립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속되는 한, 이 성적 이끌림은 젊은이의 가슴과 지혜를 소모시킵니다. 이것에 의해 창조가 유지됩니다. 이러한 유혹이 멈출 때, 이 삼사라(출생과 죽음의 윤회)도 멈춥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만족하지 않을 때 젊음이 오고, 젊음이 불만족과 혼란에 시달릴 때 노년이 그것을 지웁니다. 얼마나 잔인한 인생입니까! 바람이 나뭇잎에서 이슬을 떨어뜨리듯, 노화는 몸을 파괴시킵니다. 한 방울의 독이 곧 몸 전체에 퍼지듯, 노화는 몸에 퍼져 그것을 파괴시킵니다. 그리고 몸을 다른 이들의 웃음거리로 만듭니다. 노인이 신체적으로는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더라도 욕망 자체는 번성하고 커 갑니다. 자신의 삶의 과정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을 때 혹은 삶의 방식을 바꾸거나 자신의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 수 없을 때, 그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등을 자신에게 물어보기 시작합니다. 노쇠와 함께 기침, 흰머리, 호흡 곤란, 소화 불량, 수척함 같은 신체 쇠약의 현상으로 인한 고통이 나타납니다. 죽음을 지배하는 신이 노인의 흰머리를 소금 친 멜론으로 알고, 그것을 가지려 급히 올지도 모릅니다. 홍수가 강둑 위에 서 있는 나무의 뿌리조차 잘라 버리듯, 노쇠는 삶의 뿌리를 잘라 버립니다. 죽음이 따라 와 그것을 가져갑니다. 노쇠는 죽음이라는 왕에게 복종하는 충실한 신 하와 같습니다.
얼마나 신비하고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적에 의해 정복당하지 않은 자들도, 정복할 수 없는 산 정상에 집을 짓고 살아온 자들도 노쇠나 퇴화라고 알려진 사악한 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라마가 계속했다.
미친 사람이 거울에 비친 과일의 맛을 즐기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은 미혹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모든 희망은 시간에 의해 철저히 파괴됩니다. 오, 현자시여! 시간만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낡게 합니다. 시간이 손 닿지 않는 것은 창조물 속에 없습니다. 시간만이 수많은 우주를 창조하고, 곧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시간은 년, 시대, 긴 시대로 나타남으로써 자신을 언뜻 보여 줄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내용은 숨겨져 있습니다. 이 시간이란 것은 모든 것을 압도합니다. 시간은 자비롭지 않으며 냉혹하고 잔인하며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모릅니다. 시간은 속임수로 가득한 위대한 마술사입니다. 이 시간은 분석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아무리 나눈다 할지라도 여전히 파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 채워지지 않는 식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작은 곤충도, 큰 산도, 천국의 왕까지도 먹어 버립니다! 심심풀이로 공을 가지고 노는 젊은이처럼, 시간은 심심풀이로 태양과 달이라는 두 개의 공을 사용합니다. 사실, 우주의 파괴자(루드라), 세상의 창조자(브람마), 천국의 왕(인드라), 부유함의 왕(꾸베라), 그리고 우주 분해의 무(無)로서 나타나는 것은 시간일 뿐입니다. 우주를 계속 창조하고 소멸시키는 것도 시간이 하는 일입니다. 크고 위대한 산이 지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이 위대한 시간은 절대적 존재(브람만) 안에 세워져 있습니다.
시간이 끝없이 우주를 창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거나 가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뜨거나 지지도 않습니다. 미식가인 시간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 태양이라는 불에 의해 익어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완전히 익은 것을 알면 먹어 버립니다! 말하자면, 다채로운 존재라는 아름다운 보석들은 시간의 각 시대를 꾸밉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놀이 삼아 쓸어 버리는 시간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젊음이라는 연꽃에게 시간은 해질 녘의 시간입니다. 일생이라는 코끼 리에게 시간은 사자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높든 낮든 시간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이 파괴되어도, 시간 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하루의 활동을 한 후에 수면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시간도 우주의 소멸 후에 창조적 잠재력은 감춘 채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합니다. 이런 시간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진정 모릅니다.
라마가 계속했다.
지금껏 묘사한 시간 이외에도 탄생과 죽음에 책임이 있는 또 다른 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을 지배하는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크르탄타라고 알려진 시간의 다른 면이 있습니다. 크르탄타는 행동의 끝, 행동의 불가피한 결과나 결실입니다. 이 크르탄타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니야티(자연의 법칙)와 함께 춤추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들에게 행위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실을 가져다줍니다. 우주가 존재하는 동안, 그 둘은 지치지 않고 일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열정은 지칠 줄 모릅니다.
이렇듯 시간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파괴하면서 우주 안에서 춤추는 데, 우리는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까? 크르탄타는 신념이 확고한 자들까지도 흔들리게 하여 그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이 크르탄타의 질서에 의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변화를 경험합니다. 여기에 더 이상 영원이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가 악으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모든 관계가 속박입니다. 모든 즐거움은 위험한 질병입니다. 행복에의 열망은 신기루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감각은 적입니다. 실재가 알려지지 않은 비실재가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이 최악의 적이 되었습니다. 이기심은 악의 제일가는 원인입니다. 지혜가 약해집니다. 모든 행동이 불쾌함으로 이끌어지며 쾌락은 성적인 면으로 향해집니다. 자신의 지성은 이기심에 의해 지배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에 평화나 행복이 없습니다. 젊음은 시들어 갑니다. 신성한 분들과의 교제는 드뭅니다. 이러한 고통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진리에의 깨달음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명예에 기뻐하는 이도 없고, 어느 누구의 가슴에서도 자비심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비열해지고 있습니다. 허약함은 강함을 누르고, 비겁이 용기를 눌렀습니다. 악과의 만남은 쉽게 가질 수 있지만 선한 만남은 갖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인간성을 어디로 몰아갈지 궁금합니다.
오, 신성한 분이시여! 이 창조를 지배하는 신비로운 힘은 강력한 악마조차 파괴하고, 영원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빼앗으며, 불멸의 것조차 죽여 버리는데, 저 같은 평범한 이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 신비한 존재는 모든 것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것의 개체화된 측면은 이기심으로 간주됩니다. 그 힘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전 우주가 그것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그것의 의지만 이 여기에 홀로 퍼져 있습니다.
라마가 계속했다.
오, 현인이시여! 아동기에도, 청년기에도, 노년기에도 사람은 행복을 즐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대상들 그 어느 것도 행복을 주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은 헛되이 이 세상의 대상들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자기본위적이지 않고, 감각적 쾌락에의 갈망으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만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사실 저는 강력한 군대에 맞서 잘 싸울 수 있는 사람을 영웅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마음과 감각들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사람만을 영웅으 로 여깁니다.
저는 곧 잃어버릴 것은‘얻은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잃지 않을 것, 그것만이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애쓴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허락된 그런 얻음은 없습니다. 반면에 덧없는 얻음이나 순간적인 역경은 구하지 않아도 옵니다. 신성한 분이시여! 하루 종일 바쁜 듯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기적인 활동에 온 시간을 전념하는 사람이 하루 동안 한 번의 선한 일을 하지 않아도 밤에 잠잘 수 있다는 것이 저는 당황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바쁜 사람이 지상의 모든 적을 이기고 부와 사치로 둘러싸 여 있다 해도, 항상 자기는 행복하다고 자랑하고 다닌다 해도, 죽음은 가만히 다가옵니다. 죽음이 어떻게 그를 찾는지는 신만이 아십니다.
무지로 인해 사람은 자신을 아내, 아들, 친구에게 얽어맵니다. 그는 이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는 순례지와 같다는 것을, 아내, 아들,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그들 중 일부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 세상은 도공이 사용하는 녹로와 같습니다. 녹로가 놀라운 속력으로 돌지만, 그것은 여전히 멈춘 듯 보입니다. 사실 세상은 계속 변하는 데도, 무지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안정되어 보입니다. 이 세상은 독나무와 같습니다. 와서 그 나무를 만지는 사람은 의식을 잃고 어리석어 집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가 악의 영역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이들은 죽기 마련이며 모든 행동은 기만적입니다.
수많은 영겁의 세월이 왔다 갑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순간일 뿐입니다. 시대와 순간 사이에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없습니다. 신들의 관점에서 보면 한 시대도 순간일 뿐입니다. 온 지구가 작은 원소들의 변형인 듯합니다. 그 위에 우리의 신념과 희망을 고정시킨다는 것은 얼 마나 헛된 것입니까!
라마가 계속 말했다.
오, 성스러운 분이시여!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것이 영원해 보이든지 순간적으로 보이든지 간에 모두 꿈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분화구는 예전에는 산이었고, 지금의 산은 순식간에 지구 위의 구멍이 될 것이며, 오늘날의 울창한 숲은 곧 대도시로 바뀌고, 지금의 비옥한 대지는 척박한 사막이 됩니다. 사람의 몸, 생활 방식, 재산도 그와 비슷하게 변화합니다.
삶과 죽음의 이 순환은 살아 있는 영혼들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능란 한 무희와 같습니다. 무희의 춤 동작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올리거나, 지옥으로 던지거나,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대단한 행위는 곧 기억 속에 남겨질 뿐입니다. 여기서 행하는 종교 의식조차도 그렇습니다. 곧 인간은 동물로 태어나고, 또 그 반대도 됩니다. 신들은 신성함을 잃습니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창조자 브람마, 보호자 비슈누, 구원자 루드라와 다른 신들조차 어쩔 수 없이 파괴로 향하는 것을 봅니다. 이 세상의 감각 대상들은 이런 파괴를 기억할 때까지만 즐거운 것으로 보입니다. 흙을 가지고 노는 아이가 흙으로 여러 모양을 만들듯이, 우주의 임명자는 계속하여 새 것을 창조하고 또 파괴합니다.
세상이 가지는 단점에 대한 이런 지각은 제 마음 안에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성을 파괴했습니다. 따라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은 제 마음 안에 생기지를 않습니다. 수면 위에는 신기루가 나타나지 않듯이 말입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기쁨이 제게는 쓰디쓴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쾌락의 정원을 헤매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여자를 원하지도 않고, 재산의 획득에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제 안에 평화 롭게 남기를 바랍니다. 저는 계속해서 탐구합니다.“어떻게 하면 내 가슴이 세상이라 불리는 늘 변하는 환영을 완전히 멀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저는 죽음도, 삶도 바라지 않습니다. 욕망의 열병을 지니지 않은 채, 저는 저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왕국, 즐거움, 부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들 모두는 제 안에 없는 이기심의 노리개입니다.
지금 지혜 속에 자리 잡지 않는다면, 언제 다른 기회가 생긴단 말입니까? 감각적 쾌락에의 탐닉은 마음에 독이 되어, 그 영향이 여러 생애 동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나 지식을 지닌 자만이 이것에서 자유로 울 것입니다. 따라서 오, 성자시여! 간청합니다. 욕망, 두려움, 혼란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이 주는 가르침의 빛으로 제 가슴에 있는 무지의 어둠을 파괴시켜 주십시오.
라마가 계속 말했다.
슬픔이라는 무서운 함정에 이렇게 떨어지는 살아 있는 존재들의 이 가엾은 운명을 생각하면, 저는 비탄에 젖습니다. 제 마음은 혼란스럽고, 저는 진저리나고, 걸을 때마다 두렵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지혜 안에 자리 잡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구속되어 있고, 부분적으로는 자유롭습니다. 마치 베어졌지만 뿌리는 남아 있는 나무와 같습니다. 마음을 억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지혜가 제게는 없습니다.
그러니 말해 주십시오. 슬픔을 겪지 않는 자의 조건이나 상태는 무엇입니까? 세상이나 세상의 행위에 빠진 저 같은 자가 어떻게 하면 지고의 평화와 희열의 상태에 다다를 수 있습니까? 다양한 활동이나 행위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말해 주십시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까? 어떻게 하면 마음을 욕망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마음이 세상을 자신의 나로서 보는 동시에, 풀잎보다 가치 없이볼수 있게 할 수 있습니까? 지혜의 길을 배우려면 위대한 이의 자서전을 공부해야 합니까? 사람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까? 신성한 분이시여! 혼란스러운 마음을 산처럼 안정되게 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은 깨달은 분이십니다. 다시는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확실히 이 세상은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합니다. 어떻게 하면 가슴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이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까? 마음은 분명히 불순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습니까? 위대한 현자가 처방한 청정제는 무엇입니까? 사랑과 미움이라는 흐름의 희생자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수은이 불 속에 떨어져도 영향을 받지 않듯이, 세상의 고통 과 슬픔에 영향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비밀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이 우주의 모습 안에 퍼진 마음의 습관을 조절 할 수 있는 비밀은 무엇입니까?
미혹에서 자유로워진 영웅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이 자유롭기 위해 쓴 방법은 무엇입니까? 제가 적격이 아니거나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라마는 조용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