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심심했던 성서 백주간”
성서백주간 2023년 소식지
원당성당, 김경영 마리아
“엄마, 심심해.. 심심해!” 큰아이가 세 살즈음 어느 날, 졸졸 따라다니며 투정을 부렸다. 집안일에 분주해 맘 편히 놀아줄 수가 없던 나는 잠시 아이의 눈을 맞추고 물어보았다. “심심이 뭐야?” “… 음 …” 아이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며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환하게 대답했다. “뭘 하면 재미있을지 생각하는 거!” 순간, 나는 뒤통수라도 맞은 듯했다. 어쩜, 아이는 어른인 나보다 더 많이 세상을 명료하게 꿰뚫고 있는 듯했다. 재미있으려면 심심함이 필요했다. 그건 진리다.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우리 심심하자. 마음껏 심심하자. 알았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충분히 심심하기 위해 제 방으로 뛰어갔다.
2019년 6월부터 2022년 9월까지 성서 백주간 모임을 가졌던 이 시간은 내 인생의 ‘심심한 시간’이 되어준 기간이다. 그것도 충분히 심심했다. 이제부터 얼마나 재미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 가슴이 부풀어 오를 만큼.
성서 백주간 모임 직전 영세를 받았던 나는, 세례 예비자 교리에서의 묵상과 성찰의 시간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바로 성서 백주간으로 이어졌다. 성서와 기도와 성당 모임에 익숙치 못한 초보 신자였던 나에게 성서 백주간은 신앙생활에 익숙해지도록 밥 먹기 전 아기의 이유식 같은 역할도 해주었다. 봉사자님의 친절한 안내와 함께 동기들의 진실된 이야기와 신앙인의 모습은, 내 믿음의 길에 동무이자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외손주들을 돌보며 남편과 아들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속내를 비치면서도, 그것을 지혜롭게 견디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J 자매님, 친동생의 암 투병을 돌보면서도 텃밭 일의 즐거움을 노래하며 감사와 기쁨을 늘 잃지 않았던 L 자매님, 신장병을 앓고 계시면서도 모임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참여하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M 자매님, 평생 속 썩인 남편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하느님을 바라보며 아이들과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어오신 R 자매님, 신혼부터 주말 부부로 살아오면서 남편 없이 혼자 시부모와 아이들을 돌보아오면서도 불평 없이 사랑스런 미소를 잃지 않는 A 자매님. 이분들과 함께 한 3년여의 여정은 내 삶의 한 부분을 심심할 데로 심심하게 익혀주었다. 이로 인해 나는 얼마나 재미지고 향기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자신과 기대를 안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고3 수험생 엄마이기도 했던 나는 성서 백주간 모임을 통해 불안하고 힘든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언제나 다 같이 한목소리로 딸 아이의 건강한 수험생활을 위해 기도를 해주셨고 아이의 뒷바라지로 힘들 때는 함께 눈물지어 주셨으며 아이가 무사히 진학하게 되었을 때는 내 일처럼 기뻐해 주셨다.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마음 졸이며 긴 시간을 지내는 동안 인생의 선배로서 담대히 마음을 잡을 수 있도록 충고해주었고 그 속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셨다. 성서 백주간을 통해 나는 엄마로서도 얼마나 큰 성장을 하였는가! 모임을 시작한 그해 겨울부터 코로나 시국이 되어 한동안 어쩔 수 없는 방학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함께 모여 줌(Zoom) 프로그램을 연습하고 매주 빠짐없이 줌으로 만나는 시간을 이어갔다. 비대면으로라도 이렇게 서로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얼마나 환호하고 감격하였던가!
성당 미사도 참여할 수 없고 밖에서 사람들도 만날 수 없던 정말이지 갑갑하기 그지없던 시기에 우리는 성서 백주간 모임을 통해 정을 나누는 공동체와 연대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종강이 아쉽고 또 아쉬워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카톡방을 닫지 못하고 띄엄띄엄 다음 모임을 약속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서 백주간 모임을 하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말씀의 향연을 맛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어진 성경 분량을 매주 읽고 성경 말씀 속에서 나를 비춰주는 구절은 어쩌면 신기하게도 매주 이어졌다. 정말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내 모습이 보이지? 나를 위해 쓰여진 책인가? 못할 것도, 안될 것도, 심지어 실패도 끝이 아님을 말씀을 통해 묵상할 수 있었고 울퉁불퉁한 내 삶을 고스란히 안을 수 있는 용기도 얻을 수 있었다. 기도는 은총을 주는 게 아니라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는 것이라는 깨달음도 안을 수 있었다. 신앙생활은 그저 미사와 기도를 통해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것이라고만 막역히 생각할 수 있었지만, 성서 백주간 모임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동안, 나는 주님께 내 처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말씀을 듣기 싫다고 투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솔직하게 발가벗은 내 상태를 드러낸 뒤엔 어김없이 내 오른편에 계시다고 말씀하시며 흔들리지 않게 하심을 느끼게 하셨다. 3년여의 짧지 않은 성서 백주간은 아이가 어린 시절 정의 내린 심심함의 뜻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어떻게 재미나게 살아가야할까를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내면의 다양한 모습을 성서 속의 많은 인물들을 통해 그야말로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함께 한 동기들은 한없이 모자라고 유치한 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잡고 함께 나아갈 수 있게 한 힘이었다. 그릇에 넘치게 받은 많은 것들을 이제는 나눌 수 있는 내가 되어야겠다.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시편 23, 2)” 저는 하느님이 이렇게나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 김경영 마리아입니다.
-의정부교구 원당 성당 김경영 마리아-
=성서 백주간 2023년 소식지에서 복사했습니다=
엠마오 생각: 제 경험으로는 백주간는 넘 '쫄깃'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 불가하게....님들도 한 번 경험하는 은총을
첫댓글 제목이 눈과 마음을 확...제 경험으로는 백주간는 '쫄깃'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 불가하게....님들도 한 번 경험하는 은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