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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9 자애경 (2) (법문: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아비담맛타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자애경 (2)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자애관하고 있습니다. 브라흐마 위하라 담마(brahmavihāra-dhammā), 범천들이 사는 방법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첫 번째 자애(멧따)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붓다께서 설하신 자애관하는 방법 강의하고 있습니다.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가르침』, (식카와띠 위뿔라냐니 옮김, 我無말들 출판사, 2022), 131-146쪽을 참조하십시오. (https://cafe.daum.net/DHAMMADIPAKOREA/DTZD/3)
자애경 본문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7. 나빠로- 빠랑 니꿉베-타, 나-띠만녜-타 깟타찌나깐찌, 뱌-로-사나- 빠띠가산냐-, 난-냐 만냣사 둑카밋체-야, 어느 누구이든 서로 속이지 않고, 어디서나 다른 이를 조금도 무시하지 않으며, 증오와 적개심을 가지고 몸과 입으로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고, 서로서로 다른 이의 고통을,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8. 마-따- 야타- 니양 뿟따, 마-유사-에-까 뿟따- 마누락케-, 에왐삐 삽바부-떼-수, 마-나상 바-와예- 아빠리마-낭 어머니가 하나뿐인 자식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보호하듯,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향하여 무량한 자애의 마음을 많이 쌓아야 합니다. 9. 멛딴 짜 삽바 로-까스밍, 마-나상 바-와예- 아빠리마-낭, 욷당 아도-짜 띠리얀짜, 아삼바-당 아웨-라 마사빳땅 온 세상의 위로 아래로 옆으로, 원한도 적의도 넘어선 무한한 자애를 널리 펼쳐라. 10. 띳탕 짜랑 니신노 와, 사야-노 야-와땃사 위-따밋도- 에땅 사띵 아딧테-야, 브라흐마메-땅 위하-라 미다마-후 서거나,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깨어있는 동안 언제 어디서나 자애의 마음을 닦아가는 삶을 ‘고귀한 삶’이라 부처님 설하셨다. 11. 딧틴 짜 아누빡깜마,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까-메-수 위네-야게-당, 나히자-뚝 갑바세-야 뿌나레-띠. 계행과 지혜를 완벽하게 지니는 수행자는 잘못된 견해에 얽매이지 않으며,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고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다시는 잉태되어 윤회하지 않는다. |
"딧타-와- 예-와 아딧타, 예-와두-레- 와산띠 아위두-레
부-따-와 삼바웨-시-와, 삽바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Diṭṭhā vā yeva addiṭṭhā, ye va dūre vasanti avidūre;
Bhūtā va sambhavesī va, sabbasattā bhavantu sukhitattā.)
지난 시간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분명하거나 태어나지 않았거나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자애관 한다고 했습니다.
‘나빠로- 빠랑 니꿉베-타, 나-띠만녜-타 깟타찌나깐찌,
뱌-로-사나- 빠띠가산냐, 난-냐 만냣사 둑카밋체-야’
(Na paro paraṁ nikubbetha, nātimaññetha katthaci na kañci;
Byārosanā paṭighasaññā, nāññamaññassa dukkhamiccheyya.)
"어느 누구이든 서로 속이지 않고, 어디서나 다른 이를
조금도 무시하지 않으며, 증오와 적개심을 가지고
몸과 입으로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고,
서로서로 다른 이의 고통을,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나빠로- 빠랑 니꿉베-타’
서로 서로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서로 서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 속이지 말아야 되고, 다른 사람도 나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나-띠만녜-타 깟타찌나깐찌’
‘어떤 이유로든지 서로서로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학식이 부족하다고 무시하고, 병약하다고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상대를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키가 작다고 무시하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무시하고, 인종이 다르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신분이 낮다고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상대를 무시하고 과소평가하고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은 참 괴롭겠죠. 업신여기는 사람은 불선업을 짓는 것이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은 괴롭고, 무시하는 사람은 자신이 자애가 없어서 남을 무시하는 거죠. 자애가 있으면 무시하지 않을 텐데 자애가 없으니까 무시하는 거죠. 자기 마음에 불선업이 생겨서 무시하게 되는 거죠. 잘나서 무시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자애가 없어서 무시합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데 자애가 없으면 무시하게 되죠. 그래서 학식이 부족하다고 또는 경제적으로 부족하다고 업신여기지 말아야 됩니다.
‘뱌-로-사나- 빠띠가산냐, 난-냐 만냣사 둑카밋체-야’
‘뱌로사나(Byārosanā)’는 ‘화나서.’ ‘뱌로사나’는 심한 성냄입니다. 죽이고 싶을 정도의 성냄입니다. 실제로 살생하는 게 아니라 그런 마음입니다. 그렇게 화내는 것. 그리고 ‘빠띠가산냐(paṭigha-saññā)’, 미워하는 것, 잔인함. 이런 마음이 일어났을 때, ‘난냐 만냣사 둑카밋체야(nāññamaññassa dukkhamiccheyya)’, “다른 이의 고통을 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화났어도 상대방의 고통을 바래서는 안 됩니다. 화난 것은 화난 것이고, 상대가 고통에 빠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다른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도, 상대가 고통에 빠지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그냥 내가 싫어하고 화를 낼 수는 있지만, ‘저 사람 가다가 넘어져 버려라’라고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거기까지 가지 말아야 합니다. 범부라서 탐진치 3개가 다 있으니까 화는 내더라도 그 사람이 불행해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상대의 불행을 바라면 그 불행이 나에게로 옵니다. 그러한 나의 의도가 업이 되어 내게로 오는 것이지요. 상대의 불행을 바라는 데까지 마음이 달려가지 않도록 마음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다른 생각을 하십시오. 그 사람이 너무 미우면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됩니다. 그게 아눗사띠(anussati. 상기함) 10가지인 거죠. 지금 자애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애의 마음으로 보는 겁니다. 자애관은 위빳사나 수행이 아닙니다. 10가지 상기하는 것은 위빳사나 지혜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는 출세간의 지혜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사마타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하는 것으로 지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이 평온하게 오랫동안 유지되는 사람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 쉽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한 사람들, 사마타로 마음을 평소에 잘 다스려 온 사람들은 위빳사나를 할 때도 대상에 집중하기가 쉽겠죠.
그런데 마음에 화냄과 탐심이 많은 사람은 어떤 대상에든지 깊이 집중하기가 어렵겠죠. 그렇다고 위빳사나를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빳사나는 지혜 수행이고, 지금 하고 있는 자애관이나 상기함 10가지는 사마타 수행입니다. 대상을 바꾸는 겁니다. 내 마음에 번뇌를 일으키는 대상에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대상으로, 자애의 대상으로, 평정의 대상으로,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대상이 생겼을 때 상대의 둑카를 바라지 말고, 빨리 다른 대상으로 가십시오. 영화를 보러 간다거나 음악을 듣는다거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대상으로 가십시오.
영화를 보는 것은 형색 대상이니 아비담마에서 보면 불선업입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이 10가지를 상기하는 것, 부처님, 담마에 대해서 상기하는 것 등입니다. 108배 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10가지 상기하는 것은 돈도 들지 않습니다. ‘둑카밋체야(dukkhamiccheyya. 고통을 바라면)'가 되려고 하면 마음을 다른 대상으로 바꾸면 됩니다.
저의 속가 모친이 수영을 하십니다. 수영을 하셔서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연세가 많지만 많이 좋아졌었는데, 수영장이 자주 문을 닫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닫고, 보수한다고 닫고. 수영장이 문을 닫으면 너무 괴로운 거죠. 어떻게 해결이 안 되는 거죠. 몸의 통증도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해결되는데. 우리가 행복하려면 몸의 행복과 마음의 행복이 갖춰져야 하는데, 가능한 한 쉽고 간편하게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몸의 행복과 마음의 행복을 갖출 수 있으면 좋겠죠. 그게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마-따- 야타- 니양 뿟따, 마-유사-에-까 뿟따- 마누락케,
에왐삐 삽바부-떼-수, 마-나상 바-와예- 아빠리마-낭’
(Mātā yathā niyaṁ putta māyusā ekaputtam’anurakkhe;
Evampi sabbabhūtesu, mānasaṁ bhāvaye aparimāṇaṁ.)
이제 예를 듭니다. 자애관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자애관을 해야 되는가? 아들 하나뿐인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자기 목숨과 바꿔서라도 보호하려고 하듯이, 그렇게 모든 중생을 보호하는 자애를 내야 됩니다. 그렇게 한계가 없는 자애를. 아들은 하나이고 중생은 아주 많은데 그 하나뿐인 아들, 외동아들을 보호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그런 자애의 마음을 둘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 아들을 아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 그대로 모든 중생에게 똑같이 쓰시면 됩니다. 내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그 마음 그대로 모든 중생에게 똑같이 그 마음을 쓰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어미 소가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데 사냥꾼이 활을 쐈지만 활이 어미 소의 몸에 박히지 않고 그냥 바닥에 떨어졌다고 했지 않았습니까? 화살이 어미 소에게 꽂히지 않은 것은 어미 소가 송아지를 아주 사랑해서, 자애가 아주 강해서 화살이 꽂히지 않은 것 아닐까요? 그런 자애의 마음을 모든 중생에게 가져야 됩니다.
‘멧딴 짜 삽바 로-까스밍, 마-나상 바-와예- 아빠리마-낭
웃당 아도-짜 띠리얀짜, 아삼바-당 아웨-라 마사빳땅’
(Mettañca sabbalokasmiṁ, mānasaṁ bhāvaye aparimāṇaṁ;
Uddhaṁ adho ca tiriyañca, asambādhaṁ averaṁasapattaṁ.)
그런 멛따의 마음을 온 세상에 다 두어야 합니다. ‘아삼바당(asambādhaṁ)’은 좁지 않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비좁아선 안 됩니다. 아주 넓은 마음으로 자애를 둬야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자애를 두고 누군가에게는 자애를 두지 않는 마음, 이런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에게 고르게 자애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웨라(avera)’, 적이 없어야 됩니다. '웨라(vera)'는 '적'이고 아(a)가 붙으면 '적이 없다'가 됩니다. 자애에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적이라는 것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적이 외부에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밖에 있는 사람이 나의 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외부의 적은 나한테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없을 때도 있죠. 어떨 때는 해를 끼치기도 하고 어떨 때는 해를 끼치지 않기도 합니다. 그보다 진짜 적은 내 마음에 있는 적, 내 마음의 탐진치입니다. 자애의 반대는 성냄이죠. 또 이 도사(dosa)라는 적은 내 마음 안에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생깁니다. 밖에 있는 적은 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안에 있는 성냄이라는 적은 일어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즉시 일어납니다. 어리석음과 성냄이 동시에 같이 오는 거죠.
난다말라 사야도는 외부의 원수는 부부가 헤어지도록 할 수 없고, 부부 사이에 있는 미움이라는 원수가 이혼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밖의 사람이 이간질해서 헤어지게 할 수 없다는 거죠. 서로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미움이라는 성냄이 이혼에 이르게 합니다. 적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있는 미움이 적인 거죠.
성냄이 원인인데 성냄을 마치 자존심인 것처럼, 자존감인 것처럼 평생 품고 지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성냄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내게 이렇게 성냄이 있다.’ 자랑하기도 합니다. 어리석어서. 내 나의 진짜 원수는 나의 성냄입니다. 내 안에 있는 미움, 이 미움이라는 적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성냄이 없도록 해야 됩니다.
위빳사나 할 때 좋은 점은 ‘이래서 이렇다’라고 핑계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쟤가 물을 엎질러서 내가 화가 났다. 쟤가 실수를 해서 내가 화가 났다.”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네가 뭐 해서 내가 이렇지.” 이런 게 아닌 거죠.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내가 성냈으면 ‘성냄. 성냄’ 내가 욕심을 내면 ‘욕심, 욕심’ 이러해서 이러하다 이게 아닙니다. 그냥 지금 현재 있는 것을 사띠하는 것, ‘밖에 소리가 시끄러워서, 조용히 하지 않아서 나한테 성냄에 일어났다. 밖에 있는 소리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났다.’ 이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들리면 ‘들림.’ 저 소리가 어디서 왔는지 왜 수행처가 시끄러운지 이게 아니고 그냥 들리면 ‘들림, 들림’ 안 좋은 냄새가 나면 ‘냄새 맡음, 냄새 맡음’ 그냥 그 순간 사띠하는 것입니다. 왜 성냄이 일어났는지는 필요 없습니다. 그냥 들리면 ‘들림, 들림’이고, 화났으면 ‘화냄, 화냄’입니다.
‘띳탕 짜랑 니신노 와, 사야-노 야-와땃사 위-따밋도-
에땅 사띵 아딧테-야, 브라흐마메-땅 위하-라 미다마-후’
(Tiṭṭhaṁ caraṁ nisinno vā, sayāno vā yāvatā’ssa vitamiddho;
Etaṁ satiṁ adhiṭṭheyya, brahma’metaṁ vihāra’midha māhu.)
‘언제 어떻게 하느냐’ 입니다. 띳탕(tiṭṭhaṁ), 서 있는 동안에도 자애관을 하고, 짜랑(caraṁ)은 걸어가는 동안에도 자애관을 하고, 니신노(nisinno), 앉아 있는 동안에도 자애관을 하고, 사야노(sayāno)는 누워 있는 자세입니다. 누워서 쉬고 있거나 아니면 잠들기 전에 눕죠. 잠들기 직전 누워있는 자세에서도 자애관을 해야 됩니다. 자애관을 하다가 잠들면 자애관 하면서 깹니다. 그런 적 있습니까? 자애관 하다가 잠들면 자다가 중간에 깰 때도 자애관을 하고 있고, 일어나자마자 또 자애관부터 시작해서 나옵니다. 주문인 거죠. 사마타 수행은 주문을 거는 건데, 계속 내 마음에 그 마음이 계속 일어나도록 하는 거라서, 자애관 하다가 잠드는 습관이 들어 있으면 죽을 때도 그렇게 죽을 확률이 높습니다. 죽는 것과 사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죽는 것은 편안히 죽는 경우도 있지만, 편치 못하게 죽는 경우는 자는 거랑 죽는 게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집착만 끊으면. 그래서 잠들기 전에 자애관 하는 것이 습관이 돼 있으면, 죽을 때도 자애관 하다가, 의식이 흐릿한 상태에서도 자애관이 라디오 틀듯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워있는 자세에서도 자애관을 해야 됩니다.
‘에땅 사띵 아딧테야(Etaṁ satiṁ adhiṭṭheyya)’, 이 자애 마음을 둬라. 밥 할 때도, 직장에서도,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어라. 이러한 마음으로 지내는 것을 브라마 위하라(brahmavihāra) “고귀한 삶”이라고 부처님 설하셨다.
부처님이 어떤 자세에서 해야 되는지도 얘기했습니다. 어떤 자세에서 자애관을 해야 하는가? 꼭 이 자세로 조용한 곳에서 하는 게, 아니라 서 있을 때도 하고 걸으면서도 하고 앉아 있을 때도 하고 누워 있을 때도 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언제나 하라는 말이죠.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어떤 자세이든지 언제나 자애관을 하라. 자애관 하다 잠들면 잠에서 깰 때도 자애관하고 있습니다.
자애관은 사마타 수행이지 지혜가 생기게 하는 수행은 아닙니다. 사마타를 하는 이유는 내가 내 마음으로 괴롭다는 걸 알아서, 나의 탐진치로 괴롭다는 걸 알아서 사마타를 하는 것이지요. 내 마음을 편안하게. 이 탐진치는 참 괴롭구나. 이렇게 알아서 하는 수행이 사마타입니다.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지혜가 있다고 할 수 있죠. 내 마음을 편히 가져야겠다. 지혜가 있어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함을 남의 탓으로 돌리겠죠. “네가 이래서 이렇다. 지금 밖이 시끄러워서 이렇다.” 이렇게 남의 탓으로 돌리는데 사마타를 하는 이유는, 조건을 탓하지 않고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리려고 하는 게 사마타죠.
수행이라는 것 자체가 내 마음을 내가 다스려 보려고 하는 게 수행이죠. 바와나(bhāvanā. 수행)라는 게 많이 하면 할수록 좋고, 빨리 하면 할수록 좋고, 일찍 하면 할수록 좋은 게 바와나 수행이죠. 내 마음을 내가 주인이 되도록 연습하는 게 수행입니다. 사마타도 거기에서 나온 거니까 지혜가 있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위빳사나 지혜같이 그런 지혜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여러분이 번뇌의 뿌리를 자를 수도 없고 윤회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숨어있는 번뇌는 엄청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마타를 한다고 해서 실수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탐진치가 있어서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부처님이 이 자애관을 가르쳐 준 이유가 비구들에게 “자애관 하면서 그 숲에 들어가라.”고 하신 이유가 수승한 지혜수행인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데 자꾸 외부의 장애가 생긴 거죠. 주변에 숲에 사는 야차들이 와서 괴롭히고 못하게 하는 장애가 생겼는데 장애를 막기 위한 무기가 자애관이지 않습니까?
근데 위빳사나 하는데 왜 장애가 생겼을까요? 위빳사나가 제일 좋은 수행이면 위빳사나 해서 수다원이 되고 아나함이 되고 아라한이 되면 야차들에게도 이로움이 있을 텐데 왜 그랬을까? 왜 자애관 했을 때는 이 숲의 야차들이 조용해지고 위빳사나 하는 비구들을 왜 그렇게 와서 괴롭혔을까?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회향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6-29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97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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