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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가을 백일홍
박 헌 영
석달 전
내 눈속을 지지던 꽃
이제는 바라볼 수 있겠네
불타지 않고 재 되지 않고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겠네
저녁노을처럼.
가을 뒤뜨락
너처럼
하늘에 비춰보는 단풍잎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푸르렀던 아픔은 흘러
눈길 너머에서
은비늘 여울지겠지
나는 빛나는 적막
너는 하이얀 춤
그래,
뒤에서 바라보는 너는
더 아름다웠다.
* 전남 부안 출생, 시집 나 사는 집, 하늘빛 숨, 아이와 함께 가며, 그대 없이 그대를 사랑합니다, 저 나무 내게 동행하자 한다, 철이네 엄마 아빠, 거품의 힘, 붉은 꽃잎에 쓰다, 한 사람에게만 흐르기에도 강물은 부족하다, 버릴 수 없는 나, 내 시는 없다, 내 아내 명희, 조형시집 나의 거울, 시 선집 즐거워라, 죽으러 가는 저 물소리 등, parnee@hanmail.net
단풍
송 은 애
무작정 떠난 길
앞 뒤 돌아보지 않고
아픔만 아픔이라 질러댔다
아무리 소리쳐도 나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아름다움이란다.
나는 계절을 지나 스러지게
아픔만 도려내는 가슴일랑
그대여! 나는 아픔이라니까
서성이다 스며들었는데
아픔도 아름다움으로
보아주는 이, 그것이 사랑이라
착각하며 무서리 참아낸
가을 끝자락에서 끝내
붉게 물들었다
* 월간《순수문학》시 등단(1996), 시집 詩! 꽃을 혁신하다 외 9집, 꽃시집 밟혀도 피는 꽃(2020), 산문집 고택의 門을 열다, 길마루길 64 출간, 한국예총예술문화대상(2013), 대전문학상 수상(2015). sea5610@hanmail.net.
부산꼬리풀
바다내음 그리워 뭍에서 피어났다
바닷속으로 간 토끼의 간을
먹고, 자랐다.
용맹스런 가슴으로 담은 세월
결국! 남은건 보랏빛 향기
난 파란 신호등 기다리며
그대를 떠올리는데
백사장 모래는 은빛으로 빛나고
나는 여전히 그곳에 서있네
파도의 물거품도
해국의 몸부림도
가슴에 담고
항상, 멍든 가슴 안고
슬픈 국화
언제까지 슬픈 장면을 보아야할까
흔들리는 눈빛에 눈물도 메말랐다
해군159기 침몰사건도 보아왔다
해군수병 159명의 몸부림
삼풍백화점의 붕괴로 사라진
영혼들을 바라보다 흔들렸고
세월호 학생들의 참사
아! 이태원 압사사건까지
온 몸으로 견뎌야하는 꽃
나는 슬픔을 먹어야하는 숙명
타고난 운명의 획
언제까지 보아야할까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
닥풀
언제든 나는 그곳에 있었다
가슴은 타들어 갔고
열정은 끓어올라 빛바랜 내 가슴도
보여줄 수 없었으니
서성이며 노을 지기를 기다렸다
잡으려 해도 헛된 꿈
빈정대는 그들을 뒤로하고
숨기듯 갈고 닦은 나의 욕망
보란 듯 피어나 빛을 발할 때
밀려오는 희열감에
언제든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구절초
거닐다 양기가 솟아오른 날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림자 밟으면 애틋한 마음
바라보지 않아도
늘 가슴 한켠 시린 마음
만지지 않아도 촉감으로
다가오는 저린 마음
세상사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그대와의 관계
누가 뭐래도 언제나
아픈 만큼 다가서는
나의 마음은 초라하지만
그 느낌 풍성한 그리움이다
시란
이 종 근
목란이 사월에 필 때쯤, 그대
흰 꽃말과
내 붉은 마음씨가 친교 하려던
중립지대에서의 교집합처럼
결속의 시란?
희뿌연 담배 연기 마시며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폐부의 고행 속,
평균수명이 증가 추세임에 따라 진료카드에 연과 행으로 적혔다
나날이… 가뿐히 잘 살았다, 원 없이… 잘 짓고 잘 썼다
저물도록 충혈(充血)된 눈과 푸른 지문이 해지고 닳는다고 해도
한 폭의 숨은 그림이었고
한 뼘만큼 널린 춤이었다
시란
시가 타고난 운명이란
나의 시니피앙*
그대 희로애락을 내 문예로 옮겨, 명명백백히
한 줄의 시가 바람으로 촉촉이 젖어 들었다
목란이 사월에 질 때쯤, 격앙하듯 울부짖었다
그대 종속의 나는 아낌없이 마른 부역자
*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석사) 졸업.《미네르바》등단. 제1회《서귀포문학작품공모전(서귀포예총)》에서 당선하고, 제2회《박종철문학상(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최우수상, 제1회《부마민주항쟁문학창작공모전(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우수상, 제2회《국립임실호국원나라사랑시공모전(국립임실호국원)》최우수상, 2021년《제주문학관개관기념문예작품공모(제주문학관)》최우수상 등 다수의 창작 시(詩) 공모전에서 수상. 천안문화재단 <문화예술창작지원금> 수혜. 시집『광대, 청바지를 입다』발간,
* 기표(記表)로 프랑스어 ‘signifiant 시니피앙’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의하여 정의된 언어학 용어로 동사 ‘signifier 시니피에’의 현재분사로 “의미하는 것"을 나타냄.
원고모집 1
한 분뿐인 고모 집이 아주 멀기만 하오
산 푸르고 물 맑은 곳
그 읍내, 아담한 집만큼
야트막한 담장의 키,
자식을 잇지 못한 천형으로 그 집에서는 ‘큰어머니’로 불리는
나의 고모가 구절초처럼 단출하게 사오
조카인 나더러 한 번쯤 들려서 면대를 소원하기에
어서 찾아가 뵙는 예법과 차제에 들어 설 중차대한 의식은
피가 당기고 살이 뒤엉키는 천혜의 순리임을
두 눈과 두 귀가 멀쩡한 구월 위에 그리운 꽃말이 있고
두 손과 두 발이 어정쩡한 정과 서툰 생각이 맞물려서
좀처럼 수행치 못한 들녘 너머 자란 공경
마음속, 빚진 습작이 무르팍까지 높푸르게 쌓여가듯
염치 불고하고 적막하게 굽이진 이 가을
이 우아한 문장,
무작정 시 한 줄의 천직이 문한(文翰)으로 총총히 다녀가오
원고 모집 2
1.
가까스로 시를 지어 보내곤
산을 가로지르는 강을 바라보지요
기차 쇠바퀴가 날쌔게 지날 적마다 철로
교각에 쿵쾅대는 박동이 놀란 심장일까
우지직 쪼개진 함축된 문장의 분화 속,
냅다 갖다 붙이듯 찐득한 점착(粘着)은
둥근 해였으면 자주 뵐 일과였을 테이고
드문드문 잊힐 만큼 찾아뵐 문안이지만
생각건대, 생각지도 못한 고료를 부쳤다기에
심장이 요란스레 경을 치듯 통장 정리하지요
살아 있으니까, 이렇게 문예지로 만나는 게야
요즘 서신 수송만큼은 한결 편하고 빠르지요
변화에 익숙지 않은 변화는 점점 퇴화하는 게야
그런 모럴도 생애주기 속, 생애 발달의 몫이지
오, 광속의 세월이야
경솔한 마음 바로잡기에 따라서는 순식간에
위용(威容)의 편집국을 산과 강처럼 감격으로
넘나들고 오르내리듯 죄다 껴안을 수 있지요
2.
편집 직원과 필자 녀석의 제각기 재택근무가
강인 듯 흘러 집집이 별처럼 번성하길 바라는데
얄궂게 멍든 시가 처방전 없이 오래 멈추어
우지직 쪼개진 별처럼 산마다 무너져 내리지요
바람난 시
말하기 전에 시인했나요?
만해는 시를 엮어낼 적, 군말에서 님의 정체를 간곡히 주절거렸고
이육사는 광야에서 말 달리며 목 놓아 독립운동을 활발히 피력했죠
선생님은 이 국어책 어디쯤, 책갈피로 머물면서 젊은 동주인 듯
별 옮긴 시를 필사해봤나요?
말하기 전에 시인하세요!
신동엽은 천 리 비단길 금강에서 동학을 그 언술로 촘촘히 휘감았고
김수영은 이름 모를 풀들이 거센 항거를 살뜰히 헤아려 봤을 테죠
선생님은 이 감격의 무슨 말, 피 끓는 문장을 심장에 옮기어
제발 칼 꽃 춤추는 시인하세요!
내 생각에 총을 쥐듯 눈에 펜을 들고
탁목조(啄木鳥)가 타자하는 참담한 침묵 위에
삶이 굵직한 시와 원고지 두툼한 시인이
정녕 누구를 닮아 가나요?
하고픈 말하기 전에 애절한 시인했나요?
에~ 휴, 시~ 참, 어렵죠 … 그런데도 시인~ 참, 많죠
냉정한 전염(傳染)보다 시 앓는 소리가 더 고통스럽죠
암 투병처럼 머리칼이 한 올 한 올 빠져 내리듯
하고픈 말하기 전에 애절한 시인하지요!
호젓한 간격에 덤덤히 머물지요!
어느새
어느새 집 가까이 다가왔다는 전갈이다
종일 마스크까지 쓰고 괜스레 불안하게 사는데
굳이 전갈까지 보내어 맹독을 품을 필요가 있을까
그를 뒤쫓는 구렁이나 독사는커녕
연 흥부를 포함한 5인 이상의 대가족은 도통 뵈질 않는데
허수아비 머리 위에 쫑알거리는 참새도 아니고
기와집 처마 밑에 가까스로 둥지 튼 강남땅의 제비도 아니고
강남에게 시집간 이상화도 아니고
상화 시인의 시구처럼
‘마돈나’ 지난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마돈나가 한식 침실로 과연 찾아들까요
그가 자정께나 울리는 괘종 곁으로 무사히 돌아올까요
어느새 침실에 들어간 그가 이부자리 위에 걸터앉았다
앉은뱅이처럼 이름 모를 새가 어느 새가 되어 다리를 펴곤
문공부 권장의
국민체조를 한다, 후다닥 닦고 푸다~닭 씻고
그는 아마도 닭띠일 거야
자정쯤에 언뜻 생맥주가 더없이 그립다
어느새 침대 위로 어느 새가 누웠다
폭신한 솜이불을 덮고 바빴던 일과를 되짚어본다
어느새, 어느 새가 일으킨 언어유희를,
'유희야, 잘 자'
* 이상화 시인의 <나의 침실로>의 한 구절을 빌림.
바랑이 오른다
엄마가 산을 오를 때
그때 등산 배낭은 없었다
늘 닳아빠진 고무신이었고
늘 땀내에 찌든 손수건이 손에 쥐여 있을 뿐
휘어진 등에 진 업보가 숙명의 길로 오른다
남루해진 회색 승복 한 벌
낡은 장롱에서 꺼내어 입고
마흔다섯 살의
젊은 엄마는
홀로 키운 다섯 아이의 이름 고이 담아
그렁그렁 산을 오른다
아이들 기합 찬 물소리 같은 솔바람 따라 오르는 길
이 길
이 산의 기나긴 수행은
엄마의 고운 발목이 아프게 내린 공손한 발자국
십 리 백 리의 짊어진 짐보다 멀고 먼 독경의 무게
일찍이 손수레 끌던 생계의 힘이
산길을 당겨 엄마가 산을 오른다
다섯 딸 아들 잘되라고 꺽꺽 바랑이 오른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내 고향의 산복도로에 진작 그가 있었다면 울 엄마가 참으로 좋았을 일이다
높은 산이 놓인 언덕 위의 집을 찾아 손발이 쭉 뻗어 올라간 자동계단 때문이다
울 엄마가 장보고 난 뒤 택시와 막내아들 녀석 안 불러도 좋을 공짜 운송이다
영국과 중국 사이에 놓인 이념의 지루한 줄다리기처럼 아주 길기도 하고 지긋지긋한 여름의 절정으로 올라가고 있다
층층이 베란다에 내걸린 빨래와 소호의 네온 간판이 左右로 비스듬히 차곡차곡 땀 내음이 포개어지고 있다
울 엄마가 이곳에 살았으면 지독한 관절염 없이 정말 홍콩이라도 갔을 터인데
* 세계에서 가장 긴 길이(800m)로 주민 보행의 편의를 위해 1994년에 개통된 홍콩에 있는 야외 에스컬레이터를 말함.
동안거*
이 영 순
도대체 누굴까
내 안에서
늘 마음에 소동을 일으키는 놈은
차곡차곡 교자상 쌓아올리고
범어사의 동안거가 시작된다
수행자들의
염주 알 같은 번뇌가
시간의 행간을 떠돌다 밀려나고
창밖에 얼어붙은 실가지는
겨울바람 독경소리에 웅웅 울다가
지나온 푸른빛의 기억을 다독이며
하얗게 눈꽃을 피운다
굴절된 자신을 내려놓으며
아득아득 제 꽃을 찾다가
아직
피우지 못한 연꽃처럼
합장한 두 손이 파르르 떨린다
누굴
본 것일까
놈의 분탕질인가
헛소동에 춤추는 자인가
* 대전 출생, 월간《문학세계》신인문학상(2001), 시집 길은 어디에, 절하며 산다, 나비의 뼈,《백지》동인,
《꿈과 두레박》회장, ly1103@hanmail.net
* 동안거: 승려들이 음력 시월 보름부터 이듬해 정월 보름까지 일정한 곳에 머물며 수도하는 일
파리의 전언
새들 반가워 지저글거리고
가는 진달래 오는 철쭉
생긋 벙글 웃어주기에
덩달아 벙실거리며 바라보는데
파리가 앵
지나가며 혀를 찬다
제 흥 제 설움에 울고 웃는 것을
저 보고 울고 웃는다는
가여운 중생들
저러다가 공연히 원망 가득 실어
분노의 춤도 추겠지
바람 불어 꽃이 진다고
새들도 울고 있다고
아차!
나도 남 일에 꼴 틀리는
단 한 줄의 팽팽한 현이로구나
끊어지는 날까지
이곡 저곡에 흔들리는
세상사
김 창 유
참으로 행복을 느낄 때는
감사하면서도 행복이 깨질까 봐 불안하고
참으로 불행하다 느낄 땐
원망도 하며 이젠 행복이 올 거라고 위로도 하지
노란색 안경엔 세상이 노랗게
파란색 안경엔 세상이 파랗게 보이듯
밝은 눈으로 보는 세상을 밝게
어둔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둡게만 보이겠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딱 한 번뿐인 삶이라면
까짓것 ‘세상사 내 맘먹기에 달렸기에’
우리 서로 덮어주고 세워주며
밝은 빛 고운 눈으로
밝고 떳떳하게 살아야겠지
* 충남 서천 출생, 한국공무원문학협회 회원, 서양화가, 시집 『아름다운 이름으로』, kcy42@hanmir.com
당당할 때
성한 몸이 병원에 올 때 당당하고
죄 없이 경찰서에 들르면 당당하다
음주하지 않고 측정기 불 때 당당하고
부끄러움 없이 남 앞에 설 때 당당하다
내 돈으로 대접할 때 당당하고
잘 알고 내 힘으로 이루었을 때 당당하다
그리고 당당할 때 살맛이 난다.
된장 항아리
백 경 화
할머니 어머니가 쓰시던 질항아리
백 년 넘게 쓰셨던 우리 집 유물
장 담는 날에는 언제나
“이 단지에 담아야 장맛이 좋아” 하시며
보물 다루듯 정성스럽게 닦아
장을 가득 채우셨다
이젠 모두 떠나시고 그 단지는
내게로 와서
우리 집 장맛을 더해준다
대대손손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고
당신들 손길이 닿았던
당신들의 숨결이 흐르는
그리움과 추억이 향기롭게 묻어나는
우리 집 된장 항아리
볼수록 정겹다
* 충남 부여 출생,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수필집 산의 향기를 찾아서, 시집 술래잡기, 포토 포엠 울림으로 다가온 자연의 노래, 포토에세이집 앵글속으로 스며든 이야기, 대전문인협회, 대전국제펜문학회 회원, 꿈과 두레박, 한밭문학회 회원,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bak0799@hanmail.net
질투와 희망
친구가 선물로 준 핑크빛 벌레잡이 제비꽃
탁자 위에서 눈길을 뗄 수 없이 사랑을 받는다
재롱둥이 강아지
꼬리 흔들며 저도 보겠다고
무릎 위로 기어올라 부시락 거린다
저리 가! 바닥에 내려놓고
잠깐 동안 일 보고 오니
강아지도 없고 꽃은 목이 잘려 흔적도 없이
꽃 대궁만 바르르 떨고 있다
구석에 쪼그리고 있는 해피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데
당장 쫓아가 패대기치고 싶다
조금 전 나를 보고 웃어주던 아이들
내 사랑 독차지 한 죄로 이슬처럼 사라졌다
허망함과 야속함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을 때
아이들 속삭임이 환청으로 들린다
“슬퍼마세요 다시 피워 드릴게요”
꽃잎 속에 아주 작은 꽃봉오리 하나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