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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5강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배경과 기록 목적 이해
요한계시록은을 기록한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며, 기록 연대는 A.D. 95-96년경이다. 이때는 로마 황제인 도미티안(Caesar Domitian/Domitianus Augustus, A.D. 81-96)1)의 통치 말기 때 또는 트라얀(Caesar Nerva Trajan/Trajanus Germanicus)가 로마 황제로 등극한 때로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던 시기이다.2) 도미티안은 로마 제국의 11대 황제로 등극하였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였던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10대 박해자3)에 해당하는 10명의 황제 중에서 네로 황제에 이어 자신을 신격화하며 가장 혹독하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한 인물이다.‘로마의 기독교박해: 도미티안의 박해’4)에 소개되고 있는 도미티안의 그리스도교 박해에 대한 기술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도미티안(로마 제11대 황제)이 황제가 되었다. 도미티안이 황제에 등극하였을 때 상황이 달라졌다. 도미티안이 로마의 종교적 전통을 고집하고 자신을 신격화하면서부터 문제가 야기되었다. 도미티안은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는 로마 시민들에게 특별히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섬기게 했다. 그것은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드디어 황제가 신들의 신이라고 선포하여 황제 숭배를 강요했다.
그는 자신을 신(神)이라 호칭하여 수도(首都) 로마에 금은(金銀)으로 형상을 만들고, 우상 숭배를 강요했다. 도미티안은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 형제나 원로원 의원들까지 살해할 정도였다.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로마제국은 영국에서 유브라데, 다뉴브 강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는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방편으로 황제(가이사) 숭배 사상을 이용하였다. 로마는 로마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1년에 한 번씩 황제를 위해 소량의 향을 태우고“가이사는 주님이시다!”라고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 숭배와 황제를 주(主)로 부르는 일을 거절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하자 그리스도의 교회는 황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당했으며, 그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의 교회가 절대 권력을 가진 로마 황제의 대박해를 견디기는 쉽지 않았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무신론자’라고 불렀다. 그 당시“그리스도인들은 음란한 밤 집회를 가지며, 자기 자녀들을 죽인다.”는 거짓말이 유포되었다. 기아나 전염병, 지진이 나면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로마의 모든 신들이 노했다고 책임을 전가시키고, 재산을 압수하고 추방하거나 불순분자로 몰아 맹수들과 결투를 시키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유지를 위하여 매년 또는 수시로 예루살렘에 헌금(성전세)을 보냈는데, 기원 후 70년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도미티안 황제는 유대인들에게 그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명령했다. 황제의 강압을 이기지 못한 일부 유대인들이 황제에게 헌금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황제는 유대인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고, 황제 즉 신에게 헌금을 바치지 않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겠다고 선포했다.
황제는 자신의 명령이 지엄함을 보이기 위하여 자신의 인척 중에 그리스도인이었던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 도미틸라를 처형했다. 이때에 로마에 다시금 기독교 박해의 태풍이 불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음을 당했는데, 유대인들도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함께 탄압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로마를 떠나거나 또는 지하로 은둔했다. 그 유명한 카타콤이 그것이다.
도미티안 황제는 네로의 전철을 밟고, 15년 동안 잔악하게 통치한 뒤 네로 황제처럼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도미티안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데 있어서 네로의 후계자로 불릴 정도였으나, 그의 통치 말년에 교회에 대한 핍박을 그만두라는 포고를 내리고 추방당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도미티안 황제는 네로와 함께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사에서 가장 혹독하게 박해한 인물이다. 이러한 박해 시기에, 그것도 가장 박해가 심했던 도미티안 황제 때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것에 있는 배경과 그 기록 목적이 무엇인지는 다음의 설명에서 알 수 있다.5)
도미티안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하여 황제숭배를 정책적으로 시행함으로 자신을 주와 신으로 경배케 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장 피해를 본 대상은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이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대상도 진정한 의미의 주님(the Lord)으로 고백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황제숭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사도 요한도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 그의 말년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집중하던 중, 황제숭배를 거역했다는 이유로 주로 정치범들의 유배지인 밧모 섬에 갇혔다. 당시 로마의 속령에 속해 지배를 받고 있었던 현 터키지역의 일곱 교회들이 처한 형편도 요한의 경우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모진 핍박과 환란에 직면했던 당시 교회들을‘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위로하고 격려하며 종말론적인 신앙관을 확립케 함으로 신앙의 정절과 담대한 믿음의 고취 및 경계를 촉구하기 위해 기록된 일종의 예언서(1:3)였다. 이런 관점에서 당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했던 구약 선지자들의 신탁(神託)적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선지자의 심정을 가지고 본서를 기록하고 증거했다고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이 본 계시록을 예언의 말씀과 동일시하는 의중을 통해 이런 사실이 감지된다. 따라서 요한은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과 제반 약속들이 일관되게 지향해 나온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이란 주제를 참 이스라엘인 교회의 종말론적 회복과 승리라는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데 집중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포로기 전후 선지들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 사용했던 다양한 상징과 묵시적 표현들을 동일한 맥락 속에서 사도요한이 본서에서 채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강력히 뒷받침 해 준다.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이스라엘의 회복은 사실상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구속사역으로 새 이스라엘인 현시대 교회공동체를 통해 일단락되었고(갈 3:7, 29, 6:16),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인 성취와 완성을 향해 남은 구속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림의 성취는 재림을 통한 미래의 완성을 철저히 보증한다는 것이 본서의 증언이다.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을 주심으로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 모두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이것을 기록하게 된 당시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소개하기를“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 말미암아 밧모라 섬에 있었더니”(계 1:9)에서 알 수 있듯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6)은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의 황제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시기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한 박해의 상태에서 기록되면서 단지 당시의시대적 상황에서 겪는 로마 제국의 황제에 의한 박해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창세 때 아벨로부터 시작된 의인이 흘린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흘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에까지 함께 하여 왔으며, 이 피 흘림에 동참한 의로운 피가 세상 끝날에까지 흘려질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사는 로마시대의 기독교 박해사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이 박해사는 최후의 전쟁으로 불리는‘아마겟돈 전쟁’또는‘곡과 마곡의 전쟁’이 치러지고서야 비로소 그 막을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용으로 불리는 사단과 그 추종세력인 두 짐승으로 불리는 적그리스도, 그리고 그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거짓 선지자의 멸망이 다루어지는 것에서 온 세상의 세력이 집약된 바벨론의 멸망이 말해지는 것이‘아마겟돈 전쟁’또는 곡과 마곡과 치르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창조를 통해서 처음 세상이 시작된 때부터 의로운 자의 흘린 피가 흘려지는 알파(처음)가 시작되었으며, 이 피는 오메가(마지막)로 끝나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 뒤를 따른 의로운 자의 피에서도 볼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겪는 박해는 종말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증거의 사역을 감당하며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직면하는 환난을 내다보면서 그처럼 교회가 따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님으로서 자신의 권능과 보호에 두고서 새하늘과 새땅 곧 새예루살렘과 함께 임하기까지 자신의 교회를 안전히 지켜 가실 것을 말씀해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배척함에 있는 악의 세력에 의해 언제나 위기에 처한 교회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 주신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위로에 있으면서 함께 교회 된 자들을 서로 격려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 중에 기다림으로 그날이 오기까지 참음으로 견뎌 이겨나가게 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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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를 도미티안(Domitian)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영문식표기에 따른 것이다. 이는 다른 로마 황제의 경우에서도 동일하다.
2)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는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으며,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된다. (1)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통치 기간(A.D. 41-54)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 근거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A.D. 40년대 후반에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쫓아 내보내는 칙령을 내린 것을 든다. 사도행전 18장 2절에서 그 기록인“글라우디오(Claudius)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문헌들에서 보면 여기의‘유대인’은‘그리스도인’(Chrestus)로 표기하고 있다. F. F. Bruce,『예수님의 수제자들(Men and Movements in the Primitive Church)』, 이광호 역(서울: CLC, 1986), 71-79. 이광호,『요한계시록』(서울: 도서출판 깔뱅, 2009), 각주 11)에서 재인용. 그러나 이 시기는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져 가고 있는 초기에 해당하는 때이며, 시기적으로 요한계시록에 앞서 있는 신약성경의 기록이 아직 진행 중인 시기였고, 로마 제국과 그리스도인의 갈등도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 간의 적대에 비해서 적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로마 제국의 다른 황제들에 비해서도 그 정도가 적었으며, 무엇보다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의 박해는 정책적인 이유에 있었지 다른 황제들에게서 보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었던 데서 그 가능성은 매우 낮으므로 지지를 받지 못한다. (2) 네로 황제의 통치 기간(A.D. 54-68)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A.D.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는 견해의 주장에 의한 것인데, A.D. 70년에 있게 되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있는 시점인 네로 황제의 통치 기간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의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는 터툴리안이 있다. 그리고 T. Randell은 풀핏 주석 요한계시록 서론에서 터툴리안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함께 예루살렘 파괴 이전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말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기간으로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이광호『요한계시록』각주 14).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이렇게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기 전인 A.D. 70년 이전으로 보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이스라엘 멸망이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 어디에도 언급이 없다는 것을 보아 모든 성경이 A.D.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도 A.D. 70년을 넘지 않는 그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다. 위의 책, 24. 국내 학자로는 이광호도 이 견해를 따른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그 근거를 다른데서 찾는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연대를 지금까지의 A.D. 70년 이전인 네로 황제의 통치 기간 때로 보는 것은 로마 제국에 의해 발생한 기독교 박해와 관련된 종교와 정치적 상황에 의한 외적 증거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것이지만, 그는 그 근거를 성경의 내증을 배경으로 한 구속사와 관련된 두 가지 역사적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요한계시록이 기록시기를 구약의 기록과 연관된 신약의 구속사적 의미에서 찾는다. 그것은 역사상‘특별한 40년’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인데, A.D. 30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까지 40년의 의미는‘사도교회 시대’로 그 후에 뒤따르는‘초대교회 시대’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의 때와 구속사적으로 조화되는 의미를 지니는 기간이라고 본다.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광야 40년 동안의 특별계시의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영원한 해방과 그 이후 사도들을 통한 이적과 기사가 교회 가운데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인 40년 동안의 특별계시의 시기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그 40년이 지나게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이스라엘 민족의 의미는 그 역할을 완성함으로써 종언을 고하고 보편교회와 연관된 새로운 왕국 시대를 맞이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그에 관한 말씀의 계시를 주시는 것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보았다. 둘째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앞둔 4년간에 유대지역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로마제국에 대한 항쟁인 반란에 있는 시민전쟁[독립전쟁]에 유대민족주의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인들도 연루되어 있다고 보아 로마 제국은 대대적으로 유대인과 함께 그리스도인들도 박해하였으며,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아무런 범죄 혐의가 없는 사도 요한이 체포되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는 중에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되는 관련이 있었다고 본다. 위의 책, 24-35. 필자는 이러한 견해의 주장이 갖는 타당성에도 가능성을 열어 둔다. 이럴 경우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는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기간(A.D. 81-96) 중 말기에 기록된 것(A.D. 95-96)으로 보는 견해로부터는 시기가 최대 30년 가까이 당겨진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A.D. 70년 이전인 네로 황제의 통치 기간 때에 보는 견해도 그리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음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시기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당시 아시아 일곱 교회가 발전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3)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기간(A.D. 81-96) 중에서 말기(A.D. 95-96)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견해는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지지를 얻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에서 가장 유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필자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내용 전개에서 보는 종합적 상황에서의 긴박함과 여기에 권면되고 있는 주님의 권면을 고려할 때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의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는 이레네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게, 빅토리아누스, 제롬, 유세비우스가 있다. 이광호,『요한계시록』, 21-22.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의 박해 또한 도미티한 황제가 통치하는 기간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박해이기 때문에 도미티안 황제에 의하여 박해가 미친 광범위한 범위 안에서는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기간(A.D. 81-96)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다는 견해도 수용이 된다. (4) 트라얀 황제의 통치 기간(A.D. 98-117년)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견해의 주장은 그 가능성이 사도 요한의 생존 가능성의 연대와 관련하여서 볼 때 매우 낮으므로 지지를 받지 못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시기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3) 초대교회 박해사로 말해지는 로마 제국에 의한 기독교 10대 박해사는 64년에 있은 네로 황제(A.D. 58-68)에 의해서 시작되어 25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10번째 박해 황제가 되는 디오클레시안 황제와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에 이어지는 박해(A.D. 303-311)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때에 있은 가장 특징적인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네로 황제의 박해(54-68년) 때에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죽임을 당했다. (2) 도미티안 황제 때의 박해(81-96년)에서는 사도 요한이 밧모섬으로 유배당했으며, 황제의 4촌 동생 등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3) 트라얀 황제 때의 박해(98-117년)에서는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감독이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죽임을 당했다. (4) 하드리안 황제 때의 박해(117-138년)에서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갑이 화형으로 죽임을 당했다. (5)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의 박해(161-180년)에서는 저스틴과 포티누스 감독이 죽임을 당했다. 이때의 박해에서는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과부 펠리시타스와 그의 일곱 아들이 처형을 당한 기록이 있는데, 펠리시타스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당신에게 승리할 것이며, 나를 죽인다면 죽음을 통해서 더욱 큰 승리를 거둘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또한 한 소년의 죽음도 일화로 남아 있다. 쌍투스라는 소년은 박해로 고문을 받으며 죽임을 당할 때 고문을 당하면 당할수록“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을 계속하여 되풀이하면서 대답하며 죽어갔는데, 이것을 지켜보던 많은 신자들이 용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몇 몇은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죽임 당함을 기뻐하며 최후를 맞이했다. (6)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의 박해(191-211년)에서는 이레네우스와 오리겐의 아버지인 레오니마스가 죽임을 당했다. 이 때에 있은 박해에서도 남아 있는 일화가 있다. 아프리카의 카타르고에서 있은 일인데, 페루페투아란 여인과 이 여인의 하녀인 펠리키타스라는 두 여인이 원형경기장에서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 찢겨 죽임을 당하는 두려움에 있었지만 둘은 손에 손을 굳게 잡고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증거하였다. 이때 펠리키타스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으며, 투옥된 지 8개월 만에 아이를 낳고 죽임을 당하게 될 때 간수들이 그녀에게 "해산하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면서 어떻게 원형 경기장의 짐승들을 대항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현재 나의 고통은 나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야수들에게 대항할 때에는 또 다른 이가 내 가운데 역사 하실 것이다. 내가 그분을 위해 고난을 당하니 그분이 내 대신 또한 고통을 받으실 것이 틀림없다." 라고 대답하였다. (7) 막시미누스 황제 때의 박해(235-288년)에서는 로마 감독이었던 힙포리티스와 폰티아너스, 그리고 히플리투스, 우르술라가 죽임을 당했다. (8) 데키우스 황제 때의 박해(240-251년)에서는 오리겐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이 고문으로 출옥 후 죽었다. (9) 발레리안 황제 때의 박해(253-260년)에서는 카타르고의 키프리안과, 스페인의 타라고나 지방 감독인 투루투어스와 부감독들이 죽임을 당했다. (10) 디오클레시안 황제 때의 박해(284-305년)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고 황제 숭배에 있을 것을 거부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잔인한 방법의 고문을 당하며 죽어갔으며,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에 이어지는 박해(A.D. 303-311)에서는 더욱 혹독하게 박해를 하였다. 이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박해에 의한 시험의 때를 견디지 못하고 신앙을 포기하거나 형벌을 피하기 위하여 타협을 하였다. 이것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한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 가진 믿음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보거나, 그리스도를 배반하여 믿음에서 떠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 가진 신앙의 정절을 꿋끗하게 지키는 것을 보며 감명을 받은 갈레리우스는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A.D. 311년에 죽음을 앞두고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용을 표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4) http://blog.naver.com/sangdamee/10171485270
5) 김성주,‘요한계시록 1장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http://cafe.daum.net/remnant7000.
6) 밧모 섬(Island 0f Patmos)은 소아시아의 남서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도데카네스 군도에 있는 조그만 섬으로서, 초대 교회의 믿을만한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의 영에 따라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필립 E. 휴스, 오광만 역,『요한계시록』(서울: 여수룬, 1994),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