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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탓
김 명 동*
무더위와
힘겨운 사투 중인데
지칠 줄 모르고
우후죽순
고개를 내밀고 자라는
이방인 같은 잡초가
나를 괴롭힌다.
마당을 어지럽히는
꼴이 보기 싫어
예초기를 둘러메고
형장으로 들어가 한바탕 형을 집행했다
잘린 풀들이 수북이 누워 있다
마당 한켠이 조금은 훤해졌다
땀이 이마와 등어리에
처마 끝 빗물 쏟아지듯 떨어진다
어지럼증이 오는 듯하다
세월 가는 짐이 무거워서일까
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 길로 들어서길
기다려지는 것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지친 나이 탓이 아닐까
꽃에게
너를 바라보면
내 콧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
네 찐한 향기에 취해
홍당무가 되어버린 내가
혼절하여 비틀거린다.
※ 경북 상주 출생, 시집 어느 바보의 작은 가슴(1990), 고향은 저만치(1992), 꿈속에 별 달(1993), 그대를 사랑하는 이유(2002), 그리움의 마당에는 당신이 주인입니다(2006), 사랑춤(2015), 누군가 다녀갔다(2020), 노을동행(2020), 수필집『칠보십장생(2015), 동시집 별빛이 내려와서(2018), 전)한국문인협회 영동지회장, 영동예총 회장, kimydo812@hanmail.net
계란후라이 꽃
송 은 애*
남들이 뭐라든 할매는 계란후라이다
엊그제 낳은 계란후라이 하며
배고픈 아이들 도시락에 넣어주고
삼키던 침도 이젠 말라비틀어졌다
입술을 깨물다가 문득, 그리움의 상징인 영감을 떠올린다.
그땐 왜 그렇게 배가 고팠을까?
이밥, 조밥 그리고 계란후라이가
배고픔 달랬는데, 지금은
배불러 한탄이다.
지워버려야지! 모여 앉은 할매
엉덩이 들썩이며 꽃 같았던
지난 추억 떠올리다 잠든 청춘에
마른 입술을 비비며 올려다본 하늘에
아이들이 미소지며 손을 흔든다.
아! 행복하다
금계국 천지
전국을 섭렵했다
지난해는 유난히도 추워
세상을 잃나보다 했다
날 버린 세상이라고 때론 원망도 했다
질기게도 뿌리내리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리고 섭렵했다! 세상을
욕심 많은 사람보다
외면하던 사람들에게
꿋꿋이 일어나는 모습 보이기 위해
전국을 황금으로 물들이며
나의 천국을 만들었다
인생 다 그런거지!
당귀꽃
비 온 뒤 어느 날이었다
내 발목을 잡아당긴 건 미련도
기쁨도 엉킴도 아니었다
며칠 전 헤어진 그대의 송곳 같은
뼈아픈 말 한마디 목젖에 걸려
후회의 길목 그 자리에 머물 때
구름처럼 몰려든 회한의 돌이킴이었다
그땐 그 말이 진심이었나?
실망해도 좌절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
후회는 하지 않지만
복잡한 내 생각의 끈처럼
길게 늘어서서 결론을 기다렸다
불안감도 허우적대던 이성도
상관없다 말하리라
구름처럼 뭉쳐서 함께 지내리니
걱정을 마라 나만의 자존심도 아니다
※ 월간《순수문학》시 등단(1996), 시집 詩! 꽃을 혁신하다 외 9집, 꽃시집 밟혀도 피는 꽃(2020), 산문집 고택의 門을 열다, 길마루길 64 출간,한국예총예술문화대상(2013), 대전문학상 수상(2015). sea5610@hanmail.net.
율이.5
박 헌 영*
오늘도 말없이
오늘은 젤리 한 알을 내민다
빛 한 줌 입 안에 넣는다
오늘 만든 기린을
눈감은 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뭔가 내 안의 뭔가
키가 높아진 듯하다
어스름 다 저녁에
별에게로.
이지아
1학년 함께 저녁 정자
할아버지가 왜 이걸(하트 팬던트) 만들어 줄까?
몰라요
이뻐서, 지아가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서
그럼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보다 더
의사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보다 더
그럼 나무요? 한다
응?
저는 튼튼하니까
산소를 많이 내줄 거예요
사람들이 먹고 안 아플 거예요.
살
- 재즈시.2
뼈가 신이라면
사람은 살이다
하늘에 연을 만들어
살에 종이를 붙인다
날것의 뼈대에 바람을 안긴다
원효는
살이 뼈의 뼈임을
뼈 없는 물, 해골 한 바가지 식수에서 얻었으니
마음이니 생각이니 느낌이니
일을 방해하거니
삶은 근육이다. DNA
나선의 층계를 죽을 때까지 오르는.
이별에게
- Y에게
꽃이 지면
그 향기는 쓸쓸한 능선 위로
그제서야 넘치리라
이별을 손금에 숨기고
아직은 강물 흐르거니
술 다해도 둑을 넘어
그칠 수가 없어라
아무리 깜깜해도 한낮에도
이별은 별, 낮별이니
가는 것보다 오는 것이
이미 내 안에 넘치네.
※ 전북 부안 출생. 시선집 <즐거워라, 죽으러 가는 저 물소리> 외, 조형시집 <나의 거울> 등. parny57@naver.com
어머니의 무게
이 영 순*
까마귀 우짖는 소리에
어머니는 자꾸만
삶의 창을 내리려 하신다
그늘진 시간에서
몇 발짝 물러나 전화를 받는다
근심을 나누며 허기진 소리를 하다가
위로 섞인 친구의 농담에
쿡쿡 웃음이 나온다
혼돈과 공포의 시간을 건너는 어머니
방구석에 밀쳐진 베개처럼 잊고 웃다가
흠칫, 나에게 내가 놀란다
칠십 내게도 언젠가 오고야 말
모든 것, 놓아야 할 때는 얼마나 남았을까
문득 청개구리 울음 같은 시침 소리가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무겁다
구십 노모가
비몽사몽 부르는 어머니
그 존재의 무게는
나만 모른다고
벼랑의 풀에도
삶의 독한 향기가 있다
바람에 비척이며
아슬아슬 매달려 살아도
꽃이다
흰 방울새보다
진한 사랑의 울음을 품어
소리 없이 먼 곳에 전하는 꽃
눈 딱 감고 춤을 추는
사랑이 고픈 애잔한 몸짓에
보는 이, 환호를 보낼 때
틈새를 비지고 핀
보랏빛 해국
바람에 또 냄새 진한 눈물이 솟고
해국의 향에 취해
온몸 들이미는 것들의 몸부림에
노랗게 묻어나는 삶의 울림을
그때는 몰랐다 2
청원휴가를 나왔다고 했다
딱 이틀,
빙벽에 부딪쳐
눈발에 묻혀버린 편지가 불러낸
푸른 청년의 붉은 귀향
겨울나무 눈처럼 똘똘 뭉쳐
바람을 가늠하는 답답했던 시간
그때는 몰랐다
생각이 가슴으로 내려가면
침묵이 된다는 것을
눈을 덮고 무엇을 키우고 있는지
젖은 땅 밟으며
귀대하던 뒷모습에 꽁꽁 묶여
반백 년 살아갈 줄을
그리움의 초록을 물고
길목에 멍으로 서 있을 줄을
또 봄비가 온다
※ 대전 출생, 월간《문학세계》신인문학상(2001), 시집 길은 어디에, 절하며 산다, 나비의 뼈,《백지》동인,《꿈과 두레박》회장, ly1103@hanmail.net
바람꽃의 노래
이 종 근*
저 꽃은 바람꽃, 늙은 배 한 쌍이
밤바다에서 빙빙 맴을 돌고 돌아
섬을 오가듯 힘껏 등댓불 일으킨다
거센 물여울이 잘게 부서지듯 괭이갈매기가 날갯짓을
풀어헤치면 하늬바람이 잘게 스미어 바람꽃으로 핀다
한여름 속, 크고 작은 섬들이 저녁 달빛을 내어 밝히고
파도 소리에 엉킨 해반이 제법 흥겨운 멋으로 움틀 때,
서로가 파도인 양 넉넉히 부대끼는 사랑의 분량으로
서쪽 바다로 주저 없이 읽히는 활달한 풍어의 밤이다
먼 항해길 무사히 건너온 사랑이 나풀대는 별빛인 양
푸른 바다 곁에 놓인 늙은 배 한 쌍이 포구를 울린다
섬의 경계를 남실거리는 뱃고동이 울렁이는 곡진한
갑판 위에서 덩실덩실 춤추는 어부들의 견고한 닻줄,
바람꽃 한 점, 한 점이 푸른 바다 곁을 뛰쳐나오는
바람꽃이 뭉실뭉실한 닻의 포효인 양 파란을 내린다
맘껏 공중에 설레는 붉은 등대가 품은 새벽 달빛 따라
늙은 배 한 쌍이 기다란 별빛을 고즈넉이 쫓아오고야!
푸른 사시사철을 품은 한 떨기 바람꽃이 고요히 이는
이 붉은 밤, 이 짧은 영속(永續)
수평선*
바람 건너편에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애초에 한 점이었을 바람이 하늘을 넘나들며 나뭇가지 쭉 뻗은 원호의 선으로 또렷한 경계의 하늘을 다부지게 그려내고 있다
바다의 탁 트인 시력에 배 띄우고 걸출하게 어루만지듯 피어난 구름 넓이로 돛을 펼쳤다가 구름 무게로 닻을 내리고 있다
참으로 과감한 결단이다
이 징후가 곡선의 바탕 위에서 출발한 강건한 토대임을 분별해 냄과 동시에 한 그루 이름 잊힌 나무가 오롯이 자라나고 있다
바람의 면모가 여지없이 바다에 입각할 때쯤 배의 영토를 확장한 듯 해리(海里) 건너 바다의 국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뒤얽힌 속사정이 있을 법한 울창한 숲의 길섶에 한 그릇으로 채운 공깃밥과 한 채의 바다가 하늘을 뱃사람이 호위하듯 하늘을 배의 존엄으로 되새기고 있다
참으로 순조로운 구축이다
바람 한 점은 뭉게구름이 되고 이내 뭉게구름은 바람 한 점이 되어 수평으로 선을 내고 엄숙한 면적을 일궈내고 있다
하천일번지 3
- ‘우리’ 속의 나
실패에 꼬인 실의 매듭이 풀리기 전까지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흐르는 실개천에 박힌 돌다리를 건너자 지도책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굴다리가 난데없이 나타났다 경부선 철로 아래에 신기루 같은 마을에 집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중에 값싼 방 하나를 골라서 거처를 정했다 여전히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속의 사람들은 침묵하는 언어로 해답을 구걸하듯 좀처럼 얽히고설킨 전봇대 아래의 지도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다들 타향의 정이 차츰차츰 자라날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 숙명이라고 단정할 틈 없이 실개천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 가족이 머물던 한 울타리 속에서 실패에 꼬인 실의 매듭이 풀리듯 막 태어난 막내가 들어가서야 ‘우리’라는 낯선 고향을 이뤘다 훗날 하나둘씩 자라서 다들 이사를 떠나갔지만…….
막내만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찔하고 시끄럽고 구슬픈 이곳에
하천일번지 4
- 기억의 아픈 갱신
1. (기억의 …)
내 사는 개울물은
핏줄의 내력인데
지하도 아래로만 흐르고
내 사는 골목길은
집집이 내놓은 꽃길인데
고층 아파트에 묻혔고
내 사는 기찻길은
엄마의 손 빠른 호출인데
기적소리는 멈췄고
내 사는 돌담 옛집은
바람 따위에 흩날리다가
쓰러지는 폐가일 뿐…….
2. (… 아픈 갱신)
찐빵 도넛 군만두
고구마튀김 잔치국수
팥빙수와 콜라 한 잔
그들은 이곳을 떠났다
문패가 숫자로 붙었다
재개발 재건축 경기로
몇 동
몇 층
몇 호
동네 몇 바퀴를 채
돌지 않아도 될 듯하다
간곡한 볼거리가 사라졌다
하천일번지 5
- 건빵과 찐빵
기찻길과 벽돌 사이 개울물이 흐르고
개울물과 공장 사이 기차가 휑하니 지난다
아, 집의 균열은 어디쯤에서 흔들리나
아, 다락방은 햇볕 한두 줌 스미는가
나의 우물과 나의 쌀밥과
나의
연탄과 나의 만화와 나의
공납금이 늙은 엄마의 걱정처럼 이끼
검푸르게 낀 담으로 피어오를 때,
아홉 살 많은 형아는 군인을 갈까
아홉 살보다
서너 살 더 많은 누부야는 공장을 갈까
어린 나는 밤마다 퉁퉁 부은 눈으로
건빵과 찐빵의 늦은 귀가를 그리다가
등걸잠이 든다
※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석사) 졸업.《미네르바》등단. 제1회《서귀포문학작품공모전(서귀포예총)》에서 당선하고, 제2회《박종철문학상(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최우수상, 제1회《부마민주항쟁문학창작공모전(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우수상, 제2회《국립임실호국원나라사랑시공모전(국립임실호국원)》최우수상, 2021년《제주문학관개관기념문예작품공모(제주문학관)》최우수상 등 다수의 창작 시(詩) 공모전에서 수상. 천안문화재단 <문화예술창작지원금> 수혜. 시집『광대, 청바지를 입다』발간,
onekorea2001@naver.com
붉은머리 오목눈이
백 경 화*
눈이 오목하고 머리가 붉다 해서
이름 지은 붉은 머리 오목눈이
천변의 갈 숲에서 쉴 새 없이
찌지굴대며 시끄럽게 떠듭니다
한자리에 잠시 머물지 못하고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카메라만 보면 잽싸게 도망칩니다
오목조목한 얼굴 폭 들어간 눈
작은 몸집보다 꼬리가 길어
더욱 앙증맞고 귀여운 새
누가 어쩌길래. 왜 도망가? 두런대며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뱁새를 따라갑니다
뱁새를 따라가다 지친 사진가
뱁새는 수풀 속으로 꼭꼭 숨어 버리고
따라가던 카메라는 빈 허공만 바라봅니다
명예
김 창 유*
명예는 목표가 되어서도 좋지만
그 명예를 얻기 위함보다는
많은 세월 노고 따라오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명예는 액세서리
모진 세월과 정성이 맺어주는
아름다운 진주
나 스스로 걸 수도 있지만
남들이 달아주면 더욱 빛나겠지
남이 달아줘 어울리지 않으면
아니 단만 못하겠지
명예는 삶의 가치
생의 보람.
효도
얘야
힘이 부치면 효도 못 해도 된다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어
그저 너희들이나 잘살면 되지 뭐
하지만 자식들에겐
부부가 한마음으로 꼭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훗날 아픈 후회도 줄어들테니
효도는 생의 근본 영원한 가치
그 방법은 알겠지?
베풀어주신 은혜만큼
효도 또한 한없다 싶지만
후회스럽고 아쉽기만 한 것
오늘따라 무심한 세월에
기다려주지 않고 영영 떠나버리신
부모님이 그리워진다, 보고파진다.
※ 충남 서천 출생, 한국공무원문학협회 회원, 서양화가, 시집『아름다운 이름으로』, kcy42@hanmir.com
박꽃 같은 친구야
전 월 득*
내 어린, 달 밝은 밤
초가지붕에 함초롬히 피어서
나를 설레게 했던
하얀 박꽃 같은 친구가 있었지
행여, 네 발자국 소린가
귀 기울이다 네 이름을 부르면
하얀 박꽃으로 피어나던 친구야
어느 곳에 살다가
이제야 왔더냐?
칠흑 같은 먼 길을 헤쳐
하얀 가슴을 풀어 놓는 친구야
혹여, 멍든 가슴 남아 있다면
달빛으로, 별빛으로 씻고
고운 벗이 되자 친구야
씀바귀
간사스런 남녘바람 찾아와
지긋지긋한 겨울을 쫓아 보내면
아지랑이 아롱대며
내 방문을 기웃거린다
소매 끝에 코 문지르며
문풍지 조각 거울로 밖을 엿보던
아홉 살 나는
어느새 꽃바구니 옆에 끼고
논두렁에 엎어진다
입맛 까다로운 아버지
흘겨보던 밥상에
나실나실 피어나는
파릇한 씀바귀 올려놓고
아버지의 환한 미소 맛보며
보약 같은 행복을 만들었었지
여린 엄마는 맘고생을 보자기에 쓸어 담아
이십 리 길 오일장에 맨발로 뛰어갔었지
아홉 살 나를 춤추게 하는
삐약이 고무풍선 사주려고
좁다란 은산장을 돌고 돌아
힘겹게 귀가하시던 내 어머니
그늘에 앉아 씀바귀를 다듬으며
내 유년의 봄바람을 읽는다
사랑
사랑이란
다소 누추한 것
핑크빛 마음으로도
미치지 못하는 것
열렬한 사랑에 빠져도
약간은 허전한 것
사랑이란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비단 그릇
수많은 멜로디
폭풍전야처럼 어지러운 것
사랑이란
잔잔한 호수의
금빛 물결을 가르는 한 쌍의 원앙처럼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려는
끝없는 몸부림
※ 충남 부여 출생, «상상의 힘»(2020) 수필 부문 신인상, jwd5038@naver.com.
민들레
김 기 태*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여행하다 내린 곳이 둥지거늘
나뭇잎에 떨어져도 서두르지 않고
빗방울 친구 삼아 땅으로 내려와
뿌리를 내리지
머문 시간이 길어지면
잎이 낙엽 되기를 기다려
한 해를 기다렸어
돌 틈 사이에 떨어져도
싹 틔울 자신이 있었으니
이슬을 먹고 살아도
온 힘을 다해 키워
바람을 기다렸지
순풍에 한평생 다진 땅을 버리고
미련 없이 날아오르는 순백의 꽃
눈부신 백발의 향연이다
詩란
山寺
처마 밑
풍경 울리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유성(儒城)
백제 시대에
선비가 많이 살 거라고 지은 이름
식사 중인 손님에게
‘박사님’하고 부르면
열 명 중 일곱 명이 고개를 돌리는데
나머지 두 명은 박사과정에 있고
한 명은 석사 출신이래
지금은 이과 선비들이 무리 지어 사는 동네
그려, 염력(念力) 때문일 겨
천 육백 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생각대로 굴러간 겨
할미꽃
어제도 예쁘더니
오늘도 예쁘다
나만 바라보는
아내를 닮았다.
※ 충남 서천 판교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전)계룡건설 토목본부장, 온동 마을 촌장, 수필집 삶의 시방서, 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 그려, 하고집이 등. blog.daum.net/ondong
복사꽃
오 병 남*
복사꽃
밭둑에 고이 피어 손짓하면
밭일하던 팔순 부부
연분홍 그늘로 쉬러 간다
젊은 나무 아래서
막걸리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키면
할아버지 얼굴에 복사꽃 피어난다
“한 잔 더 받으시요”
“내 사랑도 한 사발 받으시요”
일손 놓은 노부부의 정담에
복사꽃 배시시 웃고 서 있다.
봄날
참꽃 향기에
봄날은 무르익고
두엄 삭이는
구수한 냄새
봄바람이 훔쳐간다
고향 들녘에
뿌려 둔
기억의 씨앗들
흙 속에서 다시
옹알이하며 푸르게 태어난다.
보리
찬 바람
눈보라 속에서도
늘 푸른 보리
농부님이
더 잘 자라라고 밟아줍니다
마음 아파 괴로울 때
누군가 내 마음의 밭을
밟고 지나간다면
그 또한
하늘이 보내주신
농부님이 아닐까요.
※ 충북 청주 출생, 청주교대 졸업, 한국미술협회 회원, 가톨릭 미술가회 회원, 대전사생회 회원,
시집『당신은 나에게 선물이었어요』
우금티 전투
이 석 구*
저 고개 넘을라치면
여지없이 스나이더 한 발에 가슴 하나씩 뚫려 나갔다
죽창에 쇠스랑, 낫자루 거머쥔 농민들
기껏 화승총에 의지한 동지 따라 오르고 오른 우금티는
절규 어린 그들의 피 무덤 되었다
견준봉에 버티고 선 이백 일군
숨었다 쏘아대고 숨었다 쏘아대고
개틀링 기관총, 크루프제 야포로 무장한 관군
사정없이 갈겨만 대니
위세 좋게 사람 병풍 둘렀건만
후드드 쓰러져간 뻘건 피
한 서린 내 되어 금강으로 흘렀다
이인가도 그득 메운 싸늘한 주검
차가운 날
내 땅 내 흙에서 솟은 서릿발조차
뼛속 깊이 후벼만 들었으니
아, 서러워라
어이 달랠 수나 있으려나 억울한 그 혼백들
생존의 인내
정 깊은 것인지
외로웠던 것인지
찰떡같이 끈끈한 대지는
두 다리 잡고 꼼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긴 목만 움츠렸다 폈다를 반복하며
장끼는 그렇게
삼십 분도 넘게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의존적 경쟁이 깊숙이 득실 감춘
푸른 별 중심에 선 존재들
하루살이부터 벌 나비 그리고
참새들이 촐싹대며 곁을 배회하는데도
장끼 한 마리
결코, 흔들림 없이 경계서는 까닭은
수수만년 긴 시간 속에서 촘촘하게 새겨진 생존의 인내
그 뿌리가 그만큼 깊기 때문은 아닐까
당신의 때는 가버리는가
인간이여
정녕, 당신의 때는 가버리는가
오만의 칩이 육신을 드날며
강녕을 핑계 삼아 영혼을 삼키는 날
하이브리드 인간이 전이의 물결로 오나니
정녕, 당신의 때는 가버리는가
백만 년 전
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던 그 순수를 저버리고
멈춰야 할 분수를 알면서도
밀려오는 물결에 허우적대는 비애
빛 밝은 서정의 흥취도
인간다운 애증의 정서도
그 물결에 모두 묻혀 가나니
온통 오만의 무덤 되어 가나니
인간이여
정녕, 당신의 때는 가버리는가
천장호의 아침 단상
어둠이 조각조각
하나둘 부서지는 칠갑산 언저리
바람을 잡고 흔드는 천장호가 가는 가을 그리고 있네
스치는 붉은 기운
노랑 요정들이 설핏설핏 얼굴 내미는 몽상의 수변에는
고요의 운율만이 철없이 흐르는데
길 잃은 나그네는 수심이 깊어라
반 쪼가리의 삶
화평의 길은 멀고도 멀어
노심초사, 한마디 말조차 경계하라 일렀건만
잠길 듯 말 듯
가다가 끊기는 출렁다리는
안개 속에 미끄러져 천리만리 미궁으로 빠져드니
아, 천장호여
명징한 해빙의 봄
그 언제나 오시려나
키 작은 들풀들
험준한 산을 넘어서
광활한 들에 드리우는 해맑은 부드러움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민들레와 토끼풀과
그리고 그 아래 고만고만한 것들이 어우러져
영롱한 색계를 빚어내는 곳
골을 따라
사유의 강은 백 갈래 천 갈래 다른 길 낼지라도
총총, 너와 나 다툼없이 겸허히 위로할 뿐
숙명인 양 터전 삼아
골 언저리 틈새마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저, 키 작은 들풀들
큰 것들아
어찌 저들의, 삶마저 작다 하겠는가
어찌 저들의, 일생 가볍다 하겠는가
※ 충남 논산 출생, 이학박사, ≪상상의 힘≫ 신인상 수상, 시집『초승달에 걸터앉아』,『서두르지 않아도 돼요』,『흐뭇한 삶』등, seokkoo@hanmail.net
생일
인 설 현*
귀빠진 날이라는 데 다행히 귀는 붙어 있다
눈과 입도 붙어 있으니
이만하면 그렁저렁 살아온 나 아니더냐
아들의 생일상 부름에
맛과 멋을 고르며 상상해 본다
허나, 선택은 할멈의 몫
귀빠진 날은 귀가 달아나는 날이다
어머니 마음
명절 연휴 다가오면
어머니는 문지방 닳도록
대문을 들락날락 하신다
눈꺼풀은 내려와 앉아있고
눈은 희미해져 침침한데
시선은 먼 길 끝에 가 있다
산모퉁이에 차 보일 때마다
혹시 이번에 하시면서
차 지날 때까지 바라본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하면
챙기던 문단속 잊으셨는지
대문 빗장은 열려 있다
전기세 많이 나올라
어두웠던 온 집안이
명절 때만은 대낮 같다
잠 못 이루어 즐겨보시던 연속극
리모컨 켜는 것까지 잊으셨는지
두 귀만 대문턱에 걸쳐있다.
※ 충남 예산 출생, 공주사범학교 졸업, 시집『착하고 귀한 선물』, 저서『재미나는 글짓기』,『슬기로운 엄마교육, 즐거운 자녀공부』등
어머니
곽 경 상*
꽃비 내리는 봄이 오면
어머니가 더욱 그립습니다
두 손이 터지도록
칠 남매 키워 주신
내 어머니
눈물로 키운 자식들
어미 되어 이제야
어머니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인 듯
올해도 꽃이 피었습니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시던
내 어머니는
어이해 꽃이 지듯
그리 일찍 가셨나요
꽃이 내 마음속에 들어 온 날
어머니가 보고 싶어 울었습니다
꿈에라도 한번 오세요
어머니
그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그대의 부드러움과 촉촉함이
내 가슴을 스쳐간다
나는 알고 있지
그대 가슴에
마르지 않는 강처럼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꽃비
강가에 벚꽃길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꽃잎들
바람 불어와 꽃비가 내린다
함박눈처럼
함께 걷는 모든 이들
환호성이 나오지만
꽃잎 없는 나무 되면
외로울까 걱정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걷는 이 길
평생 잊지 못할
꽃비 내리는 황홀한 길
내년에도 이렇게 너를 기다릴께
※ 충북 옥천 출생, 충북대 행정대학원, 옥천군청 여성회관 관장, 충북 보육시설 연합회장
빈 의자의 사색
김 근 수*
빈 의자에 앉으면
내 마음이 정제되고 편안해진다
자존심과 겸손함을 알려준다
나의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제한적인 것을 알려준다
빈 의자는
지혜를 발견하게 해준다
내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아준다
빈 의자는
진정한 나를 만나게 해주며
위로의 시간을 통해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인생의 색깔을 고민하게 해준다
빈 의자는
내게 매우 소중하다
내 인생을 더 깊게 탐구하며
자기 발전의 멋진 여정을 가르쳐 준다
※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국보문인협회 전국작가협회 회장, 제11회 대한민국 국회 문화예술 명인대전 시 부문 대상, 대전광역시 대전사랑 시장 표창, 대전 중구 청소년 문예 대상 수상, 국무총리 청소년보호위원회 유공자 표창, 문화체육관광부 ‘책읽기 캠페인’ 초청 작가, 한국농촌문학상 대상 수상,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상 수상, 한국문학신문 대전광역시 본부장. 기자, 세계 청소년동아리대회 백일장 심사위원, 서원대학교 통일부 주관 전국 시 낭송대회 심사위원장, 저서 시집『유천동 블루스』,『오월의 연가』외
경계의 시간
심 현 지*
엄마,
봄비 내리는 창밖에 구름 두어 점 떠 가네요
오늘 수리산 푸른 자락을 기어이 넘으실 건가요
엄마의 편안해진 숨소리가 가슴 먹먹해지는 오후에요
어제는 쓸만한 것들을 옷장에서 꺼내 보자기에 쌓았어요
신발장에 있는 편안한 운동화도 현관문 앞에 놓았구요
고단했던 길고 긴 세월 원망도 서러움도 모두 잊고 가세요
사랑과 행복만 가득 안고 가셨으면 해요
이제 온 세상 날아다니며
이승에서 못한 일 천상에서 원 없이 해보세요
참아왔던 엄마의 긴 숨소리가 들려요
이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나봐요
엄마, 그동안 고맙고 감사했어요
그리고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 할래요
다음 생에도 꼭 울 엄마 해줘요.
기린꽃
고난의 깊이를
간직한다는 꽃말
기린꽃 가시는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
오랜 세월 창가에서
일년내내 피고 지고
분홍빛 꽃송이
앙상한 가지의 오랜 동무
눈길 잡아 까꿍하네
한결같은 그 마음의 길
※ 대전 유성 거주, ≪중도문학≫ 신인상 수상(2022), hg42500@gmail.com
청소
노 복 래*
나는 매주 일요일이면 거울을 보며
달력 한 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빗자루로 쓸고 걸레질에 온몸이 엄살을 한다
팔십 평생 농사일을 하시던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의 뼈 소리를 들으며
시간이 놀던 자리에
청소 한번 하지 않고 자랐다
할아버지의 잔소리가 깊어 갈수록
더 굵어지던 내 허리뼈
잘게 다듬어지던 억센 언어들
마구 부서져 나가던 마음의 티끌들
나는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달력 한 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할아버지의 속옷에서 풍겨오던
향긋한 땀 냄새를 맡기 위해
※ 충남 예산 출생, 한밭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 토목공학 석사, 논산시 수도사업소장, 한밭대 외래강사 역임,
현)(주)동양엔지니어링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