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2장 1-15절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하나님을 찾으라(1-3절)
본문 1-2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1-2) 함께 모여라. 함께 모여라.
창피한 줄도 모르는 백성아!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세월이 겨처럼 날아가기 전에,
주님의 격렬한 분노가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주님께서 진노하시는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함께 모여라.
스바냐 선지자는 유다 백성을 향해 '수치를 모르는 백성', '창피한 줄도 모르는 백성'이라고 부르며 책망합니다. 이는 유다 백성이 그 동안 자신들이 행한 죄에 대해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그저 외식적인 신앙생활만 하고 있음을 일갈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6장 15절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천만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쓰러져서 시체더미를 이룰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벌을 내릴 때에, 그들이 모두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창피한 줄 알고, 부끄러워하기라도 한다면 천만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겉고 속이 다른게 뻔히 보이는데도, 그 거짓된 행동이 멀지 않아 드러남에도, 가만 보면 모두 자기를 위하고 자기 포장을 일삼으면서 '자기 옳음'과 '자기 의'를 이야기하는 그 역겨움에도 어쩜 그리도 당당한지 모릅니다. 거룩한 표정은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안색도 안 변합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은 게 분명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나 오늘날 이 땅 교회의 모습이나 매한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땅 교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고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기도자들이 얼마나 애통하는지 모릅니다.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망가져도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 있는지, 교회가 어떻게 이토록 부끄러움도 없는지, 창피한 줄도 모르는 교회들을 향해 그저 안쓰러움에 절규하며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도 한 마음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을 향해 절박한 심정으로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주님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다시 찾자!" "주님의 분노가 눈앞에 보이니, 어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자!" "백성아! 너희들 정말 하나님을 믿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진정 믿고 있는 거니? 정말이야? 이제 심판이 멀지 않았어! 어쩌려고 그러니...” 이 회개의 촉구는 ‘수치를 모르는 자’(1절)들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3절)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다 처음에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며 시작합니다.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만나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끝까지 여호와를 찾는 것입니다. 끝까지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혹시’입니다. 결코 당연함이 아닙니다. 내가 여호와를 찾으니까, 내가 공의와 겸손을 구하니까, 당연하게 누리는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어떠함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조건과 자격을 갖추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혹시’ 진노 중에라도 주님의 긍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합3:2).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진노 중에라도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구하는 것뿐이요, 그 긍휼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가상한 노력이나 열심, 헌신으로 주님의 긍휼을 끌어당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전적인 주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이방 민족을 향한 심판 메시지(4-15절)
이렇게 유다 백성을 향한 회개 촉구는 이방 민족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4-7절은 블레셋에 대한 심판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오랜 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대표적인 민족입니다. 블레셋은 엘리 제사장 때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갔고(삼상5장), 여호람 왕 때 유다 왕궁과 성전의 제물을 약탈해 갔습니다(대하21장). 그 악행은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4) 가사는 버림을 당하며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며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에그론은 뽑히리라
4절에는 블레셋의 주요 도시인 가사, 아스글론, 아스돈, 에그론이 모두 언급됩니다. 그렇게 ‘버림을 당하고’, ‘폐허가 되고’, ‘쫓겨나며’, ‘뽑히리라’는 표현은 완전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8-11절은 모압과 암몬에 대한 심판입니다.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 자신들의 지역을 지나가는 것을 거절하고 막았습니다. 또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암몬은 유다 왕 여호사밧 왕 때, 모압과 함께 유다를 침략하여 잔인한 살육을 행했던 민족입니다.
(8) 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하나님은 모압과 암몬이 하나님의 백성을 비방하고 조롱한 말들을 다 듣고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저들이 자신들의 경계를 넘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살육과 약탈을 행한 죄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오래전 출애굽 때의 일부터 유다 왕 여호사밧 때의 일까지 다 보고 다 듣고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아십니다. 시편 139:1-3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시139:1-3, 새번역)
13-15절은 앗수르에 대한 심판 메시지입니다. 앗수르는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들의 교만함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엄중합니다.
(15)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
앗수르 민족은 니느웨 성의 부귀영화만 자랑하며 안일함에 빠져 "우리는 기쁘다" "우리는 평안하다"만 노래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불신하며,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소리치는 오만방자한 민족이었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이 소리는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나'를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리입니까? '나'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 교회안에도, 우리 안에도 이런 교만한 소리가 있음을 아십니까? 요한계시록 3:17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계3:17, 공동번역)
기독교 신앙의 '나'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나'가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는지를 절절히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의 고백이 우선입니다. 거기서부터 은혜를 찾습니다. 그 고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합니다. 그 자리에서부터 복음과 진리가 절실한 것입니다. '은혜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 복음과 진리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 은혜 아니면 난 사망입니다!'의 진정성 있는 절박한 고백이 신앙입니다. 오늘날 이 땅 교회가 수치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데까지 망가진 이유는 이 고백을 잃었거나 아니면 이 고백이 말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자각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 분만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믿음의 길을 걸어내십시다.
기도
하나님,
주님 앞에서 부끄럽고 창피하며 면목 없는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신뢰하며,
오직 주 예수만 늘 의지하며 사는 우리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