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김 명 동
오늘
붉은 잎 하나
가지 끝에서 손을 놓는다
또 하나의
노란 잎 하나 사연도 없이 떨어진다
가을바람이
이별의 사연 담긴
엽서 한 장을
산 너머로 날려 보낸다
이별은 그리움과
아쉬움을 담아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다
*경북 상주 출생, 시집 어느 바보의 작은 가슴, 고향은 저만치, 꿈속에 별 달, 그대를 사랑하는 이유, 그리움의 마당에는 당신이 주인입니다, 사랑춤, 누군가 다녀갔다, 노을동행, 건널목 등 수필집『칠보십장생(2015), 동시집 별빛이 내려와서(2018), 한국문인협회 영동지회장, 영동예총 회장, kimydo812@hanmail.net
낙엽
그대는 낙엽의
마지막 목 졸림에
갈증을 아느냐
저린 가지 끝에 매달려
힘없이 떨어지는
고통을 그대는 아느냐
노을빛에 물든
무거운 옷 벗어
던지려는 나무의 심술
작은 빗방울에도
숨죽이는 두려움
쉰 바람에 속삭임 없이
하나씩 던져주는
노란 손수건
그리고 피 묻은 빨간 손수건
그대는 아느냐
가을이 이별 앞에 떨구는
피멍 든 잎새를
그대는
주울 수 있느냐?
명자 해당화
봄은 그렇게
겨우내
주체할 수 없는
시린 기다림을 담고 와
외로움에 진통하는
그대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칠해 놓았다
계절의 약속
송 은 애
골담초 계절 어기고 피어 유혹한다.
속도 위반
신호 위반
아니야, 약속을 위반하고
무엇을 전하려고 매달렸을까
교만이 넘쳐 자만
사랑이 넘쳐 애욕
지혜가 과부화였기에
때를 거스렸을거야
그의 진실을 찾아 나를 돌아보고
이해했을 땐 이미 그대가 떠난
외로운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후였다
때를 알기엔 너무 빠른 세상
올 가을엔 깨달아야지
※월간《순수문학》시 등단(1996), 시집 詩! 꽃을 혁신하다 외 9집, 꽃시집 밟혀도 피는 꽃(2020), 산문집 고택의 門을 열다, 길마루길 64 출간,한국예총예술문화대상(2013), 대전문학상 수상(2015). sea5610@hanmail.net.
구절초, 어깨에 눕다
남과 다르다
나와 함께 종종걸음 쳤지만
세상은 늘 녹녹하지 않았다
하늘이 푸르를 때 구름 지나가고
햇살에 내 몸 맡길 때 바람 불더니
저기 저 노을 질 땐 이유 없는 눈물만
나더이다. 우습지요?
가련한 그 어깨 누울 때
손잡고 위로한 그대 어깨를
빌려줄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음을
뒤늦은 깨달음으로 알고 홀로서니
바람은 산들바람으로
태양의 침묵은 말없이
기다림의 여유로 깨닫게 한다.
한라천마꽃
깊은 산속에서 썩어가는 그들의
남은 찌꺼기가 생명줄이다
하늘이 그를 내려주며
혹독한 시련을 동아줄로 주었을까
말없이 사랑하고 그림자처럼
살라고 주문하니 순응한
한 인간의 삶 같다
순탄하지 않던 삶을 품은
이유이다. 하늘이 주었기에
가을 저편에
아스라이 무너져 내린 마음
다잡으려 떠나는 길에
버선발로 뛰어나와 잡는
그 아름다운 계절 덕분에
나는 산다.
그 계절이 머물듯 나를
붙잡는 그곳엔
내가 있고 네가 있어
서운하지 않고 풍성하다
잠시 멍때리기 좋은 날
그 풍경에 젖어
나는 그곳에 산다.
해당화 옆 억새풀
살림살이 편하십니까?
잠시 그의 물음에 가시가 돋아나고
오그라들었던 꽃몽오리가 활짝
스치는 바람소리조차 관심 없던
그는 온몸을 비벼가며 인생을
흔들어 버렸다
꽃은 마음껏 피고
풀은 푸른창공 바라본다
고고한 자태의 붉은 꽃
평범하게 아래로 흐르며
천상과 지상의 손끝이 하나 되어
가슴 깊은 인연이 된다.
가을이다 4
박 헌 영
초록이 바쁜 지상
이만치 돌아보니
가을이다
오래였던 잎잎의 너
입술 끝에 단풍이 드는구나
너 어디엔들 사랑이 없었겠냐만
사랑할 시간이 없어
너를 사랑한다
이른 사랑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늦은 사랑은 곧바로 겨울이다
가을이다, 일생에
한 달도 채 못 되는
사랑이다.
※전북 부안 출생. 시 동인 <천칭> 회장, 시선집 <즐거워라, 죽으러 가는 저 물소리> 외, 조형 시집 <나의 거울> 등. parny57@naver.com
백일홍나무 2
갈라져
한 줄기가 한 줄기에서 헤어졌다
두 이별이 다시 갈라져 가지에서 가지로
또다시 수수 몇 번 이별 끝에 저 백일홍나무
이별의 힘으로 하늘 넓혀 꽃그늘 깊다
껍질 죄 벗은.
모과 3
흠집 없는 모과 없다.
일그러진 열매
흉터 자국들.
여름철 수없던
내 안의 폭풍이
모과에 열려 있다.
어느 과일보다 단단하다.
상처의 향기.
물소리
친구는 백 년 전부터
옆에 있었던 듯
같이 고개 기울여
대전천 다리 아래
물소리를 듣는다
삶이 무엇이느뇨
물소리 듣는 일이다.
가을이다 17
플라타너스 한 잎 툭
이마에 떨어진다.
모르는 어딘가에서
잊혀진 가슴에
툭, 내가 떨어진다.
김삿갓
배 수 자
얼굴보다 큰 삿갓을 쓰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천하를 방랑한다
홍경래 난으로 조부를 욕되게 하여
과거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조선 시대 신분을 숨기며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어
물 따라 흘러간다.
가슴에 꾹꾹 다지고 담은
가족의 사랑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나오고 통곡을 하는
그리움이 따르지만
삿갓이 되었기에 속세 안에서
흘러만 간다
인생은 모두 나그네이기에
김삿갓은 나그네의 삶으로
오늘도 시를 읊으며 삼천리를
유랑하고 있다.
※문학박사, 수원 곡반초 수석교사, 제4회 나혜석 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 마음의 향기, 얼음새 꽃 소리, 사색의 오솔길, 시들지 않는 꽃, 수필집 만남의 심미학 등
옥계 폭포
김 창 유
충청북도 영동군 윌이산 등성이 아래
계곡 따라 구불구불 오름길
그를 따라 흐르는 계곡 물소리는
나를 따라오너라 어머니 목소리
난계 국악 상이 산어귀에서 맞아주고
여기는 속세를 멀리 떠난 선계?
수려한 산중에 누워있는 여인네 옥계폭포
용솟음치는 남정네가 아니라
비단 자락을 드리운 듯 다소곳이
다소곳이 품어내는 여인네 물줄기
높은 암벽과 울창한 숲속에
속세의 길흉 전설과
난계 선생의 전설을 품고 있는 박연폭포?
누천마을 잘도 지키고 있다.
우리는 가도 넌 영원히 터 잡고 누워
찾는 이들의 고된 인생에 안식처가 되어주길
※ 충남 서천 출생, 한국공무원문학협회 회원, 서양화가, 시집『아름다운 이름으로』, kcy42@hanmir.com
고마운 버스
현금 없는 버스에 올라
시장님이 만들어준 교통카드를 대니
“고맙습니다” 멘트가 나온다
고맙긴, 내가 고마운데
노약자석은 어르신 임산부에게
양보를 당부하고
안전사고 예방 위해 손잡이를 꼭 잡으라고
다른 사람 위해 통화도 자제를 부탁한다
이번 정류장은 어디, 다음 정류장은 어디
일일이 안내하고
정차하면 일어나시라고 끝까지 보살핀다
무료 환승 요금 할인도 안내한다
세상에 이렇게 보살피는 버스가 어디 있어
이런 효자가 또 어디 있냐고
이 고마운 세상
더 오래 살면 안 되나?
아, 서른여덟의 나이에
이 종 근
1.
서울 화동 23번지
정독도서관 입구
문패가 달랑 누웠다가
표지석 하나로 다시 섰다
성 학사의 잊힌 집터
아, 서른여덟의 나이에
곧은 붓이 꺾이고
젊은 눈이 슬프다
궁 가까이 놓인
대군의 검(劍) 자루 앞에서
일편단심의 궁지기로
도(刀)처럼 살았더이다
2.
표지석 위에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였다
외진 이들의 탐방이 꽉 차도록 읽어내는
아, 서른여덟의 나이에 발목이 잡히더이다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석사) 졸업.《미네르바》등단. 제1회《서귀포문학작품공모전(서귀포예총)》에서 당선하고, 제2회《박종철문학상(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최우수상, 제1회《부마민주항쟁문학창작공모전(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우수상, 제2회《국립임실호국원나라사랑시공모전(국립임실호국원)》최우수상, 2021년《제주문학관개관기념문예작품공모(제주문학관)》최우수상 등 다수의 창작 시(詩) 공모전에서 수상. 천안문화재단 <문화예술창작지원금> 수혜. 시집『광대, 청바지를 입다』,『도레미파솔라시도』, onekorea2001@naver.com
현충사
장군의 곧은 충절을 품은 신념이
이 길 따라 책으로 엮이고
세월 따라 읽히는 난중일기인 양
장군의 배가 기림의 날을 건너
대숲 바람 소리로 들어온다.
우직한 충정과 맹렬한 수호로
섬과 섬 사이
바다와 바다 사이를 누비던 통솔의 장검과
큰 파도인 양 물결치던 수군의 아우성이
격정의 솔바람 소리로 들려온다.
절개 넘치는 꽃물결과
용맹한 나무 빗장으로 호령하는
장군의 고고한 위엄이
일념통천(一念通天)의 거북선을 타고 들어와
하늘 아래 땅 위를 통틀어 구국을 일으킨다.
이곳, 현충사에서
고요히 들려오는 애끓는 피리 소리와
장군의 인품이 담긴 시 한 줄이
내 심장의 한가운데 그윽이 감격으로 아로새긴다.
옥정아, 세월이 약이라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 철이라
옥정아, 조선국은 철저한 신분 사회
호랑나비를 홀려
윤(昀)을 낳아 세자 했으면…
일차적 성공, 훗날은 세월이 약이라
네 정치력, 욕망 죄다
발을 내리고 정치를 듣는 대비이거늘
옥정아, 조선 중인의 해방일진대
파업이 올 수도 있다
친정을 못 간다고 했다
여학교 동창생끼리 친하게 어울려
1박 하는 여행을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조선국(朝鮮國)의 운명을 바라본
민자영이 그랬을 거다
이 씨네, 남편의 출근이나
어린 아들의 등교 준비로
으음 06:40∼08:40
십이간지, 진시(辰時)에 조간신문이 오면
가슴이 쿵쾅하고 손발에 우울증이 돋는
민자영이 그랬을 거다
-엄마, 미술 수업 있는데… 물감이
-여보, 양말 한 짝이… 도무지
-어마마마, 도첩(圖帖)과 색료가… 떨어져
-중전, 곤복(袞服)의 폐슬이… 보이질 않아
재황 씨와 척한테 더 잘 챙겨주고 싶었던
조선의 국모라는 슬픈 숙명
민자영이 그랬을 거다
나, 슬퍼도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
나, 손을 놓아도 소중히 기억해 주려는가
절구
이 영 순
절구 아가리
꿀꺽이며 빗물을 삼킨다
장구한 세월 속에
얼룩진 상처를 본다
절굿공이와 함께 주고받던
아낙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던 날
꽃처럼 피고 단풍처럼 물들던 시절의
이야기
보리 찧고, 떡도 찧고
매운 고추 마늘 갈던 날들
아낙들이 떠나버린 까닭일까
으슥한 헛간에서 먼지를 쓰고
뒤란 어느 구석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몇 남지 않은 빛바랜 절구들
아름드리 소나무로 쩌렁쩌렁 크다가
절구 되어 쿵덕거리며 가슴 찧더니
이젠 하나둘 사라져 간다
그렇게 한 시절 살고 밀려간다
뒷일은 맹랑한 것들에게 내어주며
바퀴벌레
바퀴벌레처럼 납작하게 긴다
핑크빛 점퍼에 낫처럼 굽은 허리로
갈 나들이 나왔다
헐떡이며 희비를 헤쳐오다 굽어진
핑크빛 등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지고
옛 궁궐의 돌계단을 비척이며 딛는다
꽃잎 다 떨어진 꽃 대공 허옇게 날려도
이렇게 걸을 수 있으니
우리는 라쿠카라차
꽃 대공에 꽃이 펴도
꽃 대공에 꽃이 져도
굉장한 생존본능의 전사들
카메라를 들다가 슬그머니 내릴 때
낙엽도 날아와
굽은 등을 토닥인다
※대전 출생, 월간《문학세계》신인문학상(2001), 시집 길은 어디에, 절하며 산다, 나비의 뼈,《백지》동인, 한밭문학 작품상(2022), ly110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