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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9~21(8)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2012. 2. 26
오늘 설교는 돈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어 볼까합니다. 흔히들 교회에서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을 터부시합니다. 특히 강대상에서 설교 내용으로 돈 이야기를 하면 극도의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닌가 짐작합니다.
1)돈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 때문입니다. 돈은 더러운 것이고 거룩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모든 불미스러운 문제를 유발하는 돈을 설교의 주제로 사용하는 것에 눈살을 찌푸리게 됩니다. 그러나 돈은 그 자체 성격으로는 중립적입니다. 돈은 좋은 것 일수도 있고 아주 나쁜 것일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돈을 관리하는 사람, 돈을 만지는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돈이 가진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처럼 나뉘어진다는 점입니다.
선하게 사용하면 한없이 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돈입니다. 반대로 악하게 사용하면 돈보다 더 사악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을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2)게다가 혹시라도 강대상에서 돈 이야기를 하면, 설교를 듣자 말자“헌금 거두는 위해서 설교하는 것”이라는 부정적 생각을 먼저 앞세우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와 일부의 목회자들이 돈 문제에 대해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신중하게 하는 목사님들 대부분은 돈 이야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설교에서 돈 문제를 거론하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가질 정도로 극도로 싫어합니다. 지금 덕민 교회도 그랬고, 예전에 제가 섬겼던 교회에서도 그랬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 때문에 예전에 제가 섬겼던 교회의 어떤 성도님은 저에게 “목사님은 돈 설교 안하니 좋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말을 듣고 나면 기분이 좋기 보다는 “내가 과연 내 기준에 따른 설교를 하기만 하고,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올바른 돈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가?”라는 고민을 한 적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에 대한 설교를 아예 안 하는 것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올바른 내용을 전달해 주는 것이 설교자로 올바른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풀어서 그 속에 담겨진 진리를 가르쳐야 할 직무를 가진 목회자가 본인의 판단에 따라 무턱대고 돈 설교, 물질 설교를 안 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설교자로 직무가 아닌가?>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목사는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연구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매우 자주 돈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천국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천국에 대한 것보다 지옥에 대한 것을 더 많이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옥 이야기>보다 더 많이 이야기 한 것이 바로 돈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돈 문제, 물질문제가 중요하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을 바꾸어 금주일 설교의 주제를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주제로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에 대한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타이밍도 좋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로 큰 돈을 모아야 할 일을 앞두고 돈을 다루는 설교를 했다면, “목사님이 돈 내라고 저 설교 하는구나”, 오해를 살 수 있지만, 지금은 우리 교회에서 헌금을 강요해야 하는 상황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편하게 설교하고 여러분들도 편하게 설교를 듣기 바랍니다.
저는 돈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 외에 돈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었습니다. 제가 읽은 책 중에서 좋은 내용의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책이 나온지는 조금 오래 되었습니다만 좋은 책입니다. 박현주씨가 쓴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김영사)”
한국 사람들은 속으로는 돈을 무지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양반 심리 때문에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현주씨는, 돈을 꽃이라는 파격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분의 표현은 이런 뜻입니다. “돈을 바르게 벌어서 바르게 쓰자”는 겁니다. 그러면 돈은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피어난다는 겁니다. 성경의 메시지와 맥을 같이 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죠.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 이 말은 ‘직업의 귀천이 없으니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잘 쓰자’는 뜻을 해석하면 아주 좋은 말이 됩니다.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이 말의 해석은 너무나 달라집니다.
개처럼 개걸스럽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버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큰일 납니다.
수단방법 안 가리고 돈 냄새를 맡고 개처럼 덤벼드는 모습이라면, 기독교인들은 극구 반대해야 합니다. 성도는 돈을 모으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돈을 벌어 나가는 방법의 정당성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개처럼 개걸스럽고 추잡하게 돈을 벌어서 개처럼 마구잡이로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못된 모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정도를 걷고 올바른 방법으로 정승처럼 돈을 벌어서 정승처럼 써야 합니다.‘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는 것’정말로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만 해도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도는 성도답게 돈을 벌어서 성도답게 돈을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답게 돈을 벌어서 성도답게 올바르게 돈을 쓰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1. 돈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돈을 잘 사용한다는 말은 돈의 가치를 잘 이용한다는 말입니다. 돈의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1만원자리 돈은 1만원의 가치답게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 중에 있는 예수님이 하신 돈 이야기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여기서 보물은 “금은보화”를 가리키는데, 단적으로 말하면 <돈>을 말합니다. 돈을 사용하지 않고 쌓아두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오늘처럼 돈을 맡길 수 있는 은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금속이나 돈을 자신만이 아는 땅 속에 숨겨두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신이 숨겨 놓은 장소를 잊어버리고 영영 찾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어떤 때는 잘못 파묻어서 은전이나 동전이 녹이 슬어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혹은 집에 보관해도 주택의 벽이 진흙으로 되어 있어서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얼음을 보관하는 어떤 냉동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건물이 다 타버리고 철근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불이 난 얼음 창고에는 불을 끄고도 남을 만한 양의 물이 있었지만, 얼음의 상태로 꽁꽁 얼어 있어서 거의 무용지물이었던 것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쓰지 않으면, 불용(不用)이면 아무런 가치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저축하지 말라고 무조건 다 사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의 수익 가운데 지혜롭게 저축도 해야 하고, 지혜롭게 사용하기도 해야 합니다. 사용하지 않고 무조건 저축하면서 돈만 쌓아 놓는 것은 지혜로운 모습이 아닙니다. 돈은 써야 가치가 발생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돈을 잘 써야합니다. 잘못 사용하는 오용(誤用)이 되면 오히려 해가 됩니다. 그리고 너무 지나치게 많이 쓰면, 남용(濫用)이 되고 남용하면 부도가 납니다. 잘 써야 합니다. 선하게 써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선용(善用)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선하게 사용한다는 내용이라서 돈이 가진 가치를 더 높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써 돈을 선용해야지 악용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벌 받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오용도 안 되고, 남용도 안 되고, 악용도 안 되고, 선용해야 합니다.
금세기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강철 왕 카네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부자로 죽고 싶지 않고 부자로 살고 싶다.” 정말 지혜로운 말이죠. 억만금을 가진 부자라고 하더라도 선하게 사용하지 아니하고, 그 많은 돈을 다 가지고 죽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아 가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을 하나님을 위해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물질에 대해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물질에 궁핍함을 느끼지 않는 모습으로 여유롭고 넉넉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름답게 사용하는 부자의 모습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돈을 잘 쓰는 모습일까요? 저는 세 가지 모습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누림의 원칙, 2)드림의 원칙, 3)나눔의 원칙’을 지키라고 말씀드립니다.
1)누림의 원칙 - 돈은 악마가 아닙니다. 돈은 하나님이 성도에게 잘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돈을 사용하여 누림을 위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전 6:2절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었어도 누리는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돈을 벌기만 할뿐 자신이 사용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슬픔입니다.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 형벌이 아니라, 벌은 돈을 올바르게 쓰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성도여러분.
제가 돈을 쓰면서 인생을 누리라고 말하니깐, “오늘 목사님이 왜 저러시나?, 왜 누리고 즐기는 것을 말씀하시나? 설교가 조금 이상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자신이 벌은 돈을 쓰고 즐기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대체로 궁핍한 생활을 하셨지만, 때때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고, 잔치 집에도 가신 적도 있었습니다. 누리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을 주시고, 그것으로 인생을 즐거움을 누리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그런고로 성실하게 번 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잘 사용하며 인생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다만 주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누리되 지혜롭게 누려야 합니다. 분수에 넘게 사치하거나, 너무 세상의 유행을 따라가며 세상 향락을 누리고 즐기는 것은 범죄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돈을 사용하는 것이 이웃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200만원 월급 받는 분 앞에서 ‘자신이 구입한 700만원짜리 샤넬 가방’을 자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무엇을 사든지 자유로운 대한민국이지만,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고 자랑하는 것은 성도의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좋게 말하면 자기자랑에 빠진 푼수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죄악입니다.(교회안에 이런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반대로 쓸 돈이 없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은 외적인 것에 울고 웃지만, 성도는 내적인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 모신 곳이 하늘나라임을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생활입니다.
2)드림의 원칙 –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을 누리고 즐기라고 물질의 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곳에서 성도들이 받는 물질의 복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돈은 분명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100% 몽땅 인생을 엔조이하고 즐기고 누리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가 가진 물질의 주인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드림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에게 내가 가진 물질을 드리는 것을 말하면, 마치 헌금하라는 돈 설교가 되기 때문에 오해해서 안 됩니다.
드림의 원칙에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물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모습으로 되돌려 드리는 물질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에게 되돌려 드려야 하느냐? 이 질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하는 헌신과 헌금의 모습이 각자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지고 누리는 것에만 촛점을맞추지 말고, 하나님에게 되돌려 드려야 하는 물질도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3)나눔의 원칙 – 내가 가진 물질은 내 것입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내 주변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보고, 그 어려움을 보살피면서 다가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돈을 값어치 있게 사용하는 <나눔의 원칙>입니다.
이 나눔은 요즈음 자주 등장하는 <기부>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많이 가졌다고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의 일부, 적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누는 것에서 더 큰 사랑의 모습이 만들어 집니다.
히 13:16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하는 것과 재물을 나누는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지만, 구제하고 나누는 일도 예배라는 말씀합니다.
잠 19:17 보면 심지어 이런 표현까지 나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서 나누어 주고 베풀어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꾸어 드리는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채권과 채무 관계가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돈을 받을 권리가 있는 채권자의 모습, 얼마나 당당합니까? 반대로 돈을 갚아야 하는 의무가 있는 채무자는 기죽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채권 채무 관계에서 내가 큰 소리 치는 채권자가 되고, 하나님이 채무자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오만방자한 내용이라 말할 수 있죠.
바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 나누는 것이 하나님에게 꾸어 주는 것이라 말합니다. 나누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후히 보상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강조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올바른 돈을 사용하는 방법을 깨닫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드림과 나눔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가리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내가 벌은 돈으로 인생을 누리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질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합니다. 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돈이 궁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니라, 돈을 통해 “마음”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시죠.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말씀대로 돈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깁니다. 그래서 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헌금을 통해 그 사람의 신앙과 마음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물질에 인색한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도 이런 신앙을 가르쳐 주십시오. 재산 물려주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입니다. 물려주는 재산은 언제든지 날라가 버릴 수 있지만, 물려주는 신앙의 법칙은 사라지지 않고, 자녀들에게 더 큰 축복을 불러오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무디신학교 학장 조지 스위팅(George Sweeting)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장차 마지막 날 ‘너는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드렸는가?’ ‘얼마나 많이 나눴는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다 사라집니다. 돈도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늘에 쌓은 보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시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