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주체에 해당하는 산냐[인식자]에 대한 가르침을 오온설법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선정과 직결시켜서 산냐를 아주 중요하게 다시 거론하신다.
뽓타빠다여,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서 다섯 가지 장애가 제거되었음을 관찰할 때 환희가 생겨난다.
환희로운 자에게는 희열이 생긴다. 희열을 느끼는 자의 몸은 경안(輕安)하다. 몸이 경안한 자는 행복을 느낀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그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림에서 생겼으며,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러면 이전에 있었던 그의 감각적 욕망의 산냐는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를 가진 자(者)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산냐는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공부지음에 의해서 사라진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뽓타빠다여, 다시 비구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이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무른다.
그러면 이전에 있었던 떨쳐버림에서 생겼으며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는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를 가진 자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산냐는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공부지음에 의해서 사라진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뽓타빠다여, 다시 비구는 희열이 바래었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사띠-삼빠쟈나하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온하고 사띠하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러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는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평온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평온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를 가진 자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산냐는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공부지음에 의해서 사라진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뽓타빠다여, 다시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사띠가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무른다.
그러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평온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는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미묘하고 참된 산냐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미묘하고 참된 산냐를 가진 자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산냐는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공부지음에 의해서 사라진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 중략 -
"뽓타빠다여, 비구는 여기서 초선의 경지에서 고유한 산냐를 가진 자가 되는데 그때 그는 그 경지로부터 다시 제2선이라는 다른 경지로, 다시 제3선이라는 다른 경지로 이렇게 점차적으로 산냐의 구경(究竟)을 체험하게 된다. 이제 그가 산냐의 구경에 서 있을 때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나쁘다.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만일 내가 의도하고 계속적으로 형성해 나가면 이런 나의 산냐는 소멸하고 다른 거친 산냐가 생겨날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나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 않으리라.'라고.
그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 않는다.
그가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산냐는 소멸하고 다른 거친 산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소멸을 체험한다.
"뽓타빠다여, 이와 같이 알아차리는 산냐가 차례대로 소멸하는 증득(等至)이 있다.
"뽓타빠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이전에 알아차리는 산냐가 차례대로 소멸하는 증득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이 설하신 것을 이와 같이 잘 알겠습니다.
'뽓타빠다여, 비구는 이처럼 여기서 고유한 산냐를 가진 자가 되는데 그때 그는 어떠한 경지로부터 다시 다른 경지로, 이렇게 점차적으로 산냐의 구경을 체험하게 된다. 이제 그가 산냐의 구경에 서 있을 때에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나쁘다.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만일 내가 의도하고 계속적으로 형성해 나가면 이런 나의 산냐는 소멸하고 다른 거친 산냐가 생겨날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나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 않으리라.'라고. 그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 않는다. 그가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산냐는 소멸하고 다른 거친 산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소멸을 체험한다. 뽓타빠다여, 이와 같이 알아차리는 산냐가 차례대로 소멸하는 증득(等至)이 있다.'라고."
"그러하다, 뽓타빠다여."
"세존이시여, 그러면 세존께서는 산냐의 구경이 하나라고 천명하십니까?"
"뽓타빠다여, 나는 산냐의 구경은 하나라고도 천명하고, 개별적인 산냐의 구경들도 천명한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산냐의 구경은 하나라고도 천명하고 개별적인 산냐의 구경들도 천명하십니까?"
"뽓타빠다여, 소멸을 체험할 때마다 나는 산냐의 구경을 천명한다. 이와 같이 나는 산냐의 구경은 하나라고도 천명하고 개별적인 산냐의 구경들도 천명한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먼저 산냐가 생기고 그 다음에 지혜가 생깁니까, 아니면 먼저 지혜가 생기고 산냐가 생깁니까, 혹은 산냐와 지혜가 전도 후도 없이 생깁니까?"
"뽓타빠다여, 산냐가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지혜가 생긴다. 그러나 산냐가 생기면 지혜도 반드시 생긴다.
그는 그와 같이 꿰뚫어 안다. '참으로 이것에 조건 지워져 나의 지혜는 생긴다.'라고.
"뽓타빠다여, 이런 방식을 통해서 '산냐가 먼저 생기고 다음에 지혜가 생긴다. 그러나 산냐가 생기면 지혜도 반드시 생긴다.'라고 알아야 한다."
뽓타빠다 경 『디가니까야 제1권』각묵스님(2007) 초기불전연구원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 선정(禪定)에 따른 미묘하고 참된 산냐의 발생 및 등장과 소멸을 말씀하시고, 산냐의 생멸(生滅)과 산냐의 구경(究竟)을 말씀하신다. 그러자 뽓타빠다 바라문은 이러한 산냐가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자아(自我)하고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부처님께 묻는다.
- 전략 -
"세존이시여, 그러면 산냐가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산냐와 자아는 서로 다른 것입니까?"
"뽓타빠다여, 그런데 그대는 무엇을 두고 자아라고 이해하고 있는가?"
"세존이시여, 거칠고 물질로 되었고 네 가지 근본 물질(四大)로 이루어졌고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을 자아라고 이해합니다."
"뽓타빠다여, 그대가 거칠고 물질로 되었고 네 가지 근본 물질로 이루어졌고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을 자아라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참으로 그대에게 산냐와 자아는 다를 것이다.
"뽓타빠다여, 그런 방식에 의한다면 산냐와 자아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나니, 거칠고 물질로 되었고 네 가지 근본 물질로 이루어졌고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고 사는 자아가 머물러 있는데도 이 사람에게는 그것과 다른 산냐가 생기고 그것과는 다른 산냐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뽓타빠다여, 그러므로 이런 방식으로는 '산냐와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되고 만다.'라고 알아야 한다,“
중략 -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저는 산냐가 인간의 자아인지, 아니면 산냐와 자아는 서로 다른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까?"
"뽓타빠다여, 그대와 같이 다른 견해를 가졌고, 다른 (가르침을) 좋아하고, 다른 수행을 추구하고, 다른 스승을 따르는 자는 참으로 산냐가 인간의 자아인지, 아니면 산냐와 자아는 서로 다른 것인지 알기 어렵다."
- 후략 -
뽓타빠다 경 『디가니까야 제1권』각묵스님(2007) 초기불전연구원
이 문답의 결론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수행 체계를 따라서 실천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산냐’가 ‘나’와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산냐란 부처님께서 도입(導入)하신 불교 고유(固有)의 용어로 실천 수행자들이 경험적으로 체득하는 것이어서 이론적 접근으로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한글역 니까야가 나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금강법기사에서는 금강경에 등장하는 네 가지 상[사상(四相) : 我相, 人相, 衆生相, 生命相]이 중생의 주체(主體)라고 가르쳤다. 이들 네 가지 주체 중에 아상(我相)이 주된 상이고 나머지 셋은 파생상(派生相)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중생에게는 이런 중생의 주체 말고 또 다른 주체가 하나 더 있다고 가르쳤다.
이 주체 법문을 듣고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다시 한글역 니까야가 나오고도 한참 후에 필자는 산스크릿트어 대조(對照) 한글역 금강경을 보다가 상(相)으로 한역(漢譯)한 단어가 산스크릿트어로는 Saṃjñā(삼즈냐)이고, 팔리어로는 saññā(산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필자는 부처님께서도 법기 대아라한 스님과 같은 내용과 수행의 주체 법문, 즉 산냐 관련 법문을 하셨는지 니까야를 찾아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