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블랙커피
연영흠
내가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날이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지만, 대학에 입학한 뒤에 과모임 때가 아닌가 싶다. 그 무렵에는 손님이 오셨다고 커피를 내오는 집이 거의 없을 때이니 아마 처음으로 마신 커피도 다방 커피일 것이다.
처음 마신 커피는……, 그때는 커피향이 좋은지도 몰랐고, 그저 쓰기만 했다. 그래서 설탕을 서너 스푼을 더 넣었는데 이번에는 달기만 했다. 그 이후 다방에 가면 밀크를 달라고 했다. 지금은 다방의 차림표에 밀크가 없는 듯한데, 그 무렵에는 우유를 냉장고에서 차게 한 듯한 ‘밀크’라는 메뉴가 있었다. 찻값은 커피보다 약간 비쌌지만 그게 더 몸에 좋을 듯해서이다. 그 무렵 어느 선배가 설탕이 몸에 좋지 않다면서 자기는 커피를 블랙으로 마신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대학 신입생 1학기 때 과대표가 교대 여학생들과 미팅을 주선했다. 서로 상견례를 하고 파트너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로 상대를 정한 뒤에 개인적으로 만나는 형식이었다.
춘천 어느 다방에서 첫 미팅을 하는 날, 그녀와 나는 커피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커피를 놓고 가자 그녀가 설탕과 프림을 얼마나 넣을지 물었다. 묻지 않았다면 내가 알아서 탔을 텐데, 그녀의 호의를 받으면서 문득 커피를 블랙으로 마신다던 그 선배가 떠올라서 블랙으로 마시겠다고 했다. 블랙으로 마시면 멋있게 보일 듯하고, 모처럼 순수한 커피 맛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블랙커피를 마시는 순간……. 그렇게 맛이 없는 음료수는 처음이었다. 한약은 그래도 구수한 맛이라도 나는데, 이건 그냥 쓰디쓸 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나는 어떤 음식이던지 남기지 않는 성향이다. 비장한 각오로 커피 잔을 비웠는데, 아마 내 마음이 표정에 나타났을 것이다.
한 시간 동안 그녀와 만나는 동안 별다른 실수는 없었고, 서로 좋은 낯으로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애프터는 없이 그렇게 우리 인연은 끝났다. 그녀가 설렐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은 것도 아니었다. 이성친구로는 나무랄 데 없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여고시절에 국어를 좋아했다면서 국어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학비 부담과 가정 형편을 생각해서 교대를 선택했다고 한다. 2년만 다니면(그때는 교대가 2년제) 교사가 될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고도 했다. 나도 선생님들 중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인 여선생님이 가장 인상에 남는데, 그래서인지 여교사에 대한 인식이 좋다고 했다. 인사치레가 아니고 솔직한 마음이었다.
문제는 대화하는 내내 내 표정이 어두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쓰디쓴 커피를 마시려니 속도 울렁거리는 듯하고, 혹시 입에서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엽차도 두어 잔 마신 듯하다. 어쩌면 그녀는 내 표정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이후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지금까지 블랙커피를 마신 적이 한 번도 없다. 교사가 된 이후 동료들과 회식을 할 때 여교사들과 술잔을 따라주기도 했는데, 내가 잔을 부을 때는 술을 사양하는 이에게는 성별과 관계없이 억지로 권한 적이 없다. 음료수나 물로 대신했는데……. 아마 처음으로 마신 블랙커피의 쓴맛을 떠올리고 남이 싫어하는 것을 권하지 말자, 라는 생각이 작용했던 듯하다. 그때는 남녀 교직원들이 서로 술잔을 권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동료 여교사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술자리 매너는 좋다는 평을 들었던 듯한데, 가장 큰 이유는 원하지 않는 이에게는 술을 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잔의 블랙커피! 비록 첫 미팅의 파트너에게는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 뒤에 만난 여교사들을 포함한 동료들에게는 매너를 지키는데 도움이 된 셈이다. 어디 커피뿐일까? 찻잔이건 술잔이건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은 권하지 말자는 삶의 교훈을 얻었으니 결과적으로 내게 도움을 준 한 잔의 인연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