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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6장1-5절 2차선교여행01 디모데 만남 240926 원주희목사
2024.09.26 목 오전 8:32 ・ 17분 0초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바울은 15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났던 모든 회의 결과들을 이제 서로 치게 되었습니다.
지침이 주어진 겁니다. 적절한 지침을 교회가 순종하기로 결의합니다.
그래서 더베와 루스드라이 났는데 거기 누구로만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디모데를 만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믿는 유자의 여자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디모데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고, 아버지는 아마 해당 주변에 경건한 사람들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랬는데 디모데전서 이렇게 보면은 외조모, 그다음에 어머니 이렇게 믿음의 계보를 이렇게 얘기한 걸로 봐서는 외가 쪽의 믿음의 영향력 안에서 디모데가 신앙의 사람이 되었던 것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나서 디모데를 사도바울이 제자를 삼습니다.
그것도 a 제자를 삼습니다. 사도바울의 a 제자가 디모데 d로 브리스길남 이렇게 쭉 나갑니다.
근데 가장 가까이 두는 제자 마지막 서신을 쓸 때 그의 마음과 그의 기름부음을 온전히 나누고 싶은 그런 제자가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 사도를 너무 사랑했고 존경했고 따라갔기 때문에 마지막 바울 사도가 임종에 같이 앉고 싶었지 나는 못했어요.
마지막에는 그의 무덤이 바울 사도의 무덤 바로 밑에다가 자기의 무덤을 삼아서 마치 영혼의 아버지 곁에 묻히기 원하는 그러한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그게 디모데입니다. 좋은 만남은 바울도 유익하고 디모데에게도 유익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안에서 그런 만남들이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젊은 날 멘토들을 하나님이 저에게 붙여주실 때 멘토들 속에서 인간적인 연약함들을 드러드보곤 했습니다.
우리를 욕심의 대상으로 보기도 했고, 그래서 본인이 넘어진 분도 있고 근데 그때는 참 그게 비판의 모습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이제 그분들의 나이가 내가 되고 보니까 그분들의 심정이 이해가 돼요.
그리고 나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들을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도 디모데 같은 제자들을 붙여주시고 그리고 바울과 같이 좋은 영혼의 아버지가 되어주고 어머니가 되어주는 축복이 함께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아비의 마음이 정말 필요합니다.
아비의 마음이 정말 필요합니다. 거룩함 안에서 영혼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젊을 때 얼마나 비판 의식이 강합니까? 그리고 그냥 자기가 정한 이상적인 틀 안에서 스승들 또 윗사람들 이렇게 넣어보고서 막 비난하기도 참 쉽습니다.
근데 실제로 그 나이가 돼서 그 인생을 살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을 여러분 목회를 하면서도 그렇게 많지 않아요.
많지 않은데 이제는 우리가 그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나이의 때예요.
하나님 안에서 좋은 멘토, 좋은 사람들을 길러내는 축복과 은혜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기를 소망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정말 영혼을 세워가는 그런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바울 사도는 베베와 루스드라에서 루스드라에서 병자가 치유돼서 못 걷는 사람이 나왔던 이적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디모데를 만났고, 그 디모데는 그의 어머니 외조모 믿음의 계보를 이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그의 제자로 삼아서 영혼의 아버지가 되어서 디모데를 그렇게 길러냅니다.
한 사람 길러놓았더니 이 디모데가 나중에 에베소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 바울이 섬겼던 세웠던 교회를 그렇게 하나님답게 섬겨내는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근데 이 디모데에게 사도바울이 한 시전에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 였어요.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사도바울은 할례에 대해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에요.
할례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디모데는 어머니는 아마 할 일을 하길 원하겠지만은 그의 아버지는 그걸 왜 해 이렇게 말했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심지어 예수도 안 믿는 분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 해 8일째 만에 유대인들은 난 지 8일째 하는 건데 그걸 지금까지 안 한 겁니다.
근데 이것을 그를 데려다가 뭘 했다 지금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사도바울은 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느냐 유엔성입니다.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고 또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니 너는 할례를 받는 게 좋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할례를 받았으니 유대인처럼 되어 줄 수 있고, 이방인들은 할례를 하고 안 하고는 그거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굳이 다른 사람에게 할례를 행해라.
이방인 중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할례를 받으라 하지 않았지만 디모데에게는 유대인의 권리, 유대인의 소속감을 가지기를 그렇게 권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우리가 조직 교회 안에 있으면서 조직 안에서 원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대구에 있는 박진미 선교사한테 내가 신학을 해라 이렇게 권했고 주변의 분들도 대부분 다 신학을 해라 그랬는데, 선교사님들이 신학해라 하는 데는 외국에 가서 그냥 그냥 온라인으로라도 해라 이렇게 얘기했는데 저는 통합적 신학을 제대로 해라 3년 고생한다 생각하고 해봐라 그랬습니다.
교육청에서 하면서 그냥 하는 것 아니고 교육청사 하면서 이렇게 한번 교회도 생겨보고 해봐라 그랬는데 글쎄요.
얼마나 순종할지요? 근데 조지 교회 안에서 통과 은혜 같은 거 디모데에게는 지금 할례를 행하는 것이 통과 은혜입니다.
의식을 치러야 라이센스 함께 일할 수 있는 오해를 사지 않을 수 있는 굳이 설명하고 배경을 설명하고 이래야 되는 그런 것들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에게는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사역의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 디모데 너는 할례를 받는 게 좋겠다 했습니다.
유연성입니다. 근데 다른 사람에게는 굳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사람들 중에 선교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은 머리 깎기 앵거리아에 가서 머리를 깎고 나 시신의 규정을 따라서 머리를 깎어라 안 깎아라 이런 것들을 권합니다.
이방인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나시리의 규정들을 지키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중에 예수 믿고 그들이 주님의 일에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헌신한 기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징표로 머리 깎으라.
그래서 이발소 가서 머리 깎고 그걸 이제 공개적으로 하면서 유대인으로서 주의 일에 헌신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그런 징표를 그에게 주게 합니다.
이게 조직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배려이고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한 사도바울의 결단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요. 여러 성으로 단역할 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귤에 우상의 멍맹이 주는 것, 피 이런 거 음행 뭐 이런 거 멀리하라고 하는 규정들을 주어서 그들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함께 식탁에 교제하면서 예배하러 모였을 때 서로 서로가 서로에게 오해가 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용납되어질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복음 아래 그들을 굳게 했더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같이 시작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아멘 이 말씀의 축복이 우리 교회 가운데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의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쓸데없는 것으로 정말 PT끼 논쟁해야 될 제목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PT끼 싸워야 될 제목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이 진리에 관한 것도 아니고 문화에 관한 것들 때문에 온갖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나면 그만 교회가 정말 써야 될 에너지를 잃어버리게 돼요.
사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들이 있습니다.
그게 스콜라주의라고 합니다. 스쿨라주의 스콜라주의는 초대 기독교 스콜라주의와 중세 스콜라주의와 개신교 스콜라주의로 3개의 시대로 나누어집니다.
초대교회에서 콜라주의 시대는 사도들의 시대와 속사도 시대가 교부 시대쯤 되면 치열한 논쟁을 하면서 기독교 전경을 채택하고 성경이 뭐냐 그 전경이 뭐냐 이런 것들을 채택하는 데서 피틱 이런 논쟁을 합니다.
교리 논쟁입니다. 교리 논쟁하면서 유대주의, 율법주의를 걷어내고 그다음에 헬라주의 영주주의를 걷어내는 그런 성과가 있었습니다.
근데 그 성과 이면에는 복음에 그러면서 복음의 동력을 상실해버려요.
그게 초대해서 콜라주의입니다. 그리고 중세로 가면요.
기독교 신학을 헬라 철학과 다 짝을 맞춰가지고 생활의 규범과 삶의 규범을 낮춰가면서 중세 스콜라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엄청난 교리는 저하고 교리 논쟁 중에서 이제 동방정교회와 서방 기독교 로만 캐톨릭과 동방정교회로 갈라집니다.
동방주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 터키가 멸망을 당하니까 그들이 쫓겨 올라가서 그리스도교에 올라가서 저 위쪽은 러시아 종교가 됩니다.
그리고 쫓겨난 사람들이 레스토리스파가 돼서 저 당나라까지 흘러들어오면서 중세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렇게 교리 논쟁이 치열했습니다.
근데 치열한 교리 논쟁 안에서 필연적으로 뭘 잃어버리느냐 복음의 열정을 잃어버립니다.
에너지를 거기다 다 쓰고 그리고 영성을 잃어버리게 그게 중세교회의 뼈아픈 실체들입니다.
개신교 스쿨라주의 개신교 로마 테드에 벗어나서 칼빈과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고 그들이 개혁한 그들이 또 치열한 논쟁을 합니다.
성만찰이 화재설이 맞냐 영적 임재가 맞냐 공제설이 맞냐 이런 치열한 논쟁을 하고 자기들끼리 다툼이 일어납니다.
현빈파에서 침례교 마 토마스 민즈의 침례교 세력들을 굉장히 많이 죽였어요.
종교 안에서 신교와 구교 사이에서 갈등도 많았지만 신교 사이에도 갈등이 되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통 정리가 되는데 꽤 오랜 시간은 걸려요.
그게 개신교 스콜라주의 시대입니다.
그러면서 장로교단 내에서 내에서 예정서를 중심으로 한 갤빈주의 교리가 만들어지고 막 그렇게 교위가 형성이 되는데 이 개신교 장로교 내에서도 치열하게 싸워요.
그래서 저는 신학교 다니기 전에 알미니우스와 캘빈주의의 배자가 알미니우스는 웨슬리의 제자이고 패자는 캘킨의 제자인데 서로 다른 제자들이 막 싸운 줄 알았습니다.
아니요. 둘 다 캘빈의 수제자들입니다. 둘 다 캘빈의 수제자들인데, 알미니우스가 주장하는 해석하는 켈빈과 베자가 해석하는 캘빈의 주의가 다른 거예요.
둘이 치열하게 캘빈주의 내에서 싸운 게 그 예정설 논쟁입니다.
이게 그런 스콜라주의 시대 때 복음에 대한 열정보다 문화와 교리를 지키는 데 그냥 온 에너지를 다 쓰다가 유럽에서 그냥 꼴딱 망할 뻔했습니다.
근데 이 미국 신세계가 열리면서 미국 선교가 시작되면서 개신교는 해외로 뻗어나가서 아프리카와 그다음에 미국과 그리고 이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개신교 시대를 새롭게 형성해 낸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논쟁을 가볍게 끝냈습니다. 회의 하나 잘했더니 회의 하나 잘한 것이 복음과 문화에 대해서 명확한 결론을 내려서 초대교회 엄청난 스콜라주의 시대가 될 뻔한 것들을 가볍게 정리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마해지고 굳건하여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우리 내남조가 이 은혜 안에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엉뚱한 논쟁과 엉뚱한 씨름하느라고 정말 영혼 붙들고 씨름할 수 있는 그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아니하고, 교회가 주어진 정확한 지침 안에서 복음과 문화를 정리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교회에 많은 복된 전통을 살려내면서 이 교회가 갈 길을 찾아내고, 그리하여 이네난 땅에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더 날마다 더하여지는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사도바울이 더비 원수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난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 부족한 저희들에게도 디모데 같은 제자들을 붙여주시겠습니까?
그러면 바울, 사도 같이 그렇게 사람을 길러내는 사람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주의 영광으로 함께해 주시옵소서 우리 몸된 교회가 복음과 문화에 대해서 명확한 구분이 있게 하시고 진리는 지켜 나가되 문화에 대한 유연성을 가져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풀어내며 날마다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는 그러한 죄로 주장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행16장6-18절 2차선교여행02 인도하심을 받으라 240927 원주희목사
2024.09.27 금 오후 4:30 ・ 12분 27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서 주님을 섬겨가면서 주님과 동역한다.
동력한다. 우리가 고백해요. 주님과 동역하기 전에 먼저 해야 될 게 있는데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몸으로 배운 사람들은 동력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동행할 때는 주로 내 인생 문제, 내 삶의 문제들 속에 주님이 앞서갈 때도 있고 내가 좀 뒤처질 때도 있지만은 때로는 우리 의욕이 너무 앞서가지고 또 이게 내일이다 보니까 절박함이 있어서 주님보다 또 내가 또 앞서 갈 때도 있고 그럴 때 주님이 날 쫓아오시는 그런 시간을 지나갈 때도 있고 우리 속에 있는 연약함 이런 것들 때문에 세상으로 막 도망가버릴 때도 있고 그럴 때마다 또 찾아오시고 또 다가오시고 또 넘어지고 깨어지기도 하면서 주님과 함께 걷는 법을 배워갑니다.
할렐루야 주님과 함께 걷는 법을 배워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럴 때는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혹독하게 다루니까 그렇게 부여하신 온 세상 만물을 지으신 분이 그렇게 가난하기도 하시고 그렇게 절박하게도 하시고 근데 만물의 찌꺼기같이 여겨지는 그런 시간도 지나가요.
그래서 하나님이 되게 작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을 쫀쫀하게 여겨집니다.
근데요. 보세요. 내 뒤에 누가 계시느냐 주님이 계십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계세요. 그래서 숲길을 걸어가는데 어린아이가 이렇게 걸어갑니다.
그에 실려서 막 걸어가는데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그 어린아이 뒤쪽에 있는 부모가 확 튀어나오는 것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여정을 걸어갈 때 위기 상황을 닥치면 하나님이 확 튀어나오십니다.
확 튀어나오 이러십니다. 그렇게 동행을 배워요.
동행을 배워지면 그다음부터는요. 주님이 이것도 하라고 시킬 때도 있고 저것도 하라고 시킬 때도 있고 이것에 감동을 주기도 하고 저것에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그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주님과 동역하는 동행할 뿐 아니라 동력하는 하나님과 함께 걸으면서 주님과 동력하고 그렇게 주를 섬겨가는 그리고 영혼을 세워가는 은혜의 여정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복이 우리와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바울은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1차 선교 여행을 끝내고 2차 선교 여행을 가는데 2차 선교여행 초반 때는 1차 선교여행에 갔던 지역을 다시 돌아보면서 그렇게 사람들을 세워 갑니다.
그래서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서 하나님의 종을 세워가는 그 여정을 얼마나 기뻤겠어요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래서 계속해서 사도바울이 아시아 지역에 아시아 지역에 1차 선교 여행 때 다녔던 그 지역들을 다시 차근차근 되밟으면서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풀어가게 하시려고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무엇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지라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랬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또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서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여기가 아닌가요?
하면서 딴 데를 짚어봅니다. 단에 가서 또 무시아 앞에 이르러서 비드오니아로 가야 되겠다라고 애를 쓰는데 예수의 영이 허락치 않은지라 이랬어요.
이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마다 루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꿈으로 인도 안 받습니다. 어떤 사람 환상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읽고 큐티하다가 묵상 중에 주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감동됩니다. 어떤 사냥할 때 마음이 찡 울리면서 이거구나 깨닫습니다.
근데 그 공통적인 인도함은 따라 합시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십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가장 공통적인 사이는 예수님 안에 머물게 하시는 것 그래서 주님 아래 머무를 때 주시는 평강 감사 기쁨 이것이 내 안에 가득해지고 거룩함 가운데 이렇게 세워지는 여정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또 정말 물리적으로 어떤 공간이나 어떤 직장이나 누구를 만난다든지 그런 그런 바깥으로 드러나는 일들에 대한 인도하심은 인도하심은 그다음 영역인 겁니다.
이게 기반이 되고 나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배우게 됩니다.
할렐루야 주의 영의 인도하심을 배워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하고 그다음 이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니까 또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계속 지금 헤매고 다니고 있는 겁니다.
그냥 여기 가도 열매가 저기 가도 열매 가고 그래 밤에 기도하고 몸부림을 치는데 들어와의 이성을 쓸 때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환상이 보이기를 마귀로의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귀에 대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관상을 봅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아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줄 저쪽으로 부르시는구나 하면서 마귀에 대한 시방으로 넘어가서 주님의 영의 복음을 풀어내는 그 사이 갑니다.
그리고 이 마귀는 네 저에 직행하해서 배 타고 가야 되니까 그냥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꽤 문제가 있죠.
배를 타고 가는 걸음들을 따라서 이렇게 갔더니 빌립보에 이르러서 그 속에서 복음을 풀어내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영이 인도함 받는 것에 관해서 좀 나누려고 합니다.
음성을 들을 수도 있고 관상을 볼 수도 있고 다 할 수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엔크라이스도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게 하시는 겁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곳에 인도함 받아야 된다.
그리고 그 직장을 어디로 한다 남편 가이 누구다 이런 것에 인도하심들은요.
반드시 해야 될 것입니다. 사인을 구하십시오. 할렐루야 이것이 저에게 인도하심이면 사인을 구하십시오.
인도함 받아서 그 사람 만나서 이 하나님 외쳐준 짝이다.
그래서 인도 안 받아서 이곳이 하나님 내게 허락한 직장이다 이런 거 그렇게 받아도요.
그 역시 짊어져야 될 몫이 있고 하나님하고 싸워야 될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진실하게 이렇게 승리해 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영적 권위자를 통해서 인도함을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때는 반드시 따라서 분별해야 합니다. 영적 권위자도 그 인도함 받을 때 나름 예언이다 또는 원면이다 이렇게 해줄 수 있는데, 사람의 눈은 늘 그게 있습니다.
사무엘 사무엘 선지자 하나님 당대에 얼마나 큰 선지자입니까?
그 선지자도 2세의 아들 등에 기름부음할 때 엘리아을 만났더니 야 하나님이 택한 자가 이 야구나 하면서 기름 부으려고 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사람의 눈은 너무 다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 있고 자기 나름의 보기에 이 친구면 되겠구만 하는 그런 마음이었던 겁니다.
근데 주님이 그를 버렸다 이랬어요. 그래서 주님의 영에 인도하심은 늘 분별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에 상향이 이렇게 맺혀진 것에 따라서 내 눈에 좋은 것들을 먼저 취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그것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것을 배워가고 그 속에서 남은 인생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내 남자에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주의 백성들이 받고 그 인도하심에 따라서 한 걸음 한 걸음 주와 함께 걸어가는 여정을 걸어가고 그 속에서 내 인생도 열매 맺고 교회도 열매 맺는 그 은혜의 역사가 다시 한 번 더 풀어지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이 새벽 우리가 더 주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여서 저희를 이 내남 제일교회에 성지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길을 내시고 길을 펼치시고 열어가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이곳에서 주를 섬기면서 넘어서야 될 산들, 헤쳐가야 될 문제들, 섬겨야 될 영혼들 속에서 또한 빌립보 땅에 교회가 세워지듯이 우리 교회도 이 건물뿐 아니라 정말 영혼을 깊이 세우는 그러한 교회로 하나님 세워지게 주장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운행하는 교회로 하나님 주장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이끌어주시길 원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행16장12-34절 2차선교여행03 만남의 축복 240928 원주희목사
2024.09.28 토 오전 6:31 ・ 23분 29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빌립보에서 교회가 형성되는 여정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빌립보로 바울과 신라를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영의 인도함 받아서 그곳에 갔는데 문제는 갔다고 해서 바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런 기반이 없었다는 겁니다.
빌립보는 신학공에 해당이 없었습니다. 회당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회당에 가면 복음의 접촉점이 가장 강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헬라 세계에 대해서 눈이 열려서 복음이 꼭 유대인만 향한 것이냐, 모든 이방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특별히 유대인인데, 남편이 헬라인이건 이제 거꾸로 본인이 유대인인데 아내가 헬라인이든지 해서 이방 결혼한 사람들이 함께 주를 섬겨 예배하는데 예배하면서 유대인인 그는 회당 안에서 예배하고 남편은 바깥에 세워놓고 경건한 자가 되어 버리는 너무 미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복음이 헬라의 일에는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다윗의 나라는 그렇게 눈에 보이게 다윗의 통치를 가져오고 유대인의 해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역사이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가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인류의 모든 죄과를 사셨다.
이 진리가 누구한테 가장 먹혀들겠습니까? 회당에 모이는데 특별히 이방 결혼을 해서 지금 국제적이 된 사람들에게 가장 먹혀드는 얘기인 거.
인간적으로도 복음에 가장 접촉성이 강한 사람들이 회당에 있습니다.
핍박 좀 받아도 돌로 좀 맞고 막 핍박을 좀 받기도 해도 회당에 가면 전도에 확실한 자원이 거기 있습니다.
근데 빌립보는 해당이 없었습니다. 복음에 접촉성이 없고 맨 땅에 지금 헤딩을 해야 되는 상황이에요.
이 성에서 수의를 위했습니다. 빌립보에서 그리고 안식일이 되었을 때 사도바울과 신라 그들도 하나님을 예배할 곳이 없으니까 회당이 없으니 어디 가서 기도할까 하다가 조용한 데 찾아간다고 한 게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보니까 그런 그늘에 서늘한데 이렇게 저렇게 여자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루디아시에 두아디라시에 있는 자식 물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만난 겁 루디아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만났는데 자생 물감 장사 이 코발트가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이 자식 물감은 그 당시 왕과 귀족들이 주로 입는 옷이고, 이 당시에는 신분에 따라서 입는 옷의 색깔이 달랐습니다.
평민들이 입는 옷이 있고 귀족이 입는 옷이 있는데, 자색 옷은 왕이나 귀족이 입는 옷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는 조롱한다고 입힌 옷이 뭡니까?
자신의 옷을 입힌 겁니다. 왕과 귀족이 니가 유대인의 왕이라며 하미바바바바바, 쪼다 같은 게 이게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혀서 희롱하려고 그렇게 옷을 입혔던 겁니다.
근데 아마도 해진 옷이겠죠. 이 두아디라 성에 있는 자식 물감 장사 루디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데 이 사람도 해당이 없으니까 안식일날 자기 혼자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니 마땅한 예배 장소가 없을까 해서 물가에 나왔다가 바울과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상함에도 고비고비마다 만남의 축복을 주십니다.
할렐루야 만남의 축복을 주십니다.
루디아를 만나는 것은 자연스럽게 기도하러 가다가 그런 사모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과 만남이었고, 그 말씀을 그에게 나눌 때에 주님이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이랬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그의 영혼에 들어가는데 아무 거침통이 없는 그런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이 빌립보에서 또 하나의 만남이 축복이니 그와 그 집이 온 집안이 세례를 받고 유디아가 빌립보에 처음 구원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바울사 거처를 옮겨서 루디아의 집에 머물면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기도하는 곳에 기도할 만한 장소에 늘 나가서 그렇게 기도 생활하는데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에게 큰 이익을 주는 사람이다 했어요.
두 번째 만남은 정치는 여정이었습니다. 아마 사도바울 빌립보에서 이 사람 말고도 가까이에서 뭐 하고 지나가면서 뭐 하고 수많은 사람 만났겠죠.
근데 그 만남 중에 의미 있는 만남을 가진 사람들 할렐루야 우리도 이 내남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의미 있는 만남의 축복이 이 땅에서 우리 가운데 풀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의미 있는 만남을 가지고 두 번째 의미 있는 만남을 가진 사람은 귀신 들려서 정치는 여종가 여종이었습니다.
그 주인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 점쳤는데 전개가 잘 맞는 거죠.
이 사람들은 무슨 점을 쳤는지 모르겠어요. 트럼프로 점을 쳤는지 포카하면 점을 쳤는지 1, 2, 3, 4 숫자 골라서 좀을 듣는지 어쨌든 서양 사람 트럼프 좀 우리나라도 화투점도 있고 별점이 다 있잖아요.
각각 문화적인 소스를 가지고서 이렇게 연을 일시 넣고 가기도 하고 그런 손금을 보기도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매개체로 삼아서 점을 지게 되겠죠.
어쨌든 점치는 귀신이 들려 있다 했습니다. 악한 영에 시달리는 한 여인입니다.
그리고 영들에게 시달릴 뿐 아니라 신분적으로는 주인에게 매여 있어서 그것으로 이익을 갖다 주는 그런 돈벌이 수단이 되어버린 그런 인격이 완전히 무너진 사람 그 사람 만나는데, 이 악한 귀신들이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바울과 신라 따라와서 소리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누구의 종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다 이렇게 지금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7절은 바울과 우리라고 해서 분명히 이 빌립보에 복음 전파할 때는 바울과 신라가 중심이에요.
근데 여기 우리라고 해놨습니다. 우리 누가 사도행전에는 누가입니다.
아마 누가가 이 빌리버에서부터 합류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바울과 우리, 바울과 신라 그리고 누가 이렇게 되겠죠.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만남의 축복을 풀어나가시는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근데 이 귀신 들린 여종은 영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고 사회적으로는 주인에게 매여 있는 사람, 자유감이 없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이 사람과의 만남도 축복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축복으로 만들어주는 과정이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다.
이 종은 귀신이 들려서 바울과 신라 아내, 하나님의 영, 놀라운 성령이 함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영이 함께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을 전할 때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다.
이러면 내용상으로는 복음을 바울과 신라를 증거해 주는 그런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것이 굉장히 난감한 문제예요. 복음은 복음답게 전해져야 되는데 귀신 들린 사람이 자꾸 증거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구원의 길을 갈 때 헬라어로 관사가 쓰이고 정관사가 쓰이고 안 쓰고에 따라서 단수 복수가 결정이 돼요.
근데 구원의 길을 할 때 이 구원의 길, 우리가 전하는 구원의 길은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근데 이 본문에서 말하는 구원의 길을 할 때는 다양한 구원의 길 중에 하나 이래예요.
그래서 바울과 신나를 증거해 주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 같지만 나도 좀 알거든 이런 겁니다.
그 구원의 길 말고 다른 길도 좀 있거든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되게 난감한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게 사회적으로 주인에게 매여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축사 사역은 그 축사받고 난 뒤에도 그 영을 케어하고 돌보는 것이 만만치 않은 시간을 지나가야 돼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민을 계속합니다. 쫓아내 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계속하는데 여러 날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 날을 하는데 바울이 심히 모하여서 괴로웠다.
이거 결정하기가 되게 난감하고 괴로워하여서 마지막 결단을 합니다.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내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와라 라고 명하니까 이전이 즉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악한 영에게는 해방이 되었는데 문제는 이 효종은 주인의 소유물인 겁니다.
물건같이 소유물이고 말이나 소같이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근데 주인은 여정을 이뻐했겠죠. 왜 돈 벌어주니까 점쳐서 이익을 가져다주는데 그 이익의 소망이 끊어지게 되니까 바울과 신나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고 갔다 했어.
그리고 이 사람들은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이 우리도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풍속을 전한다 하면서 바울과 바울과 신라 그리고 누가 이런 사람을 고발합니다.
물이 일찍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고발을 받으면 받을 수 있습니다.
고발하면 로마의 법에는 제수의 말도 들어봐야 됩니다.
고발당한 사람 말도 들어봐야 됩니다. 상관들은 옷을 짚고 찢어 벗기고 외로 쳐라 하면서 아무런 대응권을 주지 않습니다.
둘째 많이 두드려 맞고 옥에 가두고 간수에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이런 상황이 된 겁니다.
교발을 차고에 든든하게 세웠는데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두들겨 맞고 억울한 상황에서 몸은 아프고 억울하고, 그리고 남아있는 루디아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리고 귀신 들린 저 여자는 내가 맥주로 저걸 풀어줘서 자기 돈벌이 못하면 밥이나 먹여 주겠단 말이오.
이런 여러 가지 고민과 번민들이 있습니다. 그런 법민들 속에 사도바울이 그 밤을 보내면서 낙심하고 하나님은 왜 우리를 두들겨 맞게 하시는지, 왜 안 지켜주는지 이러시지 않습니까?
그럴 때 그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고 바울과 신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찬송함에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 이 은혜가 있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해석되지 않는 상황 앞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때로는 억울함이 있으면 기도 중에 푸셔야 돼요.
할렐루야 기도 중에 풀리고 마음이 열려지고 그다음은요.
하나님을 뭐하였다 찬송했다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럴 때 찬송부터 노래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이코 주님 왜 이렇게 억울하게 하셨는지 주님 하면서 막 그 찬양을 이렇게 시작할 수 있는 낮에 나에 나 눈물 머금고 이럴 수 이렇게 넋두리 같은 찬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근데 어쨌든 찬양하고 하다가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그 태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할렐루야 이런 상황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 앞에서 씨름할 때 하나님이 그 찬송을 받으십니다.
마음이 열려집니다. 그리고 계속 찬양했더니 하느님 거기에 오게 임지 오게 임지하시니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에 매여 있는 것이 다 벗어지더라.
할렐루야 벗겨져 버렸습니다. 벗겨졌으면 나가야지 나가야 되는데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간수는 자기 아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요법에는 간수 간수로 지키다가 죄수가 도망가면 자기 목숨으로 죄수의 목숨을 대신해야 돼요.
그래서 도망 보내면 자기 목숨을 대신해야 되니까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사도바울이 로마로 갈 때 일어납니다.
다들 이제 풍랑에 시달렸는데 죄수들을 싣고 가는 배입니다.
근데 간수 그것을 지키는 백부장의 무리가 함께 올라서서 이제 그 죄수들을 싣고 로마로 압송해 가는데 난파를 당했습니다.
죄수들이 그 폭풍 속에서 같이 견디고 노를 젓고 그런 일을 감당하면서 거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됐어요.
근데 섬이 가까웠습니다. 간수들이 생각이 바뀝니다.
재수가 지금 각자 각자 인솔해서 관심이 없고 각자 헤엄쳐서 각자 와서 생활을 해야 되는데 그때 만약 도망자가 생기면 자기 목숨으로 대신해.
그래서 예수님 다 죽입시다 이럽니다. 그게 로마의 법이에요.
자기 죄수를 죽이면 괜찮은데 죄수가 도망하면 자기 목숨으로 대신해야 됩니다.
그때 간 소장이 위대한 결단하잖아요. 다 그냥 자기 목숨 살기 위해서 각자 도생하시오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살은 겁니다.
지금 죄수들이 도망간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합니다.
도망했구나 그러면 내가 그냥 사형 언도받고 죽으면 우리 가족도 피해 가고 그러면 차라리 내 하나 깨끗하게 죽어버리는 게 낫지 자결할 일 아닙니다.
그러면 재수가 자기를 찔러 죽이고 간 셈이 되면 자기는 전사자가 되는 거예요.
가족은 삽니다. 그래서 자기 칼을 빼어 자기 하려고 하는데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 이랬어요. 벌벌 떨며 바울과 신 앞에 이제 엎드려버립니다.
간수가 간수와 죄수와 위치가 바뀝니다. 어떻게 하여 구원을 받겠습니까?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도가 위대한 말합니다.
31절 시작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같이 시작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그 밤에 그와 그 사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하겠습니다.
그날 밤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고 크게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에서 세 그룹에 의미 있는 사람 만납니다. 루디아 그다음에 귀신 들린 여종, 간수 집안 집안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루디아의 집안과 간수의 집안, 그리고 귀신 들린 여성 혼자.
그렇게 해서 세 그룹의 사람들과 만남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떤 만남은 축복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 만남 때문에 낭패를 당했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두들겨 패고 두들겨 찍히고 그런 정반대의 상황 안에서 만남을 가졌습니다.
지나가는 만남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 안에 하나님 바라보고 갔더니 그 모든 만남들 속에 하나님이 정말 의미 있는 만남들을 허락하여 줬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요. 지나가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 죄송합니다.
뻥이요 목회를 하면 성도들 중에 목회자와 의미 있는 만남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밥을 사줄 수도 있고 뭘 할 수도 있고 또로는 핍박이 올 수도 있고 한데요.
그때 주님을 바라보고 갈 때 영혼과 영혼의 만남, 생명의 만남의 축복이 이루어집니다.
할렐루야 그 복과 은혜를 우리 네난 땅에 이루어내는 저희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때로는 영리적인 만남일지라도 사랑의 승리를 해나가면서 복음의 만남으로 세워나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복음의 만남이 우리 내남 땅에 이루어지게 인도해 주시고 너는 제일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편만이 풀어지고 복으로 나뉘어지는 은혜가 있기에 하나님 주장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의 영광 들어 주옵소서 주께서 온전히 주관하여 주시길 원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행16장31-40절 2차선교여행04 빌립보 교회설립 240929 원주희목사
2024.09.29 일 오전 6:50 ・ 13분 10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와서 유석인 유럽의 세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첫 번째 복음 전파였고, 회당도 없고 성전도 없고, 믿는 사람이라곤 없는 이곳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이 빌립보 교회 가 처음 개척된 겁니다. 개척되어지는데 요란한 신고식을 치루었습니다.
귀신 드는 사람을 치료했다가 모진 핍박을 겪었습니다.
악한 형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료하는 사역이 일어나면 놀라운 그 가정이 영원히 구원을 받고 그 가정 전체가 하나님의 표정을 보는 놀라운 은혜도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풀어지는 놀라운 역사도 있어요. 반작용도 있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받는 대가 지불이 있어요. 하나님의 모든 일에는 대가 지불이 있습니다.
핍박을 겸하여 받고 할렐루야 그 핍박을 겸하여 받는 것 그 사람이 영적인 짐을 아무리 이렇게 방어 기도하고 보기도 하고 터는기도 하고 그래도 조금씩 묻는 거 있어요.
근데 그거 어 주님의 은혜 아래에서 각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의 은총 그분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주실 때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그걸 스스로 다 짊어지셔서 죽음이라는 모진 고통을 겪지 않습니까?
그게 갑지불이죠. 인류 구원에 대한 갑지불이에요.
그리고 부활로 함께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구상도 그래요.
그래서 또 조금씩 묻기도 하고 또 우리는 부주의해서 그러기도 하고 우리 연약함이 있어서 악한 영이 틈을 타기도 합니다.
그런 것뿐 아니라 외부적으로는 이단이네 삼단이의 소리를 듣기도 쉬워요.
그 소리 누가 제일 먼저 교회가 제일 먼저 합니다. 목사들이 제일 먼저 합니다.
정말 이단스러워서 그럴 수도 있고요. 또 하나는 양떼를 뺏기기 싫어서 우리는 개교의 주의거든 개신교는 개교의 주의고 캐톨릭이 아니에요.
캐톨릭은 본교의 주의입니다. 이 교회 소속과 저 교회 소속이 따로 없어요.
그리고 신부님들은 발령받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가 저기 왔다가 왔다 갔다 해요.
사람에 따라서 움직여지지 않고 조직 안에서 선거를 관리하는 시스템이에요.
그래서 미앙내앙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양떼예요.
근데 개신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니 양이 있습니다.
내가 먹인 양이 있고 우리 교회에 헌금해주는 성도가 따로 있고 안 해주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양을 뺏길까 봐 하는 이유가 가장 큰 이유 중에 한 가지입니다.
이것은 초대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파와 예수님과의 갈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교 권력의 갈등은 그런 문제였어요. 바리새파는 지방 해당 권력을 잡고 있고 사도계파는 성전 권력을 잡고 있는데 이 회당이 헌금한 곳으로 그들 생활도 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해 간다고 합시다.
종교적 기득권들. 근데 예수님이 오셔서 병자를 치료합니다.
말씀을 더 잘 압니다. 교인들이 예수님에게 몰려갑니다.
심지어 건물도 없는 빈 광야에서 모여가지고 자기들끼리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은혜받고 그냥 병 고침도 일어나고 역사가 막 일어납니다.
회당에 텅텅 빕니다.
해당을 섬기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에 대한 자기 종교 권력을 지켜야 된다라고 하는 집단을 지켜야 된다라고 하는 집단 이기주의가 슬슬 발동하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 당시의 모습이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떠나서 핍박은 있다.
어떤 모양이든지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신라 이 두 사람이 복음을 전하러 갈 때 빌리버스에서 일어난 핍박은 믿는 사람에게서 이런 핍박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이런 핍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들의 핍박은 율법의 교문을 가지고서 성격을 빙자하여서 그냥 니가 성경적이냐 아니냐 이런 거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핍박은 니가 성경적이냐 아니냐 논쟁하듯이 하는데 실제로는 다른 목적이에요.
그걸로 하는데 이걸로 하면 뽀대가 안 나니까 성경 들고 핍박하는 겁니다.
근데 이방인들의 핍박은 완전히 무대보입니다. 성경도 없고 거리도 없고 근거도 없고 기준은 뭐냐 이거였습니다.
돈을 못 벌어주게 되는 문제, 그 사람의 영혼의 자유를 얻었느냐 못 얻느냐 이거 아니었습니다.
돈을 못 벌어주는 문제 유대인들의 핍박은요 안찍일날 고쳤냐 안 고쳤냐 이런 거 귀신의 왕을 덧입어서 바을 세부를 힘입어 쫓아내는 거 맞다 병 고치는 거 맞는데 그거 귀신의 왕을 덧입어서 쫓아내는 거야 하면서 핍박하는 거 그게 유대인의 성경을 빙자해서 예수님을 핍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요. 이런 건 전혀 없습니다. 돌이 최고야 합니다.
어쨌든 이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근데 따라서 이러하든지 저러하든지 사랑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오늘 시대에 혁명적인 목회자들이 지를 모시고 가야 될 몫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온갖 일들이 일어납니다. 목회자와 장로님 사이에 성도님, 성도와 성도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별별 일이 다 주로 많은 것들이 서로 다른 것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요.
그런데요. 그때 그 모든 일들 들어는 어떤 사람의 죄가 있는데 지적하지도 못해요.
떠날 거니까 그 사람도 편먹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근데 그거 이런 저런 것 속에서 사랑으로 승리해 만드는 것이 오늘 시대에 목사가 걸어가야 될 숙명적인 제목이에요.
사랑으로 승리해서 성령이 그 영혼을 녹여내고 나도 그 영혼에 중보하고 그 안에서 사랑으로 승리해 낼 때 그때 진정한 교회 됨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와 신라는 빌립보에서 사랑의 위대한 승리를 이루어 냈습니다.
감옥에 두들겨 맞는 시간도 지나가고 그리고 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거기 머물러 있는 그런 시간 성령의 인도하심이죠.
차근차근 지나갔더니 그들은 위대한 사랑의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건전한 사람 자주 장사 루디아 그리고 귀신 들린 여성, 그리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였던 간수 이 세 사람이 세 그룹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복음을 풀어내고 그렇게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이 교회가 사도바울이 옥에 갇혀서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까지 그 끝까지 사도바울을 공개하고 그 선지를 위해 기도하고 재정을 후원하고 그렇게 함께 독력하는 그러한 교회로 세워졌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열매는 이렇게 맺히는 겁니다. 신앙의 열매는 이렇게 맺어지는 겁니다.
위대한 사랑의 성리,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놀라운 능력으로 악한 영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하나님의 지위와 이적을 행하고 표적을 통해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근데 희생하려고 하지 않아요 사랑의 승리, 사랑의 승리를 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죽은 자를 살리는 은사가 있습니까? 예수님 죽은 자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근데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의 모든 사역을 마무리 지으셨고, 그 위대한 사랑의 승리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이라고 하는 온 인류의 구원이라고 하는 놀라운 은혜들이 풀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13권을 쓸 만큼 지혜와 계시이 통달합니까?
그런 사람이 로마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이 두들겨 맞는 과정도 지나가고 있어 감옥 안에 머물러 있는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그 시간을 가지고요.
그렇게 위대한 사랑의 승리 안에 복음이 말로만 전해질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과 성령의 능력이 함께 전해지면서 탄탄한 교회, 빌립보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이 교회가 그렇게 교회에 처음 세웠던 지도자였던 바울 사도의 모든 사역을 끝까지 공개하고 섬기는 그 아름다운 역사에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축복과 은혜가 우리 가운데서 우리 교회 가운데서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소망하고 부족한 저희들이 사도 바울과 신라가 걸어갔던 그 믿음의 여정을 반듯하게 걸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선명한 복음, 그다음에 진실한 주를 닮은 인격, 그리고 성령의 능력,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 이것들이 조화가 되어서 빌립보 교회가 형성이 되었고, 2차 선교 여행에서 첫 번째로 맺어지는 교회가 세워지는 축복의 열매가 그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복과 은혜가 우리 가운데 우리 교회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하고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 네남주일 교회가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것처럼 그렇게 복되게 세워지게 하시고 주님의 영광이 넘치고 넘치고 넘치는 그 은혜가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연세가 많은 분들은 천국 가는 확실한 구원의 준비가 되어지게 축복해 주시고, 또 젊은 영혼들을 또한 보내 주셔서 다음 세대를 길러 나가고 교회됨의 본질을 함께 고민하며 기도하며 세워가는 은혜가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울산에서, 은행에서, 경주에서, 영천에서 아버지 하나님 영적인 센터가 되어서 영혼을 건지는 놀라운 은혜의 센터가 되어서 성령님의 능력이 온 도성에 풀어지는 은혜가 있기에 축복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온전한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