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어제 내린 비로 신선한 물방울이 맺혀 있는 목련의 꽃망울이 내려다보이는 아침입니다.
1-5절
기도를 주고받는다는 것,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특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에 자신과 동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똑같이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중보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을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들로부터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동시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악한 자에게서 건져 주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저도 왠지 모르게 힘들 때 처음에는 의지를 갖고 기도를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도에 불이 붙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예외 없이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을 때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2절)
믿음 또한 선물이기에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무리 전도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사람을 대할 때 절망감에 젖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생명이 붙어 있는 한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가족/친구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5절)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표현은 익숙하지만, ‘그리스도의 인내’라는 말은 여기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앞서 ‘악한 사람들/자들’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이것과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더라도 바울 일행에 대한 유대인들의 행태는 이방인들보다 훨씬 집요하고 악랄합니다. 오죽했으면 그들에 대해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2장 16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말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일갈한 다음, 그들을 포기해버리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우고자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셨습니다. 끝까지 인내하시는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울 또한 그토록 자신을 쫓아다니며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핍박했던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가슴에 품고, 로마서 9장에서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2)라는 고백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우지 않고는 불가능한 고백입니다. 서신서 저작 시기로 볼 때, 데살로니가 전후서가 로마서보다 앞선다고 보기 때문에,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인내에 대해 이야기한 바울이 이후 그것을 점점 더 체화해서 로마서에서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날마다 기도의 깊은 자리로 들어가지 않고는 불가능한 고백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더 깊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바울 자신이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간 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나의 기도가 얼마나 얕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6-15절
바울이 4절에서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말했지만, 그것과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의 경우, 바울이 직접 노동을 해서 자신의 앞가림을 한 것은 ‘사례를 하고 그것을 빌미로 바울을 조종하려는 시도’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컸습니다. 그러나 여기 데살로니가에서는 그것과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기상으로 데살로니가에서의 여정이 고린도보다 앞서므로 바울은 그의 2차 전도여행 초기에는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8-9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노동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큰 울림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며 자란다는 말처럼 사람이 가장 쉽게 배우는 것은 듣는 것에서보다 보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가르치기 위해서 스스로 모범을 보인 바울의 자세가 말해주는 것이 많습니다. 그 수고가 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바울이 여기에서 한 단락을 할애하며 비교적 자세하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일부 사람들의 불순종은 큰 이슈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게으름’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무질서’(disorderly; out of order)였습니다. 그 무질서는 노동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일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런 사람들과 잠시나마 교제를 끊으라고 ‘명령’합니다. 제안이 아닙니다. 그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도가 셉니다. 그의 명령은 불순종한 사람들을 배척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제의 단절로 인한 충격이 가져올 레슨을 기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14절)고 말합니다. 교제 단절은 교훈을 위한 것이지 관계 단절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15절)는 말에는 바울의 깊은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가르치기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대충해서는 안 될 것 같고, 해서 선택한 것이 교제의 단절이었던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또한 배우게 되는 것은 노동의 신성함입니다. 남에게 빌붙어 산다거나 의존해서 살기보다는 스스로 땀을 흘려 얻은 소득으로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12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10절,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교회 공동체를 향해 이 같은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것입니다. 게을러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분명 전염성을 가지고 교회 공동체를 알게 모르게 와해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누룩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영적인 지도자는 이처럼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원인들을 찾아서 미리미리 대비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건강하게 우리 주님의 발자취 따라가는 여러분의 발걸음에 우리 주님의 영광의 빛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배운대로 행동할 것을 확신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시고 굳건히 하시며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성도들의 순종하는 믿음과 함께합니다.(3-4)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모든 일은 선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삶은 칭찬받기보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의 조롱과 무시와 핍박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같이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인내하는 것같이 인내하는 것이 깨달아질때에라야, 선한 일을 하면서 낙심하지 않을수 있을것입니다.(5,13)
순종하지 않는 형제들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결정이겠습니다.(6,14-15) 교회가 서로를 위한 수고와 사랑과 위로로 가득찬 곳일때 교회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자는 다시 교회에 속하고 싶은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잘못 행하는 자들을 믿음으로 권면할 수 있는 권위있는 곳이길, 교회밖에 있는 자들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은혜로 고난까지도 감사로 품어내는 교회의 모습을 보며 들어오고 싶어하는 곳이되길, 그런 교회를 위해 우리모두에게 하나님이 사랑과 인내의 마음을 가득 부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잘못 행하는 자들을 믿음으로 권면할 수 있는 권위있는 곳이길" 함께 소망하고 이루어가기를 원합니다
주안에서 게으르지 말고 늘 성실함으로 행하며 예수님의 인내를 본받아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가 깊이 체화되시길 바랍니다.
주께 합당히 행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열매님 오랜만입니다^^~ 주께 합당한 삶, 우리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빕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더 깊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저 또한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답글 감사합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가 있으시기를 빕니다!
2장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땅에서의 삶은 성도들에게 많은 인내를 요구하게 되지만, 오늘 말씀은 그 인내의 시간에 우리는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기쁜 사실을 확인 받습니다 (3:2). 하나님의 미쁘심이 이것을 이끄실 것이며, 더불어 주의 말씀이 영광스럽게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에는 순종함으로 온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히 5:8).
"그리스도의 인내에는 순종함으로 온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사람보기에 인정받지 못한다고 스스로 지쳐서 낙심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없어야 겠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또한 형제와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을 행하는 사람," good poin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