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 4 : 5 - 11 박덩쿨의 행복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음에 무더운 날씨처럼 때로는 아직 터지지 않은 활화산처럼 원망과 불평, 불만이 가득해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상대적 빈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불평과 불만이 많습니다. 자기만족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마치 요나가 행복을 잃어버린 것처럼 세상 살맛 안나 하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처럼 요나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요나의 모습을 보면 마치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불평 가득한 요나,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하는 요나, 남 잘되는 것 보면 그것이 화가 나는 요나, 화를 내고도 자기의 성냄을 정당화 시키는 요나, 내 것은 조그만 것 하나도 아까와 하면서 남은 망하기를 기대하는 요나, 한마디로 우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는 선지자라고 말하지만 우리와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는 요나입니다.
지금 요나는 죽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죽는 것이 훨씬 낫겠습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면서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죽게 된 것, 죽어 마땅한 것 살려주었더니 살아난 것이 감사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던 것이 이제 두 달도 안됐는데 벌써 죽고 싶다고 하니 그것도 자기 머리위로 자라던 박덩쿨 하나죽었다고 죽고 싶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요나는 그래도 두 달이나 가니 다행입니다. 우리는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던 것이 이제 겨우 한 3일 밖에 안 될 수도 있는데 이제 벌써 죽는 것이 났겠다고 하니 하나님이 들으시면 기가막할 노릇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 듣고 니느웨로 가라니까 다시스로 도망가다 풍랑을 만나 제비뽑기에 걸려 심청이 처럼 물속에 던져져서 물을 꼴깍 꼴각 마시며 숨이 막혀 막 숨이 넘어갈 때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 주세요 하고 순간 기도하던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는데 깨어나 보니 깜깜하고, 냄새는 썩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고, 한치 앞이 안보이고, 미끈거리고, 아무튼 어딘지 분간도 못하겠지만 이곳이 지옥인가 해서 자신을 꼬집어보아도 분명히 살아있어서 지옥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그나마 얼마나 감사했던지 물고기 뱃속이어도 괜찮고 그저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감사했는데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 것 보니 아직도 살만 한가 봅니다. 왜 이런 상황들이 왔습니까?
첫째 옛날의 힘들고 어려웠을 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물고기 뱃속에 있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요나처럼 물속에 던져졌을 때 어떻게 하셨는지 그때의 일을 아직 기억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살면서도 살아만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삼일을 보내며 감사를 했던 것이 바로 한 달 전 인데 벌써 죽고 싶다고요 이제는 살만한가봅니다.
직장이 없어서 당장 들어가서 일할 곳만 있어도.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수 있는 일만 있어도 하고 생각하고 병상에 누워서 몸만 아프지만 말아도 하고 생각하고 교통사고를 만나 사경을 헤메는 순간에 살려만 주시기만 하면하고 기도하던 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죽고 싶은 사람이 엘리야처럼 도망은 왜 칩니까? 차라리 엘리야가 도망치지 않고 이세벨 손에 죽으면 수교를 하는 것인데 순교를 하시지 도망은 치면서 죽고 싶다니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말이 앞뒤가 안 맞습니다. 마치 노인들이 빨리 죽야 된다면서 곧 죽게 될 것이라면 서운해 하는 것처럼 왜 죽겠다, 죽겠다, 죽어야겠다 죽어야겠다고 말하면서 살아갑니까? 다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요. 다시 교통사고로 아니면 사망진단이 떨어지는 질병이나 무슨 사건으로 사망이 한걸음 사이 밖에 안 된다고 느껴져 죽음의 위기를 만나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납니다. 이제는 그래도 살만 한가 봅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가는 것을 보니 정말 죽고싶지는 않은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까짓 햇볕 가리던 박덩쿨 하나가 죽어버렸다고 죽고 싶다고요. 그까짓 머리 둘 곳 집한 채 날렸다고 죽고 싶다고요? 주식으로 돈 좀 잃어버렸다고 죽고 싶다고요? 학교 성적이 떨어져 죽고 싶다고요? 건강 좀 일어버리고 사업이 좀 안 풀린다고 죽고 싶다고요. 하나님은 정말 죽여줄까 하고 말씀하십니다.
머리를 시원하게 하던 박덩쿨 하나 없어진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입니까? 남들은 그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데 그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니 자기가 수고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화가 나십니까?
오늘 본문의 요나는 불평불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습까? 왜 그렇게 화가 잔뜩 나 있습니까? 왠 불평이 그리도 많습니까? 그는 지금 자기가 망하리라고 말한 니느웨가 망하지 않음으로 인해 화가 나 있습니다. 자기 천막집 곁에 자라던 박덩쿨이 말라죽어 불평을 그러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거 가지고라고요. 우리의 불만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까짓 거 일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얼마나 대단하게 했다고요? 서원은 무슨 서원을 갚았다고 살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불평불만이 많습니까? 옛날에 몸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 뭐라고 서원했습니까? 돈 없어서 이집 저집 돈 꾸러 다니고 수치를 당할 때 돈 생기면 하나님 위해서 쓰겠다고 서원하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쓰고 갚았습니까? 자녀 없어 구박 받을 때 아이 주시면 신앙생활도 잘하고 아이 믿음으로 키우겠다고 약속하고 자녀생기니까 교회 몇 번 나오고 자녀가 우상이 되어 살면서 하나님 위해서 요나같이 삼일 길 하루 일도 안하고 불평 불만하십니까?
이제 겨우 찬양대 조금하고, 교사 조금하고, 목장일 하는 듯 하고서 그나마 충성스럽게도 아니고 하는 듯, 마는 듯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고, 제 마음대로 하면서 하나님이 그까짓 것도 안 해주시냐고 불평을 늘어놓는 자신이 요나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갑니까? 예전의 힘들고 어려웠던 때를 다시 회상하십시오. 그리고 박넝쿨의 휴식도 감사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박넝쿨이 없어도 감사할 뿐입니다.
둘째 현재의 안일함에 안주하려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이 일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복지부동이라고 합니다.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안주함입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자기와 관계없는 일은 얼마든지 해도 괜찮은데 자기 손해 보는 것을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부동산법 현재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내가 집 두, 세채 가지고 고 있을 때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원 그만 두고 품위유지비로 한달에 몇 일을 국회의원을 했던지 100만원씩 지출되는 것 말이 안 되는 줄 국회의원들도 다 압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국회의원이까 그것을 절대로 안 고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박덩쿨은 손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 손대면 사생결단 나는 것입니다. 아시아나 항공기 조종사들 비행기표 자녀들이나 가족 여행에 막 주다가 안주니까 왜 내 박덩쿨 건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차 전철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목사도 교회에서 핸드폰 사용료 내주다가 핸드폰 사용료만 안내줘도 사택 제공하다가 안주면 못해먹겠다고 데모 할 것입니다.
의사들 약사들 변호사들 모두가 다 자기들만 생각하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면 데모하고 파업하고 난리입니다. 집단이기주의자들이 아파트 값이 싸게 내좋은 사람을 공격합니다.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똘똘 뭉쳐서 안 내리기로 단결합니다.
니느웨의 12만은 마음에도 없는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아시아나 항공기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잃어버린 박넝쿨만 생각하지 다른 사람들은 수출에 겨우 길이 열려 이제 막 수출 물품을 선적하려다가 발을 동동 굴러야 하던지 말든지 상관도 없이 자신의 박덩쿨에만 관심이 있는 요나같은 사람들입니다. 사업계획에 어떤 차질이 생기던지 말던지 오직 내 박덩쿨만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경영주는 근로자를 생각해야 하는데 근로자 생각하지도 않고 근로자는 경영자 입장을 생각해야 하는데 이제 이익 조금 남는다고 투자한 것 투자할 것은 생각지고 않고 무조건 막무가내로 이익 배당해 달라고 난리고 온통 자기박넝쿨만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도 자기 일하는 부서만 생각하고 분야만 생각합니다. 사무실은 일주일 내내 컴퓨터를 써도 구동이 잘 안돼서 한참을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쓰는 곳에는 컴퓨터 막 사고 오직 자기 편리 자기 이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박넝쿨이 없어도 행복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빠지지 말고 12만명의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될것인지 수많은 우양의 가축들은 어떻게 될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니느웨성이 망하면 자기도 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망하면 나도 망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좀더 멀리 더 많은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박넝쿨이 없어도 행복할 수있습니다. 지금 세계의 인구의 3분의 1은 하루 한끼 식사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우리나라처럼 잘먹고 잘 사는 나라가 어디 그렇게 있습니까? 그런데도 못살겠다고요 죽고 싶다고요 세계에서 핸드폰을 가장 많이 가지고 다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가정에 핸폰사용료만 줄여도 사는 집 많습니다.
좀더 낮은 곳을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박넝쿨없어도 죽을 일 아닙니다. 박넝쿨이 없어도 행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감사하십시오 초막집이 아직도 그냥 있다는 사실에 아직도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고 건강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셋째 사명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사명에 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사명감으로 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명감 없이는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얼마 안가서 이런 저런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다른 사람이 왜 그 고생을 사서하느냐고 해도 내 돈 들여가면서 하는 이유가 그곳에 행복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요나가 사명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코가 꿰어서 할 수없이 일은 하지만 지금도 사명감이 없습니다. 그는 니느웨성에가서 40일이 있으면 이 성이 망한다고 말하는 것이 사명인 것처럼 생각하지민 그것은 한낫 심부름에 불과한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그 성이 멸망할 까봐 그 백성들이 40일이 있으면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만해도 12만명이나 되는데 그들이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 안타까와서 말하지 않으면 안될 수 없는 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을 시키기 때문에 할 수없이 하는 것은 요나 같은 심부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원망이 불평이 많은 것입니다. 회사에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다니고 의사라고 해도 환자가 불상하고 고쳐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돈 안되는 환자는 귀찮은 것은 사명이 없이 돈벌이로 하는 직업들이기 때문에 사명없이 하는 좀더 박덩쿨 밑에서 시원한 그늘 아래 있겠다는 요나같은 심보에 불과한것입니다.
박덩쿨의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똑 같은 박덩쿨 밑에 있어도 요나같은 마음이 아니라 삼명이 있어야 진정한 박덩쿨이 행복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 직장, 교회에서 박넝쿨의 지정한 행복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명을 다시 인식하십시오 가정에서 주부로서 자녀로서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회사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박넝쿨의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하던 것 보다 더 불편해 졌어도 문제가 안됩니다. 전에 하던 직장보다 전에 하던 교회보다 더 불편해졌어도 그곳과 비교해서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명이 아니고 요나같은 박덩쿨의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행복을 찾으십시오. 사명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사명으로 일하십시오. 그러면 박넝쿨이 없어도 행복할 수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행복할 수있습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던 첫 사랑을 기억합니까? 그 첫사랑의 사명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져도 예수 안에서 행복할 수있는 것입니다. 사명이 회복되어 예수 안에서 다시 행복해 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