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구바빌론>
바빌로니아 제국은 구 바빌론 제국으로부터 기원한다. 구 바빌론은 함족계 아모리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구 바빌론 시작은 대략 기원전 20세기경 아모르인들이 이주하면서 이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곳으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다. 이 두 강을 따라 기원전 3000년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수량 기록하고, 유지와 분배의 필요가 생겨, 문자와 수학, 별자리들을 연구하면서 고대문명이 형성될 수 있었다. 구 바빌론 제국은 기원전 18세기 유명한 함무라비 대왕의 치세에 본격적으로 번성했다. 함부라비 대왕은 나라를 강력하게 통치하기 위해 세계 최초의 성문법인 합무라비 법전을 만들었다. 그의 사후 구 바빌론은 쇠퇴 위기에 처해졌고 기원전 9-7세기 후반에 새롭게 부상한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다.
아시리아>
기원전 9세기부터 7세기 후반까지 바빌론은 아시리아가 통치했다. 칼데아 부족들이 바빌론을 침범해 수 차례 왕위를 찬탈했다. 특히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립 통치 기간, 칼데아인의 반란으로 통치가 어려워졌는데 칼데아 족의 새로운 지도자 무셰지브 마르두크는 바빌론 신전 재물로 용병을 사서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689년 센나케립은 다시 바빌론을 포위 공격해 9개월 만에 재탈환하고, 이 때부터는 바빌론에 대한 유화정책을 버리고 파괴와 약탈을 명령하였다. 신전과 마르둑 신상은 파괴되었고 버려졌는데, 이는 메소포타미아인에게는 엄청난 종교적 충격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결국 아시리아 제국 센나케리브는 암살당하고 만다. 아시리아 제국 센나케리브의 뒤를 이은 에사르하똔은 바빌론을 재건하고 주민들의 재산을 돌려주는 등 융합정책을 폈으나, 항상 바빌론에서 반란의 빌미가 된 마르둑 신상은 바빌론에 두지 못하게 했다. 에사르하똔의 사후, 뒤를 이은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고, 아슈르바니팔은 바빌론을 포위해 기원전 648년 함락시켰다. 아시리아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인 아슈르바니팔이 죽은 지 1년 후인 기원전 627년에, 아시리아 제국은 내전에 휘말리기 시작하자 이 상황을 기회로 삼은 칼데아인 출신 나보폴라사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신 바빌론>
아슈르바니팔이 죽은 후 기원전 612년 페르시아만 가까이 살던 칼데아인 나보폴라사르는 기원전 앗시리아의 니네베를 함락시키고 점령하고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정했다. 바빌론은 기원전 626~539년까지 80여년 정도 존속하였다. 신바빌론 칼데아인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바빌론 제국 또는 칼데아 제국이라고도 불린다. 현 소재지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 90km이다. 뒤이어 그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치세 때(604~562) 대규모 정복 전쟁을 하여 승리했고 토목공사와 건축물을 세웠다. 이것은 네부카드네자르 시대에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일부는 선왕인 나보폴라사르때부터 이루어졌다. 아무튼 네브카드네자르때 신전의 지구라트,이슈타르 성문(베를린 박물관 보관) 그리고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언급되는 공중 정원이 이때 건설된 것이다. 신바빌로니아는 네브카드네자르(562~604) 강력한 통치 아래 북으로는 아르메니아 남으로는 남으로는 페르시아만까지 서쪽으로는 시리아 유다 이집트 일부를 점령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 정복국에서 탈취한 대량의 물자와 지식인 기술자들을 활용하여 바빌론 도시 건설을 완성했다. 이때 거대한 성벽축조와 그 안에 바벨탑)지구라트등 최초 최대 건축물들을 건설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내분으로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한 신바빌로니아는 기원전 539년에 동쪽에서 힘을 키워온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게 멸망했다. 키루스왕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뒤를 이은 나보니두스의 실정으로 키루스는 거의 무혈입성으로 손쉽게 정복하였다.
기원전 562년 네부카드네자르 대왕이 사망한 뒤, 바빌론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7년 동안 임금이 3명이나 바뀌었다. 그러나 바빌론이 무너진 결정적인 사건은 바빌론과 함께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메디아에서 발생했다. 이란 남부 지역에서 메디아 제국을 섬기던 페르시아 출신 키루스가 반란을 일으켜 메디아를 장악했다. 이에 놀란 바빌론은 이집트를 포함한 주변국들과 허겁지겁 동맹을 맺고 맞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바빌론이 처했던 복잡한 내부상황 때문이었다. 수차례 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바빌론 마지막 임금 ‘나보니두스(개혁파)’는 무너져 내리는 제국을 강하게 재건하기 위해(종교적으로 구심점 추구),바빌론의 가장 오랜 전통인 달月신 숭배를 복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임금의 정책은 바빌론의 주신主神 마르둑을 섬기던 사제 집단과 크게 충돌하였다. 그래서 페르시아 키루스가 바빌론의 침공했을 때, 사제들이 제국의 대문을 활짝 열고 페르시아의 키루스를 정복을 환영하는 이변이 벌어졌다. 키루스는 무혈정복에 성공하였고, 바빌론 땅에 살면서 이 광경을 고스란이 지켜본 유배자들은 경악했다.
바빌론은 허무하게 멸망했고 이 경악할 사건을 목격한 유다인 유배자들은 무슨 통찰을 하였을까? 하느님 이해, 세계사의 흐름, 자신들의 정체성에에 확실한 방점을 찍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유일신 보편신 인격신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시라는 것, 하느님이 민족들의 전권자로 그 운명을 쥐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유다인들의 귀환과 나라의 재건이라는 부푼 희망이 시작될 수 있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4년 5월 12일, AM 04;39
참조: EBS, 찬란했던 고대 바빌론 이야기 놀라운 건축기술과 문명
성경통독 65강, 바빌론 유배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