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데 메나
후안 데 메나(Juan de Mena, 1411년 코르도바-1456년 토렐라구나)는 카스티야 전(前)르네상스의 알레고리·단테 학파에 속하는 스페인 시인이다. 특히 《운명의 미궁》(Laberinto de Fortuna)으로 알려져 있다.
마드리드 토렐라구나의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 시스네로스의 그리스도상 곁에 있는 후안 데 메나의 묘.
토렐라구나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의 후안 데 메나 기념판.
생애
부모에 관한 문서가 남아 있지 않아 유대교 개종자 가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알메나라 영주 루이 페르난데스 데 페냐로사의 손자이며 코르도바의 시의원 또는 배심관이었던 페드라리아스의 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그는 언제나 코르도바를 사랑했고 그 도시의 문화적 전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오, 학문과 기사도의 꽃이여!
코르도바 어머니여, 그대의 아들을 용서하라.
지금 널리 부르는 이 노래에서
그대의 지혜를 다 전하지 못할지라도.
놀라운 거울과 같았던
용맹한 현자들을 들어 그대를 칭송할 수 있으나,
나 자신이 그대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의심받으리라.
사람들은 내가 마땅한 것보다 더 아름답게 그렸다고 하리라……
— 후안 데 메나, 《운명의 미궁》 제124연
고향에서 공부를 시작한 뒤 살라망카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436년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곳에서 토르케마다 추기경을 만났으며, 추기경의 수행원으로 1443년 피렌체에 갔다가 로마로 여행했다.
1444년 카스티야로 돌아와 후안 2세의 라틴어 서신 담당 비서가 되었다. 이 직책과 코르도바의 ‘24인 시의원’(veinticuatro, 시 행정관) 직을 함께 맡았다. 이듬해 국왕은 그를 왕국의 공식 연대기 작가로 임명했다. 그러나 《후안 2세 연대기》의 저자가 정말 메나인지는 의문시되어 왔다.
후안 데 루세나는 대화편 《행복한 삶에 관하여》(De vita beata)의 등장인물을 통해 메나를 창백하고 병약하며, 학문에 헌신한 대단한 노력가이자 시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묘사한다.
책을 읽느라 수없이 밤을 새워 살은 야위었고, 얼굴은 창백하며 학문으로 닳았소. 그러나 창에 부딪혀 찢기고 다시 꿰맨 얼굴은 아니오.
같은 작품에서는 메나 자신이 시작(詩作)에서 느낀 강렬한 즐거움 또는 집착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의 신앙을 걸고 내게 맹세했다. 때로 시를 지으며 오래 머물 때면 그토록 큰 기쁨을 누려, 모든 일을 잊고 점심은 물론 저녁마저 잊은 채 자신이 영광 속에 있다고 여긴다고 했다.
그는 카스티야 총사령관 돈 알바로 데 루나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그의 《명망 높고 덕망 있는 여인들의 책》에 서문을 썼다. 산티야나 후작 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와도 문학적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였다. 그에게 《대관식》(Coronación)을 헌정했으며, 이 작품은 당대에 《쉰 연》(Las cincuenta)이라고도 불렸다.
후안 데 메나가 산티야나 후작의 도서관에서 일했다는 가설은 근거가 빈약한 듯하다. 그의 문학적 명성은 일찍부터 대단했다. 16세기 인문주의자 프란시스코 산체스 데 라스 브로사스, 곧 ‘엘 브로센세’는 《운명의 미궁》을 라틴·그리스 고전처럼 주석하고 해설했다.
후안 데 발데스도 《언어에 관한 대화》에서 “운문으로 글을 쓴 사람들을 모두 논하자면, 사람들은 한결같이 후안 데 메나에게 으뜸의 영예를 돌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순수주의적 관점에서 그의 카스티야답지 못한 언어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어떤 낱말들을 사용했습니다. 일부는 너무 조야하여 버려야 하고, 일부는 지나치게 라틴어다워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쁨에 찬 얼굴’, ‘제2극의 밑바닥’, ‘온 천구를 두른다’ 같은 표현을 한 연에 모두 넣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좋은 카스티야어라기보다 형편없는 라틴어를 쓰는 데 가깝습니다.
메나는 토렐라구나에서 죽었다. 일부는 옆구리 통증으로 죽었다고 하고,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는 《전투와 오십 년대기》에서 노새에서 떨어져 끌려간 상처 때문이라고 했다.
산티야나 후작이 만들게 한 화려한 묘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안토니오 폰스는 《스페인 여행》(1781)에서 토렐라구나 교회 사제석 계단에 고딕 문자로 다음 글이 새겨진 돌을 발견했다고 기록했다.
복된 고향, 좋은 운명이여,
죽음이 몸을 숨기는 곳이여,
시인 후안 데 메나는
운명에 따라 이곳에 자리를 얻었네.
시 작품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후안 데 메나는 사랑을 주제로 쓴 가요집 계열의 서정시에서 만날 수 있다. 노래·진술시·문답시·존재와 부재의 유희·구애시 등으로 이루어진다. 가볍고 우아한 시이지만 때로 열정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지적인 인상을 준다.
그대의 두 눈은
그토록 분별 있게 바라보며,
나를 찌르고는
죽일 것 하나 남기지 않았네.
내가 이 침상에 누워 있을 때
가장 큰 고통은
내 연인의 품을 떠나던 순간을
생각하는 일이네.
이 시들은 주요 15세기 가요집들과 1511년 출판된 에르난도 델 카스티요의 《일반 가요집》에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후기 문체는 상징주의와 박학함에 집착했다. 대예술시와 소예술시의 연, 12음절과 8음절 시행으로 이루어진 《명암》(Claroscuro)에서는 콘셉티스모와 가장 정교한 가요집 서정시의 강렬함이 수수께끼 같은 모호성과 결합한다. 이 점에서 그는 같은 코르도바 출신인 루이스 데 공고라를 한 세기 반이나 앞섰다.
《산티야나 후작의 대관식》
《산티야나 후작의 대관식》 또는 《칼라미클레오스》(Calamicleos)는 당시 《쉰 연》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1438년에 쓰였고 1499년에 출판되었다. 현존 사본 수가 보여 주듯 당대에 매우 유명하고 널리 유통된 시였다.
51개의 이중 5행연으로 구성된다. 메나가 파르나소스산으로 끌려가, 친구이자 후원자인 돈 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가 위대한 시인이자 완전한 기사로 대관되는 모습을 본다는 내용을 알레고리로 전개한다.
마르셀리노 메넨데스 펠라요는 이 작품을 “운을 맞춘 설교…… 건조하고 현실적이며 재미없고 엄격하지만 지극히 카스티야적”이라고 평했다. 신성한 것과 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한 터무니없는 암시와 과장된 문체가 작품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시인 자신도 ‘희극적·풍자적’ 장르라고 규정한 시에 ‘문자적·알레고리적·영적’ 산문 주석을 덧붙여야 했다.
《운명의 미궁》 또는 《삼백 연》
카스티야 왕 후안 2세에게 바친 《운명의 미궁》, 또는 《삼백 연》(Las trezientas)은 메나의 걸작이다. 처음에는 대예술시 297연, 모두 2,970개의 12음절 시행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사이에 11음절 시행도 일부 들어 있었다.
왕이 1년의 날수와 같은 수의 연을 원했기 때문에 메나가 왕을 만족시키려고 24연을 더 썼으나 죽음으로 약속한 수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작품을 편집한 히스패닉학자 레몽 풀셰델보스크는 일부 판본에 나오는 추가 24연을 다른 작가가 쓴 후대의 독립적인 미완성시로 보았다. 이 시는 군주의 변덕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후안 데 메나 같은 궁정인이 국왕의 결정을 비판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운명의 미궁》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가운데 〈천국편〉에서 영감을 얻은 알레고리시다.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상징체계보다 힘차게 묘사된 역사적 사건들에 있다. 거기에는 성찰적인 진정한 애국심과, 카스티야의 섭리적 운명을 떠맡은 후안 2세가 구현하는 국가 통일의 전망이 나타난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후안 데 메나는 전쟁의 여신 벨로나의 전차에 실려 간다. 용들이 끄는 전차는 그를 운명의 궁전으로 데려간다. 매우 크고 어두운 구름 속에서 마중 나온 섭리가 세계의 기계를 보여 준다. 그것은 “대단히 큰 세 바퀴”로 이루어져 있다.
두 바퀴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는 과거이고, 장막에 가려진 다른 하나는 미래다. 나머지 하나인 현재는 끊임없이 어지럽게 회전한다. 각 바퀴에는 일곱 개의 원이 있다.
- 디아나의 원: 정결한 이들의 거처
- 메르쿠리우스의 원: 악인들의 자리
- 베누스의 원: 육욕의 죄가 벌을 받는 곳
- 포이보스의 원: 철학자·연설가·역사가·시인의 은거처
- 마르스의 원: 조국을 위해 죽은 영웅들의 판테온
- 유피테르의 원: 왕과 제후들의 자리
- 사투르누스의 원: 국왕의 총신 알바로 데 루나만이 홀로 차지한 옥좌
대예술시 시행에 네 번 강세가 놓이는 리듬은 유연성이 부족하고 단조롭지만 장중하다. 때때로 더 유연한 11음절 시행이 이를 완화한다. 정교하게 다듬은 문체는 도치법·교양어·이탈리아어법·수사·상징·역사 및 신화적 암시로 장식되어 있다. 그럼에도 진정한 영감이 존재하며 참된 시인의 분명한 재능이 빛난다. 단테 외에도 루카누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칠죄종을 논박하는 노래》
《칠죄종을 논박하는 노래》(Coplas contra los siete pecados capitales), 또는 《죽음과의 논변》(Razonamiento con la muerte)은 그가 마지막으로 쓴 작품이며 미완성으로 남았다. 같은 주제의 중세 논쟁문학, 더 멀리는 히스파노·로마 시인 프루덴티우스의 《영혼의 투쟁》(Psychomachia)에서 영감을 얻었다.
고메스 만리케가 작품을 완성했고, 페로 기옌 데 세고비아와 헤로니모 데 올리바레스 수사는 탐식·질투·나태와의 논쟁을 더했다.
산문 작품《대관식 주석》
메나는 산티야나 후작을 기린 자기 시를 풀이한 산문 《대관식 주석》(Comentario a la Coronación, 1438)을 썼다. 이 책은 15·16세기에 가장 유명하고 널리 유통된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로망스어로 옮긴 호메로스》
1442년 메나는 《라틴 일리아스》(Ilias latina), 곧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라틴어 6보격으로 요약한 작품을 카스티야어 산문으로 번역했다. 널리 보급되어 성공을 거둔 이 번역은 결국 《로망스어로 옮긴 호메로스》(Homero romanceado), 또는 《일리아스 간략 요약》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아우소니우스의 《페리오카이》(Periochae)와 이른바 ‘제2의 테바이 핀다로스’도 자료로 사용했다. 특히 정교한 예술 산문으로 쓴 서문이 돋보이며, 주제를 자유롭고 편견 없이 다루었다.
메나는 후안 2세에게 《라틴 일리아스》 번역을 바쳤고, 작품의 소재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쟁 일화를 담고 있다는 점도 서문에서 크게 강조된다. 토마스 곤살레스 롤란과 펠리사 델 바리오가 이 번역을 편집했다.
《공작 작위에 관한 논고》
《공작 작위에 관한 논고》(Tratado sobre el título del duque)는 1445년에 작성되었다. 찬양적 성격은 중세 궁정인이 특히 좋아하던 주제와 연결된다. 기사도 이론을 다룬 이 논고는 계보·문장학·위계·의전과 관련된 명칭과 내용을 제시한다. 기사도에 관한 여러 정보와 당시의 도전 및 결투 관습도 담고 있다.
《몇몇 옛 가문의 기록》
《몇몇 옛 가문의 기록》(Memorias de algunos linajes antiguos)은 스페인 국립도서관 사본 3,390 단 한 점으로 전한다. 주제는 《공작 작위에 관한 논고》와 같은 성격이다. 여러 장이 훼손되었고, 후대에 만든 질 낮은 필사본이다.
《사랑에 관한 논고》
《사랑에 관한 논고》(Tratado de amor)는 처음에 후안 데 메나의 작품으로 보았으나 저자 여부가 완전히 확정되지는 않았다. 그의 사랑에 관한 이론적 관심을 보여 주는 작품일 수 있다.
《사랑의 치료법》(De los remedios de amor)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치료법》(Remedia amoris)을 따르며, 사랑을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보는 문학적 관습을 사용한다. 사랑을 이겨 내고 피하는 여러 조언을 제시한다.
문체
메나는 적절한 리듬을 찾아 헤맸지만 유연성이 부족한 12음절 시행을 선택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두 개의 무강세 음절마다 놓이는 네 번의 단조로운 강세 때문에 지나치게 장중하고 변화를 허용하지 못한다.
가르실라소·보스칸·디에고 우르타도 데 멘도사는 뒤에 이탈리아식 11음절 시행에서 유연한 리듬을 발견했다. 그 시행에는 대략 세 번의 강세가 있으며, 필수적인 것은 제6음절의 리듬축과 제10음절의 강세뿐이다. 제6음절의 강세는 제4·제8음절의 두 강세로 대신할 수도 있다.
메나는 일상 언어와 다른 고상한 시어를 창조하려고 의식적으로 시도한 최초의 카스티야 시인이었다. 그는 이러한 노력이 평범하고 대중적인 표현을 옹호하는 이들의 비난을 부를 것임을 알고 있었다. 《운명의 미궁》 제33연에 넣은 ‘항변’에서 이렇게 밝혔다.
어느 연이나 구절, 또는 긴 말이
내가 말한 바에 맞게 울리지 않더라도,
말보다는 뜻을 살펴보라.
내 말이 내 논리에 비추어 지나치다면,
오직 식견 있는 이들의 교정을 받으리라.
그러나 자기 견해의 무지함에 따라
언제나 헐뜯는 조야한 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메나는 무엇보다 카스티야어로 장중한 시적 방언, 곧 대예술시의 시학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기에 근본적인 리듬 문제를 알아보지 못했다.
코르도바의 위대한 시인이 지닌 언어와 문체의 형식적 측면을 가장 깊이 연구한 마리아 로사 리다 데 말키엘의 연구가 보여 주듯, 카스티야어는 메나에게 깊은 혁신을 빚지고 있다.
그는 도치법과 라틴어 구조의 모사를 통해 문장구조에 역동성을 부여했다. 현재분사, 독립구문, 부정사구문을 활용했고 새로운 요소와 신조어를 도입했다. 라틴어 단어를 변화 없이 직접 가져온 교양어로 기존 민중어를 대체했다. 예를 들면 ‘얼굴’ 대신 vulto, ‘추방’ 대신 exilio, ‘더러운’ 대신 poluto를 썼다. diáfano(투명한), sulfúreo(유황의)처럼 뒤에서 셋째 음절에 강세가 놓이는 낱말도 즐겨 사용하여 독특한 울림을 만들었다.
한편 고대 카스티야어에서도 영감을 얻어 시어를 새롭게 했고, 운율을 맞추기 위해 옛말을 자주 썼다. 음성적 고어에는 어말탈락형 nol’, *grand’*와 음첨가형 atan, amátanse가 있었다. 어휘적 고어로는 aína, desque, vegadas를, 동사 활용의 형태적 고어로는 respuso, vido, veredes 등을 사용했다.
일부 시행 끝에는 “아름다운 페니키아”, “보기 좋은 반달리아” 같은 서사적 수식어까지 썼다. 작품의 수사적 밀도도 뚜렷하다. 특히 우언적 확대인 암플리피카티오(amplificatio)의 여러 기법—완곡어법, 수미반복, 두운반복, 교차배열, 이중어, 굴절반복—을 활용했다.
두 요소(“그처럼 섬세하고 순수한 정신”), 세 요소(“사랑이 거짓되고, 허영되며, 게으를 때”), 심지어 네 요소(“그는 용맹하나 운은 좋지 않은, / 지극히 덕 높고 명망 높은 백작”)를 연속해서 엮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한 표현기법의 축적은 메나의 시에 바로크적이고 화려하게 겹쳐진 형식, 강한 음향성과 표현력을 부여한다. 아직 거칠었던 언어에 도입한 그의 혁신은 바로크 시대의 성숙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후대 카스티야 문학이 전개한 시적 흐름을 가능하게 한 필수적인 선구자였음은 분명하다.
그는 힘차고 장중한 대예술시 시행과 그에 맞는 연형을 사용한 가장 뛰어난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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