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둔터니’ 마을과의 인연
2003 년.
마흔아홉의 한창 바쁜 나이의 화가 장 기로가 호구지책으로 나가던 대학의 강의까지를 때려치우고 서울에서 '둔터니'라는 작고 먼 호숫가 마을로 이사를 오면서, ‘夢想別曲’은 시작된다.
그런데 기로가 둔터니 마을로 이사를 온 건, 물론 몇 년 전의 '이혼의 상처'가 커서 또 그 충격으로 떠났던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고 온 뒤, 뭔가 돌파구를 찾겠답시고 그 길을 걸으면서 느꼈던 '여행 에세이' 식의 '책작업'을 하면서 겪은 세상살이가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정한 과감한 결단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이 겉으로만 보고 흔히 생각하 듯, 그리 갑작스럽거나 충동적인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기로와 둔터니 마을과의 관계를 조금 살펴 보자면, (이제 기로에게는 정확한 기억도 잘 되지 않는 지난 일이지만)상당히 많은 햇수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아마 그의 4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동창이자 기로와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유 범상은 전주에 살고 있었는데,
자기 처가와 연결된 전북 '임실군' 호숫가 시골에 낡은 초가 한 채를 사놓았다며, 기회 있을 때마다 기로에게 한 번 보러오라고 성화를 부리던 일이 있었다.
그게 바로, 기로에겐 '몽상별곡'의 기원일 수도 있다.
그해 추석이었던가? 그 때도 가을이었으니, 아마 그럴 것이었다.
추석을 맞아 고향(군산)에 내려갔던 기로는, 명절을 보낸 다음 하루는 처 '송 선희'와 함께(그당시는 이혼 전이었다.) 전주에 들러, 결국 범상을 따라 호숫가에 있다던 그 집 구경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가서 보니, 범상이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경치는 좋은 반면, 집은 다 쓰러져가는 초가여서,
'무슨 이런 집을 사놓고서 오라 가라 난리야?' 하고, 부부가 범상에게 겉으로 드러내놓고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가 기로와 이 마을 ‘둔터니’와의 첫 대면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 때, 나중에 기로가 살게 되는 ‘夢想?’은 친구 범상이 사 놓았던 초가집에 닿기 바로 전에 있던 제법 번듯한 스레트 지붕에 창고까지 딸린 집이었고, 또 하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호반도로에서 이 둔터니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첫 집이 식당이었는데, 그 '산장 가든'의 사장이자 둔터니 마을에서 태어나 거의 그 마을을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던, ‘산장 아저씨’ 박 만석과의 만남을 지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기로가 ‘夢想?’에 가서 살면서 기록했던 1 년간의 이야기인 ‘夢想別曲’의 실제적인 주인공인 박 만석의 거론 없이 이 얘기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의 범상에 따르면, 그 마을에 워낙 부지런한 그러면서도 평생 일만 하(아)는 한 50대 중반의 사람이 있는데, 일만 잘 하는 게 아니라 비록 학교의 문턱도 밟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는 머리가 비상해서... 식당을 운영하는데도 어찌나 돈을 긁어 모아대는지, 당시에도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그렇지만 지독한 구두쇠 겸 알부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기로의 입장에서야 범상이 강조하던 그 사람 '박 만석'이 궁금할 이유조차도 없었지만,
범상은, 거기에 집을 산 뒤 이래저래 그 사람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 또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얘기가 통할 수 있는 주민이라고 강조하면서, 시큰둥하던 기로에게 그 ‘산장 아저씨’를 꼭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얘기를 해댔던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은 기로를 억지로 끌고가다시피 산장집으로 데려갔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박 만석이 집에 없어서... 그 당사자를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던 게 첫 번째 '둔터니 마을'의 방문이었다.
그러다 또 한 번 범상의 성화가 기로에게 몰아닥친 건, 그 쓰러져가던 초가를 헐고 그 자리에 통나무집을 짓고 있다는 연락과 함께였다.
일을 벌여놓았던 범상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툭하면 기로에게 전화를 걸어,
"통나무 집을 다 짓기 전에 꼭 와 봐야 된다."고 난리를 쳐서... 또 한 번 기로가 그 마을에 내려갔던 게 처음 갔던 1년 여 쯤 뒤의 늦가을이었다.
당시 잔뜩 꿈에 부풀어 있던 범상은 본인이 직접 짓던 통나무집을 보여주면서,
"야, 기로, 언제든지 여기 통나무집에 와서 쉬고, 또 니가 원하기만 한다면 와서 살아도 돼." 했었다. 마치 기로를 위해 집을 짓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기로의 입장에서야, 물론 언젠간 한 번쯤은 쉬러 올 수는 있겠다 싶었지만... 서울 생활을 한 순간에 때려치우고 내려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그 때도 범상은 기로를 산장집으로 데려갔었는데, 바로 그 때 기로는 ‘산장 아저씨’ 박 만석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차피 범상이 늘 ‘산장 아저씨’라고 불렀기 때문에, 기로도 저절로 그 호칭을 따라 부르게 된 게... 여짓껏 박 만석이 ‘산장 아저씨’로 남은 호칭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당시 기로의 입장에서는, 산장 가든의 사장으로써의 박 만석을 찾아갔던 게 아닌, 그저 친구 따라 둔터니 마을의 터주 대감인 한 현지 마을 주민을 만났을 뿐이다.
그런데 기로가 느낀 박 만석의 첫 인상은, 나이에 비해(당시엔 50대 후반) 의외로 수줍음이 많다는 것이었다. 아니, 사람을 쉬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다소 겁을 먹고 상대방을 대하는 듯한... 그러니까 내성적이라기보다는 사람을 피한다는 인상이 훨씬 강한,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기로를 놀라게 했던 일은,
때가 때인지라 그랬겠지만, 박 만석이 그들에게 맛을 보라며 감 한 봉지씩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 양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맛을 보라며 주는 감이라면 대여섯 개로도 충분했을 텐데, 그 천하의 자린고비(?)라던 박 만석은 그들에게 선뜻 한 봉지씩(잘은 몰라도 30 여개씩)의 먹감을 선뜻 주었던 것으로,
'구두쇠 치고는 손이 보통 큰 게 아니네?' 하고 놀란 것도 있지만,
서울까지 가져갔던 그 감이 나중에 맛이 들자(당시엔 바로 딴 것이라 약간 설거나 떫은맛이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여보, 내년엔 그 동네 감 좀... 미리 주문해서라도 좀 사오면 안 될까요?" 하고 송 선희가 좋아했을 정도였다.
물론, 둔터니 마을의 감이 꿀맛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기로였지만, 다시 한 번 감의 맛에 감탄을 했던 건 물론, 바로 이 ‘산장 아저씨’라는 사람에 대해 호기심도 갖게 되었던 계기였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 범상이라면 또 모를까... 기로 자신이야 뭐, 박 만석의 입장에서는 초면일 수도 있는 사람인데, 본인이 힘들여 땄을 감 한 봉지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뜻 내주었다는, 그 숨겨져 있던 산장아저씨의 배포에 주목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과는 정서가 잘 맞을 것 같다는 추측을 넘어, 뭔가 친근미까지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물론 그뿐이었다. 박 만석과의 얘기는 더 이상 발전할 그 어떤 이유도 없었지만, 그럴 가능성마저 없었으니까.
그 것도 단 몇 분의 조우였을 뿐이니까.
물론 그런 뒤에도 기로는 두세 차례 더 호숫가의 통나무집에 들르게 되는데,
어차피 고향이 군산인 기로는 명절이거나 돌아가신 부모님 기일을 맞아 군산에 내려올 때, 한 번씩 범상을 찾아 전주에 갔고... 그럴 때마다 범상은 마치 무슨 필수 코스인 양 둔터니로 기로를 데려가, 자신의 통나무집을 보여주면서,
"난, 나중에 은퇴를 하면 이곳에 와서 살 거야!" 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주에서 자신의 사업을 펼치고 있던 범상은 둔터니 마을에 집만 소유하고 있을 뿐이지, 자신 역시 커나가던 아이들 교육문제 등으로, 통나무 집에서 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이 호숫가 집에 들어와 집을 돌보면서 지낼 마땅한 사람이 필요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40대 중반이었던 그의 주변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고, 도시로 향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도시 생활을 접고 산골로 들어와 살겠다는 사람은 나타나질 않자, 그대로 집을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유 범상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만한 사람은 친구인 기로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어릴 적부터 보아온 일이었지만 비록 기로가 시골 태생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의 성향이나 정서가 늘 시골생활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도 참고가 되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야, 기로. 여기에 내려와 살아라!" 하고 충동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기로가 둔터니에 한번씩 들를 때마다, 범상은 역시 기로를 대리고 마치 필수 코스라도 되는 것처럼 산장집에 문안인사를 드리러 들락거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기로는 그 감 사건의 기억으로 친근미를 느끼며 박 만석에게 다가가려고도 했지만,
박 만석은 그저,
“예......” 하고 인사만을 받고는, 도망치듯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피한다던지 숨는 것 같은(?) 냉랭함과 소심함만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니,
이제는 기로도,
'무슨 사람이 저다지 폐쇄적이라지?' 할 수밖에 없었고, 또, '원래, 사람을 알고 지내는 걸 썩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가 보구나......' 하면서, 점점 박 만석에 대한 호기심도 시들해 가고 있었다.
뭐, 대단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