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은 과연 대안인가" -사상적 측면 / 김형효 교수
‘소유적 인간’ 아닌 ‘사유적 존재’ 양성의 원동력
근대사 400여 년간 서양적 지성과 의지가 세계를 움직였다.
지금 서양은 마음의 사유로 문명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자각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자아가 생각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으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의식이고,
자아가 점차 희미해지면서 평온한 상태에서
일체와 벗이 된 상태에서 솟아나는 생각이 곧 마음이겠다.
양자택일 강요하는 서양적 지성과 의지에 염증
“일체가 유기체적 一心” 화엄적 禪의 철학 주목
서양은 지금 의식의 철학에 대한 깊은 반성에 젖어 있다.
그간에 의식의 철학이 낳은 진리는 대충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편리(便利)’고, 또 다른 하나는 ‘정의(正義)’다.
전자는 경제기술의 진리를 상징하고, 후자는 사회도덕의 진리를 말한다.
경제기술의 진리는 도구주의적 지성 문화와 상관있고,
사회도덕의 진리는 이기주의를 극복하려는
공동체적 선(善)의지 문화에서 발단됐다.
이분법적 사고 만연
그런데 그 편리와 정의가
각각 애초의 생각대로 얌전히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편리는 본의 아니게 인간정신을 타락시키는 안일의 독을 낳고,
정의도 역시 뜻하지 않게 구제불능의 아집을 낳게 하는
독선의 독을 동반하는 문명의 현상을 경험하면서,
서양사상은 이 세상이 인간의 뜻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됐다.
즉 근대서양은 지성과 선의지로 세상을 좋게만 진보시킬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능위주의(能爲主義)의 철학에 몰입했는데,
그 능위주의가 한갓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최근에 깨닫게 된 것이다.
철학적으로 능위주의는 몇 가지의 특성을 안고 있다.
첫째로 행동주의의 철학을 기본으로 한다.
지성은 본디 행동을 위해 생긴 인간의 능력이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지성은 동물의 생존능력인 본능을 대신한
인간의 생존술과 직결된다.
본능이 행동적이듯이, 지성도 행동을 겨냥한다.
미국의 자본주의적 경제기술문명도 행동적이고,
구 소련의 사회주의적 집단 선의지의 강령도 행동적이었다.
둘째로 행동주의는 소유주의와 직결돼 있다.
자본주의는 경제 기술적으로 세상을 편리하게 소유하겠다는 것을 말하고,
사회주의는 정신 도덕적으로 세상을 정의의 우산으로 덮어씌우겠다는 소유의식의 발로다.
이런 소유주의 철학의 이면에는
다 강력한 자아의 주의주장이 깃들어 있다.
셋째로 자본주의의 이기적 자아든 사회주의의 도덕적 자아든,
다 불퇴전의 자의식으로 세상을 요리할 태세를 갖고 있다.
넷째로 자아중심적 능위주의는 논리적으로 택일주의의 특성을 띠고 있다.
택일주의는 양자택일의 사고방식을 말한다.
선.악, 진.위, 미.추, 정(正).사(邪) 등 세상사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켜 놓고, 늘 전자의 입장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논리를 편다.
물론 전자 계열이 옳다. 그러나 옳은 계열과 옳지 않는 계열이
이원론적으로 별개의 것으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다.
즉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은 서로 별개의 다른 실체들이 아니다.
옳지 않은 것은 옳은 것의 이면으로서
옳은 것의 배설물과 같다는 것을 서양은 오래 동안 생각하지 않고,
선이 악을 전멸시켜야 드디어 선의 왕국,
정의의 세상이 도래한다고 믿어 왔다.
이런 투쟁주의는 모두 택일주의적 가치관의 산물이다.
택일적 투쟁주의의 철학이 나오게 된 근본원인은
능위주의가 절대주의의 진리관을 마지막으로 모셔 왔기 때문이다.
절대주의 진리관은 진리가 오직 절대적인 순수성이라고 여기므로
잡종의 이중적 성격을 용납하지 않는다.
절대 진리가 순수 그 자체이므로
나머지 인간도 오직 단일한 절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인간은 순수절대를 지키기 위한 투쟁주의를 성스럽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실의 존재방식은
절대적 순수의 외곬로 구성돼 있지 않고, 잡종적 이중성으로 짜여져 있다.
독과 약이 한 얼굴의 이중적 모습이듯이, 선과 악도 그러하다.
진리와 비진리도 개별적 독립적 단위를 지니지 않고
이중적인 한 사실의 두 모습이다.
이 점은 불교가 말하는 중생과 부처의 이중성과 같다.
부처는 중생의 다른 모습이고,
중생도 부처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서양은 이런 세상사의 이중성을 이제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양은 지성과 의지의 철학적 한계 때문에
다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인간이 지성과 의지의 힘을 빌려
세상의 진리를 제조하려는 생각을 망상이라 보고,
세상에 이미, 그리고 늘 있어 온 그 여여한 진리를 발견해
거기에 무위적으로 동화하려는 새로운 정신문화의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다.
즉 서양이 기존의 기독교를 떠나서 화엄적이고
선적(禪的)인 사유세계에 새로이 주목하게 된 것이다.
부처와 중생이 한 인간성의 두 모습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중대한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모든 것이 단가적으로 구성돼 있는 것이 아니고,
양가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세상사의 필연법을 말한다.
인간성 회복운동 나서야
불교는 이 필연법을 스와스티카(swastika)와 같은 만자(卍字)로 나타낸다.
만약에 부처와 중생이 두 독립적 실체라면,
인간은 중생을 버리고 스스로를 부처로 만드는 행동을 해야겠지만,
부처는 그렇게 행동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중생과 함께 동거해 있는 마음이므로
단지 중생의 마음을 부처의 마음으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이런 전회는 생산이나 창조와 같은 타동사적 차원이 아니고,
관조의 차원에서 마음의 자동사적
또는 재귀동사적 활용의 지혜일뿐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행동보다 지혜의 관조를 더 가까이 한다.
화엄적이고 선적인 관조는 의지적 행동의 차원이 아니다.
따라서 관조의 차원은 소유론적 사유를
존재론의 차원으로 생각을 전화시킨다.
중생의 생각은 모두 소유를 겨냥하고 있다.
그 소유가 꼭 물질적 소유만을 뜻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소유인 도덕적 이상주의도
역시 일종의 정신적 진리로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욕심을 반영한다.
모든 도덕주의(주자학과 마르크시즘)가 궁극적으로
정치적 권력을 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존재는 중생의 사고방식이 부처의 사고방식으로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자마자 생기는 탈소유적 사유방식이다.
존재론적인 사유방식은 세상을 자아중심의 이해관계로 나누지 않고,
일체를 모두 하나의 유기체적인 일심(一心)으로 읽는 방식과 상통한다.
지성과 의지로 세상을 읽은 재래의 서양철학에서 보면,
일체는 전부 다양한 개별적 실체든지,
아니면 일체를 오로지 전체적 하나의 추상적 집합으로만 보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전자의 입장은 개체적 자유주의고,
후자의 입장은 집단적 전체주의를 대변한다.
물론 우리는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보다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개체주의를 더 선호하지만,
그 개체주의도 전체주의 못지않게
소유주의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인을 소유의 주체로 보느냐,
아니면 추상적 전체만이 소유의 주체로 인정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 소유주의에 해당한다.
불교의 화엄적. 선적 세계는 그런 양자택일을 부정한다.
일체가 하나이면서 다양한 개체이므로 ‘일즉다(一卽多)’가 성립한다.
이 ‘일즉다’의 사유가 곧 존재론적 사유의 본질에 해당한다.
중생적 사고방식은 전체든지 개체든지 둘을 택일적으로 보는 방식이다.
이런 택일적 사고방식은 중심과 비(非)중심을 쪼개서 보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중심주의는 소유중심의 다른 이름이다.
개체주의는 일체를 다중심으로 만들어 상호 회통하는 것을
방해하고, 전체주의는 다양성을 억압해 획일화시킴으로써
자유와 차이의 평등성을 희생시킨다.
그러나 존재론은 중심이란 생각이 없는 마음이므로
자의식이 없기에 자유롭고, 세상의 모든 차이를 긍정하므로
평등한 마음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무애한 자유와 차별이 없는 차이의 대긍정이
곧 화엄적 선의 사유가 아닌가.
현대서양의 해체주의 사유는 이 화엄적 선의 길을 가려한다.
화엄적 선의 길이 자의식의 지성과 의지에서
무아(無我)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세상은 안다.
자아에서 무아로 가려는 정신문화는
택일주의에서 상관주의로 세상사를 보려한다.
화엄적 선의 지혜는 세상사가 서로 상관적 차이로 얽혀있음을 말한다.
땅은 하늘과 상관적 차이로 얽혀 있고,
식물과 동물도 역시 상관적 차이의 그물망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을,
불교는 말한다. 이것이 연기법의 다른 이름이다.
연기법은 세상사의 필연적 법칙을 말한다.
이것은 택일의 지성적 논리와 다르다.
문자와 사유 동시에
마지막으로 화엄적 선의 진리는 절대자의 존재가
세상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고 언명한다.
화엄적 선의 세계에서 그런 목표는 없다고 가르친다.
목표의식은 인간을 엄숙하게 만들고
괜히 목표달성을 위해 근육 긴장을 북돋운다.
그런 최종목표는 없고, 세상의 본체는 공(空)임을 말한다.
그 공은 절대자가 아니다.
공이 어찌 절대적인 존재자(存在者)일 수 있는가.
태허(太虛)는 절대자가 아니므로,
화엄적 선은 절대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모든 철학과 종교를 우습게 여긴다.
21세기는 불성을 찾기 위한 시대다.
그 불성이란 말이 너무 불교적이라 싫으면,
인간의 본성이라 불러도 괜찮다.
하이데거라는 20세기의 독일철학자가 일찍이 말했다.
“그 동안 서양은 너무 많이 행동했고, 너무 적게 사유했다.”
이제 행동하는 소유적 인간보다
고요히 사유하면서 존재의 본성을 찾으려는 인간을
세상은 더 고귀하게 높이리라.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