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묘와 국사당
동묘(東廟, 關王廟)는 중국의 장수인 관우(關羽, 160~219)의 영정을 놓은 사당으로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사당이다. 서울에는 관우 관련 사당이 4개 있었는데 국가에서 관리했던 동(관)묘가 대표적인 것이다. 또 제갈공명 사당인 남산의 와룡묘(제갈공명 사당)에도 관우상이 있다.
중국의 관우 장군을 모시는 것은 임진왜란 후 선조 때 명나라 장수들이 관우의 도움으로 왜구를 물리쳤다는 믿음에서 지어진 것이다. 선조 때 임진왜란 후 남대문 밖에 남묘를 맨 먼저 세웠고, 그 후 동묘는 명나라 장수의 요청으로 추가로 세웠다(1602). 고종 때에 북관묘와 서묘(숭의전)을 세워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에 중국의 인물인 관우사당을 지었다. 이러한 연고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관우 숭배(?)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자주의 실종인가 사대의 집착인가?
외침에 의해 나라의 사직이 흔들릴 때 외국과의 협력으로 물리친 역사가 있다. 이를 기리고 보은이란 차원에서 동상을 세우고 사당을 세웠다. 신라의 나당연합 전쟁 때는 당나라 소정방 (蘇定方), 임진왜란 때는 이여송(李如松), 한국 동란 때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대표적인 지원군 장수들이다. 이여송에 대한 사은은 관묘로 숭앙 되고, 한국전쟁 시의 UN군 맥아더에 대해서는 인천의 자유공원에 동상을 세워 놓았다.
이러한 사례를 생각할 때 우리가 신세 진 다른 나라의 장수들은 어떻게든지 기리고 있는데 정작 우리가 기려야 할 우리의 유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우리의 뿌리는 단군인데 단군을 모시는 데는 단군성전이 있다. 단군성전(檀君聖殿)은 단군전, 단군사묘(檀君祠廟), 단군사우(檀君祠宇) 등으로 불리며, 우리의 국조(國祖) 단군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시고 봉향(奉享)하는 사당으로 여러 곳에 있다. 대표적인 것은 서울특별시 사직공원 경내 서북쪽에 마련된 단군성전이다(1973.5 건립).
그리고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국사당도 여러 곳에 있는데 대표적인 곳은 인왕산 국사당이다. 이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한양을 지키는 당집으로 세워 놓고는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다. 임금님이 나라 제사를 지내던 당집이라는 뜻에서 ‘국사당’이라 불리었다. 서울의 인왕산 국사당은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시는 당으로 태종 때 삼신(天神, 山神, 水神), 태조 이성계, 무학대사(無學大師)와 제호신장을 모시는 국사당이다. 서울의 국사당은 일제의 침략을 받으면서 우리의 근본신앙을 무속으로 격하시키면서 그 위상이 초라해졌다. 국사당의 원래 자리는 남산 꼭대기, 지금 팔각정이 있는 곳이 제 자리이었으므로 제대로 모시던 자리이었다. 조선 무격신앙의 중심지였던 남산 국사당은 1925년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그 이유는 조선총독부가 남산에 그들의 신인 아마테라스오오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그 꼭대기에서 내려 보는 국사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일제는 권고나 협박으로 국사당은 이건(移建) 되었다. 일본 신사는 광복 이후 철거하고 그 자리를 식물원으로 만들었다.
국사당이 남산에서 옮겨 온 지 100년이 가까워진다. 지금은 국사당이 제 자리를 빼앗기고 초췌한 당집 같은 모습에서 옛날의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토착 귀신과 외래 귀신의 싸움이 이어지는 것 같다. 왕조가 바뀌고 통치자들이 바뀌어도 이 나라, 이 강토를 지켜온 우리의 장수들을 모시는 곳이 국사당이고, 외래 장수를 모시는 곳이 동묘이고 동상이다. 왕조와 역사가 바뀌었어도 그들에게 보은과 예우를 후손에게 물리는 것이 과연 이을 만한 역사의 교훈일까? 콜럼버스 동상, 노예상의 동상이 파괴되는 역사의 흐름을 우리의 역사에 투사해 본다.
(심의섭, 곰곰이 생각하는 隨想錄 1 개갈 안 나네, 한국문학방송, 2020.07.01.: 20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