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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5)
시험 받는 이유
약1:12-15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자들 가운데
더러 시험과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말씀대로 살려다가 당하는
시험이라면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3-4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믿음 가운데 받는 시험과 시련은 오히려 우리를 연단시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이 이유 때문에‘ 저와 여러분도 믿음 가운데 받는
시험과 시련을 오히려 기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험(유혹) 받을 때에>
그런데 오늘 말씀 13절에 나오는 시험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믿음의 시련’이 아니라 유혹이라는 의미에서의 시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13절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야고보는 우리가 결코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시험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도,
하지도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시험하셨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예컨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고(창22:1),
모세와 탈출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에서
쓴 물로 그들을 시험하신 적이 있습니다(출15:22).
또한 예수님께서도 친히 제자 빌립을
시험하신 적이 있습니다(오병이어의 기적을 앞두고).
요6:5-6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도, 하지도 않으시는 분이라는
본 절의 말씀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시험’이라는 말을 바로 이해할 때 의문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은 다같이 ‘
시험’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시험’과
‘사단의 시험’은 엄밀히 구분됩니다.
분명 하나님도 성도를 시험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은 사단으로부터 오는
시험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고 연단시켜
성숙한 신앙인으로 만들기 위한 테스트(Test)로서의 시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련’(trial)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란 부패케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의 목적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답해줍니다.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시험은 항상 충성과 불충성, 믿음과 불신,
또한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 주는 좋은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복을 주기 위한 수단입니다.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물론 하나님의 시험은 성도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성도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교사가 학생들에게 시험 문제를 출제할 때에
수업에 착실히 임한 학생이라면 능히 풀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하듯이 하나님도 성도가 믿음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도가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성도가 그로 인하여
신앙의 길에서 실족하는 일이 없게 하십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와 달리 사단의 시험은 성도들을 멸망으로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양상도 대개는 ‘유혹’(temptation)으로
나타납니다. 공생애를 개시하기 직전의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시험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마디로 ‘시련’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연단하여
향상케 하시기 위해 보내는 것이나 ‘유혹’은 사단이
우리들을 죄에 빠뜨리려고 보내는 것으로 ‘욕심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시험’의 의미를
‘유혹’(temptation)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13절 상반).
<책임전가의 습성>
사람들은 자기의 죄와 타락에 대해 책임을 전가시키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바클레이는 “역사의 시초로부터
인간에게는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원시적인 본능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예>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그의 죄를
문책하였을 때에 아담의 대답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와의 행위를
책망하였을 때에 그녀의 대답은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나이다”라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였습니다.
아담과 이브로부터 모든 인간에 이르기까지 시험에
굴복한 핑계는 한결같이, “그것은 나의 잘못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 또는 운명이나 환경에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과 환경을 주신 하나님에게 책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타락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마치 그 유혹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말하여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혹’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시험받는 원인>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그렇습니다. 시험의 원인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어리석음 때문이지 외부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시험의 출처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하면 외부에 나타난 모든 죄악의 근원이
자기 안의 욕심, 곧 탐욕과 정욕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끌려 미혹됨’에 해당하는 원어는 물고기나
어떤 짐승이 미끼에 걸려 끌려 나오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개구리 낚시를 해 본적이 있습니까?
낚시 모양은 물고기를 잡는 낚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미끼로 지렁이 대신 콩나무 잎사귀를 이용합니다.
콩나무 잎사귀를 접어 낚시 바늘에 잘 끼어 바늘이
보이지 않도록 위장을 합니다.
그리고는 개구리 눈 앞에 갖다 댑니다.
처음에는 개구리가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계를 합니다.
그러니 유혹을 해야 합니다. 낚시를 개구리 눈 앞에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유혹을 합니다. 그러면 개구리가
무엇인가 자기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거든요.
그러니 무슨 곤충인 줄 알고 달려들어 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지천에 널린 콩나무 잎사귀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유혹에 넘어가 그것을 무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한 번 물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낚시 바늘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도 오로지
자기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주는 시험도 이렇게 오는 것입니다.
사탄이 주는 시험(유혹)은 우리 내면의 욕심을
한껏 자극시키면서 옵니다. 그 결과에 대한 거짓된 환상을 심어줍니다.
철저히 위장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선악과 열매를 가지고 유혹했습니다.
선악과 열매가 얼마나 탐스러웠습니까?
창3:6a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선악과 열매가 탐스럽지 않았다면 먹으라고
아무리 권해도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안심을 시킵니다
.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라고 그녀의 욕망을 한껏 자극했습니다.
먹어도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선악을 구별하는 경지에
, 하나님과 동등한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라는 사람이
“나는 무엇이든지 다 저항할 수 있습니다.
단 유혹을 빼놓고”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유혹을 물리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생애의 마지막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간절한 교훈 가운데 하나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욕심을 한껏 자극하는
유혹은 이기기 힘이 듭니다.
<미혹됨의 결과 – 죄, 사망>
욕심에 끌려 미혹됨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결국 욕심은 ‘죄’를 가져오고, 죄는 그냥 있지 않습니다.
또 다른 죄를 낳습니다. 자라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평생을 하나님 앞에 열정적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유혹이 다가왔습니다.
어느 날 다윗이 왕궁 옥상을 거닐 때
그의 눈에 목욕하는 여자가 가득히 들어왔습니다.
뭐 목욕하는 여자의 나신을 볼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그러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그 여자에게 성적 유혹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1장 2절 말씀은 이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그 여자가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와가 유혹을 느꼈을 때와 흡사합니다.
이것도 영적으로 충만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 그 여자가 누기인지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 헷사람 우리야의 아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다윗이 가장 어려울 때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입니까?
그런데 일단 유혹에 빠지자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으면 중단했어야 하지만
유혹에 빠진 다윗은 욕심이 이끄는 대로 갑니다.
데려다가 동침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끝입니까?
그 한 번의 외도로 그 여자가 잉태를 하였습니다.
죄가 커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그 죄를 쓸어 덮기 위해서 우리야를
전쟁에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아내와 동침하게 하려고
가진 애를 쓰지만 충직한 우리야는 동침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얼마나 간악한 범죄를 저지릅니까?
요압과 짜고 우리야를 가장 전쟁이 치열한 곳에 보내
억지로 전사하게 만든 것입니다.
죄가 더 큰 죄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끝입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마무리 되는 듯했습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그에게 보내어 크게 책망합니다.
비옥 다윗이 회개하였지만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칼이 그 집에서 떠나지 않게 된 것이었습니다.
측근들과 아들들의 끊임없는 반란은 그의 죄의 댓가였습니다.
이처럼 욕심은 죄를 가져오고, 죄는 자라나 결국 파멸,
곧 사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잠언 7장에 보면 매춘부의 꾐에 빠져 사망의 장소로
끌려가는 한 어리석은 남자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꾀임이 얼마나 달콤한지 모릅니다.
모든 것은 다 자기가 준비해 놓았다고 유혹합니다.
그냥 몸만 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남편이 있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보름 후에나 올 것이라며 안심을 시킵니다.
마치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유혹을 합니다.
결국 이 어리석은 남자는 그녀의 꾐에 빠져 넘어가고 맙니다.
잠7:21-23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22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23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
그 결과를 너무도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치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쇠사슬에 매이려고 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새가 그물을 향해 돌진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결국은 화살이 그 간을 뚫기에 이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욕심의 결과입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다.
가치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자랑거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을 갖되,
육체의 소욕을 채우는 탐욕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전에 가졌던 가치가 변화합니다.
이전에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렇습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수님밖에 자랑할 것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건강한 욕구가 생깁니다
.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길 원합니다.
성령 충만해지기를 사모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